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언어와 철학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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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와 철학 / 이명현 (서울대 철학)

 

1. 철학에 있어서의 언어에 대한 관심

 

20세기 철학에 있어서 특기할 만한 사항 중의 하나는 언어에의 관심이다. 이것은 바로 20세기 분석 철학의 기본적 성격과 활동의 대상을 규정해 주었다. 그러면 어떤 연유로 언어의 문제가 철학적 탐구의 중심 관심사로 등장하게 되었는가?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보다 명확한 해명을 얻기 위하여 서양 철학사의 전개과정을 일별할 필요가 있다. 타레스로부터 시작하는 서양 철학에 있어서 철학  ‘philosophia’는 애당초 인간이 이론의 문제로 삼을 수 있는 모든 것을 그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philosophia는 모든 순수 이론적 탐구를 하나로 묶어 부른 총칭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사실상 오늘처럼 학문이 분화되지 않았던 시기에 그것은 하나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론적 학문이 본격적으로 분화되기 시작한 것은 뉴우턴(1632-1727) 자연과학의 수학적 원리를 저술한 이후부터라고 봄이 옳을 것 같다. 물리학의 분과화를 뒤이어 화학, 생물학이 분과학문으로 확립되기에 이르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칸트는 뉴우턴의 물리학이 수립된 이후, 철학이 모든 이론적 탐구의 총칭처럼 생각되었던 종래의 철학관의 자기수정의 필요성을 가장 날카롭게 의식했던 철학자였다. 그는 일종의 철학의 정체위기를 느끼고 철학이라는 학문의 새로운 자기규정을 모색하였다.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존재세계가 어떤 모습으로 되어 있는가의 문제는 적어도 철학자의 단순한 사변에 의해서는 해답될 수 없음이 명백하다고 그는 믿고, 무차별적으로 존재세계의 본질을 탐구한다고 자처하던 종래 형이상학의 허실을 규명하려 하였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이성비판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러한 이성비판을 통해 그에게 명백해진 것은 자연세계에 대한 이론적 탐구는 실증을 밑바탕으로 하는 자연과학(뉴우턴 역학)의 소관사요, 철학은 윤리의 문제를 다루며, 또 인간의 인식능력을 비판, 검토하는 선험적 작업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리하여 이제 철학은 모든 이론적 탐구의 총칭일 수 없다는 인식이 분명해진 셈이다. 칸트 이후 헤겔을 그 정점으로 하는 독일 관념론이 한때 융성하여, 이러한 칸트적 위기의식(자연과학과 종래 모든 이론적 탐구의 총칭으로서의 철학 간의 충돌에서 빚어진 위기)이 하나의 허위의식이라고 장담하며 순수한 사변에 의한 거대한 이론을 세워 놓고, 그것이 참된 이성의 철학임을 자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칸트학파 등과 같은 칸트 이후의 철학에 있어서 철학은 정신을 그 대상으로 삼는 정신과학이요, 뉴우턴 역학은 자연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자연과학이라는 통념이 지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과학과 자연과학이라는 구별 위에서 철학을 정신과학 속에 안주시키려는 안이한 시도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으니, 심리학의 분과과학으로서의 출현이 바로 그것이다. 종래 철학의 울타리 속에 서식하던 인간 심리에 관한 연구가 철학으로부터 분가하여 인간의 정신(마음)을 실증적 방법에 의하여 연구한다고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훗설(1859-1938)은 현상학의 수립을 통하여 이 제2의 철학의 정체위기를 극복하려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학문의 분과화 과정을 통해 분명해진 것은 종래의 막연히 존재하는 것을 통틀어 철학이 그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다고 자처하던 것을, 이제는 모든 존재하는 것을 여러 개의 영역으로 나누어 실증적 방법에 의해 그 현상의 구조를 설명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따라서 철학만이 지니는 고유한 연구 대상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되었다. 여기에 철학의 명확한 자기규정이 요청되었다. 20세기의 분석철학의 출현은 바로 이러한 철학의 자기 규정의 한 형태로서 파악할 수 있다. 학문의 분과화에 따라 존재하는 현상의 성질이나 구조를 설명하는 과제는 제분과 학문에게 이양되고, 그러한 현상을 연구하는 제학문의 이론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철학의 주된 임무라고 분석철학은 철학의 자기규정을 한다. 그런데 그 이론은 언어의 체계(진술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언어의 이론적 분석이 철학의 과제가 되는 셈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의 궁극 원리를 탐구하는 것이 철학이라는 것에 비하여 언어의 논리적 분석이 철학이라는 견해는 너무나 초라해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인상의 착오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와 같이 사물의 세부적인 구조에 관하여 치밀한 설명을 요구하는 시대에 있어서 한 개인이 모든 존재현상의 근본구조를 직접적(실증적)으로 연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자연히 연구의 분업화가 뒤따르기 마련인데, 이것이 학문의 분과화로 나타난다. 현대에 있어서 모든 현상의 기본원리가 무엇인가에 관한 전체적 통찰을 얻기 위해서는 제분과학문의 이론(언어의 체계)을 분석 검토하는 이차적(간접적) 방식에 의거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이 그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세계에 관한 이해양식이 표현되는 언어의 이론적 구조를 해명한다는 것은 그 결과에 있어서 종래 철학적 탐구가 지향해 온 그 목표와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다. 다른 점은 그 방법에 있다. 실증과학(분과학문)이 성립되지 않았던 시대에 철학은 주로 사변에 의존하여 존재세계의 구조를 직접 해명하려 하였으나, 개별적 실증과학들이 존재의 여러 가지 양상을 분과로 나누어 설명하는 오늘에 있어서 철학은 실증과학의 이론을 논리적으로 분석함으로서 간접적으로 존재세계의 구조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언어의 논리적 분석이 철학의 기본과제라는 분석철학의 철학관(철학의 자기규정)이 결코 하잘 것 없는 것이라는 인상은 하나의 착오임이 분명해진다.

이렇게 철학적 작업의 성격을 논리적 분석으로 보고, 그 대상을 인간의 개념체계의 화신인 언어로 보는 분석철학에 있어서의 언어에의 관심은 두 가지 측면에서 고찰할 수 있다.

 

첫째는 철학을 하나의 이론에 대한 이론이라는 뜻인 메타이론이라고 규정했을 때의 언어에의 관심의 지적할 수 있다. 이론이란 다름 아닌 진술의 집합이므로, 메타이론은 다름 아닌 진술, 즉 언어에 대한 논리적 분석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는 메타이론으로서의 언어분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언어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런 둘째 유형의 관심은 비단 현대 분석철학에 국한되지 않는다. 일찌기 플라톤이 그의 대화편 크라틸루스에서 언어의 정체를 논의한 이래 언어는 많은 철학자들의 끊임없는 논의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러한 관심을 우리는 언어철학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언어철학적 작업이 분석철학에서 활발히 전개되었는데, 언어철학은 메타이론으로서의 언어분석의 지원장치의 구실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 범주의 메타이론으로서의 언어분석은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은 인간의 세계 이해의 방식을 해명한다는 적극적 의의만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메타이론으로서의 언어분석의 소극적 의의는 전통적 철학 특히 형이상학적 이론의 허구성을 폭로하는데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을 비롯한 여러 분석철학자에 의하면,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많은 이론들은 언어의 논리적 구조를 잘못 이해한 데서 산출된 것이기 대문에, 언어의 논리적 구조를 올바로 보여줌으로서, 전통적 이론의 허망함을 드러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메타이론으로서의 언어분석은 이러한 전통철학에 대한 비판이라는 소극적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2. 언어에의 접근의 세 유형

 

20세기 철학적 논의에 나타난 견해들을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고찰하려고 한다. 첫째 유형은 인공언어에 관심을 두었던 러셀, 초기 비트겐슈타인 그리고 카르납의 경우다. 둘째 유형은 일상언어의 분석에 관심을 두었던 후기 비트겐슈타인과 오스틴, 라일, 스트로슨 등 일상언어학파의 경우다. 세째 유형은 촘스키를 비롯한 변형문법론자들의 경우이다. 이 세 유형들의 기본 특색을 차례로 살펴 보겠다.

 

() 첫째유형

러셀과 초기 비트겐슈타인이 공유하고 있던 견해는 논리적 원자론이라 불리운다. 이 논리적 원자론의 기본논지는 언어의 기본 성격에 관한 이론을 포함하고 있다. 러셀은 그의 논문 <논리적 원자론 철학>(1918)에서,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저서 <논리철학 논고>(1922)에서 각기 논리적 원자론을 전개하고 있다. 논리적 원자론이 포함한 언어의 기본 성격에 관한 논점을 다음과 같이 간추릴 수 있다.

 

(A1) 언어는 본질적으로 실재세계를 반영한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언어의 구조는 실재세계의 구조와 일대일 절대관계에 있다.

(A2) 러셀의 <수학의 원리>에 표현된 것과 같은 인공언어로 된 논리체계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자연언어의 논리적 구조를 보여준다.

 

이 두 논지는 러셀과 초기 비트겐슈타인의 공통된 주장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은 논지 (A1)을 언어사상론(言語寫像論)의 형태로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언어사상론에 의하면 언어는 세계(사실의 총체)를 묘사하는 하나의 그림이다. 언어와 세계는 동일한 논리적 형식을 공유하고 있다. 이 논리적 형식을 언어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언어는 세계를 묘사하는 그림의 역할을 할 수가 있다.

 

인공언어에의 관심을 나타내는 논지(A2)는 분석작업의 필요성을 예시해 준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자연언어의 외형적 형태는 그대로 세계의 구조를 반영해 주지는 않는다.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언어가 세계의 구조를 반영해 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러셀의 <수학의 원리>에 제시된 인공언어는 다름 아닌 논리적으로 꽉 짜여진 기호논리의 체계다. 이 기호논리 체계가 바로 자연언어의 올바른 구조를 보여준다는 것이 논지(A2)이다. 세계의 구조를 반영해 주는 언어는 그러므로 자연언어 그 자체라고 해야 한다. 분석이란 자연언어의 외형적 구조(문법적 구조)가 세계의 구조를 제대로 보여 주지 않을 경우, 세계의 구조를 바로 보여 줄 수 있도록 형태를 바꾸어 놓는 것을 의미한다. 러셀의 기술이론’(記述理論)은 이러한 분석의 이념을 구현해 주는 이론이다.

 

논리적으로 완전한 언어라고 여기서 상정된 언어는 외연적 논리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즉 모든 문장은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문장 혹은 원자문장의 복합체다. 그런데 이 요소문장을 연결해 주는 것은 논리적 연결어이다. 한 문장의 진리치는 구성된 요소문장의 진리치이다. 그런 의미에서 복합문장은 요소문장의 진리함수이다.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외연적 논리에 의해 형성되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은, 복합문장을 구성하는 기본단위가 되는 문장인 원자문장 혹은 요소문장이 어떤 것인가에 관한 견해를 달리했다. 러셀은 그러한 기본이 되는 문장을 원자문장(명제)이라 부르고, 그것은 감각 자료를 기록하는 것이라 했다. 이에 반해 비트겐슈타인은 그러한 기본문장을 요소문장이라 부르고 그것은 논리적, 존재론적 의미에서 단순한 것을 가리키는 문장이라고 했다. 이러한 차이는 인식론적 문제에 관해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을 갈라놓은 분기점이 된다. 우리의 현재 관심은 인식론적 문제에 있지 않으므로,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에 관한 견해에 이런 차이가 있음을 지적하는 데 만족하련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언어의 논리적 구조가 실재세계의 그것과 동일하다는 견해이다. 이 견해는 언어의 본질은 사실의 기술에 있다는 견해와 밀접히 연결된다. 언어가 어떤 사실을 기술할 수 있는 것은 언어와 사실의 총화로서의 세계와 구조적 동일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언어의 본질적 기능을 이렇게 사실의 기술에서 찾으려는 입장은 언어의 의미를 인식적 요소에서 찾으려는 입장과 굳게 악수한다. 논리 실증주의의 보검이었던 검증의 원리는 인식적 의미를 언어의 본질로 규정하려는 사고의 한 산물이다. 그리고 언어의 본질을 사실의 기술에서 찾으려는 입장은 의미지시론과도 곧잘 연결된다. ‘말이 지시하는 대상이 말의 의미라는 것이 의미지시론의 주장이다. 이것은 언어를 그것이 묘사하는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언어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이다. 러셀은 그의 논문 <논리적 원자론 철학>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에서 각기 의미지시론을 주장하고 있다.

 

언어의 구조가 실재세계의 구조를 보여준다는 견해는 언어를 그 자체로서 하나의 자족적인 독립된 체계로 보지 않고 실재세계에 의존적인 것으로 보는 셈이다. 세계의 모습을 보여 주는 하나의 수단-세계의 그림-으로 언어가 이해된다. 따라서 이런 입장에 있어서는 자연히 진리치를 지닌 문장인 진술에만 관심이 쏠리게 마련이다. 러셀과 초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적 입장에 동조했던 논리 실증주의자들이 진리치를 결정할 수 있는 문장으로만 구성된 이상적인 인공언어의 구성에 열을 올렸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카르납은 그러한 인공언어의 구성에 관심을 두었던 논리 실증주의자들 가운데 대표적 인물이다.

 

() 둘째 유형

비트겐슈타인은 1930년 초부터 <논리철학 논고>에 표현된 언어에 관한 자기 자신의 이론의 약점들을 스스로 발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자기비판은 하나의 새로운 사상의 형성으로 발전되어 갔다. 이 새로운 사상의 출현을 우리는 그의 후기 사상이라 부른다. 이러한 그의 후기 사상은 그의 사후에 출간된 <청갈색본>, <철학적 연구>등 속에 전개되어 있다.

언어에 대한 그의 후기 견해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으로 출발한다. 언어에 대한 그의 전기 사상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언어사상론(言語寫像論)이 그의 후기에는 거의 전면적으로 비판되어 거부된다.

 

언어의 본질은 실재세계(사실의 총화) 묘사에 있다.’는 그의 전기 견해는 언어에는 본질적 특징이 없고, 단지 여러 가지 언어사용들 사이에 가족 유사성밖에 없다.’는 견해로 대치된다. 언어는 세계의 구조를 보여 주는 하나의 거울과 같은 것이 아니고, 그 사용자인 인간의 삶의 조건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것이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모습을 밝히기 위해 말놀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말놀이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그가 드러내고자 한 논점을 적어도 다음의 세 가지 명제로 요약할 수 있다.

 

(B1) 여러 가지 놀이(게임)에 일관된 공통적 특성이 없고 오직 유사성만 있듯이, 언어의 여러 가지 사용을 살펴 보면, 언어의 본질이라고 꼬집어 이야기할 한 가지 특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언어의 여러 가지 쓰임을 보면, 가족들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과 같은 것만, 즉 가족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B2) 언어는 놀이(게임)와 마찬가지로 규칙에 의해 규정되는 하나의 존재 양식이 다. 그러나 아무리 엄격한 규칙에 의해서도 모든 가능한 경우가 일의적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규칙이 어떻게 해석되고 규정되느냐 하는 것은 그 언어 사용자의 삶의 양식에 의존한다.

 

(B3) 놀이가 하나의 인간의 활동이며, 하나의 규칙으로서의 놀이가 인간의 활동을 그 한 부분으로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행위는 인간 활동의 하나이며, 하나의 규칙의 체계로서의 언어는 인간의 삶의 양식들 속에서만 그 생명을 얻 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말의 쓰임, 삶의 양식이라는 용어를 발견하는데, 이 말들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에 대한 사상의 알맹이를 담은 말들이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쓰임이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 밝히고자 한 점들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B4) 기호체계로서의 언어가 어떻게 적용되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언어 사용자이 지, 그 기호체계 자체는 아니다.

 

(B5) 말의 의미를 확인한다는 것은 언어기호가 언어공동체에 의해서 어떤 방식으 로 사용되었는가를 확인함이다. 말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그 말이 지닌 삶의 문맥 안에서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다.

 

명제(B4) (B5)가 암시하는 것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언어는 인간의 삶의 양식이라는 구체적 현장에서 그 산 모습이 드러난다. 그런데 그러한 현장검증을 해 보면, 언어의 의미는 <논리철학 논고>에서와 같이 그 의미가 그 제시하는 대상에 의하여 일의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쓰여지는 삶의 양식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논고>와 같은 언어관에서 나타날 수 있는 오류는 이러한 다양성을 무시하고 단순화 혹은 일반화하는 경향이다.

 

여기에 언어에 대한 철학으로 올바른 접근이 무엇인가 함이 예시된다. 그것은 일상 언어가 우리의 삶의 연관 속에서 지니는 여러 가지 용법(다양한 의미와 기능)을 그대로 승인하는 것이다. 다양한 언어의 형태는 그 사용자인 인간의 삶의 조건 속에 뿌리박고 있는 고유한 논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어의 본질을 실재세계에 관한 묘사적 기능이라고 단정하는 태도는 마땅히 포기되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삶의 양식이 무엇을 지시하는 말인지 명백히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여러 단편적인 발언 속에 암시된 말을 음미해 보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점들이 비트겐슈타인이 말하고자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B6) 말하는 행위는 삶의 양식의 한 부분이다. 이러한 삶의 양식은 인간의 생 물로서의 유기적 활동에 속한다.

(B7) 어떤 사태와 사물에 대한 인간의 자연스런 반응양식과, 어떤 현상을 파 악하고 보는 판단의 방식이 삶의 양식이다.

(B8) 이러한 삶의 양식을 우리는 원초적 삶의 양식과 문화적 삶의 양식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B9) 각 언어는 어떤 특정한 삶의 양식을 구현하며, 그와 상관관계를 이룬다.

(B10) 언어의 이해는 첫째 그 언어에 상관적인 원초적 삶의 양식과의 일치와 둘째 문화적 삶의 양식의 이해를 포함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의 언어관이 함축하는 것은 인간의 개념체계는 세계의 구조를 거울처럼 반영하는 것으로서, 언어 사용자인 인간의 조건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학적 원리>에 표현된 인공언어는 인간의 개념 체계의 구조를 일의적으로 드러내 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통찰에 의하면 언어란 인간조건과 깊은 관련을 가진 것으로서, 그 구조는 <수학적 원리>와 같은 인공언어에 의해 일의적으로 밝혀지지 않는다. 일상언어는 그러한 인공언어에 환원될 수 없는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된다. 언어가 지닌 묘사적 기능 이외에 여러 가지 기능들을 가지고 있다.

 

오스틴은 일상언어가 지닌 여러 가지 기능들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는 점에서 후기 비트겐슈타인과 일치한다. 오스틴은 언어 형태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일상언어가 지닌 다원적인 모습을 규명하려고 했다.

 

라일, 스트로슨을 비롯한 소위 일상언어학파의 사람들은 후기 비트겐슈타인과 오스틴이 보여 준 일상언어에 대한 통찰을 밑거름으로 하여 그들의 철학적 작업을 수행해 갔다. 그들은 철학적으로 어려운 문제들 속에 포함된 중심개념들이 일상적 언어문맥 속에서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분석함으로서,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한 새로운 단서를 제시하려고 하였다.

 

후기 비트겐슈타인과 일상언어학파의 철학자들은 언어에 관한 일반적 이론을 세우는 데는 그리 관심이 없었다. 그러므로 카르납과 같은 논리 실증주의자에서 볼 수 있는 언어에 관한 일반적 이론을 여기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이들은 개별적인 철학적 문제에 포함된 언어의 논리적 특성을 세밀히 분석하는 데 열중하였다.

 

카르납과 같이 어떤 인공언어의 모형이 자연언어의 구조의 참된 모습을 보여 주리라고 이들은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인공언어의 구성에 관심이 없었다. 자연언어는 인공언어에로 일률적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다면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일상언어학파에 속한 사람의 신념이다.

 

() 세째 유형

노암 촘스키를 비롯한 변형문법 학자들은 모든 자연언어에 공통적인 보편적 구조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 보편적 구조를 밝히는 것이 언어이론의 과제다. 그리고 이 보편적 구조는 기호이론과 유사한 인공언어 규칙에 의하여 체계적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 입장은 모든 언어에 공통되는 일반적 구조가 있음을 시인하며, 그것이 어떤 인공언어에 의해 표현될 수 있음을 주장하는 점에서 전기 비트겐슈타인, 러셀, 카르납 등의 견해와 일치한다. 그러나 전기 비트겐슈타인, 러셀이 언어의 보편적 구조를 언어가 묘사하는 실재세계의 구조에 의존한다고 보았음에 반하여 촘스키는 언어의 보편적 구조를 인간의 마음 속에 주어진 선천적 규칙들 속에서 발견하려 한다. 첫째 유형이 언어의 성격을 존재론적 시각에서 해명하려 했음에 반하여, 세째 유형은 심리적 차원에서 밝히려 한다. 촘스키의 언어이론의 근본 가정은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부여된 보편적 규칙의 체계가 있다는 것이다. 언어는 다름 아닌 마음 속에 주어진 보편적 규칙들의 외형적 표출의 한 형태이다. 언어이론이 밝히고자 하는 것은 외형적 모습에서 각기 다른 자연언어들에 공통적인 보편적 구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촘스키는 언어에 이중적 구조가 있음을 주장한다. 음성학적, 기호적 요소에 의해 표현되는 표층구조와 의미론적으로 확인되는 심층구조가 바로 그것이다.

 

촘스키에 의하면 문법은 기본부문, 변형부문, 의미부문으로 구성된다. 기본부문은 하나의 언어에 가능한 심층구조가 무엇인가를 규정해 주는 일련의 규칙이며, 변형부문은 심층구조가 어떤 양식으로 표층구조와 대응되는가를 규정해 주는 규칙들이며, 의미부문은 의미론적 표현요소들이 어떻게 심층구조와 연결되는가를 규정해 주는 규칙의 체계이다.

 

그들의 관심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자연언어의 논리적 구조를 밝히는 것이다. 이것은 인공언어의 구성에 관심을 기울였던 카르납을 비롯한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언어에의 관심과 대조를 이루며 일상언어의 논리적 형태에 관심을 보인 둘째 유형과 일치하는 점이다. 그러나 둘째 유형에 속하는 철학자들이 자연언어의 일반적 구조를 해명해 줄 일반적 이론을 제시하는 데 무관심하였음에 반해 세째 유형은 자연언어의 일반적 구조의 해명에 부심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첫째 유형과 둘째 유형은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안목을 얻기 위해 언어에 관심을 가졌음에 반하여, 세째 유형은 언어의 성격과 구조를 밝히는 작업 자체가 언어에의 관심이 노린 바 전부이다.

 

첫째 유형은 자연언어에 관한 구체적 사실들을 배제하는 경향이 있으며, 둘째 유형은 어떤 특정한 언어현상의 해명에만 편중되는 경향이 있다. 세째 유형은 이러한 첫째 유형과 둘째 유형의 경향에 상당한 불만을 보인다. 그 불만은 자연언어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포함하는 일반적 이론이 그들에게 결여되었다는 데 있다. 이렇게 볼 때 세째 유형은 첫째 유형과 둘째 유형의 두 극단을 피한 중간형태라 볼 수 있다.

 

첫째 유형은 언어에 관한 아주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구조에 관심을 기울였거나, 그러한 일반적 구조를 표현하는 인공언어의 구성에 전념했으며, 둘째 유형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구체적 자연언어의 어떤 특수한 경우에 대한 세밀한 분석에 부심했으며, 세째 유형은 자연언어의 구체적 현상들을 설명해 주는 일반적 구조의 탐색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이런 차이는 애당초 언어에의 관심을 유발시킨 동기의 차이에 유래한다.

 

세째 유형에 속하는 사람들은 언어현상 자체의 연구가 그들의 탐구의 근본동기였기 때문에 자연히 언어현상 자체의 연구에 보다 적절한 접근을 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러나 그것은 세째 유형이 채택하고 있는 기본가정이나 기본개념이 첫째 유형이나 둘째 유형에 비해 더 정당하다는 것을 반드시 의미하지는 않는다. 세째 유형에 속하는 촘스키는 인간의 마음 속에 선천적으로 주어진 일련의 규칙이 있으며, 이 규칙에 의해 언어학습이 이루어진다는 가정을 내세운다. 그러나 아직까지 변형문법론자들이 분석해 놓은 자료들은 이러한 가정이 타당함을 실증해 주기에는 불충분하다. 이 세째 유형의 가정은 전통적 인식론의 하나인 데카르트의 합리론의 현대판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세 가지 유형의 근본적 차이는 그것의 이론적 기초가 철학적 이론이냐 아니냐에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세째 유형이 자연언어의 구체적 현상에 대한 보다 충분한 설명을 제공해 주는 여러 가지 분석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세째 유형에 속하는 사람들의 전문분야가 언어현상 자체에 관한 탐구였다는 우연적 사실에 기인한다고 해석함이 타당할 것 같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세 유형은 각기 독자적으로 형성된 이론이 아니라, 이어져서 발전되면서 나타난 세 과정에 불과하다. 둘째 유형은 첫째 유형의 결함을 인식하고 난 후 창출된 이론이며, 세째 이론은 첫째 유형과 둘째 유형으로부터 여러 가지 이론적 기본틀을 암시 받아 그것을 밑거름으로 형성되고 발전된 이론이다.

 

3. 결 어

 

이 글의 목적은 철학에 있어서 언어에의 관심이 어떤 경로로 나타났으며, 어떤 형태로 구체화되었는가를 살펴 보는 데 있었다. 철학에 있어서 언어에의 관심은 언어철학과 메타이론으로서의 언어분석으로 나타났음을 우리는 앞에서 살펴 보았다. 언어철학으로서의 언어에의 관심은 철학의 역사만큼이나 깊다고 하겠다. 그러나 메타이론으로서의 언어분석은 현대 철학적 현상의 하나이다. 그것은 철학이라는 학문의 역사적 전개의 하나의 귀결로서 나타난 현상임을 살펴 보았다. 메타이론으로서 언어분석이 철학적 작업의 전면으로 나타남에 따라, 자연히 언어철학적 작업도 언어분석의 지원장치로서 현대에 있어서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히 전개되었음을 지적하였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20세기에 나타난 언어에 대한 관심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이론들을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그 특성을 찾아보려고 하였다. 러셀과 전기 비트겐슈타인, 그리고 카르납을 중심인물로 하는 첫째 유형은 언어의 보편적 구조를 객관적 세계와의 대응관계 속에서 해명하려 했으며, 기호논리가 언어의 보편적 구조를 보여 주는 하나의 전형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후기 비트겐슈타인, 오스틴, 라일, 스트라우손을 중심인물로 하는 둘째 유형은, 첫째 유형이 강조했던 진리치를 지닌 진술로서의 기능 이외에 언어가 지닌 다양한 기능을 부각시키며, 그러한 언어의 여러 가지 특성을 언어사용자인 인간의 삶의 조건과의 관계 속에서 밝히려 한다. 따라서 삶의 일상적 상황 속에서 사용되는 자연언어가 지닌 다면성의 해명에 깊은 관심을 가진다. 촘스키를 비롯한 변형문법론들로 구성되는 세째 유형은 모든 자연언어에 공통되는 보편적 구조를 일정한 인공적, 논리적 언어로 표현되는 규칙들로서 밝히려 한다. 이것은 첫째 유형과 둘째 유형의 중간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세째 유형은 동시에 독자적으로 나타난 세 가지의 서로 다른 입장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연속적으로 전개된 세 가지의 발전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시간적으로 후에 나타난 이론은 전에 나타난 이론들의 단점들을 극복하는 방향으로 발전되어 갔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유형과 둘째 유형은 전적으로 철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어 왔다. 세 유형은 앞에서 논의한 여러 가지 차이에도 불구하고 다음의 점에서 그것들은 일치한다. 음성학적으로 표현되는 언어의 표층구조는 언어의 참된 구조인 논리적 구조를 보여 주지 않는다. 따라서 의미론적으로 해석되는 언어의 논리적 구조가 무엇인가를 밝혀 내는 것이 언어에의 관심이 노리는 바다. 여기서 우리는 언어의 논리적 질서의 탐구가 현대에 있어서 언어학자와 철학자가 만나게 되는 공분모임을 발견한다. /언어와 언어학 제2(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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