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의 일생, 그 문학사적 전개
by 송화은율영웅의 일생, 그 문학사적 전개
조 동 일 (서울대, 국문학)
1. 머리말
주몽신화, 탈해신화, 많은 서사무가, ‘홍길동전’이나 ‘유충렬전’등의 소설, 이는 모두 영웅이야기다. 영웅이야기는 건국신화, 서사무가, 소설 등 여러 영역에 걸쳐서 두루 나타나며 국문학 작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국문학 연구에서 참으로 소중하게 여겨야 할 대상의 하나이므로, 일찍 그 점에 착안한 여러 선학들이 많은 논문에서 다각도로 논해왔다. 그러나 개별적인 작품이나 특수한 문제점에 관한 연구업적은 계속 누적되었지만, 영웅이야기의 전체적 성격 및 그것이 국문학에서 차지하는 위치 같은 포괄적 문제는 제대로 논의되지 않았다. 개별적 연구의 집합이 곧 전체적 연구가 아니므로, 포괄적이고도 전체적인 이해를 위한 방법이 요청된다 하겠다.
방법론의 반성에 관한 필자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첫째,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영웅의 일생에 내포된 난생, 태몽, 심지어는 태몽에 나타나는 신선, 부처, 용 등의 개별적 화소를 중요시해서 그 민속적 연원, 의미, 분포 등을 밝히는 데 치중했는데, 여기서는 영웅의 일생이라는 전체적인 유형의 이해에 역점을 두고자 한다. 화소들은 가변적이고 쉽게 차용될 수 있으며, 때로는 장식적 구실을 하는 데 그칠 수도 있으나, 유형은 그렇지 않아 영웅의 지속적인 성격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화소는 유형과의 관련하에서, 유형이 각편(version)으로 실현되면서 어떠한 변화를 겪는가 살피기 위해서 고찰의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둘째,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대개 영웅을 하나씩 다루었는데, 여기에서는 주몽에서 유충렬까지를, 더 나아가서 신소설에서도 보이는 영웅의 잔해까지도 전체적인 공통성에 착안해 한꺼번에 거시적으로 살피고자 한다. 전체적인 공통성은 바로 유형의 일치이다. 어느 영웅이나 고귀한 혈통에서 비정상적으로 출생해서, 기아가 되거나 가출해서 고난을 겪고, 투쟁을 거쳐 승리자가 된다. 유형의 일치 발견은 영웅이야기에 관한 포괄적인 이해를 가능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필연적으로 요청한다.
셋째,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영웅상의 역사적인 변모에 관해서는 그리 주목하지 않았는데, 여기서는 영웅의 일생이라는 유형이 각 시대에 따라 어떠한 상이한 각편으로 나타났는가 살펴 문학사적 연구를 꾀하고자 한다. 그리고 영웅이야기의 문학사적인 한계를 밝히고, 그 한계가 어떻게 극복되었는가를 고찰하겠다.
이러한 방법을 갖추므로 다음과 같은 문제가 제기되고 해결될 수 있다.
첫째, 영웅적 일생의 유형 대비를 통해서, 한국의 영웅이 다른 나라의 영웅과 공통적인 면이나 상이한 면을 밝혀낼 수 있으며, 영웅이야기에서 나타나는 민족적 전통의 성격 규정이 가능하다.
둘째, 고대신화가 고전소설 또는 신소설과 맺고 있는 밀접한 관련이 영웅적 일생의 유형적 일치를 통해서 밝혀질 수 있어서, 약 이천 년에 걸친 문학사의 한 종단면이 선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셋째, 고대의 귀족과 조선시대의 양반, 조선시대의 양반과 민중의 사상적․미학적 입장의 차이가 어떻게 대립․발전해왔는가 하는 문제의 일단을 영웅상의 역사적 변천을 통해서 해명할 수 있어서, 문학사 이해의 심화를 꾀할 수 있다.
2.자료 제시
건국신화 가운데 주몽과 탈해의 경우에 전형적인 영웅의 일생이 보인다. 그리고 궁예와 작제건을 이에 추가할 수 있다. 궁예의 이야기는 신화로서의 성격은 약화되어 있으나, 온전하게 갖추어진 영웅의 일생이다. 작제건은 영웅의 일생으로서는 약간 미흡한 점이 있으나, 영웅상의 역사적 변천을 살피기에 아주 유용한 자료이다.
서사무가 가운데 영웅의 일생을 노래한 것이 많으나, ‘금녕괴내깃당본풀이’와 ‘바리공주’를 택한다. 둘 다 영웅의 일생은 갖추고 있고, 서사무가를 대표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고전소설 가운데 영웅적 일대기 소설, 즉 영웅소설은 아주 흔하지만,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서 ‘홍길동전’, ‘금방울전’, ‘유충렬전’, ‘숙향전’, ‘구운몽’만 고찰의 대상으로 한다. 이 다섯 작품이면 영웅소설의 다양한 성격을 두루 포괄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신소설로는 ‘혈의누’ 한 편을 택하겠다.
앞으로 각 자료는 인물명으로 지칭한다. 기억의 편의를 위해서 다음 표를 작성하고, 아울러 출전이나 인용할 작품 자료도 밝혀둔다.
앞으로 특별히 말하지 않는 경우에는 주자료를 인용한다.
인 물 명 주자료 보조자료
주 몽 이규보, 동명왕편 삼국사기,삼국유사
탈 해 삼국사기 본기 삼국유사
궁 예 삼국사기 열전
작 제 건 고려사 세계
괴내깃도 금녕 괴내깃당본풀이
바리공주 바리공주
홍 길 동 홍길동전 경판 한남본 경판 어청교본
금 방 울 금방울전(경판본) 완판본
유 충 렬 유충렬전(완판본)
숙 향 숙향전(필사본)
양 소 유 구운몽(한문본) 국문필사본
옥 련 혈의 누
위에서 든 열두 인물의 일생은 여러 가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다. 공통적인 단락들로 이루어진 서로 일치하는 유형이다. 공통적인 단락은 다음 일곱 가지이다. 어느 인물이나 그 일생이 일곱 가지 단락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그 가운데 어느 한두 단락 정도 의미가 약화되어서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실제로 없을 수도 있으나, 일곱 단락 외에 다른 단락을 더 지니고 있는 인물은 없다.
일곱 단락은 다음과 같다.
A 고귀한 혈통을 지닌 인물이다.
B 잉태나 출생이 비정상적이었다.
C 범인과는 다른 탁월한 능력을 타고 났다.
D 어려서 기아가 되어 죽을 고비에 이르렀다.
E 구출․양육자룰 만나 죽을 고비에서 벗어났다.
F 자라서 다시 위기에 부딪쳤다.
G 위기를 투쟁적으로 극복하고 승리자가 되었다.
이러한 단락들이 각 인물의 일생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주 몽
A 천제자 해모수와 하백녀 유화의 아들이다.
B 1 해모수가 유화를 강탈해서 임신하게 했다.
2 유화가 햇빛을 품고 임신했다.
3 해모수에게서 버림받은 유화가 금와에게 구출되어 주몽을 낳았다.
4 유화가 왼쪽 겨드랑이로 알 하나를 낳았다.
C 모습이 빼어나고, 목소리 또한 웅대했으며, 몇 달 지나자 말을 하고, 활을 쏘면 빗나가지 않았다.
D 1 태어나기 전에 해모수가 유화를 버렸다.
2 난생이 상서롭지 못하다고 금와가 내다버렸다.
E 1 금와가 유화를 구출했다.
2 여러 말이 밟지 않고, 수많은 짐승이 보호해서 살아났다.
F 1 금와와 그 아들들이 주몽을 천대하고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으리라고 했다.
2 강에 이르러 배가 없어 길이 막혔다.
3 송양(宋讓)과의 싸움이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G 1 금와의 나라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2 하늘에 호소하고 활로 물을 치니 고기와 자라의 무리가 다리를 놓아 강을 건너 고구려를 건국했다.
3 송양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탈 해
A 다파나국 (삼국유사에 의하면 용성․정명․완하․화하등의 이름을 가진 나라)국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왕후이다.
B 임신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C 키가 9척이고, 모습이 빼어나며, 지식이 남달랐다.
D 사람이 알을 낳은 것이 상서롭지 못하다 해서 버리기로 하고, 궤짝에 넣어 바다에 띄웠다.
E 1 적룡이 인도했다.
2 해변노모가 구출․양육했다.
F
G 1 호공의 집을 빼앗았다.
2 남해왕의 딸과 혼인했다.
3 왕이 되었다.
궁 예
A 신라 47대 헌안왕 또는 48대 경문왕의 아들이다
B 1 어머니는 왕의 빈어이다.
2 외가에서 태어났다.
C 태어날 때 흰 빛이 무지개처럼 하늘에 뻗었고, 중오일에 태어났으므로, 날 때 이미 이빨이 있었다.
D 장차 국가에 불리하리라고 여겨 부왕이 죽이라고 했다. 사자가 강보에 궁예를 누각 아래로 떨어뜨렸다.
E 젖먹이는 여종이 받아서 도망쳐 키웠다.
F「나는 집을 떠나, 어머니를 조심스럽게 하지 않겠다」라고 하며 양모의 집을 떠났다.
G 도적의 무리에 들어가 두목 양길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
작제건
A 당천자(唐天子)의 아들이다.
B
C 어려서 슬기롭고 용맹이 뛰어나고 16세가 되자 「신궁(神弓)」이 되었다.
D 아버지를 모르고 자랐다.
E 홀어머니와 같이 지냈다.
F 1 아버지를 찾아 중국으로 가는데, 바다에 구름과 안개가 끼어 어두워졌다. 고려인이 배에서 내려야 배가 갈 수 있다고 해서 해상 바위에 내렸다.
2 늙은 여우를 쏘아 죽이라는 요청을 용왕으로부터 받았다.
G 1 늙은 여우를 쏘아 죽였다.
2 용녀와 혼인했다.
3 자손이 동쪽 땅의 왕이 되리라는 말을 들었다.
괴내깃도
A 아버지는 송당(松堂)에서 솟아난 소천국, 어머니는 강남천자국에서 솟아난 백주또로서, 부모 모두 무신(巫神)이다.
B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부모가 싸우고 별거했다.
C 많이 먹고, 무용에 뛰어났다.
D 1 아버지 없이 자랐다.
2 아버지를 찾아 갔으나, 아버지의 수염을 잡아당기고 가슴을 짓누른 죄로 쫓겨났다. 「죽일려고 되 마 죽일 순 없고 무쇠설콱에 싀설난 아 놔서 통쇠를 체와가지고 동해와당으로 띠왔」다.
E 동해용왕국에 표착해서 용왕국 셋째 딸과 혼인했다.
F 식성이 과대해서 용왕이 괴내깃도 부부를 「무쇠설곽에 들여노아서 물 밧겻디로 내띠」웠다.
G 1 강남천자국에서 표착해서 남북적을 쳐서 이겼다. 머리 둘 돋은 장수, 셋 돋은 장수, 넷 돋은 장수를 죽였다.
2 「천금상 만호후」를 거절하고 돌아와 무신(巫神)이 되었다.
바리공주
A 왕의 딸이며, 어머니는 왕비이다.
B 일곱째 공주로 태어났다.
C 1 태몽에 용이 나타났다.
2 자랄 때, 「한자를 가르치면 열자를 통하고」「천지지간 만물지중 모를 것이 가히 없나이다」라고 했다.
D 1 딸이어서, 왕비가 뒷동산에 버렸다.
2 왕이 나라가 망했다 하면서 옥함에 넣어서 바다에다 버렸다.
E 1 청학 백학, 까막까치가 보호했다.
2 석가가 비리공덕할미 부부에게 데려다 기르도록 했다.
F 부모를 죽음에서 구출할 약수를 구하러 저승으로 떠났다.
G 1 약수를 구해와 부모를 살렸다.
2 벼슬을 사양하고, 무신(巫神)이 되었다.
홍길동
A 홍판서의 아들이다.
B 시비 춘섬을 어머니로 하여 서자로 태어났다.
C 1「총명이 과인」했다.
2 도술을 지녔다.
D「본 죄이시 만일 범남 의를 두면」나라와 가문을 위태롭게 할가 염려해 가족들이 자객을 시켜 죽이려 했다.
E 1 자객을 죽이고 살아났다.
2 정처 없이 집을 떠났다.
F 1 탐관오리와 싸웠다.
2 부와 형이 길동 때문에 고난을 겪게 되었다.
3 백룡의 딸을 납치해간 요귀와 싸웠다.
4 율도국왕과 싸웠다.
G 1 탐관오리에 대해 승리했다.
2 병조판서 제수를 받고 조선을 떠났다.
3 요귀를 물리치고 백룡의 딸과 혼인했다.
4 율도국 왕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왕이 되었다.
5 가족과 다시 만났다.
금방울
A 아버지는「호협방탕」한 「김랑」이나 어머니 막씨는 열녀이다.
B 1 죽은 남편이 막씨에게 찾아와 잉태했다.
2 금방울의 모습으로 태어났다.
C 1 용녀의 적강이다.
2 신통력을 지녔다.
D 금방울로 태어났기에 어머니가 버렸다.
E 버려도 죽지 않고 되돌아왔다.
F 1 장차 남편이 될 해룡이 계모 밑에서 고생했다.
2 해룡이 요귀와 싸웠다.
3 해룡이 외적과 싸웠다.
G 1 해룡을 도와 고생에서 벗어나게 했다.
2 요귀와의 싸움에서 이기고, 해룡은 납치되어 간 공주와 혼인했다.
3 외적을 물리쳤다.
4 미녀로 바뀌어 해룡과 혼인했다.
5 해룡이 고귀하게 되고, 그와 동락했다.
유충렬
A 정직․충효로 이름이 났고, 부귀공명을 누리는 「정은주부」유심의 아들이며, 어머니 장씨는 「이부상셔」의 장녀였다.
B 부모가 늦도록 자식이 없어서 남악 형산 산신에게 빌어서 낳았다.
C 1 천상 선관의 하강이다.
2 기상이 특출하고 「명국 사마 원수」라고 몸에 박혀 있다.
D 1 간신 때문에 아비지가 귀양 갔다.
2 도망치다가 어머니를 잃었다.
3 도적들이 충렬을 죽이려고 물 속에 넣었다.
4 강승상이 투옥되고 그 집을 다시 떠났다.
E 1 물 속에 들어갔으나 바위 위에 올라 살고, 남경 상인들이 구출했다.
2 강승상에게 구출․양육되고, 그 딸과 혼인했다.
3 강승상 집에서 떠나자 도사를 만났다.
F 1 간신과 외적이 득세하여 나라가 위기에 처했다.
G 1 도사에게서 무술을 배우고 무기를 얻어 간신 및 외적과 싸워 이겼다.
2 헤어졌던 가족이 다 모였다.
3 고귀한 지위에 이르러 부귀를 누렸다.
숙 향
A 총명하고 우아하며 문장이 뛰어난 귀족 김전의 딸이며, 어머니도 귀족명문 출신이었다.
B 늦도록 자식이 없어서 명산대천에 빌어서 잉태했다.
C 천상선녀의 하강이다.
D 1 도적의 난을 만나 피난하다가 부모를 잃고 죽게 되었다.
2 강승상 집에서 나와 물에 빠져 죽게 되었다.
3 불에 타 죽게 되었다.
4 옷이 타고 배 고파 죽게 되었다.
E 1 도적이 숙행을 살려두고, 사슴이 업어 가서 강승상 부처가 구출․양육했다.
2 물에 빠진 숙향을 용녀가 구출했다.
3 불에 타 죽게 된 숙향을 화덕진군이 구출했다.
4 옷이 타고 배 고픈 숙향을 천태산 마고할미가 구출․양육했다.
F 1 이선과의 인연을 이루지 못하고 옥에서 죽게 되었다.
2 이선과 헤어져야만 되었다.
3 이선이 봉래산 등지에 가서 선약을 구해와야만 되었다.
G 1 마고할미의 도움으로 옥에서 살아났다.
2 이선과 다시 만났다.
3 이선이 선약을 구해와 황태후의 병을 치료했다.
4 고귀하게 된 이선과 동락하다가 선계로 돌아갔다.
양소유
A 본래 신선인 양처사의 아들이다.
B 양처사부인 유씨가 쉰이 넘어 잉태해서 낳았다.
C 1 남악 형산 연화봉에서 수도하던 승려 성진의 하강이다.
2 모습이 빼어나고 지식이 뛰어나며 문장이 뛰어났다.
D 1 아버지는 신선이 되어 갔다.
2 과거를 보러 가다가 병란을 만났다.
E 1 모자가 서로 의지하며 지냈다.
2 병란을 당해서 바위 속에 숨자 신선을 만났다.
F 1 팔선녀와의 인연을 이루는 데 여러 가지 고난이 있었다.
2 외적을 정벌했다.
3 고귀한 지위에 이르러 부귀를 누리다가 연화봉으로 돌아갔다.
옥 련
A 돈 잘 쓰기로 이름 있고, 나중에 미국 유학가는 김관일의 딸이다.
B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C ‘영리하고 숙성’했으며, ‘총명재질은 조선 역사에는 그러한 여자가 없다’고 했다.
D 1 전란에서 부모를 잃고 죽게 되었다.
2 일본인 군의 정상의 집에서 나와 자살했다.
3 일본인 군의의 집을 떠나 정처 없이 갔다.
E 1 일본인 군의가 구출하고 일본으로 데려가 양육했다.
2 순검이 자살하려는 옥련을 구출했다.
3 정처 없이 가다가 구완서를 만났다.
F 나라를 개화시키고자 고민했다.
G 1 미국으로 유학 갔다.
2 구완서와 혼인하기로 했다.
3 부모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3. 영웅의 일생이라는 이야기 유형
위에서 든 인물들의 일생이 서로 일치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있을까?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는 어렵다. 주몽, 탈해, 궁예, 작제건(또는 홍길동까지)은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인물일터인데, 일생이 모두 실제로 서로 같았을 수 없다. 일생이 같은 이유는 같도록 꾸며냈기 때문일 것이다. 괴내깃도, 바리공주, 금방울, 유충렬, 숙향 등의 가공적 인물의 경우에는, 일생이 같도록 지어낸 것이 더욱 분명하다. 꾸며내거나 지어내는 방식은 고대신화에서나 후대의 소설에서나 기본적으로 일치했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 인물이든 가공적인 인물이든 일정한 유형에 맞추어서 형상화한 것이다. 소설의 경우에는, 유형에 맞도록 창작하기 위해서 때로는 불필요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전개를 하기도 하는데, 그 몇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금방울전’에서 주인공이 금방울로 태어났다는 것은 ‘B. 비정상적 출생’ 을 만드는 한 방식이며, 특히 주몽이나 탈해에게 있었던 난생이란 화소의 전승이다. 금방울이란 외형상 바로 알이되, 금이라는 화소가 첨가되었다. 금이란 화소는 이미 금와의 경우에도 있었다. ‘숙향전’에서는 숙향의 부모가 피난하다가 숙향을 버리고 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꼭 그래야 할 이유는 바로 ‘D. 기아’ 라는 단락을 지녀야 했기 때문이다. ‘구운몽’에서 양소유가 과거 보러 가다가 병란을 만나 산에 숨는데, 그 대목에 병란이 나와야 할 이유가 있다면 D단락을 유지하자는 것이다. 만약 병란이 없으면 D가 공허하게 된다.
단락을 유지하기 위해 불가결한 화소들뿐만 아니라, 없다 해도 단락의 성립에는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 화소들까지도, 구성상의 필요성이 없이 소설에서 재현되기도 한다.
‘홍길동전’이나 ‘금방울전’에서, 요귀를 퇴치하고 납치되어간 여자와 혼인하는 화소는 작품상 오히려 불필요하다 할 수 있다. 그 화소가 없어도 G단락이 흔들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여전히 나타나는 이유는 작제건에서 보인 전례가 계속 전승되기 때문이다. ‘숙향전’에서 이선이 약수를 길러다 황태후를 살렸다는 화소도 바리공주에서 보인 전례의 연속이다.
요컨대, A에서 G까지의 단락들로 이루어진 영웅의 일생은 전승적인 유형이며, 이 전승적인 유형에 맞도록 창작되었기에 주몽에서 옥련까지의 여러 인물들의 일생이 서로 일치한다.
전승적 유형은 구비 서사문학에서 흔히 나타나는 것이다. 모든 구비서사문학 작품은 전해오는 이야기를 화자가 자기대로 다시 말한 것이고, 완전히 새로 지어낼 수 없다. 전해오는 이야기란 바로 유형을 그 핵심으로 한다. 전해오는 내용 가운데 유형을 이루지 않는 부분은 언제나 탈락․변화할 수 있지만, 유형은 고정되어 있다. 고정된 유형을 화자의 것으로 다시 말함으로써 각편이 성립되며, 각편은 ‘유형+화자의 창작’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승적 유형은 구비문학이 기록문학으로 전환될 때에도 계속 지속될 수 있다. 영웅의 일생이 바로 그런 본보기이다. 영웅의 일생은 ‘⑴구전, ⑵구전을 토대로 한 기록화, ⑶기록창작’, 이 세가지 과정을 통해서 이어져 왔다. 서사무가는 물론 ⑴이고, 고대신화는 아마도 ⑵일 터이고, 소설은 ⑶이다. 영웅의 일생이라는 전승적 유형이 ⑶으로서도 나타나는 현상은 어디까지나 ⑴이나 ⑵가 선행했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영웅의 일생이 전승적 유형일 수 있기 위해서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널리 타당하다고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널리 타당하다고 인정되느냐는 그 의미가 현실적 경험과 합치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가공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하더라도, 나타내는 전체적인 의미, 즉 유형적 차원의 주제는 반드시 현실적 타당성을 가져야만 그 이야기가 전승적 유형으로 존속될 수 있다. 현실적 타당성이 보편적일 때 그 전승적 유형은 시대적으로 오래 이어지고 계층적으로 넓게 받아들여지는 생명을 누릴 수 있다. 영웅의 일생은 1세기경에서 20세기까지, 건국신화로도, 서사무가로도, 고전소설로도, 신소설로도 나타나니 현실적 타당성이 상당히 보편적이리라고 인정된다.
영웅의 일생의 유형적 차원의 주제는 다음과 같이 분석될 수 있다.
주인공이 고귀한 혈통을 지닌 인물(A), 범인과는 다른 탁월한 능력을 가진 인물(C)이 아닌 경우에는 이야기가 성립되지 않는다. 고귀하고 탁월한 인물이란 바로 영웅의 기본적인 특징이다. 다시 말하면 주인공이 영웅이 아닐 때 이 유형은 성립되지 않는다.
또 한편으로 고난이나 불행(B, D, F)이 없어도 이야기가 성립되지 않는다. 유형의 구조는 다음과 같이, 행복을 위해 끊임없이 고난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으로 되어 있다.
A (고귀한 혈통) 행복.
B (비정상적 출생) 고난, A의 부정.
C (탁월한 능력) 행복, B의 부정, A의 부정의 부정.
D (기아와 죽음) 고난, C의 부정, B의 부정의 부정
E (죽음의 극복) 행복, D의 부정, A․C의 부정의 부정.
F (자라서의 위기) 고난, E의 부정, B․D의 부정의 부정.
G (투쟁에서 승리) 행복, F의 부정, A․C․E의 부정의 부정.
위의 표는 행복과 고난의 변증법적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행복은 고난과의 싸움에서 더욱 발전적으로 강화될 수 있음을 말하고, 고난은 행복을 지향하는 의지를 더욱 강하게 해주며 그 의지의 실현을 고차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계기임을 주장한다.
유형적 차원의 주제는 두가지 측면으로 요약될 수 있다. (1) 고귀하고 탁월한 영웅에게 있어서, (2) 고난은 행복을 파괴하지만 고차적인 행복을 획득할 수 있게 해준다. 주제의 두 측면 가운데 (2)는 보편적 타당성이 아주 크다고 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널리 경험할 수 있는 여러 실천적 활동, 특히 질적 비약을 가져오는 인간 활동은 (2)가 타당한 원리임을 말해준다. 그러기에 고난과 행복의 변증법은 거의 모든 문학작품의 기본구조를 이루고 있다. ‘고생 끝에 영광’이니 ‘초년고생은 금을 주고 산다’고 하는 속담이나, ‘고난-해결의 시도-좌절-해결’로 모든 유형구조가 이루어져 있는 서사민요나 고난과 행복의 변증법을 나타낸다는 점에서는 영웅의 일생과 같다. 어느 경우에나 고난이 있기 때문에 해결이 있고 행복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행복과 고난의 변증법적 전개 가운데 영웅의 일생은 그것대로의 특수성이 있고, 그 특수성의 인식에서 주제(2)의 보편타당성에 제한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특수성은 서사민요와의 비교에서 잘 드러난다. 서사민요에서는, 처음에 고난이 제시되고, 그 해결이 매우 어렵기에 좌절에 이르며, 해결이 일회적이다. 그러나 영웅이야기에서는, 처음에 행복이 제시되고, 고난의 해결이 쉬우며, 해결은 여러 번 거듭된다. 이러한 차이는 영웅이야기와 서사민요를 각기 가꾸어온 집단의 생활 현실 및 인생관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서사민요는 농민의 것이다. 농민의 생활은 고난에서 시작되고, 고난의 극복이 결코 쉽지 않으며, 극복의 방법이 현실적 또는 일상적 대결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사는 형편이다. 그리고 고난의 극복이나 해결도 흔히 역설적인 것이다.
이와는 다르게 영웅이야기는 상층의 전승이다. 상층의 생활은 행복에서 시작되고 고난의 극복은 용이하며 최종적인 해결은 승리자의 영광일 수 있다. 실제적인 승리가 아니더라도, 환상적인 승리라도 믿는다. 그러기에 주제(2)는 보편적이면서도 또한 상층의 것이라는 한계가 있다.
주제(1)은 영웅은 고귀하고 탁월한 자라고 믿는 한 유효할 수 있는 것이다. 타인보다 능력이 탁월하기에 위대한 과업을 수행하는 영웅은 어느 시대에도 있을 수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영웅이 반드시 신분상 고귀한 인물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분명히 시대적 한계를 가진다. 신분적 차별이 당연한 사회구성의 원리이고, 고귀한 신분을 가진 인물이어야만 참다운 인간일 수 있고 탁월한 능력을 지닐 수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만 주제(1)은 타당성을 유지할 수 있다. 이와는 다르게 인간은 평등해야 하고 고귀한 신분이란 실제로 세습적 지배자의 자기 분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간파되는 시기에 이르면, 그 효력을 잃고 만다.
위에서는 편의상 주제 (1)과 (2)를 따로 논했지만, 그 둘은 동일 사실의 양 측면이고 불가분의 것이다. 고귀하고 탁월한 영웅의 일생이기에 행복에서 시작되며, 고난이 계속되어도 용이하게 극복하고 영광스러운 승리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요컨대, 주제(1)이나 (2)에서나 영웅의 일생이란 유형은 민족적인 것이면서도 또한 상층의 전승이라고 할 수 있다. 1세기경에서 20세기초까지 상층의식 및 문학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을 터이나, 영웅의 일생이라는 전승적 유형은 계속 생명을 가지고 여러 작품으로 재창작되면서 많은 변화를 두루 반영해왔다.
4. 영웅의 성격 변화와 몰락 과정
집단적 영웅에서 개인적 영웅으로
영웅상의 문학사적 전개 또는 시대적 변화를 밝히는 데 있어서 우선 주목해야 할 사실은 집단적 영웅이 차츰 개인적 영웅으로 바뀐 것이다.
주몽과 탈해는 고대의 정복부족장이었다. 자기 부족을 이끌고 이주해와서는 토착부족을 정복하고 지배자가 되었기에 ‘천제자’이고 영웅일 수 있었다. 주몽이나 탈해가 ‘천제자’나 영웅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그렇다기보다는 그들의 부족 전체가 천신족이고 영웅적이라는 뜻이다. 부족의 지도자로서, 부족을 대표하는 집단적 표상으로서 개인이 존재했다.
그 시기에는 부족장과 부족민 사이의 계급적인 격차 같은 것은 아직 두드러지지 않았으며, 상층문화라고 할 만한 것도 따로 성립되지 않았으니 의식의 분열도 심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초창기적 개척정신이 용솟음치고, 군신의 주종관계가 성립되어 있으면서도 공동체적 유대가 아직 강하게 남아 있는 영웅시대’의 영웅이 주몽과 탈해이다. 나중에 고구려나 신라에서 상층과 민중 사이에 사회적․문화적 분열이 심해졌어도 일단 성립된 영웅상의 집단적 성격을 쉽게 바꾸어 놓지는 못하고, 주몽과 탈해는 공동의 건국 시조로서 숭앙되었다. 더욱이 주몽은 그 정도에 그치지 않고, 이규보의 ‘동명왕편’에 이르러서는 민족적인 영웅으로서 의의가 확대되고 외적에 저항하던 시기에 새로운 감동과 각성을 주었다. 이규보는 천하가 우리나라는 본래 성인의 고장임을 알게 하겠다는 의도에서 ‘동명왕편’을 썼다.
삼국 건국기 이래 오랫동안 영웅이 없다가 신라말, 고려초에 이르러서 궁예와 작제건이 나타나는 현상은 그 시기의 시대적 성격에 기인한다고 생각된다. 신라말, 고려초는 고전적인 영웅의 시대는 아니다. 계급의 사회적․문화적 분화가 격심하던 때이다. 그러나 ‘스스로의 진통 속에서 새로운 사회질서를 수립하는’, ‘자기 능력을 자각하였고 그 역사적인 과제를 수행하였다는 민족적 경험’의 시기였기에 영웅이 출현할 수 있었으며, 계급 분화가 격심했다는 조건에 따라 영웅의 성격이 결정되었다.
궁예는 그 시기 도적으로 출발한 영웅이다. 도적이란 바로 농민반란의 한 형태라 할 수 있고, 신라의 지배층에 대한 민중의 반항이다. 그러기에 도적의 두목인 궁예는 민중의 영웅이라는 별다른 의미의 집단적 표상이다. 그 점에서 후일의 홍길동과 상통한다. 궁예나 홍길동은 장차 역적이 될 위험이 있다고 죽이려고 하자, 타인의 힘으로 또는 스스로 도망쳐 도적이 되었다. 그러나 일단 왕이 된 궁예는 민중의 영웅이 아니고 난폭한 전제자였고, 오직 자기를 신성시하기를 강요하며 개인으로 활약하는 영웅이었다. 그러기에 쫓겨났고, 백성에게 피살되었다. 요컨대, 궁예는 민중의 영웅이라는 집단적 성격과, 그것과는 다른 개인적 성격을 아울러 지니고 있었다. 궁예에게서 개인적 영웅의 출현을 보게 된다.
작제건은 궁예를 몰아내고 왕이 된 지방호족 왕건의 선조인데, 어떤 역사적인 투쟁을 전개한 것은 아니고 왕건이 후일 고려를 건국했기 때문에 영웅일 수 있었다. 그러기에 집단적 성격은 있다고 해도 민족적인 것도 민중적인 것도 아니고, 오직 고려 왕가의 영웅일 뿐이다. 주몽이 고구려인에게, 탈해가 신라인에게 갖는 의의와 같은 것을 고려인 전체에게 갖지는 않았을 터이고, 왕이 국가의 주인이라고 하는 의미에서만 국가적인 영웅일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왕씨가 왕족이라는 점만 제외한다면, 한 가문의 영웅적 선조에 불과하고 개인적 성격이 훨씬 더 두드러졌다.
괴내깃도와 바리공주는 그 경우와는 다르게 무속이라는 신앙공동체의 영웅이다. 마을의 신인 괴내깃도는 그 마을 사람 모두가 섬긴다. 마을의 신이 아니고 일반적인 신인 바리공주는 신앙을 가진 모든 사람이 소중하게 여긴다. 괴내깃도와 바리공주의 시련과 투쟁은 신앙공동체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마치 자기의 일인 듯 생생한 감동을 주고, 자기네를 질병․재해․죽음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괴내깃도나 바리공주가 투쟁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꿈과 소망을 나타내주는 구실도 한다. 그 점에서 괴내깃도나 바리공주는 분명히 집단적 영웅이다. 그러나 괴내깃도나 바리공주는 범인과는 철저히 다른 무신이다. 신도들과 동일시될 수 있는 인물이 아니고 믿고 의지해야 할 대상이다. 더욱이 무당이라는 매개자를 통해서 일정한 의례를 거쳐서 만날 수 있는 대상이라는 점에서 범인의 세계를 초월해 있는 영웅이다.
홍길동도 집단적 영웅이면서 개인적 영웅이다. 도적의 무리를 이끌고 사회적 불평등의 시정을 위해서 싸우는 홍길동은 바로 반항적인 ‘호민’의 표상이며, 민중적 영웅의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율도국에 가서 요귀를 퇴치하고, 율도국왕과 싸워 이기는 홍길동은 민중의 영웅이 아니며 개인적인 영웅에 지나지 않는다.
금방울, 유충렬, 숙향, 양소유는 집단적 영웅이라고 할 수 없으며 개인적인 영웅일 따름이다. 모두 천상인의 하강이어서 범인과는 아주 다르고, 고난과 투쟁이 민족적인 의의도 민중적인 의의도 지니지 않는다. 그런 개인적인 영웅의 출현은 아주 중대한 변화이다. 집단적인 영웅을 고유한 의미의 영웅이라 한다면, 영웅 아닌 영웅이 나타난 것이다. 개인적이기만 한 영웅의 행위는 집단적 영웅의 경우와는 다르게 아주 기이하고 괴이하게 될 수 있다. 금방울이 그런 예이다. 홍길동의 도술은 친숙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금방울의 도술은 괴이하다. 금방울 외의 다른 인물들에서는 도술이 한정 도는 약화되거나, 다른 요소와 복합되어 괴이함을 면할 수 있었다.
집단적 표상의 후퇴는 전형성의 상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전형성을 추구하지 않고 어떤 특수한 개인을 문제삼는 경우에는 문학적 창조력이 질적으로 제약될 수 있다. 한국적 영웅상의 특징으로 든 갈등에 찬 현실주의를 계승․발전시키는 데는 적지 않은 지장이 생겼다. 영웅 아닌 영웅을 그리는 소설은 갈등으로 찬 현실주의와는 상당히 어긋나는 길을 택했다.
역사적 영웅에서 비역사적 영웅으로
다음 주목해야 할 변화는 역사적인 영웅에서 비역사적인 영웅으로 영웅상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역사적이냐 아니냐는 영웅이 살고 활동한 장소가 어딘가,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인가, 일생이 어떠한 역사의식의 반영인가 하는 세가지 각도에서 판별될 수 있다.
주몽, 탈해, 궁예 셋은 분명히 역사적인 영웅이다. 활동한 장소는 모두 한국이다. 탈해는 먼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되어 있으나 투쟁을 이 땅에서 전개하고, 신라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셋 다 실재했던 인물이다. ‘삼국사기’의 비판을 거쳐서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인물로 인정되었다. 활동한 결과인 즉 고구려의 건국, 신라의 석씨 왕계의 성립, 후고구려의 건국이 모두 역사적 사실이다.
작제건의 경우는 이와 좀 다르다. 역사적인 영웅이면서 비역사적 영웅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주된 활동을 가상적인 해도에서 전개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선조라고 하지만 실재했던 인물인지는 의심되고 있다. 고려사에서는 ‘고려의 선조는 역사 기록이 결핍되어 자세하지 않다’고 했다. 작제건의 행적을 기록한 ‘세계(世系)’는 본기와는 별도로 취급된 부분이다. 장차 왕건에 의해서 진행될 건국사업을 예건할 수 있게 한 데서만 작제건의 일생이 역사와 관련되어 있다.
홍길동도 역사적인 영웅이면서 비역사적인 영웅이다. 국내를 무대로 한 작품 전반의 홍길동과 율도국이라는 가상적인 해도를 무대로 한 작품 후반의 홍길동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洪吉童’ 또는 ‘洪吉同’이라는 이름의 도적은 실재했던 인물이다. 이들의 행적과 소설상의 홍길동이 어느 정도 일치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무리를 이끌고 관부를 습격하는 도적의 두목이 홍길동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도적이 탐관오리의 재물을 빼앗아 빈민을 구제한다는 것도 사실무근 한 일은 아니다. 홍길동의 투쟁을 통해서 사회적 불평등을 시정하자는 주장은 객관적 근거가 있는 역사의식의 반영이다. 그러나 이 땅을 떠난 후의 홍길동은 이와 다르다. 역사적 사실과 관련을 갖지 않고, 역사의식이라고 할 만한 것도 뚜렷하게 지니지 않았다.
괴내깃도와 바리공주는 비역사적인 인물이다. 한국과 가상의 세계를 왕래하지만, 활동의 주무대는 가상의 세계이다. 괴내깃도의 동해용왕국, 강남천자국이나 바리공주의 저승은 모두 무속에서 창조해낸 가상의 세계이다. 그리고 괴내깃도와 바리공주의 시련이나 투쟁은 역사적 사실의 반영도 역사의식의 구현도 아니다.
금방울, 유충렬, 숙향, 양소유도 모두 비역사적 인물이다. 모두 중국인이고 중국에서 활동한다. 작품의 서두에 시대가 명시되어 있으나, 시대를 명시하는 것이 관용적 표현이지 작품에 시대적인 의의를 부여하자는 것은 아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을 중국이라는 장소를 빌려서 이야기한 것이다. 서사무가는 가상의 세계를 설정하는데, 소설은 중국을 택하는 이유를 몇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소설은 서사무가보다 더욱 구체적인 배경과 사건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상적인 세계로서 만족할 수 없고 명확한 시간과 공간이 요구되는데, 비교적 잘 알려진 곳이며 상상력을 발동하기 쉬운 곳이 중국이다. 둘째, 무속에서는 가상적 세계의 창조가 무신의 초월적인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서 필요하지만, 소설에서는 그럴 이유가 없고 작품의 품위를 높이기 위해서는 중국을 무대로 하는 것이 적절했다. 금방울, 유충렬, 숙향, 양소유의 일생에서 어떤 역사의식을 찾기 어렵다. 처음 출발과는 다른 새로운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투쟁하지 않고 작품의 서두에 제시된 태평성대를 회복하며, 그 대가로 영달할 따름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대의 영웅은 역사적인 인물이면서 문학적인 인물이었고, 처음에는 역사와 문학이 미분화 상태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차츰 역사와 문학이 분화되었다. 역사로서의 영웅이야기는 궁예나 작제건을 마지막으로 크게 쇠퇴해서 일대기적 유형이 유지되지 못했고, 문학에서의 영웅이야기는 소설의 출현과 함께 계속 풍부하게 창조되었다.
그런 변화는 합리적이며 실증적인 사관의 성장과 더불어 더욱 촉진 되었다. 이미 김부식이나 정인지도 역사서술에서 합리성을 존중해서 영웅의 행위를 인정하는 데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으나, 실학시대에 이르러서는 실증적 비판의식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익’은 ‘이른 시기에 신빙성 있는 역사가 없고, 어리석은 풍속탓에 귀신이야기를 즐겨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고대의 영웅이야기마저도 믿을 수 없다고 하는 시대가 되니, 당대의 영웅이야기가 역사적인 성격을 지닐 수 없고 가공적인 것으로만 존속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문학이 역사로부터 분리되는 것은 당연한 추세이다. 역사는 실제로 일어난 일의 기록이고 문학이란 있을 수 있는 일을 꾸며낸 작품이므로, 문학은 역사로부터 분리될 때 더욱 자유로운 창조가 풍부하게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학이 역사로부터 분리되는 변화와 문학이 내용적으로 비역사적인 것으로 되는 변화는 성격상 구별해야 한다. 문학작품이 역사적 현실을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반영하지 않거나, 역사의식을 상실하게 되면 진실성이 훼손되고, 문학의 내용이 공허하게 될 염려가 있다. ‘홍길동전’은 역사의 기록은 아니지만, 역사적 현실의 문학적 반영이고 역사의식에 충만해 있으나, 서사무가 및 ‘금방울전’이나 ‘유충렬전’ 이하의 소설은 그렇지 않아, 현실인식이 크게 약화되었다.
서사무가에 역사의식이 구현되어 있지 않은 이유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무당은 역사창조에서 어떤 적극적인 구실을 하지 않았으며, 무속의 관념은 현실적 역사에 별로 의미가 없다고 전제해야 성립될 수 있으므로, 괴내깃도나 바리공주는 비역사적인 영웅일 수밖에 없다.
소설의 경우는 그처럼 단순하지는 않지만, 역사의식이 결여되어 있는 이유를 추론할 수 있다. ‘구운몽’ 외에는 작자가 밝혀져 있지 않으나, 윤리적 가치가 특히 존중되고, 관념적 인과의 논리에 따라 작품이 전개되어 출장입상(出將入相)의 꿈이나 부귀영화에의 도취가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는 점을 보아, 대부분의 영웅소설은 상층의식을 반영한 작품이다. 역사창조의 적극적인 의식을 가지거나 진취적 경륜을 지니기보다는 개인적 영달과 행복에 특히 깊은 관심을 가졌으므로, 역사의식을 상실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웅상의 최종적인 모습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옥련은 일단 제외해 놓은 이유는 ‘혈의 누’가 다른 영웅소설들보다 뒤에 나온 작품이고, 귀족적인 영웅상의 최종적 면모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옥련은 얼핏 보면 민족적 수난과 각성을 대변하는 집단적 표상인 듯이 생각되지만, 일반 민중과는 판연히 구분되는 선민인 개화인으로 설정되어 집단적 성격이 크게 한정된다. 더우기 ‘총명 재질은 조선 역사에는 그러한 여자가 있다고 전한 일이 없으니’라고 해서 옥련이 특이한 개인으로 이해되게 한다. 숙향이나 유충렬이 범인과는 구별되는 특이한 개인이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청일전쟁에서 부모를 잃은 옥련의 일생은 역사적 사실과 연관되고 그 나름대로 역사의식을 지니고 있으나, 작가의식이 빗나가 있다. 청일전쟁의 서술에서부터 일본인을 구원자로 내세우고, 옥련을 구출‧양육해서 개화교육을 받게 하는 은인도 일본인이다. 일본에 의지하고 서양을 추종해서 개화를 해야 한다는 주장에서, ‘입으로 조선말을 하더라도 마음에는 서양 문명한 풍속에’ 젖자는 것이 이상적인 목표로 제시되었다. 진취적 역사의식을 지니는 듯한 인상을 주면서 몰주체적인 개화관을 나타냈다.
충효라는 윤리적 가치는 약화되어 있는 대신에 개화라는 관념이 그 자리에 들어섰다. 개화된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자각이 아닌 생경한 당위론이어서 옥련의 행동을 여러 모로 제약한다. 옥련은 결코 진취적이거나 창의적인 성격이 아니며 항상 당위를 앞세워 행동한다. 특히 구완서와의 관계에서 그 점은 분명히 드러난다.
새롭게 마련된 운명론이 일생을 지배한다. 깨달은 자가 보면 만사가 필연이고 미혹하면 무엇이든 우연인 것이 운명론을 구현하는 관념적 인과의 논리였는데, 그 가운데 깨달은 자의 영역 즉 운명을 만드는 초월적 세계는 없애버리고 미혹한 세계만 남겨 놓았다. 자살을 하면 우연히 구해주는 사람이 있고, 운수가 좋아서 성공을 한다. ‘유충렬전’, ‘숙향전’, ‘구운몽’ 등에서의 운명론은 일정한 세계관의 표현이었고 그러기에 작품에서 온전한 조화를 갖추고 있었는데, 세계관의 근거는 버리고 운명론만 남겨 놓으니 만사가 오직 기이한 우연일 뿐이고, 그 속에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 그러니 진취적이거나 주체적인 인간상이나 역사의식이 성립될 수 없고, 개화라는 주제가 주인공의 행동과는 무관한 관념인 채 공전할 수밖에 없다.
옥련과 구완서의 혼인 역시 자유로운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상태에서 우연히 만났다는 운명과 개화라는관념에 따라 약속될 수밖에 없었다. 개화라는 관념이 어색해서 숙향과 이선의 경우와 같은 열렬한 애정은 기대할 수 없다. ‘혈의 누’에 이르러서는 영웅이야기의 한계가 더욱 심각하게 노출되었다. ‘혈의 누’는 영웅의 일생이라는 낡은 틀에다가 개화라는 관념을 집어 넣었기에 진실성을 아주 상실했다.
5. 마무리
지금까지의 고찰에서 얻은 결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고귀하고 탁월한 능력을 지닌 인물이 비정상적으로 태어나서 여러가지 시련을 겪다가, 성공적인 투쟁을 거쳐 승리의 영광을 차지한다는 영웅의 일생은 고대의 국조신화, 서사무가, 소설에서 두루 나타나는 오랜 전승적 유형이다. 그러기에 건국신화, 서사무가, 소설은 서로 밀접한 문학사적 관련을 가진다. ‘홍길동전’ 이후 영웅소설의 성립을 이런 각도에서 이해해야 한다.
고대의 국조영웅 특히 주몽과 탈해는 영웅시대의 표상이어서 집단적‧진취적‧주체적 성격을 분명히 지니지만, 차츰 그런 성격이 변질되었다. 궁예, 작제건 또는 서사무가에서는 이런 성격이 약화되고, ‘홍길동전’ 이후의 영웅소설에서는 개인적‧비역사적‧운명적이며 애정을 추구하는 영웅 아닌 영웅이 등장했다. 그래서 현실주의의 갈등이 퇴색되고, 조선시대 양반의 보수적 사고를 나타내는데 영웅이야기가 이용되었다. 더 나아가서 신소설에서는 몰주체적이고 관념적인 개화론이 영웅의 일생을 통해서 역설되었다. 그래서 노출된 상층 영웅소설의 한계가 민중영웅이야기 및 그 소설적 변모에 의해 극복되었다.
이러한 결론은 특히 영웅소설에 관한 잘못된 견해를 시정하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홍길동전’은 ‘수호전’의 모방으로 성립된 작품이 아니다. ‘홍길동전’은 영웅의 일생이라는 오랜 유형이 처음으로 국문으로 기록되고 창의적으로 작품화한 소설이며, 고전적인 영웅이야기와 뒤에 나올 영웅소설의 중간적 성격을 분명히 지니고 있다. 그리고 ‘유충렬전’ 등에 끼친 ‘삼국지연의’의 영향도 이와 같은 것이다. 영웅의 일생이라는 유형은 멀리 주몽이나 탈해로부터 내려온 것이며 중국소설과는 무관하다. 그리고 ‘금방울전’ ‘숙향전’은 물론 ‘구운몽’의 해석에서도 새로운 시각을 마련할 수 있게 한다. ‘구운몽’은 겉보기에 ‘홍길동전’이나 ‘유충렬전’과 관련이 없을 듯하지만 본질적으로 같은 유형이면서 상당한 변이를 겪었을 따름이다. 그 점을 종래의 ‘구운몽’ 연구자들은 간과해 왔다. 또한 고전소설과 신소설의 관계도 영웅의 일생이라는 공통점을 통해 새롭게 밝혀진다. < 민족 영웅이야기 19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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