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이문열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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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를 위하여
베끼기의 문화적 의미
김  현

 

 

「황제(皇帝)를 위하여」는 이문열(李文烈)의 가장 중요한, 그리고 가장 좋은 소설이다. 그것은 이문열의 무의식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통적 문화에 대한 회귀욕망과 거부의지 사이의 섬세하지만 치열한 싸움의 무의식적 결과이다. 그는 전통적 문화에 회귀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려 하지만, 그의 소설은 그것을 부정적으로 비판한다.「황제를 위하여」는 일종의 모순의 소산이다.

 「황제를 위하여」에서 옹호되고 있는 것은 도교계통의 신앙(p.17), 낡은 노장의 답습 혹은 동양적이고 소박한 아노키즘(p.341)이다. 정감록은 그것의 한 표현이다.「황제를 위하여」는 그 신앙을 사는 한 인물의 이야기이다. 그는 1895년에 태어나 1972년에 죽은 인물로서, 정감록에 나오는 정진인이 바로 자기라고 믿고 산, 약간 이상한 사람이다. 그는 정감록에 예언된 대로 이씨 왕조가 망하면 정씨 왕조가 올 것으로 믿었고, 실제로 남조선이라는 왕국을 계룡산 기슭에 세운다.「황제를 위하여」는 바로 그 남조선 창건주의 일생을 기록한 이야기이다. 모든 창건주의 이야기가 그러하듯, 그것 역시 기이한 탄생, 보조자들의 출현, 싸움, 실패, 싸움, 개국…… 등을 그 기능단위로 갖고 있다. 그 인물은 남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운 사람이지만, 그가 난 때는 을미사변(1895)에서 1972년에 이르는 시기이며, 그가 산 곳은 계룡산 근방의 백석리(白石里)이다. 그것은 그가 현실의 땅에서 환상의 나라를 세운 미치광이임을 입증한다.

  정상적인 사람이 현실의 땅에 환상의 나라를 세울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다. 그가 얼마만큼 비정상적인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은,「황제를 위하여」에서 뛰어나게 흥미로운 부분들, 예를 들어, 기차를 처음 봤을 때의 그의 반응, 주막에서 돈을 털릴 때의 그의 유장함, 그리고 바가야로 사건, 젊은 대위 사건 등에 재미있게 묘사되어 있다. 그만의 비정상적인 사람인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이 나라를 세운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이 비정상적인 사람이다. 미숙아, 우발산, 방량, 신기죽, 두충, 변박유‥‥‥등은 범법자, 사기꾼, 몽상가, 반편, 알콜 중독자, 미치광이 등이다. 황제와 그의 보조자들은 현실내의 뿌리박은 사람들이 아니라, 현실의 변두리를 떠돌아다니는 떠돌이들이다. 그들이 현실과 부딪칠 때, 그들은 현실적인 척도에서 실패하지만, 그 실패를 통해 그들은 더 굳건한 환상의 나라를 세운다. 그리고 그 환상의 나라의 맨 윗자리에 황제가 자리잡고 있다. 그는 반 혹은 비―현실적인 사람이지만, 그 마음만은 깨끗하고 거룩한 사람이다

  그의 깨끗함과 거룩함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문열은 그의 거룩함과 깨끗함의 근거로서, 과학의 합리를 미신이라고 믿고, 초자연적 직관을 논리라고 믿는 그의 마음됨을 지적하고, 그 실천의 논리로, 제왕의 도와 노장의 무위를 들고 있다. 거룩함과 깨끗함은 비 세속적인, 성스러운 것에 속한다. 그 성스러움은 합리주의자들의 과학이나 합리에 의해 설명될 수 없다. 그것은 느낌의 대상이지 설명의 대상은 아니다. 그 성스러움을 보장하는 것이 초자연적 직관이며, 그 직관은 성스러운 물건, 책, 사람들의 예언의 틀 안에서의 직관이다. 예측가능성이 과학이라면 그 직관 역시 과학이다. 그 과학은 실험보다는 의례를 존중하는 과학이다. 예언은 가설보다 훨씬 확고한 믿음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예언은 완성하기 위한 황제의 노력, 예를 들어 예언서에 맞춰 기병하고, 예언서에 맞춰 장수들의 성을 내리는 것 따위는, 성스러움에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려는 황제의 의도의 반영이다. 그 의식을 통해 성스러움은 완성된다. 그 의례가 바로 제왕의 도이며, 노장의 무위이다. 그것은 억지를 배제하고 자연스러움을 숭앙한다. 제왕의 칼은 하늘을 칼등으로 삼고 땅을 칼날로 삼으며 만백성을 칼자루로 삼으며, 황제의 진정한 나라는 육신에 구애되지 않은 드높은 정신 속에 있다. 가장 극진한 제왕의 도는 다스림이 없는 도이며, 가장 도저한 무위는 하고자 함이 없는 무위이다. 요순과 노장은 황제의 정신적 이상이다.

  황제의 그 도저한 정신주의를,「황제를 위하여」의 화자는, 처음에는, 일견 황당무계하지만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것으로 생각하다가, 나중에는, 모든 정신적 체제를 부정하는 정신적 힘으로 긍정한다. 화자 역시 황제의 정신주의에 은연중에 감염된 셈이며, 그 감염이 그로 하여금 황제의 일생을 재구성하게 만든다. 황제의 정신주의에 화자가 공명하기에 이르는 것은, 현실에서 느끼는 위기의식에서 벗어날 길을 찾아야 한다는 마음의 움직임에 그가 저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제를 위하여」의 화자가 황제의 일대기에 접하게 된 과정은 오래된 이야기들의 변형이다. 잡지사 기자인 그는

   계룡산에 취재를 간다.

   한 노인을 만나 백제실록(百濟實錄)을 본다

   노인은 죽고 실록도 찾을 수 없다.

   기억을 살려 옮겨 쓴다.

그 과정은, 책을 읽고 그것을 옮겨 쓴다, 라는 옛 이야기들의 서두의 변형이다. 그 잡지사 기자의 옮겨 씀은, 그대로 베낌이 아니라, 자기―식으로―고쳐―베낌이다. 베낌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그대로 베끼는 것인데, 그대로 베낄 경우, 원본과 복사 본 사이에는 유형화 혹은 양식화의 관계가 이룩된다. 원본의 문체나 내용을 그대로 베끼면 하나의 유형, 양식이 생겨난다. 자기―식으로―베낌은 그대로 베낌과 달리, 원본에 대한 비판, 반성, 성찰을 전제한다. 원본과 복사 편 사이에는 거리가 생기고, 그 거리 때문에, 공감, 야유, 풍자 등의 심리적 움직임이 나타난다. 그 움직임이 바로 해석이라고 불리 우는 행위이다.

  그 잡지사 기자가 본 것은 백제실록이다. 실록이란, 한글학회의 큰사전에 의하면, 사체(史體)의 한 이름으로, 한 임금의 재위한 동안(사전의 문체치고는 너무 어색한 문체이다 ! )의 정령(政令) 기타 모든 사실의 기록이다. 백제실록은 백제가 죽은 뒤에 편찬한 그의 실록이다. 그 실록을, 그는 실록을 찾을 수 없어 연의(演義) 형식으로 고쳐 베낀다. 연의란, 다시 한번 한글학회 큰사전에 의하면, 사실의 뜻을 부연하여 설명함을 뜻한다. 그가 연의 형식으로 실록을 고쳐 베꼈다 함은 그가 실록의 사실들을 그 나름대로 부연하여 설명함을 뜻한다. 백제실록은 삼국지연의의 톤으로 번역된다. 그 베낌은 삼중적이다. 왜냐하면,  황제는 비기 들의 예언을 고쳐 베껴 자신의 삶을 만들었으며,  실록은 그의 삶을 실록에 맞게 고쳐 베꼈으며,  기자는 그 실록을 다시 고쳐 베꼈기 때문이다. 베낌은 베낌을 낳고, 그 베낌은 또 새로운 베낌을 낳는다. 해석은 해석을 낳고, 그 해석은 또 새로운 해석을 낳는다. 베낌―해석은, 말 하나라도 그 사람의 이데올로기를 표현한다는 말이 옳다면, 해석자의 이데올로기의 표현이다.

  황제의 삶은 베끼기의 삶이다. 그가 베낀 삶은 제왕의 삶이다. 그 삶은 자연이 그의 나타남을 알리고, 신민이 그의 나타남을 반기는 그런 삶이다. 그는 인의를 주로 하는 삶을 배워 익힌다. 그 익힘을 이끌고 나가는 것은 그의 아버지이다. 그는 그의 아버지의 가르침을 뛰어넘어, 스스로 제왕임을 드러낸다. 그 드러냄은 언제나 고사에 의거한 드러냄이다. 그의 삶의 원본은 옛 제왕들의 삶이며, 그는 그 삶들의 새로운 배합이다. 그 원본을 가르쳐준 것은 물론 옛 성현들의 글이다. 글을 통해 그는 제왕의 도를 익히고, 아니 기억하고, 그의 삶을 통해 그것을 고쳐 베낀다. 그 고쳐―베낌의 과정에는 주저, 망설임이 없다. 그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제왕의 삶을 산다. 그는 모델의 삶을 베껴 산다. 그 베낌은 한결같다. 그 한결같음이 그의 사람됨의 크기이다. 그 한결같은 베낌이 허황되다 하더라도 그의 베낌은 진지하고 성실하다. 그의 삶에는 오차가 없다. 모든 것은 비기에 미리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해석이 틀릴 수는 있지만, 그의 삶이 예언되어 있지 아니할 수는 없다. 그는 만날 사람을 만나고, 살 삶을 살게 되어 있다. 그는 황제다. 그는 덕치와 인의의 황제다. 그의 유일한 결함은 민주주의를 이해 못한 것이다. 이해 못했다 라는 표현은 옮지 않다. 그는 민주주의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황제가 어찌 민주주의를 이해할 수 있으랴! 그에게 있어서, 백성이란 언제나 우매한 백성이며, 그래서 인민을 위한 나라는 있지만, 인민의 나라, 인민에 의한 나라는 있을 수가 없다. 제왕은 하늘이 내는 것이며, 하늘의 밝음보다 밝은 것은 없는 것이다.

  실록의 베낌은 치자의 덕치와 인의를 드러내고, 관리들의 충성됨을 드러내는 베낌이다. 실록은 황제의 황제됨을 드러낼 뿐 아니라, 수많은 충신들의 행적을 적고 있다. 황제에게 충성되지 못한 자는, 그 공이 아무리 크더라도 적게, 소략하게 기록된다. 실록의 원본은 수많은 실록들이며, 백제실록은 그 실록들의 고쳐―베낌이다. 그 고쳐―베낌의 원리는 장엄함, 위대함이다. 황제와 관련된 모든 것은 장엄하고 위대해야 한다. 실록의 문장이 웅장 유려한 것은 그것 때문이다. 황제는 위대한 분이며, 백성은 그 황제를 무조건 뒤따라야 한다. 우발산, 신기죽, 두충, 변약유, 등의 충성은, 위대함/뒤따름의 멋진 예이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러나 반드시 위해하고 장엄하지는 않다. 실록은 그것들에 무관심하다. 실록은 백성들에게 관계 있는 것이 아니라 황제에게 관계 있기 때문이다.

  황제의 실록의 베낌은 말의 엄밀한 의미에서 고쳐―베낌이 아니다. 그것은 사실은 그대로―베낌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대로―고쳐―베낌이다. 그와 그의 충신들의 삶은 유형화된 삶이기 때문이다. 말의 엄정한 의미에서 고쳐―베낌은 화자의 고쳐―베낌이다. 화자는 실록을 연의로 고쳐 베낀다. 그는 실록을 새롭게 설명하고 해석한다. 그 설명과 해석은 합리주의적 설명·해석이다. 그 합리주의자의 설명에 의해,

   황제의 삶은 미치광이의 삶이지만, 그 삶의 어떤 부분은 깨끗하고 아름답다.

   실록의 삶은 봉건적인 삶이지만, 그 삶의 어떤 부분은 설득력을 갖고 있다.

는 것이 설득력 있게 드러난다. 황제의 삶은 과거 지향적인 삶이지만, 그의 이상은 덕치와 인의이므로, 그의 삶의 어느 부분, 가령 백성을 위해 재산을 아낌없이 내놓는 부분 같은 것은, 깨끗하고 아름답다. 충성을 요구하는 그의 태도를 통해, 공산주의와 불교, 기독교, 그리고 현대적인 삶의 허실이 어느 정도는 드러난다. 그에 의하면, 공산주의는 허자(許子)의 아류로서, 거기에도 치자와 피치자의 구별이 없을 수가 없다고, 공산주의의 이상보다는 공산주의의 실천의 허점을 지적한다. 예수의 사랑은 사람을 약하게 만들며, 부처의 자비는 사람들 분별없고 어찌할 바 모르게 한다고 지적할 때, 그는 유가의 전통 속에 서 있다. 그것은, 황제가 젊은이들의 잡스런 가무음곡에 대노하는 장면에서 절정에 달한다. 실록의 삶 역시 과거 지향적 삶인데, 그것은 마숙아―황제, 김광국―황제 등의 관계 속에 긍정적으로 표출되어 있다. 신기죽, 변약유, 두충 등과 황제의 관계는 부정적인 맹목적 충성이지만, 마숙아, 김광국의 충성은 의리, 신의에 기반을 둔 긍정적 충성이다. 화자의 베껴―씀을 통해, 황제의 깨끗한 삶, 신하들의 충직한 삶이, 삶의 한 덕목으로 제시된다. 그 삶을 우리가 다시 살 수 있을까? 아니 그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일까? 그러므로 화자가 실록을 고쳐―베낀 것은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이다.

  화자는 실록을 연의로 베끼지만, 그 베낌의 톤은 전후가 다르다. 황제의 탄생에서 개국에 이르는 부분과 그 후부터 죽음에 이르는 부분의 톤은, 그 자신의 용어를 빌리면, 연의와 소설의 톤으로 확연히 갈라진다. 연의의 톤은 사실을 기이함과 결부시켜 서술하는데서 얻어진다. 화자는 연의와 장회소설을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실제의 톤은 다르다(엄격하게 따지자면, 연의는 내용상의 분류이며 장회소설은 형식상의 분류이다.). 연의에서 사실은 기이함과 결부되어 황제의 시대착오적 성격이 두드러진다. 그 결과, 독자는 연의에서는 시대착오적 정신의 아름다움을 느끼지만, 소설에서는 시대착오적 정신의 안타까움 움직임을 목도한다. 이야기의 흐름만을 따라가자면, 연의에서는, 황제의 이상이 실현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이 가능성으로 항상 남아있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가능성이 거의 엿보이지 않는다. 가능성의 유무가「황제를 위하여」의 전후의 톤을 바꿔놓은 것이다. 그 다음, 화자의 입장을 따라가자면, 화자는 황제를 긍정적으로 따라가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황제의 이상의 시대착오적인 측면과 더 세게 부딪치게 되어, 그 따라감을 포기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그는 동조자에게 이야기꾼으로 그때 변신하여, 장회소설의 흉내를 내, 그 뒤의 일을 알고 싶거든, 다시 다음 회를 기대하시라라고 너스레를 떤다. 그 너스레가, 아니 차라리 그 모순이「황제를 위하여」에 큰 활력을 부여한다. 한 기인의 정신적 편력은, 시대 현실에 대한 부정적―왜냐하면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비판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어, 현실에서의 그것의 의미를 반성할 수 있게 한다. 그의 기행은 단순한 기행이 아니라, 현실 비판적인 기행이 된다. 그의 기행을 통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비판할 수 없는 것들이 신랄하게 비판된다. 그 신랄함은 포복절도할 정도의 본능적인 웃음을 유발시킨다. 바가 야로 사건과 같은 전반부의 기행이 연민 섞인 웃음을 자아낸다면, 맥아더에게 주식을 내리고, 젊은 대위를 쫓아다니며, 젊은이들을 치죄하는 장면에서의 기행은, 바흐찐이 사육제의 웃음(le rire carnaval-esque)이라고 부른, 민중의 힘있는 웃음을 유발시킨다. 그 웃음은 공식문화 내에서는 터트릴 수 없는 대중민중문화의 웃음이다. 그것은 우직해서 앞뒤를 재지 않는 사람만이 터트리게 할 수 있는 웃음이다. 그것은 기괴한 웃음이지만, 생명력의 밑바탕과 결부된 웃음이다.

  황제의 기행이 우직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의 행동이 자기 안에 갇혀 있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사람의 생각, 표현까지도 모르는 체한다. 그 모르는 체함은 자기의 주장을 더욱 강하게 느끼게 하기 위해서이다. 가령, 맑시즘에 대해, 그는〈맑시즘이란 말오줌인지 내 알 바 아니지만〉운운하면서 맑시즘에 대해 말하는 사람의 말문을 막고, 재즈에 대해,〔자지라니〕,〈그 음이 어찌 이리 잡상스럽소? 〉라고 의뭉스럽게 묻는다. 그 모르는 체함, 의뭉스러움이 그 기괴한 웃음을 낳게 한다.

  황제의 우직함―의뭉스러움에 비교할 수 있는 인물이 있다면, 그는 돈키호테. 황제와 돈 키호테 여러 의미에서 비슷하다. 그것들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그들은 책을 읽고 미친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들의 대의를 펴기 위해 편력한다.

   그들에게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약간 미친 보조자들이 있다.

   그들은 미치광이이다. 그들은 사라진 것(달성할 수 없는 것)을 삶으로 산다.

   그들의 미치광이 짓은 웃음을 유발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황제를 위하여」는 실록과 「돈 키호테」를 고쳐 쓴 소설이다.

  「돈 키호테」와 마찬가지로, 「황제를 위하여」에도, 이야기에 이상한 곳이 서너 군데 있다. 두 개의 예만 들면,

   황제는 만주에서 척대인의 도움을 받아 동장을 일으킨다. 척대인의 척가장에서 동쪽으로 삼십리쯤 가면 수백 리에 걸쳐 놀고 있는 땅이 있는데, 척대인은 황제에게 그 땅을, 십 년 동안은 무료, 십 년 후에는 수확을 넷으로 나눠, 둘은 경작자가 갖고 둘은 그들이 나눠 갖는다는 조건으로 빌려준다. 그런데 육 연도 되지 않아, 황제를 제치고 척대인과 직접 선을 대보려는 소작인들이 생겼다고 화자는 기록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황제에게 바치는 사 분의 일 소작료가 처음과 달리 공연한 낭비로 느껴진 것이다. 라는 화자의 설명이다. 그 설명은 약간 이상하다. 황제는 척대인에게 십 년 동안은 지대를 물지 않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느는 10년간은 수확의 반을 차지 할 수 있다.

   만주에 어느 정도 기반을 잡자, 황제는 집안 사람들을 동장으로 불러모은다. 그때 온 그의 아이들은 셋이다. 첫째는 공산주의자가 되어 그를 떠나고, 둘째는 일본에 건너가 밀수꾼 이 된다. 그러나 셋째는 처음 나타나는 장면에만 나오고 그 뒤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셋째는 황제와 부인 사이의 소생이 아니라, 그의 신하 우발 산과 그의 부인의 사이에 난 아이지만, 그가 자기 아들로 인정한 이상, 그의 아들이다. 그 셋째에 대해, 그토록 마음이 너그러운 황제가, 첫째, 둘째를 다 떠나보낸 이후에도 한 마디 언급 없는 것은, 이야기의 진행이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 아이는 어떻게 됐을까?

  세르반테스는「돈 키호테」후편을 쓰면서, 전편의 이상한 점들에 대해 자세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으나, 이 문열은「황제를 위하여」의 후편을 쓸 수 없는 형편이다. 왜냐하면 황제가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록편찬 자들에게도 실수가 있을 것인데, 어찌 그것을 고쳐 쓴 화자의 이야기에 그것이 없으랴.

  「황제를 위하여」를 뛰어난 소설로 만들고 있는 결정적인 것은 그것의 문체다. 사육제의 문체처럼, 간결하면서도 빠르고, 빠르면서도 유장한 그것의 문체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목들은,「돈 키호테」의 아름다운 대목은 그것이 비판하려 한 기사도소설의 문체를 본뜬 대목이라는 아우얼바하의 지적을 그대로 빌리면, 실록의 한문서술을 흉내낸 곳들이다. 실록의 한문투를 옮겨놓은 대목의 문체는, 서양어를 뒤늦게 배운, 한문수학 세대의 그것에 버금하게 아름답다. 그것은 국정교과서에 실린 몇 개의 글을 상기시킨다. 그것은 그러나 그것들의 감격조의 톤을 거의 갖고 있지 않다. 과장되어 있으되 장엄하고, 장엄하되 설득력 있다. 예를 들어, 처음으로 왜군과 교전하여 패퇴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대목의, 복잡한 현대식 조립 체와 실록번역문체의 대비는, 그 번역문체가 얼마나 웅장유려한가를 분명하게 드러내준다. 화자가 실록을 고쳐 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실록류의 문체―내용에 정통해 있었기 때문이리라.「황제를 위하여」는 제왕의 도와 장자의 무위를 이상으로 제시하는 척하면서,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비판하고 있는 모순의 소설이다. 그것은 이문열이 지금까지 쓴 것 중에서 가장 뛰어난 소설이며, 한국소설이 오래 기억할 만한 소설이다. 그가 베낀 장회소설의 문투를 빌리면, 그 소설이 얼마나 재미있나 알고 싶거든, 빨리 서두부터 읽어가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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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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