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이무영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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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영 - 대표적인 농촌문학가
이동희

 

 

1. 그의 생애

이무영은 그의 《소설작법》에서 창작에 임하는 태도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소설 창작은 성스러운 인간 최고의 작업이다. 산모가 태아를 아끼고 보호하고 육성시키는 것과 똑같은 세심과 진실과 정열 그리고 또 경건한 마음으로 창작에 임해야 한다.

이렇듯 진실하고 경건한 태도로 34년 간 성스러운 작업을 일관해 온 이무영은 그런 이유로 한국 문학사상 커다란 산맥을 이루고 있다. 그는 그렇듯 열렬한 문학 정신의 신봉자였으며 투철한 문학 사사의 실천자였다.

그는 남달리 농촌.농민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끈질기게 농(農)의 정신과 농촌의 현실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삶의 가치를 찾기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그는 농촌 문학의 개척자이며 선봉자였다. 흔히 그를 가리켜 흙의 작가요 농민 문학의 선구자라고 말한다. 그것은 농촌 소재의 소설을 당시 누구보다도 많이 썼고 활약을 많이 하였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앞에 말한 대로 성실한 창작 태도에서 오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가 농촌의 현실과 이상을 그리기 위해 하늘의 별따기 같은 직을 버리고 농촌으로 향하는 모험을 저질러 거기서 제 1과 제 1 장부터 다시 인생을 배우며 관념을 버리고 현지 체험을 통해 소설을 써 나간 것은 모범적인 작가의 태도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적극적이며 성스러울 이만치 진실한 작업의 결과 많은 단편과 장편 그리고 희곡에 이르기까지 농촌 소재를 통해 생의 의미를 추구해 간 것이다.

그런 청색 깃발을 혼자 힘으로 힘겹게 휘날리다가 그 최고의 열매를 따지는 못하였지만 한국의 대표적인 농촌 문학가라는 대명사가 붙게 된 것이었다.

이무영의 생애는 크게 다섯 갈래의 분수령이 지어진다.

제 1 기는 1908년 출생부터 1923년 도일까지

제 2 기는 그 후부터 1939년 향향(向鄕)할 때까지

제 3 기는 그 후부터 1950년 해군 입대까지

제 4 기는 해군 종군 생활부터 다시 서울 생활까지,

제 5 기는 그 이후부터 절필까지

이것은 이무영의 생활적인 변화기이면서 동시에 문학 사상의 변화를 뚜렷이 보여 주는 단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 편의상 갈라 본 것이다.

흙의 작가 이무영은 1908년 1월 14일 충북 음성군 음성읍 오리골(관명은 석인리) 타관에서 가난한 농민인 이덕여 씨와 인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때는 의병 항쟁으로 어지러워 이 산골로 피난을 왔다가 낳았던 것이었다. 호적에는 음성면 읍내리 출생이라고 되어 있지만 생전에 본인이 작성한 연보에 오리골로 되어 있다.  7남매 중 차남인 이무영의 아명은 갑룡이었고 그 후 용구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다.

5세까지를 유아기를 이 오리골에서 보냈으며 6세가 되던 해에 거기서 8킬로 정도 상거인 충북 중원군 신니면 용원리 26번지로 이사를 하여 입적, 본적은 이곳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13세까지 소학교를 다니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 시절의 얘기는 <목마 타던 시절>에 씌어져 있다. 그러다 1920년에는 상경,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진학을 하였는데 이때부터 문학에 뜻을 두었다. 2학년 때부터 동화, 소설 등을 탐독하기 시작했고 특히 그로 하여금 문학열을 불을 붙인 것은 일본의 자연주의 작가 야마다의 <이불>을 읽고부터였다. 이 소설은 감수성이 예민한 시골 소년을 사로잡아 작가로의 지망을 줄달음치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1925년에 문학 수업의 큰 뜻을 품고 현해탄을 건넜다. 그러나 호화로운 일본 유학이 아니었다. 고학이었다.  뜻만 기지고 건너간 일본에서 노동을 하며 지내다가 그 해 4월 일본 작가 가토오 다케오 씨 댁에 기숙하면서부터 길이 열리기 시작하여 그로부터 4년 간의 문학 수업을 하게 되었다. 그는 그 집의 서가에서 일본의 저명한 작가의 작품들과 프랑스,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을 비롯한 세계 명작을 섭렵하게 되었다.

스승을 모셨던 4년 간 나는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 4년 간의 독서가 그 후 30년의 몇 배 아니 몇 십 배에 해당할는지도 모른다.

그의 말년, 어느 날의 일기인 <생활 없는 생의 기록>에서 그 때를 추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회의와 선택 아닌 번득여 지나치게 섬려한 일본 문학에서 공허를 느끼고 러시아의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에서 사고적이며 적나라한 인간 문제, 죄와 덕, 선과 악의 조화에 심취하였다고 한다.

이무영은 1926년 18세의 나이로 처녀 장편 <의지 없는 영혼>(원명 <의지 없는 청춘>)을 출간하고 다음해에 다시 <폐허>(원명<폐허의 울음>)를 무영이란 아호를 써서 연간함으로써 작가의 길로의 닻을 올렸던 것이다.

그러나 1929년 금의 환영의 흐뭇한 마음을 가지고 귀국하였으나 고국의 문단은 그에게 작가 대우를 해 주지 않았다. 그는 절망하지 않고 소학교 교원, 출판사, 잡지사로 돌아다니면서 열심히 창작 활동을 하였다. 그러던 차 동아일보사에서 한국 최초로 모집한 희곡 현상 모집에 <한낮에 꿈꾸는 사람들>이 당선되고 중편 <반역자>, <지축을 돌리는 사람들> 등 역작을 계속 발표함으로써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또 희곡 <모는 자와 쫓기는 자>, <톨스토이> 등도 발표하여 소설가로뿐 아니라 극작가로서도 인정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로 근무하게 되면서 더욱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였다. 동아일보에 장편 <먼동이 틀 때> 등을 연재하였으며, 《신동아》지에도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러다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정간, 신혼(고일신 여사와 결혼) 초에 실직이 되고는 죽마고우인 시인 이흡과 문예지 《조선문학》을 창간하여 이 잡지와 《신동아》 등에 작품을 발표하였으며 제 1단편집 취향(醉香)을 간행하였다. 신문이 복간되자 거기에 또 장편 <명일의 포도(鋪道)>를 연재하였다. 1939년에는 제 2 단편집을 낸 데 이어 두 장편을 간행함으로써 3년 동안 네 권의 저서를 내었다. 귀국한 지 10년 만에 그의 지위는 확고하게 굳혀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만족을 얻지 못하였다. 작가적인 활동은 충분히 누릴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항상 불안하고 못마땅한 생활이었다. 그의 꿈은 농촌에 있었던 것이다. 체질에 맞지 않는 도시 생활보다는 생수가 나오는 농촌, 어리숙한 농민들의 생활을 그리고 싶었던 것이다.

이무영은 비장한 결심 끝에 32세가 되는 그 해 동아일보사 사표를 던지고 이흡이 사는 농촌으로 향하였다. 경기도 시흥군 의왕면 2 리 어엽이라고 하는 마을의 작은 부락인데 집 서너 채밖에 없는 외딴 동네로 궁말이라고도 하였다. 군포역에서 3킬로 정도 되는 거리이다. 하루 아침에 모든 문명의 끄나풀을 다 풀어 버리고 이 벽촌으로 와서 농사를 지으며 <제 1과 제 1 장>, <흙의 노예>를 비롯한 일련의 농촌 소재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 용기 있는 생활의 혁명은 이무영이 스스로 택한 고행의 길이었다. 그러나 그로 해서 현실의 생활과 작품 속의 생활, 즉 현실과 이상의 이위일체를 성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문서방>, <두더지> 등의 흙냄새가 물씬 나는 단편들을 많이 써서 발표하였으며 <향가>, <청기와집> 등의 장편을 신문에 연재하는 한편 농촌 소재로만 된 7편의 단편을 묶어 제 3 단편집 《흙의 노예》를  출간도 하고 <산가(山家)>로 시작하는 《무영 농민문학 선집》을 펴내었으며 대하 소설 <농민>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획기적인 의도가 적극적으로 실현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그는 시골에 살긴 하였지만, '조선 예술상'의 수상, 경성 보육, 연희대, 서울대 등의 출강, 소설집과 《소설작법》의 간행 등  도시인의 생활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궁말에서 군포 역전(시흥군 남면 당일리 일명 아구동 86)으로 이사를 하여 서울과 왕래의 편의롤 도모하였으며 얼마 뒤 6.25동란으로 그 집마저 폭격을 당하였다. 그 뒤 진해로 서울로 해군 장교, 국방부 정훈국장, 숙명여대 강사, 단국대 교수, PEN클럽, 자유 문학자 협회, 문총의 간부 등의 분망한 생활, 그리고 6남매의 아버지로서의 힘겨운 생활 등으로 향향의 의도는 완전히 바뀌어야 했다.

1950년 이후 그는 <노농(老農)>, <맥령(麥嶺)> 등의 농촌 소재 소설도 썼지만 <바다와 대화>, <해전 소설집> 등의 바다를 소재로 한 소설을 썼으며 <사랑의 화첩>, <계절의 풍속도> 등 도시인의 애정의 원리를 제재로 쓰게 되었다. 또 평론 분야에도 참여하여 《자유문학》지와 일간지 등에 성실한 작가 정신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말년의 일기에

집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문총으로, 문총에서 다방으로, 거기서 빈대떡 집으로 거의 매일 개미 쳇바퀴 돌 듯한 지금의 생활에서 좋은 작품이 나올 리 없다. 어디고 가고 싶다. 훨훨 쏘다녀 보고 싶다.

라고 쓴 것처럼 소설이 써지지 않음을, 생활, 사상, 철학의 빈곤을 고민하였다.

그러나 1960년 4.19 다음 다음날 이 땅에 농촌 문학의 씨앗을 푸짐히 뿌려놓고 명의 부름을 받아 붓을 던지고 말았다.

2. 이무영의 작품 세계

이무영의 초기 작품에는 사상의 정립을 위해 여러 방향의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폐허의 현실을 슬퍼하기도 하고 어떤 지주(支柱)를 찾으려는 몸부림 <폐허>, <의지 없는 영혼>을 보여 주기도 하고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 (<두 훈시>, <반역자>), 과거의 원한과 금전 관계를 초월한 사랑과 우정 (<B녀의 소묘)>,<취향>)을 보여 주기도 하다가 공복(空腹)의 서러움과 악운 (<창백한 얼굴>, <유모>), 방화, 자살 (<만보노인>, <수인의 아내>) 등 절망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또 무정부주의적인 반항, 경향적인 지하의 인물들을 등장시켜 이상론을 펴기도 한다. (<명일의 포도>, <지축을 돌리는 사람들>, <취향> 등)

그러나 이런 작품 경향은 대부분의 다른 작가들도 그랬던 것처럼 곧 벽에 부딪쳐야 했다.

이런 감상과 절망, 실의에 빠진 인물들을 생기가 차 있고 긍정적인 인물로 바꾸어 놓은 것이 그의 향향이었고, 그것은 이 작가의 재출발이었던 것이다. 제 1 작인 <제 1 과  제 1 장>과 연작인 <흙의 노예>에서, 나태해 가는 도시 생활로 소설을 못 쓰는 김수택은 김노인에게서 개똥을 줍고 꼴을 베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여 된장내, 흙냄새의 감정, 벼 한 폭 배추 한 잎에의 애정을 배우게 되며, '이 애정으로 도덕을 삼는 데서만 인류는 행복하게 될 것'이라는 흙의 철학을 배우게 된다. 수택은 나중에 농사를 지어 봤자 소작료, 지세를 떼고 나면 남는 건 시름뿐이라는 실망에 빠지지만 그런 인고를 농민의 현실로 인식하고 감수한다. 그리고 오직 땅을 장만하겠다는 소망을 갖고 머슴살이를 하고 술 한 잔, 인절미 한 개 사먹지 않고 부지런히 하여 마련한 땅을 손자 상태가 다 날리고 소작밖에 붙이지 못하는 노동, 병중에 약값을 들이지 않고 땅을 사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하여 자결하는 김영감을 모델로 수택은 <노농>이라는 소설을 쓰게 되고, 땅을 위해 땅 속으로 들어간 흙의 노예의 살신의 교훈은 기계 문명으로 녹슨 감정에 큰 충격을 안겨 준다.

같은 무렵의 <모우지도(慕牛之圖)>, <문서방> 등의 주인공은 순종하는 농군, 바보스러울 만큼 솔직하여 '남의 잘난 맛에 사는 대신 나는 못난 맛에 살고', '사람이 절하고 뺨맞는 법이 없다'고 생각하는 생불 같은 농민의 심지로 가난을 참고 견딘다.

3. '농민' 연작의 가치

이러한 비극적인 농촌 농민의 현실 인식을 행동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장편 <향가>, <농민> 등이다.

<향가>는 전문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명옥과, 만주 등지로 방랑을 하다 돌아온 준섭은 뜻을 합하여 서로 숙적(宿敵)의 관계인 그들 부모의 무지와 마을 사람들의 오해를 초월하여, 저수지를 만들고 학교를 세우고 농민들의 숙원인 땅을 갖도록 해 줌으로써 밝은 농민상을 보여 주고 있다.

<농민>은 연작 장편으로 <농군>, <노농>으로 이어지는데, 계획했던 5부작까지는 쓰지 못하여 미완인 것이다. 그러나 중요 인물만 같고 시간과 사건들을 거의 독립시켜 소설마다 대단원을 맺고 있다. 그 중에도 제 1 부작인 <농민>이 가장 뛰어난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 연작의 주인공은 학대받는 빈농의 아들 원장쇠로 토호인 김승지, 박의관과 대결을 한다. 장쇠는 아내가 김승지에게 욕을 당하여 자살을 하고 재산을 강탈당한 울분에다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도록 매까지 맞고는 집을 나가 동학군이 되었다. 그는 일당을 거느린 두목이 되어 3년 만에 돌아와 두 토호의 부자(父子)를 뒷산에 불러다 그들이 쓰던 형구로 형을 가하여 종문서 빚문서를 태우고 속죄를 시킨다. 몰려든 군중들이 자기 손으로 죽이겠다고 하다가 제지당하자 그를 맘속으로 사모하고 있던 김승지의 딸 미연이와 장쇠를 결혼시키면 용서한다고 하여 남장을 한 미모의 미연이 그렇게 하겠다고 까지 하였다. 그러나 동학군을 쫓아 나타난 관군의 북소리로 하여 흩어져야 했다.

<농민>은 미륵동과 탑골을 소우주로 하여 양반 지주의 착취, 불법을 역사적인 현실로 부각하여 생생한 감동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동학군의 의거를 배경으로 하여 김승지, 박의관이라는 조정에 동학란을 일으켜 장쾌하게 그들의 무릎을 꿇게 한 것은 비단 한 마을의 현실이나 이상이 아니라 한국 농촌의 그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데에 의의가 있는 것이었다.

<농민>에서 장쇠가 3년 만에 동학군이 되어 들어온 것처럼 <농군>에서는 한일 합방에 의분을 느껴 의병대장이 되어 들어온다. 김승지의 토호질은 계속되고 양민들의 원성은 더욱 높아 가고 그리고 국운은 이미 기울어 한일 합방이 되는 것을 보고 다시 사라진다. 여기서는 농민의 울분이라기보다 민족의 통분을 해소하려 하고 있다.

그런 관념을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시킨 것이 <노농>이다. 장쇠가 마을에 다시 들어온 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토호질도 명이 다하고 박의관의 아들 일양의 도움으로 보를 만들어 수백 석지기의 옥답을 만들고 김승지의 딸 미연이도 농민들을 도와 준다. 그러나 지주들에게 시달리던 핍박 이상으로 농민을 짓밟는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다. 장쇠는 아들 만석이와 미연의 도움을 받아 3.1 만세를 위한 공작을 하다가 발각되어 파국으로 몰아넣는 대단원을 짓고 있다.

이 <농민>의 연작은 동학란, 한일 합방, 3.1 운동 등 역사적인 격동기를 그 정점으로 하여 극적 효과를 거두고 농민사를 통한 한국사를 조명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거대한 작의가 치밀한 구성과 실감을 동반한 농민의 생태 그리고 박진감이 있는 문장으로 불러 일으켰던 1부작의 공감을 2, 3부작으로 연결시키지 못한 감이 있다. 그리고 이무영에 대한 최근의 연구들에게서 그의 농촌 소재 소설들이 '역사적 현실을 꿰뚫는 예리한 안목이 결여'되어 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도 8.15와 6.25나 그 이후의 어떤 때로 연결하려 했던 대작의 후미가 중간된 것이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그 위에 쓴 <맥령>에서는 보리 고개와 이농, 아들의 전사 등 어두운 현실을, 애타게 기다리던 단비가 내리는 것으로 처리하고 있으며 <기우제>, <광장씨 후일담> 등에서도 농촌 농민을 묘사하였을 뿐 그 전 작품의 박력을 따를 수가 없을 것 같다. 농촌을 떠난 뒤의 작품은 역시 도시 생활을 소재로 쓰게 되었고 현대인의 정신적인 고뇌, 애정의 윤리, 중년기 이후의 고독 등을 그리고 있다. 자신의 죄를 자신이 무겁게 씌우려는 <광상(狂像)>의 권교수, 선과 악, 신과 인간 사이를 방황하는 <죄와 벌>의 박신부, <숙경의 경우>의 여성의 탈선을 자살로 대답하는 숙경을 통해 처절하리만큼 진실하게 사는 생의 의미를 제시하고 있으며, <계절의 풍속도> 같은 데서 젊은 제자와 중년의 스승이 서로 사랑하면서도 깨끗이 끝나는 윤리를 설득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유작인 <목석부인>에서는 사랑을 예술로 승화시키고 있으면서도 애정 도피를 한 자신을 통렬히 꾸짖고 있으며 <애정설화>에서는 성적 무력을 해결하고자 산 속에서 젊어지는 공부를 하고 있는 광기 어린 모습을 그리는 등 말년의 작품들은 심층의 고뇌를 통해 현대인의 인간성을 추구하려 하고 있다.

이무영의 20편의 장편, 7편의 중편, 108편의 단편 그리고 9편의 희곡 중 농촌 소재에 해당하는 것은 2분의 1이하이다. 그러나 누구나 그를 농촌 소재의 작가, 흙의 작가로의 비중을 두고자 한다. 그것은 그가 종래의 계몽적이며 이상적인 장으로 사용하였던 농촌을 한국의 역사적인 현실로 부각시켰다는 사실이며, 농의 정신을 말해 주는 순박한 인간과 함께 고민하고 과감하게 현실을 극복하려는 인물을 등장시킴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농촌 문학을 개척한 때문이다.

그러나 시종 진실하고 경건하고 정열적인 자세로 일관한 이무영은 그러한 면에서 단순한 농촌 소재를 전재로 한 농촌 문학가의 범주로 관찰하는 것보다는 도시, 농촌, 바다, 그리고 다시 도시 등 폭넓은 공간 위에 다양한 인생의 진실을 추구하려 한 한국 문학의 구도자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무영의 농촌 소재 소설을 더욱 충실히 평가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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