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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憂愁) / 안톤 체호프(Aanton Chekhov)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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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憂愁) /  안톤 체호프(Aanton Chekhov)

 

 

 

이내 슬픔을 누구에게 하소연하리?……

황혼(黃昏). 크고 축축한 눈송이는 방금 불이 켜진 가로등 옆을 너울너울 춤추면서, 지붕이며 말 잔등이며 어깨며 모자 위로 떨어져서는 얄팍하고 포근한 층(層)을 이룬다. 마부(馬夫) 요나 뽀따뽀프는 유령(幽靈)처럼 전신이 새하얗다. 그는 살아 있는 육체가 굽힐 수 있는 데까지 최대 한도로 몸을 굽히고 마부대(馬夫臺)에 앉은 채, 꼼짝달싹 않고 있다. 만일 그 위에 눈사태가 떨어진다 해도, 그는 자기 몸에서 눈을 털어 버릴 필요성을 느끼진 않았으리라…… 그의 말도 역시 새하얗고 움직일 줄을 모른다. 그 부동성(不動性), 모가 난 형태, 말뚝처럼 꼿꼿한 다리로 해서 가까운 곳에서 보아도 1코페이카짜리 설탕과자 말과 흡사하다. 그 말은 어느 모로 보나,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이 분명했다. 쟁기에서 벗어나고 낯익은 평범한 경치에서 떠나서, 괴물과 같은 불빛이며 멈출 줄 모르는 소음이며 부산스럽게 뛰어 다니는 사람들로 뒤덮인 이 도가니 속에 굴러 떨어졌으니, 어찌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있으랴…….

요나와 그의 말은 벌써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점심 전에 숙소에서 나온 것이지만, 아직껏 개시를 못 하고 있다. 그러나 거리에는 벌써 저녁의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파리하던 가로등 불빛은 그 자리를 생생한 빨간색에다 양보하고 거리의 혼잡은 점점 소란해진다.

"마부, 브이보르그스까야까지!"

요나는 이런 소리를 듣는다.

"마부!"

마부는 부르르 몸부림을 치고, 눈에 뒤덮인 속눈썹 너머로 두건(頭巾) 달린 털외투의 군인을 본다.

"브리보르그스까야까지!"

하고 군인은 되풀이한다.

"아니, 넌 졸고 있냐? 브이보르그스까야까지!"

알아들었다는 표시로 요나는 말고삐를 당긴다. 그러자 말 잔등과 그의 어깨에서 눈 층(層)이 허물어 떨어진다…… 군인은 썰매에 앉는다. 마부는 쯧쯧 입술을 빨고는 백조(白鳥)처럼 목을 빼고 몸을 일으키며, 필요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습관에 의해 회초리를 흔든다. 말도 역시 길게 목을 빼고 그 말뚝처럼 꼿꼿한 다리를 굽히며 어슬렁어슬렁 걸음을 옮긴다…….

"어딜 가는 거야, 이 자식아!"

맨 처음 요나는 앞뒤로 움직이고 있는 새까만 군중 속에서 이런 고함 소리를 듣는다.

"어딜 가는 거야? 좀 더 오른쪽으로 가!"

"넌 말을 몰 줄 모르냐! 오른쪽으로 가!"

군인도 화를 내서 외친다.

사륜마차(四輪馬車)의 마부가 욕설을 퍼붓는다. 길을 건너려다가 말 콧등에 어깨를 부딪친 통행인이 험상궂은 눈초리를 바라보고는 소매에 묻은 눈을 털어 버린다. 요나는 바늘방석에라도 앉은 듯, 마부대에서 갈팡질팡하며 팔꿈치를 양쪽으로 내어 밀고, 미친 사람 모양, 마치 자기가 어디에 있으며 어째서 이런 곳에 있는지조차 모르겠다는 듯 눈만 두리번거리고 있다.

"바보 녀석들 같으니!"

하고 군인은 투덜거린다.

"말에 부딪치려는 자가 없나, 말 밑으로 기어들려는 자가 없나, 모두 같은 놈들이야."

요나는 손님 쪽을 돌아보고 입술을 오물거린다…… 분명히 무슨 말인지 하고 싶은 것 같았으나, 그의 목구멍에서는 코고는 듯한 목소리 외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뭐라고?"

하고 군인은 묻는다.

요나는 히죽이 웃으며 입을 찡그리고 목구멍에 힘을 주어 쉰 목소리로 말한다.

"저 말입니다, 나리…… 제 아들놈이 이번 주일에 죽었답니다."

"으흠!…… 어떻게 죽었지?"

요나는 온몸을 손님 쪽으로 돌리며 말한다.

"그건 걸 누가 압니까! 아마 열병인 것 같습니다…… 사흘 동안 병원에 누워 있다가 죽었으니까요…… 모두 하느님의 뜻이겠죠."

"옆으로 비켜, 이 악마야!"

어둠 속에서 이런 소리가 들린다.

"뭘 꾸물거리고 있어, 이 늙은 개새끼야! 눈은 뒀다 뭘 하는 거야!"

"자, 좀더 달려, 달려……."

하고 손님은 말한다.

"이래 가지곤 내일까지도 못 가겠다. 좀더 몰아봐!"

마부는 또다시 목을 빼고 몸을 일으키고는 아주 대견스러운 표정으로 회초리를 흔든다. 그 후에도 요나는 여러 번 손님 쪽을 돌아보지만, 손님은 눈을 감은 채 아무리 봐도 자기 말을 들어 줄 것 같은 표정이 아니다.

브이보르그스까야 거리에서 손님을 내리우자, 그는 음식점 옆에 말을 멈추고 마부대에 몸을 굽히고는 또다시 움직이지를 않는다…… 축축한 눈송이는 다시금 요나와 말을 새하얗게 뒤덮어 버린다. 한 시간, 두 시간, 시간은 흐른다.

요란스럽게 덧신을 두드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세 사람의 젊은이가 인도를 지나간다. ―그 중 두 사람은 호리호리하게 크고, 한 사람은 난쟁이 꼽추다.

"마부, 경찰교(警察橋)까지!"

하고 째는 듯한 목소리로 꼽추가 외친다.

"세 사람에 20코페이카다!"

요나는 고삐를 당기고 쯧쯧 입술을 빤다. 20코페이카는 가격이 아니지만, 그는 가격 같은 것에 상관이 없다…… 루블이건, 5코페이카건 ―지금의 그에게는 마찬가지이다. 손님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청년들은 이리저리 떠밀고 욕설을 주고받으며 썰매 옆으로 다가온다. 세 사람이 함께 좌석으로 기어오른다. 그런데 두 사람은 앉고 한 사람은 서야 했는데, 이 때 누가 설 것인가에 대해서 옥신각신 논쟁이 벌어진다. 한참 동안 욕설과 각자의 주장과 비난이 있은 다음, 가장 작다는 이유로 꼽추가 서게 됨으로써 일단락을 짓는다.

"자, 가자!"

꼽추는 자리를 잡고 서자, 요나의 뒤통수에 입김을 불어대며 찢어지는 소리로 외친다.

"내리 쳐! 도대체 영감, 그 모잔 뭔가! 뻬쩨르부르그를 모조리 훑어도 그보다 나쁜 건 찾아내지 못할 거다……."

"흐흐……흐흐……."

하고 요나는 웃는다.

"어쨌든 내 모자니……."

"내 것이건 뭐건 빨리 달리기나 해! 이런 식으로 쭉 갈 참인가? 응? 그럼 목덜미를 후려 갈길 테다!"

"머리가 깨지는 것 같군……."

키다리 중의 한 사람이 말한다.

"어제 두끄마쏘프의 집에서 바시까와 둘이 꼬냐크를 네 병이나 마셨으니 말야."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는 거야, 난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

하고 또 한 사람의 키다리가 성을 낸다.

"거짓말을 해도 분수가 있지."

"벼락을 맞겠다, 거짓말이라면……."

"그런 말야, 이[ ]가 기침을 한다는 것과 같은 진실이야."

"흐흐흐!"

하고 요나는 웃는다.

"재미있는 분들이셔!"

"아니, 임마……."

하고 꼽추가 화를 낸다.

"늙은 고릴라 같으니, 넌 말을 달리는 건가, 아닌가? 아니, 이게 가는 거야? 힘껏 회초리를 내리 쳐! 이 악마야! 임마! 좀 더 달려 봐!"

요나는 자기 등에서 꼽추의 몸놀림과 떨리는 음성을 느낀다. 그는 자기에게 퍼붓는 욕설을 듣던가,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자기 가슴속에 점점 고독감(孤獨感)이 사라져 감을 느끼는 것이다. 꼽추는 아무 실속 없이 떠드는 욕설에 목이 잠겨, 쿨룩쿨룩 기침을 할 때까지 욕설을 계속한다. 두 사람의 키다리는 나제쥬다 뻬뜨로브나라는 어떤 여자에 대해서 말을 시작한다.

요나는 가끔 그들을 돌아본다. 잠시 말이 끊어진 틈을 타서, 그는 다시 뒤돌아보며 중얼거린다.

"이번 주일에…… 제 아들놈이 죽었습니다!"                                      

"사람은 모두 죽게 마련이야……."                                             

하고 꼽추는 기침을 한 다음, 입술을 닦으면서 헐떡이는 소리로 말한다.

"자, 달려, 달려! 여보게, 이렇게 간다면, 난 도저히 참질 못하겠어! 도대체 언제까지 갈 생각인가!"

"영감, 좀더 기운을 내라…… 목덜미를 후려갈겨!"

"아니, 이 영감이 말을 듣나, 먹나? 모가지를 비틀어야 알겠어…… 점잔을 빼고 가만있으니까, 걷는 것보다 난 것이 뭐야! …… 영감, 듣고 있는 거야, 즈메이고르이느이치? 그렇잖으면 우리들의 말을 무시할 작정인가?"

그리고 요나는 뒤통수를 때리는 느낌보다는 오히려 그 소리를 듣는다.

"흐흐흐……."

하고 그는 웃는다.

"재미있는 분들이군…… 제발 건강들 하슈!"

"마부, 자네에겐 마누라가 있나?"

하고 키다리 중의 한 사람이 묻는다.

"저 말이요? 흐흐흐…… 재미있는 분들이셔! 지금 제겐 마누라가 하나 있지요. ― 축축한 땅 덩어리…… 히히히 …… 즉 무덤이란 말요! …… 아들놈도 죽었는데 저는 살고 있습니다. 이상한 일도 있어요. 염라대왕께서 문을 잘못 들었습죠……  저한테 올 것이 아들놈한테 갔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요나는 아들이 어떻게 죽었는가를 설명하려고 뒤돌아보지만, 이 때 꼽추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겨우 목적지에 닿았다는 것을 선언한다. 20코페이카를 받아 쥔 다음에도 요나는 한참 동안 어두운 통로로 사라져 간 주정뱅이들의 뒤를 전송하고 있었다. 다시금 그는 외톨이가 된다. 그리고 다시금 그에게 정적이 다가온다…… 한동안 잠잠했던 우수(憂愁)가 다시 휩쓸어, 한층 강력한 힘으로 가슴을 씹는다.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요나의 눈초리는 양쪽 인도를 오가는 군중 위를 달린다. ― 이렇게 많은 수천 명의 군중 속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줄 사람은 없을까 하고. 그러나 군중은, 그와 그의 우수에는 아랑곳도 없다는 듯, 무심히 달리기만 한다…… 우수는 한없이 크기만 한다. 요나의 가슴을 쪼개서 그 안에서 우수를 흘려 버린다면 그것은 온 세상에 철철 넘치고 말리라. 그러나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우수는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대낮에 불빛을 들이대고도 볼 수 없는 그러한 하잘것없는 껍질 속에라도 들어박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요나는 가마니를 든 머슴을 보고 그 사나이한테 말을 걸어 보리라 생각한다.

"여보게, 지금 몇 시나 됐지?"

하고 그는 묻는다.

"아홉 시 지났어…… 뭣 때문에 이런 데 서 있는 거야? 빨리 가도록 해!"

요나는 거기서 몇 걸음 지나가서, 등을 굽히고 우수에 온 몸을 내맡긴다…… 그는 사람에게 말을 건다는 것이 이미 소용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5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그는 몸을 곧게 세우고, 마치 날카로운 아픔이라도 느낀 듯 머리를 흔들고는 고삐를 잡아당긴다……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숙소로 돌아가자.' 하고 그는 생각한다. '숙소로!'

그러자 말도 그의 마음을 짐작이라고 한 듯 민첩히 달리기 시작한다. 한 시간 반 가량 지난 후, 요나는 벌써 크고 더러운 난롯가에 앉아 있다. 난로 위에도, 마루 위에도, 벤치 위에도, 사람들이 코를 골며 자고 있다. 공기는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하다…… 요나는 잠자는 사람들을 둘러보고 몸을 긁으면서, 이렇게 빨리 숙소로 돌아온 것을 후회한다.

'귀리 값도 못 벌었어.' 하고 그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렇게 마음이 우울하지. 자기 일을 잘하는 사람은…… 배를 곯지도 않고, 말에게도 배고픈 맛을 보이지 않으니, 언제나 마음이 편할 수밖에…….'

한쪽 구석에서 젊은 마부 한 사람이 일어나서, 졸린 듯이 중얼거리며 물통 쪽으로 허둥지둥 걸어간다.

"마시고 싶으냐?"

하고 요나는 묻는다.

"그래 마시고 싶어!"

"그럼, 실컷 마셔…… 그런데 말야, 젊은이 내 아들놈이 죽었다네…… 자네 들었나? 이번 주일에 병원에서 말야…… 세상이란!"

요나는 젊은이에게 자기 말이 어떤 효과를 일으켰는가를 보려고 하지만,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젊은이는 머리부터 푹 이불을 뒤집어쓰고 벌써 잠들고 말았다. 노인은 한숨을 몰아쉬고 몸을 긁는다. 젊은이가 물을 마시고 싶었던 것처럼, 그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아들이 죽은 지 한 주일이 되어 오지만, 그는 아직껏 누구에게나 아들의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말하려면, 요령 있게 자세히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떻게 돼서 병에 걸렸는가, 어떻게 고통 당했는가, 죽기 전에 뭐라고 말했는가, 죽을 때는 어떠했는가, 이것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장례의 광경이며, 죽은 아들의 옷을 찾으러 병원에 갔을 때의 일까지 말해야 한다. 시골에는 딸 아니씨야가 남아 있었다…… 그 딸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 지금 그가 해야 할 말은 얼마나 많은가? 이 말을 듣는 사람은 감동한 나머지, 한숨을 몰아쉬며 가슴아프게 생각할 것임에 틀림없다. 상대편이 여자라면 더욱 그렇다. 여자라면, 가령 아무리 바보라 해도 단 두 마디에 벌써 울음을 터뜨리고 말리라.

'말이라도 가서 볼까.' 요나는 생각한다. '언제라도 잘 수는 있다. 얼마든지 잘 순 있어.'

그는 옷을 걸치고 자기 말이 매여 있는 마구간으로 간다. 그는 귀리며, 건초(乾草)며, 날씨에 대해서 생각한다…… 혼자 있을 때는 아들에 대해서 생각할 수가 없다. 누구든지 말을 들어 주는 사람이 있으면 몰라도 혼자서 외로이 생각에 잠겨 아들의 모습을 상기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이 괴로운 것이다…….

"먹느냐?"

요나는 반짝반짝 빛나는 말의 눈을 바라보며 물어 본다.

"자, 먹어, 먹어…… 귀리 값을 못 벌면 건초라도 먹어야지…… 그래…… 마차를 끌자니 이미 몸은 늙어 버렸고…… 아들놈이 끌어야 해, 내가 아니라…… 그 앤 참 훌륭한 마부였어. 그놈만 살아 있다면……."

요나는 잠시 가만있다가 다시 말을 잇는다.

"그렇다, 얘야…… 꾸지마 요느이치는 이 세상에 없다…… 먼 곳으로 떠나갔어. 아무 산 보람도 없이 죽고 말았다…… 자, 네게 새끼 말이 있고, 넌 그 새끼 말의 엄마라고 하자…… 그런데 갑자기 그 새끼 말이 어딘지 먼 곳으로 가 버렸단 말이다…… 그런데도 넌 슬프지 않니?"

말은 먹이를 씹으며,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주인의 손에 입김을 불기도 한다…… 요나는 흥분한 어조로 자기의 자초지종(自初至終)을 말에게 이야기한다. <약혼녀>



요점 정리

지은이 : 안톤 체호프(Aanton Chekhov)/ 옮긴이 : 김학수)

갈래 : 단편 소설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구성 : 연민의 구성(마부 요나의 소박한 바람이 주변 사람들의 무관심에 의해 무참히 깨어지지 결국은 자신의 말에게 말을 걸 수밖에 없게 되는 연민의 구성 방법을 취하고 있다.)

성격 : 애상적, 감상적, 서정적

배경 : 시간(19세기). 공간(러시아)

경향 : 순수 문학

문체 : 객관적(극적 지시)

제재 : 아들을 잃은 요나의 슬픔

주제 : 아들을 잃은 심정을 들어 줄 상대가 없는 마부 요나의 슬픔, 하소연할 길 없는 인간의 고독감과 비애

특징 : 독특한 해학과 비극적 정조를 바탕으로 고독과 우수의 감정을 형상화했음.

줄거리 : 요나 뽀따뽀프는 얼마 전에 아들을 잃은 시골 출신 마부(馬夫)이다. 자기 대신 훌륭한 마부가 되어 주리라 기대했던 아들이 병으로 죽자, 슬픔에 빠져서 돈을 벌려는 의지조차 잃고 만다. 그가 바라는 것은 누구에겐가 아들의 죽음과 자신의 슬픔에 대해서 자초지종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손님으로 탄 군인이나 취객(醉客)들은 길을 재촉하기만 할 뿐이고, 숙소에 있는 젊은 마부는 관심도 보이지 않고 잠을 청한다. 결국 요나는 자신의 말[馬]에게로 가서 사연을 털어놓는다.

 

 내용 연구

(가) 이내 슬픔을 누구에게 하소연하리?...... - 하소연할 길 없는 슬픔(프롤로그)

(나) 황혼(黃昏). 크고 축축한 눈송이는 방금 불이 켜진 가로등 옆을 너울너울 춤추면서, 지붕이며 말 잔등이며 어깨면 모자 위로 떨어져서는 얄팍하고 포근한 층(層)을 이룬다. 마부(馬夫) 요나 뽀따뽀프는 유령(幽靈)처럼 전신이 새하얗다. 그는 살아 있는 육체가 굽힐 수 있는 최대 한도로 몸을 굽히고 마부대(馬夫臺)에 앉은 채, 꼼짝달싹 않고 있다. 만일 그 위에 눈사태가 떨어진다 해도, 그는 자기 몸에서 눈을 털어 버릴 필요성을 느끼진 않았으리라......그의 말도 역시 새하얗고 움직일 줄 모른다. 그 부동성(不動性), 모가 난 형태 말뚝처럼 꼿꼿한 다리로 해서 가까운 곳에서 보아도 1코페이카짜리 설탕 과자 말과 흡사하다. 그 말은 어느 모로 보나,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이 분명했다. 쟁기에서 벗어나고 낯익은 평범한 경차에서 떠나서, 괴물과 같은 불빛이며 멈출 줄 모르는 소음이며 부산스럽게 뛰어다니는 사람들로 뒤덮인 이 도가니 속에 굴러 떨어졌으니, 어찌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있으랴.......- 눈 내리는 황혼의 마부와 말(발단1)

(다) 요나와 그의 말은 벌써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점심 전에 숙소에서 나온 것이지만, 아직껏 개시를 못 하고 있다. 그러나 거리에는 벌써 저녁의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파리하던 가로들 불빛은 그 자리를 생생한 빨간색으로  양보하고 거리의 혼잡은 점점 소란해진다. - 아직 개시도 하지 못하고 있는 마부 요나 (발단2)

(라) "마부, 브이보르그스까야까지 !"     

요나는 이런 소리를 듣는다.

 "마부 !"

마부는 부르르 몸부림치고, 눈에 뒤덮인 속눈썹 너머로 두건(頭巾) 달린 털 외투의 군인을 본다.

 "브이보르그스까야까지!"

하고 군인은 되풀이한다.

"아니, 넌 졸고 있냐? 브이보르그스까야까지!"

알아들었다는 표시로 요나는 말고삐를 당긴다. 그러자 말 잔등과 그의 어깨에서 눈 층(層) 허물어 떨어진다.......군인은 썰매에 앉는다. 마부는 쯧쯧 입술을 빨고는 백조(白鳥)처럼 목을 빼고 몸을 일으키며, 필요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습관에 의해 회초리를 흔든다. 말도 역시 목을 빼고 그 말뚝처럼 꼿꼿한 다리를 굽히며 어슬렁어슬렁 걸음을 옮긴다...... - 마차에 탄 군인 손님(전개1)

마부대 : 말을 부리는 사람이 마차를 끌기 위해 앉아 있는 곳

코페이카 : 러시아를 비롯한 구소련 권역의 화폐단위. 100코페이카는 1루블

개시 : 처음으로 시작함

두건(頭巾) : 머리에 두르는 헝겊

이내 슬픔을 누구에게 하소연하리 : 주인공 요나의 심리가 겉으로 드러난 구절이다. 이 작품의 주제를 짐작케 한다.

 황혼 - 층을 이룬다 : 이 글의 시간적·'층'이라는 말로 보아, 요나가 말과 함께 밖에서 오랫동안 눈을 맞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나 - 꼼짝달싹 않고 있다. : 손님을 태우려고 두리번거리지조차 않는 마부 요나의 모습을 통해 그가 무엔가 깊이 빠져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쟁기에서 - 않을 수 있으랴 : 요나의 출신이 농민이며 먼 곳에서 왔음을 알 수 있다. 작가가 도시의 모습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구절이다.

파리하던 가로등 - 소란해진다 : 밤이 되어 흥성거리기 시작하는 도시의 풍경이다.

마부는 쯧쯧 - 옮긴다 : 마부 요나의 정신이 딴 데 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돈을 벌려는 의욕이 전혀 없는 것이다.

 

이해와 감상

 이 장면은 작품 전체의 배경과 인물들이 소개되어 있는 소설의 발단 부분이다. 시간적 배경은 눈 내리는 황혼녘으로, 도심 속 사람들의 소음이 시끌벅적하고 그 구석 한 켠에 마부 요나와 그의 말이 풍경의 일부가 되어 서 있다. 요나는 가두어 둔 슬픔에 젖어 잔뜩 웅크린 상태이며, 그의 말도 생각에 잠긴 듯 움직일 줄 모른다. 감상이나 설명에 배제하고 절제된 문장으로 소란스러운 거리, 그리고 그 속에 서 있는 마부와 그의 말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짧게 제시된 첫 문장은 이 소설의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것으로 작품 전체의 주제를 암시하고 있다.

(가) "어딜 가는 거야, 이 자식아!"

맨 처음 요나는 앞뒤로 움직이고 있는 새까만 군중 속에서 이런 고함 소리를 듣는다.

"어딜 가는 거야? 좀더 오른쪽으로 가!"

"넌 말도 몰 줄 모르나! 오른쪽으로 가!"

군인도 화를 내서 외친다.

사륜마차(四輪馬車)의 마부가 욕설을 퍼붓는다. 길을 건너려다가 말 콧등에 어깨를 부딪친 통행인이 험상궂은 눈초리로 바라보고는 소매에 묻은 눈을 털어 버린다. 요나는 바늘방석에라도 앉은 듯, 마부대에서 갈팡질팡하며 팔꿈치를 양쪽으로 밀어내고, 미친 사람 모양, 마치 자기가 어디에 있으며 어째서 이런 곳에 있는지조차 모르겠다는 듯 눈만 두리번거리고 있다.

"바보 녀석들 같으니!"

하고 군인은 투덜거린다.

"말에 부딪치려는 자가없나, 말밑으로 기어들려는 자가 없나, 모두 같은 놈들이야." - 제대로 말을 몰지 못해 욕을 먹는 요나 (전개2)

(나) 요나는 손님 쪽을 돌아보고 입술을 오물거린다........분명히 무슨 말인지 하고 싶은 것 같았으나, 그의 목구멍 속에서는 코고는 듯한 목소리 외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뭐라고?"

하고 군인은 묻는다.

요나는 히죽이 웃으며 입을 찡그리고 목구멍에 힘을 주어 쉰 목소리로 말한다.

"저 말입니다, 나리........ 제 아들놈이 이번 주일에 죽었답니다."

"으흠!.......어떻게 죽었지?"

요나는 온몸을 손님 쪽으로 돌리며 말한다.

"그런 걸 누가 압니까! 아마 열병인 것 같습니다........사흘 동안 병원에 누워 있다가 죽었으니까요.......모두 하나님의 뜻이겠죠." - 아들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요나 (전개3)

(다) "옆으로 비켜, 이 악마야!"

어둠 속에서 이런 소리가 들린다.

"뭘 꾸물거리고 있어, 이 늙은 개새끼야! 눈은 뒀다 뭘 하는 거야!"

"자, 좀더 달려, 달려......"

하고 손님은 말한다.

"이래 가지곤 내일까지도 못 가겠다. 좀더 몰아 봐!"

마부는 또다시 목을 빼고 몸을 일으키고는 아주 대견스러운 표정으로 회초리를 흔든다. 그 후에는 요나는 여러 번 손님 쪽을 돌아보지마는 손님은 눈을 감은 채 아무리 봐도 자기 말을 들어 줄 것 같은 표정이 아니다. - 또 다시 단절되는 대화 (전개4)

(라) 브이보르그스까야 거리에서 손님이 내리자, 그는 음식점 옆에 말을 멈추고 마부대에 몸을 굽히고는 또다시 움직이지를 않는다.........축축한 눈송이는 다시금 요나와 말을 새하얗게 뒤덮어 버린다. 한 시간, 두 시간, 시간은 흐른다. - 또 다시 움직이지 않는 요나와 말 (위기1)

(마) 요란스럽게 덧신을 두드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세 사람의 젊은이가 인도를 지나간다. - 그 중 두 사람은 호리호리하게 크고, 한 사람은 난쟁이 꼽추다.

"마부, 경찰교(橋)까지!"

하고, 째는 듯한 목소리로 꼽추가 외친다.

"세 사람에 20코페이카다!"

요나는 고삐를 당기고 쯧쯧 입술을 빤다. 20코페이카는 가격이 아니지만, 그는 가격 같은 것에 상관이 없다.......루불이건, 5코페이카건-지금의 그에게는 마찬가지다. 손님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청년들은 이리저리 떠밀고 욕설을 주고받으면 썰매 옆으로 다가온다. 세 사람이 함께 좌석으로 기어오른다. 그런데 두 사람은 앉고 한 사람은 서야 했는데, 이 때 누가 설 것인가에 대해서 옥신각신 논쟁이 벌어진다. 한참 동안 욕설과 각자의 주장과 비난이 있은 다음, 가장 작다는 이유로 꼽추가 서게 됨으로써 일단락 짓는다. - 세 사람의 손님(위기2)

사륜마차(四輪馬車) : 바퀴가 넷이 달린 마차

갈팡질팡 : 방향을 잡지 못 정하고 이리저리 헤매는 모양

꾸물거리다 : 몸을 느리게 비틀면서 이리저리 자꾸 움직이다.

인도(人道) : 넓은 도로에서 차도와 구별하여 사람만이 다니는 길

고삐 : 한 끝을 소나 말의 재갈에 잡아매어 몰거나 부릴 때 끄는 줄

루블 : 구소련의 화폐 단위

 

이해와 감상

 마부 요나는 군인 손님을 거듭 부르는데도 듣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길도 못 잡고 허둥대고 있다. 요나는 죽은 아들로 인해 슬픔에 잠겨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슬픔을 같이 나눌 누군가에 절실히 바라고 있다. 손님에게 죽은 아들 얘기를 건네 보지만, 그 손님은 아무런 신경도 않는다. 손님이 내리자 요나와 말은 또다시 우수에 잠겨 부동(不動)의 세계로 침잠해 들어간다. 다시 세 명의 손님이 타고 경찰교까지 20코페이카의 가격을 부른다. 그러나 그에게는 가격이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따뜻한 동정의 말을 건네 줄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가) "자, 가자!"

 꼽추는 자리를 잡고 서자, 요나의 뒤통수에 입김을 불어대며 찢어지는 소리로 외친다.

 "내리 쳐! 도대체 영감, 그 모잔 뭔가! 뻬쩨르부르그를 모조리 훑어도 그보다 나쁜 건 찾아내지 못할 거다……."

 "흐흐……흐흐……."

하고 요나는 웃는다.

"어쨌든 내 모자니……."

 "내 것이건 뭐건 빨리 달리기나 해! 이런 식으로 쭉 갈 참인가? 응? 그럼 목덜미를 후려갈길 테다!" - 요나를 다그치는 곱추(위기3)

(나) 요나는 가끔 그들을 돌아본다. 잠시 말이 끊어진 틈을 타서, 그는 다시 뒤돌아보면서 중얼거린다.

 "이번 주일에……제 아들놈이 죽었습니다!"

 "사람은 모두 죽게 마련이야……."

하고 꼽추는 기침을 한 다음, 입술을 닦으면서 헐떡이는 소리로 말한다.

 "자, 달려, 달려! 여보게, 이렇게 간다면, 난 도저히 참질 못하겠어! 도대체 언제까지 갈 생각인가!"

 "영감, 좀더 기운을 내라…… 목덜미를 후려갈겨!"

 "아니, 이 영감이 말을 듣나, 먹나? 모가지를 비틀어야 알겠어…… 점잔을 빼고 가만있으니까, 걷는 것보다 난 것이 뭐야! …… 영감, 듣고 있는 거야, 즈메이 고르이느이치? 그렇잖으면 우리들의 말을 무시할 작정인가?"

그리고 요나는 뒤통수를 때리는 느낌보다는 오히려 그 소리를 듣는다.

 "흐흐흐……."

하고 그는 웃는다.

 "재미있는 분들이군…… 제발 건강들 하슈!"

 "마부, 자네에겐 마누라가 있나?"

하고 키다리 중의 한 사람이 묻는다.

 "저 말이요? 흐흐흐…… 재미있는 분들이셔! 지금 제겐 마누라가 하나 있지요. -축축한 땅 덩어리…… 히히히…… 즉 무덤이란 말요!…… 아들놈이 죽었는데 저는 살고 있습니다. 이상한 일도 있어요. 염라대왕께서 문을 잘못 들었습죠…… 저한테 올 것이 아들놈한테 갔으니 말입니다." - 아들의 죽음을 이야기하려는 요나(위기4)

(다) 한동안 잠잠했던 우수가 다시 휩쓸어, 한층 강력한 힘으로 가슴을 씹는다.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요나의 눈초리는 양쪽 인도를 오가는 군중 위를 달린다. - 이렇게 많은 수천 AD의 군중 속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줄 사람은 없을까 하고. 그러나 군중은, 그와 그의 우수에는 아랑곳도 없다는 듯, 무심히 달리기만 한다…… 우수는 한없이 크기만 한다. 요나의 가슴을 쪼개서 그 안에서 우수를 흘려 버린다면 그것은 온 세상에 철철 넘치고 말리라. 그러나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우수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대낮에 불빛을 들이대고도 볼 수 없는 그러한 하잘 것 없는 껍질 속에서라도 들어박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 요나의 우수(위기5)

(라) 요나는 가마니를 든 머슴을 보고 그 사나이한테 말을 걸어 보리라 생각한다.

 "여보게, 지금 몇 시나 됐지?"

하고 그는 묻는다.

 "아홉 시 지났어…… 뭐 때문에 이런 데 서 있는 거야? 빨리 가도록 해!"

 요나는 거기서 몇 걸음 지나가서, 등을 굽히고 우수에 온몸을 내맡긴다…… 그는 사람에게 말을 건다는 것이 이미 소용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5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그는 몸을 곧게 세우고, 마치 날카로운 아픔이라도 느낀 듯 머리를 흔들고는 고삐를 잡아당긴다……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 참을 수 없는 요나의 고독감(위기6)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지금 제겐 마누라가∼즉 무덤이란 말이요 : 마부의 부인은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닌 무덤에 묻혀 있다. 그의 아내는 오래 전에 죽었음.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렇게 많은∼우수는 한없이 크기만 한다. : 요나는 많은 군중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만한 사람이 없나 찾아보지만 실망만 할 뿐이다. 더욱더 외로움은 커진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그러나 5분도 채∼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 목적지에 다 온 요나는 다시 외톨이가 된다. 우수에 젖어 있는 그는 슬픔과 외로움이 극도에 달한다. 그는 절망한 채 숙소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이해와 감상

 브이보르그스까야에서 탄 세 명의 남자들은 술에 취해 서로 욕설을 주고받으며 논쟁을 벌이다가 요나의 허름한 차림새를 조롱한다. 그렇지만 요나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잠시 고독감을 잊는다. 조심스레 아들의 죽음을 이야기해 보지만, 빨리 달리자는 욕설만 들릴 뿐이다. 아들이 죽은 경위를 얘기할 틈도 없이 세 사람은 목적지에 도착했고 요나는 다시 외톨이가 된다. 한동안 잠잠했던 우수가 다시 그를 휩싸고 슬픔은 극도에 달하지만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심하게 달리기만 한다. 그는 절망한 채 숙소로 돌아가기로 마음먹는다.

(가) '숙소로 돌아가자.'하고 그는 생각한다. '숙소로!' 그러자 말도 그의 마음을 짐작이라도 한 듯 민첩히 달리기 시작한다. 한 시간 반 가량 지난 후, 요나는 벌써 크고 더러운 난롯가에 앉아 있다. 난로 위에도, 마루 위에도, 벤치 위에도, 사람들이 코를 골며 자고 있다. 공기는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하다…… 요나는 잠자는 사람들을 둘러보고 몸을 긁으면서, 이렇게 빨리 숙소로 돌아온 것을 후회한다. - 숙소로 돌아온 요나와 말(절정1)

 '귀리 값도 못 벌었어.'하고 그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렇게 마음의 우울하지. 자기 일을 잘하는 사람은…… 배를 곯지도 않고, 말에게도 배고픈 맛을 보이지 않으니, 언제나 마음이 편할 수밖에…….'

(나) 한쪽 구석에서 젊은 마부 한 사람이 일어나서, 졸린 듯이 중얼거리며 물통 쪽으로 허둥지둥 걸어간다. "마시고 싶으냐?"하고 요나는 묻는다. "그래 마시고 싶어!"

 "그럼, 실컷 마셔…… 그런데 말야, 젊은이 내 아들놈이 죽었다네…… 자네 들었나? 이번 주일에 병원에서 말야…… 세상이란!" - 여전히 하소연할 대상이 없는 요나의 답답한 심정(절정2)

(다) 요나는 젊은이에게 자기 말이 어떤 효과를 일으켰는가를 보려고 하지만,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젊은이는 머리부터 푹 이불을 뒤집어쓰고 벌써 잠들고 말았다. 젊은이는 머리부터 푹 이불을 뒤집어쓰고 벌써 잠들고 말았다. 노인은 한숨을 몰아쉬고 몸을 긁는다. 젊은이가 물을 마시고 싶었던 것처럼, 그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아들이 죽은 지 한 주일이 되어 오지만, 그는 아직껏 누구에게나 아들의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말하려면, 요령 있게 자세히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떻게 돼서 병에 걸렸는가, 어떻게 고통 당했는가, 죽기 전에 뭐라고 말했는가, 죽을 때는 어떠했는가, 이것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 지금 그가 해야 할 말은 얼마나 많은가? - 미칠 듯한 요나의 고독감(절정3)

(라) '말이라도 가서 볼까.' 요나는 생각한다. '언제라도 잘 수는 있다. 얼마든지 잘 순 있어.'

 그는 옷을 걸치고 자기 말이 매여 있는 마구간으로 간다. 그는 귀리며, 건초며, 날씨에 대해서 생각한다…… 혼자 있을 때는 아들에 대해서 생각할 수가 없다. 누구든지 말을 들어 주는 사람이 있으면 몰라도 혼자서 외로이 생각에 잠겨 아들의 모습을 상기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이 괴로운 것이다…….

 "먹느냐?"

요나는 반짝반짝 빛나는 말의 눈을 바라보며 물어 본다.

 "자, 먹어, 먹어…… 귀리 값을 못 벌면 건초라도 먹어야지…… 그래…… 마차를 끌자니 이미 몸은 늙어 버렸고…… 아들놈이 끌어야 해, 내가 아니라…… 그 앤 참 훌륭한 마부였어. 그놈만 살아 있다면……." 요나는 잠시 가만있다가 다시 말을 잇는다.

 "그렇다, 애야…… 꾸지마 요느이치는 이 세상에 없다…… 먼 곳으로 떠나갔어. 아무 산 보람도 없이 죽고 말았다…… 자, 네게 새끼 말이 있고, 넌 그 새끼 말의 엄마라고 하자…… 그런데 갑자기 그 새끼 말이 어딘지 먼 곳으로 가 버렸단 말이다…… 그런데도 넌 슬프지 않니?"

 말은 먹이를 씹으며,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주인의 손에 입김을 불기도 한다…… 요나는 흥분한 어조로 자기의 자초지종을 말에게 이야기한다. - 말에게 하소연하는 요나(절정4)

 '숙소로 돌아가자∼숙소로! : 자신의 슬픔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려고 하였지만 아무도 받아주지 않자 숙소로 가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이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을 표현한 구절이다.

공기는 숨이∼후회한다. : 큰 기대감을 가지고 숙소로 돌아오지만 숙소에도 역시 하소연할 만한 대상이 없다. 자신의 답답한 심정을 제시하고 있다.

요나는 젊은이에게 - 수가 없다 : 젊은 마부가 자신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 주길 요나는 바랐지만, 들어 주지 않고 잠들어 버리자 요나는 실망한다.

젊은이가 물을 - 싶은 것이다 : 요나에게 있어서 죽은 아들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 드러나 있다.

어떻게 해서 - 얼마나 많은가 : 아들을 잃은 요나의 슬픔이 밖으로 분출되지 못한 채 요나의 가슴 깊은 곳에 가득히 쌓여 있음을 암시하는 구절이다. 요나는 아직 그 슬픔을 말할 대상이 없어 슬픔을 억누르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을 듣는 - 틀림없다 : 요나가 바라는 것은 단순히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듣는 상대편에게 자신의 슬픔을 나누어 주어, 그 상대편이 함께 슬퍼해 줌으로써 상대편으로부터 위로를 받고자 하는 것이다.

혼자 있을 때는 - 없다 : 지금 요나에게는 자신의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절실히 필요함을 알 수 있다.

누구든지 - 괴로운 것이다 : 요나의 슬픔이 잘 나타나 있다.

말은 먹이를 - 한다 : 말과 요나가 일체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이 아닌 동물을 통해 자신의 슬픔을 토로하고 있는 것은 요나의 처지가 눈을 시리게 하고, 사람들의 비정함을 엿볼 수 있다.

요나는 흥분한 - 이야기한다 : 요나의 소망이 말을 상대로 이루어지는 구절로, 반어적 기법을 통해 비극적 정조를 드러내고 있다.

 

이해와 감상

 요나는 참을 수 없는 고독감에 쫓겨 숙소로 돌아온다. 숙소에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이 있을 것만 같은 기대감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들 자고 있는 숙소에 정작 당도하자 요나는 서글픔을 느끼며 후회한다. 그것을 요나는 자신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해 보지만 부질없다. 병으로 아들을 잃고 시골에는 딸이 남아 있고, 자신은 객지에서 마부 노릇을 하는 가슴아픈 처지를 누구에게라도 이야기하면 공감을 얻고 위로를 받으리라 생각하지만 아무도 이 마부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다. 결국 요나는 마구간으로 가서 말에게 자신의 사연을 넋두리하듯 털어놓는다.  

이해와 감상

 얼마 전에 외아들을 잃은 늙은 마부 요나는 그 슬픔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동정을 구하고자 한다. 그래서 손님을 태울 때마다 그는 아들의 죽음을 말하고자 하나 진지한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결국 실패하고 만다. 숙소로 돌아와 동료 마부에게도 말을 걸어 보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끝내 자기 이야기를 들어 주는 사람이 없자 그는 자기 말에게 아들이 죽은 사연을 털어놓는 수밖에 없다.

 동물에게 인간적 교감을 추구하는 이러한 반어(反語), 또는 희비극(喜悲劇)은 인간이 본래 고독한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작품은 체호프의 독특한 해학과 비극적 정조가 혼합된 초기 작품의 하나이다. 본문은 작품의 전편을 수록했다.(출처 : 김윤식·김종철 저 한샘 문학)

 이 작품은 마부 요나의 고독과 우수를 통해 메마른 세상에서 겪는 인간의 비애를 짙게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얼마 전에 외아들을 잃은 늙은 마부 요나는 그 슬픔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동정을 구하고자 한다. 그래서 손님을 태울 때마다 그는 아들의 죽음을 말하고자 하나 진지하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끝내 자기 이야기를 들어 주는 사람이 없자 그는 자기 말에게 아들이 죽은 사연을 털어놓는다. 동물에게 인간적 교감을 추구하는 이러한 반어(反語)는 인간이 본래 고독한 존재라는 이 작품의 주제를 드러내고 있으면, 이와 더불어 체호프 특유의 비극적 정조가 인상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심화 자료

극적 제시의 효과

 이 작품은 소설의 기법 중 '극적 제시'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작가는 마부 요나의 감정을 직접 분석해 보이거나 논평하지 않는 대신 요나가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예컨대 작품 서두에 요나가 눈을 잔뜩 뒤집어 쓴 채 마차에 앉아 있고 말도 역시 그러한 상태로 꼼짝 않고 있는 것을 묘사한 다음 손님이 행선지를 말하며 거듭 불러야 요나와 말이 움직이고, 게다가 제대로 길을 들지 못하는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요나가 무엇엔가 침잠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나의 슬픔은 작가에 의해 설명되는 것이 아니고 독자가 요나의 행동이나 대사를 통해 추리해 나가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극적 제시의 방법은 소설의 기법을 가리키는 것이며, 극적 소설이란 소설 유형의 하나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둘 사이에 필연적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작가가 작품 속에 개입해서 상황이나 사건의 의미를 직접 설명하는 대신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이 극적 제시 방법의 하나이다. 희곡의 기본적인 특징이 서술자의 부재임을 생각해 보자. 반면 극적 소설이란 행동 소설과 성격 소설이 종합된 것으로 인물(성격)과 사건(행동) 사이의 긴밀한 관련성을 특징으로 하는 소설 유형이다.

'우수(憂愁)'는 극적 소설은 아니지만 극적 제시의 방법을 쓰고 있다.

요나와 말의 관계

 작품 전반부에서 요나와 말은 그저 마부와 그가 소유하고 있는 생계 수단의 관계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요나가 그의 슬픔을 타인들과 공유하지 못하고 고독하게 홀로 있을 때, 그는 말에게 자신의 슬픔을 털어놓으며 괴로움을 덜어낸다. 이 때 말과 요나는 짙은 정신적인 교감의 상태를 이루고 있으며, 이를 통해 작가는 인정 없이 메말라 가는 세태를 비판하고 있다.

체호프 초기 소설의 경향

 체호프는 초기작들에서 있는 그대로의 인생을 그린다는 것을 창작의 기본 태도로 삼았다. 이에 체호프는 초기 소설의 경향에는 사회를 비판적으로 시각으로 바라보는 풍자적 계열과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난 사람들을 동정적인 태도로 바라보는 계열이 두드러지는데, '우수'는 후자에 속한다. 이 계열의 작품들은 대체로 정경 묘사를 중심으로 애수(哀愁) 어린 서정성을 표현했다. 이러한 변두리 인생들에 대한 눈물 어린 시각이 뒤에 현실 비판의 시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1880년대의 러시아 문학

 투르게네프의 루진에서 시작하여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까지 이어지는 19세기 중엽 러시아 소설의 황금 시대가 끝나고 1880년대의 문학은 침체를 맞게 된다. 그 원인은 농노 해방을 계기로 하여 일기 시작한 사회적 격변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재능 있는 사람들을 모았던 문학은 이미 지적 활동의 중심이 아니었다. 이와 같은 퇴영적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예술적 문학의 발아가 체호프에 의해 시작되었다.

비극적 정조

 체호프는 초기작들에서 있는 그대로의 인생을 그린다는 것을 창작의 기본 태도로 삼았다. 초기 소설의 경향 중에는 풍자적 계열과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난 사람들을 동정적으로 바라보는 계열이 두드러지는데, '우수(憂愁)'는 후자에 속한다. 이 계열의 작품들은 대체로 정경 묘사를 중심으로 애수 어린 서정성을 표현했다. 변두리 인생들에 대한 눈물 어린 시각이 뒤에 현실 비판의 시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체호프 문학의 사회적 배경과 후기 작품

 체호프가 청년 시절을 보낸 1880년대 는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하는 등 테러 행위가 고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왕위를 계승한 알렉산드르 3세는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 강경한 탄압 정책을 시도하였고, 그 때문에 가난한 농민들이나 지식인들의 생활 태도는 일시에 환멸과 암운으로 바뀌었다. 이 때 체호프는 어둡고 절망적인 러시아 사회를 있는 그대로 작품 속에 드러내 보이면서, 사람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재인식시키고, 삶에 대하여 궁극적인 태도를 갖도록 호소하였는데, 이러한 체호프의 신념은 그의 후기 작품에 잘 그려져 있다.

그의 후기 작품으로는 러시아의 전제 정치를 비판하고 지식인의 운명을 암시한 '6호실', 민중 생활의 향상을 꾀하는 딸 리사와, 현실 개조를 주장하지만 무기력한 화가와의 대화를 통해 진보의 문제를 다룬 '다락이 있는 2층집', 돼지보다 못한 농민 생활의 비극을 그린 '농군들' '골짜기' 등이 있다.

체호프 Anton (Pavlovich) Chekhov

 1860. 1. 29(구력 1. 17) 러시아 타간로크~1904. 7. 14/15(구력 7. 1/2) 독일 바덴바일러.

러시아의 작가이자 일류 극작가이자 근대 단편소설에서 가장 앞선 거장으로 꼽히며 19세기말 러시아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특출한 존재이기도 하다. 걸작으로는 〈갈매기 Chayka〉·〈바냐 아저씨 Dyadya Vanya〉·〈세 자매 Tri sestry〉·〈벚꽃 동산 Vishnyovy sad〉이 있다.

청소년시절

 체호프의 아버지는 농노 출신 식료품 잡화상으로 근근히 살아가면서도 신앙심이 두터운 엄격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체호프에게 가게 일을 시켰고 그를 자신이 지휘하는 교회 성가대에 들게 했다. 후에 체호프가 작품에 그려낸 어린시절의 경험은 생기 넘치고 흥미진진한 것이었지만 그 기억은 어머니의 다정함에도 불구하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스 소년들을 가르치는 지방의 한 학교를 잠시 다닌 뒤 타간로크의 중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10년간 이 학교를 다니면서 당시로서는 가장 훌륭한 정규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교과과정은 딱딱했고 그리스어와 라틴어 고전 일색이어서 그는 평생 이 과목들을 싫어했다. 학교를 다닌 마지막 3년 동안은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며 혼자 생활을 꾸려야 했는데, 이는 아버지 가게가 파산하자 새 출발을 위해 식구들이 모스크바로 이사했기 때문이었다.

 1879년 가을 체호프는 모스크바의 식구들과 합류했고 1892년까지 이곳에 주요기반을 두고 활동했다. 그는 곧 의과대학에 들어가 1884년 의사자격을 얻고 졸업했다. 그무렵 벌써 식구들의 경제적 대들보 역할을 했다. 아버지는 형편없는 보수로 고용되어 있었고 저널리스트인 알렉산드르 형과 예술가인 니콜라이 형은 차례로 방랑길을 떠나 거의 재정적인 도움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식구들의 비공식적인 가장이 된 그는 신문·잡지에 기고하거나 희극적 소품을 써서 별도의 수입을 올림으로써 커다란 책임감과 정력을 보여주었으며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기꺼이 부양했다. 이와 함께 꾸준히 의학공부를 하며 바쁜 사회생활을 했다. 체호프는 유머 잡지의 일화 작가로서 필명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888년경 그는 이미 '수준이 낮은' 대중들에게 널리 인기를 얻고 있었으며 후기작품을 한데 모은 것보다도 더 많은 작품을 썼다. 이 과정에서 약 1,000단어로 쓰는 짤막한 희극적 소품을 이미 하나의 작은 예술형식으로 탈바꿈시켰다. 또한 그는 희극적 작품에서 다루던 광적인 우스꽝스러움을 기묘하게 가미해 다양한 상황에서의 인간의 불행과 절망을 다룬 진지한 작품도 시도했는데, 점차 이 진지함에 빠져 그는 곧 희극성보다 진지함을 추구하게 되었다.

문학적 성숙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연재물을 처음 발표하면서부터 20대 초반의 체호프는 문학적 진전을 이룩했다. 모두 성공을 거둔 이들 연작은 그때까지 쓴 작품보다 훨씬 진지하고 훌륭한 수준이었다. 마침내 1888년 체호프는 처음으로 중요한 문학잡지인 〈세베르니 베스트니크 Severny vestnik〉에 작품을 발표했다. 〈대초원 The Steppe〉이라는 제목의 이 작품을 기점으로 그는 드디어 과거의 희극적 소설과 결별했다. 〈대초원〉은 어린이의 눈을 통해서 본 우크라이나 여행을 서술한 자전적 작품으로, 1888년부터 1904년 죽을 때까지 그가 수많은 신문·잡지와 선집에 실은 50여 단편소설의 효시였다. 체호프의 명성은 주로 이 후기작품들과, 같은 시기에 쓴 성숙한 희곡에 기초를 두고 있다.

 1888년 체호프는 처음으로 진지한 내용을 다룬 단편소설에 몰두했다. 유머는 이제 밑바닥에 숨어버렸지만 그래도 항상 중요한 요소로 남아 있었다. 또한 작품의 수를 줄이더라도 질을 추구하고자 애썼으며 발표하는 작품수가 상당히 줄어들었다. 〈대초원〉의 뒤를 이어 발표한 몇 편의 심오한 비극적 단편소설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지루한 이야기〉(1889)이다. 죽어가는 어느 늙은 의학교수의 심리를 파헤친 이 작품은 젊은 작가로서는 매우 예외적으로 놀라운 통찰력과 정교한 기법을 보여준다. 희곡 〈이바노프 Ivanov〉(1887~89)는 작가 또래의 젊은이가 자살하는 장면으로 절정을 이루는 작품인데, 〈지루한 이야기〉와 함께 체호프의 이른바 임상소설군에 속한다. 정신적·육체적인 병자의 경험을 심층적으로 탐구한 이 작품들은 작가가 의사라는 사실을 환기시켜준다. 체호프는 실제로 이따금씩 의사로 활동했다. 1889년 무능하고 동정심 많은 형 니콜라이가 체호프 자신의 목숨도 앗아간 결핵으로 죽자 그는 염세적이 되었다. 때로는 이 염세관이 체호프 자신이나 그의 전체 작품의 유형으로 잘못 평가되기도 한다.

 1880년대 후반 체호프는 자기 예술의 목적에 대해서 무척 고민했음이 틀림없다. 그가 비평가들의 주목을 끌만큼 유명해지자, 비평가들은 그가 뚜렷한 정치적·사회적 관점을 갖고 있지 않으며 작품에 어떤 방향성을 부여하지도 못했다는 이유로 비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비난은 비정치적이고 특정 철학에 구속받지도 않으며 추상적인 허세를 불편해하는 사람이었던 체호프를 괴롭혔다. 1890년초 그는 혼자서 머나먼 섬 사할린 섬으로 사회학적 조사를 하러 훌쩍 떠남으로써 이 피곤한 도시의 지적 생활에서 탈출구를 찾았다.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약 9,650㎞나 떨어진 사할린은 차르 체제하의 유형지로 악명높은 섬이었다. 그때는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부설되기 전이었으므로 마차와 배를 타고가는 여정은 길고도 험했다. 무사히 도착해 지역 상황을 연구하고 주민 인구를 조사한 뒤 배편으로 홍콩을 거쳐 실론(스리랑카)으로 갔다. 조사 결과를 토대로 이곳에서 출판한 〈사할린 섬〉(1893~94)은 러시아 형벌학사상 명예로운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체호프는 자신의 많은 작품을 출판해준 부유한 신문 경영자 A.S. 수보린을 동반하고 첫번째 유럽 여행길에 나섰다. 사교적이고 활달한 성격이었지만 가까운 벗이 거의 없었으므로 26세나 연상인 수보린과 함께 갔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체호프는 수보린과 오랫동안 친밀한 관계였으나 정치적으로 반동적 경향의 신문인 〈노보예 브레먀 Novoye vremya〉의 발행자인 그로 인해 얼마간 인기를 잃었다. 결국 체호프와 수보린은 유명한 드레퓌스 사건을 다룬 이 신문의 태도 때문에 결별했다. 체호프는 드레퓌스를 옹호했으나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정치에서나 예술에서나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라고 생각한 그는 좌우익을 막론하고 지나치게 정치성을 띤 인물을 위험하다고 보았다. 사할린 답사를 전후해 체호프는 희곡의 습작과 실험을 계속했다. 장황하고 어울리지 않게 우스꽝스러운 4막극 〈숲의 정령 Leshy〉(1888~89)은 나중에 많이 삭제되어 기적적인 예술에 의해 위대한 희곡 〈바냐 아저씨〉로 탈바꿈했다. 시골 장원의 목적 없는 삶을 훌륭히 파헤친 작품으로 개작한 이 작업은 1890~96년에 이루어졌다. 그무렵에 쓴 다른 작품으로는 보드빌 단막 익살극인 〈곰 Medved〉(1888)·〈청혼 Predlozheniye〉(1889)·〈결혼 Svadba〉(1889)·〈기념일 Yubiley〉(1891) 등이 있다.

멜리호보 시기(1892~98)

 의사이자 의료 행정관으로서 1891~92년의 대기근 구제사업에 참여했으며 모스크바에서 80㎞ 떨어진 멜리호보 마을에 영지를 사들였다. 오빠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결혼하지 않고 집안 살림을 도맡은 누이동생 마리야와 늙은 부모와 함께 약 6년간 이곳에서 살았다. 그는 곧 이 지역의 유명인사가 되었고 학교를 세우기 위해 돈을 모았으며 종종 치료를 받으러 온 농부들에게 둘러싸여 지냈다. 그는 또한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여러 곳에서 온 손님들을 위해 집을 늘 개방했다. 이는 창작과는 무관한 생활인 듯했지만 멜리호보 시기는 단편소설에 관한 한 그의 생애에서 가장 창조적인 시기였다. 사실 〈나비〉·〈이웃사람들〉(1892)·〈익명의 소설〉(1893)·〈흑의의 수도승〉(1894)·〈살인자〉(1895)·〈아리아드네〉(1895)를 비롯한 많은 걸작이 이 6년 동안 나온 것이다. 이제 시골생활이 작품의 주요주제가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은 〈농부들〉(1897)이다. 구성 때문에 평범하게 보이는 이 단편 연작은 체호프의 어떤 작품보다도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그것은 부분적으로 작가가 러시아 농부들을 감상적이고 온순한 모습으로 제시하는 그때까지의 관례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갈매기〉(1896)는 멜리호보 시기에 쓴 유일한 희곡이다. 1896년 10월 17일(구력)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된 4막극인 이 작품은 희극으로 오해되어 혹평을 받았고 실제로 야유가 빗발쳐 공연이 중단될 뻔했다. 크게 상심한 체호프는 2막 공연 도중 객석을 떠났고 생애에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다시는 희곡을 쓰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2년 뒤 이 작품은 신설된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다시 공연되어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 극작가로서 체호프의 자질을 재정립시켜주었다. 〈갈매기〉는 각각 2명의 작가와 여배우가 대표하는 구세대와 신세대의 충돌을 조명하고 있는데, 몇몇 장면은 친구들의 삶의 모습을 재연한 것이다.

얄타 시기(1899~1904)

 1897년 3월 체호프는 결핵으로 인한 각혈로 고생했다. 의사로서 그는 꽤 오래 전에 증상을 자각했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스스로 병자나 다름없는 자신의 상태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멜리호보의 영지를 팔아 크림 반도의 해변 휴양지 얄타에 별장을 세웠다. 이때부터 매년 겨울에는 대부분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지적 생활을 포기하고 얄타나 프랑스령 리비에라에서 지냈다. 그의 희곡은 이제 막 진정으로 관심을 끌기 시작했으므로 이런 생활은 매우 짜증스러웠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연극에 출연했던 여배우 올가 크니퍼와 사랑에 빠져 결국 1901년 결혼했다. 이때가 그가 평생에 단 한번 진정한 사랑을 경험했던 때일 것이다. 그러나 크니퍼가 배우활동을 계속하기를 고집해 그는 겨울 동안은 대부분 아내와 떨어져 살았고 아이도 생기지 않았다. 재정 문제에 관해서는 어두웠던 그는 1899년 정규적인 고료를 받기 위해 희곡을 뺀 모든 걸작들의 판권을 A.F.마르크스에게 7만 5,000루블이라는 지나치게 싼 가격으로 팔아넘겼다. 마르크스는 1899~1901년에 10권으로 된 체호프의 전집을 처음 출간했으나 이때는 이미 작가 스스로 많은 초기 작품을 부정한 뒤였다. 그런데도 이 전집은 자료를 덧붙여 1903년 재판되었고 여러 모로 만족스럽지 못했다. 얄타 시기에 체호프는 단편소설 창작을 줄이고 희곡에 크게 중점을 두었다. 마지막 희곡 작품인 〈세 자매〉(1901)와 〈벚꽃 동산〉(1904)은 모두 모스크바 예술극장을 위해 쓴 것이었다. 그는 이 극장을 설립한 블라디미르 네미로비치 단첸코와 콘스탄틴 스타니슬라프스키에게 힘입은 바 컸지만 작품의 리허설과 공연에 만족하지 않았다. 자신의 희곡이 비극이라기보다는 희극에 가깝다고 되풀이해 주장했던 그는 종종 연출가들이 생의 무상과 권태에 한숨 짓는 주인공들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어둡게 다루는 데 대해 불만이 쌓여갔다. 스타니슬라프스키는 그때까지 과장된 연기를 펼쳤던 러시아 무대에 웅변조를 벗어난 자연스러운 방식을 도입한 혁신가라는 명성을 얻고 있었으나, 될 수 있는 한 자신의 작품을 가볍게 다루기를 바라던 체호프의 눈에는 여전히 자연스럽지도, 웅변조를 벗어나지도 못한 것으로 비쳤다. 체호프의 원숙기 작품은 세계 각국에서 공연되었지만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가벼운 연출을 바라는 그의 요구가 충족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예를 들어 지방 소도시에 사는 젊은 3자매의 갈망을 지극히 섬세한 필치로 묘사한 〈세 자매〉를 지나치게 진지하게 다룬다면 작품을 망칠 수도 있는 것이다.

 쇠락해가는 러시아 지주 계층을 신랄하게 묘사한 작품인 마지막 희곡 〈벚꽃 동산〉은 그의 주장에 따르면 희극이며 어떤 점에서는 익살극이기도 한데, 등장인물들은 매우 통렬하게 묘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희극적이다. 1904년 1월 17일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의 작품 초연은 그 자체가 하나의 희비극이었다. 언제나 소란을 혐오하던 작가가 이미 죽음을 눈앞에 두고 발작적으로 기침을 해대는 상태에서 극장으로 실려와, 자신의 등단 25주년(이것도 잘못 환산한 것이었음)을 축하하는 허풍스런 연설들을 들어야 했던 것이다. 그무렵 그는 이미 러시아에서 저명한 작가가 되어 있었으나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였다. 콘스탄스 가넷등 여러 작가들이 그의 작품을 보급했고 영어권에서는 그를 숭배하고 모방하는 작가들이 무수히 생겨났다. 그러나 핵심을 교묘히 피해 겉으로는 성실한 문체로 써내려간 그의 작품은 말해진 것보다 더 중요하게 보이는 내용들이 말해지지 않은 채 남아 있어 난해하기 때문에, 작가들이 모방하거나 비평가들이 분석하기가 쉽지 않다.

 그의 사후 40여 년 만인 1944~51년에 전집 〈A.P. 체호프의 작품과 편지 전집 Polnoye sobraniye sochineny i pisem A.P.Chekhova〉이 발간되어 어느 정도 조건부이기는 하지만 비로소 그의 작품들이 러시아에서 학술적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20권으로 된 이 전집 중 8권이 수천 통에 이르는 그의 편지가 실려 있는 책이다. 명랑하고 재치 넘치는 이 편지들은 그가 절망적인 염세주의자라는 생전의 평가를 뒤집었다. 문학사가 D.S.미르스키에 따르면 이 편지들은 러시아 서간문학의 본보기로서 푸슈킨의 편지들에 버금가는 것이다. 체호프는 여전히 주로 극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비평가들은 단편소설에 더 많은 관심을 쏟고 있으며 특히 1888년 이후의 단편이 훨씬 중요하고 문학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R. F. Hingley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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