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언어와 현실의 갈등-이청준론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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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 - 매잡이

언어와 현실의 갈등-이청준론 /金治洙

 

한 사람의 작가에게서 그 작가의 고유한 세계를 발견한다고 하는 것은 비평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 일 것이다. 아니 그 고유의 세계를 발견할 뿐만 아니라 그 세계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분석해 낸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 작가와 작품을 제대로 읽고내는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정작 어떤 작가를 들고 그의 문학세계를 이야기하고자 했을 때 그것이 대단히 추상적이거나 무의미한 것이 되지 않게 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작가가 하나의 작품을 쓴다고 하는 것은 그 자가로서는 그때가지의 여러 가지 경험을 추체험하는 것이며 동시에 새로운 경험을 창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새로운 경험을 창조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작품을 만드는 경험>의 창조성을 의미한다. 물론 작가는 작품을 쓸 때마다 이처럼 경험 창조를 하고 있지만, 이 때의 창조의 경험은 개개의 작품에 따라 다른 것이다. 작품을 쓴다는 것이 언제나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를 띠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만, 만일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작품 자체가 일종의 유형화로 떨어짐으로써 새로운 작품의 긴장을 우리로 하여금 경험하게 해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가 하나의 작품을 쓴다는 것은 설사 그가 쓰고 있는 이야기 자체가 이미 경험되어진 것이라고 할지라도 새로운 경험의 창조가 되는 것이며, 따라서 그 작품은 우리에게 새로운 경험을 하게 만든다. 작가가 작품을 쓰는 행위가 창조적 행위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독자가 작품을 읽는 행위도 창조적 행위일 수 있고 또 그래야 할 당위성을 갖는다. 이 말은 작가의 새로운 경험인 작품을 독자가 단순한 경험으로서  소비해 버릴 경우에 그 작품과 독자사이의 관계가 비진정한 관계로 끝나고 만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비진정한 관계란 작품과 어떤 독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고유한 관계가 아니라, 그 작품의 일차적 독서만으로 어떤 독자하고나 이루어지는 관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비진정한 관계에 의할 것 같으면 하나의 작품과 어떤 독자 사이에 은밀하고 심오한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게 되고 개별적인 의미가 사라진 유형화된 부딪침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의 산업 사회가 부딪치고 있는 문화의 유니폼화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고 문화의 소비재화 현상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옛날의 개인은 자신이 입게 되는 옷을,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자신의 신체적 조건에 맞추어서 그 사회의 미적 감각에 맞는 디자인과 색상에 맞게 만들어 입었기 때문에 그 개인이 살고 있는 사회에 따라 옷의 형태와 색깔이 달랐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웬만큼 개방된 사회에서는 그것이 동양이든 서양이든 신체적 조건이 어떠하든 동일한 형태의 옷을 입게 된다. 전세계의 이러한 유니폼화를 순전히 경제적 측면에서  대량 생산으로 인한 가격의 저렴화로 설명할는지 모르지만, 이것은 그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무수한 모순을 외면한 채 눈앞의 이익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하는 조직화된 게임에 지나지 않는다. 즉 전세계를 자신들의 시장으로 삼으려고 하는 대자본과 새로운 식민주의는, 한편으로 저렴한 가격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시장을 획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유니폼화를 통해서 정신적 식민지를 개척하게 되며 또 한편으로는 저렴한 유니폼을 제공하는 대가로 희귀한 자원을 흡수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함정은, 스스로 신체적 조건에 맞는 옷을 만들어 입는 것보다 대량생산의 유니폼을 사 입는 것이 손쉽다는 데 있다. 이러한 현상은 가령 우리가 살고 있는 주택이나 문명의 여러 가지 이기에서 일반화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분개하고 개탄하는 것은 자칫하면 경제와 문화의 고립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의식화시켜야 하는 것은, 이와 같이 모든 분야에 있어서 유니폼화가 결국 우리로 하여금 창조적 사유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면서 모든 것을 소비재로만 만들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질문의 세계이다. 이러한 가능성이 독서행위에서 일어났을 경우 문학작품와 어떤 독자 사이의 관계의 유형화로 드러난다.

 

소설은 바로 이처럼 유형화되는 관계로부터 스스로를 벗어나게 하려고 하는 내재화된 노력을 하면서 동시에, 유형화되고 있는 모든 것을 의식화하려고 하는 외재적인 노력을 하는 문학의 장르이다. 역사적으로 소설의 끊임없이 변화해 온 것은 소설 자체의 유형화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소설의 노력의 표현이며, 삶의 여러 가지 양상뿐만 아니라 동일한 사건까지도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 보아온 것은, 삶이나 그 삶을 살고 있는 우리의 의식 자체의 유형화를 극복하고자 하는 소설의 또 다른 노력의 표현이다. 여기에서 극단적인 예를 하나 들면, 김옥균이라고 하는 역사적인 실제인물을 소설로 다룬 역사소설이 한편, 혹은 여러 편 있다고 해서 그를 다룬 역사소설이 다시 나올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새로운 역사소설은 김옥균이라는 인물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법으로, 또 다른 각도로 다룬 것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어떤 대상을 묘사하거나 서술한다고 하는 것은 단번에 그 대상을 파악하여 완전히 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따라서 묘사나 서술을 통해서 그 대상과 하나의 관계를 맺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대상은 그 대상을 바라보는 대상에 따라 다른 특성을 드러내게 되고 그 사람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 따라서 작가의 개성이란 그 작가가 대상과 맺게 되는 관계에서 드러날 수 있는 것이며 그 구체적인 예가 작가에게는 작품일 수밖에 없다. 작가는 그러한 자신의 독특한 안목으로 대상의 정체를 밝히고자 하는 사람이며, 다른 사람에 의해서 밝혀진 대상의 정체에대해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대상의 정체를 탐구하는 사람이다.

 

그러한 이유로 작가는, 이 세상에 수없이 많은 작품이 이미 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작품을 쓰는 것이며, 그 새로운 작품을 통해서 우리에게 현실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현실의 정체에 대한 탐구가 외형적으로 드러날 만큼 실용적인 의미를 띨 수 없는 것은 소설의 미학이 갖는 고유성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소설은, 르포르타지나 논픽션처럼 있는 그대로 보고하는 것으로 완성되는 것도 아니고 관공서의 공문서나 재판관의 판결문처럼 현실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은, 르포르타지나 논픽션, 공문서나 판결문과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지만, 그 언어의 사용방법에 있어서 다르다. 언어의 사용방법이 다르다고 하는 것은 그 언어의 사용을 지배하고 있는 질서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문서나 판결문의 언어는 그 글의 현실적인 효과와 그 의미의 단일성(單一性)을 최대의 질서로 생각하고 있는 데 반하여 소설의 언어는 그 글의 문학적인 효과와 그 의미의 복합성(複合性)을 최대의 질서로 삼고 있다. 물론 여기에서 <문학적인 효과>와 <의미의 복합성>이 바로 문학비평과 문학연구의 대상이 되거니와, 이와같은 문학언어의 특성 때문에 작가가 현실을, 다시 말해서 대상을 탐구한다고 하는 것은, 학자나 수사관이나 신문기자가 현실을 분석하고 해석해내는 것과 다른 의미를 띠고 있다. 작가가 탐구하고 있는 현실은 그 자체가 이미 겉으로 드러난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 작가에 따라서 얼마든지 그 모습을 달리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학자나 수사관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현실은, 그걸 다룬 학자가 누구이든, 그걸 수사한 수사관이 누구이든 똑같은 것으로 나타나야 하지만, 작가가 다룬 현실은 그 작가에 따라서 모두 다른 모습을 띤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만일 어떤 작가에게서 나타난 현실의 모습이 다른 작가에게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면 표절이라든가 아류라든가 하는 시비가 생기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하나의 작가가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존재한 어떤 작품에서도 볼 수 업었던 현실의 어떤 모습을 새로운 탐구의 방법에 의해 드러낸 작가가 나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치게 강조됨으로써 어떤 작가의 <기괴성>에 대해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는 따위의 이야기를 문제로 삼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작가의 개성이 얼마만큼 설득력을 갖고 있느냐 하는 데 따라서 그 작가의 개성의 뛰어남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서 이청준의 작품세계를 탐구해 본다고 하는 것이 독자에게 대단히 보람있는 만남이 될 수 있으리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의 그러한 개성 때문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1965년에 사상계사(思想界社)의 신인작품모집에 단편 「퇴원(退院)」이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등장한 이청준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대단히 특기할 작가이다. 그에게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쉽게 간파할 수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첫째 그는 1965년 이후 오늘에 이루기까지   거의 중단없이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모두 70편이 넘는 장단편을 15여 년에 걸쳐 계속 발표한다고 하는 것은 얼핏보면 별로 주목할 만한 사실 아닌 것처럼 보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작가들과 비교할 때 그처럼 기복이 없이 꾸준히 작품활동을 지속적으로 해온 작가는 그 유례가 대단히 드물다. 특히 그의 작품을 읽은 독자들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어떤 주제든지 쉽게 넘어가지 않는 그가 작가적인 개성을 가지고 이처럼 많은 작품을 거의 비슷한 속도로 발표해 왔다는 것은 작가로서의 그의 직업의식이나 지성으로서의 작가의식에 있어서나 괄목할 만한 저력을 소유하고 있음을 말한다. 어떤 작가에게서 그가 쓴 모든 작품이 걸작이기를 기대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일지 모르겠지만, 이청준에게는 태작이 대단히 드물다. 이 말은 그의 작품 대부분이 우리에게 긴장을 요구하고 있고, 우리로 하여금 한국에서 사는 삶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며 나아가서 소설과 문학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사실들을 이제 검토해 보기는 하겠지만, 이처럼 독자를 오랫동안 긴장시킬 수 있다는 그의 능력은 그가 작가적 생명의 장수를 보장해 주는 것이다. 게다가 그가 받은 <동인문학상> <한국일보 창작문학상> <이상문학상> < 중앙문화대상> 등의 상을 보게 되면, 작가에게 있어서 상을 거론하는 일이 좀 우스운 일이지만, 적어도 이청준의 수상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납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청준이 주목을 받아야 할 이유 중에서 그가 15년 동안 14권의 창작집과 장편소설을 갖고 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작품 세계가 하나의 경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러 가지 경향이라고 하는 이유는 물론 그의 작품의 소재가 다양하다는 것도 포함된다. 그의 작품 속에는 6·25사변이라는 충격에 관한 이야기도 있고, 활쏘는 사람이나 매잡이나 항아리 굽는 사람과 같은 장인의 이야기도 있고, 오늘날의 단순한 월급쟁이 이야기도 있으며, 소설을 쓰거나 잡지사 기자를 하는 지식인의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소재의 다양성도 그의 소설의 다양성에 기여한 것 가운데 하나이기는 하겠지만, 그리고 바로 그 소재의 다양성이 필연적으로 주제의 다양성을 불러일으키는 데 공헌한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의 소설이 여러 가지 경향을 띠고 있다고 하는 것은, 각각의 소설에서 추구하고 있는 것이 다양하고, 따라서 그 추구하는 방법도 다양하다는, 그래서 삶이나 문학에 대해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도 다양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러한 다양성은 이청준이라는 작가 자신이 세계를 보는 관점이나 자신의 삶을 보는 관점의 다양성에서 기인하고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작가 자신이 세계나 살에 대해서 이미 기성의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작품을 통해서 그 관념을 추구하고 있고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롤 이청준 소설은 외형적으로 눈에 보이는 현실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감추어진 세계를 끊임없이 찾아가고 있다. 이것이 이 작가에게 있어서 주목해야 될 세 번째 특기 사항이기도 하지만, 그의 소설의 서두는 어느 작품에서나 단정적이고 확실한 상황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미지의, 불확실한, 그래서 소설 속에서 찾아가야 될 상황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상황의 진정한 의미가 소설의 결말에 가면 완전히 드러난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의 소설에서는 그러한 상황이 가능하게 한 여러 가지 조건들이 차츰 밝혀질 뿐, 그 상황에 하나의 의미만을 작가가 부여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작가는 그 상황에 의미를 부여함으로 인해서 상황 자체를 닫힌 상황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 상황을 가능하게 한 조건들만을 밝혀냄으로써 그 상황의 의미를 열어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말을 바꾸면 독자들 각자가 그러한 여러 가지 조건들과 상황의 관계를 스스로 생각함으로써 소설의 독서 자체를 소비적이 아니라 창조적인 행위가 되도록 하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여기에는 그러한 가능성을 뒷받침해 주는 기술적인 전거가 있다. 이청준 소설의 화법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는 그것은 화자의 관점으로서 드러난다. 다시 말하면 그의 소설의 대부분의 화자는 항상 전지전능의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중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거나 혹은 한 작중인물의 관점을 빌고 있다. 그러한 예를 그의 3편의 중요한 소설의 서두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1) 지난 봄 갑자기 세상을 등지고 만 민태준 형은, 그가 이승에 있었다는 흔적으로 단 한 가지 유물만을 남겨 놓고 갔었다. 아는 이는 다 알고 있는 일이지만 그것은 별로 값지지도 않은 몇 권의 대학 노트로 되어 있는 비망록이었다. 우리는 그가 원래 시골집에 논섬지기나 땅을 가지고 있었고, 처신에도 별로 궁기를 띠지 않았기 때문에 설마 옷가지 정도는 정리할 게 좀 남아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민형의 임종 순간이 노트 몇 권밖에 남길 수 없을 만큼 비참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나이 서른 넷이 되도록 결혼 살림도 내보지 못한 민형은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주변을 말끔히 정리한 다음 스스로의 임종을 맞았으리라는, 어쩌면 그 임종은 민형 자신에 의하여 훨씬 오래 전부터 계획되었는지 모른다는 추측이 유력했던 것이다. 하고 보면 그의 유품인 비망록은 그가 간 뒤에도 남겨 두고 싶은 유일한 소지품이었음이 틀림없었을 거라고들 했다.

--「매잡이」

 

위의 인용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화자는 <나>라고 하는 작중 인물이고, 지금 여기에서는 지난 봄에 죽은 <민태준>의 유일한 유품으로 하나의 비망록이 있을 뿐이라는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어떤 성질의 것이고 화자 자신에게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인지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이 없지만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주변을 말끔히 정리한 다음 스스로의 임종을 맞았으리라>고 함으로써 앞으로 그 인물의 죽음을 중심으로 한 <알려진 바 없는> 중요한 부분을 화자가 찾아갈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독자는 이제 중요한 부분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화자를 따라가면 되는 셈이며 그것이 이 소설의 독서가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물론 여기에서 화자가 독자보다 많이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벌써 앞에서 인용한 사실 자체가 화자의 눈앞에서 벌어진 현장의 전달이 아니라는 점에서 화자가 독자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 이 소설을 조금만 더 읽으면 화자가 <사실을 고백해야 할 것 같다>고 하면서 『실상 앞에 말한 모든 이야기는 지금 내가 말하려는 고백을 전제하면서 지금까지 주변에서 생각되고 있었던 사실들을 그대로 적었을 뿐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나 자신으로서는 그런 것들에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말이 되겠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을 나는 바로 오늘 아침에 알게 된 것이다』고 함으로써 독자보다 화자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 소설의 그 다음의 전개는 기지(旣知)의 사실이 아니라 미지(未知)의 사실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다시 말하면 화자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오늘 아침>에야 드러난 것처럼 소설의 주제는 화자에 의해 밝혀져 가는 부분이지 이미 알고 있는 부분이 아니다. 따라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은 바로 그러한 주제를 찾아가는 데 필요한 전제조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청준 소설에서 화자가 독자보다 더 아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러한 전제조건에 지나지 않을 뿐, 정작 화자 자신이 알고 싶어하는 것-그것은 또한 독자 자신이 알고 싶어하는 것이기도 하다-은 화자가 찾아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한 예를 『소문의 벽(壁)』서두에서도 쉽게 주목할 수 있다.

 

2) 아무리 깊은 취중의 일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날 밤 내가 박준을 대뜸 나의 하숙방까지 끌어들이게 된 데는 어딘지 꼭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만 같다. 왜냐하면 그날 밤 박준이 처음 나의 눈앞에 나타났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아직 나에게는 얼굴도 성도 모르는 생면부지의 사내에 불과했고, 또 그런 박준은 아무리 그가 기괴한 모습으로 나를 놀라게 하려 했다 해도 다방 거리나 신문 같은 데서, 나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그런 돌발적인 사건들을 만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한데 그런 내가 그런 박준을 하숙방까지 끌어들여 함께 밤을 지낸 것이다. 아무래도 무슨 이유가 있었을 것만 같다. 하지만 나는 지금 당장 그 이유를 생각해낼 수가 없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내가 그를 나의 하숙방까지 끌어들일 생각을 먹게 되엇는지, 스스로 납득할 만한 동기가 떠오르질 않는단 말이다.

 

위의 예문에서도 1)에서와 마찬가지로 화자 자신이 소설의 작중인물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남들보다 사태를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위의 예문 1)과 2)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이 두 화자의 말 속에 <추측>이 잔뜩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문 1)에서 <임종을 맞았으리라>, <오래 전부터 계획되었는지 모른다>는 추측과 <남겨 두고 싶은 유일한 소지물이었음이 틀림없었을 거>라는 추측이 있는 반면에 예문 2)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만 같다>든가 <아무래도 무슨 이유가 있었을 것만 같다>고 하는 추측이 들어 있다. 이러한 추측을 통해서 이청준의 화자는 독자의 호기심을, 아니 독자의 긴장을 불러 일으키는 한편, 자기 자신이 앞으로 그 소설 속에서 해야 할 일을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소설의 서두에서 독자와 함께 한 화자 자신의 추측이 사실인지 아닌지, 그리고 사실이라면 그것이 무슨 의미를 띠는지 찾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찾아가기 위해서 화자는 언제나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으로 추측을 하면서도 그걸 지금 당장은 확실히 알 수 없는 것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이처럼 몇 가지 추측을 가능하게 하려면 그 추측의 전제 조건에 해당하는 정보들을 화자가 제공할 수밖에 없고, 그런 점에서 화자가 독자보다 다소간 많은 정보를 갖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사실이 된다. 이와 같은 현상이 「병신과 머저리」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일 수 없다.

 

3) 형이 소설을 쓴다는 기이한 일은, 달포 전 그의 칼 끝이 열 살배기 소녀의 육신으로부터 그 영혼을 후벼내 버린 사건과 깊이 관계가 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 수술의 실패가 꼭 형의 실수라고만은 할 수 없었다. 피해자 쪽이 그렇게 생각했고, 근 십 년 동안 구경만 해오면서도 그쪽에 전혀 무지하지만은 않은 나의 생각이 그랬다.

 

여기에서도 이미 두 가지의 중요한 정보가 화자에 의해 제공되고 있지만 그 두 정보 사이의 관계는 추측으로 나타나 있을 따름이다. 즉 형이 소설을 쓴다는 정보와, 의사인 그 형이 수술한 그녀가 달포 전에 죽었다는 정보는 화자가 독자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이 두 사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은 1)과 2)에 만들어낸, 다시 말해서 그 관계에 관해서 독자로 하여금 상상을 하게 하는 것이다. 만일 화자가 그 관계에 관한 추측을 하지 않았더라면 독자로서는 그 관계가 어떠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러나 일단 화자가 거론한 이상 독자는 그 화자가 일으켜 놓은 호기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독자의 관심은 이제 화자가 이끄는 데로 화자와 <함께> 움직이게 된다. 이것을 화법(話法)에서 <동반(同伴)의 관점>이라고 명명한다면, 이청준의 소설은 바로 그 동반의 관점으로 소설적 긴장의 출발점을 삼는다. 일단 이처럼 추측을 하게 하고 상상을 하게 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앞으로 화자와 함께 하게 될 여행이 미지의 모험으로 가득찰 것임을 기대하게 하고 끝없는 의혹 속에 빠지게 될 것임을 느끼게 한다. 특히 예문 1) 2) 3)과 같은 소설의 서두 다음에는 반드시 무언가 밝혀지지 않은 대목들이 있음을 이야기함으로써 바로 그 대목을 밝혀가는 과정을 소설의 전개과정으로 삼게 된다. 가령 1)의 예문 뒤에 ,그러니까 모든 죽음이 그렇듯이 그의 죽음에 대한 좀더 중요한 부분은 전혀 알려진 바가 없는 셈이다>고 한다든가 예문 2)에 뒤이어서 <그 밖에 형에 대해서 내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아무 것도 없는 셈이다>고 하는 것은 그의 소설의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하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추구하는 양식을 띠고 있음을 이야기하기에 충분하다.

 

 이와 같이 질문과 대답의 추구로 일관되고 있는 이청준의 소설들에게 그 작중인물들이 던지고 있는 질문의 근본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을 얻기 위해서는 아마도 그의 소설 속에서 소설을 다루는 작품을 검토해 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러한 작품에서 이 작가의 소설에 관한 의견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청준의 소설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직업인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이 직업인들이 모두 자기 분야에 대해서 만족하고 있지 못하고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와 불화 속에 빠져 있다. 그 가운데서 소설가를 직업으로 택하고 있는 주인공의 소설들이 여러 편 있지만, 모두 실패한 소설가를 다루고 있다. 가령 「조율사(調律師)」에서 글을 쓰지 못하는 소설가 <나>와 좌절을 겪는 평론가 <지훈>이 그렇고 『소문의 벽』에서 결국 미쳐버리고 마는 소설가 <박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며, 「병신과 머저리」의 <형>이 소설을 불태우는 것도 소설가로서 스스로의 패배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주인공에게 있어서 소설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소문의 벽』에서 주인공은 <작가는 누가 뭐래도 진술을 끊임없이 계속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족속>이라고 하고 있고 「지배와 해방」의 주인공은 <작가는 언제나 그가 도달한 세계에서 또 다른 다음 번의 이념의 문을 향해 끝없이 고된 진실에의 순례를 떠나야 하는 숙명적인 이상주의자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러한 주인공들의 발언을 통해서 이청준에게 있어서 소설을 쓴다는 것은,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진실을 찾아서 이야기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위의 예문에서 <누가 뭐래도>라는 조건절은 작가 자신의 글쓰는 행위가 작가의 외부적 조건과는 상관없이 작가의 개인적 윤리적 결단으로 이루어짐을 이야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배와 해방」에서 <독자와 사회에 대한 한 작가의 책임이란 그러니까 결국 그의 개인적 삶의 욕망과 독자들의 삶을 위한 어떤 일반적인 가치 질서의 실현이라는, 복수가 기여가 되어야 한다는 그 지극히도 이율배반적인 관계 속에서 힘들게 마련되어야 할 운명의 것>이라고 한다.

 

작가가 자기의 외부의 조건과 상관없이 진실을 이야기한다고 하는 것은, <작가라는 것은 세상을 향해 뭔가 끊임없이 자기 진술을 계속할 의무를 자청하고 나선 사람들>이라고 한 것처럼 스스로 작가이기를 선택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러한 작가에게 외부의 압력이 주어진다면 그 작가는 필연적으로 갈등을 느끼게 될 것이고 그 갈등이 심화되면 결국 정신적인 상처를 갖게 된다.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이청준의 소설 속의 소설가는 바로 정신적인 질환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소설가로서 실패한 사람들이다. 물론 이청준의 소설은 바로 이들 소설 속의 소설가들의 실패를 통해서, 혹은 그 실패의 대가를 치르고 이루어진 것이다. 『소문의 벽』의 마지막에 오면 이 소설의 주인공 박준이 <자기의 내면에 용틀임치는 진술욕과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고 있는 전짓불 사이에서 심한 갈등과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정체불명의 소문과 갈등을 빨아먹으며 전짓불은 그의 의식 속에서 엄청나게 크게 확대되어 갔다. 한데 바로 그 전짓불은 어렸을 때부터 그의 의식 속에서 은밀히 발아를 기다리고 있던 그 갈등과 불안의 씨앗이었다. 이제 그 씨앗이 발아를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박준의 마지막 소설 속에서 한 작가로 하여금 끝끝내 정직한 진술을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린 방해요인의 상징으로 훌륭하게 완성되어지고 있었다>고 해석을 내린다. 말하자면 소설가 박준의 실패요인을 어렸을 때의 정신적인 상처를 입게 된 <전짓불>에 대한 공포가 이 작가에 의해 단순한 심리주의적 해석으로 끝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 소설 뿐만 아니라 다른 소설에서도 그렇지만 이청준의 주인공들은 모두 <불행한 과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불행한 과거>가 과거의 <한때> 일어난 일로서 이미 끝난 이야기라면 이 소설에서 현재의 불행의 원인을 거기에서 찾는 것 자체가 심리주의 일 것이다.

 

물론 『소문의 벽』의 박준이나 「병신과 머저리」의 <형>이 모두 과거에 깊은 정신적인 상처를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6.25사변 때의 기억으로 나타나고 있는 <박준>의 전짓불 사건은 상대편의 정체에 따라 진실을 말해서 죽을 수도 있고 거짓을 말해서 죽을 수도 있다. 이것은 <나>의 생각이나 이데올로기와는 상관없이 그리고 그 생각과 이데올로기를 토론할 수 있는 여지도 없이 그것이 자아(自我)가 아닌 상대편과 같은 <편>이냐 아니냐에 의해서만 삶과 죽음이 결정되는 택일적(擇一的)인 상황인 것이다.  따라서 상대편의 정체를 모른 채 상대편이 누구냐에 따라 양극(兩極)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은 <우연>에다 모든 것을 맡기는 결과가 된다. 미친개에게 물리는 것과 같은 이러한 상황을 폭력의 지배를 받는 공포의 상황이라고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이청준 주인공에게 있어서 <전짓불>과 연관된 어린 시절의 상처는 「퇴원(退院)」에서도 나타난다. 주인공이 어린 시절에 남몰래 즐기던 비밀이 있었는데 그것은 광 속에 가득찬 볏섬 사이에 있는 틈 속에 <어머니>와 <누이>의 속옷을 깔아 놓고 잠시 잠을 자고 나온다는 것이다. 이 사실이 아버지의 <전짓불>에 발견되어 주인공은 이틀 동안 이유도 모른 채 그 속에 갇혀 있었다. 여기에서는 <전짓불>을 든 사람의 정체는 분명히 <아버지>였으나 왜 <아버지>가 화를 내고 <그>를 광 속에 가두어버렸는지는 전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나>의 행위가 왜 이틀간의 감금에 값하는 것이었는지 전혀 설명이 없다. 이 말은 아버지의 분노의 원인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소문의 벽』에서 자신이 어느 쪽이라고 밝히면 상대편의 마음에 들 수도 있고 안 들 수도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이 비논리에 의한 어린 시절의 정신적 상처는 「개백정」에서도 똑같이 드러난다. 6.25전쟁 때 <말씨가 설고 거센 총잡이들>이 나타나면서 그 산골에 살던 어린 주인공의 집안에 이치를 따질 수 없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개공출>로 이미 <노랑이>의 죽음을 경험한 주인공에게는 죽은 줄로 알고 있던 <복술이>가 <앞날 하나를 몹시 절뚝거리고> <두 눈마저 이미 시력을 잃고> <오른쪽 눈은 눈두덩이 두껍게 부어 올라 이미 뜰 수조차 없게 되어 있었고> <피가 흐르고 있는 왼쪽 눈은 피로 범벅이 된 눈두덩 털 때문에 형체조차 잘 알아볼 수가 없>게 된 채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처럼 <복술이>까지 죽이려고 든 것은 <개가죽> 숫자가 모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노랑이>의 가죽을 취한 뒤에 공짜로 먹어 본 고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개를 잡을 수 있는 권력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사람이 권력없는 사람의 정신적인 상처는 전혀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두려운 상황, 무쇠탈처럼 논리적인 사유도, 토론의 여지도 없이 무조건 강요되는 두려운 상황에 의해서 주인공이 입은 상처는 『소문의 벽』에서 <박준>이 전짓불에 입은 상처에 못지 않은 것이다.

 

이 두 상황에서 공통적인 특색을 살펴보면 우선 그것은 비논리가 지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비논리가 지배한다는 것은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없게 할 뿐만 아니라 호소할 길조차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힘이 지배할 뿐 <말>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말이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은 <법(法)>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법>은 곧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인공의 어린 시절에 입은 상처는 이러한 폭력에 대한 공포만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가령 「눈길」 같은 작품에서는 주인공의 어린 시절에 경험한 가난에 대한 공포가 정신적인 상처를 이루고 있다. 다시 말하면, 도회지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집>을 잃은 어머니의 가난으로 인한, 아니 자기 자신의 간난으로 인한 상처는, 주인공으로 하여금 <어머니>에게 <빚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려고 하게 만들지만, 이렇게 겉으로 드러난 <적대감> 이면에는 그 반대의 <친화감>이 깔려 있다. 아니 주인공에게서 나타나는 어머니에 대한 적대감은 사실은 주인공이 자신의 상처를 되돌아보고자 하지 않는 과거의 기피증이지 어머니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적대감은 아니다. 그것은 <나>가 <아내>에게 어린 시절의 간난에 관해서 이야기해 주고자 하지 않고, 따라서 그 이야기가 나올 만했을 때 다시 서울로 떠남으로써 어머니로부터 그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방지하려고 했지만, 일단 그 이야기가 <어머니>에게서 <아내>에게로 전달되는 순간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으로 충분히 설명된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 시절의 가난은 그에게 <부끄러움>이 되어 가능하면 그것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주인공의 어린 시절의 정신적인 상처에 대해서 하나는 <전짓불>에 대한 공포 때문에, 다른 하나는 <가난>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에 이야기하기를 꺼려한다고 하는 것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똑같은 행위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외부에서 금기로 되어 있기 때문인 경우와 자기 내부에서 스스로 자제를 하는 경우로 나눌 수 있고, 그런 점에서 위에서 말한 공포와 부끄러움은 그 두 가지를 설명하기에 충분한 것처럼 보인다.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한 인식은 가령 『소문의 벽』에서 <박준>의 두편의 소설이 잡지에 발표되지 못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 데서도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이 두편의 작품들은 결국 양쪽 다 빛을 보지 못하고 만 것이다. 하나는 <시대양심>이라는 것에 바탕을 둔 편집자의 문학 이념과 어긋난다는 이유에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소위 그 <문제의 소문>을 두려워하는 신념 없는 편집자의 조심성에 의해서.

 

위에서 전자는 자율적인 제동에 의해서 후자는 타율적인 제동에 의해서 두 작품이 햇빛을 보지 못하는 경우를 설명하고 있다. 작품이 발표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작품의 사물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며, 작품이 발표된다고 하는 것은 작품의 언어의 상태라고 일컬을 수 있다. 따라서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진실의 사물의 상태이지만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진실의 언어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청준의 주인공은 어렸을 때부터 그것이 <공포>에 의해서건 <부끄러움>에 의해서건 자신의 의사를 표시할 수 있는 자유를 박탈당한 정신적 상처를 가지고 있다. 자신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시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그 주인공이 살고 있는 세계가 논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다는 이야기며 동시에 그곳은 비논리가 지배하는 세계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주인공이 살고 있는 세계의 부조리성은 어린 시절만의 추억이지 않다는 데 주인공의 보다 큰 비극이 있는 것이다. 즉 「뺑소니 사고」라는 소설에서 주인공 <배영달>은 <기자>로서의 사명감과 <역사에 대한 책임> 사이에서 <양진욱>이라는 인물과 부딪친다. 그는 <금식>이라는 이름으로 백성들을 속이면서 <우상>이 되었던 <일파선생>의 죽음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것을 신문에 알리려고 한다. 반면에 <양진욱>은 <일파선생>의 금식에 속임수가 있지만 그것이 수행하게 된 역사적 역할의 중요성 때문에 자신의 본래의 직업마저 던져 버리고 <일파 사상 연구회>를 맡고 나선다. 그러나 결과는 일파 선생의 허위 금식에 관한 폭로 기사가 신문에 나간 것이 아니라 그 기사를 배영달 기자의 뺑소니사고에 의한 사망 기사가 신문에 나간 것으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이 주인공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역사에 대한 책임이라는 이름 아래 그것이 몇 사람의 독점물로 바뀌는 모순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 모순을 드러내고자 기사를 쓴 순간에 우연인지 아닌지 모를 뺑소니 사고를 당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보게 되는 <뺑소니 사고>는 전쟁 중에 경험했던 <전짓불> 사건이나 <개백정> 사건과 유사한 것이다. 그것은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어떤 것의 존재에 대한 이청준의 투철한 인식이며, 전쟁 때처럼 겉으로 드러난 무서움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공포가 끊임없이 우리를 둘러싼 채 위협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인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을 통해서 이청준의 주인공은 이야기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체제 쪽의 금기와 싸우게 되지만 결과는 언제나 실패로 나타나고 있다.

 

 이청준의 이러한 소설 세계를 그 자신이 설명해 준 소설을 든다면 그것은 아마 「빈방」일 것이다. 이 소설은 주인공이 살고 있는 세계와 주인공 사이에 있는 갈등을 단적으로 보여 주면서 동시에 이 작가의 작품들에 나타난 여러 가지 상징적인 징조들을 설명해 준다. 이 소설에는 <지승호>라는 인물이 <나>라는 신문기자의 하숙집에 동숙인으로 들어온다. 그런데 <지승호>는 딸꾹질이 시작되면 그치지 못하고 계속하게 된다. 얼핏보면 이 소설도 <지승호>의 딸꾹질의 정신적인 원인을 찾아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는 원래 어느 공장에서 그 회사의 생산부 직원으로 근무를 하다가 충격적인 사건의 경험을 한 뒤에 딸꾹질을 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그 충격적인 사건이란, 노임을 올려 달라는 여공들에 의해 조합책임자로 받들어진 지승호가 그러나 여공들의 알몸항의에 소방호스의 찬물세례가 주어진 다음, 자신의 입장을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난처한 입장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딸꾹질은, 자신의 거북한 입장 때문에 생긴 것도 아니고 찬물을 끼얹은 알몸 때문에 생긴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 사건을 취재해간 기자의 기사를 기다리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그 순간에 그는 11월의 추위 속에서 알몸에 찬물세례를 받은 여공들의 사건을 정신적으로 다시 체험하게 된다. 그가 여기에서 경험한 것은 두 가지 무서움이다. 하나는 찬물 세례로서 눈에 보이는 무서움이라면, 다른 하나는 기사가 활자화되지 않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서움이다. 그리고 그가 딸꾹질이라는 증세를 나타나게 된 것은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경험하고 난 다음이다. 여기에서 기사가 활자화되지 않았다는 것은 진실이 언어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무서움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없는 포비아의 상황이 그로 하여금 말 대신에 딸꾹질을 하게 되고 그 때문에 주인공은 고통을 받는다. 특히 신문기자로 있는 <나>마저 이 이야기를 모두 알고 난 다음에는 딸꾹질을 시작한다고 암시되고 있는 것을 보면 오늘날 우리는 모두 딸꾹질 환자일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처럼 이청준의 주인공이 거의 모두 <병신>이거나 <환자>이며 그들에게 그럴 만한 원인이 무엇인지 찾는 것이 그의 소설 세계라면, 이른바 그 정신적 상처가 <심리학적>이거나 <정신분석학적>으로 과연 현재의 병의 원인으로 굳어질 수 있는 것인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왜냐하면 주인공들의 현재의 정신 상태에 대한 원인으로서만 과거의 정신적 상처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다분히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에 모든 것을 맡기고 마는 결과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의 주인공은 어렸을 때에만 무서움에 의해 정신적인 상처를 입은 것이 아니라 나이가 들면서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포비아의 상황에 의해 끊임없이 위협받고 상처받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소문의 벽』의 <박준>이 소설을 못쓰고 있는 것은 과거의 <전짓불> 때문만이 아니라 오늘의 <전짓불>의 존재 때문이기도 하며 「병신과 머저리」에서는 형만이 과거의 상처로 인해서 소설을 끝맺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아픔 가운데에는 형에게서처럼 명료한 얼굴이 없었>지만 그러나 <나>도 화폭을 완성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 말은 6.25의 전상이라는 정신적인 상처를 가진 <형>이 소설을 끝맺지 못하지만, 그 이유를 단순히 과거의 상처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음을 말한다. 그것은 그러한 과거가 없지만 그림을 완성시키지 못하는 <나>의 정신적인 상처로 설명될 수 있다. 말을 바꾸면 스스로 책임지는 일을 두려워하고 그래서 자신의 그림마저 형의 소설의 결말의 의존하게 된 <나>의 습관의 원인을 말한다. 또한 「가면의 꿈」에서 지연의 남편 <명식>은 어렸을 적부터 소문난 <천재>로서 현재의 직위인 판사가 되기까지 일종의 <천재> 놀음만을 해 온 것이다. 바로 이 <천재 놀음>에 대한 자각으로 인해서 자신의 본래의 얼굴이 사실은 가면을 쓴 얼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서 그 가면 쓴 얼굴에 가면을 뒤집어 쓰는 행위를 하게 된다. <천재놀음>만을 해 온 자신의 본래의 얼굴이 바로 가면을 쓴 얼굴임을 깨닫고 그 가면을 쓴 얼굴을 혼자 있는 시간에만은 보이고 싶지 않아서 또 다른 가면을 쓰게 된 주인공의 상처는, 주인공이 직장에서는 가면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로써 설명된다. 왜냐햐면 체제 속에서 생활하는 일상적인 자신의 모습이 가짜라는 의식은, 그 동안 자신의 삶이 보이지 않는 힘의 지배를 받아왔다는 사실의 자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의 주인공의 불행이 과거에만 그 원인이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 이청준의 소설이 주인공의 과거를 찾아 간다면 그것은 심리주의요 정신분석학에의 호소일 따룸이다. 그러나 그러한 불행이 과거에도 있었고 오늘날에도 있었다는 사실의 의식화를 위해 찾아지고 추구된 것이라면 그것은 심리주의에 빠질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청준의 주인공들 가운데 소설가라든가 기자, 혹은 판사가 많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이들이 모두 <말>을 다루는 것을 직업으로 갖고 있다는 사실로써 설명될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이들 주인공들이 경험한 세계는 진실을 <말>로 바꿔놓는 것을 금지한 세계이다. 진실을 진술한다는 것이 불온하게 취급당하고 무서움이 지배를 받는 포비아의 상황에서 이들이 <말>을 다루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직업적으로 성공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를 내포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그들은 진실의 진술이 필요한 사회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드는 진술만이 필요한 사회에서 살고 있으면서 동시에 진실의 진술을 하고자 한다. 따라서 그들은 정신적인 갈등을 느낄 수 밖에 없고 그 상처로 인해서 때로는 미치거나 때로는 죽거나 때로는 글을 쓸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이 글을 쓴다는 것은, 그들이 비논리가 지배하는 포비아의 상황에 <말>로써 대항하는 것이지 힘으로 대항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청준의 소설 세계 전체가 우리의 삶에 있어서 기막힌 알레고리의 세계임을 증언해 주고 있다.

 

이청준의 소설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힘은, 그의 소설 어디에나 존재하는 정신적 상처가 사실은 우리가 흔히 갖게 되는 상처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탐구하고 있는 상처의 종류가 다양하고 그 상처의 성질이 다양하다는 것은 그가 삶의 정체를 그처럼 여러 각도에서 탐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특히 그의 소설들 가운데 「매잡이」이라든가 「과녁」이라든가 「줄」과 같이 오늘날에는 볼 수 없는 <매를 부리는 사람>과 <활을 쏘는 弓士> <줄타는 광대>를 다루고 있는 것은 삶의 다양한 탐구로서 그의 소설 세계를 풍부하게 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이청준이 이들 장인들의 세계를 다루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匠人들의 삶이 교환가치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 이들의 쇠퇴가 오늘의 막강한 문명에 기인한다는 사실, 이들이 피해자일 따름이지 전혀 가해자일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의 언어화가 소설의 탐구적 성격의 중요한 부분일 수 있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진실의 언어화가 힘 앞에서 실패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청준은 그의 주인공들의 상처를 통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그리고 그렇게 언어화한 것이 현실적으로 무슨 효용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세계에 살고 있지만, 그는 바로 우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그것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작가가 선택한 것이 말이며 진실일 뿐 폭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가가 꿈꾸는 사회는 힘이 아니라 <말>이 지배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는 갈등을 느끼게 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사람답게 사는가 끊임없이 질문을 하며 <말>을 통해서만 그 질문이 가능하고 또 극복이 가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작가인 것이다. 따라서 이청준의 일련의 작품에 <언어학서설>이라는 부제가 붙어 다니는 것은, 진실에 관한 자유로운 추구와 <말>의 완벽한 지배로 요약되는 그의 문학관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언어의 영토가 완전히 자유롭게 되는 것을 우리가 꿈꾸는 이념이라고 한다면, 이청준은 우리의 이념을 의식화시켜 주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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