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오정희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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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보호를 위해서 일부의 글만 교육용으로 올립니다.

그리고 일부 자료는 주로 전집류 부록에 수록되어 있는 작가론 또는

작품론으로 출처가 부정확합니다.


오정희의 작품 세계
세계에의 비전
金炳翼

 

 

1. 1968년 데뷔작 「완구점 여인(玩具店 女人)」으로부터 제15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동경(銅鏡)」에 이르기까지 오정희는 모두 24편의 창작을 발표했다. 그 모두가 단편의 장르에 속할 이 작품들은 1977년에 상재된 첫 창작집 《불의 강(江)》에 12편의 초기작들이, 1981년에 간행된 두 번째 소설집 《유년(幼年)의 뜰》에 그후의 8편이 수록되었고, 나머지 네 편은 작금년에 씌여져 잡지에 게재된 채로의 것들이다. 결코 다작이라 할 수 없는 그의 작품 활동은 그러나 그의 문단경력이 쌓여감과 더불어 활발해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수록된 두 권의 소설집을 함께 마주 대하면 관심 두어야 할 한 가지 대조점이 드러나고 있어 흥미롭다. 즉 《불의 강(江)》의 12편은 발표 연월과 게재지를 밝히면서 씌어진 시기를 역순으로 밟아 차례를 이루고 있고 《유년의 뜰》의 8편은 그 같은 시기를 적지 않은 채 소설 속 주인공들의 연령에 따라 작품을 배열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래서 독자는 첫 작품집에서는 최근작으로부터 최초의 작품으로 오정희의 소설을 거꾸로 읽게 되며, 두 번째 소설집에서는 가장 어린 주인공으로부터 점차 나이들어 가는 주인공들을 차례차례 만나게 된다.

이러한 구성상의 묘미는 작가가 원하든 원치 않든간에 그의 소설을 두 가지 방향으로 접근할 것을 유도한다. 《불의 강》에서 작가가 요구하는 것은 한 작가가 형상화한 문학 세계에 대해 그것이 마련되기까지의, 그리고 종래에는 그의 문학의 가장 근원적인 동기 혹은 심상으로 파들어 가는 것이고, 반면 《유년의 뜰》에서는 주인공들의 성장하는 삶의 모습 또는 부챗살처럼 펼쳐진 여러 세대의 삶의 파노라마를 한눈에 보도록 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소설들을 최초의 것으로부터 최근의 것에 이르기까지 그다운 한결 같음을 폭넓게 깔고 있으면서도 두 소설집 사이에 상당한 양상의 차이를 드러낸다. 다시 말하면 시적이고 이미지를 동원한 은밀한 문체, 삶에 대한 비극적 비전이 여전히 지적될 수 있지만, 첫 번째 창작집의 강한 모티브로 사용되는 비정상적인 성 관계와 태아의 죽음이 두 번째 창작집에서는 조용히 사라지고 대신에 아이를 기르고 남편과 더불어 사는 정상적인 가족관계가 자리잡는다. 이러한 변화가 작가 자신의 생애에서 말미암은 것인지 그의 상상력의 자연스런 성숙에서 비롯된 것인지 분명치 않지만, 그 어느 하나 또는 둘 다에서 빚어진 것이건간에 그의 소설사에 중요한 분기를 이루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작가의 이 미묘한 변화를 발견함으로써 그의 문학이 품고 있는 삶 혹은 존재의 진상에 대한 그의 인식을 밝히고 그 의미를 두텁게 하려는 것이 이 글의 의도이다. 그러나 존재의 진상에 대한 작가적 비전을 밝힌다는 것은 특히 오정희의 경우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존재 혹은 세계를 이미지로 표상하거나 형상화할 따름이지 거기에 어떤 설명이나 해석을 덧붙이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소설들은 우선 줄거리의 해석에서의 차질부터 야기할 정도이다. 그 몇 가지 예를 살핀다는 것은 오정희 소설의 이해에 중요한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

ⅰ) 그의 초기작 「직녀(織女)」는 <……그 부어오른 눈두덩에 푸른 칠을 하고 입술을 붉게 그려 일곱 송이의 꽃을 쥐고 대문을 나서면 볕바른 개천을 조심조심 건너가는 아, 당신은 육손이. 손가락이 여섯 개>라는 시적인 비유로 끝난다. 이미 마음을 거두어간 남편의 애정을 직녀처럼 기다리는 여인의 조바심을 그린 이 소설에서, <일곱 송이의 꽃>이란 불교에서 부부의 인연을 상징하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지만 불현듯 당돌하게, 그리고 분명히 독자의 오독을 방비하기 위해 반복되었을 <육손이>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작가의 다른 소설에서 <조막손>이란 표현이 두 군데 나오지만 <육손이>에 대해서는 그 어느 곳에도 해석의 시사점을 던져 주지 않는다. 김현은 《불의 강》 해설에서 기형이 나타내는, 정상보다 큰 힘을 가진 자를 표상하는 것으로 짐작하고 있는데 이 해석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미흡감을 느끼는 것은 이 작품에서의 <당신>이 강자의 이미지를 받는 표현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필요 없이 덧가짐으로써 기형이 된 자의 과잉된 자의식에 대한 원망스런 비난을 함축하고 있다고 보는데, 그렇다면 오정희 소설의 전편과, 그리고 그 주인공들의 범람하는 의식 상태까지도 이 비유는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ⅱ) 그의 두 번째 창작집에 수록된 「별사(別辭)」에는 그 후반부에서 뙈약볕을 쬐며 친정 부모의 예약된 못자리를 답사하는 이야기와 낚시를 하러 집을 나간 남편의 정처 없는 배회 이야기가 몽타주로 함께 진행된다. 김치수는 《유년(幼年)의 뜰》 해설에서 유물을 남겨놓고 실종된 남편을 아이의 생명과 대조시킨 남편의 익사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 부분을 자세히 읽어 보면 남편의 죽음이 아내의 환상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이 밝혀진다. 주인공 여자와 그녀의 어머니와의 대화나, 그녀와 그녀의 남편에게 소설 속의 시간이 주어진 날이 같은 백중날이었다는 데서 그것은 입증되는데, 여기서의 문제는 사실상의 줄거리 해독이 아니라 그 해독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작가의 의도에 있다. 작가는 주인공 여자의 환상 속 정경과 자신의 지금의 일들 간에 거의 구획선을 그어주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남편의 죽음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환상 속의 죽음이 아닌 것처럼 위장시킨다. 그 위장의 수법은 다른 여러 작품에서도 자주 보이는데 그것은 아마도 환상과 실제, 혹은 삶과 죽음인 동일한 평면 위에 공서하고 있음을 방법적으로 드러내 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ⅲ) 아이를 데리고 남편의 낚시질에 따라나선 주인공 여자를 이야기하는 「비어있는 들」에는 그녀의 의식을 끈덕지게 휘어잡는 <그>가 출현한다. 소설은 그녀가 <그>의 출현에 대한 예감에 휩싸이며 그를 맞으리라는 기대에 역으로 나갔었다거나, 기차의 기적 소리마다 그가 그 차에 탔으리라는 예상에 젖어 있음을 간곡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정작 그가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그 정체를 설명하지 않는다. 이 소설을 읽어 가면서 처음에는 인물로 느껴졌던 것이 점차 추상적인 그 어떤 것으로 수정되어 가고, 낚시질에서 돌아오면서 보게 되는 주검을 통해 <그>가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갖게 만들지만, 아마도 반드시 죽음으로만 그를 한정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에 빈번히 나타나는 어휘인 <예감>으로써 그것이 그 자체임을, 일상성에 묻히지 않고 돌출하는 어떤 막막한 기대에의 열망일 것임을 그것은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해석의 혼란을 의도적으로 유도하는 오정희 소설의 모호성 수법은

ⅰ)에서 산문의 장르가 요구하는 구체적 묘사의 거부와 시적 이미지의 대치,

ⅱ)에서 실제와 환상 간의 거리 제거

 ⅲ)에서 내면과 객관과의 구별 거부를 보여주는 뚜렷한 예가 될 것이다.

요컨데 소설에 대한 비소설적 접근 태도는 오정희 문학의 중요한 특성을 이루는데 이 기법은 그의 문체에 대한 검토에 이르면 보다 폭넓고 유창하게 활동하고 있음이 발견된다.

ⅰ) 후기의 소설에서 그 빈도는 줄어들지만 두 권의 창작집에 수록된 작품들 속에서 행해지고 있는 대화 부호의 삭제는 대화와 지문, 혹은 대화와 대화간의 구별을 어렵게 만든다. 물론 대화 부호가 없는 대화의 처리법은 황순원과 송영의 초기작들에서 애용되고 있는 바이지만, 오정희의 경우 그것이 유발하는, 타인과의 객관적 관계 유지의 포기라는 효과가 더 치밀하고 시적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그러므로 간접 화법이 갖는 독특한 분위기 이상으로, 그의 소설들이 의식의 내면 풍경으로 읽히도록 유도한다.

ⅱ)최초의 소설들을 제외한 그의 대부분의 소설 주인공들은 이름으로 표기되지 않고 관계를 지칭하는 대명사로 대신하고 있다. 물론 후기의 소설에서는 가령 남편이나 어머니 혹은 아이와 같은 불특정의 관계 명사 혹은 노랑눈이처럼 별명으로 불려져 어느 정도 객체성을 띠고 있지만 초기의 소설들은 나와 당신, 그라는 대명사로 지칭되고 있고, 이름이 나온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대명사적인 분위기 속에 싸여 버린다. 이 같은 고유 명사의 제거는 책체를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자기 속에 함몰된 타이를 의식하게끔 만들며 내면의 의식 상태에 의해 지배를 받는 세계를 보게끔 한다.

ⅲ) 그의 소설 지문에는 현재형, 과거형, 대과거형의 복잡한 시제들이 세심하게 연결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하나의 문단 안에 지금 진행되고 있는 것과 과거에 있었던 것에의 회상, 그 과거 속의 또 하나의 과거가 복합적으로 얽혀 의식의 분방한 산책을 드러내 준다. 그러나 독자는 이 시제들의 변화를 기민하게 따라가지 못함으로써 해독의 혼란을 일으킨다. 작가는 바로 이 시제의 혼란을 통해 시간의 분절성을 부인하고 있는 것 같다.

오정희의 이와 같은 문체와 수법은 요컨대 그가 그의 소설들을 소설 아닌 시로 읽혀지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는 구체적인 묘사 대신에 모호한 이미지를 구축하고 사실적인 설명 대신에 분위기적인 비유를 사용하며 객관적인 해석 대신에 내면적인 표상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소설 세계를 사실적 차원으로, 현실과의 대조로서가 아니라 숨겨진 내면의 추상으로 그리고 해석의 영역으로서가 아니라 존재의 영역으로 바라보게끔 만든다. 우리는 이러한 세계를 뤼시앙 골드만이 말하는, 자아와 세계간의 단절에서 보여지는 서정시의 세계로 일컫을 수 있을까. 오정희의 세계는, 깊은 눈으로 바라보는 이 존재 세계의 영원한 비밀, 그것의 무한한 은폐와 완강한 함구, 격렬한 적의와 철저한 절망을 그 자체로 내포하고 있다. 그는, 다시 말하지만, 스스로의 세계 해석을 거부하면서 그 자체로 타인의 해석을 견제하는 완벽한 단절을 시도한다. 그것은 세계와 존재에 대한, 아마도 타고난 비극적 비전으로서야 이해될 수 있는 영역일 것이며 이 비극적 비전이 세계를 소설로서가 아니라 서정시로 바라보게끔 만드는 것이다.

2. 세계와 자기와의 이 같은 단절이 오정희적으로 표현된 것이 초기 소설들에 대한 김현의 분석에서 지적된 <섬뜩한 살의>일 것이며 그 후의 소설들에 대한 김치수의 고찰에서 짚어진 <전율>과 <삶과 죽음의 공존>일 것이다. 그러나 오정희의 소설들은 보다 면밀하게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앞서 우리가 살핀 바처럼, 그의 소설은 생활 세계적 차원으로서가 아니라 이미지로 표상된 서정시적 세계로 읽혀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그의 초기 소설들에 빈번하게 나타나는, 아마도 그의 상상력에서 근원적인 것으로 기능할 몇 개의 모티브를 다시 분석할 필요를 느낀다. 여기서 중요한 그의 동기들은 ⅰ)비정상적인 성관계, ⅱ)태아의 유산 ⅲ)육체의 불구성 등이다.

ⅰ) 오정희의 소설에는 비정상적인 성관계가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된다. 그 하나는 「완구점 여인」에서 보이는 여성간의, 그리고 「주자(走者)」와 「산조(散調)」에서 이야기되는 남성간의 동성애 관계이며, 다른 하나는 「봄날」과 「목련초(木蓮抄)」에서의 외간남자와의, 그리고 「관계(關係)」에서 암시되는 시아버지와 며느리간의 어쩌면 불륜이라고 보아야 할 관계가 그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가령 두 번째 소설집의 「어둠의 집」과 중앙 일보에 연재했던 「바람의 넋」에 나타나는 강제 윤간, 그리고 「직녀」와 「안개의 둑」,「불의 강」에서 묘사되고 있는 부부간의 성적 무기력까지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동서애든 윤간이든 그것은 비정상적인 성적 폭발이며, 외간 남자와의 결합 기대이든 부부간의 냉담한 관계이든 그것들은 비정상적인 성적 무능력 상태이다. 그것이 과격한 폭발이든 무기력한 위축이든 성관계가 화해롭고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은 그들이 타아와 가장 뜨겁고 즉감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있음을 뜻한다. 환언하면 이러한 성관계는 자기와 세계와의 단절을 확인하면서. 그 확인을 인정하려 들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그 확인을 더욱 분명하게 체험하고 있음에 다름아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관능이란 육감적이며 자기 해방적인 것이 아니라 혐오스럽고 자기폐쇄적인 것이 된다. 그것은 대상으로의 해방감을 요구하면 할수록 더욱 스스로를 향한 폐쇄감으로 단절시키는 반응을 일으킨다. 「완구점 여인」의 주인공은 복도가 <먼지 한 알 없이 청결해 보여서 위축감을> 느끼고 그래서 <뻣뻣한 스커트를 허리께까지 훌쩍 걷어올리고 그대로 선 채 오줌을 누고 싶다>는 충동을 갖는다. 그러나 그런 유의 충동은, 완구점 여인과의 관계를 회상하면서 <스멀스멀 밀려 오는 관능에의 혐오> <몸의 마디마디에 가래처럼 걸찍하게 괸 혐오>를 유발한다. 비정상적인 성관계에서 오히려 강렬하게 도발될 관능이 오정희에 의해서는 <가래처럼 걸쭉한 혐오>로 묘사된다는 것은 이 세계로부터 거부당한 자아의 비참한 저주일지도 모른다. 그의 살의는, 가령 「적요」나 「불의 강」그리고 「안개의 둑」에 시사되고 있는 섬뜩한 살의는 자기와 화합하지 않는 세계에 대한 폭발적인 보복, 그것도 자신의 내면으로만 맡겨진 보복의 행위일 것이다.

Ⅱ) 태아의 유산은 「번제(燔祭)」에서의 <태내에서의 살해된 아이>, 「봄날」에서의 <더러운 종양을 제거하는 기분>으로 꺼낸 6달 된 태아로부터 「불의 강」에서 <이태 전에 죽은 아이>, 「안개와 둑」에서 보호서에서 빼앗긴 젖먹이 아기, 그리고 「직녀」에서 <회임 못하는 석질의 자궁>, 그리고 「관계」에서 <며느리에게 자식을 잉태시키고 싶다>는 시아버지의 헛된 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지만 그 한결같은 모티브는 좌절당한 생명이다. 이 모티브는 그의 뒷날의 소설들에서 중요한 매개물로 나타나는 아들의 모티브(「꿈꾸는 새」이후, 그리고 「인어(人魚)」에는 주워 기르는 양녀 이야기가 나온다)에서 배반당하고 있지만, 초기 소설들에는 ⅰ)의 비정상적인 성관계의 모티브의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좌절당한 생명>은 나와 세계와의 단절을 확증해 주는 매체로 해석되어야 할 것 같다. 다시 말하면 태아의 생명은 목숨, 자기 삶의 연장체로서의, 모성애를 요구하는 목숨이라기보다 자기와 세계와의 화합에 실패한 흔적으로 볼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작가는 실제로 잃어버린 아기에 대해 인간적인 연대감으로 연연해하는 것이 아니라 잊혀질 수 없는 험집으로 기억해 내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것은 「봄날」에서처럼 <흑판에 가득 쓰인 글씨를 지우개로 쓰윽 지우고 활활 털어 버리면 말짱해>질 듯한 일로 여겨졌지만, 그러나 태아의 망령은 <일종의 잠재성 간질>로서 <비 오기 전의 류머티즘처럼 민감하게 반응>시키는 존재이다. 다시 말하면, 태아의 아기는 구체적인 생명의 내포로서 기능하기보다는 세계와의 실패한 관계, 세계와 함께 생성하지 못 하고 유산되어 버린 관계의 증거물인 것이다. 이 같은 좌절된 관계의 확산은 가정부에서 어머니로 변신하는 「완구점 여인」. 젖먹이 아들을 팽개치고 재혼한 어머니의 「주자」, 아들 없는 며느리와 동거하는 시아버지의 「관계」, 생활비만 대주고 나타나지 않는 딸을 기다리는 노인의 「적요」, 의붓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결국 시앗까지 보게 되는 「목련초」의 화해롭지  못한 가족 양상에서 발견된다. 이것들은 근원적으로 <회임 못 하는 석질>의 관계를 이룬다.

ⅲ) 앞의 두 모티브와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며 자주 나타나는 동기가 불구의 육체이다. 앞서 <육손이>의 이미지가 민감한 자의식의 표징일 것으로 해석한 바 있지만, 그의 소설들의 육체적 불구성은 그것이 예외적인 것이고 대부분의 그것은 세계에 대한 접촉의 능동성을 상실한 좌절의 이미지들이다. 「완구점 여인」의 그 여인과 주인공 여자의 동생은 휠체어를 타고서야 기동할 수 있는 몸이며 「관계」에서의 자살한 아들 역시 월남전에서 두 다리가 잘린 불구였다. 그리고 「관계」의 시아버지와 「미명(未明)」의 노파는 중풍환자이며 「번제」의 여주인공은 아마도 정신병으로 입원해 있고 「안개의 둑」의 안마사는 소경이다. 불구라는 것이 대체로 그렇겠지만, 여기에 나오는 불구들은 기동력을 상실한 사람들이고 따라서 이 세계로부터 내던져진, 혹은 이 세계와의 교섭을 원천적으로 봉쇄당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생활의 무능력자일뿐더러 삶과 관계에서의 무능력자들이다. 그들은 세계로부터 감금당하고 있고 그래서 스스로를 페쇄한다. 그들은 그러므로 자폐를 스스로에게 강요할수록 강하게 느껴지는 단절감으로 하여 외부에 대해 더욱 민감해진다. 완구점 여인의 동성애나 「관계」에서의 시아버지의 며느리에 대한 욕망, 그리고 아들의 자살과 「안개의 둑」에서의 소경 안마사의 발작이 그것이다. 이러한 자폐감은 오정희 초기 소설들의 주인공에 대체로 미만하고 있어 육체적 불구 아닌 사람들에게도 <섬뜩한 살의>를 부여하고 있는데 「안개의 둑」과 「불의 강」의 두 남편이 그렇다.

이상의 모티브들은 오정희의 경우 거의 시적인 이미지롤 전개된다. 앞서 그의 산문 문체의 운문성을 지적한 바 있거니와 그것은 사건의 진행을 알리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의 작품 줄거리에 곧잘 빠져드는 모호성도 여기서 비롯되거니와 그의 소설들이 설명적이라기보다는 비산문적인 표현적인 특징을 갖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가령 <비듬처럼 떨어져 내리는 햇살>(「주자」)이라든가 <우리가 미립자의 시절부터 잉태하고 있던 진상이 비로소 인식되어 무서워진 탓>(「관계」혹은 <바깥의 적막함이 실제 내부로 파급되어 오며 삶의 적막함이 문득 만져지고>(「목련초」같은, 쉽게 잡히는 구절마다가 시 같은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으며, 또는 「산조」의 마지막은 중국에서 진열창에 비친 남루하게 서 있는 자신을 바라보았던 일을 회상하면서 다음과 같은, 소설 문체로서는 쉽사리 용납될 수 없는 구절로 끝난다. <어두운 청국인 상점, 그 죽어 있는 시간 속에 갇혀 있는 낯선 사내를 느낀다. 표정없는, 주름이 깊게 패인 얼굴이 차창에 탈처럼 걸려 여전히 나를 응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그의 소설의 이미지화에 주목하고 있는 것은 산문의 운문성에 대한 것이기보다, 그 이미지화에서 드러나는 자아와 세계와의 깊은 단절감이다. 앞에 인용한 것과 같은 유의, 오정희 소설에 숱하게 나타나는 표현들은 자기의 거부를 화해로운 관계로써가 아니라 의식의 균열을 지각하고 있는 시선으로 응시하는 데서 얻어진 심상들을 보여 준다. 그는 이 같은 응시의 한 패턴을 이렇게 묘사한다.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물은 뜨겁게 팽창해서 형체를 잠식하고 시간 속에 용해되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오직 만져지는 것은 팽배한 긴장감뿐이었다. 참으로 버리고 싶었던 내 육신이 이 완벽한 고요와 평화 속에서 해체되어 가고 있었다. (「봄날」)

이러한 상태는 외부 세계와의 해방적인, 화해롭고 관능적인 합일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팽창과 잠식, 용해와 팽배의 불연속선이 고요와 평화 속에서 치열하게 일으키는 긴장 상태이다.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고 그러다 못해 형체가 없어지도록 녹아듦과. 그에 반비례하며 진행되는 세계의 무한한 확대를 동시에 느낄 때의 그 무아적인 절망 앞에 그는 내던져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상태에서 깨어날 때 <마취에서 깨어날 때처럼 손가락과 발가락 끝에서부터 차차 감각이 되살아나는> 과정을 밟게 되는 것이다. 그의 이런 체험은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세계와 거기에 어떤 관능적인 교접을 허용할 수 없는 자신의 심연과의 거리를 의식하게 한다. 그것은 자신을 처절하게 무화(無化)시킬 때 투명하게 솟아오는 이 세계의 절대성이다. 그러므로 그가 여기서 부닥치는 것은 <허무>이다. 그의 섬뜩한 살의는 바로 여기서 잉태되는 것이다.

……더 이상 공이 완벽하게 맞는 일은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찾아들던 절망감으로 나는 자살을 생각했었지. 죽음의 의식(意識)은 너무도 투명해서 한치의 빗나감도 용서치를 않지, 그 무렵 나는 꼭 절벽 끝에 선 듯한 기분으로 라케트를 휘두름으로써 내 속에서 돋아나는 그 어찔어찔한 허무감을 죽이고 또 죽였어. 그러나 마침내 그러한 행위로 인해 내 자신이 살해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관계(關係)」)

3. 《유년의 뜰》이후 오정희의 소설은 상당한 변모를 드러낸다. 대화는 직접 화법으로 바뀌고 인물들에게 이름이 붙여지며 운문적인 이미지의 문체로부터 통상적인 산문적 서술이 주조를 이루기 시작한다. 이러한 외형상의 변화와 더불어 비정상적 성관계라든가 태아 유산, 육체의 불구와 같은 초기작의 모티브들은 거의 말끔히 가시고 주인공들은 하나의 가족 단위의 인간 관계를 형성하여 아이들은 자라고 남편과의 관계도 화해롭다. 따라서 이 소설들의 이야기는 일상적인 상황 속에서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전개되며 군데군데 작가 자신의 모습과 현실적인 사건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의 유일한 중편인 「유년의 뜰」과 그 연작으로써 우리 단편문학의 한 뛰어난 범례가 될 「중국인 거리」는 전쟁 직후의 굶주림과 혼란을 체험한 작가의 유년기 체험에서 얻어진 것일 것이며, 「꿈꾸는 새」「비어 있는 들」「별사(別辭)」의 비슷한 유형의 세 작품들과 「야회(夜會)」 같은 작품은 가정주부로서의 평범한 생활을 감당하고 있는 작가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별사」와 「야회」에는 과거의 오정희 작품으로서는 예상하기 힘든 '70년대식 정치 상황을 엿보게 하는 일들이 도입되고 있다. 뛰어난 창작물인 「어둠의 집」과 「동경」은 물론 작가의 상상력의 소산이겠지만 여기서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들, 주인공에 의해 회상되고 있는 것들은 평범한 가정사와, 그리고 해방 직후 또는 4.19와 같은 흔하게 도입되는 역사적 사건들이다. 이와 같은 변화들은 오정희가 서정시의 세계로부터 소설의 세계로 옮겨 앉게 되었다는 것을 뜻하며 직관과 추상의 세계로부터 역사와 현실의 세계로 시선을 돌리고 있음을 말해 준다.

따라서 이제 작가는 초기작들에서 결정적으로 그 단절을 직감하던 이 세계와 다른 관계를 형성한다. 다시 말하면, 자기를 둘러싼 우주의 무한한 팽창과, 그 안에서 미립자처럼 분해되어 가는 자신과의 치열한 긴장을 느끼고, 그 파스칼적인 절망 앞에서 누를 수 없이 솟아나던 살의에 스스로를 맡기던 그의 자폐는 「유년의 뜰」 이후 조금씩 열리기 시작하여 세계나 인간과의 교접이 그에게서 조심스럽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여 주는 하나의 뚜렷한 예가 「불의 강」에 그처럼 빈번하게 나타나는 적의로서 유혹받던 관능이 「유년의 뜰」에서 <밤거리에 음험하게 끓어오르는 알 수 없는 열기, 끈끈한 정념으로 가득찬 달착지근한 공기>와 같은 끈끈하면서도 말 그대로의 관능적인 표현으로 바뀌고 그나마, 「중국인 거리」 이후에는 가령 「저녁의 게임」에서의 공사장 인부와의 성교, 「어둠의 집」에서의 윤간 장면조차에까지도 그러한 관능이 제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렇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관능이 관능으로서가 아니라 살의를 동반한 적으로서, 그러니까 추상으로서 느낀다는 것은 단절된 세계에 대한 자폐자(自閉者)의 허망한 분노이다. 그러나 관능이 육감적인 것으로, 후텁지근한 열기로써 느껴질 때 그는 자기 폐쇄의 문을 열고 세계와의 막힌 관계를 뚫어 그 속으로 접촉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 관능에 어떤 권태로움을 갖게 되고 마땅히 관능적이어야 할 때, 그러니까 「저녁의 게임」의 한 장면과 같은 경우에 건조하게 처리해 버린다는 것은 무슨 뜻을 품고 있을까. 「겨울뜸부기」로부터 「별사」에 이르는 오정희의 소설들은 실상 관능이 거세된 삭막한 분위기로 진행되고 있는데, 이 질문에 대한 탐색은 제 2 단계의 이 작가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시기의 오정희의 두 가지 모티브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 하나는 현실감을 갖지 않은 <그>의 출현이다. 그것은 「유년의 뜰」에서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그러나 자물쇠에 잠긴 골방에 갇혀 있는 부네라는 주인집 딸, 「중국인의 거리」에서 항상 말없이 자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드디어는 물건 한 꾸러미를 던져 주던 중국인 남자, 그리고 「밤비」에서 사라진 여인을 찾아 무턱대고 전화 다이얼을 돌리는 남자로 구체적인 실물의 등장을 본다. 이들은 마치 유령처럼 존재하여 주인공이 아득한 시원으로 밀어내 버렸던 어떤 의식의 핵과 마주친다. 소설을 통해 말하자면, 일상성 속에 묻힌 그녀들의 세계에 비현실적인 존재로 홀연히 나타나 그들의 잠자는 의속 속에 섬광처럼 번쩍이다 사라진다. 그것은 「어둠의 집」에서 잠깐 동안의 등화관제 중에 숱하게 솟았다 사라지는 상념들 끝에, <담장 밖에 누군가 와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고, 마침내 전등 스위치를 올리면서 <섬광처럼 지나치는 무엇>으로 감각된다. <그것은 무언가 차갑고 날카로운 이물스러움이 그녀의 생애를 꿰뚫고 지나간 느낌>이었다. 그 이물스러운 느낌의 것이 「별사」에서 <그에 대한 예감>으로 변주된다. 그리하여 <나>는 익사체의 주검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상념을 갖는다.

나는 늘 기다렸다. 깊은 밤 어두운 하늘을 보며 살별이 떨어져 내리기를, 가슴을 시리게 꿰뚫고 지나가기를, 살별의 꼬리, 빛의 한 조각이 가슴으로 흘러들기를, 이승에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그리움처럼 그를 기다려 왔다.

여기에서의 <그>가 우리의 앞에서 해석한 바처럼 죽음이고, 그것도 실제적인 죽음이 아니라 예감으로서의 죽음이라면 그것은 오정희의 소설에 빈번하게 나타나는 두 번째 모티브로서의 죽음에 대한 성격 부여는 많이 달라진다. 그의 소설에는 김치수가 점검한 것처럼 생성과 사멸이 <동전의 앞뒷면>처럼 공존하고 있고 그 대립을 통해 소설적 긴장을 얻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가령 「적요」에서처럼 「동경」에는 정년 퇴직한 노인과 철없는 어린 아이의 대결이 중심 이야기가 되고 있고, 아들을 데리고 외출하는 「꿈꾸는 새」「비어 있는 뜰」「별사」에 죽은 사람에 대한 생각. 주검의 현장, 주검이 묻힐 묘자리를 본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관능 자체가 오정희에 있어 추상일 수 있듯이, 아들이 생생한 생성적 생명력으로 묘사되지도 않고, 죽음 역시 현실로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점이다.그의 죽음은 <때때로 예기치 않은 순간에, 그리고 친숙하게 찾아오는 느낌>(「별사」)이고 <우발적 죽음에 대한 기대>(「비어 있는 들」)이며 <문득 죽은 사람을 생각하듯 아이와 남편을 먼눈으로 보게>(「꿈꾸는 새」)하는 그런 죽음이다. 다시 말하면 오정희의 죽음은 생성에 대립되는, 삶의 반대편에 대결하는 죽음이라기보다 삶 속에 함께 들어 있는, 틈만 나면 삶의 균열 사이로 불현듯 고개를 내밀 그런 죽음이다. 그리고 그 죽음은 마땅히 중요한 이미지로 지목되어야 할, <가슴을 시리게 꿰뚫고 지나갈 살별>, <빛의 한 조각>, <이승에서느 결코 이룰 수 없는 그리움>이다.

비현실적인 존재에 대한 섬뜩한 감동, 죽음에 대한 섬광 같은 예감은 오정희에게 있어 분명히, 이 세계의 권태로움, 이 세계 속의 삶에 대한 허망함으로부터 초월하여 절정을 직관케 하는 매체가 될 것이다. 그가 이 섬뜩한 섬광을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세계와 세계 속의 삶은 이완된 시간의 무한한 연장이며 이렇게 세계를 느낄수록 그 시간들은 무의미하고 지루해진다. <지나간 시간들이 눅눅한 공기 속에서 숨쉬고 있다. 앞으로의 모든 날들이 그러할 것이다.>라고 「꿈꾸는 새」의 주인공은 절망이다. 그녀는 이 무한히 지체되는 시간 앞에서 모든 것이 허위이며 환상임을 깨달으면서 <내게 힘은 사라지고 헛된 정열만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또한 내가 진실로 원하는 것은 사랑인가, 성인가, 소멸인가를 자문>한다. 그리고 그녀가 초조해지는 것은 그 대답이 <모두일 수도, 전혀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다는 것>에 그 원인이 있었다. 그녀의 <우리가 갖고 있는 것, 보고 있는 것은 진실의 환상뿐이 아닐까>라는 회의는 「저녁의 게임」에서 <낡고 너덜너덜해진 각본으로 끊임없이 연극을 하고 있었다>는 확신으로 강조된다. 다시 말하면, 오정희의 주인공들은 관능이 제거된, 그리하여 한없이 건조하고 지루한 시간 속에 갇혀 있는 것이며 그 끝없이 반복되는 나날들이란 시간의 세계에 대해 절망하는 것이다. 죽음은 그 시간의 광막한 세계로부터 한순간이라도 탈출할 수 있게 하는 예감 같은 섬광일 것이다.

이제 결론적으로, 우리는 오정희에게서 세계에 대한 두 가지 비극적 비전을 발견한다. 칼 뢰비트에 의하면 세계란 개념은 공간적 인식과 시간적 인식의 두 비전으로 구성되고 있는데, 《불의 강》의 오정희는 무한한 절대적 공간으로서의 이 세계에 대해 결코 타개할 수 없는 단절을 직관하며 《유년의 뜰》의 오정희는 영원한 절대적 시간으로서의 이 세계에 대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함몰을 예감한다. 삶의 그 어느 것을 통해서도 세계와 화해할 수 없다는 것이 오정희의 전율이다. 그것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존재상(存在相)에 대한 통찰이며 그는 거기서 비롯된 절망을 드러낸다. 「중국인 거리」의 소녀와 더불어, 우리는 <알 수 없는, 다만 복잡하고 분명치 않은 색채로 뒤범벅된 혼란에 가득찬 어제와 오늘과 수없이 다가올 내일들을 뭉뚱거릴 한 마디 말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절망하는 것이며 「어둠의 집」의 주인공이 느끼듯이, <공포에 빠진 자의 불가항력, 불가사의한 힘에 대한 무력하고 무의미한 저항>을 시도하는 것이다. 오정희의 소설은 바로 이 절망과 무력한 시도 자체가 우리 가슴으로 흘러드는 한 조각의 빛, 살별의 꼬리임을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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