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이동하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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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고민(彷徨·苦悶)하는 젊은이에의 해답(解答)
  金洙治

  

 

 

이동하(李東河)의 「우울한 귀향(歸鄕)」은 《현대문학》지의 제 1회 장편 소설 현상모집에 당선된 작품이다.

  제목 자체에 <우울한>이라는 형용사가 말해 주는 것처럼, 이 작품은 한 시골 출신의 대학생이 어둡고 쓸쓸하고 추운 서울에서의 생활을 떠나 오랫동안 자기의 생활 속에서 멀어졌던 고향을 찾아가는 이야기로부터 출발한다.

  그가 왜 고향에 찾아가느냐 하는 문제는 우선, 서울에서의 생활-그것은 문학이라는 이름 밑에서 자기에게 주어지는 삶의 따분함, 젊음의 발산이 불가능한 무위의 생활, 그리고 일시적인 추위와 마음의 공허에 가득 찬 내용이 없는 삶을 이야기한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과, 오랫동안 잊혀진 고향에 돌아가 봄으로써 서울에서의 고통스런 삶이 어디에서 연유하고 있는지 하는 것에 대한 발견, 그리고 자기의 삶에서 비관적(悲觀的)사고의 원인에 대한 확인 등등의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소설은 그러한 주인공의 의식을 이중적 구조로써 보여 준다.

  즉, 하나는 현재의 주인공 <내>가 고향으로 찾아가서 추억의 실마리를 하나하나 찾아내는 과정이고 (이것은 화자의 세계이다), 또 다른 하나는 그 현재의 주인공의 추억 속에 떠오르는 과거의 주인공 윤의 소년시절의 재구축(再構築)이다. 이러한 과거의 추억을 되살리는 과정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으려는 시간 속에 매몰된 나의 발견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 잃어버린 시간은 아름다운 것도 즐거운 것도 아니며, 오히려 쓰라렸던 과거의 아픔, 비극적인 과거의 삶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신문에 난 친구의 사진을 보며 그 친구의 출세를 확인하고 그리하여, 옛날의 친구를 환대하는 이야기로부터 출발하지만, 그러나 그러한 고향에서 주인공이 느끼는 것은 옛날의 추억의 장소들이 더욱 피폐해 있다는 사실이며, 사람들의 가난과 침체된 삶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들은 곧 지금의 주인공에게 어린 시절의 추억을 하나하나 되살아나게 한다. 그것은 삼촌에 대한 것이며, 순임이에 대한 것이며, 철이에 대한 것이며, 이 모든 사람들이 살았던 비극적인 삶에 대한 것이었다.

  그 마을의 구장이며 그 마을에서는 가장 잘 살던 순임이네 집은 그 마을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도 그 집의 소유물이나 사람에 대해서는 침범하거나 시비를 걸지 않는다. 그런데 물방앗간집 개구쟁이 철이가 장난을 치는 바람에 두 집 사이에 원한이 맺힌다. 그 원한은 결국 6·25 사변 때 철이 형이 순임이 아버지를 죽임으로써 끝나 버리지만 양가를 파멸의 길로 이끌고 만다. 순임이가 중에게 시집을 가 버리고, 철이가 그 마을을 떠나 버림으로써 그 두 가정과 윤과의 관계는 거기서 끝나 버린다.

  그러나 윤에게는 이 두 사람이 단순한 친구의 관계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순임이는 윤이 갖지 못했던 부(富)를 가진 점에서 선망의 적(的)이었고, 철이는 윤이 할 수 없었던 모험을 하는 용기의 면에서 윤의 소심증의 극복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의 어린 시절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두 대상은 윤 앞에서 파멸을 보여 줌으로써 <윤>에게는 삶의 비극을 인식하게 한다. 왜냐하면 극복의 대상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삶에 있어서 꿈과 희망에 대한 신뢰감을 잃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면에서는 삼촌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다소의 허풍 섞인 말을 하긴 했지만, 윤에게 끊임없이 희망과 꿈을 -사냥에 관한 삼촌의 이야기나 군대에 입대한 삼촌의 모습이 바로 윤에게는 불가능한 세계 혹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희열을 불러일으켰다.-안겨주었던 삼촌은 결국 강도질을 함으로써 윤의 기대를 배반해 버렸다. 결국<윤>이 이 모든 주위 사람들을 통해서 확인한 것은 삶의 비극적인 모습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것은 곧 폭력이 지배하는 세계에 대한 추억이며, 그때부터 그에게는 삶에 대한

희망도 자신도 없이 살아가는 것이라는 인식이 싹텄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극이 보다 큰 의미를 띠게 되는 것은 그것이 어린이의 눈에 비쳤던 6·25의 모습이었다는 데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역사에 대한 허무감을 정신적 경험으로 소유하게 된 주인공은 그래서 인생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되었다.

  주인공의 현재의 삶에서 그것은 뚜렷이 드러난다. 학운이와 은아와의 생활은 주인공에게는 정신적으로 철이와 순임이와의 관계의 재현에 불과했고, 그래서 주인공은 은아의 사랑에 대한 아무런 신념을 갖지도 못하게 되고, 학운이의 행위에 대해서 자기 안에서 아무런 극복의 노력을 보이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가 마을을 떠나올 때와 똑같은 심정으로 다시 고향으로  떠나는 것도 우연의 결과는 아니다. 그에게는 항상 떠나는 것만이 가능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떠난다는 것이 그에게 어떤 해결도 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삶은 그에게 있어서, 태어날 때의 기구함이라든가 오줌싸개였다는 사실이 말해 주는 것처럼, 인생을 비극적으로 보려고 하면 일종의 운명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지금에 있어서 떠남은 작품을 남기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작품에 대한 신념도 사실은, 그의 당선이 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려 주는 것 외에 자기의 삶에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커다란 삶의 변화를 가져올 수도 없는 것이다. 그가 작품을 완성해서 서울로 돌아와서 만난 것은 학운이의 죽음이었고, 철이의 처절한 모습이었다.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서 이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가, 그것은 이 소설의 마지막 구절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은아는 그 애기를 하면서 바보처럼 울었다. 창백하게 지질린 볼 위로 말간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려니, 내 텅 빈 가슴의 맨 밑바닥에서부터 가느다란 떨림이 일어났다. 그것은 곧 내 전신을 누비고 지나갔다. 맥없이 떨리는 무릎을 가누자니 비로소 뜨거운 눈물이 왈칵 솟았다. 그래, 참으로 텅 비어 버린 가슴을 안고 은아와 함께 캠퍼스의 그 가파른 길을 허정허정 내려오면서, 나는 이 진저리나는 젊음이, 얻을 것도 간직할 것도 없는 이 허황한 젊음이, 내게서 빨리 떠나가 주었으면 좋겠다고, 신음하듯 뇌까렸다. 그러면 더 이상 헤맬 일도 없을 것이었다.

  결국 오늘의 젊은이들이 왜 고민하고 방황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이 작품은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에 대한 허무감, 삶에 대한 아무런 확신도 주지 못하는 어린 시절의 추억, 그러한 것들이 오늘날의 삶에서 되풀이되고 있다는 사실을 이 작가는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가의 보다 큰 힘은, 그러한 이야기를 통해서 삶의 비극적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데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다시 살면 지극히 괴로운, 그리하여 또다시 방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겠지만, 그러나 아름다운 <잃어버린 시간>인 것이다. 경·부간(京釜間)의 소읍인 삼성(三省)과 서울을 왕래한 젊음의 이야기가 이토록 절실하게 느껴질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이 작품의 자전적(自傳的) 요소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마음의 삼성(三省)>을 가지고 있는 한 이 작품을 날의 이야기로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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