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예술(藝術)과 삶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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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藝術)과 삶

 본문

 

종소리가 풀밭 위로 넘쳐 내린다 ……

부드럽게, 하늘에서 부르는 목소리처럼,

 

저녁 무렵 문득 들려오는 종소리는 우리로 하여금 보다 맑고 아름다운 곳, 다른 또 하나의 세계를 생각하게 할 수 있다. 이것은 모든 예술이 지니는 한 매력이다. 그것은 잠시나마 일상 생활의 지루함과 무게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 해방은 종소리와 같은 예술의 암시가 주는 애틋한 향수의 순간일 수도 있고, 위대한 예술 작품이 깨우쳐 주는 새로운 행복과 광명의 압도적 체험일 수도 있다. 또는 그것은 더 통속적인 형태의 오락이 제공하는 일시적인 흥분일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 예술은 우리의 인생에 대립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이런 경우에 예술은 우리의 인생에 대립되는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이러나 저러나 우리의 삶의 답답함과 다른 무엇이 아니라면, 예술을 찾을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그러나 다른또 하나의 세계를 말하는 예술의 영감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참으로 다른 하나의 세계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예술이 나타내는 바 현상이나 그 표현의 매체의 관점에서, 예술은 굳건히, 어떤 초월적 세계, 초감각적인 세계가 아니라 감각적 세계, 지금 이곳의 세계에 머물러 있다고 말하여야 할 것이다. 이 감각의 세계는 반드시 극서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면서 우리가 지각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일상적 경험의 세계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이미지와 소리와 인상의 경험들 ― 이러한 것들을 떠나서, 예술가들이 무엇을 어디에서 달리 구하여 그들의 뜻을 실어 펼 수 있을 것인가? 예술과 우리의 생활은 별개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주어진 대로의 생활이 예술의 암시를 모두 구현해 가지고 있지 아니할 뿐이다. 달리 말하여 예술은 우리의 삶을 표현하되 그것의 가능성을 표현한다. 이 가능성은 삶에 있을 수 있는 것이면서 아직 어디에고 실현되어 있지 아니한 순수한 가능성을 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술가의 영감이란 것이 대체로 거대한 방법론적 도약을 꾀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주먹구구식의 직관에 의지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또 그것이 이러한 직관에 만족할 만큼 현실의 감각적 세계를 깊이 사랑하는 것이기에, 예술가가 표현하는 것은 이미 있는 삶의 어떤 면들에 특히 주먹하고 그것을 새롭게 구성하여 펴내는 구도이기 쉬운 것이다. 더러 말하여지듯이, 예술이 인생의 강렬화(intensificaton)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이것은 삶을 보다 더 진하게, 더 풍부하게 살고 싶은 욕구가 예술에 표현된다는 것인데, 우리가 예술에서 구하는 것이 모두 이렇게 설명될 수만은 없다. 주먹해야 할 것은 우리가 일상생활의 압박으로부터 예술적 해방을 구한다고 할 때의 우리의 심리 속에 들어 있을 동기이다. 앞에서 말한 첫 번째의 경우,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따분한 인생에 대한 대치물이다. 바라는 것은 주어진 인생의 가열화, 고양화, 풍부화가 아니고, 그것을 잊어버리거나 무화하거나 대체하는 일이다. 예술을 도피라고도 보상행위라고도 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이다.

 

그리고 일단 이런 도피와 보상의 자료가 되는 예술을 퇴폐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다. 퇴폐 예술은 물론 조금 더 복합적으로 생각될 필요가 있다. 위에서 이것을 우리는 일단 삶에 이탈되는 예술처럼 말하였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무엇이 삶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 삶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백일몽이나 환상에 침잠한다는 것이 되겠지만, 정신 분석이 이야기해주듯이 백일몽이나 환상도 커다란 의미에서의 인간 현실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자유로운 것인 듯하면서 오히려 우리의 자유로운 의식의 통제를 벗어나는 어두운 세력의 강박적 필연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퇴폐 예술의 영감도 궁극적으로, 또는 건전한 예술에 비하여, 더 현실 원리의 지배를 받는다. 그것의 영감은 왜곡된 현실에서 온다. 다만 그것의 강박을 반성적으로 의식하지 못할 뿐이다. 심리적 차원에서 퇴폐 예술은 의식과 의식의 불균형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더 표면적인 삶의 관점에서 말하여 그것은 전체적으로 왜곡된 삶의 관점에서 말하여 그것은 전체적으로 왜곡된 삶의 결과이다. 이 왜곡된 삶의 부분과 전체의 불균형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어떤 한 부분이 과장되고 다른 한 부분이 억압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삶의 전체가 억압적인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 결과 인간의 전체적인 완성이 불가능하여지고, 이 전체적인 자아로부터 유리된 인간은 소외를 그 주어진 삶의 조건으로부터 받아들이지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은 개인적 상황이라기보다 사회적인 조건이다. 개인은 사회의 반영이고 사회는 개인의 반영이다. 그런나 이러한 교환 관계에서 사회가 더 강한 세력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회에 있어서의 소외의 필요는 그대로 개인의 생존에 정도를 달리하여 재생되게 마련이다. 이러한 개인적, 사회적 조건에서, 예술은 소외 극복의 수단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 의도에도 불구하고, 소외를 심화하거나 적어도 소외의 상황의 일부를 이룬다. 마르쿠제가 '억압된 역승화(repressive desublimation)'라고 부르는 것이 이와 비슷한 도피와 보상 행위이다. 마르쿠제는 선진 산업국에 있어서의 알코올리즘, 야성 예찬, 도착적 성욕 충족 등이 쾌락 추구의 표현이면서, 깊은 의미에서의 불행과 소외 및 억압의 증후라고 하였지만, 이 '억압적 역승화'는 어떤 단편화된 사회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삶의 어떤 부분의 병적인 항진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이미 비친 바와 같이, 삶의 온전함이 손상되어 있기 때문이다. 감각적, 관능적인 것의 지나친 강조, 그 반대로 두뇌적인 것에 의한 비감정화, 또는 수동적인 순응과 그에 반대되는 공격적 투쟁성의 예찬, 사사로운 삶에의 집착, 구체적 삶의 이데올로기적 단순화, 이러한 인간의 단편화에 대한 가치 부여는 모두 퇴폐의 증후이다. 이러한 단편화된 인간 기능, 인간 활동이 도피와 보상의 예술적 환상의 내용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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