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의 연원과 성립
by 송화은율유교의 연원과 성립
이 기 동 (성균관대 유학과)
유교는 공자가 창시한 것이 아니라 고대에서부터 내려온 훌륭한 사상들을 종합하고 정리하여 체계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유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교문화 성립의 원류가 되었던 고대문화를 고찰하지 않으면 안된다.
신석기시대에 접어들어 발해 연안에서는 고도의 인류문명이 꽃피기 시작하였다. 이들 신석기시대 문화유역에서는 동북아 신석기시대 문화를 대표하는 빗살무늬 토기가 많이 출토되었는데 이 토기들은 채색되지 않고 검은 색을 띠고 있었으므로 이들 문화를 흑도문화(黑陶文化)로 규정하기도 한다. 흑도문화권은 평양에서 리아오동 반도를 거쳐 산둥 반도에 이르는 광범위한 해변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한다.
흑도문화권은 하나의 통일왕국에 의하여 형성된 것이 아니라 수많은 부족국가에 의하여 형성되었는데, 이들 부족국가들을 후대의 중국인들은 동이(東夷)라 지칭하였다. 단군조선 역시 동이족 중의 한 부족국가였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의 한민족은 단군조선 뿐만 아니라 단군조선 외의 여러 동이족의 후예들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며 그 외의 동이족들은 오늘날 중국화하였으므로 동이족 고유의 문화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고대의 동이문화는 중국문화가 아니라 한국문화의 원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은대(殷代)이전에는 통일국가의 형태를 취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을 중국이라고 할 수도 없고 따라서 당시의 문화를 중국문화라고 할 수도 없다.
일반적으로 은대 이전의 고대문화를 중국문화로 취급하는 것은 사마천(司馬遷)이 기록한 <史記(사기)>의 영향이 큰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사기>는 중국 역사를 기롯한 책이라고 이해하기 쉽지만,사실은 <조선전> <흉노전> <남월전> <동월전>등 당시에 알려진 천하의 모든 일을 기록한 세계사였다. 그러므로 은대 이전의 문화를 중국문화로 인식하는 것은 재고되어야 한다. 특히 순(舜)이나, 은을 건국한 탕(湯)은 동이족이므로 그들의 문화는 당연히 한국문화의 원류로 재편되어야 할 것이다.
동이문화의 특징은 종교성이 강하여 하늘을 숭상하며, 인간의 모든 일을 결정할 때 하늘의 뜻을 묻는 점법이 발달했으며, 소박하고 순일한 것을 좋아하며,합일성과 통일성을 추구하는 것 등인데, 이러한 동이문화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인(仁)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인(仁)은 인(人)의 마음상태이고 인(人)은 동이족을 지칭하는 고유명사였다.
사람은 마음과 몸이라고 하는 두 요소로 이루어져 있는데 마음은 하늘로 연결짓고 몸은 땅으로 연결짓는 전통적 사고방식에서 본다면 동이족이 하늘을 숭상한다는 것은 마음을 중시하는 정신지향성이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몸은 각각 독립된 개체로 존재하지만 마음의 본질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하므로 몸을 중심으로 파악하는 사람들에게는 남과 나를 구별하는 분별력이 발달하지만 마음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는 남과 나를 하나로 파악하는 일체감이 발달한다.
따라서 동이족에게는 남을 나처럼 여기고 사랑하는 인도주의 정신이 발달하게 되는데 이러한 동이족의 마음상태를 훗날 공자는 인(仁)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아(爾雅)>에서 이(夷)를 인(仁)으로 설명한 것은 이를 입증하는 좋은 자료이다. 동이족의 인(仁)의 정신은 오늘날 한국인게게 그대로 남아 있다.
한국인들의 너와 나를 구별하지 않고 ‘우리’라고 표현하는 것이 그것이다. 예컨데 한국인들은 남에게 나의 어머니를 ‘우리’어머니, 나의 집을 ‘우리’집 등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말의 뉘앙스를 외국어로는 변역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오늘날의 한국인의 마음 상태를 그대로 공자가 인으로 표현한 것은 아니다. 남과 나를 하나로 생각하는 한국인들은 남의 어려움을 나의 어려움으로 여겨서 동정하고, 남의 일을 나의 일처럼 돌보는 인도주의 정신이 있는 반면 ‘남’의 것을 ‘나’의 것으로 생각하는 습관 탓에 밥은 내가 먹고 값은 남이 지불하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의타심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공자는 이 중에서 전자의 경우만을 인(仁)이라고 설명하였다.
발해 연안을 중심으로 한 동부지역에서는 흑도문화권이 형성된 반면 황화강 중상류와 양자강 중상류에 걸친 중원(中原)의 서부지역에서는 채도문화권(彩陶文化圈)이 형성되어 이 두 문화권이 중원에서 충돌하여 갈등과 조절을 되풀이하였다. 흑도가 순일성·통일성·추상성·내면성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채도는 다양성·분석성·현실성·외면성을 상징하는 것이므로, 여기서 보면 동부지역의 문화의 특징이 인간의 내면을 강조하는 종교성이 발달한 것인데 비하여 서부지역의 문화는 인간의 외면성과 현실성을 강조하는 특징을 가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동부지역의 문화가 인(仁)의 문화라면 서부지역의 문화는 지(知)의 문화이다.
인(仁)으로 대표되는 동이족의 정신문화는 추상성이 발달한 반면 구체성이 결여되고 분석력이 떨어지기 쉬우므로, 동이족 자신들의 손에 의해서는 구체화되기 어려우며 따라서 전수되기 어려운 특징이 있다. 그러므로 동이족의 정신문화는 중원으로 서진(西進)하여 서부문화와 충돌한 뒤 서부문화의 지적(지적)인 분석력에 힘입어 구체화되고 체계화된다. 다시 말하면 인(仁)이 지(知)의 요소를 받아들여 원만해진 것이다. 그것이 이른바 중용(中庸)이다.
중용이란 서로 다른 두 요소를 통합하여 조화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중용이란 인(仁)의 문화와 지(知)의 문화가 평면적으로 단순히 결합되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인(仁)의 문화가 뿌리가 되고 지(知)의 문화가 지엽이 되며 인(仁)의 문화가 핵심이 되고 지(知)의 문화가 표피가 됨으로써 하나의 체계로 조화를 이루는 상태가 되는 것이 중용인 것이다.
사람이 정신적인 삶에만 치중하면 현실적인 분별력이 없어지므로 혼란이 일어날 수 있으며 육체적인 삶에만 치중하면 남과 끝없는 경쟁을 벌이게 되므로 갈등이 일어난다. 그러나 지상에서 각각 독립적인 개체로 보이는 대나무가 지하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육체적으로 보면 각각 독립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인간존재도 마음의 세계에서는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정신적 삶을 바탕으로 한 상태에서 육체적 삶을 영위하면, 본질적으로는 남과 ‘하나됨’을 바탕으로 하면서 현실적으로는 각자의 고유한 삶을 독립적으로 영위하게 되어, 개인의 삶과 사회의 질서가 모두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태가 중용이다.
중용을 최초로 주창한 사람은 요(堯)와 순(舜)이다. 그리하여 요순시대는 중용이 실현된 이상적인 시대였다. 요순시대의 사회를 모두의 ‘하나됨’이 실현된 사회라는 의미에서 ‘대동사회(大同社會)라고 부르기도 한다. <예기(禮記)>에서는 대동사회의 구체적인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큰 도(道)가 행하여지는 세상에서는 천하를 사유물로 생각하지 않는다. 현명하고 능력있는 자를 뽑아서 신의와 화목함을 이루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의 부모만을 받들지 않고 남의 부모도 받들며 자기의 자녀만을 보살피지 않고 남의 자녀도 보살핀다. 노인으로 하여금 편안하게 일생을 마치도록 하며, 젊은이로 하여금 각자의 역량을 쓸 수 있도록 하며, 어린이들을 잘 자랄 수 있게 하며,홀아비·과부·고아·자녀 없는 노인과 폐질자들이 모두 부양될 수 있도록 한다. 남자는 모두 직업이 있고 여자는 모두 시집을 간다. 재물이 땅에 떨어져 있으면 반드시 줍지만 자기의 소유로 하지는 않으며, 열심히 일을 하지만 자기만을 위해서 일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간악한 모의가 일어나지 않고 도적이나 강도가 생겨나지 않는다. 그래서 문을 밖으로 열어놓고 닫지 않는다. 이를 대동(大同)이라 한다. 대동사회에서는 각자가 고유한 직업을 가지고 다양하게 살아가지만 근본적으로 서로 남이라는 의식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조화를 이룬다. 마치 국가가 하나의 가정처럼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한마음이 되면 자신이 대표자가 되려 하지 않고, 자기에게 이익을 주는 사람을 대표로 삼으려 하지도 않으며, 오직 전체의 입장에서 판단하여 적임자를 대표로 삼으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임금이 자기의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지 않고 현명한 자에게 물려주는 것이 대동사회의 특징이다. 요(堯)가 동이족인 순(舜)에게 선위하였고 순(舜)이 서부족인 우(禹)에게 선위하였을 때는 동부문화와 서부문화가 조화를 이루고 있었으며 따라서 대동사회가 지속되었다.
그런데 우(禹)는 동이족에게 선위하지 않고 자기의 아들에게 제위(帝位)를 전하였다. 그리하여 서부문화에 의한 정치가 지속되자 동이가 소외되면서 대동사회가 무너졌다. 동이족의 불만이 극에 달하자 동이족인 탕(湯)이 나타나 불만세력을 규합하여 우가 세운 하(夏)를 멸망시키고 은을 세워 불만을 해소시켰다.
그러나 탕이 다시 자기의 아들에게 제위를 전하자 이번에는 다시 서부족의 불만이 팽배하기 시작하였으므로 결국 서부족인 무왕이 출현하여 은을 멸망시키고 주를 세워 불만을 해소시켰다. 이렇게 보면 하.은.주 삼대는 불만이 해소되기도 하였던 시대인데, 유교에서는 이 시대를 대동사회와 구별하여 소강사회(小康社會)라 한다.
주대(周代)에는 철기가 발명되어 전쟁의 규모가 커지고 방법이 잔혹해졌으므로 동이족의 반발과 서부족인 주의 탄압도 전보다 정도가 심하여 혼란은 극에 달하였다. 이를 특징지워 춘추전국시대라 한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수많은 사상가들이 출현하여 각각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공자의 중용철학이다.
공자의 중용철학은 요순시대의 대동사회를 근간으로 삼고 하.은.주 삼대의 발전된 문화의 특징들을 수용하여 당시의 상황에 맞는 새로운 사상으로 집대성한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유교사상이다. 유교사상을 대변하는 경전으로는 공자가 정리한 ‘오경(五經)’과 공자 및 그 후계자들의 언행과 이론을 정리한 ‘사서(四書)’가 있다.
오경에는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 춘추(春秋), 예기(禮記)’가 있고 사서에는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이 있다. 시경은 주나라 때의 민요와 궁중음악,찬송가 등을 모은 것이고, 서경은 요순 이래의 위대한 정치가들의 정치사상을 정리한 것이며, 역경은 인간이 자연의 질서에 맞추어 원만한 삶을 살 수 있는 원리를 기록한 것이고, 춘추는 춘추시대 노(魯)나라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기록한 것이며,<예기>는 당시의 예를 정리한 것이다.
논어는 공자의 언행을 정리한 것이고, 대학은 공자의 제자인 증삼(曾參)의 이론을 기록한 것이며, 중용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이론을 기록한 것이고, 맹자는 맹자(孟子)의 언행을 기록한 것이다.
이상에서 보면 유교는 한국문화의 원류인 동이문화가 중원으로 들어가 체계화된 뒤 후대로 계승되어 공자에 의해서 집대성되고 그것이 다시 한국으로 역수입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유교문화의 원류가 된 한국 고대문화를 간과하고 중국에서 수입된 후대의 유교사상만을 고찰한다면, 유교문화는 중국 중심의 문화로 간주되고 말 것이다.
유교란 공자 및 그 후계자들의 가르침을 말한다. 배우는 입장에서는 유학(儒學)이라 하고,실천하는 입장에서는 유도(儒道)라고도 한다. 공자는 배움으로써 진리를 터득하였고 또 재자들에게 배워서 터득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는 배움을 강조하여 유학이란 말을 많이 사용한다.
유교사상의 핵심은 인간의 이상적·정신적 삶과 현실적·육체적 삶의 조화를 추구하는 중용사상이다. 사람의 중용적 삶은 이상적.정신적 삶을 근본으로 삼아 거기에 바탕을 두고 현실적.육체적 삶을 영위함으로써 가능하지만, 그것을 터득하는 방법은 먼저 현실적, 육체적 삶을 확보하고 다음으로 이상적, 정신적 삶을 확립하여 하나의 체계로 융합하는 것이다.
현실적.육체적 삶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의.식.주 등 삶의 기본 조건들을 구비하고 인간사회에서 형성되는 복잡한 인간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여야 하며, 이상적.정신적 삶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정신적 본질을 인식하여 밝힌 뒤에 그것을 실천하여야 한다. 전자에 해당되는 것을 하학(下學), 형이하학(形而下學) 또는 소학(小學)이라 하고, 후자에 해당되는 것을 상달(上達), 형이상학(形而上學), 또는 대학(大學)이라 한다. 그러므로 유학은 하학하고서 상달하는 학문(不學而上達), 형이하학을 하고서 형이상학을 하는 학문, 또는 소학을 하고서 대학을 하는 학문이라 정의할 수 있다. 그러면 소학과 대학의 내용을 중심으로 유학의 성격과 내용을 알아보기로 한다.
육체적 삶과 육체적 삶에 필요한 조건을 충족하기 위한 학문이 모두 소학이다. 의학, 약학, 농학, 건축학, 의상학, 경제학, 경영학, 무역학, 자연과학, 법학, 문자학, 윤리학 등이 모두 소학에 해당되지만,유학에서 주로 다루는 것은 문자학과 윤리학이다. 상고시대부터 소학을 가르치던 학교와 대학을 가르치던 학교는 분리되어 있었다. 순임금시대의 하상(下庠)과 상상(上庠), 하대(夏代)의 서서(西序)와 동서(東序),殷代(은대)의 좌학(左學)과 우학(右學), 주대(周代)의 우상(虞庠)과 동교(東膠)가 그것이다. 중국 송대(宋代)에는주자(朱子)와 유자증(劉子證)에 의하여 소학에서 가르치던 내용이 ‘소학’이란 책으로 편찬되었다. 소학에서 배워야할 내용 중 일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다른 사람과 식사할 때, 혼자서 배불리 먹으려 하지 않으며, 손으로 집어먹지 않으며, 숟가락으로 밥을 다지거나 많이 뜨지 않으며, 뼈를 씹지 않으며, 먹던 고기를 접시에 올려놓지 않는다.
부모를 모시고 있을 때 겨울이 오면 따뜻하게 하여 드리며, 아침에 문안인사를 드리며,외출할 때 반드시 알리며, 돌아와서는 반드시 인사를 드린다.
남의 집을 방문할 때 먼저 기침 소리를 내어 알리며, 문 밖에 신이 두 켤레 놓여 있을 경우 목소리가 들리면 들어가지만 들리지 않으면 들어가지 않으며, 문 안으로 들어설 때는 아래쪽을 바라보며, 문의 손집이는 두 손으로 잡으며, 두리번거리거나 사방을 둘러보지 않으며, 들어갈 때 문이 열려 있으면 열린 채 놓아두지만 닫혀 있었으면 뒤에 따라 들어오는 사람이 없을 경우 원래 대로 닫는다. 이상과 같은 일상의 생활예절과 관혼상제 등에 관한 모든 의식과 절차, 사회의 모든 제도와 질서를 준수하는 행동원리 등이다.
인간의 예절은 인간관계 속에서 성립되고 인간관계는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임금과 신하 또는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관계,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 형과 아우 또는 연장자와 연소자의 관계, 친구관계의 다섯 가지 유형의 인간관계에서 지켜야 할 행동원리로 귀결된다.
유학에서는 이것을 오륜(五倫)이라 하고 그 내용을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는 친(親), 임금과 신하의 관계에서는 의(義),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는 별(別),연장자와 연소자의 관계에서는 서(序), 친구관계에서는 신(信)을 지키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므로 소학의 내용을 오륜을 파악하고 실천하는 것을로 심화된다.
대학의 내용은 ‘대학’이라는 책에 나오는 삼강령(三綱領)과 팔조목(八條目으로 대표할 수 있다. 삼강령이란 ‘명명덕(明明德), 친민(親民), 지어지선(止於至善)’의 세강령을 말하고, 팔조목이란 ‘격불(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여덟 조목을 말한다.
팔조목은 삼강령을 세분한 것이다. 삼강령 중 ‘명명덕’은 자기를 완성하는 것이고,‘친민’은 타인을 완성하는 것이며, ’지어지선‘은 자기와 타인 모두 완성됨으로써 도달되는 최고의 단계이다. 그리고 팔조목 중 ’격물, 치지, 성의, 정심, 수신’은 삼강령의 ‘명명덕’에 해당되고, ‘제가, 치국’은 ‘친민’에 해당되며 ‘평천하’는 ‘지어지선’에 해당된다.
그러면 먼저 ‘명명덕’의 내용을 알아보자. 덕(德)이란 자기의 본성(性)을 왜곡함이 없이 있는 그대로 실현할 수 있는 마음의 능력을 말한다. 사람의 본성은 마음 속에 존재하는 ‘삶의 의지’이며 ‘생명의 원천’이다. 심장이 뛰고 호흡을 하는 등의 기본적인 생명활동이 본성의 작용에 기인하며,,약한 자를 동정하고 폭력을 미워하는 등의 인간의 원초적 감정도 모두 이 본성이 발로된 것이다. 이 본성의 작용은 잠시의 중단도 없이 지속된다. 모든 사람이 이 생명의 원천인 본성을 공동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본성은 개별적인 동시에 전체적이다. 이 본성의 전체성을 가리켜 천명(天命)이라고도 하다.
따라서 덕이 있어 본성을 실천하고 천명을 따르는 사람은 전체의 차원에서 개체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다. 덕이 있는 사람의 삶의 내용은 모든 것을 전체적인 입장에서 판단하여 남과 경쟁하지 않고 화합하므로 긴장이 없이 느긋할 것이며, 남을 사랑하는 만큼 남에개 사랑과 도움을 받을 것이므로 하는 일마다 성공할 것이며, 인류 전체의 입장에서 판단하여 개체가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이 전체가 살기 위한 현상임을 알기 때문에 자신의 죽음까지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으며, 약육강식의 투쟁장소인 이 세상이 전체적으로 보면 그것이 바로 조화를 유지하는 방법임을 알게 되어 비극으로 보이던 이 세상을 낙원으로 대할 수 있게 된다.
요컨대 덕이 있는 사람은 느긋한 마음으로 건강하게 살며, 하는 일마다 성공하며, 기쁨과 희망으로 충만한 낙원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대학’에서는 덕을 표현할 때 ‘밝은’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여 ‘밝은 덕’이라 하였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성장하면서 생겨난 욕심에 빠져 이 밝은 덕을 상실한다. 사람은 육체적으로 성장하면서 생각하고 계산하는 능력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방향으로 작용하는 데서 욕심이 생겨난다. 예를 들어 지하수가 솟아날 때 진흙이 섞여들어 흙탕물이 되는 경우에 비유한다면, 지하수는 본성에 해당되고, 진흙은 이기적으로 작용하는 생각이나 계산에 해당되며, 흙탕물은 욕심에 해당된다. 사람이 욕심을 따라 행동하고 본성을 따르지 못하게 되면 사람의 삶은 전체적.정신적 삶에서 개체적. 육체적 삶으로 전락한다. 개체적.육체적 삶으로 전락하여 욕심에 지배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전체성을 망각하고 개체적인 입장에서 늘 남들과 경쟁하면서 살기 때문에 덕이 있는 사람과 정반대의 삶을 살게 된다.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 남들과의 끝없는 경쟁 속에서 계속 긴장하며,하는 일마다 실패를 되풀이하며, 고통과 절망이 가득한 비극의 장소에서 불행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체적인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에게는 불행한 삶을 극복하고 행복한 삶을 되찾아야 하는 과제가 부여된다. 행복한 삶은 육체적 삶을 극복하고 전체적.정신적 삶을 회복함으로써 가능하므로 욕심에 빠져 상실하였던 낡은 덕을 다시 밝히는 것, 즉 ‘명명덕’을 통하여 얻어질 수 있다.
‘명명덕’은 ‘수신’으로 구체화된다. 몸을 닦아 욕심을 따르지 않고 본성을 실천하고 천명을 따를 수 있어야 밝은 덕이 발휘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몸 속에 욕심이 가득하면 몸이 욕심을 따르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으므로 ‘수신’의 근본 방법은 몸 속의 욕심을 제거하고 본성에서 발휘되는 바른 마음으로 채우는 ‘정심’으로 구체화된다.
‘정심’의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본성에서 발휘되는 순수한 마음으로 확충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욕심이 생겨나는 원인을 제거하는 방법이다. 전자에는 순수한 마음을 성실하게 붙드는 ‘성의’의 방법이 있고,후자에는 순수한 마음이 발휘되는 순간에 아예 생각이나 계산을 하지 않도록 경견한 마음을 유지하는 ‘지경(持敬)’의 방법이 있다. 가만히 앉아서 마음을 비우는 정좌법(靜坐法)이나 마음을 집중하는 경공부(敬工夫)등이 모두 ‘지경’의 방법에 속한다. ‘대학’에서는 ‘성의’와 ‘지경’의 방법 중에서 ‘성의’만을 언급하였다.
‘성의’와 ‘지경’외에도 본성을 실천하고 천명을 따를 수 있는 더욱 적극적인 방법은 직접 파악하는 ‘지성(知性)’의 방법이 있다. 그런데 본성은 자기의 마음 속 깊숙한 곳에 있으므로 알기 어렵다. 그러므로 ‘대학’에서는 다른 사람이나 다른 물건에 나아가 그 속에 있는 본성을 인식하고 그것으로 미루어 자신이 본성을 인식하는 간접적인 방법을 제시하였는데 그것이 ‘격물’과‘치지’이다. ‘격물’은 다른 것에 나아가는 것을 말하고, ‘치지’는 본성을 아는 상태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본성이 바로 천명이므로 본성을 아는 것이 곧 천명을 아는 것이다. 따라서 학문의 일차적인 목표는 천명을 아는 것에서 완성된다.
‘명명덕’의 과정을 완수한 사람은 전체의 입장이 되어 남과 나를 하나로 여기기 때문에 남을 나처럼 여기고 사랑하게 된다. 이른바 인(仁)을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 즉 남과 내가 하나가 된 상태가 바로 ‘친민’의 상태이다. ‘친민’이 된 사람은 남들도 ‘명명덕’을 하도록 인도하려는 의욕을 가질 것이지만, 그것은 학교라고 하는 주어진 공간에서 직접 제자를 가르치는 방법밖에 없으므로 모든 사람을 다 구제하기에는 제약이 있다. 그러므로 정치적 방법을 동원하여 스승을 양산하고 학교를 설립한다면 모든 사람에게 학문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에 유교에서는 정치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제가’와 ‘치국’이 ‘친민’에 속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명명덕’과 ‘친민’이 되어 나와 남이 일체가 되고 이 세상에 진리가 실현되어 일체의 갈등이 없이 조화를 이룬 상태가 ‘지선’의 상태이고 이 ‘지선’의 상태에 머무르는 것이 바로 ‘지어지선’이며 ‘평천하’이다. 역사적으로는 요순시대에 실현되었던 대동사회가 바로 그것이다.
유교의 최종 목표는 바로 이 ‘지선’의 상태에 머무는 것이고,‘평천하’를 실현하는 것이며, 구체적으로는 대동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전망 1995.1:154-159>
블로그의 정보
국어문학창고
송화은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