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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우 훗뿌릴 제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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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우 훗뿌릴 제

 

 

배꽃이 흩날리던 때에 손 잡고 울며 불며 헤어진 임

가을 바람에 낙엽 지는 것을 보며 나를 생각하여 주실까?

천 리 길 머나먼 곳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는구나.

요점 정리

지은이 : 계랑(桂娘)

연대 : 조선 전기

갈래 : 평시조, 연정가, 이별가

성격 : 감상적, 애상적, 여성적 편향,

표현 : 은유법

제재 : 이별과 그리움

주제 : 임을 그리는 마음

출전 : 청구영언(靑丘永言)

내용 연구

 

배꽃이 흩날리던 때[봄날 이별 상황에 '하강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이별의 정서를 심화시킴]에 손 잡고 울며 불며 헤어진 임

가을 바람에 낙엽 지는 것[가을 날 임을 떠올림 / 하강적 이미지 사용]을 보며 나를 생각하여 주실까?[자신처럼 임도 자신을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 설의법]

천 리 길 머나먼 곳에 외로운 꿈[임을 향한 그리운 마음 ]만 오락가락 하는구나.['천 리'는 임과 떨어진 실제 거리, 혹은 이별로 인한 임과의 심적인 거리를 뜻한다.]

 

이화우(梨花雨) : 비가 오는 것처럼 떨어지는 배꽃. 또는 봄비

흣뿌릴 제 : 어지러이 뿌릴 때

생각난가 : 생각하는가

이해와 감상

 

임과 헤어진 뒤의 시간적 거리감과 임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공간적 거리감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작품으로 초장은 봄바람에 배꽃이 떨어지듯 이별한 임에 대해 직설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중장에서는 임과의 이별 뒤 무심하게 세월이 흘러 어느덧 가을이 되었고, 임을 그리워하는 자신처럼 임도 자신을 생각하고 있을까하는 안타까움이 드러나 있다. 초장의 '이화우(봄)'와 중장의 '추풍낙엽(가을)'은 서로 대비되는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으로, 임과 헤어져 있는 시간적 거리뿐만 아니라, '이화우'와 '추풍 낙엽'의 이미지가 작품을 아름답고 슬프게 채색하고 있다. 화자의 슬픈 마음을 강하게 드러내 보이는 역할을 한다. 종장의 '천 리'는 공간적 거리감만이 아니라 이별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 주며, '외로운 꿈'은 임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배꽃이 비처럼 흩날릴 때의 이별의 정화, 낙엽 지는 가을날에 임을 그리워하는 마음, 멀리 떨어져 있는 임과의 재회에 대한 염원 등을 여성의 섬세한 감각으로 그려냈다.

 

 

 

심화 자료

계랑=계생(桂生)

 

1513(중종 8)~1550(명종 5).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으로 본명은 이향금(李香今). 호는 매창(梅窓)·계생(癸生)·계랑(桂娘:癸娘). 부안의 이름난 기생으로 가사·한시를 비롯하여 가무·현금(玄琴)에 이르기까지 다재다능한 여류예술인이었다. 작품으로는 〈가을생각 秋思〉·〈술취한 나그네에게 주다 贈醉客〉·〈봄날의 원망 春怨〉·〈무제 無題〉·〈스스로 한함 自恨〉·〈감회를 남김 遺懷〉·〈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등 가사와 한시 70여 수 외에 금석문까지 전해지고 있다. 작품집으로 〈매창집〉 1권이 있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계랑을 그리워하며 - 유희경

 

그대는 부안에 살고 낭가재양주(娘家在량州)

나는 한양에 있어 아가재경구(我家在京口)

연모하는 정에도 만나질 못하고 상사불상견(相思不相見)

오동잎에 빗물들면 그리움만 더욱 타오. 단장오동우(斷腸梧桐雨)

 

기녀 시조의 특징과 문학사적 의미

(1) 일반적 특징 :

기녀 시조는 상실의 상황에서 노래한다는 점에서 동시대의 시조 담당층인 사대부 시조와 비교된다. 사대부들의 시조가 흔히 관념적 표출에 그치는 데 반해, 기녀들의 시조는 숨김없이 서정을 표출하였다. 또한 그들의 시조는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잘 살려 시적 언어로 발전시켰다는 점에서도 그 특징을 살펴 볼 수 있다. 한편 기녀 시조는 이별이 제재라는 점에서 고려 속요와 상통하는데, 고려속요가 이별의 순간을 노래한다면 기녀 시조는 이미 벌어진 이별의 상황을 노래한다. 시적 화자의 의식면에 있어서도 고려속요가 임과의 관계를 수직적으로 보고 있다면 기녀 시조는 수평적 관계로 보고 있다. 또, 발화의 차이에서도 고려 속요는 이별의 순간에 발화하는 것으로 직접적이고 절박한 발화가 이루어지는 반면, 기녀 시조는 이미 지나간 과거이므로 자아를 성찰하고 더불어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며 간접적으로 발화한다.

(2) 문학사적 의미 :

기녀 시조는 세련된 표현 기교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순수 국어를 잘 구사하였다는 데 그 의의가 있으며, 내용 면에서는 남녀 간의 애정 및 인간의 정서를 솔직 담대하게 표현하였다는 데 초점을 둔다. 또한 기녀들이 시조를 짓고 향유했던 문화는 시조 작가층의 확대와 더불어 시조가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상류 계층의 전유물이었던 시조를 조선 중기에 이르러 기녀들도 짓고 읊었다는 점은 후기의 가객 및 평민층으로까지 시조 작가층이 확대될 수 있었던 계기를 마련한 것이며,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기녀시조는 시조 문학 변모에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출처 : 김병국 외 4인 공저 한국교육미디어 문학)

여류 시조의 문학사적 의의

여류 시조는 그 작자가 대부분 기녀들이었다. 비록 천민에 속하는 계급이었지만, 그들의 교양은 선비들에 견주어 어느 면에서도 손색이 없었다. 이들의 시조는 여성만이 지닌 섬세한 감정으로 진실하면서도 절실하게 사랑을 노래한 까닭에 더욱 감동적이다. 특히 재도지기(載道之器)의 역할을 했던 사대부들의 시조와는 달리 여성 특유의 우아한 정서를 전달하고 있으며,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시적 언어로 발전시키고 있다. 이들 작자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시조에 얽힌 일화가 많이 전하고 있어 그들의 면모를 읽을 수 있다.

기녀복(妓女服)

기녀가 입던 복식. 기녀란 의약이나 침선의 기술 및 가무(歌舞)의 기예를 익혀서 나라에 필요할 때 봉사하던 여성이다. 그들은 천인계층에 속하였지만, 가무자로서의 구실과 신분의 특수성으로 인하여 그 복식의 내용과 형식이 다양하였다.

기녀의 복식은 저고리와 치마만으로 대신되는 다른 천인 여복과는 달리 의례복과 일상복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의례복은 궁중연회 때 정재(呈才)에 참여한 여령(女伶)의 복식구성과 가례 때 의녀의 착장모습 등에 의하여 알 수 있다.

정재복식의 기본구성은 화관·단삼(單衫)·상(裳)·한삼(汗衫)·대(帶)·혜(鞋 : 운두가 낮은 신) 등이며, 여기에 하피(霞演 : 어깨의 앞·뒤로 늘이는 긴 끈)와 비구(臂共)가 첨가되기도 하였다.

동기(童妓)의 복식구성은 입(笠) 또는 화관과 단의(丹衣)·상·말군·대·혜·유소(流蘇 : 단의 위에 늘어뜨리는 장식품) 등이며, 악장(樂章)에 따라 독특한 복식을 보여준다.

재료는 나(羅)·주(紬)·초(錞) 등의 비단을 사용하며, 색은 홍색·녹색·황색·남색 등 원색을 써서 현란하게 장식하였다. 일상복은 김홍도(金弘道)나 신윤복(申潤福)의 풍속도에서 볼 수 있는데, 짧고 좁은 저고리와 속옷을 겹겹이 입은 위로 길고 폭이 넓은 치마를 입었다.

저고리는 흰색 치마허리와 끈이 보일 정도로 짧고, 품·진동·소매통이 매우 좁은 회장저고리를 입었다. 치마는 겉자락이 오른쪽을 향하도록 입었고, 외출할 때에는 겉자락을 저고리 도련 위까지 당겨 올려 허리띠로 매어 속옷의 무릎 아랫부분이 보이도록 입었다. 남치마에는 주로 옥색·백색·분홍색·녹색 등의 회장저고리를 입었다.

다홍치마에는 황색·녹색·백색·옥색 등의 회장저고리를 입었다. 동기는 다홍치마에 황색·녹색 등의 회장저고리를 입었는데, 회장감의 색은 모두 검은자주색이었다. 머리모양은 제머리 또는 작은 다리를 드려 길게 땋아 검은자주색이나 흑색 댕기를 드리워서 크게 틀어 올려 트레머리를 하였다.

외출할 때에는 전모(氈帽)나 가리마·장옷·쓰개치마를 썼다. 동기는 땋은머리를 하고 댕기를 드리우거나 새앙머리를 하고 비녀를 꽂았다.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에 나타나는 사치금제에서의 기녀복식을 살펴보면 기녀는 양반부녀자와 동등하게 복식의 사치가 허용되고 있었다.

즉, 사(紗)·라(羅)·능(綾)·단(緞)을 재료로 한 모든 복식품의 착용이 허용되었으며, 금·은으로 만든 여러 가지 장신구를 사용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기녀복식의 양상은 비일상적·비실용적이며 매우 장식적이고 화려하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蕙園風俗怜에서 본 우리 옷의 멋(朴京子, 誠信女子師範大學論文集 3, 1970), 朝鮮朝後期地方官衙의 服飾(金用淑, 淑明女子大學校論文集 17, 1977), 平安監司歡迎圖의 服飾史的考察(李柱媛, 服飾 4, 韓國服飾學會, 1981).

기생(妓生)

전통사회에서 잔치나 술자리에서 노래·춤 및 풍류로 참석자들의 흥을 돋우는 일을 업으로 삼았던 여자. 일종의 사치노예(奢侈奴隷)라고 할 수 있으며, ‘기녀(妓女)’, 말을 할 줄 아는 꽃이라는 뜻에서 ‘해어화(解語花)’, 또는 ‘화류계 여자(花柳界女子)’라고도 하였다.

〔유 래〕

이익(李瀷)은 ≪성호사설≫에서 기생이 양수척(揚水尺)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양수척은 곧 유기장(柳器匠)으로서, 고려가 후백제를 칠 때 가장 다스리기 힘들었던 집단이었다. 이들은 원래 소속도 없고 부역에 종사하지도 않고,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버드나무로 키·소쿠리 등을 만들어 팔고 다녔다.

후에 이들이 남녀노비로서 읍적(邑籍)에 오르게 될 때, 용모가 고운 여자를 골라 춤과 노래를 익히게 하여 기생을 만들었다고 한다. 따라서 기(妓)와 비(婢)는 원래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하고, 그 중 비가 기보다 먼저 발생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결국 비나 기는 한 사회의 계급 분화과정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기생의 발생을 무녀(巫女)의 타락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즉, 고대 제정일치사회에서 사제(司祭)로서 군림하던 무녀가 정치적 권력과 종교적 권력이 분화되는 과정에서 기생으로 전락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원래부터 세습되어 내려온 기생 이외에도, 비적(婢籍)으로 떨어져내려와 기생이 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반역을 꾀한 역신(逆臣)의 부녀자들이다.

고려시대에 근친상간의 금기를 범한 상서예부시랑 이수(李需)의 조카며느리를 유녀(遊女)의 적에 올린 경우와, 조선 초기 사육신(死六臣)의 처자들을 신하들에게 나누어준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조선 광해군 때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친정어머니를 제주감영의 노비로 삼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신 분〕

기생은 노비와 마찬가지로 한번 기적(妓籍)에 올려지면 천민이라는 신분적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기생과 양반 사이에 태어난 경우라도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에 따라 아들은 노비, 딸은 기생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생이 양민으로 되는 경우도 있었다. 즉, 속신(贖身)이라 하여, 양민부자나 양반의 소실이 되는 경우 재물로 그 대가를 치러줌으로써 천민의 신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다.

한편, 기생이 병들어 제구실을 못하거나 늙어 퇴직할 때 그 딸이나 조카딸을 대신 들여놓고 나오는데, 이를 두고 대비정속(代婢定屬)이라 했다.

고전소설인 《추풍감별곡 秋風感別曲》에는 양반의 딸이 아버지의 빚을 갚아주기 위해 기녀가 되는 얘기도 있다. 이런 기생은 조선사회에서 양민도 못되는 이른바 팔천(八賤)의 하나였다.

다만 그들에게 위안이 있다면, 첫째 양반의 부녀자들과 같이 비단옷에 노리개를 찰 수 있었던 점이고, 둘째 직업적 특성에 따라 사대부들과의 자유연애가 가능했다는 점이며, 셋째 고관대작의 첩으로 들어가면 친정을 살릴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신분적 제약으로 인해 이별과 배신을 되풀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명 기〕

불후의 시조시인으로 꼽히는 송도 명기 황진이(黃眞伊)는 시조 뿐 아니라 한시에도 뛰어난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서경덕(徐敬德)과의 일화는 유명하다.

부안 명기 이매창(李梅窓)은 당시 문인과 명신들인 허균(許筠)·이귀(李貴) 등과 교분이 두터웠으며, 중종 때는 선비들이 그녀의 시비를 세워주었다. 그 밖에 송이(松伊)·소춘풍(笑春風) 등 시조시인으로 이름을 남긴 시기(詩妓)들이 많다.

기녀들이 국문학에 끼친 영향 중 가장 큰 것은 고려가요의 전승이라 하겠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짙은 정한(情恨)의 고려가요는 대부분 그들의 작품으로 보여진다. 한편 진주 기생 논개(論介)는 조선시대의 대표적 의기(義妓)로 꼽힌다.

〔변 화〕

조선 말기에 이르면 기생이 일패(一牌)·이패·삼패로 나뉜다. 일패기생은 관기(官妓)를 총칭하는 것으로, 예의범절에 밝고 대개 남편이 있는 유부기(有夫妓)로서 몸을 내맡기는 일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이들은 우리 전통가무의 보존자이며 전승자로서 뛰어난 예술인들이었다.

이패기생은 은근짜〔隱君子〕라고 불리며 밀매음녀(密賣淫女)에 가깝다. 삼패기생은 이른바 창녀(娼女)로서 몸을 파는 매춘부라고 할 수 있다.

민족항일기에 들어와서는 한말의 기생학교·기생조합이 권번(券番)으로 바뀌었다. 권번은 서울·평양·대구·부산 등 대도시에 있었고, 입학생들에게 교양·예기·일본어 학습을 시켜 요리집에 내보냈다. 일부 기생들은 권번의 부당한 화대(花代) 착취에 대항하여 동맹파업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한편, 어떤 친일파 인사가 거금을 주고 당시 이름난 요정인 서울 명월관(明月館)의 진주 기생 산홍(山紅)을 소실로 삼으려 하자, “기생에게 줄 돈이 있으면 나라 위해 피흘리는 젊은이에게 주라.”며 단호히 거절하여 의기의 맥을 이었다. 그 밖에도 민족항일기에는 애국충정과 관련된 기생들의 일화가 많다.

광복 이후 권번이 사라지면서 기생 또한 없어지는 듯했으나, 요즈음에도 일본인을 대상으로 하는 요정에서의 ‘기생파티’가 주요 관광상품으로 등장하여 사회문제로 대두된 적도 있다.

흔히 기생과 같은 여성들을 두고 필요악적 존재라고 하거나, 하나의 직업여성으로 다루려고 하지만, 대부분의 여성운동가들은 부정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여성 자신의 분발과 남성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참고문헌≫ 星湖僿說, 朝鮮解語花史(李能和, 漢城圖書株式會社, 1927), 妓女史序說(金東旭, 아세아여성연구 5, 淑明女子大學校,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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