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시집 / 소설 / 줄거리 / 장용학
by 송화은율요한시집
장용학(1921~ )
함북 부령에서 출생하여 1942년 와세다대학 상과를 중퇴하였고 1944년 학병으로 입대후 해방과 함께 제대하였다. 1947년 월남하여 전쟁 직전인 1950년 5월 단편 「지동설」을 문예지에 발표하고 1952년 문예지에 「미련 소묘」로 추천을 마치고 문단에 나왔다. 1955년 현대문학에 「요한시집」을 발표하였고「원형의 전설」 「비인탄생」등 전쟁의 상처가 채 가시기 전 실존주의적 자유의 관념을 매개로 국한문 혼용을 고집하여 난해한 작품을 써 “한국 관념소설의 대부”로 평가받아 왔다. 유신시대에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있었다. 1987년 단편 「하여가행」을 끝으로 절필하고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그는 “군사정권 때는 체제에 대한 저항 의식이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자유로워진 지금은 그 대상을 상실했기 때문에 글을 쓸 여력이 없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요한시집
작가는 이 작품을 창작하게 된 동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느날 店頭에서 거제도 포로수용소 생활의 수기를 그 몇몇 장면 주워 읽게 되었다. 바위를 떨어뜨려 사람을 으깨어 죽인다든지 눈알을 뽑고 코를 도려내고 사지를 뜯어 변소에 처넣었다든지 하는 장면은 빈혈증을 일으킬 만한 것이었다. 그 울고 싶은 전율을 안고 보수산에 올라와 저 앞바다 수평선에 희미한 거제도의 島影을 보았을 때 내 마음 속에서 창작욕이 솟아올랐다.”
작품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이 소설은 크게 네 부분으로 짜여져 있다. ‘서(序)’는 토끼의 우화, ‘상(上)’은 동호의 1인칭 서술에 의한 내적 독백, ‘중(中)’에서는 누혜의 죽음과 그 동기가 동호의 의식 속에서 드러나며, ‘하(下)’는 누혜의 유서이다.
‘서’는 동굴 속에 갇힌 토끼가 빛을 찾아 밖으로 나왔을 때 강렬한 햇살에 실명(失明)한다는 우화이다.
‘상’ 부분. ‘나(동호)’는 의용군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가 미군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 갇힌 후, 이제 막 그 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인물이다. ‘나’는 회상에 잠긴다. 2년 전 인민군 신분으로 미군과 싸웠다. 어느 일요일, 미군을 습격하다 붙잡히고 말았다. 반공 포로로 수용소에서 풀려나온 ‘나’는 누혜 어머니가 있는 산속의 하꼬방에 정착한다. 누혜도 같이 참전했으나, 이미 수용소에서 자살한 뒤이다.
누혜가 포로가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후퇴하는 국군을 따라 이남으로 내려온 누혜 어머니는 고양이가 잡아 온 쥐를 먹으며 목숨을 연명해 왔다. 노파는 실낱같은 목소리로 누혜를 부르며 죽어 간다.
‘중’에서 누혜의 죽음의 동기가 ‘나’의 추억과 분노 속에 표현된다. 누혜는 수용소 내의 비인간적 살인에 대해 절망을 느끼고 죽음을 통해서 마지막 위로와 안식을 택한다. 그의 시체는 ‘인민의 반역자’라는 낙인이 찍혀 눈알이 뽑힌다.
‘하’ 부분은 누혜가 쓴 회상 형식의 유서이다. 그는 순수를 지향하는 시인이고자 했다. 해방이 되면서 새로운 삶을 살고자 인민의 벗이 되었으나 살육의 현장에 그는 절망한다. 그런데 포로 생활을 하면서 새로운 생활 양식을 찾은 착각에 빠진다. 노예의 생활 속에서 자유의 새로운 맛을 본 느낌이다. 그러나 자유도 욕망의 대상이란 점에서 인간 정신에 대한 하나의 구속이므로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으로 판단한다. 그리하여 실존적 삶을 살리는 유일한 길은 자유가 죽는 데 있었다. 누혜는 드디어 마지막 돌파구로 자살을 택한다.
앞에 제시한 ‘줄거리’는 이 작품의 얼개만 파악한 것이다. 그러므로 동호와 누혜의 의식 세계, 두 사람 간의 관계는 잘 드러나지 않았다. 특히 이 소설의 중심 과제가 ‘자유(自由)’라고 할 경우, 그 자유를 중심으로 한 고뇌와 진통은 좀더 정밀한 분석을 필요로 한다. 아무래도 소설 감상의 요체가 등장 인물의 성격(Character)파악에 있는 것이라면 동호와 누혜의 내면 세계에 접근하지 않을 수 없다.
두 인물의 의식을 다시 한번 추적하기로 한다.
섬에서 돌아온 나(동호)는 누혜 어머니가 사는 산꼭대기 하꼬방집을 며칠 만에야 겨우 찾아 낸다. 레이션 상자를 뜯어 덕지덕지 붙인 하꼬방 지붕 위로 수송기 한대가 남쪽으로 날아간다. 비행기 소리만 들어도 발작을 일으키던 나였는데, 이제는 가슴만 조금 울렁거리는 정도로 많이 회복되었다.
나는 의용군에 징집되어 한 손에 수류탄을 들고 ‘50년 전의 자본주의를 향하여’ 돌격하다가 폭격을 받아 포로가 되었다. 가슴에 POW(prison of war : 전쟁 포로)라는 꼬리표를 달고 나는 수용소에 갇혔다. 내가 누혜를 만난 것은 그 섬에서였다. 그와 나는 잠자리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나처럼 의용군이 아니라 이북에서 내려온 정규 인민군 출신이었다.
이번 전쟁에서 보인 용맹으로 그는 최고 훈장을 받은 ‘인민의 영웅’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수용소 내에 내분이 일어났을 때도 적군가는 부르려 하지 않고 틈만 나면 누워서 푸른 하늘만 쳐다보곤 하였다. 이러한 냉담한 태도 때문에 누혜는 그의 붉은 동료들로부터 ‘타락한 반역자’,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히게 된다. ‘내 살이 뜯겨 나가고 내 피가 흘러내린 이 전쟁’이 누구를 위한 전쟁인지도 모른 채 세계의 고아가 되어 버린 포로병들 사이에 이제는 남을 죽여야만 내가 살아 남을 수 있는, 비로소 ‘완전히 자기의 전쟁’이 된 싸움이 철조망 안에서 다시 일어났다. 붉은 깃발과 푸른 깃발이 맞서 휘날리는 남해 고도에서, 이 전쟁에 참가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생존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며칠 후 누혜는 철조망에 목을 매고 자살했다. 붉은 동료들은 시체에서 팔다리를 뜯어 내고 눈을 뽑고, 귀․코를 도려내어 그것들을 변소에 갖다가 처넣었다. ‘사상의 이름으로, 계급의 이름으로, 인민이라는 이름으로’ 누혜의 시체에는 잔인한 복수가 가해졌다.
그는 자살하기 전날 밤, 남색에 못지 않게 뜨겁게 나를 포옹했다. 수용소에서 남색행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내 육체가 강간당한 것 같은 치욕을 느꼈으나 나는 구렁이에게 감긴 처녀처럼 꼼짝할 수가 없었다. 꿈에서 자신을 껴안은 여자가 바로 ‘요한의 모가지를 탐낸 살로메였다.’고 말하는 그가 나를 껴안음으로써, 그는 꿈속의 요한, 나는 꿈 밖의 요한이 된다.
그러나 그가 남긴 유서를 읽었을 때야, 그가 왜 죽음의 장소로 철조망을 택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그 철조망은 ‘세계를 둘로 갈라 놓은, 따라서 두 개의 세계를 이어 놓고도 있는’ 하나의 돌파구였던 것이다. 그의 유서는 이 자유의 문에 이르기까지 겪어 온 그의 삶을 기록한 수기였다.
누혜는 자유를 구속하는 최초의 ‘죄의 집’이 학교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학교는 벌에서 죄를 배우게 했기 때문이다. 그는 일본 여자와 사랑하게 되었고, 사랑과 혁명 사이의 이율 배반으로 괴로워한다. 제2차 대전이 끝나자, 그는 인민의 벗이 됨으로써 재생하려 했다. 그러나 당에 들어가 보니 ‘인민은 거기에 없고 인민의 적을 죽임으로써 인민을 만들어 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는 자유를 가로막는 벽을 뚫기 위해 전쟁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포로가 되었다. 그에게는 외로움과 절망만이 있었다. 그는 포로․노예로부터 새로운 자유인을 발견하려 한다.
자살은 그 자유를 향해 탈출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이자 그의 마지막 기대였다.
누혜가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남하한 그의 어머니를 내가 찾아 냈을 때, 그녀는 중풍으로 반신불수에다 극심한 굶주림으로 죽기 직전이었다. 그녀는 고양이가 잡아다 준 쥐를 먹고 연명하고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나는 수용소 변소에 버려진 누혜의 손을 보았을 때와 같은 심한 분노와 구토를 느낀다. 그녀의 손에서 쥐를 빼앗으면서 나는, ‘어머니, 난 누혜입니다.’라고 울부짖는다. 쥐를 빼앗긴 노파가 숨을 거두자 등뒤에 있던 고양이의 파란 두 눈이 바로 누혜의 눈으로 보인다.
앞서 말했듯이 이 소설의 중심 과제는 자유이다. 자유는 ‘참다운 것을 위해 겪어야 하는 또 하나의 구속’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그래서 자유를 성서에 나오는 ‘요한’에 비유하였다. 즉, ‘예수’의 출현을 위해 죽어야 하는 존재가 ‘요한’이었듯이, 자유란 찾아올 그 무엇을 위해 견뎌야 하는 고통이다. 자유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며 목적을 위한 희생이란 뜻이다.
토끼의 우화는 누혜의 유서에 나타난 삶과 밀접히 대응된다. 동굴 속의 삶은 ‘주어진 대로 사는 삶’이며, 토끼가 어느 날 깨달은 것은 ‘실존적 자각’이다. 누혜도 서서히 세상의 벽을 깨닫고 그 벽을 뚫기 위해 전쟁에 참여한다.
그는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 갇히는 데 그 곳 역시 이념을 빙자한 온갖 만행이 자행되며 그의 자유를 구속하고 있다. 그는 외로움과 절망을 느끼고 마지막 탈출을 시도한다. 그것은 자살로 ‘실현’된다.
“자살(自殺)은 하나의 시도(試圖)요, 나의 마지막 기대이다. 거기에서도 나를 보지 못한 다면 나의 죽음은 소용없는 것이 될 것이고, 그런 소용없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생(生)이라면 나는 차라리 한시바삐 그 전신(轉身)을 꾀하여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토끼가 바깥 세상의 빛 때문에 눈이 멀고 죽음에 이르는 것은, 누혜가 진정한 자유가 없다는 사실에 절망을 느끼고 자살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의 실존적 선택이다. 자살이야말로 그 누구도 이 행위에 관여할 수 없는 ‘자유’로운 선택이다. 인간은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해 이념을 준비하고 전쟁을 일으켰으나, 결국 그 전쟁 때문에 희생되었을 뿐이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실존 그 자체일 뿐, 신이니 자유니 하는 인위적인 것들은 인간을 자유롭게 할 수 없다. 신과 자유는 결국 또 다른 구속이요 벽일 뿐이다.
이 작품은 동호의 내적 독백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사실인지 환상인지 구별되지도 않는 숱한 생각들이 일관된 줄거리를 갖지 않은 채 나열되고 있다. 역사에 대한 비판, 전쟁의 비인간성, 쥐를 먹는 누혜 어머니의 처참한 모습, 수용소 생활, 누혜의 죽음과 관련된 동호의 내면 의식이 어지럽게 이어진다. 그러나 그 모든 독백은 결국 ‘나란 무엇인가.’라는 실존적 물음에 귀착된다.
만약 ‘실존’이라는 것이 창조적인 주체가 되어 세상을 새롭게 인식하고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고자 하는 꿈이라면, 이 소설은 그러한 꿈을 지향하는 인물의 비극적 체험을 한국 전쟁이라는 배경 속에서 그린 작품이다.
블로그의 정보
국어문학창고
송화은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