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환 시인
by 송화은율
유치환(柳致環, 1908-1967, 청마·靑馬)
· 극작가 유치진의 동생. 경남 통영(충무) 생. 동래고보 수학. 연희전문 중퇴.
· 1931년 [문예월간]에 <정적(靜寂)>을 발표 등단.
· 1936년 [조선문단]에 <깃발>발표.
· 서정주와 함께 ‘생명파 시인’. 이른바 생명파의 한 사람으로 동인지 [생리]를 간행
- 그러나, [시인부락] 동인으로는 활동 않음
· 경향 : 허무를 극복하려는 남성적, 의지적인 시.
- 사람의 삶 어디에나 있는 뉘우침, 외로움, 두려움, 번민 등의 일체로부터 벗어난 어떤 절 대적인 경지를 갈구했으며, 그 해결의 길은 일체의 생명적인 것에 대한 허무주의적 자각에 서 찾았다.
- 곧, 강렬한 허무적 의지는 그 밑바닥에 생명의 뜨거운 꿈틀거림과 감정의 소용돌이를 간 직한 것 때문임
· 1960년대에 부산에 정착, 부산고, 경남여고 등지에서 교사, 교장으로 근무
· 시집 : [청마시집](1940), [울릉도](1948), [보병과 더불어](1951) 등
- 유적지
1) 유치환시비
- 바위시비(부산진역앞 수정가로 공원, 영도남여자상업고등학교)
- 깃발시비(에덴공원)
- 그리움시비(용두산 공원 ‘시의 거리’)
--- 시 <깃발>, <저녁놀>, <봄소식>, <일월(日月)>, <바위>, <울릉도>, <해바라기의 비명(碑銘)>(함형수 시)
[문학] 청마 유치환의 초기시 27편 발굴
한국현대시의 거목인 청마 유치환의 초기시 27편이 발굴됐다. 시인 박 철석씨(전동아대교수)가 계간 [문학예술]에 처음공개한 초기시들은 여성 적인 섬세한 감각이 주류를 이루던 한국시단에 남성적인기상과 의지, 생 명력을 불어넣은 청마 시세계의 단초를 잘 보여준다.
청마가 젊은시절 정열을 쏟았던 시동인지 [소제부 제1시집]과 [생리] 에 수록된 이들 시편은 생동감 넘치는 서정시와 관념세계를 담은 명상시 계열로 크게 구분된다.
[봄비츨 모조리 빨어마시며/도다오르는 새파란 새닙들을/동산에 노힌 염소 갓치/ 나는 모조리 뜨더목고 십습니다/그것이 이 풀의게 주는/ 나의 가쟝 큰 축복입니다]
서정시 [5월의 마음]에 나오는 구절 [젊은 오월의 하 늘]은 초기 대표작 [깃발]에 나오는 [저 푸른 해원]의 시초로 해석된다. 자연을 시의 단골제재로 삼은 청마는 이번 초기시에서도 바다와 산을 각 각 남성적인 정열과 굳건한 의지를 관념적으로 대변하는 상징물로 이용하고 있다.
[람벽의 바다는 그의 바닥에/죽음의 처참이 잇고/광란의 정염이 잇고/ 고독의 자존이 잇고/심사의 과단이 잇고/한업시 맑은 그의 예지의 깁히는/ 저 수평선 넘에서 굴려오는/풍운을 감득한다](바다)청마는 또한 [저녁 풍 경]등 일제하의 가난했던 뒷골목의 풍경을 서정적인시선으로 담은 풍물시 를 통해 이웃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기도 했다.
[다시보는 풍수] 예술적 풍토 두루 갖춘 `문인의 고장'
전에는 충무시라 했던 곳이지만 지금은 주변 군과 통합하여 통영시로 불리는 곳, 남해의 상징적 중심성을 띤 고장이 통영이다. 그 곳 말로는 ‘토영’ 또는 ‘퇴영’이라 발음되지만 평양을 피양이라 발음하는 것처럼 현지에서는 그말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들린다.
통영은 삼도 수군 통제영을 줄인 말이다. 본래 조선 수군 편제에 없던 것을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의 잇단 승첩으로 자연스레 만들어진 이 제도는 고종 33년(1896) 마지막 통제사 홍남주가 병사함으로써 역시 자연스레 303년간의 역사를 마감했다.
지금 통영을 대외적으로 드러내주는 상징성을 지닌 것은 민속공예와 문인, 예술가 등 두가지로 압축할 수 있을 듯하다. 이 중 민속공예는 나전칠기로 대표되는 바, 충무공이 임진왜란 당시 통제부 산하에 12공방(동고도까지합치면 13공방)을 설치하여 군사물자를 제작케 한 것이 시발점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이 고장의 풍토와 맞물려 그 특색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 있으니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의 기라성 같은 인물의 배출이다. 그를 느끼기 위해서는 먼저 남망산공원을 올라야 한다. 여러 번 와 본 곳인데도 타관 나그네인지라 길을 몰라 헤매고 다니자니 이 곳의 특이한 교통현상이 마음을 복잡케 한다. 너무 혼잡한데다가 통영 시민께서는 듣기 거북하겠지만 무질서하기까지 하다. 두가지 쯤 이유가 생각되는데 우선 민망한 얘기부터 하자면, 이 곳이 조국 근대화의 변방지대이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제 말하려는 주제이기도 한데, 통영의 예술가적 기질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측면이다. 예술가적 자유혼의 발로가 남이 보기에 무질서로 비쳤다면 그렇게 바라본 나의 예술에 대한 무지의소치이므로 사과하고 물러날 수 밖에는 없을 터이다. 이유가 어느 쪽에 있든 통영에서 운전하기는 꽤나 피곤한 일이다.
남망산공원은 통영의 가시적 문화 공간이다. 거기에 문화관이 있고 통영 오광대, 남해안 별신굿, 승전무 협회와 전수관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곳에서 통영 전체를 조망할 수 있기에 그렇게 본 것이다.
전체에 대한 조망은 문화의 기본이다. 부드럽지만 복잡할 정도로 다양한 해안선, 명미한 기후와 밝고 소박한 풍토, 농촌과 어촌의 근대적 항구 도시를 한꺼번에 바라볼 수 있는 남망산이야말로 문화를 말하기가장좋은 지리적 여건을 갖춘 곳이다.
그 곳에서는 먼저 청마 유치환 시인을 만날 수 있다. 1974년 건립된 그의 시비에는 이미 교과서에 실려 모르는 사람이 없는 그의 시 [깃발] 전문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그의 시가 표상하고 있는 깃발에서가 아니라 이제 우리는 이 시 자체를 읽는 것만으로도 학창 시절의노스탈쟈를 느낀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이 앞에 설 때마다 감회가 새롭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아, 벌써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가되었구나, 그 간 난 뭘하며 살아왔나, 하는 따위의 감상 말이다.
그러나 시비의 뒷면은 값 싼 감상을 계속 허용하지 않는다.
{내 눈을 뽑아 북악의 산성에 높이 걸어 행패하는 망국의 이리들과 불의의끝장을 보리라}같은 대목이 바로 그렇다. 그래서 민족 시인이란 호칭을 들었던 것이겠지만 나는 아무래도 그의 서정에 마음이 더 끌린다.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같은 시들. 그 동생에 그 형이라 유치환의 형 유치진은 극작가이자 연극인으로 탁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시조 시인, 그 자신은 시조를 3행시라 주장했지만, 김상옥이 이곳 출신이고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의 시인 김춘수도 이 곳 태생이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에 이르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작품을 읽기 위한 사전까지 발간되었으니 더 덧붙일 말이 무엇이겠는가. 이런 작가들의 배출을 나는 상당 부분 그 풍토에 기인하는것으로 이해한다.
청마 시비에서 더 오르면 프랑스 조각가 장 피에르 레이노의 분재조각이 나온다. 자연 상태의 커다란 소나무에 화분 모양을 두른 작품이다. 그 작품 설명에 이르기를 {예술가의 꿈이란 자연의 일부가 되는 것}이라 하였던데 그 점 풍수학인의 바람도 다를 바 없다. 조금 표현을 바꾸자면 {풍수의 꿈은 자연과 합일되는 것}정도가 될지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정상에 서 있는 충무공 동상은 너무 초라하기도 하거니와 얼굴 표정이 지나치게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이 든다.
정상 나무 그늘에서 할아버지 몇 분이 장기를 두고 있다. 한 할아버지가 일어서더니 숲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소변을 본다. 지나치다 얼핏 보니 소변 본 밑에 무슨 팻말이 놓여 있다. 경상남도지사 모씨라는 이름이 새겨진 기념 식수 초석이었다. 오줌 맞는 기념비라면 처음부터 세우지 말았어야 좋았을텐데 하는 감상이 지나간다. (최창조. 전 서울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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