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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경이라는 감정 / 가리키 준조(唐木順三)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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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경이라는 감정 / 가리키 준조(唐木順三) 


신슈(信洲) 아쓰가 산의 서쪽 기슭, 표고 1,100m정도 되는 곳에 큰 샘이 하나 있다. 물의 양도 많고 물맛도 좋아, 마을 사람들은 이 물을 끌어다가 수돗물로 사용하고 있다. 샘 주위의 서너 평은 출입 금지 지역이다. 두랄루민 기둥을 세우고, 그 기둥에는 가시 철망을 어마어마하게 감아 놓았다. 은색의 두랄루민은 인공적인 느낌을 준다. 기둥 밑은 시멘트로 굳혀 놓았다.

지금은 사람 그림자도 없지만, 여름철에는 등산객이 많다는 것을 여기저기 널려 있는 음료수 깡통이나 샘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유리병으로 짐작할 수 있다. 군데군데 모닥불을 피운 자국도 남아 있다. 등산객들이 취사(炊事)할 물을 이왕이면 직접 샘에서 기르려고 하다 보니, 샘이 더럽혀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두랄루민과 가시 철망으로 샘을 보호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그럴 수박에 없다고 생각은 했지만, 내 마음은 편하지가 않았다.

삼나무·솔송나무·느티나무 등 수백 년이 된 나무들의 당당한 풍채에 비해, 이 가시 철망이나 두랄루민은 정말이지 궁상스러울 뿐만 아니라 추하고 천박했다. 이런 궁상스럽고, 추하고, 천박한 짓을 왜 하지 않으면 안되었을까? 이런 일을 하게 만든 인간의 행동거지가 추하고, 경박하고, 생각이 모자라기 때문이 아닐까? 옛날에 길 가던 나그네는 샘물을 소중히 알고, 정갈하게 간수했으며, 뒤에 찾아 올 나그네가 상쾌하게 쉬어 갈 수 있도록 마음을 썼다. 이는 여행객의 도덕이고 습관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생가에 버드나무를 심은 것도 나그네를 생각해서였다. 그 나무 그늘에서 땀을 식히고, 한숨을 돌리고, 다음 발걸음을 기운차게 내딛게 하기 위한 마음 씀씀이었다.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나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물에 대한 존경심이 없을 것이다. 갈수기(渴水期)에 물이 잘 안 나오면 그 때서야 물의 고마움에 대해 조금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때에도 수도국이나 시 행정(市行政)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는 게 고작일 것이다. 물도 수도 문제나 수자원 문제가 되었고, 정치적 문제 혹은 정치적 대상이 되어 버렸다. 현대에 있어, 이는 불가피한 일일는지 모른다.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불만이다. 현대에는 수많은 문제가 기계적이거나 정치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럼으로써 의심스럽고 신성한 것의 베일이 벗겨지고, 정체가 폭로되고, 대중의 비판에 의해 올바른 궤도에 오른 것도 많다. 이런 점을 인정하지만, 물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내 불만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샘가에 서서 두랄루민도 가시 철망도 필요 없던 시절을 생각한다. 옛 사람들은 논밭을 적셔 주고, 마실 물을 제공해 주는 샘이 있는 곳을 신성한 장소로 여기며, 감사하는 마음을 지녔을 것이다. 동시에 이해(利害)를 떠나, '심구무원주, 원궁수불궁(尋究無源水, 源窮水不窮)인 물에게서 어떤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것, 인간의 지혜나 힘을 초월한 무엇인가를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외경심을 지녔을 것이다. 신성한 장소는 더럽혀서는 안 된다. 소홀히 해서도 안 된다. 함부로 드나들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느끼고, 이를 자자손손(子子孫孫)에게 지키게 했을 것이다.

내가 '외경심' 이라 한 것은 무언가 위대한 것, 사람의 힘이나 지혜가 미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삼가고 어려워하는 마음가짐을 말하다. 최근 '대화'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이야기를 나누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 대화를 통해 일을 처리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대화로 만사 처리가 가능하다는 인간의 오만한 생각이 은연중에 내포되어 있다. 인간의 지식이나 힘으로 해결하지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신성하고 초월적인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외경'의 감정이나 정서가 급속히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샘물이 솟는 곳, 몇백 년 된 노목이 우뚝 서 있는 곳, 조상들이 외경하던 장소에, 주스통이나 사이다병을 버리고, 초콜릿 은박지를 버리고, 나무 껍질을 벗겨 자기 이름을 새기는 따위의 행위는 외경심을 상실한 데서 나오는 당연한 귀결(歸結)이다. 서로 깨끗한 물을 길으려고 수원지를 오염시키는 일도 생기고, 그래서 가시 철망으로 수원지를 둘러쌀 필요도 생긴다. 그리고도 그런 일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은 이를 공중 도덕의 결여라는 말로 설명한다. 공중 도덕의 결여는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쉽게 보이는 현상이다.

내가 문제삼는 것은 사회 도덕이나 공중 도덕 같은 인간과 인간 간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과 인간을 초월한 것과의 관계, 나와 나 이상의 그 무엇하고의 관계이다. 사회 도덕이나 공중 도덕은 교육, 텔레비전, 저널리즘 등을 통하여 서서히 나아질 수 있고 나아져 가고 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외경심이란 공중 도덕의 경우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 하면, 근대라는 시대는 이 '외경심', '두려움'을 없애려는 방향으로 발전하여 왔기 때문이다. 근대화란 바로 두려움의 감정이나 정서를 불식하는 과정이었다.

17세기 데카르트 이래 인간은 이성의 힘을 믿고, 이를 올바르게 사용하면 이 세상에 불가해(不可解)란 없다고 생각해 왔다. 즉, 이간의 지식이나 능력에 대하여 무한히 신뢰하는 방향으로 오늘날에 이른 것이다. 이것이 근대를 근대답게 만든 근본적 특징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간 이상의 것, 형이상학적인 것, 신성한 것은 인지가 덜 발달된 시대의 유물이나 무용지물(無用之物)로 간주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 이러한 것이 유럽 근대의 특색이다. 유럽은 과학 기술의 선진화(先進化)로 세계에서 우위를 점하였고, 유럽의 근대가 세계의 근대가 되어 왔다. 우리의 근대화가 촉진될수록 외경심 같은 감정은 청소년 사이에서 사라져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외경심 ― 두려워하고 삼가하는 마음 ― 은 자기를 초월한 존재와의 관계에서 자생하는 감정이다.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를 무용화(無用化)하고 거부함으로서 성립된 근대가 이 고도의 감정을 상실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 당연성이 정당하다고는 할 수 없다. 지금 우리는 근대라든가 근대화를 비판하고, 근대가 인간을 얼마나 왜소화(矮小化)시키고 미세화(微細化)시켰는가를 생각해야 할 때이다.

자연은 인간의 지식으로 쉽게 분석되고 해명될 만큼 얄팍한 것이 아니다. 웅대한 자연의 생명에 접하지 못하게 될 때, 인간의 삶은 그 깊이를 잃게 될 것이다. '심구무원수, 원궁수불궁(尋究無源水, 源窮水不窮)'이라는 한산시(寒山詩)중의 일절은 오늘날에도 그 심오한 의미를 상실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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