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구의 농촌소설
by 송화은율이문구의 농촌소설 - 근대화 속의 농촌 / 김우창
이문구는 그 작가 생활의 처음부터 농촌을 소재로 한 작품을 즐겨 써왔다. 그리하여 이제 그의 적지 않은 농촌 주제의 소설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오늘날의 농촌에 대한 가장 자세한 보고서가 되었다. 처음에 이 보고서는 삽화적이고 따라서 단편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근자에 올수록 이것은 단편성을 벗어나 어떤 총괄적인 관점에로 나아가는 것이 되었다. 「관촌수필」이나 「우리 동네」와 같은 소위 연작 소설이라는 형태로 농촌의 이야기들이 하나의 다발 속에 거두어들여지게 된 것이 바로 이러한 진전의 형식적인 증거이다. 물론 관점의 총괄성이 작품의 질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단 그것이 이문구의 작품을 보다 중요한 시대의 증언이게 하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한 작가의 작품 세계의 심각성은 그 세계가 사람의 삶에 대하여 얼마나 포괄적인 넓이를 가지고 열려 있느냐에 비례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인 만큼 궁극적으 문학 세계의 포괄성은 문학의 깊이와 넓이에도 보탬이 될 수밖에 없다. 사실 이문구의 농촌 보고서가 포괄적이라면 그것은 단순히 사실적 충실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소설의 포괄성은 한편으로는 외면적 사실을 넘어서는 삶의 구체적 다양성을 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삶에 대한 직관적 공감의 넓이를 말한다. 이문구의 소설들이 얻고 있는 것은 그것 나름으로 이러한 포괄성이다. 그리고 우리가 농촌의 문제를 생각할 때 또는 우리 사회의 오늘과 내일을 생각할 때 이것은 빼놓을 수 없는 준거점이 되어 마땅한 것이다.
1970년대 농촌의 현실에 대한 이문구의 탐구는 「우리 동네」연작을 중심으로 한 주로 근자의 작품들에서 그 전체 모습을 살필 수 있다. 1970년대 이전의 농촌에 대한 소설도 많지만. 그것들은 1970년대의 이야기처럼 집중적이고 포괄적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는다. 이것은 개인적인 관심의 우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1970년대가 우리 농촌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 시기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는 그 얼마 전부터 불던 근대화의 바람이 우리 사회의 곳곳에 침투하여 사회 생활의 질을 전적으로 변화시킨 시대였다. 이러한 근대화의 움직임은 농촌에도 하나의 고비를 넘어선 듯한 변모를 가지고 왔다.
모든 문명의 발달은 농촌에 대하여 매우 착잡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소위 문명이란 대체로 도시 생활의 편의나 문화 또는 제도의 복합화를 의미하고 이러한 복합화는 근본적으로 인간 생존의 기본을 이루고 있는 농업 생산의 잉여의 도시 이동을 요구한다. 이때 농촌은 불공평한 이동 과정의 희생이 되기 쉽다. 특히 정치. 경제, 문화의 주체적 결정권을 상실한 농촌의 경우 이러한 불공평한 관계는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불공평한 관계는 사회적, 경제적 변화를 통하여 무작위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고, 또는 정치적으로 강요될 수도 있다. 우리나라 농촌의 경우 1960년대. 1970년대의 변화는 자본주의적 근대화와 그것을 촉진하는 정책적 결정이 가져온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그 궁극적인 의미가 무엇이든지 간에, 적어도 1970년대까지의 농촌 현실로 보아서는, 많은 부정적인 부작용을 낳는 방향으로, 농촌의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심화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근자의 농촌문학을 논하는 글에서 염무웅은 일본, 인도, 이집트 등의 예를 언급하면서 자본주의적 근대화가 어느 경우에서나 농촌의 희생을 강요했다는 점을 말하고 있지만, 1970년대 농촌의 의미는 사실 이러한 관점에서 파악되는 것이 옳은 것으로 보인다. 이 관점은 적어도 이문구가 그리고 있는 농촌의 현실을 설명해 주고 또는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농민들의 상황 판단의 근본이 되어 있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농촌문제의 핵심은 그 원인이야 어디에 있었든, 가난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70년대 농촌에서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가난--가령 1960년대만 해도 존재하던, 이문구 자신이 묘사한 바 있는 <해마다 양식은 세 안에 떨어지고, 풋보리 잡아 찧고 말려, 가루 내어 죽 쑤어 먹을 때까지는 산나물, 들나물로만 연명……>하던 식의 가난의 힘은 많이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절대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상대적이라는 성격을 띠게 된 면이 있기는 하지만, 빈곤은 여전히 농촌의 문제로 남아 있다. 그러면서 그것은 그 조건 속에서 사는 사람에게는 옛날에 못지 않게 가혹한, 적어도 안정된 생활양식과 정신상태를 위협한다는 점에서는 더욱 부정적인 문제로 탈바꿈하여 나타난다. 전통사회의 빈곤은 흔히 외적인 제약조건으로 옳든 그르든 하나의 운명으로 정착하고 하나의 안정된 테두리로 작용하여 어느 정도까지는 좋든 나쁘든 그 나름의 일정한 생존환경을 보존하여 준다. 그러나 근대화는 순전히 그것이 가져오는 사회 변화의 속도만으로도 빈곤으로부터 그 운명성을 제거해 버리고. 한편으로는 소비문화의 유혹을 통하여 빈곤을 깊은 내적인 불행으로 정착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늘 새롭게 정의되면서 궁극적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빈곤을 강요함으로써 삶의 질서의 정당성을 앗아가 버린다. 그리하여 순전히 물질주의적인 세계관에 입각한 근대화가 정의하는 빈곤은 역설적으로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질서 전반의 문제가 된다. 순전히 물량적인 관점에 선 외면적인 접근이 근대화하는 사회에서의 빈곤의 문제를 그릇되게 파악하는 이유의 하나가 이 점을 잘못 보는 데 있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이러한 빈곤의 문제는 소설적 접근에 의하여 비로소 바르게 조명될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문구가 그의 연작소설들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명제의 정당성이다. 이문구의 농촌보고는 객관적인 숫자로 제시될 수 있는 농촌의 빈곤상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의 진단으로는 이 빈곤은 공평치 못한 발전정책에 원인한다. 그러나 그의 소설은 이러한 사실에 대한 사실적인 보고서가 아니다.(또 이러한 보고서의 작성이 작가가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작업일 수도 없다.)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농민들의 생활의 전폭적인 구도에 일어나는 변화이다.
물론 이문구의 소설은,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사실적인 제시에 기초해 있다. 근대화가 강요하는 희생은 단적으로 농산물 가격의 정책적 억제로써 대표된다. 하여튼 「우리 동네」의 주민들의 마음에 이것은 그들의 억압된 상태의 가장 근본적인 지표로 느껴진다. 가령 <이십 년 농민> 리낙천 씨의 경우 그의 수입은 일 년에 쌀 스무 가마 정도이고 이것은 (소설 내의 시가로서) 오십만 원, 그 자신의 말로 중견사원 두 달 월급에 해당하는 것이다.
여기의 리낙천 씨와 같은 경우는 그 농업경영의 영세성에 어려움의 발단이 있다고 하겠지만. 이러한 영세성이 실질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리씨 자신의 비교에서 알 수 있듯이 도시 관리직 종사자의 수입에 대조됨으로써다. 리씨 자신이 더 비교해서 이야기하듯이 문제의 사회적인 맥락은 벼 한 가마의 공판가격이 <제우 연탄 이백 장 값……구두 한 켤레 값……맥주 열 병 값……모래 한 마차 값……먹매 합쳐 들일꾼 사흘 품삯두 채 못> 된다는 데 있다. 이러한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농민도 공산품을 사용하여야 되며 그러한 교환에서 그들이 불리해진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삶의 질서의 정당성에 대한 회의를 낳는다는 점에 있을지도 모른다. 착실한 농사꾼 강만성의 아내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은 불평으로 토로한다.
「농사꾼은 호적 파갖구 물 근너온 의붓 국민인감. 다른 물건은 죄다 맹그는 늠이 기분대루 값을 매기는디 워째서 농사꾼만 나이 긋어준 금에 밑돌어야 혀? 마눌 한 접이 금가면 버리는 푸라스띡 바가지만두 못허니 이래두 갱기찮은겨? 드런 늠덜. 암만 초식장사 제 손 끝에 먹구산다지만 해두 너무헌다구. 꼭 이래야 발전헌다는겨?」
공정성에 대한 회의는 정부의 노풍 피해에 대한 농민들의 반응에서도 볼 수 있다. 농민들의 생각에 매우 부적절한 것이랄 수밖에 없는, 정부 강요의 노풍 품종의 흉작에 대한 피해보상은 다른 산업분야에서의 정책에 대조된다.
「수출 대기업주덜헌티는 대우를 워치기 해주는지 알기나 허남? 신문을 보니께 은행돈 오십억 이상 쓴 회사가 백예순하나구. 제 자본의 삼 배까장 대출받은 회사가 쉰아흡 개나 된다는 겨. 드러. 그런디 그런 회사헌티는 수출액 일 달러, 그렁께 사백팔십 원짜리 일 달러당 구십오 원을 보조해 주구, 사백이십 원에 대해서는 연리 팔, 구부로 융자를 해준다는겨. 그래서 백억 불 수출헐 때까장 기업체에 무상으로 준 돈이 몽땅 월맨고 허니 무려 구천오백억 원이라……」
이러한 근본적인 농공 또는 농상 불균형에 추가해서 농민의 생활을 우울하게 하는 경제적인 조건으로 우리는 고의적이 아닐 망정 결국은 농민에게 그 피해 부담을 안겨주는 경솔한 농업정책의 실수를 들 수 있다. 한때 신문에서도 크게 문제된 바 있는, 노풍이나 통일벼 재배 장려의 시행착오, 축산 장려나 특정 작물의 권장에 모순되는 농산물 해외수입정책--이런 것들이 농민들의 사회질서에 대한 신임을 흔들어 놓는다. 그러나 이러한 신임의 면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어쩌면 일상생활에서의 여러 가지 부조리--손해를 끼칠 뿐만 아니라 인간 생래의 정의감과 위엄에 대한 감각을 흔들어 놓는 여러 가지 부조리라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농협의 운영, 농협을 통한 비료나 농약 공급의 방법, 또는 강제로 시행되는 영농지도--이러한 것들은 농민의 참여의식을 북돋우기보다는 반발을 사는 계기가 된다. 농협의 운영이 보편성을 잃고 비료나 농약이 특수 이익과의 결탁으로 수급의 원활한 조정에 실패한다거나 영농지도에 있어서 관념적으로 보이는 영농교육을 위하여 농민을 부질없이 동원한다거나, 또한 관에서 관이 원하지 않는 품종을 심은 묘판을 짓밟아버리면서까지 신품종을 강요한다거나--이러한 일들은 모두 다 농민의 생활을 괴롭히는 요인들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문제는 국부적인 부조리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모든 것을 위로부터 아래로 하향식으로 처리하는 관의 태도 그 자체가 문제가 된다. 그것 자체가 불신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농민의 자발적인 결정의 자유와 그러한 자유가 뒷받침하는 위엄을 무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동네」의 최씨의 딸의 친구 명순은 공장에서의 쟁의의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냥 경제적인 희생 한 가지였으면 달라졌을 거예요>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농민의 일반적인 곤경에도 그대로 해당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농촌의 어려움이 경제적인 것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고 그것을 포함하면서, 그것보다 훨씬 더 편재하는 시달림의 경험이라는 것은 가령 「우리 동네」 연작 중 「우리 동네 류씨」나 「우리 동네 강씨」에서 중요한 삽화로 이야기되어 있는 사건들에서 잘 볼 수 있다. 전자에서는 서울로 가서 부동산 투기 등을 하여 돈을 번 순이가 고향에 돌아와 자기의 어린 딸이 출연하는, 새마을 선전용 영화를 위하여 동네 사람들을 동원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이질적인 행동에 대한 시기심도 썩인 반발로 하여 동네 사람들의 협조를 얻지 못하자 그녀는 면사무소의 관권에 호소한다.
동네 사람들로서는 며칠에 걸칠 촬영 준비와 스물대여섯 명의 방문객의 접대로 하등 얻을 것이 없지만, 순이에게 동네 사람들의 비협조는 이해할 수 없는 일로밖에 비치지 아니한다. 그것은 <챙피해서두 두 번 다시 이 구석에 발걸음을 말아야>하고 <좋아졌다고 암만 떠들>어도 소용이 없는 낮은 <민도>를 보여주는 일로만 생각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촌것들은 누르면 된다!>는 방편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관의 태도는 물론 동네 사람들의 태도와는 전혀 다르다. 자가용으로 면사무소에 닿은 그녀는 가장 융숭한 대접을 받음은 물론 금일봉까지 선사받는다. 그리하여 그 이튿날 새벽 동네 주민들은 편리한 스피커를 통하여 즉각 동원된다. <관향리 주민 여러분께 공지사항을 말씀드립니다. 오늘은 관향리 비상대청소의 날입니다. 관향리 민방위대원 전원과 예비군 전원은 지금 즉시 작업도구를 지참하고 본 방송실 마당으로 집합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여 온 동네가 동원되는 한편, 촬영반은 생산가에도 못 미치는 보리를 스스로 불질러 태워버린 류씨의 밭에서 트랙터로 밭갈이하는 장면을 찍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류씨가 서투른 서울 운전사의 트랙터에 깔리는 사고로 끝나게 된다. 류씨의 사고는 얼른 보기에는 합리적인 동기가 없이 촬영을 저지해 보려고 한 류씨의 잘못으로 일어나지만, 그것은 합리적 계산에 관계 없이라도 스스로의 것을 지키려는 작은 의지의 표현이 가져온 큰 희생이었다.
관권과 자주성의 대결은 「우리 동네 류씨」의 삽화에서는 비교적 지엽적인 것 또는 우발적인 것이라 할는지 모른다(이러한 지엽적이고 우발적인 시달림의 연속이 오늘의 시대의 삶의 중요한 일면을 이루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동네 강씨」에서 문제는 보다 본질적인 부조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너무 잡다한 소문들이나 삽화의 나열로 하여 산만해지기 쉬운 다른 이야기들에 비하여 이것은 보다 통일된 전개를 보여준다. 그것은 강씨와 다른 농민들이 수매 할당량의 보리를 농협창고에 넣을 때까지의 이야기이다. 정부가 수매하는 보리를 농협창고에 가져가는 과정은 단순한 운반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쥐꼬리만한 권력일 망정 권력을 한껏 휘두르는 관리들과의 갖가지 실랑이를 거치는 끊임없는 작은 투쟁과 신경전의 연쇄이다. 이문구의 농촌생활의 보고가 다 그렇듯이, 이야기의 핵심은 권력남용, 부정, 그러한 일 자체에만 있지 않다. 그가 보여주는 것은 이러한 작은 실랑이들이 어떻게 분노와 좌절을 쌓이게 하여 농촌의 삶 전체를 병들게 하는가를 보여주는 데 있다. 사실 이문구가 그리는 농촌의 삶은 이러한, 작다고 하면 작은 사건들이 만들어내는 끈적끈적한 분노와 좌절의 독기 그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강씨의 아침은 연속적으로 실패한 마늘 농사와 보리 농사로 하여 냉장고를 사겠다는 희망을 빼앗긴 아내의 불만과 함께 시작한다. 한껏 애써 농사한 보리 값은 형편이 없다. 보리쌀 한 되에 커피 한 잔 값인 것이다. 또 이렇게 싼 보리를 탈곡하기는 쉬운가. 현물로 대가를 받게 되어 있는 마을 공동의 탈곡기를 운영하는 기술자는 여간 아쉬운 사정을 해보기 전에는 움직여주지도 않는다. 정부에서 수매하는 보리는 여러 가지 얼크러진 사정을 보아--즉, 얼마나 순순히 농협의 말을 들었느냐 하는 등의 사정을 참작하여 최소한도로 할당된다. 이것은 보리 경작을 하지 않으면 <찍힌다>고 하던 때와는 딴판의 이야기이다. 수입 고기로 인하여 망하게 된 정부 권장의 축산업의 경우나 마찬가지다. 이러한 여러 답답한 사정을 배경으로 하여 보리수매의 사건이 벌어진다. 수매장으로 운반된 보리는 우선 검사원의 장벽을 통과하여야 한다. 검사원의 외양 자체가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비친다. <검사원은 밀알진 얼굴에 잔뜩 지르숙은 것이 먼빛으로 봐도 유의 귀띔대로 만만해 보이지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검사원은 <주변 좋은> 사람의 손으로만 다루어질 수 있다. 동네 이장의 주변으로 이 난관은 별 어려움 없이 통과한다. 다만 수매품의 등수는 3등인데, 이것도 특별한 방법을 쓰기 전에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암시된다. 그 다음 단계는 검사원이 내준 입고증을 가지고 보리를 창고에 넣은 일이다. 강씨와 창고지기가 대화하는 장면은 예사스러운 것이면서도 오늘날의 농촌 또는 만인이 만인의 적이 된 우리 사회의, 숨어 흐르고 있는 긴장과 적의를 실감하게 한다.
「형씨, 우리게서 온 것두 슬슬 들여 쌓봅시다」
강은 어섯만 보고 임의롭게 건넨 말이었다. 얼근한 김에 들떠 시시덕대던 창고지기가 대뜸 자웅눈을 지릅떠 보았다. 보매 허릅숭이 같더니와 달리 발칙스러울 정도로 되바라진 태도였다.
「보지두 않구 늫유?」
창고지기는 모지락스럽게 퉁바리를 놨다. 아무에게나 내대며 막하던 말투였다. 옛날 성질이 반만 살아 있어도 대번 손을 올려 붙이며 어떻게 했겠지만 생각하니 참는 쪽이 어른이었다. 그는 바뀌지 않도록 미리 매끼에 빙과 포장지를 끼워 보람해 둔 보릿가마를 손으로 가리켰다.
「거깃 것은 가마가 허름해서 못 받어유」
창고지기는 가보지도 않고 입에 발린 소리를 했다. 뜻밖에 타짜꾼이 드틴 셈이었다.
하기는 구태여 들여다볼 필요가 없었는지도 몰랐다. 검사가 나기 바쁘게 바로 창고에 들어가고 하여, 그때까지 마당에 처져 있던 것은 서너 부릇, 잘해야 서른 가마도 안 돼 보였던 것이다.
「아따, 쓰던 가마가 다루기두 부드럽디다」
강은 정이 내놓은 것 중에 쓰던 가마가 섞여 있던 것 같아 한번 더 숙어주었지만
「보지유? 쓰던 것이 부드럽게……」
하고 고개를 외로 돌리며 노래까지 읊조리는 데엔 그냥 둘 수가 없었다.
창고지기의 불쾌한 트집은 결국 창고 근처에 서성거리고 있던 관광회사 판매원의 관광 예약을 종용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새마음여성봉사단>이 <실천적 충효사상 갖기> 운동의 일환으로 추진하는 관광사업에 협조하면, 이 관광판매원의 중재로 보리의 입고가 가능해지는 것이었다. 강씨는 결국 이들의 중재를 받지 않고 있다가 비가 오고 보리가 젖게 되자 억지로 가로막는 창고지기를 밀어젖히고 창고에 보리를 들여놓으려 한다. 그때 보리를 실은 경운기에서 떨어진 보릿가마가 그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만다.
그런데 <우리 동네>를 살기 어려운 곳이 되게 하는 것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외적인 원인 때문만은 아니다. 이문구의 작품을 통하여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농촌이 오늘알 내적 붕괴를 일으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사람이 사람과 어울리면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고장이기를 그쳤다. 여기에서 모든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대하여 적이며. 자기 자신과 자신의 이익 속에 숨어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다. 물론 이러한 내적인 붕괴의 궁극적인 원인은 밖으로부터 온다. 그것은 도시에서 농촌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자본주의의 문화다. 그것은 밖으로부터 오는 억압으로 작용할 뿐만 아니라 사람의 욕망과 심성 자체를 변화시킨다. 그리하여 새로이 깨어난 소비와 소유와 사회적 신분에 대한 개인적 욕망은 안으로부터 모든 것을 바꾸어놓고 마는 것이다. 농촌은 도시에 대하여 식량과 노동력의 공급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시가 생산하는 것들을 소비하는 곳으로서 중요한 몫을 차지하게 된다. 냉장고, 전기밥솥, 텔레비전, 기타 여러 가지 플라스틱 제품이 농가의 상비품이 되고 요구르트, 햄버그 스테이크, 돈까스와 같은 음식이 들어오고 동네 가게들의 이름이 김스 의상실, 아리스노비 미장원, 아티스트 다방 등의 알쏭달쏭 외래어로 바뀌고 농사 용어까지도 평이나 정보가 아니라 헥타르, 또 기타 화학약품의 외래명을 사용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또 도시에서 밀려오는 풍습은 크리스마스, 징글벨, 포커 등을 밀어오고 술과 도박과 관광과 고고와 성에 대한 관심을 만연하게 한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풍물의 유입이 일으키는 역겨운 느낌은 두 문화가 부딪치는 과도기에서의 일시적 위화감이리고 치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시에서 오는 외래 문화의 운명이 궁극적으로 어떤 것이 될는지는 우리가 예측할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의 시점에서 그것이 농촌의 공동체적 일체감을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손상하는 한 용인을 이루는 것이은 틀림이 없다. <할아버지의 행보석어약해중천(行步席 魚躍海中天)이란 현판, 동토시, 갈모, 연상(硯床), 까치선 등이나 떡꾹, 대보름의 약식과 식혜와 갖가지 부름, 칠미죽, 개피떡> 등--전통적인 문물의 의미는 도시에서 유입해 오는 현대적인 문물과 어떻게 다른가. 전통적인 풍물이 특수계급의 전유물인 데 대하여 텔레비전이나 플라스틱 제품이나 요구르트는 보다 광범위한 대중에 의하여 향유될 수 있는 민주적인 물건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것은 사실이고 또 그러한 면에서 삶의 민주적인 다양화에 도움을 주는 점이 있다는 것은 인정될 수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물건들은 적어도 농촌에서 만들 수 있는 것들이고 또 그때그때의 기회에 쓸모와 즐거움을 위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다. 도시의 풍물은 농촌 스스로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힘--생산적, 창조적 능력을 박탈하고 또 쓸모와 즐거움보다는 화폐경제의 소모의 열병으로 하여금 사물의 척도가 되게 한다. 한마디로 현대 도시문화의 유입은 창조와 필요와 쓰임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사회에서 소비의 일방적인 항진에 의하여 특징지어지는 생활방식에로의 전환을 뜻하는 것이다.
물론 일상적인 차원에서 도시 문화의 의미가 이러한 각도에서 비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선 막연한 역겨움으로 비치기도 하고 또는 자신의 능력 범위 안에서 살고자 하는 농민의 건전한 보수성에 위배되는 일로도 나타난다. 가령, 리낙천 씨가 <그늠으 크릿스마쓴지 급살을 맞쓴지>를 증오하고 <징글징글헌 늠으 징글벨>을 탓하는 것은 부질없는 소비문화에 휩쓸리지 않겠다는 마음의 표현이고, 김승두 씨가 <평두 있구 마지기두 있구 배미도 있는디, 해필이면 알어듣기 그북허게 헥타르락구 헐 건 뭬냐 이게유>하고 영농교육장에서 말썽을 일으키는 것은 외래적인 것에 흔들림이 없이 그의 현실감각과 자식 속에 살겠다고 말하는 것이고, 다시 리낙천 씨가 조합의 융자금을 갚겠다는 계획을 하면서 그 돈을 <농자로나 썼다면 모를까, 겨우 TV나 전기밥솥 따위를 외상 지고 연체이자 늘려주며 이삼태씩 끌어간다면, 뒤통수가 부끄러워서도 못 견딜 일이 그 일이던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은 경제적으로 자기의 필요와 소비를 맞추어 사는 건전한 균형의 삶을 말하는 것이다. 또 쌀 수매가를 받은 농민들의 반 자포자기의 잔치에 맥주가 나오고 과일 샐러드가 나오고 억지 근로봉사에 동원된 학생들이 짜장면을 요구하고, 소비풍조에 놀아난 여자들이 요구르트를 줄대놓고 마시고, 부동산으로 돈을 벌고 부동산 브로커가 되어 도시화의 물결에 빨려 들어가는 장씨가 <경양식과 왜식집을 번갈아 드나들며 반주로 맥주를 곁들이게>하고 햄버그 스테이크를 먹고 하는 것은 반대로 농촌의 자율적이고 자족적 생활이 허황된 소비문화에 침윤되어 감을 나타내주는 일이 된다.
역겨움과 반발에도 불구하고 소비문화는 농촌의 내면 속에 깊이 자리잡는다. 이것은 가뜩이나 빠듯한 가계수지에 압력을 가하고 농촌의 인간관계를 근본적으로 왜곡시킨다. 소비문화의 유혹은, 이문구의 소설에 의하면, 남자보다는 여자들에게 이겨낼 수 없는 마력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으로 남자의 세계는 공적인 것이고 여자의 세계는 사적인 것이었다. 소비문화는 근본적으로 모든 생활을 사적인 것이 되게 하는 경향을 가진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또한 보다 사회적인 해석으로는 이문구가 「우리 동네 장씨」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남자보다는 여자가 <제구실을 빼앗기고 쌓인 암담과 체념>이 큰 때문에 그 보상으로서 소비문화에 끌리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여튼 여자들에게 냉장고, 전기밥솥, 텔레비전 등은 강한 욕구의 대상이 된다. 또 그들은 관광계에 들고 이장이나 아모레 화장품 회사에서 물건을 뜯어다 망년회를 벌인다. 또 온천에 다녀오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나들이가 된다. 그 중에도 전형적인 것은 「우리 동네 류씨」에 이야기되어 있는 바 <이쁜이계>와 같은 것이다. 이것은 성적 매력을 높이기 위하여 음부(陰部)를 줄이는 수술을 받을 돈을 계로 염출하자는 것인데, 이런 종류의 일이 늘 그러한 것처럼 어느 외과병원의 돈벌이 작전의 일부로서 추진되는 것이다.
외래 소비문화의 침투는 남녀관계, 가족관계에 갈등을 가져온다. 「우리 동네」의 가정치고 남편과 아내 사이에 갈등과 긴장이 없는 집이 없다. 리씨의 집이 그렇고 최씨의 집이 그렇고 류씨의 집, 강씨의 집, 김봉모 씨 집이 그렇다. 대개 이러한 갈등은 여자들의 소비품, 유흥, 도시적 사치에 대한 관심과 남자들의 건통적 농촌에 집착하는 보수적 본능 사이에 일어난다(이 갈등에서 아이들은 대체로, 예외가 없지 않지만, 세 풍조 쪽에 선다). 리낙천 씨와 그 아내의 갈등은 대표적이다. 이문구는 갈등 자체보다 그것에 관계되는 심리적 불만의 에너지를 표현하는 데 능하다. 그의 문체는 이 점에서 극히 적절하다. 그의 문체가 아니면 그 실감을 전하기 어렵다.
리낙천 씨가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은 <징글벨>을 포함한 새마을 방송의 노랫가락과 더불어이다. 그의 농촌적 신경을 자극하는 이러한 방송에 이어 그의 아침은 집안에서도 아들과 아내의 긴장을 품은 대화로 시작한다.
(전략) 바깥이 시끄러워 일러 깼는지, 밤새 옆댕기에서 가로 뻗고 자며 거리적거리던 막내 만근이가, 즤 어매 쭉은 젖을 집적거리며 보챌 채비를 했다.
「엄니, 불 좀 켜봐, 다 밝었잖여」
하는 아이 말에
「다 밝었다메 불은 지랄허러 키라남?」
대뜸 툽상스럽게 지청구부터 하는 꼴이, 아내도 잠 달아난 지 담배 두어 대 전은 진작 되던가 보았다.
잠 못 자는 새벽에 주고받는 말의 거침은 대체적인 생활의 불만 외에 크리스마스라는 소비문화의 욕구자극에 인한 것이다. 가족간의 대화는 다음과 같이 아내의 대꾸로 계속된다.
「얘는 새꼽 빠지게 툭허면 장 푸러 가서 시릇전 긁는 소리만 퉁퉁 헌당께. 새벽버텀 가기는 워디를 가자는겨?」
아내는 동치미 맛본다고 이빨 흔들린 늙은이 암상떨 듯 내흉스럽게 아이만 구박했다.
(중략)
「크리스마스헌티 가보잔 말여, 딴 애덜은 다 즤 엄니랑 하냥 간다는디 씽--」
이러한 아이의 채근에 리씨의 아내는 불만의 화살을 남편에게 돌린다.
「걔덜은 즤 엄니가 쪽 뽑구 나슬 옷이라두 있으닝께 그러지. 니미는 남 다 입는 홈스팡 바지는 워디 갔건, 털루 갓테두리헌 그 흔해터진 쓰레빠 한 짝 사다준 구신이 웂는디 뭘루 채리구나스랴?」
하고 마디마디 가장귀 치고 옹이를 박아가며 너스레를 떨었다.
「씽--그럼 오백 원만 줘. 우람이 갈 때 따러가서 징글벨만 보구 올게」
아내의 대답,
「그 오백 원 같은 소리 작작 해둬라. 돈은 애 나버러 달라네? 등창에 댓진 바른 사람 니 옆댕이 누워 있든디……니미는 늬 애비 만난 뒤루 돈 안부 끊겨서, 오백 원짜리에 시염이 났는지, 천원짜리가 망건을 썼는지, 질바닥에 흘린 것두 못 알어봐서 못 줍는단다」
또 리씨 아내의 불평은 계속된다.
「넘의 집 서방덜은 크릿쓰마쓰 센다구, 지집 새끼 뺑 둘러앉히구 동까스를 먹을래, 탕수육을 먹을래, 잠바를 맞추랴, 청바지를 사주랴 허구 북새를 피는디, 이 집구석 문패는 생전 마실 중이나 알지 먹을 중은 모르니, 에으--」
크리스마스를 두고 생기는 리씨와 그 아내의 갈등은 공업단지 시찰, 민속촌, 자연농원, 서울의 텔레비전 공개방송 등을 보러 갈 채비를 하는 관광계, 동네 유지의 기부를 보태 벌이려고 하는 망년회, 동네의 아낙네가 녹음기를 사서 퍼뜨리는 고고춤--이런 것들로 하여 되풀이 일어난다.
어떤 경우에 갈등은 이미 사다가 쓰는 가전제품의 활용방식을 두고도 일어난다. <우리 동네>의 남자들은 집안에 들어온 소비자 품목에 대해서도 최후의 저항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가령 「우리 동네 황씨」의 김봉모 씨의, 선풍기를 둘러싼 갈등도 상징적이다. 장면은 김씨가 모깃불을 붙여보려고 아들 심부름을 시키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복셍아, 다 먹었걸랑 게 붙어앉어 저기허지 말구, 저기네 오양 옆댕이 가서 보릿꼬생이나 한 삼태미 퍼 오너라. 예 앉어보니께 모기가 상여 메는 소리 헌다. 얼름……」
김봉모는 누가 세상 없는 소리를 해도 잇긋 않고 말 안 타는 아이인 줄 번연히 알면서도 참다 못해 에멜무지로 일러보았다.
「……」
역시 아이는 쳐다도 안 보는데, 바닥난 상을 대강 거듬거려 뒷전으로 접어놓고 선풍기 옆에서 턱 떨어지고 있던 아내가 고뿔뗀 넛할미마냥 쪼르르 말대답을 했다.
「보리까락은 넨장--무슨 효자 난다구 그 탑세기를 퍼 오래는겨」
「저만치루 모깃불이나 놔보까 허구」
「아침에 치울라면 성가시게 내둥 앓던 짓 헐라네……게서 모기 뜯기느니 일루루 와 앉지……선풍기 틀면 물컷 안 뎀벼 십상일레」
가족간의 갈등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은 일상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보다 더 큰 도덕적인 문제를 두고 일어나기도 한다. 가령 최씨와 그 아내가 공장의 쟁의로 인하여 감시 대상이 되게 된 딸의 친구 명순이를 집에다 유숙시키는 문제로 다투게 되는 경우 같은 것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다툼의 씨앗이 되는 것은 최씨의 아내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인 불안감 외에 보다 잘 살아야 할 생활에 부담이 된다는 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씨와 그 아내의 갈등은 단순히 여자의 물욕과 남자의 정의감이라는 도식으로 형상화될 수 없는 더 복합적인 차원을 가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러한 것이 적절히 처리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사실상 <우리 동네>의 테두리에서 더 중요한 것은 주제가 뚜렷한 정치적, 도덕적 문제라기보다는 일상적 삶의 바탕으로서의 농촌의 붕괴이다. 따라서 크리스마스나 선풍기를 중심으로 한 갈등이나 불화는 더 전형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또는 더 주목하여야 할 것은 어떤 특정한 주제나 물건을 두고 일어나는 갈등보다도 일반적으로 <우리 동네>의 삶에 팽배해 있는 불만과 좌절의 분위기이다. 이것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문구의 문체 그것으로써 잘 전달되는 것이다.(이문구의 문체에 대하여서는 여러 사람들이 언급한 바 있다. 반드시 거기에 한정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갈등의 문체이다. 그의 긴 문장은 많은 비유와 인상을 한데 휘어잡는데, 이것은 그러한 비유와 인상이 농촌적이면서 부정적인 것이기 쉽다는 점과 아울러, 화자의 내면을 눈앞에 진행되는 장면에서 떼어내어 하나의 별개의 계산의 장이 되게 한다. 가령 <재 쳐낸 삼태기를 잿간에 왁살스레 멨다붙이고, 수챗가에 개수통을 냅다 끼얹는 소리나 하며, 오늘도 아내는 신새벽부터 잔뜩 불어터진 기미가 역연하던 것이다>하는 문장은 외부의 인상을 종합하는, 불만의 공간으로서의 내면을 곧장 느끼게 해준다. 이문구의 문체와 염상섭의 문체와도 비교도 더러 말하여진 바 있는데, 우리는 염상섭의 언어가 대인 관계의 갈등을 담는 언어라는 점에 주의할 수 있다).
소비문화 속의 농촌 갈등은 말할 것도 없이 가정에 한정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전체에 만연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 동네 김씨」는 김씨와. 김씨가 양수기를 빌린 이웃 남씨와 이웃 동네의 사람들과 전기회사 직원 사이에 벌어지는 자기 이익의 줄다리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여기의 삽화에서 자기들의 물을 빼앗긴 이웃 사람과 전기회사 직원은 국외자이기 때문에, 우의적인 관계가 없다고 하더라도 이웃 남씨가 술을 받아오고 이웃간의 정을 강조하는 듯한 언사를 하는 것은 김씨의 호스를 빌리려는 계산에서이다. 정씨는 농사비용을 절약하겠다는 생각으로 면장과 교장을 쏘삭여 학생들을 동원하지만, 짜장면 등의 대접을 요구하는 학생들은 묘판을 결딴내 버리고 도망가 버린다. 정씨가 주문해 온 예순 명분의 짜장면으로 동네 사람들은 잔치를 벌인다. 그러면서 이런 잔치를 마련하였으니 국회의원에 출마하라고 농담을 한다.
강씨가 보리방아를 찧고자 할 때 겪는 어려움도 이해관계에 공동체 아닌 공동체의 모습을 잘 드러내어 보여준다. 동네 방앗간을 맡고 있는 안동삼은 강씨의 간절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되에 사이다 한 병두 안 되는 보리쌀 한 되 뜨러 방앗간을 열라는 겨? 집이 보리 두 가마 깎어주자구 내 밥 먹구 나와서 즌기 닳리구 지름 축내야 쓰겄구먼? 나두 새끼들허구 살으야지(후략)」
이러한 주장에는 강씨의 <동넷일 보는 사람이 워치게 일일이 이해타산을 따져가며 헌다나>하는 주장도 막무가내인 것이다.
---<중략>
이렇게 분석하면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덧붙여 생각하여야 할 것은 「우리 동네 황씨」가 뛰어난 것은 단순히 그 마지막 부분의 여러 가지 선언 때문이 아니란 점이다. 물론 이러한 선언도 중요한 발언이기는 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이 소설이 그려내고 있는 구체적인 정황으로부터, 조금도 사실적, 심리적 진실에 무리한 뒤틀림을 줌이 없이 끌어내어진다는 점이다. 작가는 단순히 이러한 선언에서 작품을 출발한 것이 아니라 겸허하고 착실한 사실의 검토에서 이러한 선언에 이른 것이다. 그 검토의 전체가 이 작품이다.
이러한 검토에서 오는 깨우침은 소설만이 줄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동네 황씨」는 , 위에서도 말했듯이, 그것 자체로도 설득력 있는 역동적 전개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 동네」전체에도--조금 지나치게 반복적이고 진전이 부족하고 이야기가 부족하다는 비판을 허용할 수밖에 없는 「우리 동네」전체에서도 하나의 역동적 결론을 부여한다. 이것은 단순히 소설 미학의 문제만이 아니고 우리의 깨달음의 내용에 관한 것이다.
「우리 동네」또는 다른 작품에서 이문구가 그리고 있는 농촌은 문제에 차 있는 곳이다. 또 그러니만큼 불만과 저항과 분노가 질척이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 세력의 움직임도 공동체의 재생에 보탬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파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느낌을 준다. 물론 이러한 적극적인 파괴의 힘이야말로 새로운 건설을 위한 에너지의 예비적 표현이라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동네 황씨」가 보여주는 드라마를 통해서야 비로소 그러한 가설을 실제적인 가능성으로 확인하게 된다. 우리는 농촌의 많은 어두운 힘의 뭉클거림이 무엇엔가 눌려 있는 밝은 충동의 울부짖음이라는 것을 새삼스러이 아는 것이다. 이런 사정을 이문구는 「우리 동네 황씨」의 중심적인 심상으로 다음과 같이 시적으로 표현한다.
둠벙은 무시로 자고 이는 마파람 결에도 물너울을 번쩍거리고, 그때마다 갈대와 함께 둠벙을 에워싸고 있던 으악새 숲은, 칼을 뽑아 별빛에 휘두르며 서로 뒤엉켜 울었다. 으악새 울음이 꺼끔해지면 틈틈이 여치가 울고 곁들여 베짱이도 울었다.
블로그의 정보
국어문학창고
송화은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