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이광수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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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보호를 위해서 일부의 글만 교육용으로 올립니다.

그리고 일부 자료는 주로 전집류 부록에 수록되어 있는 작가론 또는

작품론으로 출처가 부정확합니다.


이광수의 작품세계 - 직업적인 아마츄어 작가
유종호

 

 

일본 유학까지

 이 광수는 당시 세상의 주목과 화제의 대상이 되어 온 인물이다. 게다가 문학적 활동이 왕성하였던 시기에 이른바 양대 민족지에 글을 쓰고 일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저널리즘의 중심부에 늘 노출이 되어 있던 인물이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의 삶의 관한 자료는 지나치게 많고 이에 따라 짤막한 평전은 그만큼 어려워진다. 또 그에 관한 많은 글들이 연대상의 차고로 차있고 또 본인자신의 회고적인 글도 예외는 아니다. 8.15이후 씌어진 자전적인 글들은 지나친 변명이나 자기 합리화에 급급한 느낌을 주며 정작 중요한 부분 즉 그의 변신이나 전신에 관해서 납득할 만한 시사를 주는 법이 극히 드물다.

 역사적인 평가를 떠나 그의 삶이 가히 파란많은 삶이었고 고단한 삶이었음은 세사에 널리 알려진 공인으로서의 이력말고도 그의 되풀이되는 병력에 잘 나타나있다. 그가 늘 내세우는 겨레사랑의 실상이 어떤 것이던 간에 그의 자녀들이 예외없이 미국 사람이 되어 있다는 것도 세속적인 뜻으로는 잘되고 못됨과 관계없이 그의 삶의 연속성이라는 점에선 역설적인 빛을 던져 준다. 그의 변심과 전신에 대해서 위선이니 위약이니 하는 설명이 있으나 인간 행동의 계기가 되는 여러 힘을 단순화해서 설명하는 것으로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그가 가지고 있던 현실인식이나 역사 감각의 가난함이 그의 전신의 원인이라는 선에서 그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우리는 우선 그의 정치적 행적에 너무 구애받지 않고 그의 삶의 자취를 될수록 냉정히 요약해 보기로 하자.

 그의 생년은 1892년으로 되어 있다. 평북 정주에서 전주 이씨 문중의 장손으로 출생한 것으로 되어있다. 당자는 늘 양반 집안이었음을 은연중 자랑했지만 그 당시 평안도 쪽에 흔히 일컫는 의미로서의 '양반'이 어디 있었느냐고 그의 인간과 문학의 신랄한 비판자인 김 동인은 말하고 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가 마흔 둘, 어머니가 스물 셋으로서 20년의 차이가 나는 부모를 가졌다는 것은 그의 출생상의 특징이라 할 만하다.

 그의 형들이 모두 갓난이 시절에 죽었음으로 그의 대한 부모의 애고가 각별했을 것임은 짐작할 수 있다. 초시를 했으나 대소과에 실패하여 술먹기나 일삼고 집안을 돌보지 않아 살림이 궁색했다고 자기 아버지를 적어 놓고 있다. 또   몸이 약해서 늘 부모의 속을 썩인 것으로 되어있다. 한편 이사를 자주 다닌 것을 어릴 적의 기억으로 적어 놓고 있는데 그것은 가난 때문이었다 한다.

 다섯 살 때 한글과 천자 반절을 깨쳤고 또 외할머니에게 《덜걱전》등의 얘기책을 읽어주고 과일 같은 것을 받고 했다는데 이것은 그의 최초의 문학적 체험이 되어 있다. 여덟 살에 동네 글방에서 한문 공부를 해서 《대학》 《중용》 《논어》 《맹자》까지 읽은 것으로 되어 있다. 한시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여 글재주를 칭송받고 신동이라 불리워졌다.

  열 한 살 때 전국을 휩쓴 콜레라로 불과 며칠 사이에 부모를 차례로 여의고 세 남매가 고아가 되었다. 부모의 죽음을 전후한 이 광수의 추억담은 그의 자서전, 혹은 '나'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 되어 있다. 여섯 살난 누이와 함께 기생 소실을 데리고 사는 할아버지한테로 갔으나 세 살짜리 누이는 남의 집 민며느리감으로 주었는데 한 달쯤 후 이질로 죽었다. 이 광수는 늘 사고무친한 고아였음을 자기 연민과 그럼에도 이만큼 되었다는 자랑스러움을 가지고 회고하고 있는데 그의 삶의 가장 획기적인 사건의 하나라고 해야 할 것이다. '부모도 다 돌아가셨으니 고향을 떠나 버리자, 자식들이 떠나가면 누가 있어 부모제사 드리랴 하는 생각에서 사당에 불을 질러 홍패도 위패도 모두 불살라 버렸다'고 그는 회고하고 있다. 사실이라면 그에게 있는 유교적 과거에 대한 우상파괴적인 요소의 최초의 발동이라는 점에서 상징적인 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외가와 재당숙집을 전전하던 그는 열 두 살 떄 동학에 입교하여 박 찬명 대령집에서 유하며 문서 베끼는 일을 했다고 한다. 이 무렵 노일 전쟁으로 아라사 병정이 정주에 들이 닥쳐 약탈과 부녀 폭행하는 장면을 보고 처음으로 강렬한 민족의식을 체험했다. 일본 헌병대의 동학 탄압으로 현상금을 붙은 체포령이 내려 도망친 일이 13세 때로서 진남포에서 배편으로 인천으로 , 거기서 서울로 갔다. 이 난생 처음의 서울구경의 여비는 부모의 유산인 세목 두 필, 광목 한 필, 명주 세 필을 팔아 충당했다 한다. 반년만에 고향에 돌아갔던 그는 열 네 살 되던 해 다시 서울로 올라와 일진회에서 세운 학교에서 일본말을 가르쳤다 한다. 그 당시 나온 《황성신문》《제국신문》을 통하여 국내외 정세에 대한 관심을 두터이했고 천도교 일진회의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그의 도일의 연대에는 약간의 차이가 발견되나 그의 연보를 가장 상세하게 다룬 노 양환 씨는 그것을 1905년 이광수가 열 네 살 나던 해의 8월로 잡고 있다. 을사보호조약이 조인되던 해이다. 이러한 그의 어린 시절에서 보게 되는 것은 그의 분명한 조숙성이다. 도대체 열 세 살 때 현상 체포령의 수배인물이 된다는 것 자체가 그렇듯이 그의 조숙성은 그의 가정 환경이나 국가 정세가 강요한 것이지만 크게 별난 점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그가 여러 어려운 고비를 비상한 조숙성으로 극복해 간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광수는 비범한 현실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뒷날의 변신도 그 점 그의 삶에서 일관성을 얻고 있는 패턴의 하나일 것이다.

  2·8독립선언서를 쓰기까지

 이듬해 봄 대성(大城) 중학에 입학한 그는 일본의 신문학, 번역문학을 접하여 문학 작품을 탐독하는 한편 습작도 시도하게 된다. 이해 처음으로 연상의 홍 명희를 알게 되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 미국에서 귀국하는 도중 일본에 들렸던 안 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은 것, 예수교의 성경을 처음으로 접한 것도 이 무렵이다. 한편 학비의 곤란으로 몇 번이나 귀국하는 고비를 넘기기도 한다. 최남선, 정인보, 문일평 등을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이며 톨스토이에 심취하게 되 것도 이 무렵이다. 이 무렵《소년》지 등의 잡지나 학교교우지 등에 우리말, 일본 말로 글을 발표해서 유학생 사이에서 글재주를 인정받았다.

  안 중근 의사가 처형된 1910년 봄 중학을 졸업한 뒤 조부가 위독하다고 전보를 받고 귀국하였다가 이 승훈의 청을 받고 오산(五山) 학교의 교원이 되었다. 조부의 사망, 첫결혼, 한일합방으로 극히 다사다난한 한해였다. 스물 두 살되던 1913년에 《검둥의 설움》(《톰아저씨의 오두막》초역본)이 간행되었는데 그의 최초의 단행본 출간이 된다. 세계 여행을 뜻하고 한만 국경을 넘어 상해를 경유 아라사에까지 입국했고 미국행도 꿈꾸었으나 세계일차대전의 발발로 단념하고 귀국, 다시 오산에서 교편을 잡다가 15년 김 성수의 후원으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와세다 대학 철학과에 입학했고 《매일신보(每日新報)》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26세된 1917년 신년호부터<무정>을 연재하여 근대소설의 효시란 칭호를 받게 된다. 일부의 반발과 함께 청년 사이에서 비상한 인망을 얻었다. <소년의 비애><윤 광호>등의 단편을 발표하게 된 것도 이 때이고 유학생회 석상에서 뒷날의 아내 허영숙을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126회의 연재로 <무정>을 끝내는 한편 지방여행을 다녔고, 11월엔 두 번째 장편<개척자>를 다시 《매일신보》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18년엔 <신생활론>이 많은 물의를 일으켰고, 허영숙과 북경(北京)으로 사랑의 도망을 간다. 이 때 일차대전의 휴전 소식과 파리 평화회의 소식을 듣고 귀국했다가 현상윤, 최 린 등을 움직여 3·1운동의 길을 열었다고 되어 있다. 우리 쪽 문서보다 일본측 문헌에 3·1운동의 초기단계에 있어서의 이 광수의 역할이 큰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 흥미롭다. 연말에 일본으로 건너가 백관수(白寬洙),서춘(徐椿), 김도연(金度演)등과 함께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했고 19년2월에 '조선청년 독립단 선언서'를 기초하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선 언문을 영어로 번역하여 해외에 배부하는 책임을 맡고 상해로 건너갔다.

  선언서를 영역하여 그 복사를 파리의 윌슨 등에게 보냈고 또 영자신문에 보도하도록 했다. 그는 임시정부 의정원(議議政) 조직에도 가담했고 미국에서 건너온 안 도산을 만나 그의 민족운동에 크게 공명하기도 했다. 임시정부 안의 사료편찬위원회의 주임 일을 맡고 임정 기관지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이 되었다. 일년 남짓한 상해 시절에 그는 흥사단에 가입하고 망명자들의 독립운동에 진력하였으나 한편 경제적 곤란도 심했던 것 같다. 상해로 찾아온 허영숙을 먼저 귀국시킨 후 일년 남짓한 상해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게 된다.

 귀국한 뒤

  그는 한때 경찰의 조사를 받다가 석방되어 허영숙과 정식으로 결혼하고 한동안 두문불출했다고 한다.

  항간에서는 변절자란 비난이 자자했고 허영숙의 상해행(上海行)이 일본 경찰의 사주에 의한 것이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유야 어쨌든 상해로부터의 귀국이 그의 뒷날의 훼절의 단초가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시 그는 금강산 구경을 다녀왔고 <민족 개조론>이《개벽》지에 실리자 개벽사가 습격을 받는 등 해서 그는 발표기관을 잃고 사회의 냉대 속에서 지내야 했다.

  32세 되던 해 동아일보사 객원이 되어<선도자>를 연재했고 많은 논설도 쓰게 된다. 그의 동아일보와의 관계는 10년 후 조선일보사 부사장이 될 때까지 계속되며 그 동안<허생전><재생><춘향전><마의태자><단종애사><혁명가의 아내><이순신><흙>등을 동아에 연재하여 그의 문명(文名)을 굳히고 많은 애독자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과로와 병고의 삵의 연속이었다. 척추카리에스와 신장 결핵으로 두 차례에 걸친 수술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조선일보로 옮아감에 따라 <유정><그 여자의 일생><이차돈의 사><애욕의 피안>등을 동지에 연재하고 있었다. 46세 되던 1937년에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종로서에 이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6개월만에 병보석이 되어 나왔다. 경의전병원에 8개월간이나 입원했다가 퇴원했다. 동우회 사건은 일심에서 7년 구형에 무죄선고, 이심에서 5년 징역, 고등법원 상고심에서 전원 무죄를 받기까지 4년5개월을 끌었다. 사건이 끝난 것은 일본이 진주만 공격을 하기 직전이었다.

그 사이 그는 이른바 '북지황군위문'에 협력했고 또'조선문인협회'의 회장이 됨으로써 친일행위의 첫걸음을 디디게 된다.51세 되던 해엔 한국인 학생의 학병 권유차 동경을 다녀왔다. 그는 양주의 사능(思陵)에서 8·15를 맞이했다.

8·15이후의 행적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다. 해방의 흥분이 서울을 휘몰아칠 때 그는 감히 서울 시내에 나오지 못했다. 흥분이 갈앉은 뒤 서울에 나타났을 때 그는 '향산광랑(香山光郞) 서울에 나타나다'라는 신문의 뉴스감이 되었다.

8·15이후<꿈>이라는 신작을 발표해서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켰고,<나>, <스무살 고개>등 자서전적 소설을 썼는데  그것은 훼절에 대한 참회나 하다 못해 변명이라도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반발심만을 일으켰을 뿐이다. 57세 되던 해 반민법(反民法)에 걸려 한 달쯤 수감되었으나 병보석으로 출감되었고, 그 후 불기소로 자유로워졌다. 그 사이 아들의 혈서 탄원서가 다시 세상의 화제를 불러일으킨 바 있었다. 이즈음 그는 친미반소(親美反蘇)적인 시를 써서 발표해서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친권력적(親權力的)인 기회주의자라는 공격 재료를 주었다.1959년8월16일에 그를 평양 감옥에서 보았다는 정치인 계광순(桂珖淳) 의 발언이 그에 관한 최근의 정보가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형편없는 잡곡밥을 제공하는 가운데 이광수만은 쌀밥을 주었다고 한다.

근대 인물 가운데서 이광수처럼 칭찬과 욕을 많이 받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명백한 점은 뒷날의 그의 행위는 어떠한 이유로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많지 못하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겨레의 지도자로 자처한 그가 지도자의 영광만을 구할 수는 없다. 이 사람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이가 누구라랴고 변호하는 입장에서도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높이에서 큰소리친 '허영'과'참월'을 변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8·15 이후의 행적에서도 우리가 진하게 발견하게 되는 것이 합리화된 현실추수주의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가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가 언제나 화려한 역할을 맡고 싶어했음도 사실이다.

장편 소설

작가로서의 이광수의 기여는 장편소설의 개척에 있었고 또 거의 모든 작품이 신문 연재소설로 성립된 것이다. 단편소설로서의 선뜻 내세울 만한 작품이 <무명>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그리고 작가로서의 그의 성가를 처음으로 굳혀준 작품이 한글로 된 첫 장편인 <무정>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매일신보》의 청을 받고 생활비에 충당하기 위해서 씌어졌다는 이 작품은 그 매력의 태반을 역사적 흥미에 의존하고 있다. 연애소설이냐, 민족의식 고취의 소설이냐 하는 것으로 쟁점이 된 적이 있는 듯하지만 작가의 빈약한 솜씨나 일정치 못한 '관점(觀點)'의 빈번한 옮겨짐으로 말미암아 빈약한 구성에 따르게 마련인 혼란스러운 인상의 반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의 통열한 비판자 인 김동인은 되풀이해서 이 작품이 '과도기의 조선의 모양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장면이 있음을 말하고 잇다. 주인공인 새세대의 이형식과 그의 약혼자인 신여성 김선영, 그리고 구도덕의 구현자라고 흔히 얘기되던 박영채 등을 등장시켜 작자 특유의 개화 사상도 개진시켜 보고 이 땅에 퍼져 있지 않은 연애도 시켜 보고 아울러 세태도 보여 주고 민족의 앞날에 대한 자기 나름의 비젼도 보여 준 것이 이 작품의 실상이다. 성격 묘사, 작중 인물과 행동과의 필연적인 인과관계 사건의 있을 법한 개연성, 이 모든 면에서 일관성 없고 미흡하기 짝이 없으면서도 당시의 독자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다는 것은 그것이 새롭다던가 당대의 유일한 대중 매체의 주요 읽을거리였다는 부수적인 생각밖에도 몇 가지의 성격에 의존하고 있다.

첫째, 누누이 지적되어 온 바와 같이 그것을 새로운 스타일로서 새세대들에게 호소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아직 그 문장에 있어서는 기미년《창조》잡지가 나타나서 구투를 일소하기까지는 그래도 '이러라' '이로다' '하더라' '하노라'의 투가 많이 남아서 <무정>에 있어서도 그 예를 벗어나지 못하였지만 조선 국어체로서 이만치 긴 글을 썼다 하는 것은 조선문 발달사에 있어서도 특기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 <무정>이 조선 사회에 던진 파동은 특별할 만한 것으로서 거장 이인직이 그 새 몇 개 발표한 소설은 감정에 있어서 재래의 감정이었는데 새로운 감정이 포함된 소설이 조선에 나타난 효시로도 <무정>은 특필한 가치를 가졌다는 '춘원연구'에서의 김동인의 발언을 아직도 <무정>에 관한 한 권위 있는 유권해석이라 할 것이다. 즉, 새로운 감정이 새 스타일로 표출되어 유례없는 호소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숙련 독자들에게 있어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미숙함이나 부자연스러움은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그들은 완전히 매혹된 것이다.

둘째로 그의 이 작품은 다른 당대적 주제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당대 독자들의 가장 초급한 관심사를 다양하게 상상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새로운 시대의 전환기에 사람들은 특히 젊은이들을 사로잡는 관심사는 기성의 가치체계나 윤리관이 지시하지 못하는 삶에의 대처법이다. 이씨 조선의 붕괴와 식민주위자의 도래, 이에 따라 들어오는 새로운 삶의 양식, 도시와 농촌의 괴리현상의 심화, 특히 신학문이라는 다양한 지식분야의 전개는 새로운 사회적 유동성의 가능성과 함께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삶을 대처해야 할 것인가란 문제를 하나의 절실한 당면과제로서 제기한다. 적절한 것이건 닥치는 대로의 것이건 이광수의 소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한 처방의 구실을 하였다. 그의 소설을 읽고 도일 유학을 결심했다고 술회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것은 물론 극소수의 중산층 자제들의 경우이겠지만 인생 상담적인 요청을 그의 작품이 훌륭히 대답해 주었다는 증거가 되어주고 있다. 그의 설교 취미는 김동인을 위시한 많은 비판자들이 지적하는 바이지만 이것은 그의 자기 부과적(自己賦課的)인 사명감의 발로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시류(時流)를 타는데 있어서 민첩한 그가 독자들의 묵시적인 요청에 예민하게 반응했다는 증거도 될 것이다. 고해(告解)의 전통도 없고 구왕조의 몰락과 함께 과거의 문화가 붕괴해 가고 있는 터전에서 이광수는 요즈음의 종교가나 대학교수, 여론 형성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저널리스트 및 우국지사의 역할을 작가로서 혼자서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무정>이 끼친 충격적인 영향력이 여기에 있다.

<무정>의 끝이 삼랑진 수해로 민족애의 호소와 민족의 구제란, 문제로 끝을 맺고 있는 것은 소설의 숙련 독자들에겐 우연과 억지로 보일지 모르나 당시의 미숙련 독자들에겐 극히 감격적인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아아, 우리의 땅은 날로 아름다워 간다. 우리의 연약하던 팔뚝에는 날로 힘이 오르고, 우리의 어듭던 정신에는 날로 빛이 난다……

  어둡던 새상이 평생 어두운 것이 아니요, 무정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밝게 하고 유정하게 하고 즐겁게 하고 가멸케 하고 굳세게 할 것이로다. 기쁜 웃음과 만세의 부르짖음으로 지나간 세상을 조상하는 무정을 마치자.

작중인물의 성격과 그 성격의 필연이 엮는 '있음직한 것'의 인과적 추구로 설득력을 발휘하고 있는 근대소설의 이론으로 보자면 이것은 김동인의 말대로 '몽롱한 결론'일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당대의 미숙련 독자들에게 있어 그것은 하나의 소망 성취의 묵시오 희망에의 호소였을 것이다. 작품의 약점이나 결함이 도리어 독자들에겐 호소력의 소재지로 작용했을 것이다. 위와 같은 성질은 그의 많은 작품에도 어느 정도 해당되지만 <무정>은 그 단초로서의 의미를 두텁게 가지고 있다. 뒷날 이광수와 함께 떠올리게 되는 계몽문학의 여러 특질이 잘 나타나는 것도 이 작품이고 그의 국사연(國士然)하는 자세가 가장 잘 나타나는 것도 이 작품이다. <무정>의 성공에 고무되어 같은 해에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던 <개척자> 역시 청년층의 절대적인 환영을 받은 바 있으나 대개 성공에 고무되어 찍어낸 작품이 그렇듯이 앞에 작품보다는 뒤지는 작품이다. 그러나 성격상으로는 비슷한 점이 많다.

이에 반해서 16년 후 작자 40대의 작품인 <유정(有情)>은 <무정>과는 상당히 떨어진 거리에서 출발하고 있다. 우선 계몽문학이라는 통속적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작품으로 기성 도덕체계가 순수한 사랑에 파멸을 가져오게 하는 순애 소설이다. 민족의 스승임을 자처했던 그는 이 소설에서도 어떤 가락을 풍겨 주고 있음이 사실이다.

남화는 본명을 상호라 하고 호를 백파(白坡)라고도 하고 태백광노(太白狂奴)라고도 하여 백암 박은식과 함께 강유위, 장병린 같은 지사들과 교유하며 비분강개한 시와 글을 짓고 다니던 이요, 그 초취인 조선 부인은 남 백파가 중국에 유랑하는 동안 죽고 정임을 낳은 부인은 장병린의 친척이라는 중국 여자로서 장씨오. 이 장씨 부인이 남 백파의 글을 보고 사랑하였다느니만큼 글을 잘 하였소.

작품의 여주인공 남정임은 이 우국지사의 딸인 것이다. 관헌에 체포되어 복역 중 병으로 형집행 정지가 되어 석방되었다가 병원에서 죽은 남화의 딸을 맡은 최 석과 남정임의 사이는 처음 부녀 같은 사이였으나 이성간의 그것으로 변한다. 아내의 징투와 사회의 지탄이 두 사람을 일본과 시베리아로 떠나게 한다. 정임에 대한 사랑을 억제하는 최석의 노력은 죽음으로 끝나고 정임은 병을 얻게 된다. 두 사람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나는 것이다. 10여 년에 걸친 직업작가로서의 훈련을 겪고 나서 쓴 이 작품은 신문 연재소설이라는 한계 속에서나마 비교적 정교한 플롯을 가지고 있으며 문장에 있어서도 어색함과 부자연스러움이 많이 가시어진 단정함을 엿보이고 있다. 분량에 있어서도 파란만장함을 꾸며내기 위한 '샛길'이 많지 않아 적당한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허약한 점이 많이 있다. 남정임과 최석의 아내의 대조 같은 것은 어떤 상투성에 매여 있고 또 소설의 결말에 있어서도 적지않은 신파조가 엿보인다. 그러나 이만 정도의 격조를 유지한 것은 작가 나름의 노력의 소산이라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작가 자신은 상당한 애착을 나타내어 가장 자신있는 작품으로 <유정>을 들었다고 한다.

작가가 47세 때 집필하여 39년 《문장》 창간호에 권두 소설로 발표되었던 <무명(無名)>은 아마도 숙련 독자들이 저항감 없이 읽을 수 있는 몇 편 안 되는 작품의 하나일 것이다. 동우회 사건으로 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당시의 경험을 토대로 해서 씌어진 듯이 보이는 이 꽤 긴 단편은 정확하면서 부담없이 읽히는 당당한 문장, 치밀한 인간 관찰, 그리고 선명한 묘사력으로 이 광수의 재능을 잘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이다. 그가 좀더 집중적 효율적으로 운영했더라면 그릇 큰 작가가 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촉발시켜 준다. 이광수가 그 후 이만한 작품을 영영 보여 주지 못했다는 것은 본인을 위해서 큰 손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광수 소설의 큰 특색은 그가 누구보다도 많은 영향력을 발휘했고 신문학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많은 독자를 가졌던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문학적 후계자가 거의 없다는 사실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비숙련 독자의 수많은 애독이나 찬미에도 불구하고 이광수를  문학상의 스승으로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것은 일제 말기에 있어서의 그의 정당화될 수 없는 거동과 관련되는 면도 있을지 모르나 사실 그의 작품을 모델로 했다는 작가도 또 그를 통해 문학을 알게 되었다고 실토하는 숙련 독자도 보이지 않는다. 그의 문학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그에게서 개인적 은고(恩顧)를 입은 사람이거나 문학에 관여하지 않는 사람이라던가, 또는 대개의 경우 전문적인 신문소설의 작가라는 것은 흥미롭다. 사실 그의 많은 역사소설은 그의 한때의 친구였던 홍명희의 《임꺽정》을 따르지 못한다. 당대 현실을 다룬 소설로 후배인 염상섭의 《만세전》이나 《삼대》를 따르지 못한다. 그의 단편은 김동인이나 이태준의 몇몇 단편을 따르지 못한다. 그럼에도 비숙련 독자에게 이광수만큼 추억의 흔적을 남겨 놓은 사람은 달리 없었다. 여기에 이광수 문학의 자랑과 부끄러움이 있을 것이다.

이광수가 닦아 놓은 데 한 몫을 한 길을 따라 그 후 많은 작가들이 등장해서 제가끔의 기여를 한 바 있다. 그러나 세련도나 형태상의 고려에 있어 많은 진전이 있었음에도 그 후의 문학이 주제상의 왜소화 과정을 걸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형태상의 세련이 실은 이 왜소화 과정의 부산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광수처럼 모순에 찬 인물도 드물 것이다. 그의 국사적 포즈는 유명하지만 이 포즈가 그를 '직업적인 아마추어 작가'란 모순으로 굳혀 놓았는지도 모른다. 예술가로서의 그가 얼마나 아마추어로 남아 있었는가 하는 것은 그의 시가(詩歌)에서 더 분명히 드러나 있다. 그의 시의 한심한 무신경과 단순성을 상기해 보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그의 시론(時論)

이광수의 글과 사람됨을 아는데 있어서 소설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그의 시론적인 글이다. 그가 언론인으로 종사했다는 삽화적인 사실과 그가 소설가로서 만족치 않았다는 사실에서도 그것을 엿볼 수 있지만 직접적으로 작자가 '소설가'의 마스크를 벗고 설교하고 비판했다는 점에서 당대에의 충격은 한층 심각한 것이었다.

그의 최초의 시론으로 꼽히는 것은 1910년 대한 흥학보에 발표된 <금일 아한 청년(今日我韓靑年)과 정육(情育)>이다.

정치적 몰락을 가져온 조국의 과거에 대한 젊은이다운 혼신의 반역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글에서 그는 우상 파괴자로서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사회적인 제재와 타인의 체면에 좌우되어 '능히 자동 자진(自動自進)으로 자유자재하여 자기 실리를 불경(不敬)하고  도덕 범위 내에 활동하는 자가 무하고 사회재재의 노예가 되어 신성한 독립적 도덕으로 행동을 자율치 못한다.'고 한 뒤 정육을 통해 인간을 자율적인 주체로서 활동시켜야 한다는 요지의 글인데, 그의 뒷날의 시론의 원형(原型)이 되어 주고 있다. 그리고 가장 논쟁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민족개조론>과 <자녀중심론>이다.

자녀중심론은 스물 이곱 되던 해, 삼일 운동이 일어 나기 1년 전에 《청춘(靑春)》지에 실렸던 글이다. 유교적 대가족주의의 도덕율에 대한 도전적 이 글은 당시엔 실로 충격적인 글이었다. 그 이전의 <조선 가정의 개혁>, <야소교의 조선에 준 은혜> 등에서 개인의식이나 평등 사사의 일단을 펴 보았던 그는 이 글에서 대담한 자기 중심론을 펴고 있다.

  생물학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인류의 목적이 개체의 보존과 종족의 보전에 있다 하면 천하의 중심은 자기요 다음에 중한 것은 자손일 것이니 타인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는 것은 특수한 경우를 제한 외에는 악(惡)이라……자녀는 자기편으로 보면 독립한 개체니 자녀는 실로 자녀 자신을 위하여 난 것이요 부조 자신을 위하여 난 것이 아니니……

 구조선의 자녀는 오직 부조를 위하여서만 살았고 일하였고 죽었다. 부조의 뜻이 곧 그네의 뜻이요 부조의 목적이 곧 그네의 목적이었다. 최근 삼백여 년의 조선인의 윤리 교과서되는 《소학》은 실로 효(孝)에서 시하여 효에서 종하였다하리만큼 자녀를 부조의 노예로 만들고야 말려는 효의 사상을 고취하였다.

이러한 자아 중심론이 충격적이었던 것은 당대의 기성 가치관에 대한 정면 충돌에서 나온 것임을 말할 것도 없으나 그 주장의 파격적인 과격성에도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자(死者)는 사자로 하여금 장(葬)케 하고 생자는 생한 자 혹은 생할 자를 위하여 생하게 하여야 되겠다. 필요하거든 조선의 분묘도 헐고 부모의 혈육도 우리 양식을 삼아야 하겠다'는 표현의 충격성을 우리는 삼일운동 이전의 시기의 사회적 맥락 속에 옮겨 놓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유교의 기본원리의 하나인 효에서 망국의 원인의 일단을 찾고 있다. 그는 효자가 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우며 젊은이에게 강요되는 희생인가를 실례로서 들면서 통박하고 있다. 조혼(早婚)의 구습에 대한 비판과 함께 가장 설득력 있는 초기 논문의 하나일 것이다.

<민족 개조론>은 개벽사 주간이던 김기전(金起田)의 소청으로 붓을 든 것이라 전해진다. 31세 되던 1922년에 《개벽》에 발표되었던 논문이다. 상해로부터의 귀한을 계기로 그는 일제 권력의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의 국민 교화운동이나 자기 수양을 통한 사회적 발전이라는 시점을 갖게 된다. <민족개조론>은 그러한 시점 혹은 자기 합리화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그는 '우리 결함을 분명히 앎으로써 다시 살아날 길을 분명히 찾아내기'위해서 민족 개조가 불가피하다고 역설한다.

    이렇게 개인으로나 민족으로 신용이 없는데 모두 공상고 공론뿐이요, 실지로 행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아무 이루어 놓은 것이 없습니다.……우리는 수십 인의 명망 높은 애국자들을 가졌거니와 그네의 명망의 유일한 기초는 떠드는 것과 감옥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과 해외로 표박(漂迫)하는 것인 듯합니다……

이러한 말은 일단 귀국해서 식민지적 상황에서의 최대한 일을 해보자는 그의 숨김 없는 심정이 반영되면서 자기 변호의 가락을 띄우고 있다. 그는 정치적 권리의 평등과 자유를 내세우는 정치 혁명론자들, 거기에 경제적 및 사회적 권리를 첨가하는 경제 혁명론자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진리와 양심의 혁명론자인 간디로 '과거의 역사에 표현되어 온 인류 구제의 이상'을 대변하고 개인의 수양을 통한 윤리적 구제의 원리를 제시한다. 인간의 내면 세계를 하나의 독립된 단위로서 현실과 대비시키고 영혼의 구제를 통해서만 인간의 구제가 가능하다는 설파는 세속 권력에 대한 순응을 전제로 하고 있고 이와 같은 수양의 원리가 식민지 현실의 묵인을 전제로 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독립 운동가의 비방도 서슴지 않는데 그것에 현실의 원리란 이름을 빌어서 하고 있는 것은 어느 때나 발견할 수 있는 타협의 원리란 점에서 우리의 눈길을 끈다. <민족 개조론>의 정신이 아무리 원론적으로 일리 있는 면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적전(敵前)에서 벌어진 자기 진영 약화의 이적행위 구실을 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물질적 이해 관계를 달리하는 개인이나 집단이 대립되는 입장을 취하는 것은 '사람 속의 자연'이다. 이 때 갈등과 투쟁을 종식시키는 것은 이해 관계의 합리적 조절을 통한 정의의 실현밖에 없다. 그러한 측면을 도외시하고 단결과 사랑과 합심과 협동을 강조하는 것은 일조의 야바위가 아니면 실효성 없는 구호이다.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은 한 개종자의 원한의 해소나 가상적(假想敵)에의 공격이 없이 하나의 단합을 위한 계기로서 '사랑'으로 씌여졌다면 혹 설득력을 발휘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이 문서는 이 광수의 개종 후의 마음의 자취를 연구하는 자료로서 더 흥미있는 읽을거리가 된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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