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 이야기
by 송화은율은행나무 이야기
정 창 희(서울대 지질학과)
은행나무는 자랑스러운 것들을 많이 가졌다. 곧고 튼튼하고 깨끗한 줄기, 굵고 싱싱한 가지들, 부드럽게 살랑이는 부채꼴의 잎들, 그리고 은빛의 은행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자랑스러운 것은 열매인 은행이다. 그 속씨가 포도알처럼 둥글게 생겼다면, 그것에 매력을 느낄 이는 그리 많지 않으리라. 둥글납작하면서도 예리한 칼날이 한 바퀴 휘이 둘러져 있는 그 꼴은 깜찍해 보이기까지 한다. 곧, 입술을 나불거리면서 무엇인가 지저귈 것만 같다. 사람들은 은행을 본떠서 마고자 단추를 만든다.
은행이 영글어갈 무렵에는 사람들이 그의 나래 밑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간다. 숫제 아주 멀찍이 떨어져서 활모양을 그리며 숨가쁘게 달리기도 한다. 은행나무가 은행들에 최후의 정열을 부어넣을 때에 뿜어낼 수 밖에 없는 그 진하고도 독한 내음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참지 못할 만큼 역겨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은행나무를 아끼고 이해하는 이에겐 그 내음이 프랑스의 시골 토종 치즈의 독특한 향기보다도 더 은은하고 달콤하게 느껴지리라. 구태여 치즈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네 담북장의 향기가 은행의 체취를 풍긴다. 또 그것은 몇 년 묵은 맛좋은 젓갈의 냄새와도 같다. 오랜 역사를 지닌 민족들은 저마다 고유한 발효식품을 개발해서 즐기고 있다. 은행의 향기야말로 은행이 지닌 여러 억 년의 역사를 말해주는 증인이다.
식물학은 은행나무를 나자식물로 친다. 뒤에서 다시 이야기가 되겠지만 은행나무는 천 년 전에는 지구 위에서 중국 땅에서만 몇 그루가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그 뒤에 거기에서 한국과 일본 같은 곳으로 옮겨지고,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온세계로 전해진 순수한 한 핏줄기의 나무로서 일억오천만 년 전의 번성기에서와는 달리 변종도 없고 다른 품종도 없다.
은행씨를 둘러싼 노란 겉씨껍질은 얼핏 보면 피자식물인 살구나 복숭아의 과육과 비슷하나 발달이 중지되어 있다. 은행은 피자식물의 열매를 흉내만 내다가 말아버린 덜된 작품이다. 아니, 실패작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피자식물보다 덜 발달한 하등식물의 설움이 여기에 나타나 있다. 하늘이 이만큼밖에 허락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고귀한 과실이 못된” 바에야 토라져서 짓궂게 고약한 냄새나 피우겠다고 나선 열매는 결코 아니리라.
모든 식물은 종류에 따라 약하거나 강한 독을 합성하여 그 몸의 일부 또는 전부에 간직하기 마련이다. 담배의 니코틴, 양귀비의 모르핀, 또는 소를 중독시키는 몇 식물 속의 독들은 대부분이 “알칼로이드”라고 불리는 극독약 성분이다. 대마초 순의 마취성, 감자 눈의 솔라닌, 숙주나물의 독, 살구씨와 복숭아씨와 사과씨 따위에 생기는 무서운 청산도 극독약 성분이다. 여느 나무의 새싹이나 새 순에도 독이 있는 경우가 많아서 진딧물이 잘 붙지 못한다. 이것은 다만 식물들이 스스로 제 몸뚱아리의 어린 부분을 보호하고 씨를 지키도록 하늘이 허락한 종족 보존의 수단인 것 같다. 심지어 갓난아기나 동물의 갓난새끼도 여러 가지 병에 면역성을 갖는데, 이것도 병균들의 처지에서 볼 때에는 동물의 어린 싹에도 독성이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식물이 독을 합성하기는 아주 쉽다. 그 원료는 물, 탄산가스, 암모니아 및 황 따위이며 이들만이 있으면 대부분의 독은 합성될 수 있다. 인류는 이런 독을 거꾸로 이용하여 적당히 섞고 조절하여 옛날부터 병을 고치는 생약으로 써왔다.
은행의 겉씨껍질 속에는 독이 들어 있다. 이것은 산이나 들에서 자생하는 웇나무의 웇과 비슷한 독으로서 “빌로볼”이라는 물질이다. 이 밖에도 은행의 겉씨껍질 속에는 “은행산”이 있다. 이런 것들이 일으키는 피부염이 은행옴이다. 또 은행나무잎에는 살균작용을 하는 “플라보노이드”라는 독이 있다. 은행나무잎을 책 속에 끼워두는 것은 그것을 사랑하는 갸륵한 마음씨에 나왔겠으나, 책에 좀이 슬지 않게 하는 뜻밖의 효과도 볼 수 있다. 농가에서 거름을 만들 때에 은행잎을 섞어서 그 거름이나 흙속의 해로운 벌레를 죽이는 것도 바로 이러한 독성분을 이용하는 보기라고 하겠다.
은행의 부드러운 연두색의 속살은 먹음직스럽지만 날로 먹으면 독성이 작용한다. 날것을 150알 남짓 먹으면 사람의 목숨이 위험하다. 그러나 굽거나 신설로에 넣어 끓여 먹거나 하면 괜찮다. 한약방에서는 기름에 졸이거나, 기름에 담가서 오래 두었다가 약으로 쓰기도 한다. 목에 걸린 가래를 없애는 데에, 또 기관지염을 다스리는 데에 효과가 있으며, 옛날에는 폐병 치료에도 썼다고 한다.
최근에는 서독에서 한국의 은행나무잎은 수입해간 일이 있다. 아마도 “플라보노이드”같은 약품을 뽑으려는 뜻에서일 것 같다. 혹시 암을 치료하는 묘약이 그 속에 들어 있지나 않을까 하는 주제넘은 생각도 해본다. 포플러 같은 나무에는 혹이 많이 돋지만 은행나무는 참으로 깨끗하니까 말이다. 과민성인 사람은 은행나무 아래를 지나가기만 해도 두드러기가 생기고 어떤 이는 재채기를 연거푸 하기도 한다.
이런 분들은 은행나무와는 끝내 사귀지 못할 서운하고 불행한 운명을 가졌다.
서양에서는 은행나무를 “소녀머리 나무”라는 뜻으로 “메이든 헤어 트리”라고 부른다. 이것은 가르마를 탄 처녀의 머리 모양이 은행나무 잎의 모양과 비슷한 데에서 나온 것일 것 같다. 1712년에 독일의 한 식물학자가 은행나무의 독특한 모양을 발견하고, 이 사실을 곧 학계에 보고하였다. 그런데 1771년에 유명한 생물학자인 린네가 그의 책에서 은행나무에 “깅쿄”(Ginkyo)라는 학명을 주었다. “깅쿄”란 “은행”을 적는 한자의 일본 발음이다. 린네는 이렇게 “옳게” 써내었는데 출판사에서 식자공이 잘못하여 와이(y)자를 지이(g)자로 심었고 이것이 교정할 때에 발견되지 못하여 “Ginkgo”로 되어 버렸다. 서양말 사전에는 “Ginkgo”와 “Gingko”의 두 가지로 표기되어 “깅크고우” 또는 “깅코우”로 발음된다. 아뭏든 이 학명은 불행하게도 식자공의 오식으로 영원히 제 발음을 잃어버린 학명의 한 보기이다.
은행나무를 중국사람들은 귀족의 후손이란 뜻의 이름으로 “공숀스”라고도 한다. 은행나무가 귀한 나무라는 뜻에서일까? 그들은 은행나무잎이 마치 오리발처럼 생겼다고 해서 은행나무를 “야찌아오스”라고도 한다.
“마주보아야 열매를 맺는다.”라고 하면 누구나 곧 은행나무의 이야기인 줄을 알 만큼 되어 있다. 이것은 은행나무가 수나무와 암나무로 딴 그루로 되어 있어, 암나무에만 열매가 열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은행나무, 소철 및 주목 따위는 모두 암수딴그루이다. 암컷과 수컷이 있는 나무가 그리 드문 것은 아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버드나무, 수양버들 및 포플러 따위도 암컷과 수컷이 딴 그루이지만 이들이 “마주보아야”하는 따위의 말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열매가 향기로운 은행에 견주어 아주 초라하기 때문이리라.
암수딴그루인 은행나무는 어떤 방법으로 새끼를 칠까? 한 개의 꽃에 암술과 수술이 있으면 쉽게 정받이가 되어 열매를 맺을 수 있어서 편리하겠지만, 이런 생식은 우리들이 보기에는 김이 빠지고 허전한 것 같다. 암컷과 수컷이 뚜렷이 다른 개체로 되어 있어야 그럴듯하지 않을까? 사람이 암수한그루로 되어 있다면 어떨까? 어떤 점에서는 호젓하겠지만 이런 인생에는 긴장도 낭만도 없을 것 같다. 성균관에는 500년전에 심었다고 하는 은행나무가 있다. 그때에 성균관 유생들은 향기가 역겨워 은행이 열리지 않는 수나무만을 골라 심었다고 한다. 그 처사는 너무 가혹하지 않았을까? 아득히 먼 곳에 있는 암나무와도 정을 통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때의 그들의 처사는 아무래도 비정한 것 같다.
동물에는 난자와 정자가 있고 이들이 적당한 시기에는 결합하면 태아가 생긴다. 다만 하등동물에는 간단한 분열하여 번식하는 것도 있다. 식물의 경우에는 하등식물 쪽에 자유롭게 움직이는 정자가 있고 고등식물에는 정자가 없다. 대체로 동물과 식물은 이런 점에서 서로 반대이다.
19세기 말에 히라세라는 일본사람이 은행나무에서 정자를 발견하기 전에는 은행나무가 나자식물인지 또는 피자식물인지를 판단하기 어려웠다. 정자가 발견됨으로써 피자식물보다 하등식물임이 더 뚜렷해졌다. 은행나무에는 잎에 은행이 달리는 경우가 있다. 잎에 열매가 생기는 식물도 하등식물이다. 은행나무는 아주 우연하게 그 잎에 은행을 붙이는데 이로 말미암아 그 자신이 하등식물이라는 사실을 “아차”하는 순간에 폭로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런 우연이 은행나무로 하여금 옛 선조의 모습을 재현시켜 혈통을 찾게 하였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런 사실도 정자를 가지는 것과 아울러 은행나무가 피자식물보다고 한 계급이 낮은 나지식물임을 알게 해준다. 그러나 은행나무는 어엿한 꽃식물이다. 다만 화려하지 못한 꽃을 달았기 때문에 아래 계급에 들 뿐이다.
은행나무는 자랑스러운 몸뚱아리와 향기로운 열매를 가졌지만 아주 쓸쓸한 나무다. 모든 나무가 벌레를 불러서 사귀고 개미들의 등반을 허용하여 번거로운 사교장을 제공하지만 은행나무는 참으로 고결하기만 하다. 더욱 그가 고독한 것은 오직 지구 위에 한 종 밖에 없는 식물이기 때문이다. 사과와 배는 서로 접붙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사촌 사이의 식물들이다. 그러나 은행나무에는 이렇게 접붙일 수 있는 가까운 친척이 전혀 없다. 세계의 어디에도 은행나무로서 자연숲이 이루어진 곳은 없다. 모두 사람의 보호 아래 자라고 옮겨 심어졌다. 은행나무야말로 참으로 드문 순종이다. 그러나 은행나무도 개량할 수는 있다고 한다. 여느 은행나무는 심은 지 20년쯤이 지나야 열매를 맺으나 접붙이기의 묘를 살리면 2년에서 4년이 지나면 열매를 맺는 은행나무를 얻을 수 있다.
삼억 년 전쯤의 석탄기에 은행나무의 선조가 나타났다. 더 뚜렷한 은행나무의 선조들은 이억오천만 년 전쯤의 폐름기에 나타났다. 이 선조들은 이제 화석으로부터 그 모양이 복원되어 “트리코피터스” 및 “스페노바이에라”아는 학명을 받게 되었다. 이억삼천만 년 전쯤부터 칠천만년 전쯤까지의 중생대에 들어서면서 번성하기 시작한 은행나무의 선조는 “깅고이테스”, “바이에라” 및 “깅고디움”따위의 일곱 속이고 여기에는 수십 종이 속하였다. 이들 고대 은행나무는 일억오천만 년 전쯤인 쥬라기에 크게 번성하였고 칠천만 년 전쯤인 백악기의 말엽까지에는 세계 곳곳에 퍼졌으나 그 뒤에 점차로 쇠퇴하여 한 종의 한 속인 현생 “깅크고우 비로바”만이 남게 되었다.
중생대의 은행나무잎은 현생 은행나무잎보다 두세 곱이나 또는 그보다 더 컸다. 그때의 은행나무잎은 여러 개의 홈으로 갈라져 있었는데, 현생의 잎은 갈라지지 않았거나 한두 속에 홈으로 갈라져 있을 뿐이다. 그런데 현생 은행나무도 기름진 땅에 재배하면 잎이 여러 갈래로 갈지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잎이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고 해서 다른 종이라고 할 수는 없다. 백악기 말, 곧 칠천만 년 전쯤에 살던 은행나무는 화석으로 보면 현생 은행나무와 거의 다름이 없으며, 그때에는 아마도 현생 은행나무와 꼭 같은 종도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일억오천만 년 쯤이나 계속된 중생대는 파충류의 시대로서 공룡이 설쳤다. 그들 가운데는 풀을 먹는 공룡이 많았다. 이들이 어떤 식물을 먹었는지가 대단히 궁금하다. 중생대에 퍼진 은행잎이나 줄기를 공룡들이 먹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으면 오늘날의 어떤 동물도 은행나무를 침해하지 못하듯이 그때의 왕자였던 공룡도 이 나무만은 침범하지 못하였을까? 공룡의 분비물로 된 화석인 “코프롤라이트”를 연구하면 그 해답이 나올지 모르겠다. 공룡들이 은행나무를 마구 먹어서 얼마쯤은 은행의 멸망에 영향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꾸로 은행독이 공룡들이 멸망한 한 원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공룡은 중생대가 끝나기에 앞서 완전히 멸망했고 은행나무도 그 뒤에 거의 쇠퇴했다. 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지 않을까? 아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아뭏든 은행나무는 이 지구 위에 한 속의 한 종만 남아 있다. 이처럼 고독한 현생 은행나무는 왕성했던 옛날의 선조를 대표하나 멸망할 운명에 있는 것 같다. 1953년에 마다가스탈 부근의 바다에서 잡힌 페어에 가까운 학명이 “라터메리아”인 물고기 “시리라칸스”도 멸망한 것으로 고생물학작들은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이 물고기는 아직도 화석으로 된 그의 선조와 거의 같은 생김새를 가지고 살아 남아 있다. 이와 같은 살아는 있으나 화석처럼 보이는 것이 산 화석이다. 따라서 은행나무도 이른바 산 화석이다. 더구나 우리 둘레에서 서로 몸을 마주 대고 살고 있는 산화석이다. 같은 공기를 함께 숨쉬는 화석이다. 인류의 허파에서 뿜어낸 탄산가스를 마시고 이것을 깨끗이 걸려서 산소를 재생하여 인류에게 바치는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다. 참으로 역설스러운 사실이다.
화석처럼 오래된 은행나무가 경기도의 용문산과 성균관에 한 그루씩 서 있다. 성균관에 있는 나무는 너무 늙어서 한두 군데의 수술한 흠집이 있지만 아직은 정정하다. 참으로 옛날을 더듬게 하는 나무다.
은행은 은은한 향기를 가지고 있어서 외국에서도 이것을 요리에 쓰는 경향이 늘어가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부터 요리에, 특히 궁중요리에 쓰였다. 또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은행에서 어떤 새로운 생약으로 쓰일 수 있는 약물을 뽑아내는 것도 가능할 것 같다.
은행나무는 가로수나 관상수로 참 훌륭한 나무다. 여러 십 년 동안에 가로수로서 왕자를 차지하고 있던 플라터너스는 십 년 전쯤부터 흰나방의 유충 때문에 큰 피해를 입고 있다. 그러나 은행나무는 아무 탈 없이 건재하다. 흰나방은 더러 잘못하여 은행나무에 알을 스는 일이 있지만 유충은 은행나무잎을 먹을 수 없이 모두 줄어버린다. 다른 가로수들이 자동차들이 뿜는 가스 때문에 축 늘어져버리는 한여름의 한낮에도 은행나무에는 이상이 없다. 그들은 지금도 정정한 모습으로 공기오염이 가장 심한 서울의 태평로 한복판에 한줄로 서 있으며 또 옛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운동장에 서 있다. 이들은 다른 모든 나무들이 시들어도 몸을 늘 푸르게 지키며 그들의 직책을 수행하고 있다.
가을에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는 참으로 아름답다. 특히 곱게 단풍지는 은행나무는 그 뿌리가 적당히 마를 수 있도록 찬 바람이 잘 통하는 좋은 땅에 뿌리를 박은 나무이다. 그 빛깔이 그토록 아름다우니 가지가 신라의 금관처럼 휘면 황제와 같은 위엄을 나타낼 것이다. 은행나무의 아름다움도 그 금부채인 잎들이 우수수 떨어지면 그만이다. 떨어지는 한잎한잎에서 우리들은 바로 가을이 떨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그 빛깔이 유난히도 가을이 시들어가는 것을 더 심각하게 느끼게 한다. 특히 긴 역사 속에서 천천히 늙어가고 있는 은행나무의 늘그막은 우리들로 하여금 더욱 쓸쓸한 감회에 잠기게 한다.
지금은 벌레와 공해에 강하지만 언제 어떤 해충이 생겨나서 은행나무만을 즐겨 먹을지 모른다. 그리고 인간들의 거주지에만 심어져 있으므로 인간이 만들어서 당하고 있는 공해를 피할 수 없는 형편에 있다. 오염의 정도가 더 심해지면 은행의 끈덕진 저항도 맥없이 풀리게 될지 모른다.
지금도 공해 때문에 떼죽음을 당하는 동물들이 적지 않다. 이 동물들을 구하고 은행나무를 구하는 길이 바로 인간 자신을 구하는 길이 될 것이고 또 거꾸로 인간을 구하는 길이 이들 동물을 구하는 길이 될 수 있으리라. 우리 둘레에는 사라져가는 생물이 많은 듯하다. 그 가운데서도 덩치가 큰 것으로는 말, 소 및 개 따위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오래 전부터 인류와 같이 생활해왔기 때문에 독립성이 없어졌다. 만약에 지구에 큰 변동이 생기고 인간생활에 큰 변화가 생겨 이들이 인간사회로부터 내쳐진다면 이들은 자연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멸되어버릴 족속들이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은행나무와 비슷한 설움을 가졌다고 하겠다.
말은 사람의 도움 없이는 생식도 못할 정도로 약화된 동물이다. 만들면 존재하고 안 만들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뀡이나 참새도 인간들과 공생관계에 있는 새들이라고 한다. 인류가 없어지면 이들의 장래도 위태롭다.
식물은 생각하기보다 퍽 기후의 변화에 민감하다. 동물보다 식물이 더 민감한 이유는 그들이 몸을 능동적으로 움직여 이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식물들이 중생대 말기에 멸망하였는데 그래도 살아남은 식물들이 다시 몇 차례의 시련을 겪은 시대가 지난 백만 년 동안의 빙하기대였다. 네 번에 걸쳐 그 기온이 섭씨 6도에서 10도만큼씩 떨어진 빙하기에 다른 많은 식물들과 함께 많은 은행나무도 죽어버렸을 것으로 생각되어 안타깝다.
은행나무에 따른 내 찬미도 여기에서 끝나야겠다. 이 글이 “있는 것은 다 옳다.”라는 마땅하지 않은 명제에 기대어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도 아닌 은행나무를 찬미하자는 데에서 씌어진 것은 아니다. 또 은행나무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넋을 잃는 소녀의 취미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다.
다만 은행나무의 역사가 인간의 역사와 서로 얽혀 있고, 은행나무가 자연환경의 변화로부터 생존을 위협받아온 만큼 인간도 위협을 받아 왔기 때문에서이다. 더구나 그러한 위협과 불안 속에서도 은행나무도, 인간도 아주 의연한 자세를 지녔기 때문에서이다. 특히 현대인이 자기 손으로 만든 문명의 산물인 공해 때문에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이 시대에서 은행나무의 생존이 바로 인간의 생존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아서 나는 꽤 긴 말을 했다.
이 생각이 억지라고, 또 착각이라고 해도 은행나무에 대한 내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으리라.
<뿌리깊은나무 1976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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