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언어와 논리적 사고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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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와 논리적 사고 / 이해심(충남대 물리학)

 

언어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개념을 전달하는 가장 근원적인 방법이다. 따라서 언어는 듣는 사람의 사고능력과 개념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예술품 감상이나 사람의 얼굴 표정 살피기처럼 언어로 표현되기 이전 단계의 직접적인 개념이라는 것이 존재하지만 이것은 아직 논리의 단계 이전의 것이다. 논리의 단계에서는󰠏󰠏특히 자기 자신의 개념을 정리하는 단계를 지나 남에게 전달하는 단계에서는󰠏󰠏언어가 개념의 절대적이고 유일한 도구다. 문학적인 뜻에서 말하는 개인적인 감정이나 의사전달도 그러하지만 특히 과학적 개념의 전달에 있어서 언어의 중요성은 절대적이다. 언어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인간의 개념 형성에 한계가 있다고 선언한 비트겐슈타인의 입을 빌리지 않더라도, 난해한 과학철학인 양자물리와 인식론의 관계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일상생활과 일반교육현장에서 찾을 수 있는 논리적 사고와 언어 사이의 관련 문제들을 소개함으로써 언어가 어떻게 사람을 지배하는가를 일반인들에게 보여 줄 수 있다.

 

언어가 어떻게 사람을 속이려 드는가를 보여 주는 간단한 경우는 우선 낱말 자체가 가질 수 있는 속임수를 소개하는 일이다. 상대성 이론이 주는 철학적 의미를 쓰라는 시험 문제에 대해 대다수의 대학생들이 상대적 개념을 운운하는 것은 낱말의 덫이 사람의 개념 형성에 얼마나 강하게 작용하고 있나를 단적으로 말해 주는 한 보기다. 상대성 이론은 상대론적 개념을 다루는 것이지 상대적 개념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상대론적 개념이란 상대성 이론의 골자가 되는 물리 개념이란 뜻이고, ‘상대적 개념이란 남자라는 낱말에 대해 여자라는 낱말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보여 주듯이 물리적 개념을 도입하기 이전에 나타나는 기본 단위로서의 낱말의 문제다. 보통 사람들이 속기 쉬운 표현의 차이다.

 

영어 apparent라는 낱말은 사전에 분명한이라는 뜻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과학에 있어서는 분명한으로 번역해서는 안 되는 경우가 많다. apparent라는 낱말은 눈에 보이다라는 뜻에서 나온 말로 눈에 보이는 것이니까 분명한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으나, 물리학에서 쓰일 때는 흔히 직접 보이는 것이니까 단지 겉보기 즉 본질이 아닌, ‘불분명한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할 때가 많다. 하나의 낱말이 주어진 상황이나 문맥에 따라 반대의 개념을 줄 수 있다.

 

다음의 문장을 생각해 보자.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빛의 속도보다 빠른 관측방법이 없기 때문에 우주를 관측하는 데는 궁극적인 제한이 있다.” 이 문장은 빠르다라는 낱말을 두 경우에 있어서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인 것을 무시한 채 한 가지 용법으로 사용한 착각의 보기다. ‘빛의 속도와 관련하여 빠르다라는 뜻은 물리적 속도를 뜻한다. 그러나 빠른 관측방법에서 뜻하는 빠르다는 일의 능률을 나타내는데 이 두 경우의 빠르다라는 뜻은 서로 비교될 수 없는 다른 차원에 있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개념이 포함되지 않은 단지 낱말섞어놓기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장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읽는 사람에게는 제대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착각을 줄 수 있다.

 

이와는 조금 달리 감추어진 속임수는 아니지만 문법이나 어법을 부분적으로 파괴함으로써 부정확하거나 아주 빗나간 배경 상황을 가정하는 보기들이 있다. 요즘 흔히 보는 것으로서 여기부터 100미터라는 푯말과 함께 오른쪽으로 꺾인 화살표가 그려진 표지판이다. 이 표지판은 한국어를 모독하고 있다. ‘여기부터 100미터 여기로부터 100미터(또는 100미터 앞)’는 전혀 다른 말이다. ‘여기부터 100미터라는 말은 여기에서 시작하여 100미터 앞까지의 구간 전체라는 뜻이고 여기로부터 100미터라는 말은 그 구간을 포함하지 않고 100미터 되는 곳, 즉 한 을 뜻한다. 따라서 그 푯말대로라면 100미터 구간 어디에서든 우회전을 해도 좋다는 뜻이다. 왜 행정 당국은 ‘100미터앞이라는 더 간단하고 정확한 표현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들에게 한국어라는 것은 그다지 대접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또 다른 보기가 있다. 어느 한 기업체나 이름없는 단체도 아닌 행정 당국이 공신력을 자랑해야 할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통해 이렇게 광고한다. “의사, 약사에게 상의하십시오.” 이것은 환자나 그 보호자들을 낮추어 보고 한국어를 모독하기 위하여 만든 표현이다. ‘상의하다는 말은 한쪽이 일방적으로 상대의 의견을 듣는 것이 아니라 의견을 주고받는 것이다. 따라서 제대로 된 표현은 의사, 약사와 상의하십시오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 잘못된 광고는 에게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일방적인 의사전달을 가정하고 있다. 달리 말하여 이 광고를 내보내는 사람들이 실수한 것은 단지 맞춤법뿐 아니다 그들의 교만한 심리 상태를 드러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환자의 진술과 의견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의사와 약사가 환자에게 일방적으로 지시를 내릴 것을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언어는 그 언어를 쓰는 사람의 사고방식을 알려 주는 중요한 지표다.

 

언어 사용의 부정확성이 개념 전달에 있어서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또 하나의 보기가 있다. 텔레비전 교육방송의 고등학교 세계사 강의에 있었던 일이다. “보기 중에서 틀린 것을 고르시오.……미국은 국제연맹 설립에 참여하였으며 설립과 함께 가입하였다. ……아니죠! 미국은 국제연맹의 설립에는 참여하였으나 가입되지는 않았죠!” 세계사 선생이 문제풀이를 하면서 말한 이 내용은 한국어의 어법을 파괴한 한 보기다. ‘가입되지 않았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미국 스스로 가입을 포기했다는 뜻인가, 아니면 가입하려고 했는데 외부의 압력 때문에 거부당했다는 뜻인가? 그 세계사 선생이 문제풀이에 앞서 설명한 내용은 미국이 국제연맹 가입을 스스로 거절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풀이에서 한 말은 듣는 이에게 혼란을 주기에 충분한 잘못이다. 즉 능동형이 쓰여야 할 부분에 수동형이 쓰임으로써 문법 내지 어법을 파괴했다. 그리하여 명백한 개념 전달에 실패한 것이다.

 

언어의 경제성이라는 문제 때문이겠지만 우리는 어떤 개념을 언어로 표현할 때 많은 전제조건이나 부수적 상황들을 언급하지 않고 넘어간다. 대부분 너무나 당연하여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이다. “파란불이 켜지면 건널목을 건너라.” 이 말의 둘레에는 수많은 다른 내용들이 생략되어 있다. ‘파란불이 켜지더라도 의무적으로 길을 건너라는 뜻은 아니다’, ‘파란불이더라도 교통경찰이나 특별한 상황에 있는 사람이 건너지 말라는 신호를 하고 있으면 길을 건너지 마라’, ‘미친듯 차가 신호등을 무시하고 달려올 때는 길을 건너지 마라 등등. “공부 열심히 하여라는 말 속에는 또 얼마나 많은 관련 사항들이 생략되어 있는가. 더 나은 삶을 위하여, 더 좋은 정신적 만족을 얻기 위하여,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하여, 돈을 더 잘 벌기 위하여……. 이렇게 흔히 보는 명제의 주변 상황으로서 생략되어 있는 사항들은 너무나 당연하여 새삼 설명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의 보기를 접하면 그것이 사소한 일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왜 고대인들은 양력보다는 주로 음력을 사용하였는가? 한국의 교과서는 농사의 편의를 위하여 음력을 썼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수많은 학생들과 선생들이 이 말을 의심없이 외운다. 그러나 다시 물어보자. 참으로 옳은 설명인가? 농부들이 씨 뿌릴 때를 아는 것은 계절의 변화를 알기 때문이다. 계절의 변화를 제대로 잘 알려 주는 것은 음력이 아니라 양력이다. 전형적인 음력인 회교력은 일년의 평균 길이가 365일과 크게 어긋나기 때문에 날짜가 계절을 알려 주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 따라서 동아시아에서는 음력을 사용함에 있어서 양력의 기능을 일부 포함한 태음력, 즉 윤달과 24절기를 포함한 음력을 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말하는 음력이란 이 태음력이다. 아무튼 농사에 관한한 양력이 편리하다.

 

그러면 왜 우리는 고대로부터 음력을 더 많이 써왔는가? 답은 명백히 고대 사회에서의 시간관념과 관련이 있다. 고대 사회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시간의 문제는 하루, 이틀 또는 열흘 따위의 날짜를 세는 일이었다. 이러한 하루나 열흘 정도의 시간 간격을 재는 가장 편리한 시계는 무엇이었는가. 말할 것도 없이 달의 모양 변화였다. 하루 동안에 달라지는 달 모양의 변화는 열하루 동안의 변화와 구별된다. 고대 사람들이 공통으로 쓸 수 있는 자연적인 시계로서 달보다 더 좋은 것을 누가 제안할 수 있었겠는가. 달이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날짜를 알려 주는 가장 편리한 시계였다는 점이 바로 고대에 세계적으로 양력보다 음력이 더 많이 쓰인 까닭이다.

 

그러면 우리의 교과서는 어찌 된 것인가?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갈릴레이의 실험을 시도하기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최면술처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이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맨 처음 누가 교과서를 잘못 썼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아무튼 낡은 교과서를 대치하기 위하여 새로 교과서를 쓰는 사람들은 낡은 교과서에게 높은 권위를 부여하고 판박이 글귀를 베껴서 새 교과서 속에 넣는 일을 되풀이하였다. 이들은 갈릴레이의 실험에 비유될 수 있는 질문,  어째서 음력이 양력보다 농사에 더 유리하단 말인가?”라는 한마디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았다.

 

사람의 머릿속에 자리잡은 언어 능력은 언어를 듣는 데 있어서 우선 언어 형식만을 검사한다. 즉 문법적 관계를 살펴서 각 낱말들 사이의 연결과 예속 관계를 확인한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인 내용 분석에 있어서 우리의 무의식은 그 내용을 개인적인 경험과 비교하는 일에 초점을 맞춘다. 이 본능적 버릇이 우리에게 비극의 가능성을 가져온다. 개인적인 경험! 이 허약한 판단 기준은 개인적인 경험이 적거나 인상적이지 않은 부분에 대해 언어의 최면술이 자리잡을 수 있는 필요조건을 제공한다. 고대인들과는 달리 달의 모양 변화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현대인들은 음력의 의미를 개인적인 경험과 일치시킬 수 없고, 따라서 문법 체계를 만족하는 교과서의 설명에 대해서 의심을 품을 계기를 쉽게 찾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거대한 집단 최면술의 원인을 제공한다.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바에 따르면, 텔레비전의 원리란 빛의 밝기를 전기신호로 바꾸어서 이를 전파로 보내고 수상기는 이를 다시 빛의 밝기로 바꾸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고등학교 선생들도 이 설명에 만족한다. 참으로 만족할 만한 설명인가? 이 설명대로라면 텔레비전 화면에 나타나는 것은 반짝이는 하나의 점일 뿐이다. 받는 신호를 화면의 어느 위치에 나타낼 것인가를 알려 주는 좌표에 관한 정보가 함께 오지 않으면 수상기는 어떠한 영상도 나타낼 수 없다. 신기하게도 대부분의 교과서에는 텔레비전 화면의 어느 위치를 언급하는 내용이 없다. 그리고 더 신기한 사실은 교과서를 통하여 또는 선생님의 입을 통하여 텔레비전의 원리를 배우는 어린들이 주어진 설명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는 점이다. 좌표에 대한 지적을 받기만 하면 누구든 문제점을 명백히 느낄 수 있는 사실에 대해 답이 주어지기 전에는, 더 정확히 말하여 남이 문제를 지적하기 전에는 왜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가.’

 

여기 한 보기를 들어 보자. 대학교 물리 강의 시간에 교수가 학생들에게 질문을 하다. “달과 지구는 중력으로 서로 끌어당기는데 달이 지구로 떨어지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대부분의 학생들이 아주 쉬운 질문이라는 듯이 대답한다. “달이 지구 둘레를 돌고 있으니까 원심력이 생기고 이 원심력과 중력이 균형을 이루어서 달이 지구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옳은 대답이다. 이어서 다음 질문을 던져 본다. “그러면 왜 지구가 달로 떨어지지 않는가?” 이 두번째 질문에 대해 대부분의 학생들은 갑자기 벙어리가 된다. 무엇이 이 학생들로 하여금 두번째 질문에 대답할 수 없도록 만들었나? 학생들의 눈에 나타난 당혹감은 자신들이 답을 모른다는 사실에 앞서 그러한 질문을 미처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놀라움의 한 표현이다. 우리 사회는 모든 어린이들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달은 지구 둘레를 돈다.” 이 지식은 불행하게도 어린이의 개념 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실수를 저지른다. 말로는 직접 표현하지 않지만 소위 너무나 당연하여 설명하지 않고 지나가는 부분’, 즉 지구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지구는 고정되어 있고 달만이 지구 둘레를 돈다는 착각을 어린이들의 개념 속에 판박이한다. 그리하여 달이 지구 둘레를 도는 한편 지구 역시 달의 둘레를 돌기 때문에 지구가 달로 떨어지지 않습니다라는 대답이 나올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 언어가 사람을 속이는 한 보기인 것이다.

 

제대로 된 설명은 이러하다. 다른 영향을 무시하고 지구와 달 사이의 관계만을 고려해 보면 지구와 달은 두 천체의 공통 질량 중심을 중심점으로 하여 모두 공전운동을 한다. 그러니까 대강 말하자면 달은 지구 둘레를 돌고 지구는 달의 둘레를 도는 것이다. 다만 그 공통 질량중심이 지구 중심 쪽으로 쏠려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근사적 표현으로서 지구의 움직임을 무시한 채 다만 달이 지구 둘레를 돈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제 지구가 달과 지구의 공통 질량 중심 둘레를 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지구도 원심력을 가지기 때문에 달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왜 밀물과 썰물이 하루에 한 번씩이 아니라 두 번씩 일어나는지도 쉽게 이해된다. 아무튼 이러한 근사적인, 즉 부정확한 표현은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면서 근사적인 표현이며 부정확함이 있는이라는 단서 조항을 빠뜨린 채 어린이들의 머릿속에 또 어른들의 머릿속에 잘못된 개념을 판박이하고 있는 것이다.

 

잘못된 교육이 어떻게 생각이 없는 학생, 질문이 없는 학생을 만들어 내는가를 나타내는 또 다른 보기가 있다. 대학교 물리학에서 특히 강조하여 강의하는 것 중 하나가 조화 진동자의 개념과 그 풀이다. 그것이 중요한 것은 많은 물리적 상황이 근사적으로 조화 진동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번은 내 강의를 들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물리에서 왜 조화 진동자가 그토록 중요하게 취급되느냐?’는 시험 문제를 냈다. 신기하게도 시험을 치른 모든 학생들이 질문의 초점을 깨닫지 못하고 한결같이 다만 조화 진동자와 관련된 주변 이야기들만을 온통 답안지 가득히 채운 것이다. 그러니까 관련된 이야기를 물량 공세로 답안지 가득히 채우다 보면 그중 우연히 핀트에 맞는 내용이 있을 것이라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 학생들은 답이 무엇인지 모르므로 상황을 제한해 주지 않으면 많은 내용 중에서 알맞은 것을 고를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언어분석 능력이 없는 그들은 답을 생각하는 일은 둘째로 치고 질문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학생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몸에 익혀 온 문제풀이 방식은 주어진 대상이 이미 충분히 손질되어 겨우 4개로 정리된 것들 중에서 1개를 고르는 일이었다. 무한 가지의 분류 가능성이 있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내용과 비교하면 그것을 4개로 분류해 놓고 그 중 하나가 답이라는 것을 보장해 주는 것은 말하자면 답의 99퍼센트 이상을 미리 알려 주는 것이다. 소위 객관식 교육이 어떻게 학생들의 사고력 개발을 1퍼센트 수준에 머물게 하는지를 느끼게 해준다.

 

한국의 교육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피상적인 암기 위주의 교육을 벗어나기 위하여 실험, 특히 과학 실험을 통한 교육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한 세대가 지난 지금 과거보다 나아진 것이 없다. 무엇이 잘못인가. 관찰과 실험, 즉 경험을 중요시하는 경험주의는 관념주의에 대한 대립 개념이 아니고 변형된 개념이다. 관찰과 실험의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점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를 결정하고 실험 결과로서 얻은 자료를 정리하여 요약하고 결론을 짚어 내는 과정은 엄밀한 논리를 동원하는 관념주의를 필요로 한다. 우리의 실험과학 교육은 이 너무나 당연하여 말하지 않고 넘어가는 부분, 즉 관념주의든 경험주의든 그 하부구조는 기초적인 관념주의, 즉 논리적 사고와 추론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소개하지 않았다. 한국의 교육학자들은 스스로의 판단에 근거해 실험과학 교육을 외친 것이 아니라 단지 번역자들로서 외국의 교육지침서를 한국에 소개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외국에서는 너무나 당연하여 말하지 않고 넘어가는 부분을 한국에서는 깨닫지 못하여 말하지 않고 넘어갔다.’

 

이러한 여러 사실들을 언급함으로써 나는 현실적인 교육문제에 관하여 무엇을 포괄적으로 지적하려는가. 과학을 전공하는 대학 교수들이 학생들을 대하면서 느끼는 큰 비애 중 하나는 대다수의 학생들이 지극히 비논리적인 사고방식에 젖어 있으며, 어법 체계를 갖추지 않은 언어 사용에 몹시 오염되어 있어서 학문이 학문으로서 학생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요즘 학생들의 언어로 표현된 논리체계 수준은 원숭이와 백두산이 논리적 관계로 이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정도다.

 

언어는 사람의 사고능력을 결정적으로 지배한다. 한국 사회는 이 무섭도록 중요한 언어 교육을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현재 한국의 대다수 국어 선생들은 논리적 훈련을 위한 방법으로서의 국어 교육을 이해하지 못한다. 국어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들었을 때 국어 교육 담당자들이 머릿속에 그리는 것은 국문학 강의를 지루하게 길게 하는 장면들이다. ‘논리로서의 언어 문학으로서의 언어 속에 모두 언어라는 낱말이 들어 있어 앞에서 말한 대로 대다수의 국어 선생들이 낱말의 덫에 걸려 든다. 그 증명은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와 교육방송의 국어 시간이 온통 문학으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한국 국어 교육관련자들은 국어와 국문학을 자기 편할 대로 혼동하여 국어 대신 국문학 교육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들이 논리로서의 국어 교육을 받은 적이 없기도 하지만 더 궁극적으로는 그들이 낱말의 덫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의 문제점은, 지적하기 민망하지만 과목 이기주의라 불리는 문제로서 대학교의 국문학과 출신들이 고등학교의 국어 교육 과정을 마련함에 있어서 같은 부류의 국문학과 출신들이 고등학교 국어 선생의 자리를 차지하기 쉽고 수업하기 편하도록, 고등학교 국어의 내용을 자신들이 대학에서 배운 전공과목으로 한정했다는 점이다. 즉 고등학교 국어 교육에 대한 책임을 진 사람들이, 학생들의 입장이 아닌 국문학과 졸업자들의 입장을 위하여 국어를 국문학으로 제한하여 교육과정을 결정한 것이다. 그리하여 반토막 국어 교육이 우리 사회를 바보 수준에 머물도록 강요하고 있다.

 

해결책은 지극히 어렵지만 아주 간결하게 요약된다. 학생들에게 논리적 상황을 소재로 한 독서와 글쓰기 훈련을 시켜야 한다. 그리고 저급 학교에 새 교과목을 개설하여 논리, 특히 과학을 문법과 어법 검사 및 언어분석을 통하여 파악하는 과정을 가르쳐야 한다. 이 개혁은 종전과 다른 교과서를 만들고 새 교과목을 맡을 선생들을 훈련하는 따위의 지극히 어려운 문제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가 문화적 열등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다. 과학과 사상, 1993,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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