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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 이루지 못한 백제의 꿈이 숨쉬는 곳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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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이루지 못한 백제의 꿈이 숨쉬는 곳

 

 

전라북도의 문화적 토대는 단연 백제계이다. 그 중에서도 익산은 마한백제 문화권의 중심을 이룬다. 익산에는 잃어버린 백제사의 한 모서리를 받쳐줄 많은 유물유적들이 집중적으로 분포하여 오늘이라도 자신들이 간직한 내력을 밝혀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익산은 전라북도 북서부에 위치하여 북으로는 금강 줄기를 사이에 두고 충청남도 부여군 및 논산군과, 남으로는 만경강을 끼고 김제군과 닿아 있다. 사방이 평야로 둘러싸여 드나들기가 편리한 까닭에 예나 지금이나 전라도로 들어서는 초입이 된다. 호남선이나 전라선 열차를 타면 충청남도 강경을 지나 익산 땅에 들어서고 호남고속도로를 통하더라도 충청남도 논산을 지나 익산시 여산면으로 들어서게 된다.

 

강경 평야와 닿아 있는 익산 땅은 김제 다음으로 경지율이 높고 쌀 생산량이 많은 곳이다. 뿐만 아니라 금강과 만경강 덕분에 수로 교통이 편리하여 신석기 시대 이래 농경문화가 번창했고, 삼한 시대로부터 여러 시대에 걸쳐 인근지역의 정치적문화적 중심지가 되었다.

 

익산 땅에서도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곳은 오늘날의 금마면과 왕궁면을 포괄하는 옛 금마 지역이다. 일찍이 삼한 시대에 기자의 41대손인 기준은 위만의 난을 피하여 바다를 통해 남으로 내려오다가 금마 땅에 이르러 마한의 왕이 되었다. 이것이 마한 54개 소국 가운데 건마국(乾馬國)이었다. 그후 백제 시조 온조는 마한을 병합한 후 이곳을 금마저(金馬渚)라 불렀다.

 

백제 문화의 전성기였던 600년 무렵, 무왕은 금마저를 도성으로 삼고 미륵사, 제석사와 같은 거대 사찰과 왕궁평성을 쌓았다. 이를 근거로 백제가 금마 지역으로 천도하려 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나 또 한편으로는 사비성, 웅진성과 함께 이곳을 별도(別都)로 경영했으리라는 주장도 있다. 백제가 망한 후 그 역사 기록이 철저히 인멸되었고, 남아 있는 기록조차 단편적인 까닭에 사료를 통해 어떠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근래의 발굴 결과로 백제 중엽 이래 이 지역이 공주, 부여와 함께 백제 문화의 또 하나의 중심지를 이루고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그 후, 통일신라 문무왕 때는 이곳에 고구려 유민 안승의 보덕국이 있었으며 후삼국 시대에는 후백제왕 견훤의 세력이 이 땅에서 고려 태조 왕건과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이러한 역사를 간직한 금마 땅에는 마한과 백제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었을뿐더러 익산토성, 미륵산성, 낭산산성, 왕궁평성 등 고대국가의 성터들이 흩어져 있다. 또 미륵사터, 왕궁리 오층석탑, 쌍릉, 동고도리 석불입상, 태봉사 삼존석불, 연동리 석불좌상 등 유물유적이 밀집되어 있어, 이곳에 터를 닦고 경륜을 펴려던 옛 사람들의 자취를 증언해 준다. 이처럼 한 지역에 유물유적이 밀집된 것은 경주나 부여 등 어느 왕도에서나 볼 수 있는 일로, 이 지역이 왕도에 준하는 중심지 역할을 했음을 다시금 반증한다.

 

한편, 오늘날 익산에는 호남평야의 중심지로서 오랜 옛날부터 풍부한 농경문화를 일구어 오는 가운데 농민들 사이에서 불리어온 민요나 농요가 어느 곳보다도 풍성하게 전승되고 있는데 지게 작대기를 두드려 장단을 치며 부르는 익산 목말노래가 유명하다. 농경문화와 연관된 민속놀이로는 마한 때의 솟대 행사에서 유래했으리라는 기세배놀이가 있다.

익산지역을 오가다 보면 곳곳에서 화강석을 가공하는 석물 공장들을 만날 수도 있다. 그 중에서도 빛깔이 곱고 단단하며 철분 함량이 적어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황등면의 화강석과 석공예가 특히 유명하다. 굳이 이 지역 석공예의 찾자면 저 유명한 백제 석공 아사달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으리라.

 

여산면 원수리 진사동에는 가람 이병기 선생의 생가가 있어 선비 집의 아담한 정취와 함께 선생의 체취를 전해 준다.

 

국 토 서 시 / 조태일

 

발바닥이 다 닳아 새 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는 없는 일이다.

 

숨결이 다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

우리의 하늘 밑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야윈 팔다리일망정 한껏 휘저어

슬픔도 기쁨도 한껏 가슴으로 맞대며 우리는

우리의 가락 속을 거닐 수밖에 없는 일이다.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

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하나에까지

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

저 혼에까지 저 숨결에 닿도록

우리는 우리의 삶을 불지필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숨결을 보탤 일이다.

 

일렁이는 피와 다 닳아진 살결과

허연 뼈까지 통째로 보탤 일이다.

 

 

미륵사터

금마에서 함열을 향해 조금 가다가 오른쪽을 보면 옆으로 퍼진 삼각형 모양의 산이 보인다. 금마의 진산에 해당하는 미륵산(용화산)이다.

 

이 산의 남쪽 자락 질펀히 펼쳐진 너른 터에,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절터인 미륵사터가 있다. 동서로 172m, 남북으로 148m에 이르는 절터에는 서석탑, 1993년 복원된 동석탑, 당간지주 두기, 목탑터, 금당터 세 곳, 회랑과 강당과 승방의 자취, 그리고 남문과 중문의 흔적이 남아 있다. 또 석등 지붕돌, 연꽃잎이 새겨진 석등 받침, 그리고 원래의 용도를 잘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석물 부재들이 둥글거나 모나거나 어렴풋한 자국을 간직한 채 흩어져 있다. 절터로 갈라져 들어가는 길 옆에 마침 불상이나 탑을 만드는 소규모 석물공장들이 자리 잡고 있어, 예와 오늘의 연면한 이어짐이 주는 야릇한 감회를 맛보게 한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600641)때 창건되었으며 고려 때까지도 성황을 이루었으나 조선 중기 이후 폐찰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정조 때 무장의 선비인 강후진이 쓴 와유록(臥遊錄)을 보면 미륵사에 오니 농부들이 탑 위에 올라가 낮잠을 자고 있었으며 탑이 100여 년 전에 부서졌다고 하더라는 내용이 있다. 이때는 이미 절이 폐허로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이곳에는 논밭과 민가가 들어서 있었다.

 

1980년부터 문화재 연구소에서 전반적인 발굴조사를 계속하고 있는데, 절터 앞쪽에는 발굴하면서 나온 백제 때부터 고려 시대에 걸친 각종 기와 조각들이 돌담처럼 쌓여 있다.

 

삼국유사무왕조의 미륵사 창건 부분을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무왕의 아내인 선화공주와 함께 사자사로 가던 길에 용화산 아래 큰 못가에 이르렀을 때 물 속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다고 한다. 두 사람은 길을 멈추고 예를 올렸고, 이곳에 절을 세우자는 선화공주의 간청에 따라 무왕은 사자사 스님 지명법사의 신통력을 빌어 하룻밤만에 산을 헐어 못을 메우고 그 위에 절을 지었다. 이때 미륵삼존을 본받아 금당과 탑과 회랑을 각각 세 곳에 세우고 미륵사라 불렀으며, 선화공주의 아버지인 진평왕은 기술자를 보내 그 공사를 도왔다고 한다.

 

발굴 결과, 절터 아래가 뻘흙으로 되어 있고, 가운데 목탑을 두고 동서로 각각 석탑이 있었으며, 또 각 탑의 북쪽으로 금당이 하나씩 있고 각기 회랑으로 둘러져 있어, 삼국유사의 기록이 사실이었음이 밝혀졌다. 탑 하나와 금당 한 채를 절 하나로 볼 때 마치 세 개의 절이 합쳐진 듯한 삼원일가람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보통 남북을 축으로 하여 남으로부터 차례로 탑, 금당, 강당, 승방이 일직선상에 하나씩 배치되는 일반적인 백제계 가람배치와는 매우 다르며, 탑을 중심으로 동북에 세 개의 금당이 배치되었던 고구려의 회탑식(回塔式) 가람배치나 고신라의 일탑삼금당 형식과도 다른 특이한 형태이다. 다른 나라에도 이러한 예는 없다. 이 절이 미륵삼존을 위하여 창건되었다는 점에서, 또 세 차례의 설법을 통해 중생을 용화세계로 이끈다는 미륵을 위해서 세 군데에 설법처를 마련하느라 이러한 형식이 나왔으리라 여겨진다.

 

목탑이 배치된 중원은 규모가 가장 크며 금당은 정면 5, 측면 4칸의 건물이다. 석탑이 배치된 동원과 서원은 규모가 서로 같은데 금당은 역시 정면5, 측면4칸의 건물이다. 이들 금당의 초석은 마름모꼴로 다듬어져 있고 그 위에 원형 주좌(柱座)가 높게 마련되어 있다. 각 원 앞에는 전체 길이 172m에 이르는 긴 행랑 건물이 배치되었고 각 원으로 들어가는 중문이 세 군데에 설치되었다.

 

각 금당과 탑 사이에는 석등이 있었다. 목탑자리와 동석탑 뒤편에는 더없이 깔끔하고 단정한 선으로 마무리된 지붕돌과 참한 연꽃잎이 새겨진 받침돌 등 석등 부재가 남아 있다. 이 미륵사터 석등의 연꽃받침은 석등 연꽃받침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백제 와당에 새겨진 연꽃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누구의 마음이라도 풀어줄 듯 부드럽고도 온유하다. 금당자리 뒤편으로는 장대석으로 된 강당의 기단과 층계가 남아 있다. 그 뒤 돌로 된 옛 교각 위에 나무 다리가 걸쳐진 작은 개천을 건너면 다시 승방 자리의 기단이 정연하다. 강당자리 옆 돌덮개가 얹힌 몰도랑과 승방자리 뒤편 산쪽으로 무성한 갈대 밭을 보면서, 연못을 메워 지었다는 창건설화를 다시 상기하게 한다.

 

사실 오늘날 미륵사터에서 그 생경함 탓에 제일 먼저 눈에 튀어 들어오는 것은 1993년에 복원된 동석탑이다. 그덕에, 자칫하면 그냥 지나치기도 쉬운 미륵사터를 찾는 데는 얼마간 도움이 되기도 한다. 남아 있는 서석탑과 발굴조사 때 발견된 상륜부 노반을 토대로 컴퓨터로 엄밀히 계산하여 복원해내었다는 동석탑은, 아직 세월이 얹히지 않은 새하얀 돌과 금빛 상륜부, 그리고 지붕 네 귀마다 달린 금빛 풍령에서 울리는 쟁그랑 소리로 사람들을 약간 당황스럽게 한다.

 

두 탑의 가운데 위치인 목탑 자리에서 몇 번이나 동탑과 서탑을 번갈아 보아도 서탑의 원래 모습이 동탑과 같았으리라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것은 1,300년만큼의 비바람과 햇볕과 이끼 속에 사람살이의 사연을 지켜보면서 이미 돌의 자리를 떠난 서탑이 안고 있는 무게가 아직은 돌일 뿐인 새 탑에는 실리지 않아서일까. 한 자국 한 자국을 정으로 쪼면서 종교적 기원을 새겨 넣었을 옛탑과, 계산에 따라 기계로 두부모 자르듯 잘라 갈아낸 새 탑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인지도 모른다.

 

무왕은 왜 당시의 수도 부여가 아닌 이곳에 이토록 너른 터를 잡아 공들인 절을 지었는지, 또한 사찰의 경영 실태는 어떠하였는지 등은 미륵사 창건 이후 곧 백제가 망한 까닭에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예로부터 이 지역이 풍부한 농업 생상력과 유리한 교통 사정을 배경으로 여러 시대에 걸쳐 중심지 역할을 했음을 고려할 때, 무왕은 바로 이 지역을 새 터로 삼아 백제 중흥의 원대한 포부를 펴려 했던 것이 아닐까. 미륵사 창건은 그 과정에서 요구되는 정치적 권위와 신념을 제시하기 위한 상징적 작업이었으리라 추정된다.

 

미륵사터 서석탑

현재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석탑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탑이다. 원래 미륵사에는 목탑을 가운데 두고 동서로 두 기의 석탑이 있었으니, 구별해서 말하자면 미륵사터 서석탑이라 불러야 하겠지만 관습상 미륵사터 석탑이라 불러온다.

 

국보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탑은 지금은 한 쪽이 떨어져 나간 6층으로 남아 있다. 그나마 일제시대(1915)에 이루어진 붕괴방지 보수공사로 서남쪽에 시멘트가 무지막지하게 덧발려, 보기가 안타까울뿐더러 더 이상 어떻게 손을 댈 수도 없는 형편이 되어버렸다. 원래 7층이었는지 9층이었는지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논란이 있었으나, 80년대에 발견된 노반석의 크기와 남아 있는 탑신의 비례로 미루어 보아 9층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탑이 앉은 자리는 한 변의 길이가 10m 되는 정사각형이고 높이는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14.25m에 이르는데, 원래의 크기를 추정하면 상륜부까지 합쳐서 26m 가량 되는 거대한 규모였다고 한다. 연못을 메우고 돌과 자갈과 흙을 다져, 천 년이 넘도록 이만한 규모와 이만한 무게의 탑이 서 있을 수 있도록 조성해낸 백제 사람들의 토목 기술이 요즈음의 기술 수준에 비춰보더라도 참으로 놀랍다. 더구나 이 탑은 부재를 하나하나 따로 만들어 맞춰 세운 것으로, 바닥의 어느 부분이 조금이라도 어그러지면 곧 균형을 잃고 무너지게 되어 있다.

 

불교가 전래된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말엽까지 약 200년 동안 우리 나라에서는 목조 건축 형식의 목탑이 주로 건립되었다. 7세기초에 이르러 그 목탑의 전통이 이 지역의 풍부하고 질 좋은 화강암이라는 재료와 만나 마침내 미륵사탑을 빚어놓았다. 이 탑은 수많은 돌을 깎아 끼워맞춰 목조 건축의 양식을 충실히 모방한 것으로, 재료만 돌로 바뀌었을 뿐 이전의 목탑 양식을 그대로 지니고 있어 우리 나라 석탑 발생의 시원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시작된 석탑은 신라 시대에 이르러 감은사탑을 거쳐 석가탑을 통하여 양식적 완성을 보게 된다.

 

탑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1층은 4면이 모두 3칸으로 되어 있고 각면의 가운데에 문이 뚫려 있어 안에서 맞통한다. 가운데 공간에는 커다란 돌기둥이 세워져 전체의 무게를 받치고 있다. 1층 주변의 기둥은 당대 목조 건축의 양식대로 위쪽이 좁고, 높이의 약 3분의 2 되는 지점부터 부풀어 내려오는 배흘림 기법으로 되어 있다. 기둥과 지붕이 만나는 곳, 즉 지붕 아래의 처마 부분 또한 목조 건축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붕 모서리는 가볍게 들렸고 각각 풍령을 달았던 자국이 있다. 각층이 1층과 같은 수법으로 만들어졌으나 2층 이상은 높이가 얕아지고 처마 밑부분의 짜임 등이 간략해졌으며, 지붕의 폭이 알맞게 줄어들어 전체적으로 정연하고 묵직하면서도 상큼한 맛을 잃지 않았다. 안정감과 경쾌함, 장중함과 단아함을 함께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이 백제 사람들의 빼어난 마음이고 솜씨였다.

 

탑 주위의 네 귀퉁이에는 수호 석인상이 있다. 서남쪽 것은 없어지고, 오랜 세월 비바람에 닦이고 닦여 두리뭉실이 돌덩어리가 된 세구가 남아 있다. 그 가운데 동남쪽 귀퉁이에 앉은 것이 비교적 제 모습을 많이 지녔다. , , 입은 거의 분간되지 않으나 아담하고 공손한 느낌을 주는 몸덩어리와 가슴 앞에 간종그려 모은 두 손으로 1,300년 전에 부여받은 자신의 소임을 지금까지 충직하게 지키고 있다. 이는 불교 조형물 속에 끌여들여진 백제의 전통적 수호신상으로, 돌장승이나 돌하루방 같은 우리 나라 토속 신앙 조형물의 원형으로 여겨진다.

 

미륵사터 당간지주

일반적으로 당간지주는 절의 문 앞에 한 기가 있지만 삼원일가람 형식의 미륵사터에는 동서 두 석탑에서 남쪽으로 64m 되는 곳에 한 기씩, 두 기가 있다. 두 당간지주는 높이가 모두 3.95m이고 양식과 구성 수법도 같다. 보물 제236호로 지정되어 있다.

 

장대석을 맞추어 만든 기단의 네 면에는 안상이 새겨져 있다. 지주의 양쪽 바깥면에는 둘레를 따라 테두리선을 도드라지게 하였고 가운데에도 한 줄의 선을 돋을새김하였다. 지주 꼭대기 부분은 바깥쪽 각이 둥그스름하게 깎여 마무리되어 있기 때문에, 아래에서 보면 지주의 윗부분이 좁고 아래가 넓은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폭의 차이가 별로 없다. 대체로 필요한 최소한의 장식만을 하여 번잡하지 않은 단정한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는데, 양식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중기 이후의 것으로 추정된다.

 

왕궁리 5층석탑

금마면 미륵주유소 앞 네거리에서 전주 방향으로 접어들어 1.7km쯤 가다가 왼쪽을 보면, 미륵산에서 남으로 이어지던 산자락이 끝나는 얕은 구릉의 능선 위로 탑 윗부분이 살짝 보인다. 이 탑이 왕궁리 오층석탑이고 그 주변의 구릉지대가 예로부터 마한 또는 백제의 궁궐터였다고 전해 오는 왕궁평이다. 이곳의 지명인 왕궁리도 궁궐이 있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조선 말기에 간행된 익산읍지인 <금마지>에 따르면 왕궁평은 용화산(미륵산)에서 남으로 내려온 산자락이 끝나는 곳에 있으며 마한 때의 조궁터라는 성터가 남아 있다. 이 성은 돌을 사용하지 않은 토성으로, 그곳 사람들이 밭을 갈다보면 기와조각이 깔려 있고, 더러 굴뚝돌이 나온다. 종종 옥패와 동전, 쇠못 등을 습득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익산군의 산천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왕궁정이라는 항목을 잡아 군의 남쪽 5리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옛날 궁궐터라고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 이곳에서는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그간의 조사에서 남북 길이 460m, 동서 길이 230m인 남북으로 긴 장방형의 성터(왕궁평성)가 확인되었다. 또한 백제 말기의 유물과 통일신라 시대의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으며, 이곳이 궁성이었음을 추정하게 하는 각종 석재들이 발견되었다. 이 성터 안에는 백제 와요지와 여러 개의 건물터도 있다. 현재 진행되는 발굴조사가 모두 끝나면 지금은 개연성으로만 남아 있는 백제의 금마 도읍설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판가름 날 것으로 기대된다.

 

이 왕궁평의 야트막한 언덕 위 툭 트인 곳, 비바람에 시달려도 석 달 열흘 동안 고운 꽃빛을 간직하는 배롱나무(목백일홍)들 속에 손짓하듯 5층탑이 서있다. 이곳에 배롱나무들은 1971년에 80여 그루 심은 것이 단지를 이루어 5월 중순부터 8월 삼복더위까지 아롱아롱한 붉은 꽃을 피운다.

 

탑의 높이는 8.5m이고 기단면석에는 두 탱주를 갖추었다. 1층 몸돌은 우주를 돋을 새김한 기둥모양의 돌로, 네 모서리를 세우고 탱주를 새긴 네 장의 중간 면석을 짜맞춰 만들었다. 2층은 41석씩, 3층 이상은 2매씩으로 되어 있으며, 각각 우주를 조각하였다. 3단의 층급받침을 지붕과 별도로 4매의 돌로 조성하고 그 위에 지붕돌을 얹었으며, 지붕돌의 경사는 완만하고 네 귀가 약간 들려 있다.

 

안내 표지판에는 고려 초기의 탑으로 기술되어 있으나 탑의 생김새나 여러 가지 이유로 백제탑, 신라탑, 고려탑이라고 하는 등 견해가 엇갈리는 가운데 지명을 따라 왕궁리탑이라고만 불린다. 보물 제 44호로 지정되어 있다.

 

우선, 첫인상으로 보면 이 탑은 백제탑의 인상을 짙게 풍긴다. 단층기단과 얇고 넓은 지붕돌 등 전체적 이미지가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많이 닮았다. 탑신의 체감률이적은 데서 오는 굳건한 느낌과, 그에 비해 기단이 좁은 데서 오는 가녀린 느낌, 지붕돌 못서리의 상쾌한 들림에서 오는 경쾌함 등 대립적 요소들이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어 하눈에 아름다운 백제탑의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미륵사탑이나 정림사탑과 같은시대에 조성된 백제탑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탑신부의 돌 짜임의 기법과 3단으로 된 지붕돌 층급받침의 기법에서 신라 석탑의 양식이 보이므로 통일신라 초기의 탑으로보는 설도 있다.

 

또다른 설로는, 옛 백제 지역에서 이어져오던 백제 양식을 계승하고 신라 양식을 흡수하여 고려 초기에 건립된 탑이라는 견해가 있다. 1965년에 기울어짐을 바로잡기 위해 시행된 해체 복원 공사중 1층 지붕돌과 기단부에서 양식상 고려 초기의 것으로 보이는 금제 사리함과 사리병, 19매의 금판에 새겨진 금강경, 청동여래입상 등이 나왔기 때문이다(이 유물들은 국보 제 123호로 지정되어 국립전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1965년의 발굴 결과 이 탑의 기초가 백제 시대의 유적 위에 세워졌음이 확인되었다.

 

세 번째 주장은 견훤은 도읍인 완산(전주)의 지세가 앉아 있는 개의 형상이므로, 개의 꼬리에 해당하는 이곳에 탑을 세워 누름으로써 견훤의 기세를 꺾어 고려 태조 왕건이 이기게 되었고, 이 탑이 완성되던 날 완산의 하늘이 사흘 동안 어두웠다고 하는 <금마지>의 기록과도 부합한다. 실제로 고려 태조는 후삼국을 통일한 후 새 국가의 앞날을 평탄하게 하기 위해 도선의 의견에 따라 전국 각처의 풍수지리설에 따른 비보(裨補)를 했다.

 

그러나 근래의 발굴 과정에서 상부대관(上部大官)관궁사(官宮寺)궁사(宮寺) 등에 명문이 적힌 기와들이 나와, 이곳에 백제의 궁궐이 있었고, 그 내부에 대관사관궁사궁사라 불리던 절이 있었으며, 오층탑은 이 절의 유물이라는 추측도 다시 나오고 있다.

 

따라서 애초부터 고려 초기의 탑인지, 아니면 백제 때 조성된 것을 고려시대에 보수했는지 아직은 뚜렷한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한 결론이 나기까지는 연구자들의 노력을 좀더 기다려야 하겠지만, 답사객의 입장에서는 멀리 떨어져서 보면 날아갈 듯 경쾌하다가도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장중하고 보는 각도에 따라 제각기 다른 느낌을 자아내는 이 탑을 눈길로 마음으로 쓰다듬어보는 일이 더 중요할지도 모르겠다. 이 탑은 보물 제 44호로 지정되어 있다.

 

동고도리 석불

금마에서 왕궁리 오층탑쪽으로 가다보면, 길 왼쪽으로는 야트막한 언덕이 이어지고 오른편으로는 논이 펼쳐진다. 그 논 가운데 길다란 석불 두 기가 서 있다. 높이 4.24m의 두 석불은 옥룡천을 사이에 두고 약 200m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마주 보고 서 있다. 이 둘은 각각 남자와 여자인데, 평소에는 만나지 못하다가 석 달 해일(亥日) 자시(子時)에 옥룡천이 얼어붙으면 서로 만나 안고 회포를 풀다가 닭이 울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진다. 지금은 옥룡천 위에 노란 페인트칠이 된 시멘트 다리가 걸쳐져 있다. 넘어져 있던 것을 조선철종 9(1858)에 익산군수로 부임해 온 최종석이 현재의 위치에 일으켜 세웠다고 한다. 그때 씌어진 <석불중건기>비석이 찻길 가까운 선 석불 옆에 있다. <석불중건기>에 적힌 내용은 이렇다.

 

금마는 익산의 구읍자리로 동서북의 삼면이 다 산으로 가로막혀 있는데, 유독 남쪽만은 터져 있어 물이 다 흘러나가 허허하게 생겼기에 읍 수문의 허를 막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 한다. 또 일설에는 금마의 주산인 금마산의 형상이 마치 말의 모양과 같다 하여 말에는 마부가 있어야 하므로 마부로서 인석(人石)을 세웠다고 한다.”

 

불상이라 불리고는 있지만 긴 기둥 같은 몸체에 네모난 얼굴, 가는 눈, 짧은 코, 엷은 웃음기를 담은 작은 입 등이 간략하게 표현된 모습은 매우 소박하면서도 친근하여 오히려 장승과 같은 인상을 풍긴다. , 여름, 가을, 겨울, 사시로 변해가는 들판과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 어울린 끈질긴 지킴이처럼 소박해서 더욱 믿음직하다. 양감 없는 사다리꼴 기둥 모양의 돌에 얼굴과 손, 옷주름과 대좌를 매우 간략하게 표현했는데, 몸통보다 큰 네모진 관을 쓰고 긴 소매 두루마기를 입고 있다. 발치에는 판석이 하나씩 놓여 있는데 한 판석에는 알자리가 둥글게 파여있다.

 

고려 시대에는 이렇게 신체의 표현이 절제된 거대한 석상이 많이 조성되었다. 이 역시 그러한 작품 중의 하나로 고려 말엽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보물 제46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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