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이상은 누구인가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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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누구인가
고은

 

 

이상은 누구인가. 그는 반민족의 사람이 아닌가. 그는 퇴폐의 사람이 아닌가. 이러한 물음과 함께 이상의 문학과 삶은 현대 한국 문학에 있어서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우리는 자주 부닥친다.

말이 문학 또는 사상의 바탕이라면 그의 문학은 일단 일제 식민지 시대에 익힌 일본어로 된 그의 문학이 번역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불쾌한 원죄를 그의 시와 소설, 그리고 산문 따위의 모든 의식의 작희(作戱)에 뒤집어씌울 수 있다. 그의 문학은 그의 짧고 불행한 삶만큼이나 불행하다는 사실을 그가 누려온 온갖 영광과 함께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육신이 흐느적흐느적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처럼 맑소. 니코틴이 내 횟배 앓은 뱃속으로 스미면 머리 속에 으레 백지가 준비되는 법이요. 그 위에다 나는 위트와 패러독스를 바둑 포석처럼 늘어놓소. 가증할 상식의 병이오. 나는 또 여인과 생활을 설계하오. 연애 기법에마저 서먹서먹해진, 지성의 극치를 흘깃 좀 들여다본 일이 있는 말하자면 일종의 정신분일자 말이오. 이런 여인의 반--그것은 온갖 것의 반이오--만을 영수(領收)하는 생활을 설계한다는 말이오. 그런 생활 속에 한 발만 들여놓고 흡사 두 개의 태양처럼 마주 쳐다보면서 낄낄거릴 것이오. 나는 아마 어지간히 인생의 제행이 싱거워서 견딜 수가 없게끔 되고 그만둔 모양이오. 굿바이.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어디 한번 이렇게 외쳐 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번만 날아 보자꾸나.

1910∼1937년의 이 상이 남겨 놓은 이단자적인 업적과 암담하기 짝이 없는 추문, 오만하여 자기 폐쇄적인 자의식의 허장성세는 바로 그 때문에 이상과 오늘의 문학이 만나는 충동을 낳고 있는지 모른다.

그는 첫째 일제 식민지 정책에 대한 민족적 저항의 큰 줄기들이 해체되거나 유망(流亡)한 1930년대의 몇 해 동안을 그의 기괴한 문학 활동으로 살다가 중단된다. 이 점은 퍽 역사 단계와 한 문학인의 병적적(病跡的)인 삶의 관계라는 눈으로 본다면 상징적이게 하고 있다. 말하자면 민족의 뜨거운 회복 명분의 잠적과 함께 그 같은 민족 의식을 형성하지 못한 이상 또는 그 동시대 문학인들이 출현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그의 동시대 자체로부터도 소수자의 찬성과 동의를 얻었을 뿐 식민지 민중과는 동떨어진 일제 총독의 문화정치(文化政治)라는 반민족적 부르조아 문학의 첨단에서 그의 부정 정신에 의한 문학적 실험으로 일관한다. 이러한 이상의 모든 것은 그의 당대뿐 아니라 훨씬 뒤의 1950년대 전후 문학에서까지 프랑스 실존주의적 행태와 비교될 만큼 이단자 또는 이방인적인 매혹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전후 세대로서의 새로운 문학을 외치는 자들이나 대학의 문학 지망자들의 대부분이 이상의 모사자 또는 추종자가 되는 일로서 '뭔가 새로운 문학'에 대한 동질화를 꾀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상은 이러한 대상이 되기에 집중적으로 충분한 여러 현상을 갖추고 있다. 첫째 그의 비전래적, 비토속적인 모더니티가 무한하게 사로잡고 있는 자아 의식이다. 아마도 민족 의식의 완전한 결핍으로서 그는 그러한 자아 의식을 거의 퇴영적으로 심화시킨 것 같다. 이런 점은 1950전대 전후 세대는 민족 상잔이라는 비극, 분단의 비극, 적대의 비극에도 불구하고 전혀 민족적이지 못한 실존주의 현상에는 썩 먹히게 된다.

바로 이런 이상의 매혹이 1970년대 민족 문학에서 아무런 영향력도 생사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사실로도 반증되고 있는 것이다.

둘째, 그에게는 문학인의 어떤 숙명 따위를 암시하는 절망적인 삶이 있다. 그것은 매우 서구적인 그의 인상과 함께 세기말의 도취적 예술 지상주의와도 관련되며 특히 그의 문학과 함께 조선조 한양 중인 계층의 후예인 그의 신분과는 전혀 단절된 다다이즘 때문인 성싶다.

셋째 그의 생애와 문단 생활의 짧은 기간이라는 사실이 요절 또는 어떤 특이한 불행을 애호하는 자들의 우상화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이상 문학이 발휘하고 있는 관념적인 찌꺼기를, 의식의 굴절된 모양, 잘 암기된 에그조티즘과 자기 자신을 드러내면서 숨기는 뻔뻔스러운 위장술 그리고 그의 비여성적 여성 유희와 딱딱 잘라지는 진행 마비의 수사와 화술 따위는 더할 나위 없이 요구되는 문학 입문의 극치가 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시대를 정규적인 상황 의식이나 역사 의식을 가지지 못한 채 그 자신의 절망 고민과 선택되어진 인간적 모멸감 따위로써 모든 삶의 건강한 표면을 희극적으로 부정함으로써 그는 예술가의 광태를 유감 없이 누린 것이다. 이런 사실을 들어서 필자는 1천 6백 장의 《이상평전》에서 그를 '행복한 파산자'라고 낙인한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그는 그의 시대와 그가 산 식민지 사회를 전혀 문화적 귀족 계층을 자임하면서 일종의 근대적 낙후현상으로만 오만불손하게 폄하했다. 그것은 그가 <오감도>를 신문에 연재하다가 중단되기 전후에 보여 준 그의 태도로도 잘 드러난다. 말하자면 그는 그의 문학을 세상이 알아주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면서 그 한탄을 적절하게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왜 미쳤다고들 그러는지, 대체 우리는 남보다 수십 년씩 떨어져도 마음놓고 지낼 작정이냐.'

이 말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의 소갈머리를 들여다보게 된다. 즉, 이상의 자아 의식은 일종의 선진국 문학을 지향, 추수(追隨)하는 근대 의식이라는 것, 그것이 민족의 삶에 값하는 역사 또는 상황에 대한 의식과 결합되지 못하는 단순한 모더니즘이라는 것으로 밝혀진다.

이 같은 모더니즘 이론은 그 근거지였던 최재서에게 기다리고 있는 함정이 친일 문학 및 의사(擬似) 일본인이라는 사실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철저한 식민지 지식인의 애완물이었던 것이다. 1930년대 문학을 통틀어 식민지 문학의 전형이라고 한다면 이상의 경우는 가장 그 특징의 선두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서 민족 내부의 삶을 나누어 가지는 외상도 일제에 대한 정치적 갈등도 또는 일제하의 사회 현실에 대한 현실 설정이 불가능한 채 일본어와 건축 물리 분야의 외국어 차용의 취미가 곧 모더니즘의 조건이 되었다.

그는 민족어로서의 국어에 대한 문학의 궁극의 명제를 가지지 않고 도리어 그런 무거운 짐으로부터 벗어난 모더니티만이 시간적으로 그의 문학을 가장 앞선 것이라는 자기 도취에만 전념한 것이다.

사람이란 그가 사는 시대가 뒤떨어진 시대일 때는 그 뒤떨어진 상태에 그 자신의 의식의 기점을 두고 그 시대를 정당하게 극복하는 조건을 얻게 된다. 그런 경우 이상은 그의 시대와 사회를 그가 만들고 있는 독단적인 문학 밖으로 방기해 버린 범죄가 남겨진다. 여기에서 이상은 이상과 만나는 사람들에게 상황과 역사를 마취시킨  근대 문학의 한 문예주의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문학은 이제야 겨우 정리된 실정에 있다. 이상 문학은 이른바 문학의 초기 단계의 문학적 징후에 체험되는 첫걸음이 되며 그것이 우리에게 이상의 원죄와의 동질화라는 함정에 빠지게 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문학의 모델 개선으로 이상을 만나고 있으나 이러한 이상 체험자들은 다시 이상에게 돌아가는 일이란 없다. 여기에서 그가 우리 문학에 대한 회의적 원천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 문학의 장기화는 결국 이상 문학의 무효화에 기여하는 사실을 우리는 문학의 진정한 사회적 책임 앞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어떤 뜻에서 그는 바로 이러한 무효화된 문학의 비밀에 그의 진실이 담겨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한 슬픈, 젊은 문학인에게 지나친 기대와 짐을 강요할 필요는 없다. 이광수이래 한국의 식민지 작가 또는 근대 작가의 특질이 현실을 감당하고 역사를 발전하는 주체의 운동으로 인식하며 문학을 문학의 밖, 비문학의 곳에 실천적으로 확대시키는 일을 할 수 없는 데 있다. 기껏해야 연애나 몇 번 하는 것 방랑하는 것 따위로  문학적 체험을 장식해 온 터이다. 이상은 그의 숙명적인 폐병, 조루증과 성기능 퇴화가 그의 문학을 만들어 낼 때의 신체 의학적인 절실성을 가지고 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전형적인 서울 사람, 중인 계층이라는 사실이 선대 문학, 토착 문학의 지방적 체질을 가지지 못하는 조건이 되어서 민족의 밑바닥으로부터 말을 굴착하지 못하고 바로 근대 의식의 중심지에서 그 의식으로 호도되고 만 사실도 지적되어야 한다. 그에게는 자연도 없으며, 어쩌다가 부닥친 자연으로서의 시골 녹음의 녹색에 절망하는 실태밖에 없을 경우 그에게는 전래하는 자연 사상의 폐습조차도 틈입할 기회가 없었다.

여기에 '최후의 모더니스트' 이상의 최초적 반자연적 문학이 발생한 것이다. 그는 최소한 자연 발생적으로 자연에 귀속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내면적 증상에 귀화한 최초의 근대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箱)은 부정과 더불어 시작된 현대 문학과 현대인을 성찰함에 있어서 동시대적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작가다. 이것은 그의 작품이 문학사적 의의를 넘어서는 것임을 말해준다.

라고 정명환의 <부정과 생성>이 기술한 일은 바로 이러한 이상의 문학 외적 진동폭에 대한 이해인 것 같다.

이상은 여기서부터, 그에게 민족 또는 역사에 대한 무의식 상태와 함께 자연이나 사회의 기존 가치들로부터 독립된다. 그 독립이란 물론 변증법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관념적 이미지적 유희 안에서 습관의 영광을 이루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상의 뒤떨어지지 않기 위한 문학이라는, 식민지 세속 사회의 어떤 호응과도 절연된 그의 실험 문학을 정당화시키기에는 그의 문학이 당대에 이해되지 않았던 것 이상으로 모자라고 있다.

이를테면 문화 이식사적(利殖史的)인 측면을 강조할 경우 근대화, 또는 근대라는 개념들은 중국.베트남 그리고 우리에게는 아시아 정체 사회가 받은 크나큰 서구 침략주의의 충격을 내포하고 있으며 아시아 여러 나라가 식민지 정책에 의한 근대화 과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므로 그 근대화 과정 자체가 식민지 정착화, 영구화를 목적으로 하는 타율적인 원칙이 숨겨져 있게 된다. 근대화란 결국 식민지화다라는 부정적인 반응이 그러므로 지나친 것만은 아니다. 이상의 모더니즘은 바로 이러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모든 문학 내용에는 민족 단위의 고민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으며 아직까지도 한말 이래의 항일 운동이 완전히 절멸된 것은 아닌 1930년대에 이상은 철저하게 일본화된 것이다. 여기에서나 그의 중인 계층의 기질이 드러나는 슬픔이 있다. 중인이란 간단히 말하면 아전 떨거지다. 기회주의 현실주의 실지에 민감한 델리커시가 부류임은 말할 것도 없다. 꼭 이상을 거기에 조합시키려는 것은 아니나 그에게 있어서는 유교 정치 5백 년의 어떤 양반적 위의도 전래적인 불교의 무상감이나 관용도 보이지 않고 서울 중인으로서의 한계가 잘 드러난 것은 사실이다.

문학은 문학에 깊이 간여함에 따라 민족 및 민족적 특수성에 대한 편집을 해소하는 보편성을 지향한다. 특수성과 보편성은 결코 대립 개념이 되어서는 안 되며 그것은 서로 보완하는 가치의 경험 내용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말을 빼앗겨 가고 글을 불온한 기록으로 인식해야 하는 일제 시대의 사회에서 이상은 그가 속해 있는 식민지 사회의 전체상으로서의 비극을 한 번도 정면으로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에게 있어서 절실한 문학의 방법이 찾아지지 못한 것이라는 귀결에 이른다.

그의 절망은 아마도 그의 삶을 좀먹어 가고 있기는 했으나 감미로우며 가장 편안한 절망이었을 것이다.

모더니스트로서의 문학적 예술적 선진은, 진정한 근대적 자아의 발견이 반봉건.반외세.반제라는 원칙적 명제와 함께 출발해야 한다. 그러나 이상은 후자의 고난으로부터 도피하여 전자의 비현실적 자기 정체 안의 누에고치로 존재한 것이다.

아마도 그의 동시대에 그와 함께 술을 마셨거나, 그와 함께 몇 마디 말을 한 사람들은 추억의 미화를 통해서 그가 참 좋은 사람이라고 얘기하고 그가 천재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무책임한 회고는 어떤 이름 없는 사기꾼이나 변호사법 위반자의 회고에도 그대로 해당할 뿐이다.

이상은 절대로 '천재'일 뿐이지 괄호가 벗겨진 뒤의 천재는 아니다. 그를 그의 유가족 부스러기들이 도덕적으로 모범화시키려 들지만 그의 짧은 삶은 철저하게 부도덕하며 퇴폐적이다. 이 말은 단순한 품행 문제가 아니다.

이상은 끝내 이상(異常)이라는 동음의 다른 뜻을 남겼다. <이상한 가역 반응>이라는 그의 시 이름은 어떤 뜻에서 그 자신에 대한 단서를 표시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이상한 사람일 뿐 아니라 병든 사람이다. 그것은 그가 폐결핵 환자였다는 것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상 문학은 근본적으로 병자의 문학이다. 그 자신의 폐병은 그의 삶을 파괴하기는 했으나 그의 병든 문학을 뒷받침하는 조건이 되었으며 도리어 그가 그렇게나마 살게 한 의지를 이루고 있다. 동시에 그의 어떻게 보면 화려하며 음습한 것 같으나 실지로는 아무런 매혹거리도 아닌 몇 개의 여성 편력도 그가 외부와의 단절을 시도하는 수단이다. 도구로 쓰여진 것이다. 이상에게 있어서 여자는 기구였다. 그런 기구로 자기 자신을 외부와 차단시켰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건전한 부부 관계나 영부인적인 아내보다는 비정상적인 여자, 창녀, 여급 따위의 여자가 훨씬 그의 비현실 반사회의 삶에는 적격자가 되는 셈이다.

이상 문학은 필자의 의견으로는 일종의 의식이 깔려 있는 아동 문학이라고 본다. 그것은 현대 한국 문학사가 이상 문학에 너무 방대한 중요항을 설정한 것까지도 크게 반성해야 하는 의도까지 포함된다. 20대의 문학이란 랭보니 뭐니 해서 떠들어대지만 철저하게 미완성의 것이며 유치한 것이다. 이상의 조숙.조로 현상 역시 완숙이나 노숙과는 다른 아동 또는 청소년으로서의 그것일 뿐이다.

그가 육중하고 현학적인 서술의 재능을 발휘하고 그의 복합적인 관념의 차조어(借造語)들의 진술.묘사에 압도당할 만하더라도 그것들의 정체는 유치한 것에 그 기반을 두고 있음을 알게 된다.

다만 이상은, 그가 없는 1930년대, 그가 없는 현대 문학사를 생각할 때, 그 과정 안의 구체적인 한 기원이 없어진다는 공허감 때문에 놓칠 수 없는 문학인이다. 여기에 그가 한국 문학에서의 불가결의 작가가 된다. 이런 실감은 그가 남긴 논 미니트<未完成>로서의 매혹, 에스키스라고 밖에 말할 도리가 없는 생생한 삶의 파편과 이삭이 풍기는 이상한 자력 그리고 그의 분열증이 이루는 끈적끈적한 삶의 파멸 따위가 반 이상 문화의 어떤 모서리에서도 그를 침몰시킬 수 없는 것이다.

이상 문학 총 1백 30편의 시.소설.산문들은 아직까지 그것을, 문학의 마지막 비평인 문학사의 대상으로 지속시킬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 문학은 이상 이후 어떤 문학의 새로운 '이후(以後)'도 완벽하게 설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위대해서 그의 문학이 중단된 이래 깊은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그의 문학에 대한 지나친 허장성세의 관심밖에는 그의 문학이 진정한 한국 문학 내부에의 기여가 없기 때문이다.

오해와 편견은 이상 쪽에도 있었으나 그를 보는 우리에게 더 많이 후진 사회의 의식으로 작용했다. 그를 추앙하는 1950년대적인 치정(癡情) 역시 오늘날에도 그대로 남겨져 있다. 이상 문학상이라는 게 제정되고 그 상을 받은 사람이 시상이라는 이름 때문에 영예스럽다고 고백할 정도인 것이다.

이상은 양파 껍질을 자꾸 벗기는 것을 말한 적이 있다. 그것을 그에게 적용하면 이상 문학이란 결국 양파 껍질을 하나하나 벗겨가다 보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는 실감과 똑같은 것이다. 여기에 이상의 허망한 공동(空洞)이 그의 폐 침윤에서 보여진 허파의 구멍처럼 뚜렷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의 중요성은, 문학이 문학인의 것만으로 되며 문학이 모든 비문학의 대상이 아니라 문예주의적인 것만의 대상으로 오도된 식민지 문학 안에서의 진실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이상은 식민지 문학의 행운을 통해서 가장 잘 발달한 자유의 함정을 가지고 있다.

그가 일본 동경에 가서 일본 경찰에 구금된 일이 있고 그로 인해서 병사한 사실을 어떤 사람들은 그를 민족적 명분에 반영시키려 하고 그가 마치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떠들어대고 있으나 전혀 그렇지 않다. 작소(鵲巢)라는 그의 별명처럼 봉두난발을 하고 껄렁껄렁 드나드는 괴상한 한 젊은이를 상투적인 경찰의 눈으로 본다면 틀림없는 어떤 피의(被疑)가 들씌워질 수 있는 대상이며 더구나 조선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는 틀림없는 '불령 선인(不逞鮮人)'으로 도매금이 먹여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마지막 남긴 말이 레먼 향기 어쩌고 저쩌고였다. 이 따위 유치한 사치 따위보다 차라리 '어머니!' '이 금홍이년아!' 따위가 참다운 것이다. 그의 삶이 현학적이었던 것처럼 그의 죽음 역시 어린아이처럼 현학적이었다.

이리하여 나의 종생(終生)은 끝났으되 나의 종생어(終生語)는 끝나지 않는다.

그의 '종생기'의 이 절어는 이상 문학이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예시하고 있음직하다. 그것은 이상에 대한 많은 오류를 지양하고 그의 문학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역사 비평적 과제 앞에서 이상이 더 많은 희생물이 되어져야 하는 의미를 거느리고 있다.

이상은 찬란하도록, 딱하디딱한 사람이다. 그리고 문학이 천재에 의해서 만들어진다고 믿는 봉건 시대의 누습을 폐기하여 사회의 요청을 가장 잘 받아들이는 문학적 양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창조만이 곧 문학임을 알 때 거기에 이상의 허상은 깨끗하게 사라질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상은 우리에게 진실을 밝히는 천재적 자료가 되고 있다.

이상은 그러나 우리에게 끈덕지게 따라다니는 현대 문학의 요괴이다. 이 요괴를 극복하느냐, 그냥 동반하면서 그와 함께 부식되느냐라는 문제는 굳이 여기서 해명할 필요는 없다.

이 해설은 예의상 이상 문학을 위한 해설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이상은 이러한 해설도 마다하지 않을 사람으로서의 다다이스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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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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