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윤흥길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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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흥길(尹興吉)의 세 작품
金 治 洙

  

 

 

소설이 근본적으로는 삶과 세계 속에 있는 인간의 탐구라면 소설은 필연적으로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특수한 체험의 서술을 통해서 보편적인 어떤 것을 드러내 보이는 문학 장르일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인간의 특수한 체험이란 작가 개인이 살아온 삶을 토대로 상상력의 힘을 빌어서 구성한 정신적인 체험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 속의 삶이란 한편으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는 삶, 적어도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드는 삶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그러한 일상 속에서 깨닫지 못하고 의식하지 못한 어떤 것을 미리 체험하거나 다시 체험하는 삶이다. 이 두 가지 가운데 하나의 즐거움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윤흥길(尹興吉)의 소설 세계를 이야기할 때 그의 작품을 세 가지 계열로 나누어서 논하는 것이 무리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 한 계열이「장마」「황혼(黃昏)의 집」「집」「양(羊)」등의 작품으로서 6·25동란을 체험한 어린이들의 성장 과정을 다룬 소설을 일컫는다면, 다른 하나는「어른들을 위한 통화」「몰매」「제식훈련변천사(諸式訓練變遷史)」「내일의 경이(驚異)」「엄동(嚴冬)」「빙청(氷靑)과 심홍(深紅)」「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직선(直線)과 곡선(曲線)」「날개 또는 수갑(手匣)」「창백한 중년(中年)」등의 작품으로서 이른바 60년대 이후 경제 계발 정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이후에 경험된 삶의 여러 가지 양상을 서술한 작품이고, 세 번째 계열이「무제(霧堤)」「무지개는 언제 뜨는가」등의 작품으로서 분단의 현실과 아픔을 다룬 소설들이다. 이러한 분류가 앞으로의 작품활동을 제한하는 것이 될는지는 모르지만「꿈꾸는 자의 나성(羅城)」은 분명 두 번째 계열에 속한다고 한다면 최근의 장편「완장」이나「에미」는 그 어느 한 계열에 가두어 놓기에는 훨씬 폭이 넓은 작품들이다. 그러나「에미」는「장마」와 마찬가지로 첫 번째 계열에 분류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에미」에서 화자는 어머니의 삶이란 해방 전의 신혼시절의 이야기의 죽음을 앞둔 단말마의 고통을 시기적인 출발과 종말로 삼고 있을 뿐 실제로는 6·25동란을 전후해서 살아야 했던 저주받은 여성의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살펴본다면 분단의 문제를 다룬 세 번째 계열의 작품도 첫 번째 계열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아도 별로 무리가 없을 것이다. 6·25전란이란 바로 분단의 역사적 비극 때문에 생긴 것이며 또 오늘날에도 그 비극의 씨앗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윤흥길의 문학적 출발점은「장마」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어쩌면「장마」는「황혼의 집」과 함께 윤 흥길 문학의 본령이며 핵심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 두 작품의 발표로 작가 자신이 문단의 주목을 받았기도 하지만, 여기에서 이미 윤 흥길의 역사에 대한 의식과 묘사로서의 소설적 가능성을 내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장마」는 우리의 역사 속에서 저 끈끈하고 무덥고 고통스런 한 시기의 이야기를 토속적인 믿음과 전통적인 모성애와 상처받은 성장기를 통해서 전해준다는 점에서 윤 흥길 자신의 작품뿐만 아니라 우리의 중편소설 가운데서 손꼽을 만한 걸작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는 한집안에 살고 있는 두 노인이 등장한다. 사돈 사이인 이 두 노인의 관계가〈나〉라고 하는 어린이에 의해 서술되고 있는 이 소설은 화자인〈나〉의 외할머니와 친할머니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극단적인 대립을 보이다가 화해에 도달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국군에 입대했다가 죽은 아들을 가진 외할머니와, 빨치산이 되어 밤에나 찾아오는 아들을 둔 할머니가 한집에 살고 있는 이 소설의 상황은 바로 6·25 전쟁을 겪은 우리 사회 전체의 축도에 다름 아닌 것이다. 서로 사돈간이면서도, 또 화자인〈나〉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혈육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집안에서 서로 다른 이해 관계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두 노인의 운명은 역사가 만들어준 기괴한 모순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다분히 나막신 장사를 하는 아들과 짚신 장사를 하는 아들을 둔 부모의 우화를 연상시키는 이러한 모순은 두 노인이 나누어 가진 대립적 운명의 부딪침으로 더욱 비극화되고 있다. 결과적으로는 두 노파가 모두 각자의 아들을 잃고 말지만 이들이 화해의 장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전통적인 모성의 공통점에서 유래한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두 노파가 대립의 상태에 있을 때 화자인〈내〉가 체험하게 된 것은 두 개의 죽음이다. 이 두 개의 죽음은 한국의 여성에게 있어서 전통적인 한이 어떻게 발생하게 되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식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 이상을 알지 못하는 전통적인 모성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현실 앞에서 자신의 선택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식의 선택을 무조건 따르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선택 때문에 자식이 죽을 때 정치적 색채가 개인의 의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러한 논리의 세계를 떠난 숙명을 의식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적인 모성에게는 흉년이나 질병이나 교통사고나 전쟁 같은 것들이 모두 동일한 차원에서 느껴지는 것이다.「장마」의 두 노파에서 아들의 죽음이 가져온 비극적 의미는 두 노파 모두가 그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한을 지니게 되는 데 있다. 이른바〈포한〉이라고 할 수 있는 이와 같은 한의 발생이 그러나 작가에게는 단순한 숙명이 아닌 것이다. 국군과 빨치산으로 나뉘어진 역사적 상황이 두 노인에게서와는 달리 작가에게는 부정적 현실의 뿌리로 인식된 것이다. 그러니까 정치적인 대립이나 이념적 대립이 우리의 역사에 가져왔고 또 앞으로도 가져올 수 있는 비극이 우리 민족에게 얼마나 큰 부정적 현실이 될 수 있는가 작가는 보여주고 있다. 특히 어린 주인공이 초콜릿과 같은 어른들의 미끼 때문에 아버지를 육체적으로 고통받게 함으로써 평생 동안 지니게 될 죄의식을 작가는 내다보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부정적 현실을 극복하는 일이 두 노파에게는 논리적인 방법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수많은 세월 동안 숙명으로 받아들인 역사의 비극을 두 노파는 한(恨)의 풀이 즉 해한(解恨)의 방식으로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구렁이의 출현으로 그려지고 있는 비극의 정점은 구렁이가 가지고 있는 토속적인 정서에 의해 깊은 감동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죽은 사람의 영혼을 대신하여 나타났다고 알려진 구렁이를 앞에 놓고 마치 살아 있는 사람과 대화를 하듯이 달래는 장면은 그것이 토속 신앙의 한 표현이면서 동시에 판소리에서 짐짓 사설을 늘어놓는 것 같은 보다 깊은 슬픔을 느끼게 하고, 동시에 그러한 방식으로 비극적 죽음을 언어화하지 않고는 살아남은 사람으로서 한을 달랠 길이 없음을 말해준다.

  여기에서 윤흥길의 주인공이 느끼고 있는 한이란 순전히 개인적인 정서인가 역사적 사실에서 유래한 현대적 의미를 띠고 있는가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순전히 개인적인 정서에 속하는 것이라면 일종의 회고적 감상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분단의 비극이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우리의 현실로 볼 때 여기에서 나타나고 있는 한은 역사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정치적인 대립과 선전의 지배를 받는 역사는 분단의 현실을 극복할 수 없는 반면에 한과 같은 근원적인 정서의 동질성을 발견할 때 서로를 용서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적대관계가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외할머니〉가 구렁이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여기에서 말하는 대화의 언어는 일종의 주술적인 언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구렁이를 죽은 사람의 영혼으로 보았다는 사실 자체가 그 언어를 주술적인 것으로 규정짓게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구렁이를 죽은 사람의 영혼으로 생각하는〈믿음〉을 전제로 하지 않고는 그러한 대화를 나눌 수 없다는 점에서 그 언어는 주술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주술적인 언어는 동일한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감동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할머니〉의 적대감정이〈외할머니〉의 주술적 언어를 들은 다음에 사라질 수 있었던 것이다. 또〈외할머니〉가 구렁이 앞에서 그와 같은 언어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죽은 사람의 영혼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치나 이념의 싸움 때문에 두 노파가 적대감정을 가질 수 있었지만 두 사람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정서는 토속적인 동질성을 띠고 있어서 감정적인 대립을 해소할 수 있는 통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처럼 이들이 동질성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역사적 체험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란으로 아들을 잃은 슬픔을 체험하기는〈할머니〉나 〈외할머니〉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갑자기 나타난 구렁이를 상대하는〈외할머니〉는 아들을 잃은 사돈의 슬픔을 이해하고 그 한풀이를 대신하고 나선 것이다. 그 점에서〈할머니〉는 논리를 떠난 정서적 화해를 도달할 수 있었다.

  「장마」를 이처럼 한국 여성의 모성의 한 유형으로 파악하게 되면 윤 흥길의 네 번째 장편「에미」는「장마」의 연장선으로도 읽힐 수 있는 작품이다. 어렸을 때 열병을 앓음으로 인해〈사팔뜨기〉가 되었고 그 때문에 큰외삼촌에 의해 정략결혼을 하기는 했지만 신혼 초에〈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은「에미」의〈어머니〉는「장마」의 두 노파 이상으로 기구한 운명을 살아간다. 소설의 형식으로 보면 이제 죽음을 눈앞에 둔〈어머니〉를 찾아가 베일에 쌓인 과거의 일부를 하나하나 벗겨가면서〈어머니〉의 임종을 지키게 되는〈나〉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그 사이사이에〈어머니〉의 과거가 밝혀지고 있다. 이러한 서술의 과정에서〈어머니〉의 한이 어떻게 맺혀지고 있는지 밝혀주는 감동적인 장면들이 수없이 나타난다. 가령 다음과 같은 장면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어려서 내가 달구지 본 머리카락은 하나같이 검고 반질반질 윤기가 흐르는 비단길 같은 것들뿐이었다. 어머니는 매일매일 해질녘마다 자기 머리털 한 올씩을 뽑아 달구지에다 매다는 것으로 하루 가운데서 가장 의미심장하고 엄숙한 일과를 삼곤 했다. 이를테면 그것은 혼자 사는 젊은 여자가 밖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가족을 불러들이는 비밀스런 의식이었다. 달구지 바퀴에 매달려 나울거리는 그 머리털은 그 사람을 향한 그 사람을 애타게 부르는 어머니의 영혼의 손짓이었다. 그것은 한 여자의 한 남자만을 염두에 둔 소리 죽인 흐느낌이었다. 그것은 한 여자의 일편단심이면서 그니 혼자만이 아는 처절한 희열이요, 동시에 절망이기도 했다. 그것은 머리를 풀어 하늘에 제사지내는 한 여자의 기도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저주를 의미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평생 동안 달아난 남편이 되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때로는 오지 않는 남편을 저주하고 때로는 철없는 자식들을 꾸짖고 때로는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기 위해 밤새워 스스로와 씨름을 한〈어머니〉에 대한 작가의 탐구는 윤흥길의 치열한 작가 정신이 이룩한 하나의 업적이 될 것이다. 이 작품에서 한 가지 의문으로 남아 있는 문제는〈화자〉인〈나〉가 왜 〈어머니〉의 과거를 임종 며칠 전에야 한꺼번에 파악하려 했느냐 하는 데 있지만, 그러나 이것이 이 작품의 중요성과 감동을 약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이 작품에서는 자신의 몸과 마음과 전 생애를 바쳐가며 한 많은 일생을 살고도 지칠 줄 모르는 모성애와 꺼질 줄 모르는 생명력을 유지하는〈어머니〉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그 존재는〈큰외삼촌〉의 엄격함으로 가족의 도움을 잃었고 또 역사의 소용돌이로 사회의 가장자리로 밀려났고 가난의 시련으로 죽음의 위협 속에 빠졌지만, 그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모든 원한을 포용하면서〈지면서 이기고 이기면서 지는〉전통적인 〈어머니〉의 지혜에 도달하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자신의〈큰 오라버니〉에게 자식을 맡기려고 했다가 스스로의 힘에 의지하지 하지 않고는 어떤 삶도 보장받을 수 없음을 깨닫고 모자가 벌거벗고 물 속에 들어가서 지금까지의 자신들의 죽음을 선언하고, 폭격 속에서 갖게 된 아들을 미륵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하고, 죽는 날까지〈아버지〉의 귀환을 기다리며 안방을 30여년 동안 비워 놓은〈어머니〉의 삶은 스스로의 숙명에 대한 믿음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겠지만, 〈어머니〉의 인간적인 고통과 환희, 미움과 사랑, 저주와 용서가 함께 하면서도 결국은 모든 것에 대해 화해를 발견하는 것은「장마」에서의 한 풀이와 같은 문맥에 놓인다.「장마」의 외할머니가〈나사 뭐 암시랑토 않다〉고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로「에미」의 어머니가〈애비는 참말로 암시랑토 않느니라〉고 단언하는 것은 오랜 한의 역사 속에서 토속적인 믿음에 자신을 거는 비극적 여성의 운명을 느끼게 한다.〈살아남는다는 게 말짱 비겁한 짓인 줄 아냐? 죽는다는 게 말짱 다 용감한 짓인 줄 알어?〉라고 질문하는〈어머니〉의 가슴속에는 고난의 역사 속에서 살아남은 끈질긴 생명력과 전통적인 모성애가 체험한 한의 역사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더 극복해야 할 것은 어머니가〈사팔뜨기〉라는 사실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이다. 한쪽 눈으로는 동생에 대한 온화함을 나타내고 다른 한쪽 눈으로는〈나〉에 대한 엄격함을 나타낸다고 하는 어머니의 눈의 이중성은 오랜 고통과 시련과 억압을 당한 사람이 살아 남을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그것은 굽히면서 꺾이지 않는 부드러운 견고함이고, 자기의 끈질긴 생명력을 뒷받침해 주는 엄격한 관용인 것이다. 모성이 가지고 있는 이처럼 넓고 깊은 모습의 형상화는 윤 흥길의 뛰어난 재능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윤 흥길의 소설 가운데 두 번째 계열에 속하는「꿈꾸는 자의 나성」은 이미《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역작 집을 통해 산업사회를 살고 있는 개인의 문제를 파헤친 작가의 능력이 되살아난 작품이다. 이 소설의 서술 기법은〈나〉라고 하는 화자의 이야기와〈이상택〉이라는 기묘한 인물의 이야기가 서로 조응하는 형식을 갖추고 있다. 〈나〉자신이 회사 안에서 인간관계에 휩쓸려서 현실적인 고민에 빠져 있는 데 반하여〈이상택〉이라는 환상적인 인물은 다방에서 차 한잔시키지도 않은 채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서 〈로스앤젤레스 행 비행기편〉의 예약 관계를 묻는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는 이 다방에서 저 다방으로 쫓겨다니는데 그러면서도 반드시 열대어 수족관 옆에 자리를 잡는다. 따라서〈나〉가 이 인물을 찾고자 하는 것은 현실적인 이해관계가 전혀 없어서 다분히 상징적인 의미를 띠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이처럼 꿈을 꾸는 듯한 인물을 통해서 인간다운 삶의 어려움은 첫째 우리 사회가 동창관계나 지연에 의해 작용되고 있고, 둘째 너무나 서로 경쟁하는 사회가 되어 버림으로써 다른 사람에 대해서 지나치게 피해의식을 느끼고 있고, 셋째 그리하여 다른 사람의 진실을 알아보기 전에 자신의 추측으로 정직한 사람을 고통 속에 빠뜨리고 있고, 넷째 이해관계에서 부정적인 인물로 보이는 사람에 대해서는 공격적인 방어를 행하고 있고, 다섯째 정직한 사람은 다른 세계를 꿈꾸면서도 이 땅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이상택〉이라는 인물의 설정이다. 그가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는〈로스앤젤레스 행 비행기편이 몇 시에 출발합니까?〉라는 말은 한편으로 대단히 현실적이면서도 현실로부터 패배한 자의 공허한 주문처럼 들리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인물에〈나〉를 조응시킴으로써 우리의 삶 속에 들어 있는 허구적인 요소를 절망적으로 느끼게 만들고 있다. 특히〈나〉자신이〈이상택〉처럼 가방을 챙겨서 떠돌아다니는 꿈과,〈이상택〉이 마지막으로 전화를 걸어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한 말은, 한편으로 화자가〈손 과장 부인〉의 병실을 찾아가겠다는 화해를 뜻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월급과 직장을 보장해 주는 대가로 끊임없이 지불해야 했던 위선과 허위와 계산과 안락으로부터 떠남을 의미한다. 그것은〈고향〉을 잃어버린 오늘의 삶에서〈고향〉을 되찾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며, 타인에 대한 불신과 공격성으로부터 믿음과 사랑으로 전진하고자 하는 자구책인 것이다. 따라서 윤 흥길의「꿈꾸는 자의 나성」에 나오는 고향은 상징적이면서 다시 찾을 수 있는 마음의 고향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고향을 다시 찾는다는 것은 그 고향의 상상적 성질 때문에 대단히 복합적인 것이고 순간적인 것이어서 개인이 삶 속에서 끊임없는 윤리적 결단을 내리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문학이 그러한 윤리적 결단이 힘든 사회 속에서 그것을 가능케 하는 상상력의 싸움이어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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