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오영수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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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보호를 위해서 일부의 글만 교육용으로 올립니다.

그리고 일부 자료는 주로 전집류 부록에 수록되어 있는 작가론 또는

작품론으로 출처가 부정확합니다.


따뜻한 관조의 미학

천이두

 

 

오영수의 문학을 접할 때마다 '글은 곧 사람이다'이라는 말을 연상케 된다. 개개의 작품을 접할 때마다 변함없이 그의 개성을 짙게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일본의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는 시가 나오야(志賀値哉)라든가 하는 작가를 말하면서, 그의 소설은 비록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내놓았다 해도 그를 아는 독자라면 누구나 그것이 그 작가의 것이라는 것을 쉽사리 판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거니와, 오영수의 소설을 읽을 때에도 그런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 말은 시가와 마찬가지로 오영수도 사소설(私小說))의 작가라는 말은 물론 아니다. 시가(志賀)의 소설이 쉽게 독자들에게 판별될 수 있다는 것은 시가의 소설에서는 언제나 사소설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자기 초상(자연인으로서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라 할지라도)을 짙게 그리고 언제나 느낄 수 있다는 뜻이지만, 오영수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의 고유한 문학적 분위기랄까, 문학적 체취나 매력이랄까, 한 마디로 말해서 문학적 개성 같은 것을 짙게 그리고 언제나 느낄 수 있다는 말이다. '글은 곧 사람'이라는 말 자체에 다소의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글 속에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자전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그 작가의 자기 초상 내지 인생의 면모가 은연중 나타날 수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문제는 일단 논외로 하고라도 그 글 속에서 작가의 고유하고도 뚜렷한 문학적 개별성 내지 개성을 느낄 수 있는 건 사실이다. 그 규모나 깊이의 정도는 별도로 하고라도, 그 자체의 고유한 가치를 간직하는 문학인 경우에 있어서는 이 점을 승인하지 않을 수 없다. 오영수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는 분명 그 나름의 고유한 가치를 간직하는 작가이다.

1949년 문단 활동을 시작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는 고집스럽게 자신의 문학적 일관성을 견지하여 오고 있다. 후기작에 속하는 <입추전후>라는 작품에는 신문 소설을 써 보라는 친구의 권유를 물리치는 한 작가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가벼운 소품에 지나지 않은 작품이긴 하지만, 그러나 이 작품에는 오영수 자신의 인간적인 면모가 비교적 선명하게 부각되어 있어 흥미롭다. 찾아온 친구가 '나'더러 신문 소설을 쓰라는 것이다. 한 달에 ××만원이라는 파격적인 대우를 하겠다는 것이고, 그저 재미있게만 쓰면 된다는 것이다. '소설은 허구니까 거짓말이 아니냐, 그러니 젊은 계집 옷도 좀 벗기고, 다방, 카바레, 비밀 요정, 사장족 술, 계집, 도박, 마약…… 이런 것들을 원료로 해서 범벅탕을 끓이는 거야.' 이러한 친구의 유혹과 권유가 '나'로서는 아닌게 아니라 구미가 당기는 솔깃한 조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결국 친구의 권유를 거절하고 만다. 신문 소설을 지탱해 나갈 수 있을 만한 건강에도 자신이 없거니와, 도시 그런 세계는 자기의 영역 밖이라는 것이다.

이 짤막한 작품에 등장하는 '나'의 모습에서  우리는 다름 아닌 작가 오영수의 모습을 느끼게 된다. '나'의 '맹꽁이'와도 같은 태도에 대하여 친구는 그 '병적인 결백성'을 힐난하지만, 작가 오영수의 그동안의 문학적 과정이야말로 '병적인 결백성'의 그것임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30년 동안의 작가 생활의 과정에 있어서 그는 시 한 수 잡문 한 편 쓴 것 같지 않고, 신문 소설은 물론이려니와 장편 같은 것에도 아예 손대 본 것 같지 않다. 단편 소설 한 가지만을 고집스럽게 써 오고 있다. 단편 소설을 위해서 태어난 사람 같은 인상을 준다. 이 점을 미루어 보아도 우선 그의 '병적인 결백성'의 정도가 어느 정도의 것인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그가 '병적인 결백성'을 간직한 작가라는 것은 일관하여 단편 소설만을 써 오고 있다는 사실로서 뿐만 아니라 그의 문학적 특질 자체에서 또한 우리는 그것을 느낄 수 있다. 아마도 그 문학적 특질에 있어서 이 작가처럼 완고한 일관성을 보이고 있는 작가도 없을 것이다. 1949년의 데뷔 작품인 <남이와 엿장수>(고무신) 이래의 그의 개개의 작품들은 예외 없이 그것이 오영수의 작품임을 입증하는 뚜렷하고도 일관성 있는 개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문학적 소재나 관심의 방향은 비교적 다양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앞서 말한 바 그의 문학적 개성만은 완고한 일관성을 보이고 있다. 문학적 소재나 관심의 방향이야 어떻든 개개의 작품마다에서 그는 애당초 자신이 간직하고 있는 속성만을 이모저모로 고집스럽게 확인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 점에서 그는 지극히 폐쇄적인 작가라 할 수 있다. 애당초부터 자신이 간직하지 않은 요소, 생소한 외래적 요소에 대해서 그는 아예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강한 혐오감마저 드러낸다. 이점에서 그는 또 완고한 보수파이다. 그러나 이 말은 그의 문학에서 매너리즘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의 폐쇄성 내지 보수성은 김소운의 말마따나 '진짜'의 그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이 간직하고 있는 바 '진짜' 자기의 것만을 아끼고 가꾸고 확인하기에 전념하는 나머지 자기 밖의 것에 관하여는 일체 눈을 돌릴 겨를이 없을 만큼 그는 '병적인 결백성'의 소유자인 것이다. 그는 이제껏 단편 소설만을 써 왔을 뿐만 아니라, 그 문학적 특질 자체가 전형적인 단편 작가의 그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우선 정통적인 사실파다. 그의 문학은 사실주의적 의미에 있어서의 묘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틀을 거르고 사흘째 되는 알 아침, 일찍이 학도가 아이를 ×--이런 식으로 해 업고 왔다. 눈꺼풀이 부승하고 약간 긴장된 얼굴이다.

"형님!"

"이 사람이 돌았나, 아침부터……"

"날 돈 천 환만 줘--"

"뭣하는 데 천 환은?"

"거 묻지 말고, 내 죽으면 부의하는 셈 치고 천환만 줘--"

"이 사람이 아무래도 돌았어, 별 소릴 다하네."

"아 있거든 빨리……"

철은 그의 아내의 핸드백에서 얼마를 꺼내 천 환을 맞춰 주었다. 학도는 눈을 지그시 감고 단추를 끌러 돈을 안 포킷 속에 접어 넣고는 돌아섰다. 문간에 나서면서 학도는 힐끗 돌아보는데 철과 눈이 마주치자, 해! 엉망진창이다.--그리고는 씨익 웃음이 뭔지 여느 때와는 다른 자조적인 그런 웃음이었다.

이것은 그의 <박학도>라는 작품의 한 대목이다. 이 작품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작가 오영수의 문학을 이해하는 효과적인 실마리를 제공해 주는 작품이라고 생각되거니와, 이 짤막한 묘사 장면에서도 그 점을 느끼게 된다. 이 장면 묘사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은 정통적인 사실주의적 묘사이다. 이 묘사를 통하여 우리는 매사에 실패만 거듭하는 무능력자요, 그래서 그의 말마따나 '엉망진창'인 박 학도라는 전형적인 시골뜨기의 모습이 생생하게 부각되고 있음을 보게 되고, 또 그러한 친구를 따뜻하게 맞아들이는, 안정된 생활의 기반을 간직하고 있는 '철'의 모습이 부각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뿐만 아니라, 각기 처지와 수준이 다른 이 두 사람 사이에 교류되는 아련한 인정의 기미 같은 것을 또한 느끼게 된다. 여기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오영수의 문장은 평명하면서도 정확한 객관적 묘사가 주류를 이룬다. <오지에서 온 편지> <회신> 등과 같은 다소 예외적인 작품이 약간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의 문학적 기반을 이루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주의적 묘사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그의 이러한 묘사가 냉철하고 지적인 비판자의 시점에서 연유된 게 아니라 오히려 따뜻하고 정서적인 포용자의 시점에서 연유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작가 오영수는 평명하고도 정확한 묘사를 통하여 주어진 표현 대상을 생생하게 부각시키는 탁월한 능력을 간직한 작가이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그 표현 대상을 지적.비판적인 시점에서 입각하여 그 내면으로 줄기차고도 집요하게 파고 들어가는 작가라기보다는 언제나 그것을 따뜻하고 너그럽게 포용하는 지극히 정서적인 작가이다. 말하자면 그는 싸늘한 묘사가가 아니라 따뜻한 묘사가이며, 부정적.비판적인 관찰자가 아니라 긍정적 포용적인 관조자이다. 이 점에서 그는 한국 사실주의의 가장 충실한 계승자이며 따라서 그 특질과 한계를 가장 전형적으로 드러내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점에서 그는 특히 30년대의 작가 이태준의 문학적 특질을 가장 성공적으로 계승한 작가이기도 하다.

이런 점과 관련하여 앞서 인용한 장면을 다시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이 장면에서 우선 주목의 대상이 되는 것을 박학도이다. 그는 매사에 실패만 거듭하는 무능력자다. 거친 세파를 헤쳐 나가기에는 그는 너무도 순박한 시골뜨기다. 그런데도 그러한 박학도의 모습에서 한결같이 따뜻하고도 낙천적인 체온을 느끼게 된다. 그 이유는 어디 있는가? 작가 오영수 자신의 '따뜻한' 시선이 거기에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대체로 작가 자신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철'이다. 작중 현실은 대개의 경우 그 '철'의 시선을 통해서 진술된다. 그런데 그의 시선은 어디까지나 따뜻하고도 포용적인 시선이다. 자기 친구를 바라봄에 있어서 그렇다. 그의 무능력함을 비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의 때묻지 않은 소박함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의 딱한 처지를 힐책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의 타고난 시골뜨기다운 소박함에 애정의 눈길을 보내는 것이다. 엉망진창의 처지에 있는 박학도의 모습에서 이처럼 한결같이 따뜻한 체온이 발산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오영수 문학의 가장 기본적 특질은 바로 이 점에 있다 할 것이다.

다음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주된 작가적 관심이 한결같이 소박한 토속적 인간상에로 행해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즐겨 설정하는 작중의 배경도 현대적.도회적인 세계와는 인연이 먼 두메 산골이거나 외딴 어촌인 경우가 많다. <머루> <은냇골 이야기> <고개> <추풍령> 등과 같은 산골이거나 <갯마을> <실걸이꽃> 등과 같은 외딴 어촌이거나 하다. 말하자면 현대 문명의 혼탁한 물결에 오염되지 않은 순박하고 건강한 지대, 현실의 주류를 외면한 완고한 폐쇄적 공간 그것이 그가 즐겨 설정하는 작품의 배경이다. 그의 등장 인물만 하더라도 현대적 교양을 거치지 않은 순박한 시골뜨기가 극 대부분을 이룬다. 앞서 말한 작품들의 등장 인물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물론 그의 작품 세계에는 도회지를 배경으로 한 것, 현대적 지식인을 등장 인물로 한 것도 적지 않다. 또 도시 변두리의 서민층을 소재로 한 것도 적지 않다. <난> <수련> <안나의 유서> <개개비> 등등, 양적으로 보면 이런 작품의 수효가 더 많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작품들조차도 그 바탕에 흐르고 있는 것은 역시 이런 토속적 분위기이다. 이처럼 현대적.도회적인 세계에 배경을 설정한 작품에 있어서 조차도 작가의 관심의 방향이 되는 것은 여전히 그 토속적 세계이다. 이미 본 바와 같이 도시 지식인의 시선으로 작중 현실이 관찰되고 있는 <박학도>에 있어서도 그 시선이 관찰의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은 박학도라는 시골뜨기 쪽이다. <수련> <실걸이꽃> 등과 같이 도시의 지식인이 등장하는 소설에 있어서도 그 배경이 되는 것은 평화롭고 순박한 시골 풍경이다. <여우> <개개비> 등과 같이 도시 서민의 등장하는 소설에 있어서도 그런 작품의 중심 인물은 짙은 토속적 분위기를 간직한 인물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토속 세계는 그의 문학적 모태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그의 문학 세계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가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그의 등장 인물들, 특히 그의 문학의 주류를 이루는 토속적 인물들이 거의 예외 없이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 그의 문학에서 빚어지는 짙은 토속적 분위기는 묘미 있게 구사되는 이런 경상도 방언에 크게 힘입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문학 세계에서는 언제나 소박하면서도 건강하고 낙천적인 분위기가 빚어진다. 아무리 어둡고 비참한 상황이 펼쳐진다 해도, 이런 분위기는 한결같다. 그의 작가적 시선이 싸늘하고 냉철한 것이 아니라 따뜻하고 포용적인 것이라는 것은 이미 말한 바 있거니와, 인간을 어디까지나 긍정적으로 바라보려는 것은 이 작가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문학의 입장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이른바 '선의의 문학'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가령 <박학도>라는 작품에 있어서 '엉망진창'인 박학도에 대하여 작가의 관심의 초점이 되는 것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그의 무능력함이나 현실을 모르는 그의 어리석음 쪽이 아니라 그런 속에서도 한결같이 발산하는 그의 천성적인 낙천성, 그의 시골뜨기다운 소박함, 그의 때묻지 않은 선량함 쪽이다. 인간 쓰레기들만 모여 있다고 볼 수 있는 유치장 풍경을 그린 <명암>에 있어서도, 그 작품에 흐르는 주류적 분위기는 역시 밝고 건강한 것이다. <고개>에 있어서 애비를 죽인 역천(逆天)의 죄수에서조차 은연중 곱고 착한 일면이 부각된다.

<은냇골 이야기>의 등장 인물들은 모두 네 것 내 것 없는 인간 가족들이요, <메아리>의 동욱 부부가 산골을 찾아가 만난 사람들은 모두가 서로 아끼고 돕는 그리운 이웃들이다. 요컨대 작가 오영수는 어둠 속에서도 한결같이 밝음을 찾는 작가이며, 구제받을 수 없는 악인에서조차 착한 마음씨를 찾아내는 작가이다. '인간을 부정하고는 첫째 나 자신이 살 수 없고 따라서 예술이 있을 수 없다는 이 지극히 단순하고 소박한 인간 긍정이다. 즉 부정보다는 긍정을, 악보다는 선을, 추보다는 미를 추구한다는 말이다.'라고 오영수는 자신의 문학적 입장을 밝힌 바 있거니와, 이는 이 작가의 떠 하나의 뚜렷한 일관성이다. 말하자면 그가 빚어내는 문학 세계는 착한 사람들만이 모여 사는 유토피아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과 관련하여 그의 문학 세계에서는 또 짙은 해학적 분위기가 빚어지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그의 등장 인물들이 발산하는 건강한 낙천적 분위기는 결국 그의 긍정적 인간과에서 연유된다 하겠거니와, 이런 건강한 낙천적 인간상들이 밝고 건강한 웃음을 자아내게 되는 것도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따라서 그 웃음은 어디까지나 소박한 웃음이요, 발고 따뜻한 정적 웃음이다. 채만식의 풍자에서 볼 수 있는 바 일그러진 빈정거림의 웃음도 아니고, 이상의 소피스티케이션이 빚어내는 바 싸늘한 지적인 웃음도 아니다. 그의 웃음은 오히려 소박한 사람들이 발산하는 체질적.속성적인 웃음이다. 따라서 그의 웃음은 얼핏 보기에 <봄봄>이나 <동백꽃>의 김유정의 웃음과 비슷하다. 소박하고 건강한 토속적 인간상들이 빚어내는 체질적.속성적 웃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 웃음의 밑바닥에 어딘가 허무의 동공 같은 것을 느끼게 하는 김유정의 웃음과는 달리 그의 웃음은 어디까지나 선의적이요, 긍정적인 웃음이라는 점에서 또 양자는 구별된다. <남이와 엿장수>에 있어서 사춘기 소년 소녀 사이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아련한 미소, <명암>의 등장 인물들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낙천적 분위기 등은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만화> <낮도깨비>등과 같은 그의 풍자 소설에서조차도 우리가 거기서 느끼게 되는 웃음은 가령 채만식의 풍자 소설에서 느끼게 되는 것과 같은 일그러진 빈정거림의 웃음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따뜻하고 밝은 웃음이다. 풍자는 지적인데서, 해학은 정적인 데서 작기 연유된다고 흔히들 말하고 있거니와, 그런 의미에서 그는 해학적인 작가이긴 할지언정 결코 풍자 작가라고는 할 수 없다. 그는 일관하여 따뜻한 정적인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 낚시하능 거 누구여?"

보아하니 저만치 보리밭 둑길에 지게에다 쟁기를 진 삼십 가량의 젊은 사내 일꾼과 육십이 가까워 보이는 촌로가 쇠고삐를 잡고 섰다. 그는 누구여? 그 젊은 놈이 말버릇 더럽다--싶어 들은 척도 않는다.

"아, 귀가 먹었능가, 그 누구여?"

이젠 제법 핏대를 올리고 큰 소리를 지른다. 어떻게 굴러먹은 놈이기에 말끝마다 여라--에래끼 순……그는 불끈 화가 치민다. 그러나 속담에 똥끤 년이 뭐 어쩐다고 화를 낼 명분이 신통찮다. 그는 피식! 장난기와 짜증이 뒤섞인 웃음을 한번 웃고는

"나여!"

그러자 뒤미처

"나가 누구여, 나가?"

"아, 나란께로!"

"하, 이거 사람……글씨 그 나가 누구란 말여."

"누구라고 대 줘도 모를 거여!"

"이거 정말, 사람 한번 살짝 환장하겠당께, 그 낚시 몽땅 걷지 못혀?"

"못혀!"             -<어느 여름밤의 대화>

김소운도 <오영수라는 소설쟁이>에서 격찬을 아끼지 않은 이 대문에서 우리는 오영수의 문학이 간직하는 해학적 묘미의 탁월한 샘플을 얻게 된다. 경상도 사투리를 문학적 기반으로 하고 있는 그가 전라도사투리를 이처럼 매력있게 구사하고 있는 사실도 놀랍거니와,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의 대화가 빚어내는 분위기도 독자로 하여금 미소를 금치 못하게 한다. 낚시를 하고 있는 도시 나그네와 그것을 못하게 말리는 시골 사람 사이에 오고 가는 이 장면의 대화 자체는 제법 험악한 내용의 것이다. 그러나 그 대화를 통해서 빚어지는 작중의 분위기는 오히려 여유 자적하고 평화스럽다. 옥신각신 말씨름은 주고받을망정 그들의 내심에는 조금도 악의에 찬 적의 같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낚시를 못 하게 말리는 마을 사람에 대한 도시 사람의 분위기에서 그 점을 짙게 느낄 수 있다. 즉, 옥신각신 말씨름은 주고받고 있을망정 그의 내면에는 이미 그 마을 사람에 대한 '선의'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마음속의 따뜻한 선의와 제법 험악한, 밖으로 나타나는 입씨름 사이에는 기묘한 언밸런스가 빚어진다. 이 장면의 해학적 분위기는 주로 여기서 빚어진다. 따라서 그것은 선의의 시선에서 연유되는 따뜻한 성질의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30년대의 작가 김유정과 더불어 한국 문학의 전통이 간직하는 중요한 특질의 이부를 잘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작가 오영수의 문학이 토속 세계에 대한 깊은 애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터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또 반동으로 도회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강한 혐오감 내지 기피증을 드러내기도 한다. 작가 오영수의 문학적 관심은 한결같이 토속세계 혹은 토속적 인간상에로 향해져 있다고 말환 바 있거니와, 이런 토속 세계 혹은 토속적 인간상에 대응하는 그의 문학적 패턴은 대개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유별될 수 있다. 그 하나는 <은냇골 이야기> <머루> <갯마을> 등과 같이 애당초 도시적인 것을 완전히 외면한, 철저히 폐쇄적인 상황에 배경을 설정하는 경우이다. 말하자면 철저히 토속적인 인간상들이 토속적인 세계 안에서 선의의 드라마를 펼쳐내는 세계이다. 소박하고 건강한 원시적인 삶의 양상이 거기서 펼쳐진다. 물론 <머루>의 경우와 같이 6.25라는 외부 세계의 소용돌이(그것은 현대적 요소이다)가 침입하여 유토피아와도 같은 선의의 세계를 참혹하게 유린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아무튼 이런 순박한 토속적 세계야말로 그의 문학에 있어서 주류를 이루는 세계이며, 또 그의 문학적 기반이 되고 있는 세계이기도 하다. 둘째는 <화산댁이> <박학도> <여우> <수련. <실걸이꽃> <추풍령> <안나의 유서> <어느 여름밤의 대화> 등과 같이 도회지가 배경으로 되거나, 도시 지식인이 중심 인물로 되는 경우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 있어서도 그의 궁극적인 관심은 역시 토속 세계 혹은 토속적 인간상에로 향해져 있다. 가령 도회지가 배경으로 되어 있고, 도회 지식인의 시선이 중심이 되어 있는 <박학도>에 있어서도 정작 작가적 관심의 초점이 되는 것은 전형적 시골뜨기인 박학도 쪽이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인간의 선의를 산산이 짓밟아 버리는 도시의 소용돌이 속에서 매사에 실패만 거듭하면서도 끝내 그 타고난 순박하고 건강한 속성을 고스란히 그대로 간직하며 살아가는 박학도의 모습을 부각시키는 데에 그 초점이 걸려 있다고 할 것이다. <수련> <어느 여름밤의 대화> 등과 같이 도시의 지식인이 등장하는 소설의 경우 작가적 관심의 초점이 되는 것은 역시 도시의 물결에 오염되지 않은 아름다운 자연 풍경이거나 야박한 도시 인심에 물들지 않은  순박한 시골 사람들의 생활 풍경쪽인 것이다. 셋째는 <메아리> <오지에서 온 편지> <회신> <어린 상록수> 등과 같이 도시의 소용돌이에 지치고 시달린 사람들이 그 도시를 버리고 인간의 타고난 선의가 제대로 뿌리박을 수 있는 두메산골을 찾아가는 경우이다. 말하자면 도시는 타락하고 병든 거대한 탁류에 불과하다. 이 도시의 소용돌이 속에서는 인간의 선의가 산산이 짓밟힐 수밖에 없다. 인간의 타고난 미덕이 보존될 수 없으며 인간의 건강한 생명력이 병적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인간의 타고난 선의를 되찾고, 인간의 건강한 생명력을 되찾기 위해서는 그 도시의 공해에 오염되지 않은 시골로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계열의 작품들에 일관하는 문학적 이슈는 바로 그러한 것이다.

요컨대 작가 오영수에 있어서는 그 어느 계열의 작품임을 막론하고 토속 세계 및 토속적 인간상은 한결같이 착하고 건강한 반면 도시적인 것은 한결같이 병적이고 추악하고 사악하다는 것이다. <메아리> <오지에서 온 편지> <회신> 등은 그의 반 도회적.현대적인 입장을 전형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인 동시에 전원적.토속적인 세계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전형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이기도 하다.

작가 오영수가 현대적.도회적인 것보다는 전원적.자연적인 것에 대하여 강렬하고도 한결같은 노스탤지어를 반영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의 것보다는 '어제'의 것에 대하여, 새로운 것보다는 낡은 것에 대하여, 생소한 외래적인 것보다는 친숙한 재래적인 대하여 일관하여 집착을 반영하고 있는 사실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그는 분명 회고적.전통적.배타적인 작가라 할 수 있다.

햅쌀에다 돔부며 파란콩을 섞어 지은 밥에다 햇산초 향기가 코를 찌르는 추어탕은 정말 오랜만에 먹는 진미였다.

서울에도 추어탕이랍시고 있기는 한데 이건 추어탕이라기보다는 잡탕이요, 두어 마리 미꾸라지가 하얀 눈깔로 통째로 들어 있는 것을 보고는 정나미가 떨어져 버렸다.

--<산호 물부리>

이날 이렇게 잡은 징거미와 천어를 친구 부인이 애호박이랑 풋고추랑 파랑 넣어서 매운탕을 끓였는데 이건 조금도 과장 없이 서울의 어느 매운탕보다도 맛이 좋았다.

화학 조미료로 억지맛을 낸 그런 메스께한 맛이 아니고, 원료 자체의 감칠 맛이었다.

                                              --<오지에서 온 편지>

서울의 추어탕보다는 시골 추어탕이 제격이요, 서울의 매운탕이 아니라 시골의 매운탕이라야 제맛이 난다는 것이다. 즉, 화학 조미료로 '억지맛'을 낸 '인공적'인 것이 아니라 '원료 그 자체'의  감칠 맛을 그대로 살린 '자연적'인 것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인공적인 것이 아닌 자연적인 것에 대한 취향! 그것은 이 작가가 반영하는 또 하나의 한결같은 이슈이다.

'오늘'을 버리고 '어제'를 찾는 그의 회고 취미 역시 이런 점과 긴밀히 관련된다. 가령 그의 <산호 물부리>에는 '이조란 시대를 풍겨주는 향나무와도 같은' 한 구시대의 인간상이 그려져 있다. 변모되어 가는 세태에 밀려 결국 현실의 뒷전에 물러앉을 수밖에 없으면서도, 그 야박하게 변모되어 가는 세태를 개탄하기는 할지언정 결코 거기에 동조할 것을 거부하는 한 결곡한 '이조인'의 모습이 선명하게 부각되고 있는 이 작품에 있어서 작가의 시선은 결코 그 등장 인물의 낡은 시대착오적인 모습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부박(浮薄)한 세태에 동조할 것을 끝내 거부하는 그의 결곡한 삶의 자세를 아련한 동경과 경의의 시선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새 시대의 물결에 휩쓸려 자꾸 변모되어 가는 고향의 모습을 못내 아쉬워하며 하나둘 사라져 가는 고향 어른들의 지난날을 아련히 회상하고 있는 <실향> <황혼> 등도 대체로 이와 계열을 같이하는 작품들이다. 뛰어난 의술을 지녔으면서도 약삭빠른 세태에 적응할 수 없어 결국 '생활인으로서는 낙제'일 수밖에 없는 '춘당 선생', <황혼>의 모습을 아련히 회상하고 있는 '나'의 모습에서 우리는 <산호 물부리>의 '나'의 모습을 느끼게 된다. 그들은 모두 낡은 인간상들의 낡은 면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오늘의 세태에 있어서 아쉽기 짝이 없는 어제의 소중한 것을 애써 찾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도시보다는 시골을, 도시인보다는 토속적 인간상을, 인공적인 것보다는 자연적인 것을, 오늘보다는 어제를, 새로운 것보다는 낡은 것을 채택하는 그의 작가적 입장은 그의 일련의 문학적 성격을 이룬다. 이점에서 그는 현실도피적이요, 시대착오적이요,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타당한 것이라 할 수 없다. 그가 도시의 현실을 버리고 두메 산골을 찾는 것은 인간 현실을 외면하거나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도시의 탁류에 오염되지 않은 건강한 생명을 가진 인간에의 강렬한 향수에서 연유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대신에 애써 어제 쪽으로 눈을 돌리는 것도 그렇다. 그가 자꾸 소멸되어 가는 낡은 것에 애써 눈을 돌리는 것은 단순한 퇴영적 회고 취미를 위해서가 아니라 부박한 외래 풍조에 의하여 자꾸 오염되어 가는 오늘의 세태 속에서는 좀처럼 찾기 어려운 소중한 가치 체계를 거기서 찾고자 하기 때문이다. 과거 쪽을 향하는 그의 문학이 간직하는 적극적 의의는 바로 이 점에 있다.

이러한 그의 문학적 입장은 후기로 올수록 차차 문명비판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만화> <낮도깨비> 등과 같은 우화적.풍자적인 작품에 있어서 그런 점은 분명하게 드러나거니와, 특히 <오지에서 온 편지> <회신>등에 있어서 이런 점은 두드러진다. 정통적인 사실주의적 묘사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그의 문학 세계의 전반적인 자리에서 보면 이런 작품들은 오히려 예외적인 것들이라 할 수 있다. <오지에서 온 편지>나 <회신> 등은 우선 그 문장부터가 서술 위주의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다. <만화> <낮도깨비> 등과 같은 우화적.풍자적인 작품에 있어서도 그렇거니와 특히 주관적 서술문이 위주로 되는 이런  작품들에 이르러 현대의 도시 문명에 대한 직선적인 비판자로서의 면모를 짙게 느끼게 된다. 도시 문명을 비판하는 그의 어조는 매우 격렬하다. 도시의 공해에 대한, 부박한 오늘의 세태에 대한, 탁류와도 같은 현실 상황에 대한 그의 비판은 이런 작품들의 도처에서 발견된다. 이런 비판들에서 우리는 루소의 일면을 느끼게 된다. 아닌게 아니라 <낮도깨비>에는 루소가 우화적인 인물로 등장하고 있고 <오지에서 온 편지>에는 루소의 이름을 들고 있기도 하다.

인간이 이미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비대해 버린 과학도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자연 법칙에의 적용을 거부할 때 공룡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고--이것이 즉, 자연 법칙이라고 했다.

인간이 위기를 극복하고 잃어버린 인간을 되찾는 길은 오직 자연에의 복귀만이 있을 뿐이라고 애덤슨은 거듭 다짐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경향과 추세는 나체 운동이나, 히피에서도 볼 수 있지만, 루소는 벌써 이백 년 전에, 인간은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치지 않았는가.

인간은 본래 무한한 가능성을 타고났지만, 인공적인 도시 문명의 오염에 의하여 그 아름다운 천성이 왜곡되었다. 그러니 인간은 이런 인공적인 도시 문명의 병폐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타고난 자신의 자연성 내지 본성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루소의 주장이다. 그의 주장은 문명 비평가로서의 오영수의 이슈와 일맥상통한 바가 없지 않다.

그러나 오영수는 물론 루소주의자는 아니다. 더구나 나체 운동이니 히피니 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오영수의 발상은 어디까지나  동양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라 하였을 때 루소에 있어서의 자연이란 인간의 자연성 내지 본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서구적 개인주의 내지 개성주의의 근거는 이런 데서 연유되는 것이다. 여기 비하여 오영수에 있어서의 자연은 귀의해야 할 인간의 고향으로서의 그것이다. 이 점에서 작가 오영수는 <귀거래사>의 도연명의 후손이라 할 수 있다.

동욱은 산이 좋았다. 산골에서 자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산은 깊을수록 좋고, 나무가 많을수록 좋다. 소나무보다는 잡목이 많을수록 더 좋다. 봄은 봄대로 좋고, 여름은 여름대로 좋다. 가을이 더 좋고 겨울도 싫지 않다. 이렇게 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한결 든든하고 미덥다. 산골에 돌아온 것이 마치 고향에라도 온 것처럼 마음이 흐뭇하고 너그럽다.

----<메아리>

이는 작중 인물의 시선을 빈 작가 자신의 견해로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산이란 곧 자연 그것이다. 말하자면 자연은 흐뭇하고 너그러운 고향과도 같은 것이다는 것이다.

이러한 오영수의 자연관은 그의 취미 생활을 반영하는 일련의 작품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난> <심정> 등의 작품에서 우리는 화초를 사랑하는 작자 자신의 모습에 접할 수 있고, <수련> <수변춘추> <장자늪> 등에서 낚시를 즐기는 이 작가의 모습에 접하게 된다. 그것은 자연과 벗하며 살았던 동양 선비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가 정형적인 동양적 감성의 소유자라는 것은 가령 연애 문제 같은 것에 대한 그의 입장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엄밀히 말해서 오영수의 작품 세계에는 현대적인 의미에 있어서 이른바 연애라 이름 붙일 만한 액션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가령 <남이와 엿장수>에 있어서 남이와 엿장수 사이에 빚어지는 액션, <머루>에 있어서의 석이와 분이 사이에 빚어지는 액션, <갯마을>에 있어서 도일과 혜영 사이에 빚어지는 액션 등등만 하더라도 그것들을 이른바 연애라 이름 붙이기에는 너무도 미흡한 감이 없지 않다. 거기에는 아련한 연애적 정서는 피어오르고 있을지 몰라도 연애적 드라마는 없기 때문이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가 사라지는 정서적 분위기 같은 것은 거기서 느낄 수 있지만, 에고와 에고의 부딪침 속에서 빚어지는 갈등과 방황과 전개, 한 마디로 말해서 서사적 드라마는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연애의 문제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 관계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렇다. 그는 비판적.분석적인 작가가 아니라 정서적.포용적인 작가이다. 애당초 그는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갈등 대립의 관계로서 설정하지 않는다. 인간의 소박한 선의가 파란이나 굴절의 과정없이 쉽사리 소통되는 지극히 융합적인 관계로서 설정되어진다. 따라서 거기서는 소박한 선의의 인간상들이 빚어내는 아련한 '인정의 기미'는 느낄 수 있을지언정,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갈등 관계에서 빚어내는 심리적 굴곡의 추구를 엿볼 수는 없다. 이 점에서 그는 서사적 드라마의 작가가 아니라 서정시적 분위기의 작가이며, 비판적 탐구의 작가가 아니라 시적 분위기의 조성에 치중하는 작가다. 그는 분명 전형적인 리리시즘의 작가이다. 서두에서 말한 바 그가 전형적인 단편 작가라 한 것도 이런 점과 깊이 관련된다. 또 그가 한국 사실주의의 가장 전형적인 계승자라 한 것도 그런 점과 관련된다.

더러 오영수를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그를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의 문학은 김소운의 말처럼 우선 '진짜'이기 때문이며, 그를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사람일지라도, 그가 만일 '진짜' 한국 사람이라면 결국 어쩔 수 없이 사랑하고 좋아할 수밖에 없는 그런 요소를 그는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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