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열하일기'의 새로운 세계관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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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의 새로운 세계관  /이강엽 / 강의실 밖 고전여행 저자

   명문가의 후예로 태어나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한평생 학문에만 몰두했던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황해도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하고 있던 그에게 어느 날 청나라를 여행할 수 있는 뜻밖의 기회가 주어진다.

    이 때의 견문을 정리하여 쓴 여행기가 그의 대표작이자 우리 고전의 걸작인 『열하 일기』이다. 이 책에는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여 낙후된 조선 사회를 개혁하자는 그의 주장과 함께 수많은 일화가 담겨 있다. 참신한 문체와 독특한 수법으로 쓰여진 『열하일기』를 살펴보며,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연암 박지원이 던지는 물음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① 기행문인가, 일기인가

『열하일기』는 박지원(朴趾源,1737∼1805)이 열하(熱河.지금의 청더[承德])에 다녀온 경험을 토대로 쓴 견문기이다. 보고 들은 것을 적었다는 점에서 기행문이며, 또 그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렇게만 설명하면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기행문·일기 하면 웬만한 사람들은 수학 여행을 다녀와서 써 본 기행문이나, 초등 학교 시절의 일기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아니면 조금 더 나아가서「하룻밤에 물을 아홉 번 건넌 이야기(一夜九渡河記)」를  배운 기억을 토대로『열하 일기』의 내용을 상상해 보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열하 일기』는 전체 26권 10책이나 되는 매우 방대한 작품이며, 그만큼 여느 일기나 기행문과는 색다른 모습을 띠고 있다. 박지원은 청나라 황제의 칠순을 축하하기 위해 사신으로 가는 팔촌 형을 따라 청나라 황제의 피서지인 열하와 북중국, 남만주 일대를 두루 돌아보게 된다. 이 때 그는 그 곳 문인들과 교유한 내용이라든지 그 곳의 신기한 문물 등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했다.

  그런데 이 여행이 1780년 5월에서 10월까지 겨우 5개월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렇게 엄청난 분량의 글을 썼다는 것 자체가 신기에 가깝다. 하지만 그는 여행 중에 보고 들은 일을 기록한 문서를 한 보따리씩 가지고 다녔다고 하니 이런 작품이 공연히 나온 것은 아닌 듯하다.

이런 명편(名篇)을 만드는 데에는 그의 기록습관에다 박학 다식함이 더해졌고, 또 무엇이든 예사로 보지 않는 뛰어난 관찰력이 크게 작용했다. 게다가 사실 박지원은 팔촌 형 덕분에 사신 일행에 끼여들기는 했지만 특별히 공적인 임무가 없었기 때문에 한가하게 자신의 기록에 열중할 수 있었으니 기행문을 쓰기에는 더욱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열하 일기』는 그 성격이 일반적인 여행 견문기나 일기와는 상당히 다르다. 제목에 비록 '-일기'를 내세우고는 있지만 일기체만 고수해서는 그렇게 많은 분량을 흥미롭게 써 나가기 어렵기 때문에 특별한 구성법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즉 '압록강∼북경∼열하∼북경'까지의 대목은 일기체로 썼지만, 북경에서 머물면서 관광하던 시기는 잡록(雜錄,여러 가지 잡스러운 일을 기록한 글)의 형식을 빌리는 등 파격을 보인다. 일기 형식을 취하게 되면 그날 그날의 행적은 잘 알 수 있지만 한가지 주제를 부각시키는 데는 장애가 되기 떄문에, 주제별로 다시 묶어 집중 공략하는 방법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열하 일기』에는 신기한 문물을 보고 적은 평범한 견문기에서부터, 사상적 단상(斷想,단편적인 생각), 수필투의 문예물, 소설에 가까운 이야기 등이 아주 다양하게 실려 있다. 따라서 작품의 한 부분만 보고 이 책의 성격을 속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압록강을 건너면서의 기록', '태학관에 머물 때의 기록', '황교(黃敎,라마교, 티베트·만주·몽고·네팔 등지에 퍼진 불교의 한 파) 문답' , '요술 구경' 같은 소제목만 몇 개 훑어보아도 이런 성격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열하일기』에는 중국의 문물 제도 소개, 중국 학자들과의 문답, 중국 주위의 이민족문제, 종교나 음악 관련 논의 등 거의 백과 사전을 방불케 할 정도의 엄청난 내용이 담겨 있다. 요즘의 사례로 알기 쉽게 설명한다면, 지금 어떤 사람이 미국에 가서 한5개월 머물면서 미국의 모든 문물을 세심히 관찰하고, 학자들과 만나서 의견을 나누며, 주변의 작은 종족 문제에 관심을 갖고, 종교나 예술 등까지 두루 섭렵한 셈이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② 눈감은 조선과 박지원의 눈                

  그러나 이 정도에 놀라서는 『열하일기』를 먹기는 고사하고 맛조차 보지 못한다. 기행문을 쓰라고 하면 출발 지점에서부터 쓰고, 일기를 쓰라고 하면 아침 기상 시각부터 쓰는 사람들로서는 참으로 이해 못할 일이 벌어진다. 『열하 일기』의 첫 일기는 6월 24일에 시작한다. 시작부터가 벌써 심상치 않은 것이다.

    처음에 용만(龍灣, 의주관(義州館))에서 묵고 있던 중 열흘 날 방물(方物, 선물용 지방 물산)은 이미 도착되었고 길 떠날 날짜가 매우 촉박하던 판에 뜻밖에 비가 장마져서 두 강물이 합쳐서 불어 넘쳤다.

    그 사이 날씨는 활짝 개어 나흘이나 지났지만 수세(흐르는 물의 기세)는 점점 더 심하여 나무와 돌이 함께 굴러 내려 흙물은 하늘과 맞닿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압록강은 그 발원이 끔찍이 먼 까닭이다.

    『당서』(唐書, 당나라의 역사책)에 보면 "고려의 마자수는 그 근원이 말갈의 백산으로부터 출발했으나 그 물빛이 오리 대가리처럼 푸르다 하여 압록강이라고 부른다." 고 했다.

    이른바 백산은 장백산을 가리킨 것으로 『산해경』(山海經, 작자·연대 미상인 고대 중국의 지리책. 뤄양[洛陽]을 중심으로 산맥·하천·산물(産物)·산신(山神)·전설 등이 기록되어 있음)에는  불함산이라고 일컬었고 우리 나라에는 백두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백두산은 여러 강물의 발원지로서 그 서남쪽으로 흐르는 물이 압록강이다. 무엇이 이상한가? 박지원 일행이 서울을 떠난 것은 5월 25일인데 일기의 첫 시작은 6월 24일이다. 정상적인 기행문이었다면 다섯 달 여행 중 한 달치를 고스란히 빼먹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국경 저쪽에 있었기 때문에, 국경에 다다를 때까지의 과정은 과감하게 생략해 버린 것이다. 그는 필요 이상으로 국경 근처의 모습을 세심하게 묘사하면서 『열하 일기』의 맨 앞을 「강을 건너면서의 기록〔渡江錄〕」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압록강과 백두산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을 예사롭게 넘겨서는 안 된다. 압록강과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근원이며, 그것을 넘어서면 곧바로 중국을 만나게 되는, 곧 우리 나라와 중국의 경계이다.

이처럼 시작부터 한쪽으로는 조선을 생각하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중국을 생각하는 기묘함이 배어 있다. 그리고 강을 건너자마자 곧바로 중국의 문물에 탄복하게 된다. 강을 건너자마자 곧 만나게 되는 중국이라 봐야 중국으로서는 동쪽 귀퉁이의 벽지일텐데도 그 대단함에 놀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그것을 시기하는 마음으로 규정 짓고 "아직 그 만분의 일도 못 본 나로서 벌써 이런 그릇된 생각을 하는 까닭이 무엇일까."라며 스스로를 경계한다. 이어서 그는 세상을 두루 잘 살핀다면 온 세상이 평등한 것을 알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저절로 시기심이나 부러움 같은 것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난데없이 다음과 같은 문답이 이어진다.

나는 장복에게 물었다.
"장복아, 네가 만일 죽어서 중국에 한번 태어난다면 어떻겠느냐?"

장복이 대답했다.
"천만에요. 쇤네는 싫습니다요. 중국은 되놈 땅이니까요."

마침 한 장님이 어깨에 비단 주머니를 둘러메고 손으로 월금(月琴, 중국에 전해 오는 현악기의 하나)을 타면서 지나갔다.. 나는 깨달았다. 응! 저것이야말로 정말 평등한 눈이로구나.

  장복은 박지원이 데리고 간 하인이다. 천하의 박지원도 중국에 들어서면서부터는 기가 죽었는데, 그 하인은 지금 중국이 오랑케 땅이라며 폄하고(남을 깎아 내려 말하고) 있다. 만주족이 다스리는 청(淸 )나라를 그렇게 생각한 것인데 실로 난감한 일이다. 그리고는 곧바로 이어지는 것이 맹인 악사 이야기이다.

맹인으로서는 큰 소용이 없을 것 같은 비단 주머니를 차고 악기를 불면서 가는 맹인 악사를 통해, 박지원은 사실 '조선'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장복이나 맹인 악사는 그러니까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눈을 꾹 감고 있는 조선의 상징인 셈이다. 따라서 여기서 '평등한 눈'이라고 말한 것은 박지원이 염원하던 진정으로 평등한 눈이 아니다. 아무 것도 볼 생각을 하지 않고 또 눈을 감고 있어서 무엇이든 똑같이 안 보이는, 그런 어리석은 평등함인 것이다.

  이처럼 제 속을 툭 터놓고 말하기보다 이런 장치를 동원하여 은근하면서도 신랄하게 풍자하는 기법이 예사롭지 않다. 이 점에서 박지원은 『열하 일기』를 통해 눈감고 있는 조선의 눈이 되어 조선과 조선인을 일깨워 주는 역할을 자임(自任)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③ 오랑캐가 따로 없다!                              

박지원과 함께 중국에 갔던 사신 일행은 280여 명이었다고 한다. 요즘처럼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에 그 정도의 인원이 중국을 다녀온다는 것은 생각만해도 끔찍한 일이다. 그런데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북경에 도착하고 보니 그들의 인사를 받아 줄 황제가 피서를 떠나고 없어 사신 일행은 하릴없이 돌아와야 할 처지에 놓이고 만다.

그러나 조선 사신 일행은 다행히 황제의 '은혜'를 입어 피서지까지 가서 인사를 드릴 수 있는 '영광'을 얻는다. 그리하여 불과 일주일도 못 되는 사이에 북경에서 만리장성을 거쳐 열하까지 무려 200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다시 이동했던 것이다.

  그 유명한 「일야구도하기」가 바로 이런 급박한 상황을 소재로 한 글임을 생각해 두자. 혹시라도 예민한 사람이라면 이 글의 문학적 우수성 여부를 떠나서 왜 밤중에 강을 아홉 번이나 건너야 했는지 의아했을 것이다. 그러면 황제의 명령을 받고, 있는 힘껏 열하로 내달리던 조선 사신의 딱한 처지를 헤아려 보는 것도 좋겠다.

  아마도 이쯤에서 분통을 터뜨리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 고작 생일 축하를 하기 위해 그런 고생과 수모를 다 겪었단 말인가 하고 말이다. 그러나 중국과 조선의 관계를 생각하면 그 정도는 약과이다. 당시 국제 정세는 중국이 중화(中華, 옛날 중국인이 주위 민족을 야만시하고 자기네 나라가 세계의 중앙에 위치한 가장 문명한 나라라는 뜻에서 일컫던 말), 즉 세계의 중심이고 나머지 나라는 모두 변방의 오랑캐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열하에서 목격한 광경은 그런 기존 관념을 완전히 뒤엎는 것이었다. 지금도 티베트에 가면 라마교라는 종교가 있고, 이 종교에서는 환생한 부처라는 '달라이 라마'를 최고의 지도자로 삼고 있다. 그런데 중국 황제가 이 라마를 위해 잔치를 베풀고, 또 그에게 최대한의 경위를 표하고 있었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가) 막 햇빛에 번쩍이는 금기와를 보고 전각(궁전과 누각(사방이 탁 트이게 지은 다락집))속에 들어서 보니 집안은 침침하고 그가 입은 옷가지는 모두 금실로 짰으므로 살빛은 샛노랗게 되어 마치 황달병에 걸린 사람만 같았다. 대체로 누런 금 빛깔로 팅팅 부어 터질 듯 꿈틀꿈틀 근지럽게도 살은 많고 뼈는 적어서, 맑고 영특한 데라고는 없고 보니 까맣게 쳐다볼 만하게 하고 앉은 덩어리가 방에 가득 찼으나 보기에 겁나 보이지를 않고 멍청한 것이 무슨 물귀신 화상만 같아  보였다.

  (나) 황제는 내무관을 시켜 조서를 전달하는데 오색 능단(綾緞, 두꺼운 비단과 얇은 비단) 폐백을 가지고 반선(班禪, 달라이 라마)을 보도록 하였다. 내무관은 손수 비단을 제 쪽으로 내어 사신에게 주었다. 이는 '합달' 이란 것인데 반선이 제 스스로 일컫기를 그의 전신(前身)이 '파사팔' 이라 하고, 파사팔은 그 어머니가 향내 나는 수건을 삼키고 낳았으므로 반선을 보는 자는 으레 수건을 가지고 보는 것이 예절로 되어 있어 황제도 반선을 볼 때마다 역시 누런 수건을 가지고 본다고 한다. 당초 군기 대신의 말로는 황제도 머리를 조아리고 황육자(皇六子)도 머리를 조아리고 부마도 머리를 조아리니 금번 사신도 응당 가서 머리를 조아리고 뵈어야 한다고 했다.

   (다) 사신은 이미 아침에 예부와 다투면서 말하기를, "머리를 조아리는 예절은 천자의 앞에서나 하는 예절인데 이제 천자에 대한 예절을 서번(西蕃, 서쪽의 오랑캐)중에게 할 수 있겠소?"

  이렇게 다투는 중에 예부는 말하기를, "황제도 스승의 예로 대우하는 터이니 사신이 황제의 명령을 받들었을 바에는 같은 예로써 하는 것이 마땅하다."

  (가)는 박지원이 본 티베트 종교 지도자의 모습인데 상당히 악의적으로 그려져 있다. 위엄이나 기품은 전혀 찾아볼 데 없는 천박한 인상인 것이다. 그런데 (나)에서 보듯이 천하를 호령하는 중국 황제조차도 그에게 깍듯이 예의를 표하고 있어, (가)와 비교할 때 상당히 당혹스러운 느낌을 준다. 중국이 중화(中華)라면 우리는 소중화(小中華)라고 자부하던 조선으로서는 납득하기 곤란한 일이다. 한갓 오랑캐가 믿는 종교의 지도자에게, 그것도 인간적으로 하나도 존경스럽지 않은, 게다가 조선에서는 그토록 무시하는 승려인 그런 인물에게 황제가 그 정도의 극진한 예를 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와 같은 일이 생기고 만다. 한갓 오랑캐 중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표할 수 없다는 것이며, 황제도 예를 표하는데 황제께 인사 드리러 온 사신이 예를 표하지 않는 것은 결례라는 중국측과 옥신각신하는 대목이다.

박지원이 이런 세 부분을 함께 늘어놓은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박지원은 중국이 몽고나 티베트 등 변방의 이민족을 통치하기 위하여 황제가 머리를 쓰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황제가 피서를 빙자하여 열하에 와서 그들에게 상당한 대우를 하면서, 이른바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함)' 전법을 구사하고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이 그토록 무시하던 오랑캐들이 황제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는 기이한 일이 생기고, 그 현장을 목격한 박지원은 그런 변화를 잘 읽어 내고 있었다.

  하지만 사신들은 여전히 중화[華]와 오랑캐[夷]를 명확히 갈라내는 화이관(華夷觀)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 국제 정세는 이제 더 이상 중국만이 세계의 중심일 수도 없고 중국 변방의 나라라고 해서 오랑캐로 마냥 폄할 수만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박지원은 그런 변화를 감지하고 그 변화에 걸맞은 인식의 전환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즉 중심과 주변을 고정 시켜 놓고 보는 절대주의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어느 곳이나 중심이고 또 주변일 수 있다는 융통성 있는 세계관을 가질 것을 역설한다고 하겠다.

   ④ 호기심과 과학 정신                        

그러나 세계관의 변화를 부르짖는 것만으로는 공허한 계몽주의에 그칠 공산이 크다. 지금도 '신지식인' 운동이니 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지식을 찾을 것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지만, 그것이 고작 텔레비전 공익 광고에 그친다면 공염불일 뿐이란 말이다. 세계관은 그냥 변하지 않는다. 누구든 주체적으로 나서서 그 일을 감당할 때야 힘겹게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열하일기』는 작품 전체가 다 그런 변화를 위한 몸부림이라고 할 만큼 철저하고 집요하다.

  타는 수레는 태평차(太平車)라 한다. 바퀴 높이가 팔꿈치에 닿으며 바퀴마다 살이 서른 개인데, 대추 나무로 둥글게 테를 메우고 쇠조각과 쇠솟을 온 바퀴에 입혔다. 그 위에는 둥근 방을 만들어 세 사람이 들 만하다. 방에는 푸른 베 혹은 공단이나 우단으로 휘장을 치고 더러는 발을 드리워 은 단추로 여닫게 되었다. 좌우에는 유리를 붙여서 창구멍을 내고, 앞에 널판을 가로놓아서 마부가 앉게 되었으   며, 뒤에도 역시 하인이 앉게 마련이다. 나귀 한 마리가 끌고 갈 수 있으나 먼 길을 가려면 말이나 노새를 더 늘린다.

  박지원은 이처럼 자신이 본 온갖 수레를 종류별로 늘어놓고 그것들에 대해 세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그 모양이나 느낌을 적어 두는 것이 아니라, 바퀴살이 몇 개인지 그 재료로 쓰는 나무가 무엇인지와 같은 극히 실용적인 내용들이다. 색깔이나 인상 같은 것이야 여느 관광객이라도 다 그려 낼 수 있지만, 이런 내용까지 파악하려면 상당한 호기심과 관찰력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또 필요에 따라서는 그 곳 사람들에게 계속 물어 보아야만 하는 것들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사람들이 우리나라는 길이 험하여 수레를 쓸 수 없다고들 하는데 나라에서 수레를 쓰지 않으니까 길이 닦이지 않을 뿐이지 수레가 다니게 된다면 길은 저절로 닦이게 될 것이라고 했다. 길이 나쁘니까 수레가 다닐 수 없다가 아니라 거꾸로 수레가 다니면 길이 좋아질 것이라는, 이 발상의 전환이야말로 정말 박지원다운 대목이다. 그리하여 그의 눈에 잡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도마 위에 오르게 된다. 시장, 점 보는 집, 연극 무대, 골동품, 교량(橋梁) 등등 무엇이든 관찰하여 그것을 조선의 현실과 연결시켰다.

  그런데 이것들이 한갓 호기심을 충족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열하 일기」의 묘미가 있다. 우리 주변에도 호기심 많은 사람은 많지만 그것으로 해서 특별한 소득을 얻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소득은 고사하고 호기심 때문에 공연히 멀쩡한 기계를 망가뜨린다거나 불필요한 오해를 사는 일도 왕왕 있다. 그러나 박지원은 이른바 과학 정신으로 무장하여 우리의 그런 걱정을 유감없이 씻어 준다.

  해와 달은 오른쪽으로 수레바퀴처럼 돌고 돌아, 도는 궤도가 해는 크고 달은 작으며, 도는 속도가 늦고 빠름이 없어 한 해와 한 달은 일정한 도수에 맞거늘, 해와 달이 땅을 둘러싸고 왼편으로 돈다는 말은 우물 안 지식이 아닐까. 땅덩이의 본바탕이란 둥글둥글 허공에 걸려, 사방도 없이 위아래도 없이 마치 쐐기 돌다가 햇빛을 처음 받은 곳을 날이 샌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행여 박지원을 소설가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학생이 있다면 이 부분은 매우 충격적일 것이다. 현대인은 물리니 지구 과학이니 하는 정규 교과 과목에서 자전과공전, 천체 물리 등을 배우지만 박지원 당시에 이런 지식을 갖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시대를 앞선 몇몇 지식인들만이 중국을 통해 서양의 자연 과학을 받아들이고서야 겨우 가능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마술을 보면서 그 현란한 눈속임의 실체를 궁금해 했던 것처럼 해와 달을 보면서 천체의 움직임을 궁금해했다. 박지원에게 있어 호기심과 과학 정신은 사실 별개의 것이 아니라,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세계관을 구축하는 밑바탕이었던 셈이다.

       ⑤ 마무리를 대신하여                                            

  「열하 일기」는 워낙 방대한 내용인데다 소설처럼 줄거리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사실상 짧은 요약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제한된 짧은 지면에 그 내용을 모조리 압축해 담을 수 없는 일이어서 우선 아쉬운 대로 세계관의 변화라는 측면에 중점을 두고 그 내용을 살펴보았다. 혹시라도 이것이 「열하일기」의 전부라거나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있을까 걱정스럽다. 제일 좋은 것은 『열하일기』를 직접 읽어보는 것이겠지만, 그러기 전에 궁금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전체내용을 간단하게 줄여서 보여주고 글을 끝맺는다.

· 도강록(渡江錄) - 압록강∼랴오양(遼陽)의 15일 간. 성(城), 벽돌 사용 등에 대한 이야기
· 성경잡록(盛京雜錄) - 십리하∼소흑산의 5일 간
· 일신수필(馹迅隨筆) - 신광녕∼하이관(海關)의 병참지(兵站地)중심
· 관내정사(關內程史) - 산하이관∼연경(燕京)까지로 여기에 「호질(虎叱)」이 있음
·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 연경∼열하의 5일간
·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 열하의 태학에 머물면서 지전설(地轉說)등을 토론
· 환연도중록(還燕途中錄) - 열하∼연강의 6일간으로 교통 제도 등에 대한 이야기
· 경개록(傾蓋錄) - 열하에서 머무는 동안 중국 학자와 담소한 내용
· 황교문답(黃敎問答) - 세계정세를 논하면서 각 이민족의 종교에 대한 논의
· 반선시말(班禪始末) - 청나라 고종이 반선에게 취한 정책
· 찰십륜포(札什倫布) - 찰십륜포(달라이 라마의 사원)의 견문
· 행재잡록(行在雜錄) - 열하 행재소(임금이 거동할 때 일시 머무는 곳)에서 있었던 일
· 심세편(審世編) - 조선과 중국의 난제(難題)에 대한 중국 학자와의 토론
· 망양록(忘羊錄) - 음악에 대한 중국 학자와의 토론
· 곡정필담(鵠汀筆談) - 천문 관련 기록
· 산장잡기(山莊雜記) - 열하 산장의 견문으로 여기에 「일야구도하기」가 있음
· 희본명목(戱本名目) - 청나라 고종의 만수절(萬壽節,임금의 생일)에 행하는 연극 놀이의 대본과 종류를 기록
· 환희기(幻戱記) - 요술 구경을 한 소감을 적은 이야기
· 피서록(避暑錄) - 조선과 중국 두 나라의 시문에 대한 논평
· 구외이문(口外異聞) - 고북구(古北口) 밖에서 들은 60여 종의 이야기를 담고 있음
· 옥갑야화(玉匣夜話) - 밤에 여러 사람들이 주고받은 이야기를 모은 것으로, 이 가운데「허생전」이 있음
· 황도기략(皇都紀略) -  공자묘를 참배한 이야기
· 앙엽기(像葉記) - 명소 20군데 순례
· 동란섭필(銅蘭涉筆) - 음악에 관한 이야기
· 금료소초(金蓼少抄) - 의술에 관한 이야기          

                                                                                                                 출처 : http://www.gulnar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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