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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진회(一進會)야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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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진회(一進會)야

하나같이 저 가증스런 일진회는

한결같이 돌아와 따르지 아니하니

(중략)

일진회야, 일진회야,

네 아무리 어리석은들

어린 아이 못 보느냐,

제 부모를 사랑하여

다른 집 아이들이

제 부모를 욕보이면

큰소리로 슬피 울면서 서로 다투건만,

너의 심장은 어떠하길래

제 조국과 민족을 배반하고

친일활동에 앞장서니.

네가 비록 어른이나

아이만 못하도다.

(이하 생략)

요점 정리

작자 : 미상

형식 : 개화 가사

성격 : 우국 경세가

표현 : 돈호법, 비교법

주제 : 일진회의 친일 행각 비판

출전 : 대한 매일 신보

내용 연구

일피가증 : 하나같이 저 가증스러운, '가증'은 '얄밉다'라는 뜻

일향귀순 : 한결같이 돌아와 따르지

무지한들 : 어리석은들

유치소아 : 어린아이. 유치는 나이가 어림의 뜻

타인가 : 다른 사람의 집

호곡상투 : 큰소리로 슬피 울면서 서로 다툼

제 부모를 배척

고 : 조국과 민족을 배신하고, 배척의 원뜻은 물리쳐 내뜨림

타인 숭배 골몰

니 : 친일 활동에 앞장서니, 골몰의 원뜻은 한 가지 일에 온 정신을 쏟음.

이해와 감상

이 노래는 대한매일신보에 실렸던 개화기 가사다. 일종의 우국경시가로 당시 일진회를 무대로 하여 날뛰던 친일파 등 매국도당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문학적 정서의 표출에 의한 창작이 아니라 다분히 목적성을 간직하였다. 4·4조의 4음보 운율을 택하고 있지만, 시어는 생경하고, 서정적 자아의 목소리도 비판적이라는 점에서 쉽게 목적성을 의식할 수 있다. 또한 이 노래는 매국 도당에 대한 질타에도 있지만, 모든 사람들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데에도 있다.

심화 자료

一進會 (일진회)

조선 말기 친일단체. 민씨(閔氏) 일파에게 박해를 받아 10여 년 동안 일본에 망명해 있던 송병준(宋秉畯)이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통역으로 귀국하여 일본을 배경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했는데, 1904년(고종 41) 8월 18일 독립협회 회원이있던 윤시병(尹始炳)·유학주(兪鶴柱) 등과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했다가 20일 일진회(一進會)로 명칭을 고치고 회장에 윤시병을 추대했다. 일진회는 발족과 동시에 왕실의 존중, 인민의 생명과 재산의 보호, 시정(施政)의 개선, 군정(軍政)·재정(財政)의 정리 등 4대 강령을 내걸고 국정의 개혁을 요구했다. 또 그 회원은 모두 단발과 양복차림을 하는 등 문명의 개화를 급격히 서둘렀다.

일진회의 이와 같은 활동은 서울을 무대로 했을 뿐이고 지방조직이 없어 세력을 확대하지 못했다. 이 무렵 이용구(李容九) 등이 동학의 잔여 세력을 규합하여 조직한 진보회(進步會)라는 단체가 전국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음에 착안하여 송병준은 두 단체의 합동을 추진한 결과 이해 12월 진보회를 매수·흡수하여 일진회에 통합했다. 이때 이용구가 13도 지방총회장, 송병준이 평의원장에 취임했다. 한편 일본인을 고문으로 추대하고 일본군의 지원을 받으면서 친일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기관지 《국민신보》를 통해 친일적인 망발을 퍼뜨렸으며, 송병준은 이완용(李完用) 내각과 결탁하고 농상공부 대신으로 입각하여 헤이그특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의 양위를 강요했다. 1907년(순종 1) 고종이 양위하고 군대가 강제해산되자 전국에서 봉기한 의병들에게 일진회회원들이 토살되고 국민신보사도 습격당했으나, 1909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하얼빈〔哈爾濱〕에서 암살당한 뒤부터 더욱 매국행위에 앞장서 한일합방안을 순종에게 올렸다. 10년 국권피탈된 뒤 일본에 의해 해체되었다 (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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