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일상인의 문학을 위하여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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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인의 문학을 위하여 / 김대행

 

  문학어와 일상어의 번지수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오해가 있다. 문학의 언어는 우리가 사용하는 말과는 좀 다른 특별한 말이라는 생각이다. 언어에는 과학적 용법과 정서적 용법¤이 있다는 식의 나누기가 그것이다. 이런 오해가 생긴 것은 그 알량한 학자들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서울시에 종로구가 있고 서대문구가 있다 해서 그 두 구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그것은 행정의 편의를 위한 것이다. 언어의 용법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학문하는 사람들이 편의를 위해서 그렇게 나누어 생각한 것일 따름이지, 실제로 문학의 언어와 과학의 언어가 다를 까닭이 없다. 더구나 우리 일상인이 사용하는 말과 문학하는 사람의 말에 차이가 있을 리 없다. 아니 오히려 일상인의 말에 가장 충실한 말이 문학의 언어다.

 

  문제는 일상적인 말이 무엇이냐 하는 데 있다. 일상적인 말이라고 해 얼른 진부한 표현을 떠올리게 되었다면, 그것도 문학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잘못 퍼뜨린 편견에 사로잡힌 것에 지나지 않는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상인의 말 가운데서 얼마나 적확하게 그것을 표현하는 말을 찾아 냈느냐의 여부가 문학의 우월을 가름할 뿐이라는 말이 된다.

 

  문학의 말이 딴 세상에서 온 것이 결코 아니며, 그렇다고 엽기적 사용도 아니라는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 이문구의 동시 󰡐산 너머 저 쪽󰡑을 보자.

 

산 너머 저 쪽엔

별똥이 많겠지

밤마다 서너 개씩

떨어졌으니.

 

산 너머 저 쪽엔

바다가 있겠지

여름내 은하수가

흘러갔으니.

 

  이 중에 낯선 말이 있는가? 없다. 그렇다고 생각이 낯선가? 낯설면서 낯설지 않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면서 오래 잊어버리고 있었던 생각이라는 말도 된다.

  어린아이가 대여섯 살쯤 되었을 때 얼마나 많은 질문을 하는가.

 

󰡒비는 누가 만들어?󰡓

󰡒구름이 만든다.󰡓

󰡒구름은 누가 만들어?󰡓

󰡒물이 뜨거워지면 수증기가 올라가서 구름이 되지.󰡓

󰡒물은 누가 만들어?󰡓

󰡒그건 수소하고 산소로 되어 있지?󰡓

󰡒수소와 산소는 누가 만들어?󰡓

󰡒그건 하느님이 만들지.󰡓

󰡒그럼 하느님은 누가 만들어?󰡓

 

  이래서 끝내는 말이 막히던 그 숱한 질문들…….

  문학은 이것이다. 우리 모두가 생각하는 것, 그러나 까마득히 잊고 있던 것을 우리 모두가 쓰는 말로 다시 일깨워 주는 것일 뿐이다. 그러기에 문학의 언어가 일상어와 다를 리 없다.

 

  여기서 어떤 이는 말할 것이다. 그렇게 평범한 것만 예로 삼지 말고 이상(李箱)의 작품처럼 이상한 것도 말해 보라고. 그럴 필요도 있다. 이상의 󰡐가정(家庭)󰡑이라는 시를 예로 드는 것도 도움이 된다.

 

  門(문)을암만잡아다녀도안열리는것은안에生活(생활)이모자라는까닭이다. 밤이사나운꾸지람으로나를졸른다.나는우리집내門牌(문패)앞에서여간성가신게아니다.나는밤속에들어서서제웅처럼자꾸만減(감)해간다.食口(식구)야封(봉)한窓戶(창호)에더라도한구석터놓아다고내가收入(수입)되어들어가야하지않나.지붕에서리가내리고뾰족한데는鍼(침)처럼月光(월광)이묻었다.우리집이앓나보다그러고누가힘에겨운도장을찍나보다.壽命(수명)을헐어서典當(전당)잡히나보다.나는그냥門(문)고리에쇠사슬늘어지듯매어달렸다.門(문)을열려고안열리는門(문)을열려고.

 

  참으로 이상한 시다. 이쯤 되면 문학의 언어는 일상의 언어와는 다르다고 할 만도 하다. 우선 눈에 띄는 게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일부러 그렇게 규칙을 위반하려고 작정을 해서 그리된 것이다. 몰라서가 아니고 그럴 만한 의도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 이를테면 속에다 집어 넣던 셔츠 자락을 겉으로 삐죽이 내놓고 다니는 요즘 유행과 같은 심리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낯설게 하기󰡑라는 평범한 수법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 다음, 󰡐안에 생활이 모자란다󰡑느니 󰡐밤이 사나운 꾸지람으로 나를 조른다󰡑는 식의 말들은 우리 주변에는 없는 말처럼 보인다. 그럴 법도 하다. 이 또한 시인이 의도적으로 비틀어 표현함으로써 낯설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도 우리 일상의 말과 멀리 있는 것은 아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칭칭 동여매어져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는 암담한 거리감, 그러면서도 그 가족들의 비바람을 가려 주기 위해 명 줄이기도 마다 하지 않아야 하는 생활, 이런 것이 우리 모두의 삶이 아닌가. 이 시는 그 버거운 삶을 일깨워 주고 있고, 더러는 잊혀졌던 생각들을 신선한 충격으로 되살리고 있는 데서 감격이 인다. 이것에서 일상어와 다른 점을 굳이 찾으라고 한다면, 일상어 속에 있는 여러 요소들이 고도로 압축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문학은 어려운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캐러멜은 왜 달며 그것이 왜 있는가를 생각해도 좋다. 캐러멜을 달게 만드는 당분은 세상 도처에 흩어져 있다. 그것을 모으고 압축해서 더욱 달게 만든 것이 캐러멜이다. 사람들이 단맛을 보기 위해서 사탕수수밭으로 가서 헤매는 것보다는 캐러멜 한 알을 입에 넣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 문학도 그와 같다.

 

 문학이 무슨 소용인가

  󰡒문학을 해서 옷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 봤고 또 입에 올려도 봤을 말이다. 우리 누구나가 그러했듯이 문학 소년․소녀였던 그 시절에 이런 말이 맴돌기도 했을 것이다. 작가의 경우에는 물론 원고료니 인세니 하는 것이 지갑을 두툼하게 하는 수도 있다. 그러나 독자야 무엇하랴. 책을 사 보자니 돈만 드는 노릇인데. 생각이 여기에 이르고 보면 문학이야말로 참으로 무용지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반문할 수 있다. 저 유명한 콜럼버스의 달걀 얘기가 우리에게 일러 주는 것은 무엇인가? 달걀에는 공기집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란 말인가, 아니면 달걀도 세우면 세울 수 있다는 말인가. 콜럼버스의 달걀이 그 이상의 뜻으로 우리에게 어느 세계를 알게 하듯이, 문학의 보람도 문학 자체를 넘어선다.

 

  우리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만나 볼 수도 없고, 그들의 삶을 다 살아 볼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문학은 그 모든 삶을 두루 체험하게 한다. 수학 공부가 우리에게 두뇌의 회전을 가르치듯이 문학은 우리에게 삶을 설계하는 방식을 일러 준다. 그래서 문학은 역사요, 철학이다. 바로 이것이 문학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는 옷이며 밥이다.

  이런 예는 어떨지 모르겠다. 사춘기 시절에 읽었던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은 나를 전율에 가까운 감동에 빠지게 했다.

 

  󰡒당신.󰡓하고 그녀는 말했다. 󰡒저, 당신 곁에 있으면 이 이상 행복할 수 있을 수 없을 만큼 행복한 기분이 들어요……. 하지만 사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하여 태어난 것은 아니지요.󰡓 󰡒그럼 우리의 영혼은 행복 이상으로 무엇을 바란단 말이야? 󰡓 하고 나는 성급히 소리 질렀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청순함…….󰡓

  너무나 작은 소리로 속삭였기 때문에, 나는 그 말을 들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렇게 느꼈던 것이다…….

  󰡒네가 없으면 나는 그것을 바랄 수 없단 말야.󰡓 하고 나는 그녀의 무릎에 이마를 묻고 마치 어린애처럼, 그러나 슬퍼서가 아니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눈물을 흘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알리사도 아닌 소녀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아니 제롬도 아닌 내가 사랑에 빠지게 되었을 때, 소설이 아닌 보통 삶의 한 가운데서 나는 이 소설의 감동을 되살리며, 되새기며 살아 왔음을 기억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하는 성경의 구절에 기반을 둔 소설이지만 그 성스러운 말씀보다 훨씬 진하고 폭넓은 감동으로 내 사랑의 길을 인도했던 것이 󰡐좁은 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문학은 종교적이지만 종교는 아니다. 저 낮고 낮아 보이는 일상의 삶을 실감나게 공감하고 체험하는 데서 출발하여 저 높은 곳을 향하게 하는 것이 문학인 것이다.1) 우리가 문학을 가까이 해야 하는 이유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실용적 가치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우리 삶의 질을 고양하는 데 기여하는, 그것도 자발적이고 자연스러운 공감을 통해 삶의 변화를 도모하게 하는, 바로 이러한 가치가 문학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우리는 문학의 궁극적 실용성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이 아니고는 그 폭넓은 삶을 체험할 길이 없다. 우리는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고 19세기 영국 빈민가의 그 험한 삶을 알 수가 있고, 그를 통하여 우리는 정신적인 고양을 맛보게 되기도 한다. 이것이야말로 낮은 데서부터 저 높은 곳을 향하는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숨을 천천히 쉬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고 자랑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의 목숨은 유한한데, 그것은 숨쉬는 횟수로 규정된다는 전제가 거기에는 깔려 있다. 고로 천천히 쉬면 횟수는 같고 시간은 길기 때문에 수명이 자연히 연장된다는 것이다. 참으로 기발한 착상이다. 그러나 한번 비교해 보자. 숨을 천천히 쉬어서 수명을 길게 하는 것과 같은 기간을 살면서도 문학을 통해 넓고 깊은 우주를 두루 체험하는 것, 어느 것이 보람 있는 삶일까?

  어떤 것을 읽을까를 물을 필요도 없다. 재미난 것을 찾아서 읽으면 그만이다. 어떤 것을 써야 값지냐고 물을 필요도 없다. 쓸 만하다고 여기는 것을 쓰면 그만이다. 문학은 일상인의 것이므로 일상인의 삶에 충실한 사람이 쓰고, 또 그런 사람이 읽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창세 이래로 그러하였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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