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유진오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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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넓고 행복한 고전적 차원
정한숙

 

 

한국 문학사에서 현민(玄民) 유진오만큼 폭넓은 의미로 뚜렷이 떠오르는 작가는 드물다. 그는 세상이 다 알다시피 소설가요 법학자요 정치인이었고 또한 교육자였다.

그는 해방 직후 헌법 기초 위원으로 활약하여 민주 한국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남다른 공헌을 하였으며, 또한 한일 회담의 한국측 수석 대표로 일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고려대학교 총장직을 임기 만료로 사임한 후인 1966년 회갑년에는 야당의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었고, 곧이어 신민당 대표위원으로서 이 나라 야당 세력을 이끄는 정치인으로서의 정상에도 올랐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현민의 사회적 활동, 즉 문학 외적인 활동 가운데 가장 뚜렷하고 지속적인 것은 교육자로서의 활동이다. 즉, 현민과 고려대학교의 관계는 1932년 그가 27세 되던 해에 보성 전문학교 강사로서 헌법, 행정법, 국제법을 강의할 때부터 그가 1965년 고대 총장직을 3기 임기 만료로 사임할 때까지 34년간의 시간적인 거리에 정비례하여 지속적인 중요성을 띤다고 할 수 있다. 현민이 1945년 해방을 분수령으로 그 이전은 문학가로 그 이후는 교육자로서 뚜렷이 구분되는 것도 고려대학교와의 이러한 뚜렷한 지속적 관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고대에 있으면서도 이 나라 민주 정치사에 깊이 기억될 4.18 학생 혁명을 몸소 체험하였고 지금 이 시대에서 대학의 사명이 무엇이고 그 위치가 어떤 것인가를 뼈아프게 느끼기도 했다. 이러한 깨달음이 아마 그가 총장 사임 후 곧바로 정계에 나아가 야당 지도자로서의 숨은 면목을 보여 주게 한 하나의 동기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제 현민이 우리 현대 문학사에 남긴 족적에 대하여 알아보자. 그는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다방면에서 그 활동이 눈부셨으므로, 흔히 1945년 이전에 있었던 문학 활동은 경시되어 온 감도 없지 않다. 그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대비되는 이효석에 대해서는 온갖 작가론 작품론이 쏟아져 나왔는데도 현민의 경우에는 이상하다 싶을 만큼 본격적인 작가론이나 작품론이 없는 것도 이러한 편견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미 우리들이 은연중에 확신하고 있듯 현민 유진오의 문학은, 그의 다재다능의 한 증거물로서 그 의미를 다하는 게 아니라 보다 뚜렷하고 탁월한 문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은 조금도 부인할 수 없다.

그는 경성제대 예과에 입학하자 곧바로 조선인 학생들을 모아 문우회를 조직하여 이듬해 1925년 그의 나이 약관 20세 때 첫 소설 <S와 빠사회>를 《문우》에 발표한 것을 출발점으로 1927년에도 <여름밤>을 《문우》에 발표하여 소설에 대한 스스로의 역량을 키우고 있었다. 한국 문단에 공식적으로 얼굴을 보인 것은 1927년 《조선지광》에 <복수> <소리> <파악>을 발표하고 같은 해에 <갑수의 연애>를 《현대평론》에 희곡 <피로연>을 《조선지광》에 연달아 발표하여 문단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때부터라고 하겠다.

그러나 그가 정작 문단의 핵심적 구성원으로 공인된 것은 1929년이었다. 그 해에 그는 24세로 경성제대를 졸업하고 동교 법문학부 형법 연구실 조수로 연수 생활을 계속하면서 주목할만한 일련의 작품을 발표했던 것이다. 즉 소설 <5월의 구직자>를 《조선지광》에 <여직공>을 조선일보에, 희곡 <삘딩과 여명>을 《조선문예》에 발표하여 빈민 계층을 제재로 심도 있는 작품 세계를 구축해 나갔는데, 당시의 한국 문단은 경향적인 문학이 득세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현민의 이러한 작품들은 당시의 문단 풍토와 일련의 관련 속에서 그 의미가 파악되어져야 할 것이다. 1930년 카프로부터 가맹 권고를 받게 되는 것도 이러한 관계 때문인데 당시는 본의든 타의든 간에 경향적인 작풍을 띠는 작가가 많았다. 현민도 마찬가지여서 프로 문학 그룹으로부터 가맹 권고를 받았지만 불응하였다. 여기서 소위 동반자 작가라는 평을 듣게 되어, 이러한 테두리에서 현민의 초기 작품의 특질이 구명되곤 하는 결과가 생기게 되었다.

<5월의 구직자>와 <여직공> 등의 초기 작품은 프로 문학에 사상적으로 동조하는 것으로서 카프측에서도 동반자 작가로 인정하였으며, 특히 현민의 작품은 추상적 관념적인 이효석의 작품에 비하여 상당히 구체적이어서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민의 진정한 작품 세계의 특징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카프 퇴조기에 발표한 단편 <김강사와 T교수>(1935)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지식인의 실상을 진실하게 파헤친 것으로 유진오의 문학 세계를 탐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지식인의 이상이 현실에 부딪쳤을 때 어떻게 변화하고 굴절되는가를 잘 파헤친 작품으로 구직이나 실직의 문제, 또는 어느 특정 집단의 부조리만을 고발하는 사회 고발 문학의 문제를 떠나서, 인간 모순이라는 커다란 문제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아직  사회적 경험이 적은 풋내기 강사와 세상을 노련하게 살아가는 교수와의 대립을 김강사의 의식의 표면에 초점을 맞추어 쓴 단편으로서 30년대 당시의 한국 지식인의 처했던 상황을 예리하게 묘파하고 있다. 김강사라는 약자로밖에 설 수 없는 한국인의 입장과 교수라는 강자를 인물로 한 일본인의 입장을 설정함으로써 일제 시대의 양 민족간의 대립 의식을 다루는 한편 세상을 약삭빠르게 살아가는 출세형의 인물을 보는 젊은이의 순수한 인생관을 표현하고 있다. 노련한 출세주의에 걸려 넘어지면서도 양심과 순수를 잃지 않으려는 젊은 지식인의 눈은 현민의 많은 수필에서도 자주 눈에 띈다.

현민의 본격적인 문학적 면모는 <김강사와 T교수>에서도 잘 드러나지만 그가 33세 되던 1938년에 발표한 <창랑정기>(동아일보)에서 더욱 뚜렷하게 표출된다고 할 수 있다. 이미 그는 그 전해에 보성전문학교 교수로서 이미 중견 학자로 성장하고 있었고 각 일간 신문에는 그의 수상과 평론이 자주 발표되곤 하였다. 말하자면 그는 문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이미 상당한 기반을 가지고 그의 이상을 실현해 나갈 수 있는 행복한 처지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

<창랑정기>는 작가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일인칭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서술 방식이 상당한 주목을 끌었다.

이 작품은 일곱 개의 부분으로 기술되어 있다. 작가의 의도는 그 첫 부분에서 다소 사적이고도 낭만적인 향수에 대한 서술로 드러나 있다.

'해만 저물면 바닷물처럼 짭조름히 향수가 저려든다'고 시인 C군은 노래하였지만 사실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란 짭짤하고도 달콤하며 아름답고도 안타까우며 기쁘고도 서러우며 제 몸속에 있는 것이로되 정체를 잡을 수 없고, 그러면서도 혹 우리가 낙망하거나 실패하거나 해서 몸과 마음이 고달픈 때면은 그야먈로 바닷물같이 오장육부 속으로 저려 들어와 지나간 기억을 분홍의 한 빛깔로 물칠해 버리고 소년 시절을 보내던 시골집 소나무 우거진 뒷동산이며 한 글방에서 공부하고 겨울이면……

향수에 대한 다소 에세이풍의 이 일반론은 다음에서 서술하려는 개별적인 작가의 경험을 보편적인 '향수'라는 개념을 통해 확신시킨다.

주인공의 삼종 증조부 서강 대신이 거처하던 창랑정은 여기에서 시골집 뒷동산이나 공부하던 글방으로 제시되며, 서강 대신 김종호라는 고유 명사는 수남이 복동이 등의 보통 명사화된 이름으로 나타난다.

즉 작품의 개별적 상황을 소개하기 전에 작가는 당인리의 한 곳에 위치한 창랑정을 평범한 시골의 어느 소나무 우거진 뒷동산쯤으로 받아들이도록 독자들의 이해를 도와 준다. 그러므로 대원군 집정 시대에 이조 판서를 지낸 서강 대신 김종호라는 인물 또한, 누구나 갖고 있는 그 나이 또래의 할아버지쯤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작품 속의 '나'라는 어린 소년은 바로 작가 자신이다. 이러한 판단은 작품 초두에 있는 '향수'의 일반론으로 해서 비로소 가능하다. 주인공 '나'는 특수한 배경으로서의 창랑정을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고향이라는 보편적 개념을 통해 개별적 처소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중 인물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사용된 이 작품의 첫부분은 다음에 나타나는 등장 인물과 배경에 대해 하나의 분명한 환상을 야기시키는데 이것은 사실인 듯한 환상이다.

한편 '창랑정'에 대한 향수가 확대되어 과거에 대한 안타까움이 파격적인 비소설적 문장의 도입부를 거쳐 시작된 이 작품은, 작가가 작품에 대해 갖는 거리의 절제 없이는 효과를 얻기 어려운 작품이다. 최초의 부분에서와 같은 작품의 어조나 거리가 계속 전 작품을 지배한다면, 이 작품은 감상적인 에세이 정도로밖에는 평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작품과 필요한 거리를 확보하려는 작가의 태도는 '나'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객관적인 스토리 진행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소녀 을순이와의 사춘기적 감정은, 소년기의 아름다운 추억 그 이상으로 발전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모든 기억 하나하나가 창랑정에 대한 애잔한 추억의 일부를 이루게 배치되어 있다.

일반론적인 감상에만 지배되지 않고 작품을 하나의 객관적 존재로 인식하여 미학적으로 계산된 거리의 문제는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명료하게 밝혀진다. 그리고 동시에 작품의 예술상에 깊이 기여한다.

창랑정은 추억의 나라, 구름과 연기에 싸인 꿈의 저편에만 있을 수 있는 존재였던가? 나른한 추억에 잠겼던 내 정신은 차차로 굳센 현실 앞에 잠깨 온다.

문득 강 건너 모래밭에서 요란한 프로펠러 소리가 들린다. 건너다보니 까맣게 먼 저편에 단엽 쌍발동기 최신식 여객기가 지금 하늘로 날아오르려고 여의도 비행장을 활주중이다. 보고 있는 동안에 여객기는 땅을 떠나 오십 미터 백 미터 이백 미터 오백 미터 천 미터 처참한 폭음을 내며 떠 올라갔다. 강을 넘고 산을 넘고 국경을 넘어 단숨에 대륙의 하늘을 무찌르려는 전금속제 최신식 여객기다.

끝 부분에서 독자는 '처참한 폭음'과 함께 환상으로서의 현실에서 깨어나게 된다. 즉, 질이 다른 두 개의 현실감을 독자는 한 작품 안에서 느끼게 되는 것이다.

창랑정의 어린 소년인 '나'와 당인리행 버스를 타고 서강에 있는 창랑정을 찾은 성숙한 '나'는 명확히 분리된다.

애초에 이 작품은 서두에 제시한 감상적인 향수의 일반론으로 해서 작중에 등당하는 두 개의 나, 즉 창랑정의 '나'와 전금속제 최신식 여객기의 폭음 앞에 선 '나'의 거리가 빈틈없이 접근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작가는 작품의 끝 부분에서 재치 있게, 그리고 재빠르게 창랑정 속에서 몸을 뺀다. 작가는 해설자인 소년 '나'로부터 소설의 미학이 요구하는 거리를 충분히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 획득은 다소 돌발적이고 부자연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또한 이 돌발스러움이 새삼스러운 효과를 독자에게 야기하는 것도 사실이다.

현민은 같은 해에 단편 <어떤 부처>, <치정>, <수술>등을 발표하였고 이듬해인 1939년에는 《문장》에 <이혼><나비><가을>을 발표하면서 동아일보에 장편 <화상보>를 썼다. 또 이 해에 《유진오 단편집》을 간행하였고 주목할 만한 평론 <순수에의 지향>을 발표하여 문학 평론가로서의 면목을 과시하였다.

<화상보>는 당시의 지식인 계층에 만연되었던 허무주의와 그에 대립되는 사조를 대비하는 애정물로서 복잡하면서도 끝내는 당연한 귀결로 결말나는 인생의 여러 국면을 파노라마같이 전개시킨 장편 소설이다. <이혼> <나비> <가을>은 흔히 시정소설(市井小說) 평가되는 도시 인정의 세태를 묘사한 것으로 일종의 문명 비평적인 느낌이 드는 소설이라고 하겠다.

현민은 1940년에 접어들면서도 활발한 작품 활동을 벌였다. <봄>(인문평론) <주붕(酒朋)>(문장) <여름>(문예)를 썼고 이 해에 소설집 《봄》이 간행되어 그의 작가적 기반은 더욱 튼튼해졌다. 1941년에도 <마차>(문장) <산울림>(인물평론) 등의 단편을 썼고, 1942년에는 <정선달> <신경>을 《춘추》에, <남곡선생>과 평론 <작가 이효석론>을 《국민문학》에 발표했다. 그후 해방될 때까지 몇 편의 소설과 수필을 썼지만 이미 그때의 시대 상황은 올비르게 문학 활동을 할 수 없는 경직된 것이었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면서 현민은 문학의 세계에서 떠나 전공 학문인 법률학계와 교육계에서 활동하게 된다. 그의 나이 40세였으니 그는 청년 시절에만 문학을 주로 하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20대 초기부터 30대 막바지까지 해 온 그의 문학은 그 기간이 짭은 데 비해서 상당한 질적 수준과 폭넓은 다양성을 획득하고 있음에 새삼 놀라게 된다.

그가 부가적으로 행했던 문학 평론의 분야도 <순수에의 지향>은 우리 문학의 한 방법을 단적으로 제시했다는 중요성이 있고 <작가 이효석론>은 최초의 본격적인 이효석론이었다는 데서 그리고 <소설의 핀트>는 소설 기술론의 일반론으로서 상당한 평가를 받게 되었다.

본격적인 소설 문학에서 손을 떼었지만 그는 해방 후에도 격조 높은 수필을 발표해 오고 있다. 그가 살아온 인생이 폭이 넓으면 넓을수록 느끼고 경험한 것도 그만큼 다양하고 또 그가 학계에서, 교육계에서 오랜 세월을 지도자로서 보낸만큼 남다르게 인생을 보는 시각이 있는 것도 당연한 노릇일 것이다. 그의 수필은 단순한 감상의 나열이 아니라 소설적인 구성과 날카로운 관찰력을 겸비하고 있다. 그는 기발한 착상이나 오만한 위엄이나 번거로운 수사를 피하는 대신에 일상의 구석구석에 널린 소재를 간결한 언어로 표현하면서도 단순한 회상이나 사실의 차원을 넘어서서 날카로운 관찰과 짜임새 있는 구성의 문미를 살리고 있는 게 현민 수필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그는 아쿠다가와의 <하동>을 읽고 대조적으로 느끼는 <레미제라블>의 감명을 말하면서 '역시 위대를 느낀다. 문학은 무력하지 않다. 신경과 기교의 문학은 무력하지만 영혼의 절규인 문학은 결코 무력하지 않다. 나를 지금까지 길러 준 모든 일본 문학을 타기한다. 정신의 양식이 아니고 손끝 장난이기 때문이다.……그것은 깊이가 없기 때문이다. 지식과 의견의 진열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라고 할 정도로 손끝 장난의 잔재주를 싫어했던 것인데, 이러한 정신이 그대로 반영된 장르가 바로 수필이라 할 수 있다.

선이 굵은 글 그러면서도 번거롭지 않고 가늘지 않기 위해서는 문장이 간명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수필의 여기저기에서 그대로 발견될 정도로 뚜렷한 문장도를 지녔던 것이다.

현민 유진오는 이제 40세의 은퇴한 문학사 속의 소설가이라기보다는 이미 격변하는 이 시대의 산 증인으로, 또는 한국 현대 문학사에 가장 폭넓고 독특한 의미로 그대로 살아 있는, 행복한 고전적 차원에 늘 살고 있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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