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공용화 찬반 논쟁
by 송화은율세계화 위해 민족 버리자니…천박한 과잉 세계주의
요즘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우리의 의식 구조도 상당히 다양해져 예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주장들이 제기되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러나 최근 간행된 소설가 복거일씨의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에 실려 있는 주장들은 그런 부류의 하나로 보고 그냥 넘기기에는 너무 심각한 독이 들어 있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 번째 부분에서는 ‘민족주의를 버릴 것’을 주장하고 있고, 두 번째 부분에서는 '민족어를 버릴 것'을 주장하고 있다. ‘지구 제국’ 시대에는 민족주의나 민족어는 불필요하다는 생각에서인 것 같다. 그의 말대로 이는 대단히 ‘용감한 주 장’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그는 독도 영유권 분쟁이나 동해 표기 등의 문제가 터졌을 때 우리 사회에 나타났던 여러 부정적인 민족주의 행태를 지적하면서 이 제는 민족주의를 버릴 때가 되었다고 충고하고 있다.
“…일본과의 관계만 따진다 하더라도 둘 사이에서 약한 나라는, 그래서 둘 사이의 분쟁에서 훨씬 손해를 크게 입을 나라는 우리다. 아쉬 운 쪽은 일본이 아니다….”
그가 우리 사회에 민족주의를 버릴 것을 요구하는 이유는 우리가 상대적으로 약소국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쉽게 짐작케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강대국의 민족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약소국의 대응전략은 무엇인가. 국제 사회에 호소하고 국제 기구에 하소연하는 것인가? 그가 주장한 우리 사회의 감정적인 민족주의의 위험성에 일면 동의하면서도 그의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한 ‘민족주의 죽이기’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두 번째 주장은 ‘민족어를 버리고 영어를 모국어로 삼자’는 것이다. 그가 영어를 모국어로 삼자고 주장하는 근거는 놀랍게도 단순하다. 지금은 미국을 지도국으로 하는 ‘지구 제국’ 시대이고 이 시대에는 영어가 국제어로 자리잡고 있으므로 우리가 ‘지구 제국’ 중심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영어를 잘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영어를 처음부터 모국어로 배우는 것이 가장 낫다는 것이다. 다만 지금 당장은 민족주의자들의 맹렬한 반대로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여 국어와 함께 사용하게 하자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지구 제국’이 어떤 나라인지 그가 밝히지 않았으니 알 수는 없으나 공용어인 영어만 잘하면 그 나라의 중심부에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도 천박할 뿐만 아니라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면 모든 일이 술술 풀릴 것으로 보는 생각도 단순하고 위험하기는 그가 배척하고 있는 민족주의자들보다 더욱 심각한 수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편 영어를 국제어로 보고 국어까지 내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그가 어떻게 하여 국어 속에 들어와 있는 ‘쓰리, 와이로, 히야카시’ 같은 일본어 찌꺼기를 되살려 쓰자고 주장하게 되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일본어는 영어와 같은 반열에 있다고 생각해서 그랬을까, 아니 면 국어는 아무렇게나 의사소통을 쉽게 하는 방향으로 사용하면 되는 하급언어라고 생각해서 그랬을까. 1천년 전에 자기 정체성을 잃고 국어를 중국어의 하위 언어로 전락시켜 우리 문화와 민족의 자주성을 송두리째 짓뭉개버렸던 신라의 지식인이 21세기를 앞두고 환생한 것이 아닌지 착각하게 한다. - 남영신(조선일보1998.7.6.)
한국은 민족주의 과잉...영어 공용어는 현실
이 글은 졸저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를 비판한 남영신 씨의 ‘세계화 위해 민족 버리자고?’에 답하는 글이다. 남씨의 글을 읽으니, ‘민족주의와 민족어는 너무 예민한 주제들이어서 논의가 차분히 진행되기 어렵다는 사정’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민족주의와 민족어에 관한 내 생각은 지금 인류 사회들이 느슨하게나마 하나의 제국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바탕을 두었다. 이제 이 세상에서 국경 안에서 끝나는 일은 드물다. 정치든, 경제든, 문화든, 또는 환경 문제 등. 이번 외환 위기가 우리에게 아프게 일러준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정을 반영해서, 영어가 실질적 국제어로 자리잡았다.
놀랍지 않게도, 이제 민족주의는 점점 현실에서 유리되고 비적응적으로 되어간다. 특히 다른 민족들과 민족국가들의 권리를 존중하고 함께 살기를 거부하는 ‘닫힌 민족주의’를 지닌 사람들은 둘레에 괴로움을 끼칠 뿐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해를 입힌다.
민족주의적 열정은 불이다. 그것을 잘 다스리면, 사회에 활력이 넘치지만, 잘못 다스리면, 많은 것들을 잃는다. 우리는 민족주의적 열정을 잘 다스려서 ‘열린 민족주의’로 다듬어내야 할 것이다. 남씨의 주장과는 달리, 나는 ‘민족주의를 버릴 때가 되었다’고 한 적이 없다. 그렇게 버릴 수 있는 것이라면, 민족주의에 대해 무슨 걱정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나의 논지는, 민족주의를 추구함에 있어서, 우리가 이해득실을 냉정하게 계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몇 해 전 일본의 순시선이 독도 근해에 나타났을 때, 우리 대통령이 군함을 보내 시위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국내 정치를 겨냥한 과잉 대응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외교적으로 큰 손해를 보았다. 우리가 외환 위기를 맞자, 바로 그 대통령은 서둘러 경제 부총리를 일본에 보내 원조를 요청했다. 그나마 돈도 빌리지 못했다. 나는 이런 공허한 민족주의를 경계하는 것이다.
국제어와 민족어에 관한 내 주장을 ‘민족어를 버리고 영어를 모국어로 삼자’로 요약한 것은 지나친 단순화다. 국제어로 자리잡은 영어를 모국어로 배우지 않은 사람들이 입는 손해가 이미 너무 크고 앞으로는 더욱 커질 터이므로, 경제 논리는 사람들이 영어를 모국어로 삼도록 만든다는 것이 내 주장의 바탕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영어는 생존에 결정적인 기술이 되었고, 모두 영어를 배우는 데 큰 투자를 하고 있다. 아직 모국어도 배우지 못한 아이를 영어 학원에 보내는 부모들부터 이어폰을 끼고 영어 회화를 배우는 중년들에 이르기까지. 안타깝게도, 그런 투자는 효율이 아주 낮다. 그래서 나는 일단 영어를 우리말과 함께 공용어로 삼을 것을 제안한 것이다.
나는 독자들에게 물었다. ‘만일 막 태어난 당신의 자식에게 영어와 조선어 가운데 하나를 모국어로 고를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신은 어느 것을 권하겠는가? 한쪽엔 영어를 자연스럽게 써서 세상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고 일상과 직장에서 아무런 불이익을 보지 않고 영어로 구체화된 많은 문화적 유산들과 첨단 정보들을 쉽게 얻는 삶이 있다. 다른 쪽엔 조상들이 써온 조선어를 계속 쓰는 즐거움을 누리지만, 영어를 쓰는 것이 힘들어서 다른 나라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피하고 평생 갖가지 불이익을 보고 분초를 다투는 정보들을 뒤늦게 오역이 많은 번역으로 얻어서, 그것도 이용 가능한 정보들의 몇십만 분의 일이나 몇백만 분의 일만 얻어서, 세상 사람들과 경쟁해야 하는 삶이 있다. 당신은 과연 어떤 삶을 자식에게 권하겠는가? 아예 그에게서 선택권을 앗겠는가?’-복거일, 소설가(조선일보 98.7.7)
“지구제국”은 강대국 희망사항
강자와 약자가 서로 맞섰다고 가정할 때, 약자가 싸우지 않고 항복해 버리는 것은 일단 합리적인 선택이다. 질 것이 뻔한 싸움을 왜 하는가. 그러나 지고 나서 계속 강자만 섬긴다면 이미 노예다. 경제논리로 본다면 노예처럼 안정된 삶도 없다. 강한 주인을 만났으니 최소한의 삶은 보장된다. 또 주인을 흉내내다 보면 자기발전도 있다.
인간의 삶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다. 노예로서 편안하게 사느냐, 경제 적으로 어렵더라도 주인노릇을 하면서 제멋으로 사느냐이다. 역사를 보면, 대다수의 인간은 후자의 길을 선택하면서 살아왔다. 그래서 사람은 합리적으로만 사는 것도 아니고, 빵으로만 사는 것도 아니라고 했는지 모른다.
우리 역사에서 경제논리와 극단적 합리주의가 나라를 망친 사례가 바로 대한제국의 멸망이다. 사실 친일파들은 스스로 매국노라고 생각해본 일이 없다. 경제와 기술을 발전시키려면 강하고 앞선 나라와 하나가 되는 것이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고 믿었다. 이보다 합리적인 판단이 어디 에 있는가. 문제는 대다수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지 않은 데 있다. 그리 고 합리를 모르는, 어리석게 보이는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서 광복 에 이바지하였다. 그 덕에 오늘 우리가 있다.
요즘 IMF시대가 되면서 경제논리와 경제적 합리주의가 우리 사회의 지표가 된 듯한 느낌이다. 경제와 관련이 없는 분야까지도 경제논리와 경 제적 합리주의가 우리 사회의 지표가 된 듯한 느낌이다. 경제와 관련이 없는 분야까지도 경제논리로 촌탁하고, 그 기준에 맞춰 시비가 결정되고 있다. 사실, 시장경제 원리보다 합리적인 것은 없다. 우수한 자만이 살아남는 사회가 되어야 발전이 있다.
하지만 인간사회는 발전만이 능사가 아니고, 합리주의만이 행복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합리주의와 관계없는 문학, 예술, 종교 따위는 왜 필요한가. 오히려 합리주의가 극단으로 가면 사회가 위태롭다는 것도 기억해 두어야 한다. 적자생존을 신봉하는 경쟁원리가 제국주의를 낳았고, 그것이 세계평화를 깨지 않았던가. 개체의 발전이 반드시 더 큰 공동체 의 안정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시장경제는 무수한 약자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 여기에 문화전통이 다른 강자의 시장원리가 적용될 때에는 정서적 불안이 공동체를 급속도로 파괴할 수 있다.
지금 세계가 하나로 통일되고, ‘지구제국’이 올 것 같은 예언을 하는 것은 환상이다. 그것은 몇몇 강대국이 가진 희망사항일 뿐이다. 역사를 거시적으로 보면, 그렇게 되지도 않을 것이며, 또 그렇게 되는 것을 환영할 일도 아니다.
소설가 복거일씨의 책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는 각론 부분에서는 경청할 만한 대목이 많다. 지나친 배타적 민족주의를 비판하고 합리주의를 강조한 것도 기본적으로 옳다. 그러나 모든 사물을 경제논리로 보고, 인간이란 무엇인가, 한국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이 없는 것이 유감이다. 경제와 거리를 두어야 할 문학인의 시각이 그렇다는 것이 더욱 놀랍다.
영어를 공용어로 해야 한다는 주장도 국민을 향해서 할 이야기는 아니다. 영어가 짧아서 우리 사회의 위기가 온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기 정체성도 모르고, 분수없이 세계를 향해서 뛰다가 당한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위기는 총체적이다. 따라서 그 진단과 처방도 총체적이어야 한다. 지엽을 가지고 본질인 것처럼 과대포장하면,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를 범할 수 있다. 비단 복거일씨의 경우만이 아니다. 지금 두려운 것은 IMF 그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이 체제의 단기적 처방에만 급급하고, 인류의 미래를 문명사적인 관점에서 거시적으로 설계하는 안목의 부족이 가장 두렵다. -한영우, 서울대 교수(조선일보, 1998.7.9)
영어 ‘내것화’가 관건이다.
복거일씨의 책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문학과지성사간)가 불씨가 되어, 남영신 한영우 이윤기 제씨가 잇달아 지핀 논쟁은 민족주의와 세계주의의 대립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실제로는 아니다. 복거일씨는 ‘영어를 모국어로 삼자’고 ‘주장’하지도 않았고, ‘지구제국’이라는 말을 단순히 강대국의 세계지배라는 뜻으로 사용하지도 않았다. 만일 비판자들이 그의 책을 꼼꼼히 읽었다면, 그 안에는 진단과 처방 사이에 미묘한 길항이 있으며, 진단은 세계 질서의 현재적 흐름에 대한 지나칠 정도로 투명한 분석인 반면, 그 처방은 역설적이게도 뜨거운 민족주의적 열정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엄격히 보자면, 이 논쟁의 대립은 민족주의와 세계주의의 대립이 아니라 원리민족주의와 실용적 민족주의의 대립이다.
그러나 이 대립이 이렇게 첨예하게 부각되는 것은 단순히 오해로 인한 것만은 아닌 듯하다. 실로 이 둘 사이에는 도저히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는 빗장이 질러져 있으니, 그 빗장이란 ‘세계화’라는 세 음절 안에 집약되어 있다. 세계화란 무엇인가? 일차적으로 그것은 냉전체제의 붕괴, 경제망의 확산,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자문명의 발달에 힘입어 세계가 점차로 하나의 생활권을 형성하게 되는 현상을 뜻한다. 원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세계화는 민족국가의 운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나 지금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계화는 전혀 별개의 또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유럽의 지식인들이 자조적으로, 그러나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듯이 지금의 세계화는 곧 미국화와 동의어라는 것이 그것이다. 실로 현실사회주의 몰락 이후 정치와 경제뿐만이 아니라, 학문 문화 기술 언어 등 삶의 모든 부문들이 미국의 영향력 안에 놓이고 미국적 방식으로 재편성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며, 바로 이것이 민족주의의 심장부를 치명적인 바늘처럼 파고들어 한 패권국에 의해 여타 민족국가들이 노예의 운명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주입하는 것이다.
복거일씨의 문제제기는 그러나 팍스 아메리카나의 수락이 아니다.
복거일씨가 촉구하는 것은 세계화의 이중적 상황에서 한국인에게 요구되는 불가피한 생존조건에 대한 성찰일 뿐이다. 복거일씨는 원리 민족주의자에게 바늘이 되었던 것을 내시경으로 바꾸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내시경으로 비추어볼 때, 세계화는 역전될 수 없는 추세이고, 그것의 기본 도구들을 미국이 선점했으며, 그러나 그 도구들을 기민하게 받아들여 우리의 자산으로 제것화한다면 세계 체제 내의 능동적 참여자로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할 수 있으며, 그래야 한다는 것이 복거일씨 주장의 요체이다.
그 주장의 실천적 항목의 하나로 복거일씨가 들고 나온 것이 세상을 들끓게 하고 있는 영어 공용화론이다. 우선, 이것이 영어의 모국어화와는 다른 착상임을 지적하기로 하자. 다음, 영어가 사실상의 국제어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 그것을 다음세대들이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노력을 하는 것은 앞 세대 한국인들의 피할 수 없는 의무이다. 토론은 그 의무를 전제하고서 진행되어야 한다.
영어가 국제어가 된 오늘의 언어환경은 단순히 영어권 국가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어가 인류 전체의 자산이 될 가능성의 폭이 그만큼 넓어졌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중요한 문제는 타인의 도구를 활용하면서 어떻게 자신의 역사적 경험과 문화적 유산을 거기에 새겨넣어 실질적인 제것화를 달성하느냐이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결국 한글과 영어의 공존의 방식에 대한 토론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영어에 대한 준비와 아울러 한글의 세련화를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이중적 과제로 떠맡아야만 한다. -정과리, 충남대 교수(조선일보 98.07.13)
영어공용어는 시기상조
지난 반세기 민족주의는 아무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절대적 권위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터부에 정면으로 도전한 복거일의 용기는 대담하다. 한 사람의 언어는 곧 그 사람과 구별될 수 없으며, 한 민족의 언어는 그 민족어와 분리될 수 없다. 그럼에도 영어 공용어화를 계획해야 한다는 그의 논지는 혁신적이며 이를 전개하는 방식은 통쾌하다.
세계화는 가속화하고 있고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추세이다. 세계화는 다양한 문명권들이 ‘세계제국’으로 부를 수 있는 하나의 인류문명권으로의 통합과정이며 세계제국은 서구 특히 미국을 축으로 추진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 싫건 좋건 참여하지 않고서는 어떤 민족이나 국가도 고립화, 주변화, 퇴화, 그리고 화석화를 면할 수 없다. 세계화에의 참여는 국내적 혹은 지역적 경계를 넘어서 국제적 차원에서의 밀접하고 신속한 정보 교환을 전제로 하며, 이러한 정보유통은 모든 민족과 사회가 공유할 수 있는 공동의 언어 즉, 국제어를 필요로 한다. 싫건 좋건, 부당하건 정당하건 상관없이 앞으로 몇 세대 아니 몇 세기 더 전개될 인류 공통 ‘모국어’가 영어가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영어는 누구에게나 필수적인 생존조건의 하나이며, 영어의 능숙도는 세계화 속에서의 번영과 쇠퇴 정도를 상대적으로 가름하는 필수조건의 하나이다.
세계사의 흐름, 그리고 그러한 맥락 속에서 한국의 위상에 대한 냉철한 인식, 새로운 인류문명을 창조하는 ‘세계제국’에의 적극적 참여, 그리고 그러한 참여를 위한 필수적 조건으로서의 영어 문제등에 대해 우리는 가정적으로가 아니라 이성적으로, 냉정하게, 그리고 대담하게 혁명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폐쇄적이며 배타적인 민족주의가 우리를 감정의 게토 속에 가두어 놓아 객관적 현실을 왜곡시키고, 새로운 인류문명에 세계인으로서, 인간으로서의 동참의 길목들을 막아 놓고 있다는 것이다. 복거일의 폐쇄적 민족주의 비판은 민족주의가 산을 못보게 하는 나무와 같다는데 있다. 그의 민족주의 비판은 투명하고 옳다. 그러나 세계화의 구체적 그리고 기본적 방법을 위한 영어공용어론이 한국어보다는 영어를 더 기본적 의사소통 매체로 삼자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의 영어 공용어론은 그의 민족주의 비판만큼은 설득력이 없다.
중세 유럽 지식인들이 학문과 문명화를 위해 지방어를 버리고 ‘라틴어’를 공용어로 택한 것은 현명한 일이며 또한 그들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 사정은 그와 똑같지 않다. 설사 공용어화가 바람직하다 해도 그것은 몇 세기 후 영어가 널리 자연적으로 보급된 상황에서만 가능하다. 더구나 그러한 공용어화가 가능해서라도 7천만이 반만년 동안 물려온 정신적 유산을 담은 민족어를 생판 외국어로 대치하는 것이 합리적 선택인가는 심각히 더 논의될 문제이다. 저자가 전제하고 있는 것처럼 언어는 도구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복거일은 우리 주위에서 보기 드물게 합리적이다. 그러나 그의 영어공용론의 합리성은 의심스럽다. - 박이문, 포항공대 교수(조선일보 1998.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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