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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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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 해롤드 니콜슨

신화 시대의 외교

 

한 인간의 집단이 그들과는 이질적인 집단과의 관계를 질서 있게 처리한다는 의미로서의 외교는 우리의 역사보다도 훨씬 오래된 것이다. 16세기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최초의 외교관은 천사들로서 그들은 하늘과 땅 사이의 사자(使者)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현대의 사학자들은 이에 반대하는 견해를 가질 수도 있다.

유사 이전의 야만인들도 낮의 전투가 끝나면 부상자들을 모아들이고 전사자들을 매장하기 위해 휴전 시간을 갖고 싶어 했을 것이고 따라서 피차간에 협상을 갖고자 했던 계기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심지어는 크로마뇽인이나 네안데르탈인이 살던 태초에도 한 부족에서 파견된 사신이 그들의 뜻을 전하기도 전에 다른 부족에 의하여 잡아먹히는 일이 일어났더라면 서로 간의 협상이 심각하게 저해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러한 협상자들에게는 전사(戰士)들이 누릴 수 없는 특권과 면책을 허락하는 것이 좋다는 관행이 태고 적부터 수립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사절이나 사자들은 적절한 신임을 받을 수만 있다면 애당초부터 다소는 '신성 불가침한' 존재로 간주되었을 것임에 틀림이 없으며 이러한 관행으로부터 오늘날의 외교관들이 누리는 면책(免責)과 특권이 연유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원시 사회에서는 모든 이방인들이 위험하고 불순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유스틴 2세가 셀주크⋅터키인들과 협상하기 위하여 사절을 파견했을 때 그들은 있을지도 모를 병균을 몰아내기 위하여 우선 목욕 재계부터 해야만 했었다. 그들부족의 무격(巫覡)들은 전염병의 위험을 없애기 위해 향료를 태우고, 북을 두드리며, 그들이 알고 있는 모든 마법을 동원하여 무아의 경지에서 사절들 주변을 춤추며 돌았다. 몽고의 칸에게 파견되었던 사절들도 그를 알현하기 전에 불을 통과해야만 했으며 그들이 가져온 선물도 그와 비슷한 방법으로 살균되었다. 15세기까지만 해도 베니스 공국은 외국 사절과 통교(通交)하는 베니스인들을 유배 또는 처형하느라고 위협하였다. 심지어는 오늘날에도 모스크바나 테헤란에서는 몇 가지 금기의 의식을 유습으로 찾아볼 수 있다. 런던이나 그 밖의 선진 도시에서는 외국 사절이 지켜야 할 재계의 과정이 좀더 부드럽고 덜 노골적이었다.

고대 사회에서는 외국인과 특히 외국 사절에 대한 이와 같은 금기가 매우 광범하게 퍼져 있었으며 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러한 엄격한 절차를 완화시키기 위해서 특수한 기능을 가진 사람, 이를테면 부족이나 도시의 전령에게는 외교적 특권을 부여하는 관계가 생겼다. 이 전령들은 거의 종교적이라고 할만한 권위를 누렸고 허미즈신의 특별한 보호를 받았다. 전령을 보호하는 신이 허미즈신이었다는 사실은 그 후 외교를 담당하는 부서에 그다지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고대인들이 생각하는 허미즈신은 매력과 기만과 교활의 상징이었다. 그는 출생하던 바로 그 날 자신의 형인 아폴로신으로부터 50 마리의 소를 훔쳐 그것을 동굴속에 감춰둔 다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기의 요람으로 돌아와 잠들었다. 허미즈신의 이와같은 자질을 높이 평가한 제우스신은 아르고 암살과 같은 지극히 미묘한 외교적 업무를 그에게 맡기었다. 허미즈신은 친절하기는 하지만 여행자, 상인, 도둑에 대해서 턱없이 과대한 보호자라고 그리스인들은 생각하였다. 신화상의 최초의 여인인 판도라에게 아첨과 기만을 선물로 준 것도 바로 허미즈신이었으며, 전령들에게 우람한 목소리와 기억력을 준 것도 바로 그였다. 그는 천계와 지상을 이어 주는 중재자로 인식되었으며 폭넓은 인기를 얻긴 했지만 깊은 존경을 받지는 못했다.

그리스의 외교

 

신화 시대를 벗어나 역사 시대로 접어 들면 외교를 담당하는 사람들의 임무가 좀더 확실해지고 세간의 평가도 좋아진다. 호머 시대의 전령들은 단순히 협상을 위한 신임받은 요원일 뿐만 아니라 회의의 질서를 지키고 어떤 종교적 의식을 거행하는 등, 왕실의 일을 관리하는 기능까지 도맡게 되었다. 그리스의 문명이 발달하고, 도시 국가 간의 관계가 더욱 밀접해지고 경쟁이 치열해지자 협상의 기술도 훨씬 세련되게 되었다. 전령이라는 직업은 흔히 세습적이었으며, 유능한 전령이 되기 위해서는 뛰어난 기억력과 매우 우람한 목소리를 갖추어야만 했다. 몇몇 도시 국가 사이의 상업적·정치적 관계가 점차 복잡해짐에 따라서 원시적인 외교 활동의 기준을 향상시킬 필요가 높아졌다.

기원전 6세기 이래로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은 그 사회가 배출할 수 있는 가장 탁월은 외국인들이 조직한 연맹이나 도시들의 인민 집회에 참석하여 자기 도시 국가의 명분을 호소하는 것을 그 임무로 삼았다. 정부에서는 그들이 파견된 국가에 대한 정보를 수 있는 탁월한 연설이나 해주었으면 하는 것이 그들에 대한 기대의 전부였다.

투키티데스의 저술을 읽어 보면 그들의 연설이 얼마나 탁월하고 긴 것이었던가를 알 수 있다.

기원 전 5세기를 거치는 동안 그리스 도시 국가들 사이에서는 특수한 외교적 임무가 매우 빈번히 이루어져서 그 당시에 이미 오늘날 우리들의 정상적인 외교 교섭 제도에 가까운 어떤 유형들이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투키디데스는 그의 역사서 서장에서 그리스의 외교⋅교섭의 본질과 절차에 관하여 충분하고도 시사적인 자료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다. 스파르타인들이 아테네인들이 조약을 위배했는지의 여부와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응징해야 할는지의 여부를 결정하기 위하여 동맹국 회의를 소집하는 방법에 관해서도 투키디데스는 언급하고 있다. 이 회의는 기원전 432년에 스파르타에서 개최되었다. 투키티데스의 기록은 그리스의 외교 관행에 관한 매우 값진 자료들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다.

우선 절차상의 문제가 있다. 메가리와 코린트의 대표들은 스파르타 민회에서 긴 연설을 통해 그들이 아테네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를 개략적으로 설명했다. 그런 다음 주최측의 하단 요구에 따라 단상을 내려가고 민회에 참석한 전사들은 아테네에 대해서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인가에 관하여 논쟁을 벌인다. 전쟁을 찬성하는 주장이 표결에 붙여지고, 처음에는 박수로, 그리고 그 다음에는 다수결로 그것을 통과시킨다.

투키디데스의 기록에 나타나고 있는 두 번째의 흥미있는 사실은 당시 아테네의 대표들이 우연히 스파르타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테네의 대표들은 펠로폰네소스 동 맹의 가맹국들만으로 구성된 스파르타 회의에 초대받은 바는 없었다. 다만 그들은 '어떤 다른 업무'가 있어서 그곳에 왔었는데 그것은 아마 무역 조약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적국의 중대한 회의에 참석했을 뿐만 아니라 그 논쟁에도 참여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심지어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아테네에 대한 개전을 가결했을 때에도 아테네의 무역 대표들은 그들의 특수 업무가 완결될 때까지 스파르타에 체류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도시 국가들 사이의 일반적인 외교 관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진보적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스파르타 회의에 관한 투키디데스의 기록이 보여 주고 있는 바에 의하면 그리스인들은 5세기에 이미 항구적인 외교 관계를 위한 어떤 제도를 갖추고 있었고, 외교의 업무를 띤 임원들은 면책을 비롯하여 상당한 배려를 보장받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국가 사이의 관계는 단순히 계략이나 폭력으로 처리⋅조정할 수 없으며, 당장 눈앞에 있는 국가적 이익이나 일시적인 편의에 우선하는 어떤 묵시적인 '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로마의 외교

 

그리스인의 이러한 전통과 교훈은 로마인에게로 전수되었다. 로마인들은 협상술에는 특별한 재능을 타고나지 못했으며, 여러 세기에 걸쳐 남을 지배하는 동안 그들의 생활 양식은 외교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군대 기질적이요, 도시 건설업자의 그것에 가깝게 되었다. 나쁘게 말하면 그들은 적을 섬멸하고 추종자를 아끼는 원리를 발전시켰다. 그러므로 외교에 대한 로마인들의 공헌은 협상이라는 측면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국제법이라는 측면에서 찾아야만 한다.

로마인들은 로마인들 사이에만 적용되는 시민법과, 로마인과 이방인들 사이에 적용되는 국제법과 모든 인류에게 공통되게 적용되는 자연법을 수립했다. 로마인들은 조약을 신성한 것으로 여겼다. 카르타고 인들에 대한 언약을 위배하기 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목숨을 버린 레귤루스의 전설을 숭앙하는 점으로 볼 때 로마인들의 의식 속에는 약속이란 준수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깊이 뿌리박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자연법의 이상 속에는 오늘날 우리가 국제 행위라고 부르는 것의 어떤 본질이 들어있다. 자연법은 모든 인종, 모든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 권리와, 계약을 반드시 지킬 의무를 강조하는 동시에 조약의 해석은 단순히 문구에만 의거할 것이 아니라 평등과 이성에 대한 배려에 그 기초를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인들은 외교적 관행보다는 외교 이론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로마의 정치 제도는 숙련된 문서 보관인이라는 직업을 창출했는데 이들은 외교적인 선례와 절차의 전문가들이었다. 그러나 일단 로마 제국이라는 패업을 이룩하게 되자 다른 나라와 로마와의 관계는 외교적인 관점에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식민지적이고도 행정적인 관점에서 처리되었다. 사실상 로마인들은 숙달된 협상자들로 구성된 전문적인 기구를 만드는 데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협상의 기술이라든가 또는 고유한 의미로서의 외교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때는 로마제국 후기에 들어서이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완벽한 재능으로 그러한 기술을 행사하였다. 그들은 세 가지 방법을 구상했는데 첫째가 야만족들 사이에 적의를 불러일으킴으로써 그들을 약화시키는 이이 제이(以夷制夷)의 방법이었고 둘재가 조공(朝貢)과 아첨에 의하여 연방 부족과 인민들을 매수하는 수뢰의 방법이었으며 셋째가 이교도를 기독교적 교리로 개종시키는 종교적 방법이었다.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수단, 아라비아 그리고 아비시니아까지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고, 흑해와 코카서스의 부족들을 제어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세 가지의 방법을 나란히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동로마제국 후기에 불가리아인, 헝가리인 그리고 러시아인들의 위협이 닥쳐왔을 때에도 이와 같은 방법이 채택되었다.

외교적인 협상과 조정으로 쇠퇴해가는 국력을 보완하려던 동로마 제국 말기 황제들의 끊임없는 노력과 그들이 채택한 특수한 방법은 외교적 관행에 새로운 요소를 도입하였다. 인접해 있는 폭군들끼리 서로 다투게 함으로써 어부지리를 얻는 방법을 쓰기 위해서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로마 정부가 그들이 다루고자 하는 폭군들의 야심, 약점, 그리고 실력에 대해서 충분한 정보를 얻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였다. 따라서 동로마제국의 황제가 파견하는 사절들은 단순히 그 나라에 가서 자기 나라의 이익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내정과 그 나라와 제 3국과의 관계에 관한 충분한 보고서를 제출하라는 훈령을 받는 일이 생겼다.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지난날의 전령이나 웅변가와는 다른 제삼의 자질이 필요하게 되었다. 바로 훈련된 통찰력과 오랜 경험, 명석한 판단력이었다. 그리하여 직업적 외교관의 유형과 성격이 점차로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진보는 서서히 이루어졌다. 15세기에 이르러서야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은 상주 대사를 임명하기 시작했고 직업으로서의 외교가 일반적으로 인식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1815년에 이르러서야 외교관의 신분과 규율이 국제법에 의하여 확립되었다.

헤롤드 니콜슨/ 저서로는 '파리 평화 회의 회고', '외교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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