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유주현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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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현(柳周鉉)의 극한의식(極限意識)
金相善

  

 

 

1948년 《백민(白民)》지에 〈번요(煩擾)의 거리〉로 등단한 작가 유주현은 한 마디로 말해서 다양하고 다작(多作)의 작가라고 할 수가 있다. 여기 곁들여 문장이 난삽하지 않고 간명하며 살아 움직이고 있다. 따라서 어느 작품을 대해도 장면 묘사나 대화가 선명한 인상을 준다.

  뿐만 아니라, 제재 선택이 다방면이어서 사건 처리가 흥미롭다. 소설이란 반드시 인물이 등장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것인데 그 인물들이 흥미로운 사건을 엮어 나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누가 읽어도 재미있게 읽을 수가 있다. 그러면서도 통속적인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다는 점이 그의 장점인 것이다. 실록 대하 소설이라고 말해지는〈조선총독부〉하나만 놓고 본다 하더라도 그것을 쉽게 짐작할 수가 있다.

  우리의 주권을 잃고 허덕이던 일제 36년간을 배경으로 하여 숱하게 많은 인물들을 등장시킨〈조선총독부〉는 그야말로 흥미진진한 사건들이 전개되면서 모든 인물들이 생동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남주인공 박충권과 여주인공 윤심덕은 진정 작가 자신의 호흡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요. 작가 자신의 뼈를 깎아 형상화시킨 것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이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충실했으면서도 하나 하나의 사건이 무리 없이 엮어져 나간 때문이라고 하면 지나친 말이 될 것인가?

  결코 지나친 말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과소평가했다고 하는 편이 진실일 것이다. 이 밖에도 장편 역사 소설〈대원군〉〈통곡〉을 비롯해서 〈신부(新婦)들〉〈우수의 성〉〈황녀〉―그 어느 것을 펼쳐 보아도 사건 처리가 지루하다고 생각되는 점이 하나도 눈에 뛰지 않는다. 그만큼 그의 소설이 우리들에게 다양한 파노라마를 숨쉴 틈도 주지 않고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이 작가는 우리들에게 오직 읽을 수 있는 흥미 그것만을 던져 주는 것으로 시종 일관하고 있는 것일까? 처음부터 재미있는 이야기만으로 우리들을 즐겁게 하고 슬프게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도 하여금 무언가를 생각하게 하는 그 무엇은 없다는 말인가?

  전정 우리로 하여금 그 무엇을 느끼게 하는 점이 없다면, 여기서 이러한 글을 끄적거리고  있어야 할 하등의 이유도 없을 것이다. 이에 여기서는 그의 단편 소설을 중심으로 해서 그의 문학 세계가 어떠한 것인가를 더듬어 보기로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 작가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징 가운데의 하나는 인간을 어떤 극한 상황으로 몰고 간다는 점이라 하겠다. 숨막힐 막다른 골목에서는 그 어떠한 인간도 꼼짝달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서는 권력의 칼날을 휘두를 수도 없고, 화폐의 위력을 과시할 수도 없으며, 그 어떠한 권모술수도 통하지 않는다. 있는 것은 오직 인간 본연의 모습뿐이다.

  이제 나는 자유를 찾은 것이다. 나의 의사가 나의 운명을 결정지을 것이며, 은애마저 원한다면은 완전히 내 의사대로 조종할 것이다.

 〈허구의 종말〉의 남주인공이 고압선 송전주(送電柱) 중간 지대에서 자기의 현 위치를 생각하는 장면이다. '땅에서도 나의 죽음이 나를 기다리고 있고 하늘에서도 내 죽음이 나를 대기하고 있는' 위치에서 자유를 찾았다고 깨닫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전쟁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일등상사가 되기까지 2년 동안에 다섯 차례나 수술을 함으로써 제대 후에 자동차 운전도 제대로 할 수 없는 불완전품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매음굴 출신이긴 하지만 사랑하는 아내 은애와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자 했던 꿈이 산산조각이 났을 뿐만 아니라, 사랑을 뜻하는 침보다도 허기를 덜 수 있는 밥이 더 먹고 싶은 처지이기에 은애는 자기 몸을 팔아서 쌀되 값이나 얻어 가지고 저녁밥을 지었고, 이 작품의 주인공 나는 마지막 남은 가락지를 팔았으리라고 짐작하고서 그 과분하게 차린 저녁밥을 허겁지겁 먹은 것이다. 결국 은애의 매음 행위에 의해서 고픈 배를 채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불쾌하지도 않았다. 슬프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은애를 쓸어 안고 "잘했어! 울긴 왜 우노? 이젠 먹구 살 것이 해결됐는데." 하면서 울부짖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불쾌해서 은애를 벌컥 밀어 버리는가 하면 다시 끌어안고, 말하는 것도 횡설수설일 뿐만 아니라, 마치 미친 지랄을 하는 것과 같았던 것이다.

  이 날 밤 뜻하지 않는 화제로 두 사람은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어나왔다. "도둑놈 조심하라"는 아낙네의 외침과 "불낸 사람 나오라"는 경찰관 호통에 기가 막혀 버린 나는 그 아낙네의 제니스 라디오를 간단하게 훔쳐 경찰 지프차 안에 감춘 다음, 발동이 걸린 채로 세워 놓은 지프차에 올라타고는 핸들을 잡기가 무섭게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던 것이다. '활기 있는 불길과, 통곡하는 이웃 아낙네와 지프, 비싼 라디오와 그리고 발동이 걸린 채 운전수가 없는 지프차 등속이 절망의 구렁텅이에 서 있는 나를 우선 움직이게 한 것만은 사실이다. 은애가 우연히도 차에 올라앉아 있었던 것도 나로 하여금 핸들을 잡게 한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당황한 나머지 지프차를 몰다가 여남은 살짜리 소녀까지 치사케 한 다음 전속력으로 도망치다가, 나는 '뒤에서 총소리가 펑펑 났을 때, 지프차를 버렸다.'

  이때에도 나는 '공연히 남의 차를 몰고, 살인을 하고, 총구 앞에서 쫓기고 하는 나의 행동을 비판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밥을 먹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었고, 엄숙하고 진지한 행동이었을 뿐'이었다. 다만 나는, 은애까지 나와 함께 가야 할 이유가 없어서 그냥 비탈에서 은애를 쓰러뜨리고, 혼자 뛰어 도망치다가 송전주가 앞을 가로막기 때문에 그거 얼떨결에 다급하게 송전주를 기어올라 내려갈 수도 없고 더 올라갈 수도 없는 진퇴유곡에 빠져 있는 것이다.

  뒤이어 송전주 아래, 바위에 앉아 있는 애송이 순경이, "열녀 노릇 좀 해보지!"하고 설치는 찰나, 은애는 '기다렸다는 듯, 소나무에 기댔던 몸을 희뜩 가누더니 두말 않고 송전주 밑'으로 뛰어와 송전주를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순경이 은애의 행동을 저지할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다.

  이리하여 나와 은애는 아래로 내려 보낸 손과 위로 올려 보낸 손이 차가운 감촉과 함께 서로 마주 잡게 된 것이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정신적 세계를 대표하는 '나'와 육체적 세계를 대표하는 '은애'와의 합치점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에 '혼자서는 이 세상을 도저히 살아나갈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던' '나'라고 하는 존재를 보강했다는 해석을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어느 쪽이든 남주인공 '나'와 여주인공 '은애'와의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서 이 두 사람은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찾게 된다. 또한 여기서는 살고 싶으면 삶을 택할 수도 있고, 살기 싫으면 죽음을 택할 수도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는데,〈신(神)의 눈초리〉에서는 그러한 자유도 부여되지 않고 오직 절대자의 의사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어떤 누구에게 허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누구의 뜻도 아니고, 또 스스로 원해서도 아니고, 오로지 절대자만이 알 수 있는 절대자 그의 의사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강군의 죽음을 이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남들이 애지중지 사랑하는 것, 아름답다는 것, 그런 걸 마구 씹어 먹는다 생각하면 원시적인 정복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는' '진달래 꽃술' 때문도 아니고, '원시적인 욕망과 집념으로 일그러진', 그러면서도 '어떤 한 인간의 아주 처절하고 경건한 모습을 보여 주는' '아버지' 때문도 아니다. 그는 절대자의 의사에 따라 복상사(腹上死)로 '단 한마디의 말도 남기지 않았고, 남의 인상에 남을 만한 표정이나 눈초리도 보이지 않은 채 결코 제 뜻이 아닐 죽음의 세계로 간' 것이다.

  그러면 작가는〈신의 눈초리〉에서 강군의 이러한 죽음을 독자에게 보이는 것만으로 끝내려고 했단 말인가? 얼핏 잘못 생각하면, 죽어야 할 사람은 안 죽고 여든 살까진 자신 있게 살 수 있다고 장담한, 건장한 사람이 죽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오직 그러한 것만을 보여 주는 것으로 끝난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강군의 부친의 눈초리가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속단이 될 것인가?

  이에 먼저 강군이 자기 부친에 대해서 평한 것을 들어보기로 한다. 강군에 의하면, 자기 부친은 '인간의 선과 악, 사생관, 집념, 회한, 고집……추하기도 하고 엄숙하기도 하고, 또 소름이 끼치도록 미웁고 불쌍도 한 복합적인 표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정말 사람이 아니라, 원시적인 욕망과 집념으로 일그러진 추한 괴물'이며, '목욕탕 바닥에서 수집한 여자들의 거웃털의 이용 가치만도 못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너무 가식없는 한 인간의 처절하구 엄숙한 표정'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봤자 아무 쓸모도 가치도 없는 생명이요, 오히려 남에게 피해만 입히게 될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눈을 부릅뜬다고는 하지만 왼쪽은 반쯤 절려진 채 동공이 굳은 대로였고, 입은 꼭 다물었다곤 하지만 입마구리가 위로 바짝 치켜진 채 흉하게 씰그러졌으므로 걸다란 침이 그리로 줄줄 흐르고 있는' 그에게서 '인생으로서의 아무런 가능성'도 찾아볼 수 없을는지도 모른다. 또한 강군의 부친이 어이없게도 땅바닥에 쓰러졌을 때의 눈초리를 작가는 '절망의 눈초리'라 표현하면서, '쓰러졌다는 사실에 대한 절망, 운명 직전의 죽음과 겨루는 눈, 허탈과 실의(失意), 모든 의욕이 싹 까부러진 순간의 분노 섞인 눈초리'라고 보충 설명하고 있다.

  분명 강군의 부친에게선 마당에서의 걷기 훈련과 팔 올리기 운동을 함으로써 점점 더 활기를 띨 것인지 어떨 것인지 전연 예측할 수가 없다. 다만 그가 팔 올리기 운동을 하던 지점에서는 틀림없이 용마루 위의 하늘을 쳐다 볼 수 있을 뿐이다. 문제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있다.

  비록 쳐다보는 그 눈초리가 처절 그것이라 하더라도, 새로 시작한다는 그 환희와 집념을 끝내 간직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허공의 '그곳엔 형체와 색깔은 있으면서 무게도, 열도, 그리고 스스로의 의지도 갖지 못한 한 점 구름이 절대자의 어떤 소명(召命)을 받은 것처럼 그 허공 어디론가로 흘러가고' 있더라도, 그리고 또한 '거기서 싸늘하고 아주 비정적(非情的)인 어떤 눈초리를 본 것 같다' 하더라도, 노려볼 수 있는 허공이 있으니까 인간 존재의 이유가 있는 것이며, 인간 생존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신의 눈초리〉는 외부적이며 감각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내부적이며 정신적인 인간 본연의 생명을, 그리고 원시적인 인간의 순수성을 보여 준 작품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이곳저곳에서 보여지는 절망은 오직 절망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오, 인생에의 회의는 회의하기 위한 회의가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회의요 절망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이 작가의 단편집《신의 눈초리》후기(後記)에 '신의 존재를 외부에서 찾으려는 것은 일종의 샤머니즘이다. 그러나 그것을 내부에서 구한다면 그건 빛이며 가치이며 구원이다'라고 씌어져 있는 것만 놓고 본다 하더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다.

  한편〈육인 공화국(六人共和國)〉에서는〈허구의 종말〉이나〈신의 눈초리〉와는 약간 그 성질을 달리하지만, 이른바 '산다는 것의 원시적인 참모습'을 찾기 위해서 무인도를 찾아가 사흘 동안 이 섬에서 캠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섬에는 젊은 대학생 여섯 명 이외에는 그 아무도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미루어 볼 때, 이들은 분명 절대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서 스스로 선택한 셈이 된다. 그러니까〈허구의 종말〉은 각박한 주위 환경으로 말미암아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 송전주에 올라가는 결과를 빚어냈지만,〈육인 공화국〉은 일종의 건강한 저항을 시도하기 위해서 타의가 아닌 자의로 이 길을 택했다는 뜻이 된다.

  '법률도 없고, 지배자도 없고, 재즈도 스피드도 없고, 인과(因果)도 없고, 하느님의 은총도 바랄 필요 없는, 완전히 치외법권'인 이 섬에 있는 것은 오직 하늘과 바다와 땅, 그리고 여섯 명의 대학생―네 명의 남학생과 두 명의 여학생 뿐인 것이다. 그야말로 신천지에서 절대 자유를 젊은이답게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모든 조건이 완전히 갖추어진 셈이다.

  그런데 여기엔 다른 또 하나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여학생인 혜련이가 4·19때 총상을 입고 왼쪽 다리를 몹시 절룩거리는 남학생 사군에게 자기 뺨을 때려 달라고 하는 데서부터 비롯된다. '싱거우니까 아무한테나 맞기라도 해야겠다'는 것이다. "더! 세게!"하고 떨리는 음성으로 부르짖는 혜련이가 진한 쾌감 같은 것을 느낀다는 것이 곧 그것이다. 사군의 세찬 손길에 의해서 두 번 세 번 거듭 얻어맞은 혜련은 '그래도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내 입이 굳게 닫혀진 채 천 년을 침묵할 것 같다. 감고 있는 두 눈 마구리에선 이슬 같은 눈물이 소롯이 돋아난다.'

  그 다음 문제는 그날 밤에 일어났다. 바닷가 사장(砂場)에서 술도 마시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었다. 그러나 춤은 지치는 것이요, 노래는 시들해지는 것이요, 술이라고 해서 언제까지는 마실 수 있는 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자 '민 군과 오 군이 슬며시 싸움을 벌였다. 동기는 싱거웠지만 피들을 흘리며 싸웠다. 눈두덩이 부었다. 오 군의 오른쪽 눈이 밤알만큼이나 푸르딩하게 부어 올랐다.' 손뼉 장단으로 응원하던 장군과 사군도 마구 설치면서 모래 위에 뒹굴었다.

  세 번째 문제는 장군(將軍)의 아들인 오 군에 의해서 제의됐다. "여기 인류 여섯 명은 마땅히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모든 가면의 탈을 훌훌 벗어 팽개치고 적나라해 보잔 말이다. 벌거숭이 인간들이 돼 보자는 거다. 자랑할 것도 없는 우리 여섯 명의 세계에서 저마다 뭐 그렇게 소중한 것처럼 거길 가리고 잇느냐 그 말이다. 자아, 모두 나를 따라라!" 먼저 오 군이 수영 팬티를 훌훌 벗어 팽개치고, 이에 따라 민 군도 덩달아 벌거숭이가 되고, 마지막엔 퇴직 교수의 딸인 정임이가 홱 돌아서더니 망설임 없이 초록색 해수욕 복을 몸에서 쑥쑥 뽑아 버렸다.

  싱겁고 시들하고 권태로워서 옷을 벗은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또 무엇을 벗어야 직성이 풀릴 것인가?' 그 다음엔 발광하거나 섹스로 돌아갈는지도 모른다. 일반적인 섹스는 따분하니까 간통 정도는 돼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 간통 다음엔 무엇이 된단 말인가? 여기에 대한 답변은 시를 쓴다는 장군이 대신하고 있다.

  "간통 담엔 뭘까. 건드려 볼 건 죽음밖에 없겠지. 허지만 죽음만은 장난이 아냐. 죽음 앞에서 장난질을 칠 만한 용감한 놈은 여기 없어," 그러니까 치고 받으며 싸움질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옷을 벗도 알몸뚱이가 되는 것도 장난이 된다는 것이다. 원죄 의식에 사로잡힌 인간이기에 진정으로 알몸뚱이가 될 수는 없고, 어디까지나 장난 이상의 것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죽음만은 장난일 수 없다. 죽음은 모든 것의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또 장군은 이어서 말한다. "결국 우린 육지로 돌아가는 길밖에 없겠지. 놀던 물이 그리워서 돌아가겠지. 돌아가서 뭔가 또 해야겠지." 그리하여 민 군은 견습 기자 시험에 응시할 것이고, 사군은 명동의 음악 감상실을 돌아다닐 것이고, 알피니스트 오 군은 가망 없는 고시(考試) 공부를 할 것이고, 장군은 시를 쓴다고 원고지를 없앨 것이고, 또 재벌의 외동딸인 혜련은 소파 수술을 할 것이고, 정임은 아나보라를 사러 약방으로 달려갈 것이다. 또한 발가벗은 다음에 권태를 느끼면 죽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기 때문에 몸에는 최소한도의 것이라도 무어든 걸쳐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따라서〈육인공화국〉은 사흘 동안이라는 제한된 시간에 한한 것이지만, 그것마저도 절대 자유가 가장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 셈이 되는 것이다. 인간이란 전제자 앞에서, 채찍 밑에서, 규제 때문에 전전긍긍할 때에 절대 자유를 갈망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절대 자유라는 것은 그 아무데도 없다. 이것은 사군이 혜련이 앉아 있는 곳은 원심(圓心)으로 해서 10미터쯤 되는 원을 절뚝거리며 발끝으로 그렸다는 그것이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다 할 것이다.

  장군의 애인인 혜련을 사랑하는 사 군은 자기들만의 자유를 위해서 두 사람만의 영지를 선포하여 외래인의 접근을 금하고 있지만, 한편 혜련과 사 군은 지름 10미터 원 둘레 밖으로의 절대 자유가 구속된, 이른바 자승자박의 결과를 가져온 셈이 되고 만 것이다 실제로 있어서 이들 여섯 명이 찾아온 섬이라는 것도 섬 둘레 안에서의 자유인 것이지, 이들이 원래 생각했던 것과 같은 절대 자유는 결코 아닌 것이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또 한번 일어난다. 이들의 세계에 낯선 이방인(異邦人)이 '이 영해의 여러 섬들'은 자기네들이 지배하고 있다면서 막 싸움을 시작하려는 순간, 장군이 그들을 제지하면서 '지극히 엄숙한 표정으로, 도전자들이 서 있는 곳을 원심으로 해서 또 지름 10미터쯤의 둥근 원'을 발끝으로 그린 것이 그것이다. 결과적으로는 같은 것이지만, 사군이 그린 원은 그 원 안으로 외부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한 것인데 반하여, 장군이 그린 원은 원안에 있는 사람들이 나오지 못하게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선은 당신들의 위치와 우리들의 위치를 구분하는 훌륭한 구획입니다. 이 지구 위에 있는 모든 구획은 이렇게 발끝으로 그었든지 손가락으로 그렸든지, 하여튼 몇 가닥의 선으로 형성됩니다. 일단 선이 그어진 이상 그것은 엄숙한 현실이며 뛰어넘을 수 없는 강이며 허물어뜨릴 수 없는 벽입니다. 집과 집의 담 장, 군(郡)과 군의 경계, 나라 사이의 국경, 영해(領海) 영공(領空)의 구분, 동서 베를린의 장벽, 비극의 38선, 그런 불가침의 엄연한 구획들도 이런 식의 선으로 이루어져 있는 겁니다.

  이것은 장군이 도전자들에게 엄숙한 어투로 선언한 일부분이다. 따라서 외래인이나 이방인은 한 발자국도 넘어서면 안 된다. 넘어서면 침략자가 되기 때문이다. 만일의 경우, 이 선을 유린하는 자가 있다면, 육인 회원들은 그들과, 생명과 명예를 걸고 사수하겠다는 것이다. 여섯 명의 인명이 전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침략자는 격퇴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이 선에 대한 여섯 명의 권리이고 의무이기 때문이다.   

  여기 곁들여 장군은 오 군이 당수(唐手)가 4단이라는 걸 공개하는 동시에, '무의미한 피를 흘리지 말고 당신 네 들의 원 위치'로 물러가라는 강경한 경고를 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줄기찬 강변에 모두 다 아연했다. 아무도 웃지를 못했다.' 침략자들은 "철조망이램 끊고 넘겠지만, 이거야 어디……" 하면서 '더 이상 말도 웃음도 없이 물러간다.'

  분명 여섯 명의 젊은이들은 절대 자유의 신천지를 찾아왔지만, 역시 '선' 이라는 구획에 의한 상대적인 자유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에겐 오늘이라는 현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일이라는 미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 군이 혜련의 키스를 못 잊어 하는 것일지도 모르고, 또 장군과 혜련은 울화통이 터질 일일는지 모르고, 정치가는 저들끼리 쌈박질, 거리엔 득실거리는 불량배 군상, 은행 청구엔 부도 수표, 냉면 국물엔 파리의 시체가 있는 일상적인 생활과도 밀착된 것이기도 하다. 부조리한 현실을 뛰쳐나온 그들이지만, 역시 그들은 그 현실의 소용돌이 속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특히 섹스 면에 시점(視點)을 두고 파헤친 작품에〈패륜아〉와〈장씨 일가(張氏一家)가 있다. 모두 다 자유당 시절을 배경으로 했다는 점이 공통된다.

  〈패륜아〉는 주인공인 권태준의 아버지, 태준의 계모 정씨, 태준의 애인 윤애와의 사각관계를 그린 작품이다. 강화도 전등사(傳燈寺) 절 문밖 속민(俗民)의 초옥(草屋) 단칸방에서 태준은 치사량의 수면제를 먹고 몽롱한 의식 속에서 이틀 동안의 일들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태준의 아버지 권명길은 태준의 어머니를 생으로 말려 죽이다시피 한 위인이다. 병든 아내에게 시약(施藥)은 고사하고, '이따금 정체 모를 여자를 집안에까지 끌고 와서 병든 본처를 옆에 두고 여봐라는 듯이 색정 유희를 감행해서 어서 죽어 주면 이렇게 버젓이 살겠다고 시위를 하기가 일쑤였다.' 이러한 속에서 자라난 태준이가 불량한 패륜아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그리고 태준은 자기의 애인 윤애를 아버지 비서로 취직을 시켜 줬는데, 계모는 질투 때문에 아버지와 윤애가 강화도로 애정 행각을 떠났다는 정보를 태준에게 제공하면서 그들의 뒤를 미행하자는 제안을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계모 정여사와 태준은 미행한다는 이유를 내걸고 전등사 앞 초옥 단칸방에서 곤드레만드레가 되도록 술을 마신다. 또한 두 사람은 서로 사내 냄새와 계집 냄새를 맡는다. 이때 마침 아버지는 사업 관계상 여러 친우들과 더불어 강화도에 왔던 것이다. 그 아버지도 이 초옥을 찾아오게 되어 태준의 시선과 아버지의 시선이 마주친 것이다. '아버지 권명길은 결코 여비서 윤애와 애욕 도피로 강화도에 온 것'이 아니었지만, 패륜의 아버지, 패륜의 계모, 패륜의 태준이가 초옥에서 만난 것이다. 도저히 헤어나지 못하는 지점에서 만났다는 뜻이다. 이것이 곧 그들의 겪어야 할 운명인지도 모른다.

  그러면 왜 이 작가는 이른바 '어떠할 수 없는 절망의 시각'임을 주인공 태준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것이며, '모든 것은 끝나야 할 단계'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인가? 길은 오직 '죽음' 이라는 한 길밖에 없는데, 어찌하여 작가는 이 길로만 몰고 가는 것인가? 작가는 '이유는 없다'고 말하면서 '이유도 없이 죽으려는 마음, 그 자체가 자기가 죽어 마땅한 이유인지도 모른다'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 이 작품의 주인공을 꼼짝달싹 못하는 지점에 묶어 놓고 죽음의 나락으로까지 몰고 가는 것은 자유당 당시의 부패한 사회상의 불합리와 부조리를 고발하려는 것이라고 한다면 필자의 지나친 속단이 될 것인가?

  또한〈장씨 일가〉라는 작품도〈패륜아〉와 대동소이한 소품이라 하겠다. 다만〈패륜아〉는 1956년에 씌어졌는데, 〈장씨 일가〉는 그보다는 3년 뒤인, 4·19직전의 자유당 말기, 1959년에 씌어졌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장씨 일가〉는 저마다 방향이 다른 사람들이 한 지붕 밑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됐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물론 이들은 각각 독립된 존재들이지만 필연적인 연관성, 끊으래야 끊을 수 없는 줄에 얽매여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장정표는 치밀한 계산 끝에 군대에 자진 입대해서 장군 되는 걸 지상 목표로 삼고 있었는데, 전방 지뢰 부설 지대를 잘못 밟아 지뢰가 터지는 바람에 시력을 잃고 청각의 기능마저 잃은 지 꼭 6개월이 된다. 정표의 아버지 장만중은 10만 명을 대표하는 국회 의원이고, 장군 부인 일보 직전에서 전락해 버린 아내 경심, 고등학교 학생인 아우 성표, 그리고 아버지의 비서이며 대학 후배인 김윤수와 가정부 순자 모두 여섯 명인데, 이들은 한결같이 막다른 절망의 심연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내 경심은 시어머니의 49일제를 이틀 앞둔 날 저녁 어느 호텔에서 시아버지의 비서 윤수와 정을 통했고, 여학생을 앞세워 남학생의 등을 처먹는 성표는 가정부 순자를 임신케 했고, 장 의원은 '이미 몇 사람의 의견으로 결정되다시피 된 안건을 당론(黨論)으로 만들기 위해서 꼭두각시놀음을 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니까〈장씨 일가〉는 이러한 인물들이 얽혀서 꼼짝못하는 장면을 독자에게 보여 줌으로써 당시의 사회악을 우회적으로 폭로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정표가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게 된 원인도 역시 그 사회상을 반영한 것이라는 풀이를 할 수가 있다.

  이러한 사회상을 여실하게 보여 준 작품에〈태양의 유산(遺産)〉이 있다. 이 작품은 기대한 만큼 절망한다는 것으로, 딸 삼순이가 돈 벌어 가지고 오리라고 기대했던 배생원은 삼순이가 낳아 가지고 온 아이가 깜둥이 새끼였다는 것에 절망한다는 것이 대체적인 줄거리이다. 또한 이 작품이 보여 주는 것은 문란한 성 윤리―삼순이가 말한 것도 없고, 곰배 무당과 배생원과 삼덕암 주지와의 삼각관계를 여실하게 보여 준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것은 당시의 사회상의 한 단면을 날카롭게 파헤쳐 우리로 하여금 무언가를 생각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비정한 사회 풍속도를 보여 준〈유전이십사시(流轉二十四時)〉같은 것은 우리의 주목을 끄는 작품이라 하겠다. 이것은 지폐를 의인화시켜 사회의 구석구석을 폭로하고 풍자한 것으로 그 마지막 장면이 퍽 인상적이다. 그 지폐가 은행을 떠난 지 24시간 뒤에 화장장의 화부의 안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이 곧 그것이다. 인생의 마지막 수속이라고도 할 수 있는 화장터로 갔다는 것의 상징적인 여운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일에 종사하는 화부를 등장시킨〈인생을 불사르는 사람들〉의 덕배는 자기 마누라의 뼈를 갈고 있으면서 얼굴조차 짓지 못하는 기계와 같은 사람이다. 이런 기계와 같은 사람이 비단 화장터의 화부에게만 있는 것일까 한번 행각 해 볼 문제이다.

  그리고 6·25사변 직후를 배경으로 해서 희극적인 동시에 비극적인 참상을 보여 준〈명함 한 장>, 사변 직후의 혼란 속에서 한 남성을 가운데에 두고 자매간의 갈등을 그린〈자매 계보(姉妹系譜)〉를 비롯해서 담담한 필치로 노작가 청암(靑岩)의 스물 한 살 된 문학 소녀에 대한 서정적인 애수 같은 것을 그린〈노염(老焰)〉, 늙은 교육자의 서글픈 말로를 다룬〈일각 선생(一覺先生)〉, 젊은이의 기존 질서에 대한 반항을 묘파한 〈연기된 재판〉등 앞에서도 이미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이 작가는 우리 인간 사회를 다각적으로 파헤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그는 불합리한 사회의 부조리와 비정을 풍자적인 처지에서 과감하게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인간을 이러할 수도 없고 저러할 수도 없는 극한 상황에 몰아 붙이고선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가는 사회 현상이나 인간 생리를 그저 부정하기 위해서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점을 여실하게 보여 준 작품으로 아시아 재단이 제정한 제6회 자유문학상을 1958년 받은〈언덕을 향하여〉라는 것이 있다. 이 작품도 대개의 다른 작품과 똑같이 강 둔덕이 터져서 낙동강 물이 휩쓸어 들어온다는 어쩔 수 없는 극한 상황에서 인간의 원초적인 생명에의 사랑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왼쪽 다리를 절게 된 덕수(德秀)의 제안에 의해서 육군 병원에서 제대증을 찾게 될 무렵,  혁(赫)도 여기에 동의하여 구포( 浦) 다리 하류에 토막집 두 채를 짓고 형제처럼 살고 있다. 그런데 그 40일 동안의 지루한 여름 장마 때문에 둑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 '강둑이 툭 터지면 불과 일 분 이내의 두 채밖에 없는 촌락은 물바다가 되어 오도가도 못하게 되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런 판에 혁의 아내 희숙은 해산을 하려 하는데, 그만 거꾸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난산(難産)에 허덕이고 있다.

  한편 덕수는 자기의 전 재산인 돼지 새끼를 '두 마리쯤은 가슴과 옆구리에 달고 달아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덕수는 강둑 사정이 어떤가 보러 강가로 나간다. 마침내 강둑이 터진다는 전갈이 왔다. 순간, 희숙은 깜짝 놀라 혼신의 힘을 아랫도리에 주어 아기를 낳는다. 그런데 벌써 강둑이 서너 칸 통이나 끊어져 황톳물이, 희뿌옇게 몰아닥치는 물살이 둑과 집의 절반 거리까지 와 있었다. 위기 일발의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혁은 방문을 박차고 들어가 산후 처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아내를 번쩍 들고 일어섰다. 덕수는 자기네 돼지울을 홱 돌아보긴 했지만, 돼지 울로는 가지 않고 혁이네 방으로 뛰어 들어가 돼지 새끼 대신에 방바닥에 굴러 있는 어린것을 홑이불에다 둘둘 말아서는 가슴에다 안았다. 살아 있는 생명은 우선 '저 언덕'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언덕은 이미 사면이 물바다로 고립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알면서도 허위단심 그 언덕을 향해 점점 거세어지는 물을 꾸준히 헤쳐가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어떠한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도 굴하지 않겠다는 인간 본연의 의지의 발현이다. 이런 경황에 있어서의 인간의 생명이란 예측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선 목숨만은 건질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반면에 잘못하면 그 거센 물살에 목숨마저 앗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란 당장 자기 생명이 탕진된다 하더라도 끝까지 성실하게 노력하는 데에 인간 존재의 이유가 있는 것이며, 인간 생존의 진실성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곧 인간의 원초적인 본성이 아닐까?

  따라서 작가 유주현은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설정하지만, 그것은 절망하기 위한 절망이거나 부정하기 위한 부정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초월하기 위해서 절망하고 부정하고 불안에 떠는 인간을 등장시켰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말미암아 그가 부조리한 현실 사회를 고발하고 비판하면서, 경우에 따라 신랄한 야유를 퍼붓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적나라한 인간의 존엄성을 보여 줌과 동시에 인간 본연의 자세를 보여 주려는 데에 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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