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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기에 가장 불행하고 슬픈 삶을 살았던 단종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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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기에 가장 불행하고 슬픈 삶을 살았던 단종 / 남성중 송기복 선생님

 

1. 조선 초 왕권 vs 신권 첫 번째 대결 - 1, 2차 왕자의 난

 

1392년 이성계가 왕위에 올라 조선왕조가 개창되었지만 그것은 이성계 개인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를 도와준 많은 인물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도전조준남은배극렴을 비롯한 사대부들이 밀의하고 도평의사사의 의결이란 형식을 거쳐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리하여 이들을 포함한 52명의 개국공신이 탄생하였으며 이밖에도 수많은 원종공신(原從功臣)과 회군공신(回軍功臣)이 책봉되었다. 이들 공신집단이 조선의 핵심적인 지배세력으로 등장하였음은 물론이다.

이들 사대부들은 유교적인 이상정치를 표방하여 자신들의 권익을 도모하려 하였다. 당연히 이들 공신세력들은 도평의사사의 요원이 되어 때로는 태조 이성계의 권한을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에 이성계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이의 약화를 시도할 필요가 있었다.

 

태조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정도전, 조준 등은 군사제를 개편하여 병권을 중앙에 귀속시키고, 사병을 국가체제에 흡수하여 시도하였다. 도평의사사의 기능을 축소시키고 지방의 모든 군현에 수령을 파견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하였으며, 한양으로 수도를 옮겨 새 왕조의 면모를 일신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그것은 태조가 정도전, 조준, 남은 등 일부 신하에게 지나친 권력의 남용을 허락하자 이에 다른 공신들의 불만이 커져 알력이 생겨난 것이다. 특히 태조의 다섯째 아들이면서 개국의 제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는 방원의 불만이 컸고 이러한 불만과 알력이 결국 2차례의 왕자의 난으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1차 왕자의 난은 태조 7(1398)에 일어났다. 그것은 왕위계승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태조의 전처인 한씨부인에게는 방우, 방과, 방의, 방간, 방원, 방연 등 6형제가 있었다. 그러나 한씨부인은 일찍 죽고 장남인 방우도 태조2년에 죽었다. 후처였던 강씨부인에게는 방번, 방석의 형제가 있었다. 늙은 태조가 막내인 방석을 세자에 책봉하자 방원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방원은 이것이 정도전, 남은 등의 책동에 의하여 이루어졌고 이들이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살해하였다. 그 리고 방석, 방번 형제까지 살해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였다.

 

그 후 방원은 자신은 왕위에 뜻이 없었음을 밝히기 위하여 세자 자리를 방과에게 양보하였다. 그리하여 정종이 즉위하였다. 정종은 형제간에 피를 본 한양을 떠나 개경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러나 얼마 후 재차 왕자들끼리 싸움이 벌어졌다. 이번의 싸움은 1차 왕자의 난으로 권력이 커진 방원에 대하여 셋째형인 방간이 도전한 데서 비롯되었다. 여기에는 1차 왕자의 난 때 방원의 편에서 큰 공을 세웠으나 일등공신에 피봉되지 못한 박포도 방간편에 개입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방원의 승리로 끝나 방간은 토산으로 유배되었다가 거기서 죽고 박포는 주살되었다.(정종 2 : 1400)

 

방원은 2차 왕자의 난이 끝난 직후 세자가 되어 사병의 혁파와 관제의 개혁을 통하여 왕권강화를 시도하였다. 공신과 왕자들이 거느린 사병을 국가로 편입시킴으로써 현저히 세력을 약화시켰다. 도평의사사를 없애고 의정부와 국왕의 비서기관인 승정원를 신설하여 정치와 군사를 분리시켰다.

 

정종211월 선위를 받아 방원은 태종(1400-1418)으로 왕위에 올랐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태상왕 이성계는 함흥으로 가서 오지 않았는데 여기서 함흥차사라는 말이 나오기도 하였다. 태조는 사부라고 할 수 있는 무학대사의 청을 받고 나서야 돌아왔다.

 

2. 조선 초 왕권 vs 신권 두 번째대결 - 계유정난

왕위에 오른 태종은 다시 관제개혁을 실시하여 의정부가 장악하고 있던 행정실무를 모두 6조로 이관하여 재상들의 손에서 분리 독립시켰다. 그리고 다시 한양으로 천도하였으며 왕이 직접 모든 일을 처결할 수 있는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을 확립하였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1418-1450)은 집현전을 설치하고 그 곳의 학사들을 우대함으로써 유교정치의 실현에 힘썼다. 세종은 태종대에 정비된 통치체제 위에서 조선건국의 주역이었던 사대부들의 이상과 주장을 존중하였다. 그리고 유교에 정통한 인재들의 선발과 육성, 유교문화의 진작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태종에 이어 세종 즉위 초에도 이어진 군왕중심의 유교정치는 관료정치를 이상으로 하는 유신들에게 불만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집현전 학사들은 재상중심 체제의 부활과 이를 통한 자신들의 정치참여를 희망하고 있었다. 이는 세종의 입장에서 달갑지 않은 것이었지만 마냥 무시할 수 없어 세종 186조직계제가 폐지되고 의정부 서사제가 부활되었다.

 

세종조 후반 집현전이 간쟁기관, 정치기관으로 변모하면서 집현전학사들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고 세자의 교육과 보필을 이들이 맡으면서 정치적 영향력이 더욱 강해졌다. 이 세자가 세종에 이어 즉위한 문종(1450-1452)이다.

 

문종대에는 세자시절 그를 보필하였던 집현전 학사들의 위치가 절정에 달하였음은 물론이다. 세종처럼 학문을 좋아했고 문장도 좋았으며 글씨 또한 잘 썼던 문종은 병약하여 단명하였고 12살의 나이로 단종(1452-1455)이 왕위에 오르면서 사태는 상당히 복잡하게 전개되어 갔다. 미성년의 어린 임금이 즉위하면 궁중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대비가 섭정을 하는 것이 관계였지만 단종에게는 섭정을 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문종은 세종대 이후 줄곧 재상을 지냈던 김종서, 황보인, 남지 등 3정승과 집현전출신 관료들에게 어린 단종을 부탁하였으므로 단종 즉위초 이들 재상들이 모인 의정부의 권한이 커져 왕권은 실추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가운데 실추된 왕권을 회복시키려는 움직임이 세종의 둘째아들이며 단종의 작은아버지인 36세의 야심찬 수양대군(首陽大君)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할아버지 태종을 닮아 의 인물인 그에게 필요한 책사가 바로 한명회였다. 한명회는 여말선초의 명문가인 청주 한씨 공신 가문이었지만 번번히 과거에 낙방하여 산천을 유람하며 울분을 삭히던 한명회는 결국 자존심을 꺾고 만 37세에 음서로 경덕궁직이란 일종의 문지기자리를 얻었다. 한명회와 친구인 권람도 겨우 만34세에야 과거에 급제한 늦깎이로서 당시의 엘리트들을 정상적으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처지였다. 능력은 있으나 출세를 하지 못한 울분을 지닌 권람, 한명회 등은 수양대군을 기회로 여겼다. 무사들을 불러모아 기회를 노리던 이들은 1453(단종1) 10월 김종서, 황보인 등의 중신과 자신의 친동생인 안평대군을 살해하였다. 그리고 영의정 및 이조병조의 판서와 내외병마도통사의 직을 겸임함으로써 정권과 병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발도 거세 김종서의 심복으로 함경도 도절제사였던 이징옥이 반란을 일으켜 대금국 황제를 칭하고 여진을 포섭하여 대항하였다. 비록 진압되었지만 민심은 흉흉했다. 1455년 윤6월에 수양이 조정의 제신들과 의논하여 왕의 측근인 금성대군 이하의 여러 종친, 궁인 및 신하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 각 지방에 유배시키기를 청하자 단종은 하는 수 없이 따랐다. 이러한 급박한 정세에 단종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는 상왕이 되어 수강궁으로 옮겨 살았다. 드디어 수양대군이 왕위에 올랐으니 곧 세조(1455-1468)이다.

 

3. 역사의 라이벌 성삼문 vs 신숙주

이러한 세조의 즉위에 대하여 대부분의 집현전 학사들은 반대하였으나 일부는 이를 용인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전자의 대표자가 성삼문이라 할 수 있고 후자의 대표자는 신숙주였다.

 

성삼문은 충청도 홍성출신으로 무반이었던 승의 아들이었는데 태어날 때 하늘에서 났느냐?”고 하는 소리가 세 번씩이나 드려 이름을 삼문이라 지었다고 전한다.

 

과거에 급제한 성삼문은 1442년 집현전 학사로 뽑혀 박팽년, 신숙주, 하위지 등과 같이 학문을 연마했다. 세종의 깊은 신임을 받으며 훈민정음 창제과정에도 관여하였다.

 

이들 집현전 학사들이 갖는 상징성을 고려한 수양대군은 정난공신(김종서 등을 죽인 계유정난의 공신)과 좌익공신(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신)에 집현전 학사들을 다수 책봉하여 부족한 유교적 대의명분을 보완하고 집권을 합리화하고자 하였다.

 

어쨌든 단종이 경회루에서 국새를 수양에게 전함으로써 수양대군은 왕위에 올랐다. 이 때 승지로서 왕명에 의하여 할 수 없이 옥새를 수양에게 건제주어야 했던 성삼문은 목을 놓아 통곡하여 수양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고, 박팽년도 분을 이기지 못해 경회루 앞 연못에 몸을 던지려 하였으나 성삼문의 만류로 후일을 도모하였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성삼문을 비롯한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등의 학사들과 무인이었던 성승, 유응부, 김질, 그리고 단종의 외숙 권자신 등은 단종복위를 노렸다. 세조 2(1456) 6월 세조가 세자와 같이 명나라 사절을 창덕궁에서 맞는 것을 기회로 성승, 유응부 등이 별운검(別雲劍 : 왕이 행차할 때 옆에서 칼을 들고 호위하는 무관)이 되어 거사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그러나 한명회의 만류로 별운검을 들이지 않게 되자 이들은 후일을 기약하며 거사를 연기하였다. 그러나 누설될까 두려워한 김질이 장인 정창손에게 이를 알리고 이것이 세조에게 고해지면서 모조리 잡혀가게 된다.

 

끝까지 세조를 인정하지 않던 성삼문을 비롯한 거사자들은 형장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성삼문은 이 때 심정을 시로 읊었다.

 

울리는 저 북소리 운명을 재촉하는데 擊鼓催人命

머리를 돌이키니 서산에 해가 저문다 回頭日欲斜

황천가는 길엔 주막도 없다는데 黃泉無一店

오늘 밤은 뉘 집에서 자고 갈거나 今夜宿誰家

 

 

또한 죽기 직전 하인의 술 한잔을 마시고 읊었다는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라는 시는 지금도 우리의 심금을 울려주고 있다.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 또한 시 한 수를 남겼다.

 

임이 주신 밥 먹고 옷을 입었으니 食人之食衣人衣

일평생 그 마음을 어길 수 있으랴 所一平生莫有遠

한 번 죽음이 충의인 줄 나는 아네 一死固知忠義在

현릉의 소나무 잣나무가 꿈속에 아른아른거리누나 顯陵松柏夢依依

 

* 현릉은 문종과 그 비의 무덤

 

이리하여 성삼문은 동지였던 박팽년, 이 개, 하위지, 유응부 등과 함께 사형 당했고, 유성원은 자결하였다. 이들이 바로 사육신(死六臣)’이다.

 

이개도 형장으로 가는 수레 위에서 시 한 수를 읊조렸다.

 

우임금 솥처럼 정사가 무거울 때는 삶 또한 크지만 禹鼎重時生亦大

기러기 털처럼 가벼울 때는 죽음 또한 영화로세 鴻毛輕處死有榮

새벽도 덜 깼는데 문 밖에 나서니 明發不寤出門去

현릉 송백만이 꿈속에도 푸르구나 顯陵松柏夢中靑

 

단종은 이 사건에 관계되었다 하여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하여 영월의 청령포로 귀양을 보냈고 대비 송씨도 부인으로 강등되었다.

 

이 때 단종을 호송한 금부도사 왕방연은 청령포에 단종을 가두고 떠나기 전날 곡탄 언덕 위에 앉아 슬픈 노래를 불렀다.

 

천만리 머나먼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단종은 영월에서 유폐생활을 하는 동안 매양 관풍매죽루에 올라 시를 지어 울적한 회포를 달래기도 하였다.

 

달 밝은 밤 자귀새 울어 시름 못 잊고 매죽루 다락에 기대었네

네 슬피 우는 소리 내 듣기 괴롭구나 그 소리 없으면 내 시름 없을 것을

이 세상 괴로운 이에게 내 말 전하노니 춘삼월 자규루에는 오르지 마소

月白夜蜀魂瞅 含愁情倚樓頭

爾啼悲我聞苦 無爾聲無我愁

寄語世上苦勞人 愼莫登春三月子規樓

 

단종이 지었다는 시 한 수 더

 

원통한 새 한 마리 궁에서 쫓겨난 후 외로운 몸 그림자 한 자락 푸른 산 헤매네

밤마다 자려 하나 잠은 오지 않고 해마다 한을 없애려 하나 없어지지 않는구나

울음소리 끊어진 새벽산엔 어스름 달 비추고 봄 골짝에는 피 토한 낙화가 붉도다

하늘은 귀먹어서 이 하소연 못 듣는데 어쩌다 서러운 이 몸은 귀만 홀로 밝았는가

一自寃禽出帝宮 孤身隻影碧山中

假眠夜夜眠無假 窮恨年年恨不宮

聲斷曉岑殘月白 血流春谷落花紅

天聲尙未聞哀訴 胡乃愁人耳獨聰

 

세조의 아우 금성대군도 단종이 일찍이 그 집에 묵은 일이 있다 하여 순흥부로 귀양보냈다. 그러나 얼마 후 순흥부사 이보흠이 금성대군과 더불어 단종을 복위하려 하다 발각되어 금성대군은 사약을 받고 죽었다. 단종도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강봉되었다가 10월에 마침내 죽음을 당하였다.

 

이렇듯 세조의 살육이 계속되면서 민심이 흉흉해지자 김시습, 남효온, 이맹전, 원호, 조여, 성담수 등은 폐인을 자처하면서 세조를 비난하였으니 이들을 일명 생육신(生六臣)’이라 한다.

 

성삼문 등 사육신이 죽자 아무도 그들의 시신을 수습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이 밤중에 사람의 눈을 피해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냈다. 이것이 현재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 묘이다. 충남 은진에도 성삼문의 묘가 있는데 이것은 상삼문을 거열(車裂)형에 처하고 이를 전국에 조리돌릴 때 한 다리를 묻은 곳이라 전한다.

 

신숙주는 1417년 전라도 나주에서 태어났다. 호는 희현당, 보한재.

그는 스물두 살 때 진사시에 장원급제하고 이듬해 생원시와 문과에 급제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고 스물 다섯부터 집현전에 근무하면서 세종의 총애를 받았고 동국정운사성통고등의 편찬 주역이었다.

 

단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 신숙주의 생애는 일대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문종의 부탁을 받은 김종서, 황보인 등은 왕에게 올릴 문서가 있으면 먼저 보고 노란 점을 쳐서 올리면 단종이 그에 따라 붓으로 낙점을 하는 이른바 황표정사를 했다. 여기에 대해 6조의 관리, 집현전 관리 뿐 아니라 대군들도 불만을 갖게 되었다. 특히 단종이 즉위 후 발표한 분경금지법(奔競禁止法)은 대군들의 불만을 부채질하였다. ‘분경이란 사람들이 벼슬을 얻기 위해 집정자의 집에 드나들면서 아첨하고 뇌물을 주는 행위를 말한다. 의정부대신과 달리 사람들을 제도적으로 만날 수 없었던 대군들은 불만이 높아졌고 계유정난 발생의 한 원인이 되었다.

 

신숙주가 계유정난을 묵인하고 수양의 등극을 도와주게 된 이유를 추측해보면

첫째, 수양와 동갑으로 같은 해에 태어났다는 동료의식도 어느 정도 있었을 법하고

둘째, 수양과 같이 4개월간 명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친분이 쌓이고 설득 당했을 수 있고

셋째, 계유정난의 주역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 인연도 클 것이다. 권람은 신숙주가 과거를 관장할 때 뽑힌 인물이며 한명회와는 세조 즉위 직전 사돈관계를 맺었다.

 

신숙주와 성삼문의 행위는 누가 더 옳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당시의 상황은 지배세력의 교체가 필요한 혁명적 상황이 전혀 아니었으므로 이 둘은 각기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행동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성삼문도 김종서 제거에는 크게 반발하지 않다가 단종 복위에 적극 가담하였는데 만일 성공하였다면 크게 출세했을 것이다. 결국 단종의 폐위나 세조의 즉위는 민중들의 생활과는 별 상관없는 단순한 지배세력의 교체에 불과하였다.


도움글

 

단종의 죽음을 극적으로 만드는 일화가 전해진다.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받들고 영월에 이르렀으나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이를 본 관노인 통인 하나가 활줄로 단종의 목을 감아 창구멍으로 당겨 죽였다. 그러나 그 통인도 방안을 나서기 전에 육신의 아홉 구멍에서 피가 흘러 즉사했다 한다.

 

단종이 죽었으나 세조가 두려워 아무도 돌보지 않자 당시 호장이었던 엄흥도는 즉시 서강과 동강이 합류하는 곳으로 달려가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미리 준비한 관에 봉안하여 영월군 서북쪽 동을지산에 암장하고 자취를 감추었다.

 

영월주변에는 단종을 서낭신으로 모시는 경우(영월읍에 있는 영모전 서낭당, 능동 서낭당, 상동면 녹전리, 구래리, 하동면 내리, 어평리 등과 정선군 여량리 및 태백산 일대의 서낭당)가 많다. 태백산 일대의 서낭당 뒤에는 가시가 있는 엄나무가 서낭목으로 서 있는 곳이 많은데 이는 엄흥도가 죽어서까지 단종을 보필하기 위해 넋이 사후에 엄나무가 되어 단종이 계신 서낭당을 지키고 있다고 믿고 있다.

 

또 다른 일화를 보자.

영월읍 보덕사 산신각에도 단종 영정이 있다. 백마를 탄 단종과 머루바구니를 들고 있는 추충신이 그려져 있는데 추충신은 이름이 익한으로 한성부윤을 지냈던 사람이다. 단종이 관풍헌에 있을 때 산머루를 따다가 진상하고 자주 문안을 드렸다고 한다. 그날도 산머루 따가지고 오다 연하리 계사폭포에 이르러 곤룡포에 익선관으로 정장하고 백마타고 태백산가는 단종을 만나게 된다. 익한이 대왕마마 어디로 가시나이까하고 묻자, “내가 태백산으로 가는 길이오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불길한 예감에 도착해 보니 이미 단종은 죽어 있었다. 이에 그도 단종을 따라 태백산 산신령이 되었다고 한다.

 

단종과 수양대군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로는 이광수가 쓴 역사소설인 <端宗哀史 : 19281130일부터 1929121일까지 동아일보에 총 217회에 걸쳐 연재>와 김동인의 <대수양>이 있다. 이광수는 이 소설에서 단종은 조선에 비유하고 세조는 일본에 비유했다고 하는데 김동인은 오히려 강한 추진력으로 나라를 정비하고 왕권강화를 추진했던 힘있는 군주로서 세조를 보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작품을 쓰기도 했다.

 

이광수는 세조를 너무 악하게만 표현하였다하여 후에 <세조대왕>을 집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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