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의 노래 / 동화 / 전문 / 연성흠
by 송화은율은희의 노래 / 연성흠
1
몹시 무더운 여름 토요일날 저녁이었습니다.
누런 벽돌로 높게 쌓은 어마어마한 담 사이로 골패짝 만하게 뚫린 쇠창살
문에서 수백 명이나 되는 어여쁜 색시들이 밀물 밀리듯 쏟아져 나옵니다.
길바닥으로 흩어져 쏟아지는 이 어리고 또는 점잖은 어여쁜 색시들은 아침
일곱시부터 저녁 여섯시까지 온종일 독한 담배 먼지를 쏘이며 담배 만들고
나오는 연초 여직공들입니다.
이 가엾은 품팔이들은 한 달에 한 번이나 두 번밖에 안 돌아오는 노는 휴
일날을 속을 태우며 온종일 기다리다가 내일 하루 편히 쉴 것을 즐겁게 생
각하여 고단한 줄도 모르고 쌍쌍이 짝을 지어 흩어져 나오면서 소군소군 속
살거립니다.
은희도 어젯밤부터 잠을 못 자면서 즐거운 노는 휴일이 돌아오기를 몹시도
기다렸던 것입니다.
은희는 집에 돌아오는 길로 저녁밥을 먹고 그대로 쓰러져서 내쳐 자다가
훤하게 동틀 때쯤 해서 일어났습니다.
은희는 이부자리를 걷어치우고 나서 다른 날과 같이 들창에 몸을 의지하여
금방 쓰러지려는 희미한 별들을 바라보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시작했
습니다.
“오늘 하루는 단 한 사람에게라도 도움이 되고 유익이 될 만한 일을 해야
할 텐데...... 어머니! 어머니께서 이 가엾은 딸을 생각해주시는 뜻으로 남에게
도움이 되고 유익이 될 만한 일을 하도록 인도해주십시오.”
은희는 3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이같이 빌었습니
다.
은희 어머니는 살아계실 때 일상 은희를 불러 앉히시고 ‘옳은 일이 아니거
든 하지 말고 손톱만한 일이라도 남에게 도움이 되고 유익이 되는 일이거든
기어이 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은희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는 가엾은 몸입니다만 어머님께서 가르
치신 말씀은 잊어버리지 않고 매일 아침과 밤이면 그 말씀을 생각하고 지냈
던 것입니다.
공장에서 함께 일하는 다른 애들은 곡마단이나 영화 구경을 갑니다만 은희
는 사람만 모이지 않는 조용한 곳으로만 골라서 다닙니다.
제비가 날며 잠자리가 나는 것을 바라볼 때 은희는 3년 전 여름에 어머니
를 모시고 동물원 구경 갔던 생각이 났습니다.
은희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몹시도 보고 싶었습니다. 은희는 여름밤 시원한
뒷동산에 어머니를 모시고 앉아서 늘 부르던 노래 생각이 났습니다. 은희는
그 노래를 부를 때가 또 한번 왔으면 하고 지나간 그때를 몹시도 그리워했
습니다. 은희는 참을 수가 없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 노래를 부르면서 옆
에 사람이 있을까봐서 흘금흘금 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그 노래를 반도 못 불러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까지 목소리를 함께 맞추어 그 노래를 불러주시는 것 같
은 생각이 들어서 점점 큰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면서 터덜터덜 걸어갔습니
다.
“꽃보다도 더 고운 내 아들딸아
네 엄마는 늙어가고 젖은 시든다
쓸쓸한 저 먼 길을 언제 다 걷나“
은희는 참말로 목소리가 고왔습니다. 은희의 노래 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떠
한 설움을 가진 사람이라도 위로를 받았습니다. 아무리 나쁜 마음을 가진 사
람이라도 그 노래를 들을 때는 마음이 고와졌습니다.
은희는 노래를 부르면서 어떤 냇가로 왔습니다. 냇물 위에는 아직도 안개가
끼어 있었습니다. 마침 그 곳에는 어떤 젊은 사람 하나가 그의 젊은 아내와
의논을 하고 낳은 지 얼마 안 된 어린애를 버리고 달아나려 했습니다. 젊은
사나이는 벌써 냇물 위에 가로놓인 다리 위에서 달아날 준비를 하고 있고
젊은 아내는 어린애를 냇물 위에 던지려는 판이었습니다.
그때 젊은 두 부부는 안개 사이를 베어 집고 곱게 울려오는 은희의 노래
소리를 들었습니다.
내 아들아 내 딸아 어서 오너라
맘껏 힘껏 행복을 빌어보자
젊은 부부는 전기에나 감전된 것과 같이 섰던 자리에 뻣뻣이 서 있는 채
꼼짝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젊은 부부는 금방 버리고 달아나려던 어린애를
생각했습니다.
젊은 남자는 그 아내의 앞으로 뛰어와서 어린애째 그 아내를 얼싸안고 대
성통곡을 했습니다. 그래서 두 부부는 다시 어린애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
습니다.
2
은희는 냇가를 휘돌아서 어느 조용한 동리로 들어갔습니다.
마침 그때 그 동리 안의 부잣집 주인이 죽어서 장사 치를 준비를 굉장히
하고 있는데 한옆에서는 그 죽은 부자의 큰아들과 작은아들 사이에 재산 싸
움이 일어나서 요란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두 아들은 방 속에다 죽은 그 아버지의 송장을 제쳐놓고 서로 잡아삼킬 듯
이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은희의 고운 노래 소리가 고요하게 들려왔습니다.
“내 아들아 내 딸아 요란스럽다.”
갑자기 초상집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습니다. 눈이 벌개서 싸우고 있던
형제는 마치 돌아간 그 아버지에게 꾸지람이나 들은 것같이 찔끔했습니다.
“얘! 내가 잘못했으니 용서해다오.”
하고 형은 동생에게 사과했습니다.
“형님, 아니올시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동생이 그 형에게 사과했습니다.
형제는 그 아버지의 시체 앞에 꿇어 엎드려 목을 놓고 울었습니다.
3
은희는 종달새와 같이 온종일 노래를 부르며 거리로 돌아다녔습니다. 이제
는 해가 꽉 졌습니다. 은희는 어떤 다리 위에 이르렀습니다. 다리께는 뽀얀
안개 속에 뒤덮였습니다. 그 다리 모퉁이에 보기에도 가엾은 늙은 장님 하나
와 그의 손자뻘밖에 안 되는 어린애 하나가 서 있었습니다. 그 늙은 장님은
그 어린애에게 이같이 말했습니다.
“나같이 불행한 인생은 살아 있어야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 여기서 죽겠다.
너는 자라서 아무쪼록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그때 어린애가 대답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 저도 죽겠습니다. 저도 할아버지가 안 계시면 살
아있을 재미가 없습니다.”
이같이 이야기하던 두 사람은 다리 아래로 뛰어내리려고 준비를 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은희의 고운 노래 소리가 곱게 들려왔습니다.
내 아들아 내 딸아 어서 오너라
맘껏 힘껏 행복을 빌어나 보자
이 늙은 장님과 어린애는 몸을 움츠렸습니다. 그리고 고운 소리에 귀를 기
울였습니다. 그래서 둘이서는 손을 맞잡고 다시 길거리로 향했습니다.
4
은희는 하루 종일 노래를 부르며 돌아다녔기 때문에 피곤하여 집에 돌아오
는 길로 저녁밥도 엄벙덤벙 먹고 쓰러져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자정이나 거의 되어 은희는 깜짝 놀라서 창문을 열어젖히고 밖을 내어다보
았습니다.
하늘에는 파란 별이 깜박거립니다.
그것이 은희의 눈에는 돌아가신 어머님의 인자스러운 눈같이 보였습니다.
은희는 다시 어머님이 살아계실 때 들려주시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은희는
두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그 어머니를 생각하며 빌었습니다.
“어머니! 저는 단 한 사람에게라도 도움이 되고 유익이 될 만한 일을 도무
지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외로운 어린 딸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만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십시오.”
파란 별들이 더한층 깜박거리고 거리의 전차 소리까지 끊기었을 때는 은희
는 편안히 쌔근쌔근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출처 : 공유마당
이용조건 : CC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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