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지만 자연스러운 것 / 콜리지
by 송화은율어리지만 자연스러운 것 / 콜리지
내가 만일 두날개를 가진 새였다면
그리운 사람아
너 있는 것으로 날아 가련만.
하지만 그런 생각한들 무슨 소용 있으랴
나는 여기에 꼼짝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꿈에서라면 네게 날아갈 수 있고
세계는 모조리 내 생각대로 된다.
그런데 잠에서는 깨게 마련이고
내 몰골이란
외톨이가 되어 있다.
임금이 명하더라도 잠은 언제나 계속되지 않기에
나는 날이 새기 전에 눈 뜨기를 좋아한다.
잠이 사라져 버릴지라도 주위가 캄캄하면
눈을 꼭 감고
계속해서 꿈을 꿀 수 있기 때문이다.
요점 정리
작자 : 콜리지
주제 : 꿈에 대한 끝없는 지향
이해와 감상
낭만주의는 개성·주관·비합리성·상상력·개인·자연스러움·감성·환상·초월성 등을 강조했는데 이 시는 낭만파의 시적 분위기가 물씬 담겨 있다. 특히 '눈을 꼭 감고/ 계속해서 꿈을 꿀 수 있기 때문이다.'는 바로 낭만파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심화 자료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
1772. 10. 21 잉글랜드 데번셔 오터리세인트메리~1834. 7. 25 런던 근처 하이게이트. 영국의 서정시인·비평가·철학자로 윌리엄 워즈워스와 함께 쓴 〈서정민요집 Lyrical Ballads〉은 영국 낭만주의 운동의 시발이 되었고, 그의 〈문학평전 Biographia Literaria〉(1817)은 영국 낭만주의 시대에 나온 일반 문학비평 중 가장 중요한 작품이다.
초기생애와 작품
콜리지의 아버지는 오터리의 부목사였고 시내 그래머 스쿨의 교장이었다. 어린시절부터 그는 대단한 독서가여서 로맨스나 〈천일야화 The Arabian Nights' Entertainments〉와 같은 동양이야기에 광적일 정도로 매료되었다. 1781년 아버지가 갑자기 죽었고 이듬해 콜리지는 런던의 크라이스트 호스피털에 입학해 중등과정을 마쳤다. 1791년 케임브리지대학교 지저스 칼리지에 입학했다. 중·고등학교시절이나 대학시절에도 계속해 많은 책을 읽었는데, 특히 문학작품과 몽상적인 철학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교사들은 그의 웅변술과 비범한 기억력을 높이 평가했다. 케임브리지대학교 3학년 때 경제적인 곤경으로 런던에 와서 사일러스 톰킨 컴버바시라는 가명으로 기병대에 자진입대했다. 그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지만 친구들이 그를 찾아낼 때까지는 계속 군대생활을 했다. 형제들이 그를 제대시킨 후 다시 케임브리지대학교에 복학했다.
학교에 돌아와서도 그는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프랑스 혁명과 더불어 발생한 지적·정치적 격동으로 사회의 본질에 대한 집중적이고 급박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콜리지는 프랑스 혁명의 이상론을 파괴했던 끔찍한 폭력을 회피하는 한 방법으로 자발적으로 조직되고 주위의 어떤 사회보다도 더 나은 원칙에 따라 자녀를 교육하는 소규모 사회를 만들려고 했다. 우연히 시인 로버트 사우디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은 그러한 '이상적 평등사회'(partisocracy)를 계획해 펜실베이니아 서스쿼해나 강변에 공동체를 건설하려고 했다. 이 목적 때문에 콜리지는 영구히 케임브리지대학교를 떠나 사우디와 함께 브리스틀에서 대중강연자로 자리잡았다. 1795년 10월 그는 그곳 여교장의 딸인 세라 프리커와 결혼했는데, 이것은 그녀가 다른 남자들의 구혼을 거절하는 것이 그의 탓이라는 사우디의 말에 어느 정도 동요되었기 때문이다.
그 직후 사우디는 평등사회 계획에서 물러났고 콜리지는 진정으로 사랑하지도 않는 여성과 결혼생활을 계속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는 평생 이 타격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나중의 많은 경우에 임시변통적인 면이 있었다면 이는 자신의 지적 열의를 가정의 경제형편과 조화시키려는 지속적인 필요성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에 콜리지의 지성은 남다를 정도로 개화해 1795년에 알게 된 워즈워스와 함께 인간정신의 본질에 대한 탐구에 착수했다. 그들은 함께 영국 문학사상 큰 영향력을 남긴 창조적 시기에 접어들었다. 콜리지의 왕성한 지식과 모든 개인의 강력한 '생명의식'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워즈워스는 그무렵 사건들에서 생긴 좌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798년 출판된 〈서정민요집〉에 게재된 워즈워스 시의 특징을 이루는 자연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식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콜리지는 대화체 어조와 리듬을 사용해 시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새롭고도 비형식적인 유형의 시를 전개해나갔다. 이런 시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것이 〈심야에 내린 서리 Frost at Midnight〉로, 이 작품은 서머싯의 서리 내린 조용한 밤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해 서리의 고요한 작업과 시인의 곁에 잠든 아기의 고요한 숨소리와의 연관성에 대한 명상으로 이어지며, 시인이 감지하게 된 동조적 정신이 아이의 교육을 통해 내내 보강되어질 수 있도록 그 아이를 '자연의 아이'로 키우겠다는 결심으로 끝맺고 있다. 그 시의 절정 부분에서 콜리지는 자신의 철학적 태도의 근원에 놓여 있는 또 다른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그대는 보고 들으리라/그대의 신이 말씀하시는 저 영원한 언어의/사랑스런 모습과 이해할 수 있는 소리를/신은 태고 적부터 가르치고 있다/모든 것에 그가 있고 그 안에 모든 것이 있음을."
콜리지는 이 '언어'를 배우고 그것을 인류의 오랜 전통에서 추적하려고 애쓰게 되어 이 시기 내내 또다시 학창시절에 가졌던 몽상적인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비교종교와 신화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신의 단일성과 영혼불멸성에 대해 일반적으로 공통된 의견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볼 때 모든 종교와 신화 전통은 보편적인 생명 의식에서부터 생겼으며, 이 의식은 특히 천재적 인간이라는 현상을 통해 표현되리라는 생각을 탐색해보았다.
이러한 사색이 가장 성숙했을 무렵 그는 서머싯셔 컬본 근처의 외로운 농가에 은둔해, 아편에 취한 채 〈쿠빌라이 칸 Kubla Khan〉으로 알려진 불가사의한 시를 썼다. 이 시의 이국적 이미저리와 운율적 어조로 인해 많은 비평가들은 이 작품을 '무의미한 환상'으로 읽으면서 생생하고도 감각적인 특성을 즐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콜리지의 심리적·신화적 관심사에서 이 시를 조사해보면 결국 이것은 복잡한 의미구조를 가졌고 근본적으로 인간 천재성의 본질에 대한 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 두 연은 콜리지가 다른 곳에서 '압도적인 천재성'이라 불렀던 것의 2가지 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중 평화로운 때 나타나는 창조적 열의는 첫 연의 계획된 쾌락의 궁전과 정원으로 상징화된다. 혼란스러운 때의 파괴적인 힘은 제2연의 울부짖는 여인, 파괴적인 샘물, 전쟁을 예고하는 목소리로 상징화되어 있다.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절대적 천재'의 상태에 대해 쓰고 있는데, 몽상적인 '아비시니아 여인'이 영감을 불어넣어준다면 아폴론이나 오시리스처럼 그 주위의 모든 것을 주문의 마력에 의해 그를 따르도록 하는 태양신의 창조적이고 신비한 능력을 그에게 부여하리라는 것이다.
콜리지는 1797~98년에 완성된 〈노수부의 노래 The Rime of the Ancient Mariner〉에서 다소 자기중심적인 성향에서 벗어났으나 동일한 주제를 다루었다. 대표작인 이 시에서 그는 민요형식을 따랐다. 작품의 주된 줄거리는 알바트로스를 살해해 생명원칙에 위배되는 죄악을 저지른 노수부가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겪으면서 자신의 죄의 본질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가 위배한 내재된 생명력이란 모든 생명체 속에 스며들어 모든 것을 환희의 공동체로 결합시켜주는 태양 에너지와 상응할 만한 힘으로 그려져 있다. 뱃전에 떠도는 새를 죽임으로써 그 수부는 이 생명과정의 한 연결고리를 부서뜨리게 된다. 결과적으로 자신의 의식도 그 영향을 받는다. 이전에는 찬란했던 태양도 핏빛 태양으로 보이고 깊은 바다의 에너지도 부패한 것으로 보인다. "뜨거운 구릿빛 하늘에 피 같은 해가/정오에, 바로 돛대 위에 서 있었소/달보다도 크지 않은… 바다는 썩었다, 오 그리스도여!/이런 일이 세상에 있다니/아, 끈적거리는 것들이 다리로 기었다/끈적거리는 바다 위에서."
밤이 되어서야 이 에너지들이 사악한 아름다움을 드러내었다. "빙글빙글 미치광이 춤을 추며/도깨비불들이 밤에 춤을 추었다/물은, 마녀의 기름처럼/녹색과 청색, 그리고 백색으로 불타올랐다."
동료들이 죽은 후 홀로 남겨져 움직이는 느낌도, 심지어 시간이 흘러간다는 느낌도 없이, 그 수부는 생명과 아무런 연결고리도 없는 지옥과 같은 상태에 빠져든다. 그러나 결국 암흑 속에서 황금불빛처럼 번쩍이는 물뱀들을 우연히 보고 그의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에 힘입어 다시 생명의 과정이 시작된다. 즉 그는 모든 생명체들이 상호 조화된 가운데 그들의 근원을 찬양하는 우주의 내면적 통일성을 깨닫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도 그는 자신이 겪은 일로 계속 괴로워하지만, 최소한 악몽에서 깨어나 이제 인간생활의 평범한 과정을 경이감과 자비심을 가지고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시에는 이러한 특성들이 미묘하면서도 동시에 생생히 결합되어 매력적으로 나타난다. 〈서정민요집〉의 처음에 이 시를 배치한 것은 워즈워스의 많은 기고작품들의 특징을 이루는 평범한 생활 속에서 경이감을 찾는 맥락을 제공하려는 의도였던 것이 분명하다. 이 시집이 인쇄되고 있던 도중에 콜리지는 그의 보조적인 시 〈크리스타벨 Christabel〉이라는 제목의 고딕풍 발라드를 쓰기 시작했는데, 이 작품에서 그는 원시적인 힘이 어떻게 순수한 사랑과 접하면서 구제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자 했다.
시련의 세월
1798년초 콜리지는 정치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프랑스 혁명정부는 스위스 연방정부를 탄압했고, 콜리지는 〈프랑스 송가 France : An Ode〉라는 시에서 혁명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데 대한 그의 괴로움을 토로했다. 이즈음 조시아와 토머스 웨지우드 형제가 콜리지의 지성과 전도양양함에 감명받아 1798년 지적 연구를 계속하는 동안의 생계비로 연금 150파운드를 주겠다고 제안해왔다. 그 덕분에 그는 워즈워스와 워즈워스의 여동생 도로시와 함께 독일을 방문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콜리지는 괴팅겐에서 생리학과 성서비평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몇 년 후까지도 영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독일 학문의 발달상황을 잘 알게 되었다.
1799년말 영국에 돌아오자마자 그는 장차 워즈워스의 처제가 될 세라 허친슨과 사랑에 빠지게 되어 결혼 생활의 긴장이 심화되었다. 그가 워즈워스에게 바친 헌신도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고, 그후 몇 년 동안 콜리지는 가정불화로 고통을 겪으면서 건강 악화와 아편 중독으로 고생했다. 그 시기 동안 그의 주요한 문학작품 중에는 〈크리스타벨〉의 또다른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1802년 콜리지는 가정불화로 인해 〈절망 Dejection : An Ode〉을 쓰게 되었다. 이 시는 원래 세라 허친슨에게 보낸 좀더 긴 운문편지였는데, 여기에서 그는 가정생활의 냉담함에서 도피하고자 지식활동에 열중하지만 그것 역시 마음만 소모시킬 뿐이라고 비통해 했다. 이 시는 일상 회화체의 시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 시에 사용된 미묘한 리듬과 시구는 완벽하게 다듬어져 시인 자신의 절망적인 마음 상태를 잘 드러내고 있다.
콜리지는 세라를 향한 정신적 사랑과 아내와 자녀들에 대한 성실함을 서로 조화시켜 워즈워스 집안으로부터 지원금을 얻어내기를 희망했으나 그의 기대는 무산되고 건강도 더욱 악화되었다. 좀더 따뜻한 지방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생각하고 1804년 후반 당시 몰타섬 주지사의 비서 직위를 수락했다. 나중에 오랜 시간 이탈리아를 여행했으나 그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해외체류기간 동안 건강이 회복되지 않았다. 그러나 몰타에서 보낸 시간은 개인적으로 재충전의 계기가 되었다. 정부의 업무를 다루는 데 익숙해 있는 사람들과 직접 교제하면서 자신이 그들만큼 강인하지 못해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영국에 돌아와 그는 좀더 남자답고 단호해졌다. 몇 개월 후 그는 결국 아내와 헤어져 얼마 동안 워즈워스 가족과 함께 살기로 결심했다. 사우디는 여생 동안 콜리지의 가족들을 보살펴주어 젊은날의 잘못된 충고의 보상을 치렀다.
콜리지는 1809년 6월부터 1810년 3월까지 〈친구 The Friend〉라는 잡지를 출간했으나 그의 분신처럼 활동했던 세라 허친슨이 그들 관계의 긴장을 견디다 못해 웨일스에 있는 오빠 집으로 가버리자 그 일을 그만두었다. 워즈워스가 분명히 처제를 돌아가도록 부추겼다고 생각한 콜리지는 무척 화가 나서 그 직후 윌리엄과 도로시 워즈워스와의 작업상 관계를 청산하고 다시 런던에 머물 생각을 했다. 그 이후 시간은 그의 일생 중 가장 어두운 때였다. 워즈워스 남매의 기분 나쁜 논평이 전해지자 워즈워스에 대한 실망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얼마 동안 그는 런던에 남아 자신의 불만을 달래느라 작품을 거의 쓰지 못했다. 아편이 그에게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고 그 시기 이래 남아 있는 작품들은 자기극화를 해내지 못하고 자기연민으로 바뀌면서 불행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점진적인 소생의 기미가 나타났는데, 이것은 콜리지가 처음으로 유명인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1811~12년 겨울 동안 행한 강연에는 수많은 청중들이 모여들었다. 수년 동안 콜리지는 셰익스피어의 업적에 매료되었고 주요한 등장인물에 대한 심리적인 해석은 당대인들에게는 새롭고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그 시기 동안 몇 년 전에 쓴 콜리지의 희곡 〈오소리오 Osorio〉는 1813년 1월 〈후회 Remorse〉라는 제목으로 드루어리 레인 극장에서 상연되었다.
말년과 작품
마침내 따뜻한 위로는 예기치 않은 곳에서 왔다. 절망에 빠져 긴 작품을 쓸 수도 없고 아편중독에서도 벗어나지 못한 채, 그는 오랜 시간 동안 윌트셔에서 친구들과 함께 지냈다. 그곳에서 그는 로버트 라이턴 추기경의 〈베드로의 첫째 편지〉 주해서에 접하게 되었다. 이 17세기 성직자의 저술에서 그는 깊은 감명을 받았고 의존할 만한 생활태도인 상냥함과 성스러움의 조화를 찾아냈다. 이 발견은 그의 지성적 태도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때까지는 단순한 참조사항 정도였던 그리스도교는 이제 그의 '공식적인' 신조가 되었다. 17세기의 전성기를 이룬 성공회에 동조해 그는 당대의 정통 그리스도교도들과 계속 의견을 나누었다. 그럼으로써 소수의 친구들로부터 그가 항상 필요로 했던 사회적 승인을 얻으면서 동시에 지적·감정적으로 영국교회를 쇄신시켜 그리스도교적 통합에 도달하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그의 지적·감정적 생활에 이런 기반이 가져다준 하나의 효과는 해방감과 다시 대작을 쓸 수 있는 능력을 회복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시를 모아 1817년 〈예언의 꽃잎 Sibylline Leaves〉으로 출판했고, 〈문학평전〉을 썼다. 이 책은 비록 구성이 산만하지만 대단히 자극적인 내용으로 문학사상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사상사를 피력했고 워즈워스의 시에 대해 광범위한 비판을 가했다.
새로운 극작품 〈재폴리야 Zapolya〉는 1817년 출간되었다. 같은 해에 얼마 동안 새로운 〈메트로폴리타나 백과사전 Encyclopaedia Metropolitana〉과 인연을 맺었는데 그의 〈견본서 Prospectus〉에는 새로운 조직구성이 계획되어 있었다. 이 시기는 콜리지에게 있어 다소 안정된 기간이었다. 1816년 이래 그는 런던 북쪽 하이게이트의 외과의사인 제임스 질먼의 집에 기거했다. 1824년 왕립문학협회의 펠로로 선출되어 105파운드의 연금을 받았고 사람들의 인정도 받았다. 1830년 그의 마지막 산문 〈교회와 정부의 구성에 대하여 On the Constitution of the Church and State〉를 써서 가톨릭 해방문제와 연루된 논쟁에 개입했다. 콜리지의 〈시집 Poetical Works〉의 제3판이 1834년에 출판되어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의 작품을 볼 수 있었다.
평가
콜리지의 상당한 잠재력이 자신의 작품 속에서 완전히 실현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평자들이 광범위하게 동의하고 있으나, 그의 작품들은 다른 어떤 영국 문학자들의 작품보다 상당히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다. 시인으로서의 그의 지위는 결코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문학평전〉을 기초로 가장 중요한 영국 문학비평가라는 명성도 얻었다. 콜리지의 견해에 따르면 문학의 본질적 요소는 감정과 사고의 결합이었는데 그는 이것을 상상력이라고 명명했다. 그는 특히 보편과 특수, 주관과 객관, 일반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을 통합시키는 시의 능력을 강조했다. 콜리지에게 있어 비평의 기능은 단순히 규칙이나 형식을 규정하거나 설명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이러한 요소들을 구분하여 의식적인 깨달음으로까지 이끌어가는 것이었다. 시인·사회비평가·문학비평가·신학자·심리학자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콜리지는 인간존재와 전우주의 기본을 이루고 있는 본질적인 창조적 원칙을 해명하려는 데 깊은 관심을 보였다. 콜리지에게 있어 상상력은 이 기본 원칙의 원형이었는데, 상상력이야말로 인간의 직관적·비이성적 오성과 물질세계에 대한 사상을 조직하고 분별하는 능력을 상호조화시키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콜리지는 바로 이런 정반대되는 것의 조화를 통해 보편적인 이상과 개별적인 특수성을 결합시키려 했으며 그의 시와 비평이 평가를 받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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