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시인에 대하여
by 송화은율
윤동주(尹東柱, 1917. 12. 30-1945. 2. 16, 아명(兒名). 해환)
·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 생. (본관이 파평 윤씨의 한 파인 보령공파에 속하며 증조부인 윤재옥(1844~1906)은 함북 종성군 동풍면 상장개에 살았으며 43세 때 4남 1녀의 어린 자녀를 거느리고 북간도 자동(子洞)이란 곳으로 옮겼다. 그 때 형제 중 맏아들인 윤동주의 조부 윤하 현(1875~1947)이 12세였다 하니 서기로는 1886년이었다. 성가(成家)한 뒤의 윤하현은 소지주였 을 정도로 넉넉했으며, 동주의 부친인 윤영석은 자동에서 출생했다. 1900년 같은 간도의 명동 촌에서 정착하였는데, 명동이 농촌이긴 하지만 1900년대에 들어와 교육, 종교, 독립 운동 등 여 러 면에서 관북 일대의 중심지였다. 그것은 1899년 규암 김약연 선생이 그 고장을 중심으로 일 으킨 혁신 운동의 결과였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땅을 사서 조선인 부락을 형성하고 규암재를 설립하여 교육 사업을 일으켰으며, 명동서숙을 거쳐 명동 소학교와 명동 중학교로 발전시켰다. 1910년에 동주의 조부는 기독교를 믿게 되고, 같은 무렵에 입교한 다른 몇 가문과 더불어 규암 선생을 도와서 가풍을 고치고 신문화 도입에 힘을 썼다. 같은 해 동주의 부친은 16세로 규암 선생의 누인(김 용)와 결혼하여 규암 선생은 동주의 외삼촌이 되었다. )
· 동생 일주(아명. 달환)를 비롯 3남 1녀(아래 누이동생 혜원, 남동생 광주, 일주)
· 9세 때 명동소학교 입학
· 15세 때 김동환 [국경의 밤]을 졸업 선물로 받고 졸업
· 16세 때 용정에 위치한 미션스쿨인 은진 중학교에 입학
· 19세 때 은진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평양 숭실 중학교 3학년 2학기에 편입
· 20세 때 숭실 중학교가 신사참배 문제로 관에 접수되자, 항의 표시로 자퇴, 광명학원 중학부 4년에 편입
· 22세 때(38년)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 문과 입학에서 수학
· 25세(41년) <서시>, <또 다른 고향>, <십자가>, <별 헤는 밤> <새벽이 올 때까 지> 등 여 러 편의 원숙한 작품을 쓰는 한편, 연전 문과에서 발행한 [문우]지에 <자화상>, <새로운 길> 등을 발표. 키에르케고르, 도스토예프스키, 발레리, 지드, 보들레르, 프랜시스 잠, 릴케, 장 콕도 등의 작품과 정지용, 김영랑, 백석, 이상, 서정주의 시편에 심취
· 1942년 창시개명을 강요하고 고향 집을 계속 탄압하자 일본 도일 수속을 위해 성을 <히라누 마(평소,平沼)>로 개명. 1월 24일에 쓴 <참회록>이 고향에서 쓴 마지막 작품이 됨
· 1942년 3월 도일한 윤동주는 도쿄 릿교 대학 문학부 영문과 입학(송몽규는 쿄토 대학 사학과 (서양사) 전공)
· 여름 방학을 맞아 귀국, 동북 제국 대학에 편입하기 위해 일본으로 다시 건너 갔으나, 10월 1 일 교토 도지샤 대학 영문학부에 편입
· 27세(1943) 때 일본의 징병제가 공포, 문과 대학, 고등·전문 학교 학생으로 학도병 에 지원하 지 않은 재학생 및 졸업생에게 일제의 징용 영장이 발부되자, 7월 14일 첫학기를 마치고 귀향 하려던 차, 송몽규와 함께 사상범으로 체포, 교토 시모가모 경찰서에 구금
· 128세(1944년)에 독립운동의 죄목으로 2년 형을 언도(言渡)받고 규슈 후쿠오카 형 무소에 수 감
· 1947. 2. 13일 광복 후 최초로 유작 <쉽게 씌어진 시>가 당시 편집국장이었던 정지용의 소개 문과 더불어 [경향신문]에 발표
· 1948년 1월 유고 31편이 정지용의 서문과 함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간행(정음사)
· 1941년 자신의 시 19편을 모아 [하·바·별·시]를 간행하려 하나 이양하 교수가 만류한 바 있음
· 일본 동지사(同志社) 대학 유학 중 사상 불온,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 후쿠오카(福岡) 형무소 에서 옥사.
· 1948년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간행.
--- 시 <서시>(1941.11.20), <참회록>, <또 다른 고향>(1941.9), <십자가>, <자화상>, <간>, <별 헤는 밤>(1941.11.5) <슬픈 족속>, <바람이 불어> <쉽게 씌어진 시>, <태초의 아침>, <또 태초의 아침> 항목 [부끄러움], <초 한 대>
작품 연보
1934. 12. 24 초 한 대, 삶과 죽음, 내일은 없다.
1935. 1. 18 거리에서
1935 공상(空想)
1935. 10. 20 창공
(중략)
1938. 5. 10 새로운 길 연전 [문우]지, 자선(自選)1
1938. 9 슬픈 족속 자선2
1939. 9 자화상 연전 [문우]지, 자선3
1939 소년 자선4
1940. 12 병원 자선5
1941. 2. 7 무서운 시간 자선6
1941. 3. 12 눈 오는 지도 자선7
1941. 태초의 아침 자선8
1941. 5. 31 또 태초의 아침 자선9
1941. 5 새벽이 올 때까지 자선10
1941. 5. 31 십자가 자선11
1941. 5. 31 눈 감고 간다 자선12
1941. 못 자는 밤 자선13
1941. 6 돌아와 보는 밤 자선14
1941 간판 없는 거리 자선15
1941. 6. 2 바람이 불어 자선16
1941. 9 또 다른 고향 자선17
1941. 9. 31 길 자선18
1941. 11. 5 별 헤는 밤 자선19
1941. 11. 20 서시(序詩)
1942. 1. 24 참회록
1942. 5. 12 흐르는 거리 동경에서 씀
1942. 5. 13 사랑스런 추억 〃
1942. 6. 3 쉽게 씌어진 시 〃
1942. 봄 〃
문학 시기 구분
(1) 습작기(1934-1936)
: 외부 현실의 시대적 상황과 자신의 내향적 성격의 정신적 마찰
(2) 발전기(1937-1940)
: 습작기의 유년적 향수나 단조로운 관념의 세계에서 벗어나 다소간 내향적이며 상황 관계를 가진 자취가 드러남 ( <새로운 길>, <비오는 밤>, <자화상 등> )
윤동주 시의 가치
동주는 20세를 전후하여 근 10년간에 전개된 그의 체험과 더불어 그의 시 역시 여러 가지 면에서 급격한 변화 및 갈등을 보인다. 초기시의 암울한 분위기, 동시(童詩)에 깃든 유년적 평화에의 지향, 다시 강화. 확장되는 방황과 어두운 세계상, 자아의 분열과 긴장 --- 이렇게 서로 인과(因果)하고 혹은 반발하는 주제의 흐름을 우리는 보았다. 이러한 시적 편력의 배후에는 두 가지 중요한 체험적 원천이 자리 잡고 있다.
그 하나는 청년기의 정신적 불안정성과 고독감 및 정신적 방황에 기인한 <개인적 어둠>이요, 다른 하나는 조국을 잃음으로써 역사적, 사회적 삶의 자리를 박탈당한 <집단적 어둠>이다. 이 두 어둠이 윤동주라는 하나의 정신속에 결합하는 데서 그의 참모습이 드러난다.
그의 시의 가치는 <시대의 고뇌와 개인적 번민이 통일된 육체>로 느끼고 표현했다는 점이다.
곧, 그는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역사적 국면의 경험으로 확장함으로써 한 시대의 삶과 의식을 노래하였고, 동시에 그의 체험을 인간의 항구적 문제들과 연결함으로써 보편적인 공감에 도달 하였다.
尹東柱 50주기, 한국대학신보사-연세대 각종행사준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시인 尹東柱의 50주기(2월16일)를 기념하여 다음달부터 한국대학신보사와 연세대학교 등이 각종 기념행사들을 마련하고 있다. 먼저 기일을 이틀 앞둔 2월14일 尹시인이 숨진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 시인의 순결한 얼을 기리는 걸개그림이 걸린다. 이 그림은 한국대학신보사가 주관하고 한국문학평론가협회(회장 金宇鍾) 일본 同志社대학의 고려동창회등이 공동후원하는「민족시인 윤동주의 발자취 탐방」행사의 하나로 마련되고 있다.
서울대, 덕성여대 등의 학생 12명으로 구성된 미술팀이 지난 11일부터 제작에 들어가 25일 완성한 이 그림은 가로 10m 세로 4m 크기다. 尹시인과 그의 외사촌인 독립투사 송몽규를 포함한 당시 청년들의 모습과 시대상황, 새벽 여명 등을 내용으로 하였으며 기일을 맞아 후쿠오카 형무소 앞 추모위령제 무대에 걸리게 된다.
16일에는 시인이 다녔던 동지사대학을 찾아 추모식과 추모시 낭송회등을 가질 계획이다. 추모식 참가자들은 덕성여대 金宇鍾, 충남대 宋百憲, 단국대 金秀福 교수 등과 자원자들로 구성된다.
한편 尹시인의 모교인 연세대에서도 2월16일 교직원 학생 문화계 인사 등 9백 여명이 참석하는 거교적인 추모행사를 가진다. 이날 연세대 백주년기념관에서는 기념추모예배를 가진후 尹시인에 대한 추모학술행사 등을 가질 예정이다.
이밖에 연세대는 3월 셋째주를「尹東柱 주간」으로 정해 추모예배를 잇달아 가진다. 2월17일에는 宋梓 총장과 총학생회장단 등이 중국 북간도 명동에 있는 尹시인의 생가와 묘소 등을 방문, 참배하고 기념관 확충 등에 대해 유족들과 협의한다. 연세대는 올해 있을 尹東柱 기념사업의 하나로 「尹東柱기념 석좌교수제」실시 등을 추진하고 있다.
[윤동주 전집을 엮으면서] 광복 50년의 한국 문학과 시인 윤동주
식민지 시대의 문학과 그 역사적 조건에 대한 반성을 전제로 할 경우, 윤동주시의 위상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는 극단적인 절망의 상태에서도 역사에 대한 전망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때로는 상황의 우위에 서는 비판자가 되기도 하고, 상황의 한 복판에서 저항하는 시인이 되기도 한다. 역사의 신념을 고고하게 노래하는 예언자적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도 시적 주체는 민족과 국가라는 절대적 명제를 고수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개인적인 상상의 변주를 자족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던 다른 시인들과 구별되기도 한다.
윤동주 시에서 삶의 현실은 대개 비극적인 상황으로 내세워지고 있다. 민족과 국가라는 절대 개념이 부정되는 식민지 현실은 왜곡된 역사며 불모(不毛)의 땅이다. 그의 시는 바로 이 같은 현실에 대한 시적인 도전이며 예술적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편자 서문 중)
슬프도록 아름다운 시들 (정지용)
노자 오천언(五千言)에 “허기심 실기복 약기지 강기골(虛其心實其腹弱其志强其骨其志强其骨)이라는 구(句)가 있다. 청년 윤동주는 의지가 약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시에 우수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강하였을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구나 !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 !
일제 시대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앝을 것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내가 아는 시인 윤동주 형 (문익환, 시인, 목사)
나는 누구보다도 동주 형을 안다고 생각해 왔다. 물론 그의 친동생 일주보다 더 안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자부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나는 감성이 가장 예민한 국민 학교 6년 간을 그와 한 교실에서 배우며 뛰놀았다. 한 반이라야 20명 내외였으니 얼마나 서로 가까이 알 수 있었겠느냐는 것은 물을 나위도 없다. 우리 반에는 중학교 2학년 때 <동아일보> 신춘 문예에 <숟가락>이라는 콩트로 당선한 송몽규(宋夢奎)도 있었다. 동주와 몽규는 고종 사촌간이다. 동주나 몽규는 나보다는 한 살 위여서 나는 어딘지 모르게 그들 앞에서 어리게 느껴지곤 했는데 그 느낌은 지금도 여전하다. 우리는 그 작은 교실에서 민족심을 불태웠고, 소박한 대로 기독교 신앙의 분위기를 맛보았던 것이다.
우리가 6년 동안 “얘”, “쟤‘하면서 자란 명동소학교 이야기를 좀 해야 할 것 같다. 명동은 북간도 민족 운동의 요람이었고, 정신적인 중심지였다. 거기는 북간도의 대통령이라고 하던 김약연 목사님이 사는 곳이었고 안중근 의사가 와서 권총 사격 연습을 하신 곳이다. 그리로 모여든 우국지사들이 민족 광복의 먼 앞날을 내가보며 오는 세대의 교육을 위해서 세운 학교가 명동 소학교였다.
6학년 때의 일이다. 학생 자치회가 조직되고 내가 초대 신문사 사장이 되었다. 동주 형이 무슨 부서를 맡았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신문사라야 한 달에 한 번 벽신 문을 내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그 신문에 동주 형의 글이 가끔 실려졌지만, 워낙 기억력이 없어서 나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가 다닐 그 때는 그 학교에도 일본어 과목이 있기는 했지만, 우리는 ‘일본말’이라고 하면서 일본어를 통 공부하지 않았다. 중학교에 진학하려고 해도 일본말을 몰라서 어떻게 할 길이 없었다.
그때 우리 집은 용정으로 이사했기 때문에 나는 용정에서 해성학교에 들어가 1년 동안 일본말 공부를 해야 했다. 그 1년 동안 동주 형은 몽규 형과 함께 명동에서 한 20리 떨어진 곳에 있는 중국학교에 가서 중국말 공부를 했다. 1년 후에 우리는 용정 은진 중학교에 나란히 입학해서 3년을 같이 다녔다. 몽규 형이 어떤 사명을 띠고 중국 본토에 갔다 온 것이 아마도 은진 3학년 때가 아닌가 싶다. 나는 3학년을 마치고 대학 진학을 위해 평양 숭실학교에 전학을 했는데, 다음 학기에 동주 형도 숭실학교에 전학을 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기숙사 밥을 먹으면서 더 가까워진 셈이다. (중략) 중학교를 졸업한 다음 나는 일본 도쿄로 신학 공부를 하러 가고, 동주 형과 몽규 형은 문학 공부를 하러 연전(延專)으로 올라 왔다.
윤동주에 대한 평론가들의 여러 가지 시사적(詩史的) 평가
① 윤동주의 시는 압박받은 불행한 조국의 최후를 수호한 민족의 혈서이다.(정병욱)
② 그는 민족의 아픔과 시대의 어려움을 개인적 고뇌로 형상화함으로써 궁핍(窮乏) 한 시대를 살다간 시인 (정한모)
③ 1942년대를 문단의 암흑기라 했으나, 동주의 시를 발견한 뒤, 암흑 시대를 레지스탕스의 시 대로 그 제목을 바꾸어야 하겠다. (백철)
④ 그는 어쩔 수 없이 타의에 의해 저항 시인이 되고 만 슬픈 시인 (임헌영)
⑤ 윤동주는 암흑 시대에도 조금도 절망하지 않고, 긍정과 희망과 밝음의 빛깔로 시를 쓴 사람 (박영준)
김송 씨 집에서의 하숙 생활
그의 하숙 생활은 매우 질서 있는 일과로 짜여져 있었다. 아침 식사 전에는 누상동 뒷산인 인왕산의 중턱까지 산책하고 집으로 돌아와 방청소를 끝내고 조반을 마친 다음 학교로 갔다. 하학 후에는 조선은행 앞까지 전차를 타고 들어와 책발을 두루 돌아다녔다. 지성당, 일한서방, 마루젠, 군서당 등의 신간 서점과 고서점을 돌고 나면 ‘후유노야도’나 ‘남풍장’이란 음악 다방에 들러 음악을 즐기면서 우선 새로 산 책을 들춰 보기도 했다. 극장에 들르지 않으면 명동에서 걸어서 을지로와 청계천을 거쳐 관훈동에 있는 헌책방을 다시 순례했다. 거기서 또 걸어서 적선동 유길서점에 들러 책들을 훑고 나면 거리에는 전깃불이 켜져 있을 때가 되었다. 누상동 9번지 하숙집으로 돌아 오면 주인 조 여사가 손수 마련한 저녁 밥상이 기다리고 있었고, 저녁 식사가 끝나면 김송의 청으로 대청 마루에 올라가 한 시간 남짓한 환담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는 방으로 돌아와 자정 가까이까지 책을 보다가 자리에 드는 것이었다. --- 소설가 < 김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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