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유년시대 / 톨스토이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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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시대 / 톨스토이


즐겁고 행복스러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유년 시대여! 어찌 그 추억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어찌 그 추억에 즐겨 잠기지 않을 수 있으랴. 유년 시대의 추억은 나의 영혼에 청신한 기운을 불어넣어, 보다 높은 곳으로 끌어올린다. 그리고 그 추억은 내게 있어 더없이 감미로운 열락(悅樂)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실컷 뛰놀고 난 다음엔 차[茶] 탁자 앞에 놓인 높다란 의자에 가서 앉곤 하다. 내 좌석으로 정해진, 팔걸이가 달린 의자다. 밤도 꽤 깊었다. 설탕을 탄 우유를 다 마셔 버린 지도 오래다. 눈까풀이 무거워진다. ― 잠이 오는 것이다. 그래도 꼼짝 않고 앉아서 어른들이 하는 얘기를 듣고 있다. 어찌 그것을 듣지 않을 수 있으랴.

어머니가 누구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말할 수 없이 감미로운 그 음성이 귓전에 은은히 울려 온다. 그 음향만으로도 나의 마음에는 수없이 많은 이야기가 전달되는 것이다. 졸음 때문에 안개가 낀 것 같은 몽롱한 눈으로 나는 언제까지나 어머니의 얼굴을 응시한다.

그러고 있노라면 갑자기 어머니의 몸이 조그맣게 줄어들며, 그 얼굴이 단추만한 크기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윤곽만은 여전히 또렷하게 보인다. 어머니가 나를 보고 싱긋 웃는 것까지 분명히 볼 수 있다.

이렇게 콩알만큼 작아진 어머니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나는 무엇보다 좋았다. 눈을 더욱 가늘게 뜨면, 어머니는 마치 눈동자 속에 비친 어린애의 영상만큼이나 작아진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면, 이 영상은 금세 부서져 버리고 만다. 다시 몸도 도사리기도 하고 눈을 가늘게 뜨기도 하며 이 영상을 소생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해 봐도, 결국은 헛일이 되고 만다.

나는 좀더 편한 자세를 취해 보려고 두 발을 의자 위로 끌어올린다.

"얘, 니콜렌카야, 너 또 게서 자려고 그러는구나!"

라고 어머니가 말한다.

"졸리거든 어서 2층에 올라가거라."

"나 졸리지 않아요."

하고 나는 대답한다.

그러나 몽롱하면서도 달콤한 환상에 휩싸이며, 나도 모르는 새 두 눈이 스르르 감기고 만다. 1, 2부 후엔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하게 되어, 누가 깨울 때까지 그냥 내처 잠잔다. 하지만 누군가의 부드러운 손길이 와 닿는 것을 꿈결에도 느낄 수 잇다.

그리고 그 촉감만으로도 손길의 임자가 누군지를 알 수 있다. 그러면 잠에 취한 상태에서 거의 본능적으로 그 손을 잡아 입술에 갖다 대고 비빈다.

벌써 모두들 자기 방으로 흩어져 가고, 응접실에는 촛불이 한 자루 타오르고 있을 뿐이다. 어머니가 손수 나를 깨우겠다고 말한 모양이다. 어머니는 내 곁에 앉아서 말할 수 없이 부드러운 손길로 나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바로 귓전에서 너무나 귀에 익은 달콤한 음성이 울린다.

"이젠 일어나거라. 니콜렌카야. 2층에 올라가서 자야지."

어머니의 애무(愛撫)를 방해할 그 누구의 시선도 방 안에는 없다. 어머니의 아무 거리낌없이 모든 애정을 나한테 쏟는다. 나는 꼼짝도 않는다. 어머니의 손에 더욱 세차게 입술을 비빌 뿐이다.

"어서 일어나거라, 응!"

어머니는 다른 손으로 나의 목을 잡는다. 그 손가락이 재빨리 움직이며 나를 간지른다. 방 안은 어두컴컴하고 조용하다. 간지럼 때문에 나의 신경은 눈을 뜨고 예민해진다. 어머니는 내 곁에 앉아서 나를 쓰다듬고 있다. 나의 어머니의 체취를 느끼고, 어머니의 음성을 듣는다. 이 모든 것에 작용되어 나는 벌떡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는 두 팔을 어머니의 몸에 감고 머리를 그 가슴에 묻으며 숨가뿐 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엄아, 나는 엄마가 좋아, 엄마가 제일 좋아!"

어머니는 언제나처럼 그 서글프고도 매혹적인 미소를 띠며 두 손으로 나의 머리를 감싸고 이마에 키스를 한 다음 나를 무릎 위에 앉힌다.

"그렇게 너는 엄마가 좋으니?"

하고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나를 좋아해야 한다. 알겠니? 그리고 이 엄마를 잊어서는 안 된다. 혹시 엄마가 죽더라고 너는 잊지 않겠지, 응? 엄마를 잊지 않겠지 응, 니콜렌카야?"

어머니는 더욱 다정스럽게 키스를 해 준다.

"그런 말 하면 난 싫어! 인젠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응, 엄마!"

나는 어머니의 무릎에 입을 맞추며 이렇게 외친다. 내 눈에서는 눈물이 줄지어 흘러내린다. ― 애정과 환희의 눈물인 것이다.

그 다음, 2층으로 올라가서, 솜을 넣은 파자마를 입고 성상(聖像) 앞에 선다. '주여,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할 때 경험하는 감정은 참으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황홀한 것이었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위해, 잘 돌아가지 않는 혀로, 갓 배운 이 기도문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고 있노라면, 언제나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신(神)에 대한 사랑이, 기이하게도 하나의 감정으로 융합되는 것이었다.

기도를 끝내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면, 후련하고도 밝은 마음은 기쁨에 충만되곤 한다. 갖가지 공상이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그것은 무엇에 대한 공상이었을까? 모두가 두서 없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것뿐이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순결한 애정에서 우러나는 것이었다. 어두운 그늘이 없는 행복에 대한 기대에서 우러나는 것이었다. 이런 때 나는 카를 이바느이치와 그의 불행한 운명을 자주 상기했다.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그가 가장 불행한 인간이다. 나는 못 견딜 지경으로 그가 불쌍해진다. 그리고 못 견딜 지경으로 그가 사랑스러워진다. 어느 새 내 눈엔 눈물이 글썽해진다. '하나님, 그 사람에게 행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그를 돕고 그의 슬픔을 덜어 줄 수 있는 능력을 나에게 내려 주옵소서, 그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이라도 감수하겠나이다.'

그 다음,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기 완구(玩具)를 ―토끼나 강아지를 푹신한 베갯머리에 놓고, 그들 장난감 동물들이 기분 좋게 앉아 있는 모양을 대견스럽게 바라본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을 내려 주시기를, 누구나 다 만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빈다. 그리고 또, 내일 소풍을 가는데 좋은 날씨가 되게 해 주십사고 빈다. 나는 벽 쪽으로 돌아눕는다. 사상과 공상이 뒤죽박죽 헝클어진다. 그러면 나는 눈물에 젖은 얼굴로 그냥 고이 잠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유년 시대에 내가 소유하고 있었던 그 순결성과 낙천성(樂天性), 사랑에 대한 요구와 신앙의 힘을 되찾을 날이 과연 있을 것인가? 순진 무구한 낙천성과 사랑에 대한 끝없는 요구―이 두 가지 선(善)이 삶의 유일한 원동력이었던 그 시대보다 더 좋은 시대가 과연 있을 것인가?

그 때의 그 뜨거운 기도는 지금 어디 갔는가? 하나님의 귀중한 선물인 그 순결한 감격의 눈물은 어디 갔는가? 위안의 천사(天使)가 날아와서 미소지으며 그 눈물을 닦아 주고, 아직 더럽혀지지 않은 나의 어린 마음에 감미로운 공상의 씨를 뿌려 주는 것이었다.

과연 나의 인생이, 그 기쁨과 그 감격의 눈물을 내게서 영원히 떠나 버리게 할 만큼 그처럼 무거운 발자국을 내 가슴에 남겨 놓은 것일까? 그리고 그 기쁨, 그 눈물은, 이제는 한갓 추억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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