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선생께 드리는 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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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선생께 드리는 고언

정운영(한겨레 신문 1990. 5. 4, 사설에서)

 

남산 기슭 묵적골, 비바람조차 가리지 못하는 싸리나무 삽짝문인 삼간 초옥에서 10년을 기한 삼아 불철 주야로 글읽기에 골몰하는 선비가 있었으니 그 이름이 허생이라. 어느 하루 바느질품으로 연명하는 아내로부터 ■공장(工匠)이 노릇을 허거나 장사치로 나서거나 저도 안 되면 도적짓이라도 해 보시라는 수모를 당하고 나서, 마침내 7년 만에 청운의 뜻을 꺾고 말았더라.

 

허생은 문득 종로 거리의 행인들에게 수소문하여 장안의 ■부가옹(富家翁) 변씨를 찾아가 단 한 마디의 말로 만 냥의 돈을 빌린다. ■생면부지(生面不知)의 건달에게 선뜻 거금을 내놓은 태도를 보고 아들이 걱정의 낮빛을 짓자 그 부자는 오히려 허생의 “눈매가 오연하고 얼굴에 수치가 없으니 그는 물건을 바라기 전에 스스로 만족을 아는 사람이다.”라며 인격을 담보로 한 신용 대부의 확실성을 설명한다. 실제로 허생은 5년 뒤에 원금의 열 배를 상환하는데, 만약 그 갑부가 요새 태어났더라면 틀림없이 그는 은행장이 되었을 것이다.

☞ 1～2단락 : 변씨에게 돈을 빌리는 허생

 

허생은 곧장 기호의 어귀인 안성에 터를 잡고 한양으로 올라오는 삼남의 과실을 두 배의 금세로 몽땅 사들인다. 이윽고 저자에 과일이 동나 잔치와 제사를 거르는 지경에 이르자 그는 이미 사두었던 물품을 열 배의 값으로 팔아 넘긴다. 그런 다음 제주도로 건너가 갑자기 말총을 모조리 거두어 들이자 즉시 망건 값이 치솟아 다시 한 번 열 배의 이문을 남기게 된다. 허생이 굳이 제수와 말총을 전략 상품으로 지목한 데에는 입으로는 ‘북벌’을 외치면서도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도모하지 않고 제사나 의관 따위의 허례에만 몰두하는 사대부 계층에 대한 통렬한 야유가 깃들어 있다.

 

아무 물색 모르는 영업 담당 ■행수가 이번에는 미곡을 몰이하고자 조르자 허생은 “그리하여 비록 누만금을 모으게 되더라도 그것은 백성의 목숨을 누르고 살림을 궁하게 만드는 일이라”면서 의연하게 거절한다.

 

허생의 장삿속을 현대적인 용어로 풀이하면 독점과 투기가 된다. 그러나 정상 가격의 두 배를 내고 과실을 사 모았고, 호미와 면화를 싣고 가서 말총을 바꾸어 왔으므로 수요 독점 과정에서는 농가의 소득 증대에 적극적으로 기여했던 셈이다. 다만 상투를 틀고 제사를 지내던 지배 계층의 ‘사치제’에 대해 공급 독점형 인플레이션을 조작하여 그들의 과잉 소비에 다소 골탕을 먹였을 뿐이다.

☞3～5단락 : 허생의 매점매석에 숨은 참뜻

 

집세를 못 내 자살하는 사람이 속출하는데도 난다긴다하는 재벌이 구제 자금을 얻어 쓰며, 골프장 건설 용지를 사들이과 나라의 제일 가는 재벌이 오징어까지 ■걸터듬이해서 서민의 밥상을 옹색하게 만드는 등속의 탐욕과 이기를 자제했기에, 허생의 행각은 비록 그 방법이 투기와 독점에 바탕을 두었을망정 우리를 후련하게 만드는 것이다. 더구나 그는 변산 앞바다에서 남의 보따리를 털어 주린 배를 채우던 ‘ ■룸펜 프롤레타리아’ 수천 명을 무인도로 안내해 식량과 의복과 거처와 그리고 아내까지(?) 얻어 주어 진정한 복지 사회를 건립한다.

☞ 6문단 : 재벌의 잘못된 행태와 허생의 사회 개혁 의식

 

독점 재벌인 허생의 사회적 책임은 “고작 은 만금으로 세상의 물하를 다 기울였으니 이 나라의 얕고 깊음을 능히 헤아리겠구나.”라는 근심으로 표출되고, 그 근심의 통감은 실로 미련없이 돈 50만 냥을 바다 속에 던져 인플레이션의 화근을 미리 제거하려는 결단으로 구체화된다. 그는 ■물타기 증자로 주식을 팔아 떼돈을 벌고, 그 돈으로 다시 부동산을 사 모아 ‘떼떼돈’을 버는 따위의 추악한 작태를 일체 삼갔다.

☞ 7문단 : 허생의 바람직한 상행위

 

<어휘풀이>

공장이 ▶ 수공업에 종사하는 기술자

부가옹 ▶ 부자 늙은이

생면 부지 ▶ 서로 만나본 일이 없이 알지 못하는 사람

행수 ▶ 무리의 우두머리

걸터듬다 ▶ 어것저것을 마구 더듬다. 재벌의문어발식 경영을 묘사한 말

룸펜 프롤레타리아 ▶ 자본주의 경제하에서 노동자 계급에도 속하지 않는 극빈층

물타기 증자 ▶ 증권 거래 방법의 하나. 손해 위험을 줄이려는 방법의 일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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