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by 송화은율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선귤자(蟬橘子)에게 벗 한 분이 계시니 그는 예덕 선생이라고 하는 분이다. 종본탑(宗本塔)동쪽에서 사는데 마을 안의 똥 거름을 쳐내는 것으로써 생계를 삼고 있다. 온 마을에서 그를 모두 엄 행수(嚴行首)라고 부른다. 행수는 상일을 하는 늙은이의 일컬음이요 엄은 그의 성이다. 자목(子牧)이 선귤자에게 묻기를
"그 전에 선생님이 내게 말씀하시기를 벗은 동거 생활을 하지 않는 안해(아내)요 한 탯줄에서 나오지 않은 형제라고 했습니다. 벗이란 것이 이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한다 하는 양반님네 중에서 선생님의 지도를 받고저 하는 이가 수두룩합니다. 선생님이 그런 분은 상대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엄행수로 말한다면 마을 안의 천한 사람으로서 상일을 하는 하층의 처지요 마주 서기 욕스러운 자리입니다. 선생님이 그의 인격을 높이여 스승이라고 일컬으면서 장차 교분을 맺어서 벗이 되려고 하시니 저까지 부끄러워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이제 선생님의 문하를 하직하려고 합니다."
선귤자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거기 앉게. 벗에 대한 것을 내 자네에게 이야기해 줌세. 속담에도 있거니와 의원이 제 병을 못 보고 무당이 제 굿을 못한다고 하네. 자기 생각으로는 이거야말로 내 장처(장점)라고 믿고 있는 점도 남들이 몰라 준다면 어떤 사람이나 속이 답답해서 자기 결함을 지적해 달라는 편으로 말을 꺼내게 되네. 그런데 칭찬만 하면 아첨에 가까와서 멋대가리가 없고 타박만 하면 흉보는 것으로 떨어져서 본의와 틀려지네. 그러니까 그의 장처가 아닌 점을 들추어서 어름어름 당치 않은 만진을 한단 말일세. 그렇게 적절한 내용이 아닌만큼 설사 책망이 좀 과하더라도 저편에서 골을 내지는 않을 것일세. 그러다가 숨겨 놓은 물건을 알아나 맞히는 듯이 슬그머니 그가 장처라고 믿고 있는 그 점에 언급한단 말일세. 마치 가려운 데나 긁어 준 듯이 속 마음으로 감격해 할 것일세. 가려운 데를 긁는 데도 도가 있네 그려, 등에 손을 델 때에는 겨드랑이에 가까이 가지 말고 가슴을 만질 때에는 목을 건드리지 말아야 하네. 칭찬 같지 않게 칭찬이 과연 왈칵 손목을 잡으면서 자기를 알아 준다고 할 것일세. 그래, 이렇게 벗을 사귀면 좋겠는가?"
자목이 손으로 귀를 가리우고 내빼면서 말하기를
"이건 선생님이 내게다가 장사치의 하는 일이나 하인놈의 하는 버릇을 가리키고 계십니다."
선귤자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자네가 부끄럽게 여기는 것도 과연 저기 있지 않고 여기 있는 것일세 그려. 대체 장사치의 벗은 릿속으로 사귀고 체면을 차리는 량반님네의 벗은 아첨으로 사귀네. 본래부터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세 번 달라고 해서 멀어지지 않을 사람이 없고 아무리 원수 치부하는 사이라도 세 번 주어서 친해지지 않을 사람이 없단 말일세. 그렇기 때문에 잇속으로 사귀여서는 지속되기 어렵고 아첨으로 사귀면 오래 가지 못하는 법일세. 만일 깊숙하게 사귀자면 체면 같은 것을 볼 것이 없고 진실하게 사귀자면 특별히 죽자 사지 할 것이 없네. 오직 마음으로 벗을 사귀며 인격으로 벗을 찾아야만 도덕과 의리의 벗으로 되네. 이렇게 사귀는 벗은 천년 전의 옛 사람도 아득히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요, 만리의 거리도 소격(疏隔 : 사귀는 사이가 멀어져서 왕래가 막힘)한 것이 아닐세. 저 엄행수란 분이 언제 나와 알고 지내자고 한 것일가마는 그저 내가 늘 그 분을 찬양하고 싶어서 견디지 못하네. 그가 밥을 자실 때에는 굴떡굴떡, 걸어 다닐 떼에는 어청어청, 잠을 잘 때에는 쿨쿨, 웃음을 웃을 때에는 허허, 가만히 앉아 있을 때에는 멍하니 등신( 몹시 아둔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낮추어 보는 말)과 같이 보이네. 흙으로 쌓고 짚으로 덮은 데다가 구멍을 뜷어 놓고서는 새우처럼 등을 꾸부리고 들어 가서 개처럼 주둥이를 틀어 박고 자네. 다시 아침 나절에는 즐거이 일어 나서 발채(지개위에 얹는 소쿠리 모양의 접는 물건)를 짊어지고 똥거름을 치러 마을 안으로 들어 오네. 구월에 들어 서면 서리가 내기고 시월로 잡아 들면 살얼음이 잡히네그려. 그는 뒷간에서 사람의 똥, 마굿간에서 말똥, 외양간에서 소똥, 집안 구석구석에서 닭의 똥, 개똥, 거위똥, 돼지 우리에서 돼지똥, 비둘기똥, 토끼똥, 참새의 참새똥 등 똥이란 똥을 귀한 보물처럼 모조리 걸래질해 가도 누가 염치 뻔뻔하다고 말할 사람은 없단 말일세. 혼자 이익을 남겨 먹어도 누가 의리를 모른다고 말할 사람이 없고 많이 긁어 모아도 누가 양보성이 없다고 말할 사람이 없네. 손바닥에다가 침을 탁 뱉아서 삽을 들고는 허리를 구부리고 꺼불꺼불 일을 하는 것이 마치 날짐승이 무엇을 쪼아 먹고 있는 것과 흡사하거든. 그는 화려한 외화(外華)도 힘쓰려하지 않고 풍악을 잡히며 노는 것도 바라지 않지. 돈이 많아지고 지위가 높아지는 일을 누가 원하지 않을 가만 원한다고 해서 얻어질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애초부터 부러워하지 않는단 말일세. 찬양을 한다고 해서 더 영예로운 것도 없으며 헐뜯는다고 해서 더 욕될 것이 없네 그려.
왕십리(枉十里)의 무, 살고지의 숫무, 석교(石郊)의 가지, 외, 참외, 호박, 연희궁(延禧宮)의 고추, 마늘, 부추, 파, 염교, 청파의 미나리, 이태인(利太仁)의 토란 등을 아무리 상상등의 밭에 심는다고 하더라도 엄씨의 똥거름을 가져다가 걸찍하게 가꿔야만 일년에 육천냥 돈을 벌어 들이게 되네, 그런데 그는 아침에 밥한 그릇을 먹네. 그래도 의기양양하고 저녁에 이르러서는 또 밥 한 그릇을 비우네. 누가 고기를 좀 먹으라고 권하면 고기 반찬이나 나물 반찬이나 목구멍 아래로 내려 가서 배 부르기는 마찬가지인데 입맛에 땅기는 것을 찾아 먹어서는 무얼하느냐고 하네. 또 옷 갓을 차리라고 권하면 넓은 소매를 휘두르기에 익숙지도 못하거니와 새옷을 입고서는 짐을 지고 다닐 수 없다고 대답하네. 해가 바뀌여 설이 되면 이른 아침에 처음으로 갓 쓰고 웃옷 입고 띠 띠고 신도 새로 신고, 동리 이웃간을 두루 돌아 다니며 새해 인사를 하지. 그러고 돌아와서는 헌 옷을 도로 꺼내 입고 발채를 지고 마을 안으로 들어 서거든. 엄행수와 같은 분은 더러운 상일로 높은 덕을 가리고서 세상을 크게 숨어 사는 분이 아닌가?
옛 글에 이르기를 부자와 귀인이 처지에 있어서는 부자와 귀인으로 지내고 가난하고 미천한 처지에 있어서는 가난하고 미천한 대로 지낸다고 했네. 대체 처지란 것은 이미 정해져버린 것이야. 또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아침 저녁 공무를 같이 보는 뎨도 분복이 저마다 다르다고 했네. 분복이란 것은 타고 난 것이란 말이지. 대체 모든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 날 때 각기 정해진 분복이 있는 것이니 제 분복을 가지고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새우젓을 먹게 되니 닭알 찌개가 생각나고 갈옷을 입고나면 모시 옷이 부럽게 되는 것일세. 천하가 여기서부터 어지러워지고 백성들이 와 하고 들고 일어나서 논밭을 서로 빼앗으며 이에 밭이랑이 황폐해지네.
진승, 오광, 항적의 무리가 그해 농사 일이나 하는데만 만족하고 말 사람들이였는가? 주역(周易)에서 짐질 것도 있고 탈 것도 있어서 도적을 불러 들인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을 두고 이른 말일세. 그렇기 때문에 굉장한 벼슬 자리에는 깨끗지 못한 구석이 있으며 제 힘으로 번 것이 아니고는 부호가 재산가의 칭호도 더러운 것일세.
본래 사람의 숨이 떨어지면 입안에 구슬을 넣어 주는 것도 깨끗이 가란 뜻일세 그려. 저 엄행수가 똥을 지고 거름을 데여다가 그걸로 먹고 사는 것이 지극히 깨끗지 못하다고 보겠지만 그 생활은 지극히 향기롭고 몸을 굴리는 것이 지극히 더럽다고 보겠지만 의리를 지키는 점은 지극히 높은 것일셰. 그 뜻을 미루어 생각컨대 비록 굉장한 벼슬 자리도 그를 움직이지는 못할 것일세. 이로 본다면 깨끗한 가운데도 깨끗지 못한 것이 있고 더러운 가운데도 더럽지 않은 것이 있단 말일세. 내가 먹고 입는 데서 견디기 어려운 처지에 다달으면 항상 나만도 못한 처지에 사람을 생각하게 되는데 엄행수에 이르러는 견디기 어려운 처지란 것이 없네. 진심으로서 애초부터 도적질 할 마음이 없기로 말하면 엄행수 같은 분이 없다고 생각하네. 이 마음을 더 키워 나간다면 성인(聖人)도 될 수 있을 것일세.
대체 선비가 좀 궁하다고 해서 궁기(窮氣 : 궁상스러운 느낌이나 기색)를 떨어도 수치스러운 노릇이요, 출세한 다음 제 몸만 받들기에 급급해도 수치스러운 노릇일세. 아마 엄행수를 보기에 부끄럽지 않을 사람이 거의 드물 것일세.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엄행수를 선생으로 모시려고 하고 있단 말일세. 어떻게 감히 벗으로 사귀겠다고 할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엄 행수를 감히 그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예덕 선생이라고 일컫는 것일세."
또 다른 번역
선귤자(蟬橘子)의 벗 가운데 '예덕(穢德)선생(더럽고 미천한 일을 하지만 덕이 있다는 뜻에서 붙인 호칭)'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종본탑(宗本塔) 동쪽에 살았는데, 날마다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똥을 져 나르는 것으로 직업을 삼았다. 늙은 일꾼을 '행수'라고 불렀는데, 그의 성이 엄이었다. 어느 날 선귤자의 제자 자목(子牧)이라는 사람이 스승에게 물었다.
"예전에 제가 선생님께 듣기를 '벗이란 동거하지 않는 아내요, 동기(同氣) 아닌 아우다' 하였으니, 벗이란 게 이처럼 소중하지 않습니까? 온 나라 사대부들 가운데 선생님의 뒤를 따라 하풍(下風)에 놀기를 원하는 자가 많건마는, 선생님께서는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저 '엄 행수'라는 자는 시골의 천한 늙은이로 일꾼같이 하류 계층에 처하여 부끄러운 일을 행하는데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는 자꾸 그의 덕(德)을 칭찬하면서 '선생'으로 부르고, 마치 머지 않아 벗으로 사귀고자 청하시려는 듯합니다. 제자인 저로서는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오니, 이제 선생님 문하(門下)를 떠나려 합니다."
선귤자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가만 있거라. 내가 네게 벗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리라. 이언(항간에 퍼져 있는 속담)에도 있지 않더냐? '의원이 제 병 못 고치고, 무당이 제 굿 못한다.'는 격으로, 사람마다 저 혼자 좋아하는 취미가 있어서 남들은 알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딱하게도 그의 허물을 찾으려고 애쓴단 말이야. 그러나 부질없이 그를 칭찬하기만 하면 아첨에 가깝기 때문에 멋이 없고, 오로지 그를 헐뜯기만 한다면 마치 잘못된 점만 꼬집어 내는 듯해서 비정스럽거든. 그래서 그의 아름답지 못한 점들부터 널리 들어가서 그 가장자리에나 어정거리되, 깊이 파고들진 않는 법이다. 그러고 보면 비록 그를 크게 책망하더라도 그는 노여워하진 않게 되거든. 왜냐하면 아직까지는 자기가 가장 꺼리는 곳을 꼬집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러다가 그가 좋아하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면 마치 어떤 물건을 점쳐서 알아낸 듯 마음속에서 느낌이 오는데, 마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것처럼 되지.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데에도 방법이 있거든. 잔등을 어루만지되 겨드랑이까진 이르지 말 것이며, 가슴팍을 만지더라도 목덜미까진 침범하지 말아야 돼. 그래서 중요치 않게 이야기가 그친다면, 그 모든 아름다움은 저절로 내게 돌아오는 법이지. 그도 기뻐하면서 '참으로 나를 알아주는 벗'이라고 말할 거야. 벗이란 이렇게 사귀면 되는 거지."
이 말을 들은 자목이 귀를 막고 뒷걸음질치면서 말하였다.
"이는 선생님이 저를 너무 업신여기시는 게 아닙니까? 그것은 제게 시정 잡배나 경박자(輕薄子)의 사람 사귀는 법이 아닙니까?"
선귤자는 자목을 다시 불러 앉히고,
선귤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자네는 이런 것은 부끄러워하고, 저런 것은 부끄러워하지는 않는군. 시정 잡배의 사귐은 이익으로써 하고, 얼굴의 사귐은 아첨으로 하는 법이거든. 그러므로 아무리 좋은 사일지라도 세 번만 거듭 부탁하면 틈이 벌어지지 않는 사람이 없고, 아무리 오래 묵은 원한이 있더라도 세 번만 거듭 선물하면 친절해지지 않을 사람이 없지. 그러기에 이익으로서 사귀는 것은 계속되기 어렵고, 아첨으로써 사귀는 것도 오래 가지는 않는 법이야. 대체로 커다란 사귐은 얼굴빛에 있지 않고, 아주 가까운 벗은 친절이 필요하지 않은 법이지. 오로지 마음으로 사귀면 덕으로 벗할지니, 이게 바로 '도의(道義)의 사귐'이야. 그러면 위로는 천 년 전의 사람을 벗하더라도 멀지 않을 것이며, 만 리 밖의 떨어져 있더라도 소외되지 않게 되지.
그런데 저 엄행수라는 이는 일찍이 나에게 지면(知面)을 요구한 적이 없었지만, 나는 언제나 그를 칭찬하려는 마음이 간절하였다네. 그의 손가락은 굵직굵직하고, 그의 걸음새는 겁먹은 듯 하였으며, 그가 조는 모습은 어수룩하고, 웃음소리는 껄껄대더구먼. 그의 살림살이도 바보 같았네. 흙으로 벽을 쌓고 볏짚으로 지붕을 덮어 구멍 문을 내었으니, 들어갈 때에는 새우등이 되었다가, 잠잘 때에는 개 주둥이가 되더구먼. 아침해가 뜨면 부석거리고 일어나, 흙 삼태기를 메고 동네에 들어가 뒷간을 쳐 날랐지. 9월에 서리가 내리고, 10월에 엷은 얼음이 얼어도 뒷간의 남은 찌꺼기와 말똥, 쇠똥, 또는 횃대 아래에 떨어진 닭, 개, 거위 따위의 똥이나, 입회령(돼지똥), 좌반룡(左攀龍 : 사람똥), 완월사(玩月 : 닭똥), 백정향(白丁香 : 닭똥) 따위를 가져오면서 마치 구슬처럼 여겼지. 그래도 그의 청렴한 인격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을뿐더러, 혼자 그 이익을 차지하면서도 정의에 해로움이 없었으며, 아무리 탐내어 많이 얻기를 힘쓴다고 하더라도 남들이 그더러 '사양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는 않거든.
이따금 손바닥에 침을 뱉고 나서 가래를 휘두르는데, 경쇠처럼 굽은 그 허리가 마치 새 부리처럼 생겼더군. 비록 찬란한 문장이라도 그의 뜻에는 맞지 않고, 아름다운 종이나 북소리도 그는 거들떠보지 않았어. 부귀란 것은 사람마다 모두 원하는 것이지만, 그리워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근 부러워하지 않았다네. 남들이 자기를 칭찬해 준다고 해서 더 영광스럽게 여기지도 않았고, 자기를 헐뜯는다고 해서 더 욕되게 여기지도 않는 거지.
왕십리의 배추, 살곶이다리의 무, 석교(石郊)의 가지, 오이, 수박, 호박, 연희궁의 고추, 마늘, 부추, 파, 염교 청파의 물미나리, 이태인(이태원)의 토란 따위를 심는 밭들은 그 중 상(上)의 상을 골라 쓰되, 그들이 모두 엄씨의 똥을 써서 기름지고 살지고 평평하고 풍요러워, 해마다 육천 냥이나 되는 돈을 번다는거야. 그렇지만 엄 향수는 아침에 밥 한 그릇만 먹고도 기분이 만족해지고, 저녁에도 한 그릇 뿐이지. 남들이 그에게 고기를 먹으라고 권하면, '목구멍에 내려가면 나물이나 고기나 마찬가지로 배부른데, 왜 맛있는 것만 가리겠소?'하면서 사양했다네. 또 남들이 새 옷을 입으라고 권하면, '넓은 소매 옷을 입으면 몸에 익숙지 않고, 새 옷을 입으면 길가에 똥을 지고 다니지 못할 게 아니오?'하면서 사양했다네.
해마다 정월 초하룻날이 되면 비로소 갓을 쓰고 띠를 띠며, 새 옷에다 새 신을 신었지. 이웃 동네 어른들에게 두루 돌아다니며 세배를 올리고, 다시 돌아와 옛 옷을 찾아 입더군. 다시금 흙 삼태기를 메고는 동네 한복판으로 들어가는 거지. 엄 행수야 말로 자기의 모든 덕행을 저 더러운 똥 속에다 커다랗게 파묻고, 이 세상에 참된 은사(隱士) 노릇을 하는 자가 아니겠는가? 옛 글(논어)에 이르기를 '본래 부귀를 타고 난 사람은 부귀를 행하고, 빈천을 타고난 사람은 빈천을 행해야 한다.'고 하였다네. 이 말에서 '본래'란 하늘이 정해 준 분수를 뜻하는 거지. 또 '시경'에 이르기를
아침부터 밤까지 관청에서 일하시니
타고난 운명이 나와는 다르다네
하였으니, '운명'이란 것도 분수를 말한다네. 하늘이 만물을 낳으실 때에 제각기 정해진 분수가 있었으니, 운명은 본래 타고난 것인데 그 누구를 원망하랴. 새우젓을 먹을 때에는 달걀이 생각나고, 굵은 갈옷을 입으면 가는 모시를 부러워하는 법일세. 천하가 이래서 어지러워지는 법이니, 농민이 땅을 빼앗기면 논밭이 황폐해지게 마련이지. (진시황의 학정에 반대하고 일어선) 진승, 오광, 항적의 무리로 말하더라도, 그들의 뜻을 호미나 고무래 따위에 두고 어찌 편안히 있겠는가? '주역'에 이르기를 '짊어진 사람이 수레에 탄다면 도둑에게 빼앗길 것이다'하였으니, 이를 두고 한 말이라네. 그러므로 정의가 아니라면 비록 만종(萬鍾)의 녹이라도 조촐하지 않을 것이요, 힘들이지 않고 재산을 모은 사람은 소봉(素封:부자)과 어깨를 겨눌 만큼 부유해지더라도 그의 이름을 더럽게 여기는 이가 있는 법이지. 그러므로 사람이 죽을 때에 구슬과 옥을 입에다 넣어 주는 것은 그의 깨끗함을 밝히는 거라네.
엄행수는 똥과 거름을 져 날라서 스스로 먹을 것을 장만하기 때문에, 그를 지극히 조촐하지는 않다고 말할는지는 모르겠네. 그러나 그가 먹을거리를 장만하는 방법은 지극히 향기로웠으며, 그의 몸가짐은 지극히 더러웠지만 그가 정의를 지킨 자세는 지극히 고항(高抗)했으니, 그의 뜻을 따져 본다면 비록 만종의 녹(녹은 관청에서 관원에게 사례로 주는 쌀, 보리, 콩, 명주, 배 등의 총칭 따라서 '만종의 녹'은 수많은 종류의 녹봉)을 준다고 하더라도 바꾸지 않을 걸세. 이런 것들로 살펴본다면 세상에는 조촐하다면서 조촐하지 못한 자도 있고, 더럽다면서 더럽지 않은 자도 있다네. 그래서 나는 음식을 먹다가 차마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차려졌을 때에는 반드시 나보다도 못한 사람을 생각했다네. 그런 엄행수의 경지에 이른다면 견디지 못할 게 없겠지.
누구든지 그 마음에 도둑질할 뜻이 없다면 엄행수를 갸륵하게 여기지 않을 사람이 없을 거야. 그의 마음을 미루어 확대시킨다면 성인의 경지에라도 이를 수 있을 거야. 선비의 얼굴에 가난한 기색이 나타나면 부끄러운 일이거든. 또 뜻을 얻어서 영달했다고 하더라도 그 교만이 온 몸에 흐른다면 역시 부끄러운 일이지. 그들을 엄행수에게 견주어 본다면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드물 거야. 그러니 내가 엄행수더러 스승이라고 부를지언정 어찌 벗이라고 부르겠는가? 그러기에 내가 엄행수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하고, '예덕선생'이라고 호를 지어 바쳤다네."
요점 정리
작자 : 박지원
연대 : 정조 때(18세기 후반)
갈래 : 한문 소설, 단편 소설, 풍자 소설}
성격 : 교훈적, 예찬적, 설득적, 실천적
주제 : 바람직한 교우(交友)의 도(道)와 직업적 차별 타파, 엄 행수의 무실역행(실천궁행)하는 삶
의의 : 현실에 대한 비판과 풍자를 통해 새로운 인간형을 제시하고, 인간성의 긍정과 평등 사상이 담겨 있으며, 직업차별 타파 정신이 담겨 있다.
줄거리 : 선귤자(蟬橘子 : 李德懋 이덕무의 별호)에게 예덕선생이라는 벗이 있었다. 그가 바로 종본탑(宗本塔) 동편에 살면서 분뇨를 쳐 나르는 역부의 우두머리 엄행수(嚴行首)다. 선귤자의 제자 자목(子牧)은 그의 스승이 사대부와 교유하지 않고 비천한 엄행수를 벗하는 것에 대하여 노골적으로 불만의 뜻을 표시한다. 그러자 선귤자는 이해(利害)로 사귀는 시교(市交)와 아첨으로 사귀는 면교(面交)가 오래 갈 수 없는 것이며, 마음으로 사귀고 덕을 벗하는 도의의 사귐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대체로 엄행수의 사는 모양은 어리석은 듯이 보이고, 하는 일은 비천한 것이지만 그는 남이 알아주기를 구함이 없다. 남에게서 욕먹는 일이 없으며, 볼 만한 글이 있어도 보지 않고 종고(鐘鼓 : 종과 북)의 음악에도 귀기울이지 않는 사람이다. 이처럼 타고난 분수대로 즐겁게 살아가는 그야말로 더러움 속에 덕행을 파묻고 세상을 떠나 숨은 사람이다. 그의 하는 일은 불결하지만 그 방법은 지극히 향기로우며, 그가 처한 곳은 더러우나 의를 지킴은 꿋꿋하니 엄행수를 보고 부끄러워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되랴. 이에 감히 그를 예덕선생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등장 인물 : 이 작품에 등장된 인물은 3인으로 다 같지는 않으나 서민 계급임이 특색이다.
선귤자 : 당대의 학자로 매일 똥을 푸는 직업의 천농 <엄행수>와 친교하면서 제자 <자목>에게 참다운 교제의 철학과 당시 모순과 가식된 생활 속의 위선자를 풍자하는 실재인물이다.
예덕선생 : 똥을 저 나르는 역부로서 <행수>라는 별칭을 얻는다. 그의 행적은 더러우나 입은 극히 조촐하여 <선귤자>는 그를 이 세상에서 가장 참된 은사 노릇을 한다하여 <예덕선생>이란 미
호를 비친다
자목 : <선귤자>의 제자로서 스승이 <엄생수>와 같은 역부를 우대함에 치욕을 느끼고 스승의 문하를 떠나려 한다. 그러나 스승인 <선귤자>가 신분이 서민에 지나지 않은 만중 그의 제자인 <자목>도 고상한 계층은 아닌 듯 하다.
출전 : 방경각외전
내용 연구
의원이 제 병을 못 보고 무당이 제 굿을 못한다고 하네. : 자기 일은 자기가 처리하지 못한다는 뜻
이해와 감상
예덕선생전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 ·소설가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한문 단편소설로 '연암외집(燕巖外集)'의 '방경각외전(放鷹閣外傳)'에 수록되었다. 학자로 이름난 선귤자(蟬橘子)와 인분(人糞)을 나르는엄행수(嚴行首) 사이에는 친교가 있었다. 이를 마땅치 않게 여긴 제자가 하루는 그 까닭을 스승에게 물었다. 선귤자는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벗을 이(利)로써 사귀면 오래 가지 못한다. 마음과 덕으로써 사귀는 것이 도의지교(道義之交)인데, 엄행수는 천한 일을 싫어하지 않고 가난하면서도 원망하지 않는 훌륭한 태도가 가히 군자지도(君子之道)인즉, 감희 그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그를 예덕 선생이라 높인다”고 하였다. 연암의 초기 작품으로, 양반들의 허욕과 위선을 비판한 풍자소설이다.
이처럼 작자는 엄행수에게서 생활 철학을 배운다는 선귤자의 입을 통하여 비천한 생활 속에서 즐거움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 인간을 제시하여, 본디 빈천한 이는 빈천함을 행한다는 중용의 정신을 형상화하면서 삶의 한 전형과 참다운 인간관계를 그리고 있다. 엄행수와 같은 소외되기 쉬운 서민을 등장시킨 것에서 작가의 진정한 인간의 단면을 읽을 수 있다. 예덕 선생이 분뇨를 나르는 사람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예덕선생전'이 천농사상(賤農思想)을 비판한 작품이라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으나, 이 작품에서 예덕선생이 가지는 의미는 농부나 역부로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분수를 알고 그 속에서 즐거움을 가지는 모든 인물로 확대되는 데 있다. 선귤자를 비난한 자목이 선귤자의 긴 설명을 들은 뒤에도 아무런 대답이 없는 것은 이 작품의 여운이다.
심화 자료
새로운 인간의 발견과 시대적 의미
예덕 선생전은 소외되기 쉬운 하층민을 주요 인물로 등장시켜, 그들의 삶을 조명함으로써 새로운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하였고, 바람직한 우도(友道)를 제시해서 당대의 시대상으로 보아 가장 혁신적인 것은 계급 의식의 타파에 있고, 벗을 사귀는 데 있어서 신분의 차이는 고려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이해나 아첨에 의해 맺어지는 인간 관계도 비천한 것이며 다만 진실된 마음으로 교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소 자기 분수를 지켜 욕심을 내지 않고 가식이 없는 엄행수를 선귤자라는 학자는 예덕선생이라 부르며 존경하였다. 선귤자는 소외된 천민계층의 인물 가운데서 청렴한 인격의 소유자인 그를 발견하고 그를 존경한다는 말로 새로운 인간상의 제시를 하였고, 바람직한 인간상을 제시한 것이다.
또한 예덕선생은 분뇨를 나르는 사람이라는 점에 근거하여 농사를 천시한다는 비판을 할 수가 있지만, 작품의 줄거리로 보면 예덕 선생은 직접 농사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전통적인 사계층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인물로 볼 수 있다. 그 예로 농부들에게까지 인분(人糞)을 져다 주고 돈을 받아 살아가면서 살아가던 새로운 계층으로 임금노동계층이라는 추정까지 가능하게 하는 데 그 점도 의미가 있지만, 자기의 분수를 알고 그 속에서 즐거움을 가지는 사는 인물로 확대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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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은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