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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투(外套) / 고골리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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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투(外套) / 고골리



 

 <전략>

 어느 관청(官廳)에 ― 하지만 어느 관청이라는 것은 말하지 않는 것이 좋으리라. 이 세상에서 가장 취급하기 어려운 것이 관청이니, 연대(聯隊)니, 재판소니 하는 소위 공무원 계급들이니 말이다. 오늘날에 있어선, 모든 개인이 자기만이 받은 모욕까지도 사회 전체가 받은 것처럼 생각을 하는 것이다. 아주 최근에도 어느 고을의 경찰서장으로부터 탄원서(歎願書)가 제출되었었는데, 거기에는 국가의 모든 제도(制度)가 위기에 빠지려 하고 있다는 것, 신성한 그의 직위(職位)가 헛되이 남용되고 있다는 것 등이 뚜렷하게 적혀 있었고, 그 증거로 탄원서에는 한 권의 소설조로 된 문장이 첨부되어 있었으며, 그 내용에는 십 페이지마다 경찰서장이 등장하는데 때로는 곤드레만드레가 되게 술에 만취되어 주정 부리는 추태까지도 폭로되어 있었다. 그런 고로 모든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하여 문제의 관청에 대해서도 그저 어느 관청이라고만 해두는 것이 좋으리라.

  하여튼 그 어느 관청에 한 사람의 공무원이 근무하고 있었다.―― 공무원이라고는 하지만 그리 뚜렷한 존재는 아니었다. 작달막한 키에 살짝 얽은 곰보 얼굴, 빨간 머리털, 침침한 눈, 대머리가 훌렁 까진 앞이마, 잔주름이 잡힌 두 뺨, 명랑한 편에 속하는 안색…… 하여튼 죄는 페테스불그의 기후에 있었던 것이었다. 그의 계급을 말하자면 ―― 노서아 사람들은 무엇보다 먼저 계급을 따지니까 ―― 그는 이른바 종신(終身)토록 구등관(九等官)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으며,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물어뜯지 못하는 상대만을 공격한다는, 칭찬할 만한 버릇을 가진 많은 작가(作家)들로부터 마음껏 비웃음과 조롱을 받아 오는 그런 공무원 계급에 속해 있었다.

  그의 성(性)은 바쉬마치킨이었다. 그 이름으로 미루어 보건대 바쉬마크(구두라는 뜻)에서 따온 게 분명하였지만, 그러나 언제 어느 때에 어떻게 해서 바쉬마크에서 따온 것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의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바쉬마치킨의 집안 식구들은 누구나 다 장화를 신고 있었는데, 구두창은 일 년에 두세 번 갈아대는 것이었다. 그의 이름은 아카키 아카키에비치라고 불리었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좀 괴상한 이런 이름을 일부러 비꼬아서 붙인 것인 양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일부러 비꼬아서 붙인 것이 아니라, 그 밖의 다른 이름은 붙이려야 붙일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것은 이렇게 되어 비롯된 것이었다. 아카키 아카키에비치는 내 기억에 틀림이 없다면 3월 23일 초저녁에 출생하였다. 공무원의 아내이며, 마음씨 고운 그의 어머니는 태어난 어린애에게 마땅히 세례(洗禮)를 받게 해 주려고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문의 맞은편에 놓여 있는 침대에 누워 있었고, 그녀의 오른편에는 대부(代父)로서 이봔 아봐노비치 에로슈킨이라는, 전엔 원로원(元老院)의 과장(課長)으로 있었던 대단히 존경할 만한 사람이 서 있었고, 대모(代母)로서는 아리나 세미요브나 베로부르슈코봐라는 구(區)의 경찰서장 부인으로 드물게 보는 후덕(厚德)한 부인이 서 있었다. 그들은 산모(産母)에게 '모키이', '쏘씨이' 혹은 '순교자(殉敎者, 호도 자아드)', 이 세 가지 이름 가운데서 마음에 드는 이름을 아기에게 붙여주도록 골라 보라고 제시(提示)하였다.

  "싫어요, 이름들이 모두 마땅치 않군요."

  마음씨 착한 산모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산모의 마음에 들도록 그들은 달력의 책장을 넘겨 다른 곳을 펼쳐 보이자, 또 다른 세 가지 이름이 나타났다. '트리퓌리' , '듀라', '봐라카시'라는.

  "아이 끔찍스러워라."

  나이 지긋한 산모(産母)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이 무슨 이름이 그렇담. 도대체 나는 그런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는데. '봐라 다트'라든지 '봐루프'라든지 하면 또 몰라도 '트리퓌리'니 '봐라카시'니 이게 뭐예요."

  하는 수 없이 또 책장을 넘기니 '파브시카히'와 '봐라하시'라는 이름이 나왔다.

  "이젠 알았어요. 이것이 이 아이의 운명인 게죠. 정 그렇다면 이애 아버지 이름을 따서 붙여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 애 아버지 이름이 '아카키'니까 아들의 이름도 '아카키'라고 해두죠."

  이렇게 되어서 그의 이름이 '아카키 아카키에비치'로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아기는 세례를 받았었는데, 그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마치 자기가 장차 구등관(九等官)의 신세를 면치 못하리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나 한 것처럼 오만상을 찌푸렸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일이 생겨난 것이었다. 이런 것을 밝힌 것은 부득이한 일이었으니, 그에게 다른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였었노라는 사정을 독자 여러분께서 알아주었으면 하는 뜻에서 비롯된 것에 지나지 않는 터이다.

  언제 어떻게 해서 그가 관청에 근무하게 되었으며, 또 누가 그를 임명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장관이나 상관들이 그렇게 많이 바뀌었건만, 그만은 언제나 같은 의자에서 같은 태도로, 같은 일 ―― 늘 똑같은 정서계(淨書係)일 ―― 을 하고 있으므로, 나중에는 사람들이 그는 제복(制服)을 입고 대머리가 훌렁 벗겨진 채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라고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관청에서는 아무도 그를 터럭만큼도 존경하지 않았다. 설사 그가 옆을 지나가더라도 수위(守衛)들은 일어서기는커녕 응접실 안을 파리 한 마리가 날아가는 정도로만 여기고 한 번 흘깃 쳐다보려고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게 대한 상관들의 태도는 어딘지 모르게 쌀쌀하고 위압적이었다. 어떤 부과장(副課長) 같은 사람은, "정서(淨書)해 주게나."라든가, "이것은 꽤 재미있는 서류랍니다."라든가 하는 식으로 적어도 예의를 중하게 여기는 세련된 공무원들 사이에 흔히 쓰여지는 건성으로 하는 인사말 한 마디 없이 불쑥 그의 코 밑에 서류를 내어밀곤 했었다. 그럴 양이면 그는 상대방이 누구이며, 과연 이렇게 대할 권리가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따져 보려고도 하지 않은 채 힐끗 서류만 바라다보고는, 받아들기가 무섭게 정서를 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젊은 관리들은 그 천박한 익살을 부려가며 그를 비웃고, 놀림감으로 여기고, 맞대놓고 그에게 허튼 소리를 하곤 했었다. 일흔 살 먹은 노파(老婆)인 그의 하숙집 노마나님조차도 그녀가 그를 때렸다는 등, 두 사람이 언제 혼인식을 올리냐는 등, 눈이라고 말하면서 종이 조각을 그의 머리를 위에 끼얹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카키 아카키에비치는 무슨 짓을 당하든, 무슨 소리를 듣든, 이러니저러니 한 마디도 대꾸를 하는 일이 없었다. 마치 자기 눈 앞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은 태도였다. 첫째 이런 일은 그의 일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성가시게 시달림을 당해도 그는 글자 한 자를 잘못 쓰는 일이 없었으니 말이다. 다만 농담이 너무 지나치거나 팔꿈치를 툭툭 쳐서 일의 훼방을 당했을 때에만 이렇게 말하곤 했을 따름이었다.

  "사람 좀 들볶지 마시오! 어째서 나를 모욕하시는 거예요?"

  이렇게 말한 그의 말과 목소리에는 어딘지 야릇한 울림이 섞여 있었다. 그 목소리는 뭐라고 형용하기 어려울 만큼 사람의 심금을 울려주는 것이었기에, 얼마 전에 임명된 어떤 젊은 사나이는 동료들의 본을 따서 그를 놀리려고 하던 순간 무엇에 찔린 사람 모양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렸고, 이런 일이 있은 뒤로는 젊은 친구의 눈에는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이게 된 듯싶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숨은 힘이 그를, 그가 여지껏 세상살이에 능한 훌륭한 사람들로서 사귀어 왔던 동료들로부터 떼어놓아 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 뒤 오랜 시간이 지난 뒤까지도, 이 젊은 사나이는 매우 유쾌한 기분에 잠겨 있을 때에도,

  "사람 좀 들볶지 마시오! 어째서 나를 모욕하시는 거예요!"

  하고 마음 속으로 스며드는 말을 내뱉던, 대머리가 훌렁 벗겨지고, 키가 작달막한 공무원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히곤 했던 것이다.

  이 가슴이 뭉클해지는 말 속에는,

  "나도 당신들과 같은 동포라오."

  하는 또 다른 말이 울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애처롭게도 이 젊은이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뒤에도 일생 동안 살아가는 가운데 몇 번이나 그는 인간의 마음 속에는 그 얼마나 많은 비인간적인 요소가 숨겨져 있는가, 더욱이 세련되고 교양 있는 사회인(社會人) 속에도, 특히나 아! 사회에서 점잖고 성실한 사람으로서 인정하고 있는 이들 가운데조차도 얼마나 많은 흉포한 못된 습성이 숨어 있는가 하는 것을 뉘우치고는 몸서리를 치곤 했던 것이다…….

  이다지도 자기가 맡은바 일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도대체 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보냐. 그는 열심히 일을 했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할 것이다. 아니 그는 사랑을 가지고 일을 했던 것이다. 그는 정서하는 속에서 자기만이 아는 변화 무쌍하면서도 즐거운 세계를 찾아내었던 터였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그의 얼굴에는 즐거운 표정이 감돌고 있었다. 어떤 글자를 그는 유난히 좋아했기에. 정서를 하다가 자기가 좋아하는 글자가 나오면 그는 어쩔 줄 모르고 기뻐하곤 했었다. 빙그레 웃는가 하면, 눈을 지그시 감아 보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입술까지 우물거려 보기도 하면서 일을 하였으므로, 그 얼굴 표정만 보고 있어도 그가 펜으로 쓰고 있는 글씨가 무엇인지 모조리 알 수 있을 것같이 생각되곤 하는 것이었다. 만일 지금 그의 열성적인 근무에 해당되는 대우를 해 준다면, 그는 아마 깜짝 놀라리라고 생각되지만, 오등관(五等官) 정도는 임명되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익살꾸러기 동료들이 놀리던 것처럼 방앗간의 말같이 일만 했던 것이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그에 대해서 아무도 전혀 주의를 하지 않았느냐 하면 또 그런 것도 아니었다. 어느 장관은 착한 사람이었으므로, 그의 한결같은 오랜 봉사(奉仕)에 보답하는 뜻에서, 그저 남이 써놓은 문서를 정서하기만 하는 것보다는 좀 중요한 일을 맡기도록 명령을 내린 일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이미 작성된 서류 가운데에서 다른 관청으로 보낼 보고서를 만들라는 명령이 내렸었다. 그 일이란 단지 제목만을 바꾸고 두어 개의 낱말을 일인칭(一人稱)으로부터 삼인칭으로 바꾸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렇건만 그에게는 이 일이 몹시 힘에 겨운 듯, 땀을 뻘뻘 흘리며 앞이마를 연방 닦아내더니 드디어, "정말이지, 이 일은 못하겠는데요. 이 일보다는 역시 정서하는 일을 하게 해주십시오." 하고 비명(悲鳴)을 올리고야 말았다. 이런 일이 있는 뒤로부터 그는 종신토록 정서계(淨書係) 일을 면치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정서하는 일이 그의 전부여서, 그 밖의 다른 것이라고는 이 세상에 그가 관심을 갖고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자기의 옷차림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의 제복(制服)은 녹색이 바래서 홍당무에 가루를 묻혀 놓은 것 같이 부연 빛을 띠고 있었다. 깃은 좁고 낮았으므로 그리 길지 않은 그의 목이었지만, 보기 싫게 깃 위로 드러나 있어서 마치 행상꾼들이 머리에 이고 팔러 다니는 석고(石膏)로 만든 고양이 목처럼 기다랗게 보였다. 게다가 제복에는 항상 마른 풀잎이 아니면 실밥 같은 그런 것이 붙어 있었다. 더구나 그는 거리를 걸어갈 때에도 마침 온갖 쓰레기들을 창문에서 내버릴 그 시간에 꼭 알맞게 그 창문 아래를 지나간다는, 좀 독특한 재주를 갖고 있는 게 사실이기도 했었다. 그러기에 항상 모자 위에는 수박이나 참외 따위의 먹다 남은 껍질 조각 같은, 볼썽 사나운 것을 얹고 다니게 마련이었다. 거리에서 날마다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그는 일생 동안 단 한번도 주의해 본 적이라고는 없었다. 아다시피 한편 다른 젊은 직원들은 이런 일에는 아주 눈치가 빨라서 길 건너편을 걷고 있는 사람의 속바지끈이 밖으로 나와서 너덜거리고 있는 것까지를 살펴보며 심술궂은 웃음을 띄우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아카키 아카키에비치는 설사 그런 것이 눈에 띄었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이 그의 눈에는 아름답고 고르게 써진 자기의 필적(筆跡)의 행(行)으로만 보이게 마련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딘지 알 수도 없는 구석에서 별안간 한 필(匹)의 말이 그의 어깨 너머로 콧등을 삐죽이 내어밀고, 두 콧구멍을 벌름거리면서 거센 콧김이라도 내어뿜어야 비로소 자기가 글 줄 한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길 한복판을 걷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우선 식탁에 앉아서, 허겁지겁 야채 수프를 훌훌 마시고는 파를 곁들인 쇠고기 한 점을 맛이야 있건 없건, 게눈 감추듯이 먹어치워 버린다. 파리건, 무엇이건, 그때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며 무엇이든지 한꺼번에 먹어치우게 마련이었다. 뱃속이 든든해진 것을 느끼자, 그는 식탁에서 일어서서 잉크병을 꺼내놓고 집으로 갖고 온 서류를 정서하는 일을 시작하곤 했었다. 만약 일거리가 없을 경우에는, 일부러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베끼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그 서류의 문체가 아름답다는 것보다는, 누군지 새로운 인물에게나 또는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보내지는 서류를 각별히 고르는 것이었다.

  페테스불그의 몽롱한 잿빛 하늘이 완전히 빛을 잃어서, 온 직원들이 자기네의 취미와 받고 있는 월급을 생각하여, 저마다 주머니 재산에 알맞게 싸구려 음식을 배부르게 먹거나, 맛있는 요리를 먹고 있을 때, 관청에서 붓을 놀리는 소리, 분주히 왔다갔다하던 일, 자기 일만이 아니라 울며 겨자 먹기로 해야 하는 남의 일, 그리고 불쾌한 사람에게 필요 이상으로 친절하게 대해야 할 이 모든 일로부터 해방이 되어 모든 직원이 후 하고 한숨 돌리고 있을 때, 공무원들이 남은 시간을 즐겁게 보내느라고 서둘러서, 보다 대담한 친구들은 극장으로 달려가고, 어느 친구는 거리로 나가 여인을 구하고, 또 어떤 야회(夜會)에 참석하여 그들의 적은 야회 속에서 혜성(彗星)격인 어여쁜 아가씨의 비위를 맞추기에 시간을 보내고, 또 어떤 이는 ―― 이런 경우가 거의 전부이지만 ―― 현관 또는 부엌이 붙은 작은 두어 칸 정도의 방에 만찬(晩餐)이나 향락을 위하여, 많은 희생을 무릅쓰고 마련한 램프니, 그 밖의 자질구레한 세간에까지 유행을 따서 꾸며 놓은 방에 살고 있는 친구들을 방문하려고 찾아 삼층이나 사층으로 올라가고 한 마디로 말해서 모든 공무원들이 제각기 친구들의 조그만 숙소(宿所)로 흩어지고 싸구려 비스킷을 씹으며 컵에서 홍차를 마시거나, 장죽(長竹)을 뻑뻑 빨거나, 트럼프 놀이를 하면서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노서아 사람으로서는 그만둘 수 없는, 상류 사회에서 주워들은 여러 가지 잡담에 꽃을 피우거나, 그렇지 않고 이야깃거리가 없을 때에도 파로네의 동상(銅像)의 말꼬리가 잘리워졌다는 전갈을 곧이곧대로 전하여 들은 사령관에 대한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일화(逸話)를 거듭 되풀이하여 얘기하면서 트럼프 놀이를 시작하려고 할 때도, 모든 사람들이 기분 전환을 하느라고 애쓰고 있을 때도, 아카키 아카키에비치는 그 어떤 취미 생활도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언젠가 그를 어떤 곳에서 열린 야회(夜會)에서 본 일이 있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흡족할 만큼 서류를 베끼고 난 다음 마음 속으로 미리 내일의 일을 ―― 하나님이 내일은 어떤 서류를 정서하게 해 주실까 하고 즐거이 이런 공상(空想)에 잠기면서 빙그레 웃는 얼굴로 자리 속에 들어가게 마련이었다. 이리하여 일년에 4백 루불의 봉급을 받으면서 자기 운명에 만족할 줄 아는 사나이의 고요한 생활은 세월과 더불어 흘러 갔던 것이다. 만일 인생 행로에 있어서 유독 구등관뿐만 아니라 삼등관, 사등관, 칠등관 그 밖의 온갖 문관(文官), 심지어는 누구에게 충고를 하는 일도 없고 자기 자신도 그 누구한테에서도 충고를 받지 않을 듯싶은 그런 사람들에게조차도 골고루 배당이 되는 그 여러 가지 불행한 일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의 이런 고요한 생활은 아주 노년(老年)에 이르기까지 계속이 되었을 것이리라.

  페테스불그에는 연봉(年俸) 4백 루불이나 고작해야 그 정도의 봉급을 받고 있는 모든 월급쟁이에게 무서운 적(敵)이 있었다. 이 무서운 적이란 다름 아닌, 건강에는 매우 좋다고 일컬어지고 있지만, 저 살을 에이는 북쪽의 추위인 것이다. 아침 아홉 시쯤 거리가 관청에 출근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는 바로 그 시간에, 추위는 닥치는 대로 모든 사람이 코에 맵게 찌르는 듯한 아픔을 주기 시작하는 것이어서 불쌍한 공무원들은 코 둘 바를 몰라 쩔쩔매는 것이었다. 고관(高官)들까지도 앞이마에 성애가 슬고 눈에선 눈물이 나는 그 시간에는, 불쌍한 구등관 따위는 옴치고 뛰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그들을 추위로부터 구해 주는 유일한 도움이란, 얇은 외투속에 몸을 움츠려뜨린 채 되도록 빠른 걸음으로 대여섯 개 길을 횡단하여서는 수위실에 들러서, 오느라고 얼어붙어 버린, 집무(執務)에 필요한 기량(技倆)과 재능이 녹아날 때까지 발을 동동 굴러서 녹이는 것뿐이었다.

  아키키 아카키에비치는 전속력을 내어서 늘 다니는 길을 횡단하느라고 무던히 애는 썼지만,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등과 어깨가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아픈 것을 느끼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이 원인이 혹시 자기의 외투 때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집에 돌아와서 외투를 자세히 뒤져 보았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르랴! 두어 군데 바로 등과 어깨 있는 데가 가제 천만큼이나 얇아진 것을 발견하였다. 나사(羅紗)가 하늘이 비칠 정도로 낡아서 안감도 너덜너덜하게 떨어져 있었다.

  여기서 독자 여러분이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일은, 아키키 아카키에비치의 외투가 동료들 사이에서 비웃음거리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외투라는 고상한 이름으로 부르는 것조차 꺼려 하고, 그의 외투를 망토라고 불러 온 터였다. 정말이지, 그의 외투는 좀 이상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 깃은 잘라서 다른 해진 곳을 깁느라고 해마다 좁아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기운 것도 보면 재봉 삯바느질한 것처럼 매끈하지 못하고, 뒤둥글어지게 찍어 매어서 그야말로 볼썽이 사나웠었다. 이런 사실을 확인하자, 아카키 아카키에비치는 외투를 한 번 페트로비치한테 갖고 가야만 하겠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뒷 계단으로 오르내리는 어느 집 사층에 사는 재봉사로서 애꾸눈에 뻑뻑 얽은 곰보딱지였지만 가난뱅이 공무원이나 다른 단골손님의 바지나 저고리를 솜씨 있게 고치느라고 바쁘게 지내는 사나이였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술에 취하지 않고, 머리 속에 다른 생각이 없는 때에 한해서였었다.

  이 재봉사에 대해서 여러 말을 할 필요는 없지만, 소설 속에서는 사람의 성격을 뚜렷이 묘사하게 마련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페트로비치를 여기 소개하는 것이다. 애당초 그는 그레고리라고만 불리웠고, 어느 나으리의 농노(農奴)였었다. 그가 페트로비치라고 자칭하게 된 것은 해방증(解放證)을 받아들고 휴일마다 진탕 술을 마시게 되면서부터였었다. 하기야 이것도 처음에는 큰 명절날에 한해서 술을 마시곤 했으나, 차차 때 없이 달력에 십자가(十字架)의 표시가 적혀 있는 교회 명절날이면 언제나 술을 마시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점은 할일 없는 부전자전(父傳子傳)이었다. 아내하고 싸울 양이면, "이 쌍것, 독일 계집같으니" 하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가 일수였다. 기왕 그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그녀에 대해서도 두어 마디 해 두어야 될 것이나, 유감스럽게도 그녀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진 것이 없었다. 그저 알려져 있다는 것은 페트로비치에게는 아내가 있었다는 것, 그녀는 숄 같은 것은 두르고 다니지도 않았고, 언제나 남바위를 쓰고 있었는데, 얼굴은 거짓말로도 예쁘다는 소리를 할 수 없는 여인이었다. 길거리에서 그녀와 마주치면 남바위 아래 얼굴을 들여다보고, 이상 야릇한 함성을 지르고 가는 것은, 고작해야 근위병(近衛兵) 따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후략>


요점 정리

지은이 : 고골리(Nikolai Vasilievich Gogoli 1809-1852)

갈래 : 단편 소설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성격 : 현실 풍자적. 비판적, 조소적(嘲笑的), 사회 고발적

배경 : 시간(어느 겨울). 공간(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

경향 : 사실주의

제재 : 외투, 관료 사회의 부패

주제 : 개인의 성실한 삶과 그에게 냉담하며 조소를 보내는 세태 풍자, 사회에서 냉대 받는 인간의 슬픈 운명을 통해 부패한 관료 사회를 풍자, 비판함

줄거리 : 페테르베르크의 한 말단 관리인 아카키에비치는 요령 없고 처세술이 부족한 인물이다. 그는 관청에서 서류를 정서하는 일로 삶의 즐거움을 삼는다. 그는 외투가 너무 낡아 새로 장만해야만 하자 극도의 내핍 생활을 하여 새 외투를 장만한다. 그런데 관청 부과장의 저녁 식사 대접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불량배들에게 외투를 강탈당한다. 그는 절망하여 외투를 찾아 달라고 경찰서장이나 유력한 인사를 찾아 보지만 오히려 호통만 당한다. 결국 그는 그 충격으로 죽고 만다.

의의 : 19세기 러시아 비판적 사실주의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특징 : 극적 반전을 통해 신랄한 현실 비판과 따뜻한 휴머니즘을 병립시키고, 사실주의적 기법과 풍자적 기법이 돋보임. 

 

내용 연구

그는 길 위에~눈여겨보지 않았고, : 들뜬 기분이 되어 주위의 사물을 자세히 보지 못하는 상태를 나타낸다.

자못 순진하게 이것은~억설을 늘어 놓기 시작했다 : 동료들의 요구와 찬사를 피하기 위해서 사리에 맞지 않은 핑계를 대는 모양을 묘사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너나 ~ 달려갔다. : 동료를 골려 먹이려는 짓궂은 심성과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일종의 군중심리를 보이고 있음

 

이해와 감상

 고골리는 러시아 사실주의의 어머니로 불리는 작가로서 하층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인생의 추악한 면, 비천한 양상, 우수꽝스런 양태를 드러냈다. 당시 러시아는 차르 체제하의 농노제 사회로 부패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 고골리는 이런 상태의 현실에서 벌어지는 비참하고 어처구니없어 웃을 수밖에 없는 일들을 사실적이면서 풍자적으로 형상화하여 비판적 리얼리즘의 대가가 되었다. 이 '외투'는 고골리의 작품 가운데에서도 가장 유명한 소설로서 그이 비판적 리얼리즘의 특질이 잘 나타나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작은 급료를 모아서 외투를 사려고 한다. 그는 그 때문에 밥을 굶기도 하고 다른 모든 욕망을 절제하며 성실하게 일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그가 외투를 입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그것을 강탈당하고 만다. 그는 경찰을 찾아가지만 그들은 유력자를 찾아가라고 하고 유력자는 호통만 친다. 결국 주인공은 외투를 되찾지도 못 하고 사회에서 멸시와 조롱만 받은 셈이 된다. 고골리는 이러한 어수룩한 인물을 등장시켜 당시의 부패한 사회 구조를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다. 학대받는 하층민의 삶의 애환 속에 드러나는 현실의 모순구조인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우리들은 모두 고골리의 '외투'에서 나왔다."라고 한 것은 음미할 만한 말이다.

 

이해와 감상2

  19세기 전반기(前半期)에 주로 활동한 고골리는 예리한 현실 묘사와 비판으로 독자에게 웃음을 불러일으키지만, 동시에 눈물을 맺게 한 작가이다. 그런 특징이 나타난 것은 그가 따뜻한 휴머니즘의 정신을 잃지 않은 작가인 까닭이다. 고골리의 이러한 작가 정신은 그 뒤를 이은 작가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톨스토이와 함께 러시아 최대의 작가로 추앙받는 도스토예프스키는 "우리는 모두 '외투'에서 나왔다."고 고골리의 영향을 높이 평가했다. 고골리의 영향은 러시아의 후배 작가들에게만이 아니라, 우리 나라의 작가들에게도 상당히 폭넓게 미쳤다. 위에 인용한 대목은 고골리의 외투 중 앞머리 부분인데, 이 부분에도 소외된 보잘것없는 이를 대하는 작가의 휴머니즘 정신이 생동하고 있다.

 "외투"는 당시의 관료 계급의 위선과 부패상을 풍자하고, 인간의 동정심을 유발시키는 하급 관리를 소재로 하는 박애주의 문학의 효시를 이루어 도스토예프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의 앞선 모델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외투"는 러시아 휴머니즘 문학의 진보를 한 걸음 앞당긴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고골리는 사실주의적 리얼리티에 고도로 접근하면서 아직도 낭만주의적 성향의 잔재(작품 후반부의 유령 이야기)를 덧붙이고 있는데, 이것도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매우 설득력 있게 처리함으로써 두 세계의 부조화가 극복되어 날카로운 풍자 뒤에 '한 가닥의 눈물을 곁들인 웃음'에 이르게 하는 데까지 성공하고 있다.

심화 자료

고골리[Nikolay (Vasilyevich) Gogol]

1809. 3. 31(구력 3. 19) 러시아 우크라이나 폴타바 근처 소로친치~1852. 3. 4(구력 2. 21) 모스크바. 우크라이나 출신의 러시아 소설가·유머작가·극작가.  장편 〈죽은 혼 Myortvye dushi〉과 단편〈외투 Shinel〉로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 전통의 토대를 이루었다.

초기생애와 작품

고골리는 다채로운 농민생활과 카자흐 전통, 풍부한 민속문화가 전래되어오던 우크라이나의 시골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 소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2세 때 네진의 고등학교에 입학하였고 이때부터 이미 풍자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시와 산문을 써서 잡지에 보내기도 하고 학교 연극에서 우스꽝스러운 노인이나 여자 역을 훌륭히 연기하기도 했다. 1828년 관리가 되려는 꿈을 안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갔으나 돈과 연줄 없이는 살기 힘들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되었다. 배우가 되려고도 했으나 채용심사에서 떨어졌다. 이처럼 궁지에 몰리자 이번에는 시인으로 이름을 빛내겠다는 야망으로 고등학교시절에 썼던 평범한 감상적 전원시를 자신의 비용으로 출판했다. 그러나 그 또한 실패하자 시집을 모두 사서 태워버린 뒤 미국으로 건너가려고 생각했다. 그는 농장을 저당잡혀서 어머니가 보낸 돈을 갖고 독일의 항구 뤼베크로 가는 배를 탔다. 그러나 미국에 가지는 못하고 독일을 여행했을 뿐이었고 곧 돈이 떨어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다시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거기서 형편없는 봉급을 받고 관리로 일하다가 3개월 만에 자리를 옮겼다.

그동안 우크라이나에서 보낸 어린시절을 회상하며 도피삼아 가끔씩 글을 써서 신문과 잡지에 보냈다. 기억 속의 화창한 전원풍경과 농부들, 떠들썩한 마을 아이들, 우크라이나 민속에 등장하는 도깨비와 마녀들 및 환상적이고 마력을 지닌 정령(精靈)들을 다룬 이야기를 썼다. 지난날의 낭만적 이야기가 현재 벌어지는 실제 사건들과 한데 어우러지고, 장난스럽고 때로는 악마적인 고골리의 기질이 나타나 있는 8편의 이야기는 1831~32년에 〈디칸카 근교 야화(夜話) Vechera na khutore bliz Dikanki〉라는 제목의 2권짜리 단편집으로 나왔다. 간간이 구어체를 섞어 쓴 생생한 이야기는 러시아 문학에 신선함과 새로움을 더해주었다. 우크라이나 토속어에서 배어나는 풍부한 민속적 정취는 저자의 변덕스러운 억양변화와 더불어 러시아 문단을 사로잡았다.

원숙기 활동

고골리는 젊은 작가로서 하루아침에 유명해졌다. 이미 만났던 시인 알렉산드르 푸슈킨과 바실리 주코프스키에게 찬사를 받기 시작했고, 이어 작가 세르게이 악사코프와 비평가 비사리온 벨린스키에게도 인정받게 되었다. 그는 1년 남짓한 관리생활을 마감하고 여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1834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의 중세사 조교수로 임명되었으나 자신이 그 직위에 알맞지 않다고 판단, 1년 뒤 그만두었다. 한편 열심히 다음 작품을 준비하여 1835년에는 〈미르고로트 Mirgorod〉· 〈아라베스키 Arabeski〉를 출판했다. 〈미르고로트〉에 실린 이야기 4편은 〈디칸카 근교 야화〉의 후편으로 썼으나 거기에서 드러난 낭만적 도피주의는 고골리의 인생관과 큰 대조를 이룬다. 카자흐의 과거를 그린 훌륭한 작품 〈타라스 불바 Taras Bulba〉는 현재로부터의 도피를 뚜렷이 나타내는 반면 〈이반 이바노비치와 이반 니키포로비치가 싸운 이야기 Povest o tom, kak possorilsya Ivan Ivanovich s Ivanom Nikiforovichem〉는 풍부한 유머에도 불구하고 존재의 비천함과 보잘것 없음에 대한 신랄한 풍자로 가득 차 있다. 〈옛 세계의 지주들 Starosvetskiye pomeshchiki〉처럼 목가적인 모티프의 작품에서도 먹을 것에 대한 끊임없는 탐욕으로 결국 서로 미워하게 되는 노부부에 대한 풍자 때문에 목가성은 희미해진다.

세상에 적응할 수도, 도피할 수도 없기 때문에 속됨과 악을 들추어내려고 더욱 애쓰게 된 한 낭만주의자의 공격적인 사실주의는 페테르부르크 이야기와 수필 몇 편이 함께 실린 2번째 작품 〈아라베스키〉의 페테르부르크 이야기 전체에 걸쳐 두드러진다. 여기에 실린 〈광인일기 Zapiski sumasshedshego〉에서는 철저하게 좌절한 나머지 과대망상 속에서 좌절을 보상받으려 애쓰다가 마침내 정신병원에 보내지는 한 관리를 주인공으로 제시하고 있다. 〈네프스키 거리 Nevsky prospekt〉에는 비극적이고 낭만적인 몽상가와 모험을 좋아하는 속물이 대조를 이루며, 개정판 〈초상화 Portret〉의 끝부분에서는 이 세상에서 악은 제거될 수 없다는 작가의 신념이 강조되어 있다. 1836년 고골리는 푸슈킨이 주간하는 문학잡지 〈소브레멘니크 Sovreemennik〉에 해학이 넘치는 풍자적인 단편 〈사륜마차 Kolyaska〉를 실었다. 흥미진진하면서 신랄한 초현실적 단편인 〈코 Nos〉도 이 잡지를 통해 발표되었다. 그와 푸슈킨은 매우 소중한 친교를 유지하여 고골리는 항상 푸슈킨의 심미안과 비평을 신뢰했고 그에게서 러시아 문학과 자신의 운명에 큰 영향을 끼친 중요한 작품 〈검찰관 Revizor〉·〈죽은 혼〉의 테마를 얻었다.

위대한 희극 〈검찰관〉은 니콜라이 1세 때의 부패한 관료제도를 무자비하게 풍자하고 있다. 어느 지방도시의 관리들이 잘 차려입은 건달을 암행검찰관으로 잘못 알고 심한 행정폐해를 감추기 위해 뇌물과 연회를 베풀어 그의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려 애쓴다. 가짜 검찰관이 떠나고 성공했다고 좋아하는 사이에 그들을 공포에 휩싸이게 만든 진짜 검찰관의 도착소식이 알려진다. 이처럼 고발성을 띤, 이른바 '눈물을 통한 웃음'을 자아내는 희극은 황제의 특별명령으로 1836년 4월 19일 초연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보수적인 언론과 관리들에게 크게 비난받았고 고골리는 로마로 피신, 1842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이탈리아는 어느 정도 가부장적인 엄격한 기질과 성향을 가진 그에게 매우 매력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곧 로마에서 작업하고 있던 종교화가 알렉산드르 이바노프와 친해졌다. 여행중인 러시아 귀족들도 만났으며 가톨릭으로 개종한 망명귀족 지나이다 볼콘스키와도 자주 만나 그녀의 모임에서 종교적 주제로 많은 토론을 하기도 했다. 그의 최대 걸작 〈죽은 혼〉도 이곳에서 썼다.

작가가 '서사시'라고 부르는 이 소설은 봉건 러시아의 농노제와 관료적 부패를 반영하고 있다. 주인공 치치코프는 몇 번의 우여곡절을 겪은 뒤 벼락부자가 되기를 꿈꾸는 세련된 사기꾼이다. 그는 여러 지주들에게서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자 명부에 등록되지 않은 채 살아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 농노(러시아어로는 '영혼'을 뜻하기도 함)들을 사들일 영악한 계획을 세운다. 지주들은 다음 인구조사 때까지 죽은 농노 몫으로 부담해야 할 재산세가 줄어들게 되어 매우 좋아한다. 치치코프는 죽은 '영혼'들을 담보로 은행에서 돈을 마련한 뒤 먼 곳으로 가서 존중받는 귀족으로 살 작정이었다. 그가 처음 들른 지방 사람들은 그의 정중한 몸가짐에 반하고, 지주들은 부정한 거래인줄 알면서도 기꺼이 죽은 농노를 팔려 한다. 그로테스크할 정도로 해학적인 거래를 통해 농노들이 가축처럼 팔리는 러시아의 슬픈 현실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사업의 비밀이 드러나자 치치코프는 서둘러 그 마을을 떠난다.

〈죽은 혼〉은 1842년에 출판되었다. 같은 해에 그의 선집 초판이 나왔으며 거기에는 쾌활한 희극 〈결혼 Zhenitba〉과 단편 〈외투〉가 포함되어 있다. 〈외투〉는 엄청난 희생을 치른 끝에 멋진 외투를 마련한 어느 가련한 관청서기의 이야기로 그는 외투를 도둑맞자 너무도 상심한 나머지 죽어버린다. 이 보잘것 없는 남자의 비극은 아주 의미심장한 여러 사건을 통해 전개되고 있는데, 훗날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를 두고 모든 러시아 사실주의 작가는 '고골리의 외투자락 속에서' 나왔다고 선언했다. 고골리의 명성은 〈죽은 혼〉을 계기로 최고에 달했다. 벨린스키류(類)의 민주적 지식인들은 이 소설이 자신들의 자유주의 열망과 같은 정신을 가득 담고 있음을 발견했다. 푸슈킨이 비극적으로 죽은 뒤 고골리의 인기는 한층 높아졌다. 그는 이제 러시아 문학의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고골리는 나름대로 자신의 지도적 역할을 독자적인 입장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자신의 사회고발이 낳은 웃음의 긍정적인 결과를 확인한 그는 신이 그에게 위대한 문학적 재능을 주신 목적은 웃음을 통해 사회악을 응징하고 악한 세상 속에서 러시아 국민들이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밝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믿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죽은 혼〉 후속편 집필에 착수하였다. 이는 〈신곡〉과 같이 이미 발표된 부분을 러시아 생활의 '지옥편'으로, 제2부 및 치치코프가 도덕적으로 거듭나는 제3부를 '연옥편'과 '천국편'으로 쓸 계획이었다.

창조력의 쇠퇴

그러나 이 영혼구제사업을 시작한 그는 불행하게도 자신의 창조적 재능이 사라져버렸음을 발견했다. 10년도 넘게 제2부를 썼으나 결과는 빈약했다. 제4장까지와 제5장의 일부분이 그의 서류 속에서 발견되었는데, 부정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인물들은 강도있게 묘사되었으나 그가 그토록 찬양하고자 열망했던 도덕적 인물들은 생명력이 없고 과장되게 표현되었다. 고골리는 이것을 신이 자신에게서 동족구원의 목소리를 거두어간 증거라고 해석하고 이제 작가로서가 아니라 교사나 설교자로서 러시아 국민들의 도덕과 생활의 향상을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음을 증명하려 애썼다. 이렇게 해서 쓴 것이 그의 불운한 작품 〈친구와의 왕복서한 발췌문 Bybrannyye mesta iz perepiski s druzyami〉(1847)이다. 이 32편의 담화모음집은 보수적인 러시아 교회와 바로 몇 해 전 그가 그토록 무자비하게 비판했던 지배권력을 찬양하고 있다. 한때 그에게 찬사를 보냈던 사람들에게서 격렬한 비판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특히 비평가 벨린스키는 분개하여 쓴 편지에서 고골리를 '채찍의 설교자이자 반계몽주의와 사악한 탄압의 옹호자'라고 비난했다. 이 모든 상황으로 말미암아 극도로 낙심한 고골리는 신의 총애를 영영 잃어버렸다고 더욱 믿게 되었다. 기도와 금욕생활을 더 열심히 했으며 1848년엔 팔레스타인 순례길에 오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는 마치 저주받은 영혼처럼 여기저기 떠돌다가 마침내 모스크바에 발을 붙였다. 그곳에서 마트메이 콘스탄티노비치라는 광신적 사제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명령에 따라 1852년 2월 24일(구력 2. 11)에 〈죽은 혼〉 제2부를 태워버렸다. 그리고 10일 뒤 고골리는 반미치광이 상태에서 죽었다.

영향과 평가

고골리의 생각이나 삶은 기이했지만 그가 러시아 문학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대단하다. 무엇보다 벨린스키가 '수사학파' 또는 '낭만주의 학파'와는 대조적으로 앞으로 러시아 소설의 방향에 큰 영향을 줄 '자연주의 학파'의 강령을 이끌어 낸 것은 바로 고골리의 〈검찰관〉·〈죽은 혼〉·〈외투〉 같은 작품에서이다. 고골리는 처음으로 러시아의 참모습을 그려낸 작가였으며 보잘것 없는 소인(小人)을 문학의 주인공으로 형상화시킨 작가였다. 레프 톨스토이와 이반 곤차로프, 이반 투르게네프로 이어진 푸슈킨의 고전적·사실주의적 산문과는 대조적으로, 고골리의 화려하고 격앙된 문체는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를 거쳐 상징주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안드레이 벨리에게 이어졌으며 혁명 이후의 몇몇 소비에트 작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고골리의 고발성 사실주의가 낳은 많은 추종자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풍자작가는 살티코프 시체드린이다. 그 역시 문학의 영웅으로서 보잘것 없는 사람을 위해 싸운 투사였다. '단순한 문학'을 뛰어넘으려는 노력에서 그가 겪은 정신적 고통을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가 이어받아 한층 높은 수준으로 고양시켰다.(출처 : J. Lavrin 글 | 吳叔恩 옮김, 브리태니커백과사전)

고골리와 사실주의 문학

고골리의 초기 작품은 낭만적이고 괴기적인 소설이었다. 말하자면 그의 초기 작품은 우크라이나 지방의 민속 신앙을 토대로 향토적 색채와 서정성이 짙은 작품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푸슈킨의 뒤를 이어 가난한 러시아 평민의 삶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그의 작품은 사실주의로 기울기 시작했다.

특히 농노제와 관료주의의 부패에 대한 비판과 조소의 경향이 짙은 작품을 많이 발표함으로써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창시자가 되었으며, 문학과 현실의 접목에 성공했다. '외투', ' 검찰관', 죽은 혼', '대장 브리바' 등은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금자탑이 되었다. (출처 : 남미영 외 4인저 동아서적 문학)

고골리 문학의 3대 특징

① 러시아 사실주의의 완성자 : 고골리는 러시아 근대 문학의 아버지인 푸슈킨이 세워 놓은 사실주의에 보다 뚜렷한 양상을 부여하여 러시아 사실주의를 완성했다. 그래서 흔히 푸슈킨을 러시아 사실주의의 아버지요, 고골리를 사실주의의 어머니로 부른다.

② 하층민의 삶을 소설화 : 고골리의 특징은 예술의 대상을 상류의 귀족에서 끌어내려 가난한 관리, 뒷골목의 화가, 윤락가의 창녀, 소작농의 생활을 창작의 소재로 삼았다. 그래서 인생의 추악한 면, 비천한 면, 우스꽝스러움을 묘사했다. 그는 이런 면의 묘사를 통해 인생의 모순을 강조했다.

③ 조소(嘲笑)의 문학 : 고골리는 자신의 재능에 관해서 "나에게는 두 가지 재능이 있다. 하나는 서정적 재능이고, 또 하나는 조소적 재능이다."라고 했다. 그의 조소적 재능은 '외투', '검찰관' '죽은 농노' 등에 잘 나타난다. 그는 러시아 문학의 독특한 장르를 개척했다. (출처 : 남미영 외 4인저 동아서적 문학)

 

러시아의 사실주의 문학

 러시아에 있어서의 사실주의의 발생 요인은 산문의 발달과 그것을 가능케한 저널리즘의 성장이다. 러시아의 위정자는 농노 제도와 전제 정치에서 오는 사회의 모순을 바로 잡을 노력을 하지 않았다. 이러한 전제 정치 속에서 국민은 자신의 정치적 발언을 문학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러시아의 환경은 러시아 문학을 높은 사상적인 것으로 만든 요인이다. 다시 말해서 러시아의 사실주의는 러시아의 암흑 정치에서 형성된 것이다. 러시아 문학이 러시아 국민의 계몽적이며, 사회 교훈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 특징이며, 이것은 다른 나라 문학과 다른 특징이기도 했다. (출처 : 남미영 외 4인저 동아서적 문학)

 

사실주의(寫實主義)의 개념

(1) 어원

 사실주의 원어인 'realism'은 '실물(實物)'을 뜻하는 라틴 어 'realis'에서 유래하였다. 관념과 상상에 대립되는 이 말은 원래 철학적인 용어로 실재론(實在論)을 의미한다. 플라톤이 자연의 원상(原象)인 이데아를 말한 것이 실재론의 기원이며, 이 개념과 문학상의 리얼리즘은 상반되는 뜻을 갖는다. 이같이 원래의 말뜻과 문학적 리얼리즘의 의미가 달라지게 된 것은 그 개념이 보편 논쟁 등을 통해 의미에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2) 정의

 사실주의는 서양 근대 문학에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이후에 나타난 사조로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충실히 묘사하는 것을  기본 방침으로 하는 현실주의적인 문예 사조이다. 프랑스의 발자크, 스탕달, 러시아의 고골리, 영국의 디킨즈 등에 의해 발전 사조로서 일부러 미적이고 조화된 것을 찾기보다 추악하고 불쾌한 현실을 실제 대로 제시하며, 관념적인 유형보다 구체적인 개성을 중시하며, 이상주의와 같이 선택적, 수식적이 아니라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묘사를 추구한다.

2. 사실주의의  시대적 조건

(1) 사회의 상태

 사실주의는 낭만주의 시대와 거의 중첩된다. 그러나 낭만주의의 시대적 조건과 달리 사회적 현실의 문제가 사람들의 보편적 관심사로 대두하고 있다. 첫째 산업 혁명이후 전개된  자본의 지배가 좀더 철저하고 현저하게 된 현실이다. 사회의 지배 세력이 완전하게 부르주아 계층으로 확정된 상황에서 경제의 논리가 사람들의 개인적 특성과 자율성을 침해하는 양상이 심화되었다. 둘째로 사회 갈등이 표면화되면서 사회의 불합리와 모순에 대한 인식이 싹트게 되었다. 사회의 풍속과 구조가 전체적으로 문제적인 사항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셋째로 저널리즘이 발달하기 시작하여 사람들에게 자기 주위의 문제에 대한 일정한 정보를 제공하여 세계에 대한 관심을 자극하였다. 넷째로 작가와 독자의 관계가 변화되어 작가는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구속되지 않고 자신의 관점에서 사회에 대한 인식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2) 상상적 배경

 사실주의의 사상적 배경을 한 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이는 사실주의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전통에서 싹튼 것과 마찬가지로 그 사상적 배경도 계몽주의에서부터 시작하여 근대의 합리주의, 과학에서의 실증주의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사실주의의 철학적 근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서 특히 근대 이후의 비약적인 발전을 한 과학, 사회학, 심리학 등은 뒷날 사실주의의 방법에 중요한 자료들을 마련해 준다. 이와 함께 철학에 경제학을 포함하기 시작한 헤겔의 포괄적인 철학이나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이후 발전한 사회주의 사상도 일정한 연결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 밖에 다원의 진화론도 사실주의에 일정한 영향을 준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3. 사실주의 문학 이론

 과학적인 사고가 발전하고 사회에 대한 이해가 증진되면서 문학에 사실주의 이론의 한 양상을 드러내는 겨우가 많았다. 예컨대 텐은 문학을 결정하는 요소로서 종족, 환경, 시대를 들고 있는데 이관점이 일정하게 사실주의 이론에 원용된다. 즉 텐은 문학이 사회의 풍속을 그려야 한다는 관점을 제시했다. 종래 자연의 모방을 주장하던 데서 사회 현실의 풍속도를 그리는 방향으로의 전환은 프랑스의 발자크가 당대 역사의 서기이고자 한사실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이후 엥겔스는 사실주의가 세부적인 장면을 진실되게 묘사하는 외에 '전형적인 상황에서 전형적인 인물을 재현하는 문학'이라는 이론을 선보였다. 이는 사실주의가 단순히 세부적인 사실을 충실하게 묘사하는 문학이 아니라 사회의 핵심적인 문제의 전형적인 양상을 재현하는 문학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적인 명제를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4. 사실주의 문학의 전개

 (1) 프랑스의 사실주의

 고전주의가 극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낭만주의가 시에서 가장 뚜렷한 흔적을 남기고 있는 데 비해, 사실주의는 소설에서 꽃을 피운다. 소설은 프랑스에서도 계몽주의 시대에 아베 프레보 같은 작가의 작품에서 이미 사실주의적 양상을 지니게 되지만 18세기에 개인의 심리와 가정 생활에 대한 세밀한 묘사를 보인 리차드슨이 소설이 큰 영향을 끼친 이후 새로운 징조를 보이기 시작한다. 특히 영국의 역사 소설가 월터 스코트의 방법을 현재의 역사에 적용한 발자크의 방법은 사회를 움직이는 인간의 심리에 대한 탐구와 함께 사회를 전체로서 파악하는 방법을 개척하여 사실주의의 전형적인 수법을 보여 주었다. 그는 '인간희극'을 비롯한 여러 소설에서 프랑스의 풍속을 묘사했을 뿐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내밀한 심리가 벌이는 인간 드라마를 재현하고자 하였다. 그는 다양한 소재를 수집하고, 다채로운 장면을 제공하며, 개인들에게서 재현되는 사회 집단들의 동향을 통해 현실을 파악하고자 했다. 발자크와 함께 창작 활동을 한 스탕달은 등장 인물의 심리 분석에 관심을 쏟고 그들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어디에 있는지를 섬세하게 통찰하였다. 이후 프랑스의 사실주의는 플로베르와 같은 작가에 의해 묘사의 문학으로 변해 가면서 자연주의라는 상이한 문학 세계를 연다.

(2) 영국의 사실주의

 경험주의의 전통이 깊은 영국은 리차드슨, 필딩 등이 개척한 꼼꼼한 사실 묘사의 전통과 역사를 총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월터 스코트의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 이 전통을 이으면서 19세기에는 디킨즈, 새커리 등이 산업 혁명을 가장 먼저 성취하여 근대 사회의 면모를 일찍이 갖추고 있었던 영국의 현실을 제재로 한 이야기를 펼쳐 보여 주고 있다. 19세기 후반에 하디는 사회의 밑바닥에 깔린 서민 생활의 비참성과 애감을 깊이 있게 묘사하였다.

(3) 독일의 사실주의

 독일에서는 1830년 무렵에야 시민 계급 활동이 두드러지고 정치 참여를 위한 움직임도 구체화된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기계공업이 새로 발흥할 기운을 보이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쿠츠코의 경향 소설, 헤벨의 사실주의 희곡 등이 발표된다. 이밖에 켈러, 라베, 마이어 등이 사회적 변동이 격심해지는 독일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4) 프랑스의 사실주의를 계승한 것은 영국이나 독일이 아니라 러시아였다. 러시아 문학이라고 하면 사실주의를 연상하리만큼 1930년대부터 볼세비키 혁명 이후에 이르기까지 사실주의가 주류를 이루어 왔다. 유럽의 사실주의가 사회 현실의 묘사에 치중한 데 비해 러시아의 사실주의는 명석한 투시력과 영원한 환상을 지니고 있다. 대표적 작가로는 '검찰관', '죽은 농노', 등을 지은 고골리는 신비적 사실주의의 정수를 보여 준다. 또 '가난한 사람들', '이중인격',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를 지은 톨스토이 등도 대표적인 사실주의 작가였다.  이밖에 평론가인 벨린스키가 사실주의를 이론적으로도 해명하여 문학 창작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이처럼 러시아가 사실주의 문학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배경은 봉건적인 차르체제가 붕괴할 위험에 처해 있었고 서구적인 교육을 받은 인텔리겐치아들이 사회의 불만 세력으로 활동하고 있어 사회적 불안 요소가 팽배한 데서 찾을 수 있다.

5.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1) 자연주의의 개념

 철학에서는 자연 과학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물질을 유일한 존재라고 보는 실재론을 자연주의라고 한다. 문학에서는 사실주의의 뒤를 이어 싫증주의 사상을 배경으로 예술 행위의 기본이 되는 제 1원리를 자연이라 보고, 창작 활동의 근거를 자연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 문예사조를 말한다. 또한 1850년대의 사실주의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묘사하고 제시하고자 한 것이라면,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대상을 자연 과학자 또는 박물학자와 같은 눈으로 분석, 관찰하고 검토하고자 한 문예사조를 가리킨다.

(2)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발자크, 스탕달을 사실주의 작가라고 하는 데 비해 졸라, 모파상, 콩쿠르 형제를 자연주의 작가라고 한다. 전자가 현실을 세부적인 국면에서뿐만이 아니라 전체 사회와의 관련에서 파악하고자 한 것에 비해 후자는 전자의 방법을 발전시키려는 의미에서 자연 과학이나 싫증주의 철학의 방법을 문학에 도입하였다. 플로베르의 문학은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의 과도기적 양상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사조는 통상 1870년을 고비로 앞선 시기의 문학을 사실주의, 그 이후의 문학을 자연주의라고 분리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쉽게 구별되지 않는다. 관점에 따라서는 사실주의를 자연주의 안에 넣기도 하고, 자연주의를 사실주의 안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굳이 구분한다면 사실주의는 '인간 및 사회의 여러 현상에 대한 정확하고 완전하고 진지한 재현'을 특징으로 하면서 현실의 전체적인 방향성에 대한 깊이 있는 파악을 중요한 요건으로 하고 자연주의는 사실주의를 논리적으로 발전시키려 한 것으로서 '과학적 방법의 결정론을 채택하여 인생에 대한 해부와 분석'을 특징으로 한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현재에는 대체로 사실주의에 대한 비난의 뜻으로는 자연주의, 찬사의 뜻으로는 사실주의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인물이 갖추어야 할 구비 조건

일관성(consistency) : 변화를 수반하는 '동적 통일성(dynamicunity)'을 뜻한다. 예컨대, 인물의 일면적인 제시든, 다각적인 제시든 간에 그 인물의 전면모가 하나의 온전한 성격으로 구현되도록 노력한다.

보편성(university) : 보편성이란 '보편적인 경험' 및 '이해되는 인간적 의미'로 독자가 공감할 수 있고, 수긍할 수 있어야 한다.

수용성(acceptabiliy) : 등장 인물의 성격은 작품 전체의 의미에 포괄적으로 수용되면서 발전되어야 한다.

개연성(probability) : 등장 인물은 인간 행동의 허구를 구현하되, '있음직하지 않은 진실'이 아니라, '있음직한 허위'의 토대 위에서 그 활동 범위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신뢰성(credibility) : 등장 인물의 성격은 '갈등', '고백', '묘사', '서술' 등에 의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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