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계의 살아 있는 양심
by 송화은율언론계의 살아 있는 양심 / 서중석(성균관대 교수)
출전 : 학문의 길, 역사의 길
해방 후 한국의 대표적 언론인 세 사람을 꼽으라면 천관우, 최석채, 송건호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석채는 유신체제에 협력하였고, 천관우도 어쨌든 전두환군부정권에 관계하였다. 언론인으로서 끝까지 정도를 걸은 대표적 인물이 송건호이다. 1970년대 중반에 청와대 공보비서를 맡으라는 제의를 거부하였고, 장관, 유정회, 국회의원 얘기도 있었지만, 다 거절하였다.
송건호는 일제말 대학에 들어가려고 할 때 차별대우를 받고 민족의식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서울대 법대에 다닐 때 국대안 반대투쟁에 동참한 바 있었던 그는 1953년 조선일보 외신부 기자를 시작으로 40년에 걸쳐 언론계의 살아있는 양심으로 싸웠다. 법과대를 다녔는데도 분단 조국에서는 관리를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여 신문사에 들어갔지만, 그가 언론인으로서 드물게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던 것은 사대주의에 찌들대로 찌들고 자주성이나 주체의식이 없는 황량한 현실에 대한 비판에서 나온 것이었다.
송건호는 1965년 38세에 경향신문 편집국장이 되었고, 1974년에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되었다. 그는 언론인들이 원하는 편집국장에 뜻이 없었다. 이미 33세에 논설위원이 되어 성가를 날렸는데, 글 쓰고 책 읽는 데에는 논설위원 같은 자리가 더 좋았기 때문이었다.
송건호는 수난기에 편집국장을 맡았다. 구 군데 다 중앙정보부와 싸우고 나왔다. 정치적으로 어려운 때여서 할 사람이 없으니까 편집국장이란 중책을 그한테 떠맡긴 것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카톨릭 계로 정부에 비판적이었던 경향신문을 탈취하려고 작전을 벌이는 것에 맞서서 그는 언론의 정도를 지켜야했다. 유신독재의 한복판에서 동아일보 기자들과 동아방송 프로듀서들은 1974년 4월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언론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을 벌였다. 이 때 편집국장을 맡았던 송건호는 박정권이 폭압으로 동아일보에 광고를 못 내게 한 ‘광고사태’란 전대미문의 사태에 기자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싸웠다. 그러나 결국 사주가 폭압 앞에 굴복하여 1975년 3월 134명을 해고하여 ‘거리의 언론인’으로 내몰자, 사주에게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충고를 하고 사표를 냈다.
어느 때나 정도를 지키고 올바로 살려고 하면 핍박이 따르게 마련이지만, 원래 청빈하였던 송건호는 동아일보사에서 나온 이후 수년 동안 생활고에 몹시 시달렸다. 자식들을 대학에 보낼 수도 없었고, “내일 또 식량이 떨어지면 어떡하나. 굶어죽으면 어떡하나”하는 고민에 빠지곤 하였다. 그 자신이 일년에 한두 번은 미칠 것 같았다고 회고하는 데서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하였는가를 읽을 수 있다. 동아일보에서 나온 뒤 죽어도 신문사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학교 쪽으로 가려고 했는데,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한양대에서는 시간강사를 한 학기 한 후에 그만두라고 했고, 서강대에서는 새 학기에 나오라고 하고는 금방 오지 말라고 하였다. 중앙정보부에서 도청을 하여 압력을 넣은 것이었다. 원고도 쓰기 어려웠다. 출판사에도 압력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의인들이 살기 어려운 세상이었다.
1980년 5․17쿠테타가 나자마자 송건호는 ‘143인 지식인 시국선언’을 했다고 끌려가 몹시 고문을 당하였고 군사재판에서 3년 6월 형을 선고받았다. 체구는 작아도 수사관한테 독종이라는 평을 들었던 당차고 매서운 선비였는데, 이때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1990년에 들어서면서 다리에 마비 증상이 생겼고, 1990년대 중반 이후는 병마에 시달려 거의 몸을 못 쓰게 되었다.
송건호는 1984년부터 한국언론사상 한 획을 활동을 하게 된다. 동아투위, 조선투위, 80년 해직언론인, 진보적 출판인 등이 민주언론협의회(민언협)를 조직하고 잡지 ‘말’을 발행하게 되었다. 그는 민주언론협의회 의장과 ‘말’지의 발행인이 되었다. 민언협에서 발행한 ‘말’은 제도언론의 대안으로 진실을 보도할 것을 사명으로 하여 탄생되었던 바, 특히 ‘보도지침’을 보도함으로써 주목을 받았다. 6월 민주대항쟁의 열기 속에서 진실 보도의 갈망은 한층 더 커졌고, 그리하여 동아투위, 조선투위, 80년 해직언론인들이 주축이 되어 ‘민주시민’의 신문으로 ‘한겨례신문’이 드디어 만들어졌다. 이 때도 송건호는 이 신문의 초대 사장 및 회장을 역임하여, 참된 언론인으로서 대미를 장식하였다.
송건호는 동시대 지성의 문제에 많은 고민을 하였고, 그 부분에서 탁월한 비평자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1950년대나 1960년대 초에 씌어진 글도 그러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지만, 1960년대 중반 이후의 글들을 모은 ‘민족지성의 탐구’는 한국 지성의 불모성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가야할 길을 제시한 주목할 만한 저서였다. 그는 이 저서에서 해방 이후 사회과학이 철두철미 주체성을 망각하고 사대주의에 빠져 있으며, 언론인, 지식인이 논리적․객관적 사고가 결핍된 상태에서 현상 추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통렬히 비판하였다. 그는 1960년대에 이승만 식의 몰주체적 냉전․진영논리에서 벗어나, 냉전보다 민족을 앞세웠던 백범이즘이 부활할 것을 기대하였다. 1966년에 출간된 ‘드골-프랑스의 영광’도 긍지와 자존의 민족주의 고취에 맥이 닿아 있는 저서였다.
한국현대사 연구에서 송남헌과 송건호는 잊을 수 없는 인물이다. 두 분 다 학자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송건호가 지적한 대로 역사부문에서 가장 현실과 직결되어 있는 현대사뿐만 아니라 근대사까지도 사학계에서 외면하였던 것이 두 분으로 하여금 현대사 연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ask들었다. ‘한국 현대사’(1986, 1979년에 출판된 ‘한국현대사론’을 보강한 것)는 일제말 그 어두운 시기에 어떻게 양심을 지켜왔을까를 유신 말기의 상황에서 생각하면서 저술한 것으로, 주로 근대시기의 역사를 다루었는데, 그때까지는 국내에서 그러한 책이 거의 없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송건호의 현대사 서술은 한국사를 꿰뚫어보는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예컨대 김구의 반탁투쟁이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1980년을 전후한 시기에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민족주의와 현대사에 대한 열정은 통일 문제로 갈 수밖에 없었는데, 저서뿐만 아니라 논문으로도 분단과 통일정책, 통일론, 통일운동 등을 연구한 것이 적지 않다. 기독교사 연구도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 신군부정권의 백색 독재 하에서 지성의 눈으로 진실을 말하고자 하였던 송건호가 항상 고민한 것은 동시대 한국인이 얼마나 양심을 지키고 살려고 하였느냐는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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