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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년 도읍지를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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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년 도읍지를

 

 

오백 년이나 이어 온 고려의 옛 서울(송도, 개성)에 한 필의 말을 타고 들어가니

산천의 모습은 예나 다름 없으나, 인걸은 간 데 없다.

아, (슬프다!) 고려의 태평한 시절이 한낱 꿈처럼 허무하도다.

요점 정리

지은이 : 길재(吉再)

갈래 : 평시조

성격 : 회고적, 감상적

제재 : 오백 년 도읍지

주제 : 고려 왕조 회고 / 인간의 무상감과 멸망한 고려 왕조에 대한 탄식

표현 : 대조법, 영탄법 등을 사용하여 고려 왕조에 대한 무상감을 다양한 자연물과 풍경, 시작적, 청각적 심상을 활용하여 표현함

내용 연구

 

오백 년이나 이어 온 고려의 옛 서울(고려의 옛 서울 송도를 가리킴 / 개성)에 필마(匹馬)[한 필의 말. 벼슬을 하지 않은 신세. 즉 새 왕조[이성계]에 협조하지 않고 홀로 지내는 외로운 신세를 말함]로 타고 들어가니

 

산천의 의구(依舊)[모습은 예나 다름 없으나]하되, 인걸[고려의 신하들]은 간 데 없다.[산천의 모습은 예나 변함이 없으나, 인걸(옛 고려의 신하들)은 사라지고 없음을 한탄하는 내용이다. 대조법으로 표현되어 무상감을 느끼게 하여 두보의 시 '춘망(春望)' 중 '國破山河在(국파산하재) 城春草木深(성춘초목심) → 나라가 망하니 산과 강물만 있고 성안에 봄에는 풀과 나무만 깊어 있구나.'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어즈버[아, (슬프다!)] 태평연월(太平烟月)[고려의 태평한 시절]이 꿈[ '무상감'의 비유적 표현임]이런가 하노라[고려의 흥성했던 옛 시절이 한바탕 꿈에 지나지 않아 허무함을 영탄법으로 노래하였다.]

 

맥수지탄 : 고국의 멸망을 한탄함. 《出典》'史記' / '詩經 중국 고대 3왕조의 하나인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이 음락(淫樂)에 빠져 폭정을 일삼자 이를 지성으로 간(諫)한 신하 중 삼인(三人)으로 불리던 세 왕족이 있었다. 미자(微子), 기자(箕子), 비간(比干)이 그들이다. 미자는 주왕의 형으로서 누차 간(諫)했으나 듣지 않자 국외로 망명했다. 기자(箕子)도 망명했다. 그는 신분을 감추기 위해 거짓 미치광이가 되고 또 노예로까지 전락하기도 했다. 그러나 왕자 비간은 끝까지 간하다가 결국 가슴을 찢기는 극형을 당하고 말았다. 이윽고 주왕은 삼공(三公)의 한 사람이었던 서백(西伯)의 아들 발(發)에게 주살(誅殺) 당하고 천하는 주왕조(周王朝)로 바뀌었다. 주나라의 시조가 된 무왕(武王) 발(發)은 은왕조(殷王朝)의 봉제사(奉祭祀)를 위해 미자를 송왕(宋王)으로 봉(封)했다. 그리고 기자도 무왕을 보좌하다가 조선왕(朝鮮王)으로 책봉되었다. 이에 앞서 기자가 망명지에서 무왕의 부름을 받고 주나라의 도읍으로 가던 도중 은나라의 옛 도읍지를 지나게 되었다. 번화하던 옛 모습은 간데없고 궁궐터엔 보리와 기장만이 무성했다. 금석지감(今昔之感)을 금치 못한 기자는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읊었다.

보리 이삭은 무럭무럭 자라나고 [麥秀漸漸兮(맥수점점혜)]

벼와 기장도 윤기가 흐르는구나 [禾黍油油兮(화서유유혜)]

교활한 저 철부지(주왕)가 [彼狡童兮(피교동해)]

내 말을 듣지 않았음이 슬프구나 [不與我好兮(불여아호혜)]

[주] 기자 동래설(箕子東來說) : 기자는 주왕의 횡포를 피하여, 혹은 주나라 무왕이 조선왕으로 책봉함에 따라 조선에 들어와 예의ㅗ밭갈이ㅗ누에치기ㅗ베짜기와 사회 교화(敎化)를 위한 팔조지교(八條之敎)를 가르쳤다고 하나 이는 후세 사람들에 의한 조작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라고 함. 왜냐하면 진(晉)나라의 무장(武將)ㅗ정치가ㅗ학자인 두예(杜預:222∼284)가 그의 저서《춘추석례(春秋釋例)》의 주(註)에서 "기자의 무덤이 양(梁)나라의 몽현(夢縣)에 있다"고 적고 있는

 

더 알아보기 :

 

고려가 조선으로 바뀐 무렵, 여말의 충신들에 의해 불린 회고가의 하나로 이 시조는 '나라의 멸망에 대한 아쉬움'이라는 정서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정서를 '맥수지탄'이라는 한자 성어로 표현할 수 있다. 이 시조에서 시적 화자는 그러한 정서를 드러내기 위해 자연의 변함 없음과 인간사의 변화무쌍함을 대조시키는 표현 방법을 취함으로써 망한 고려에 대한 아쉬움을 절실하게 나타내고 있다.

이해와 감상

 

고려 유신으로서 망국의 한(恨)을 노래한 회고가로, '필마'에는 벼슬하지 않은 외로운 신세, '태평연월'에는 고려조의 흥성했던 시절, '꿈이런가'에는 무상감이 비유적으로 나타나 있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이르는 기간은 정치적인 격변기였다. 고려 왕조가 망하고 새롭게 조선이 건국됨에 따라 '군신유의(君臣有義)'라는 유학자, 선비들의 덕목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갈등이 시인들의 작품에 투영되었는데, 크게 옛 왕조에 대한 회고의 정과 변함 없는 충절을 표현한 것과, 새로운 왕조에 대한 애국 . 충절을 표현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이해와 감상1

 

조선 초기에 길재(吉再)가 지은 시조. 1수로 진본(珍本) ≪청구영언 靑丘永言≫에 수록되어 있다. 작자는 고려왕조의 몰락으로 인하여 봉모(奉母)를 핑계로 현실을 도피하여 선산(善山)에서 은거하였는데, 조선 정종 2년(1400)에 조정에서 태상박사(太常博士)의 직을 주었으나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며 거절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후진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였다.

이 작품은 고려왕조를 회고하며 지은 것은 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五百年(오백년) 都邑地(도읍지)를 匹馬(필마)로 도라드니/山川(산천)은 依舊(의구)하되 人傑(인걸)은 간듸업다/어즈버 太平烟月(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이 시조는 원천석(元天錫)의 시조 ‘흥망이 유슈하니······’와 함께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 고려의 도읍지를 돌아보며 느끼는 과거에 대한 회상(回想)·비탄(悲嘆)의 감정을 노래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그런데 원천석은 목동들의 피리소리라는 애상적인 가락을 통해 현실에서 느끼는 비감함을 그렸고, 길재(吉再)는 은성(殷盛)했던 과거에의 회고와 무상감으로 이입되는 사상을 통해 흥망성쇠의 무상함을 그렸다.

심화 자료

춘망(春望)

두보의 오언율시인 '춘망'과 내용이 비슷한 점이 있다.

 

 

國破山河在 국파산하재

城春草木深 성춘초목심

感時花 淚 감시화천루

恨別鳥驚心 한별조경심

烽火連三月 봉화연삼월

家書抵萬金 가서저만금

白頭搔更短 백두소경단

渾欲不勝簪 혼욕불승잠

나라가 망하니 산과 강물만 있고

성 안의 봄에는 풀과 나무만 깊어 있구나. (1-2행 전란으로 인한 폐허)

시절을 애상히 여기니 꽃까지 눈물을 흘리게 하고

(처자와)이별하였음을 슬퍼하니 새조차 마음을 놀라게 한다.(3-4행 전란으로 인한 상심)

전쟁이 석 달을 이었으니

집의 소식은 만금보다 값지도다. (5-6행 가족에 대한 그리움)

흰머리를 긁으니 또 짧아져서

다해도 비녀를 이지지 못할 것 같구나. (7-8행 쇠약한 육신에 대한 탄식)

'춘망'의 요점 정리

 

갈래 : 오언율시

연대 : 두보가 46세(757년)덕 2년에 지음

표현 : 선경후정, 대구법, 과장법

제재 : 전란의 상심

주제 : 전란의 비애

출전 : 두공부시언해 초간본 권10

길재

 

1353(공민왕 2)∼1419(세종 1). 고려 말과 조선 초의 학자.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 또는 금오산인(金烏山人). 아버지는 지금주사(知錦州事) 원진(元進)이며, 어머니는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추증된 김희적 (金希迪)의 딸이다.

11세에 처음으로 냉산(冷山) 도리사(桃李寺)에서 글을 배웠고, 18세에 상산사록(商山司錄) 박분(朴賁)의 아문(衙門)에 나아가서 ≪논어≫와 ≪맹자≫ 등을 읽고 비로소 성리학을 접하였다. 또한 아버지를 뵈려고 개경에 이르러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권근(權近) 등 여러 선생의 문하에 종유(從遊)하며 비로소 학문의 지론(至論)을 듣게 되었다.

1374년(공민왕 23)에 국자감에 들어가 생원시에 합격하고, 1383년(우왕 9)에는 사마감시(司馬監試)에 합격하였다.

1386년 진사시에 제6위로 급제해 그 해 가을에 청주목사록 (淸州牧司錄)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때 이방원(李芳遠)과 한마을에 살면서 서로 오가며 강마(講磨)해 정의가 매우 두터웠다.

 

1387년에 성균학정(成均學正)이 되고, 이듬해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성균박사(成均博士)로 승진되었다. 그 당시 공직에 있을 때에는 태학(太學)의 생도들이, 집에서는 양반자제들이 모두 그에게 모여들어 배우기를 청하였다.

1389년(창왕 1)에 문하주서(門下注書)가 되었으나,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서 이듬해 봄에 늙은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핑계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선산으로 돌아왔다.

1391년(공양왕 3)에 계림부(鷄林府)와 안변(安邊) 등의 교수(敎授)로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으며, 우왕의 부고를 듣고 채과(菜果)와 혜장(醯醬) 따위를 먹지 않고 3년 상을 행하였다.

 

그가 어머니를 효성을 다해 봉양하니 아내 신씨(申氏)도 그 뜻을 본받아 옷가지를 팔아서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시었다. 군사(郡事) 정이오 (鄭以吾)가 이러한 그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 오동동(梧桐洞)의 묵은 밭을 주어서 봉양에 쓰도록 하였다.

1400년(정종 2) 가을에 세자 방원이 그를 불러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했으나 글을 올려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뜻을 펴니, 왕은 그 절의를 갸륵하게 여겨 예를 다해 대접해 보내주고, 그 집안의 세금과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1403년(태종 3)에는 군사 이양(李楊)이 그가 사는 곳이 외지고 농토가 척박해 살기에 마땅하지 못하다 하여 오동동의 전원(田園)으로 옮겨 풍부한 생활을 누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소용에 필요한 만큼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되돌려보냈다.

집에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공손하며 항상 즐거움으로 근심을 잊고 영달에 뜻을 두지 않았다.

그를 흠모하는 학자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항상 그들과 경전을 토론하고 성리학을 강해(講解)하였다.

오직 도학(道學)을 밝히고 이단(異端)을 물리치는 것으로 일을 삼으며 후학의 교육에만 힘썼다. 그의 문하에서는 김숙자(金叔滋) 등 많은 학자가 배출되어, 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로 그 학통이 이어졌다.

67세로 죽으니, 후일 세상 사람들이 그를 기려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인동(仁同)의 오산서원(吳山書院)에 향사했고, 이색·정몽주와 함께 고려의 삼은(三隱)으로 일컬었다. 저서로 ≪야은집≫·≪야은속집 冶隱續集≫이 있고, 그의 언행록인 ≪야은언행습유록 冶隱言行拾遺錄≫이 전한다. 시호는 충절 (忠節)이다.

≪참고문헌≫ 冶隱集(吉再), 冶隱續集(吉再), 冶隱言行拾遺錄, 高麗史, 朝鮮王朝實錄, 海東名臣傳, 新增東國輿地勝覽, 朝鮮明倫錄, 弁齋叢話(成俔), 儒敎淵源(張志淵), 資料韓國儒學史草稿(李丙燾, 서울大學校 文理科大學 國史硏究室, 1959), 吉再(朴性鳳, 韓國의 人間像 4, 新丘文化社,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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