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전(兩班傳)
by 송화은율양반전(兩班傳)
양반이란, 사족(士族)들을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
정선군(旌善郡)에 한 양반이 살았다. 이 양반은 어질고 글읽기를 좋아하여 매양 군수가 새로 부임하면 으레 몸소 그 집을 찾아와서 인사를 드렸다. 그런데 이 양반은 집이 가난하여 해마다 고을의 환자를 타다 먹은 것이 쌓여서 천 석에 이르렀다. 강원도 감사(監使)가 군읍(郡邑)을 순시하다가 정선에 들러 환곡(還穀)의 장부를 열람하고 대노해서,
"어떤 놈의 양반이 이처럼 군량(軍糧)을 축냈단 말이냐?"
하고, 곧 명해서 그 양반을 잡아 가두게 했다. 군수는 그 양반이 가난해서 갚을 힘이 없는 것을 딱하게 여기고 차마 가두지 못했지만 무슨 도리가 없었다.
양반 역시 밤낮 울기만 하고 해결할 방도를 차리지 못했다. 그 부인이 역정을 냈다.
"당신은 평생 글읽기만 좋아하더니 고을의 환곡을 갚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군요. 쯧쯧 양반, 양반이란 한 푼어치도 안 되는 걸."
그 마을에 사는 한 부자가 가족들과 의논하기를,
"양반은 아무리 가난해도 늘 존귀하게 대접받고 나는 아무리 부자라도 항상 비천(卑賤)하지 않느냐. 말도 못하고, 양반만 보면 굽신굽신 두려워해야 하고, 엉금엉금 가서 정하배(庭下拜)를 하는데, 코를 땅에 대고 무릎으로 기는 등 우리는 노상 이런 수모를 받는단 말이다. 이제 동네 양반이 가난해서 타먹은 환자를 갚지 못하고 시방 아주 난처한 판이니 그 형편이 도저히 양반을 지키지 못할 것이다. 내가 장차 그의 양반을 사서 가져보겠다."
부자는 곧 양반을 찾아가 보고 자기가 대신 환자를 갚아 주겠다고 청했다. 양반은 크게 기뻐하며 승낙했다. 그래서 부자는 즉시 곡식을 관가에 실어가서 양반의 환자를 갚았다.
군수는 양반이 환곡을 모두 갚은 것을 놀랍게 생각했다. 군수가 몸소 찾아가서 양반을 위로하고, 또 환자를 갚게 된 사정을 물어보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 양반이 벙거지를 쓰고 짧은 잠방이를 입고 길에 엎드려 '소인'이라고 자칭하며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지 않는가. 군수가 깜짝 놀라 내려가서 부축하고,
"귀하는 어찌 이다지 스스로 낮추어 욕되게 하시는가요?"
하고 말했다. 양반은 더욱 황공해서 머리를 땅에 조아리고 엎드려 아뢴다.
"황송하오이다. 소인이 감히 욕됨을 자청하는 것이 아니오라, 이미 제 양반을 팔아서 환곡을 갚았읍지요. 동리의 부자 사람이 양반이올습니다. 소인이 이제 다시 어떻게 전의 양반을 모칭(冒稱)해서 양반 행세를 하겠습니까?"
군수는 감탄해서 말했다.
"군자로구나 부자여! 양반이로구나 부자여! 부자이면서도 인색하지 않으니 의로운 일이요, 남의 어려움을 도와주니 어진 일이요, 비천한 것을 싫어하고 존귀한 것을 사모하니 지혜로운 일이다. 이야말로 진짜 양반이로구나. 그러나 사사로 팔고 사고서 증서를 해 두지 않으면 송사(訟事)의 꼬투리가 될 수 있다. 내가 너와 약속을 해서 군민(郡民)으로 증인을 삼고 증서를 만들어 미덥게 하되 본관이 마땅히 거기에 서명할 것이다."
그리고 군수는 관부(官府)로 돌아가서 고을 안에 사족(士族) 및 농공상(農工商)들을 모두 불러 관정(官庭)에 모았다. 부자는 향소(鄕所)의 오른쪽에 서고, 양반은 공형(公兄)의 아래에 섰다.
그리고 증서를 만들었다.
건륭(乾隆) 10년 9월 일
위에 명문(明文)은 양반을 팔아서 환곡을 갚은 것으로 그 값은 천 석이다.
오직 이 양반은 여러 가지로 일컬어지나니, 글을 읽으면 가리켜 사(士)라 하고, 정치에 나아가면 대부(大夫)가 되고, 덕이 있으면 군자(君子)이다. 무반(武班)은 서쪽에 늘어서고 문반(文班)은 동쪽에 늘어서는데, 이것이 '양반'이니 너 좋을 대로 따를 것이다.
야비한 일을 딱 끊고 옛을 본받고 뜻을 고상하게 할 것이며, 늘 오경(五更)만 되면 일어나 황(黃)에다 불을 당겨 등잔을 켜고 눈은 가만히 코끝을 보고 발꿈치를 궁둥이에 모으고 앉아 동래박의(東萊博義)를 얼음 위에 박 밀듯 왼다. 주림을 참고 추위를 견뎌 입으로 설궁(說窮)을 하지 아니하되, 고치·탄뇌(叩齒彈腦)를 하며 입안에서 침을 가늘게 내뿜어 연진(嚥津)을 한다. 소매자락으로 모자를 쓸어서 먼지를 털어 물결 무늬가 생겨나게 하고, 세수할 때 주먹을 비비지 말고, 양치질해서 입내를 내지 말고, 소리를 길게 뽑아서 여종을 부르며, 걸음을 느릿느릿 옮겨 신발을 땅에 끄은다. 그리고 고문진보(古文眞寶), 당시품휘(唐詩品彙)를 깨알같이 베껴 쓰되 한 줄에 백 자를 쓰며, 손에 돈을 만지지 말고, 쌀값을 묻지 말고, 더워도 버선을 벗지 말고, 밥을 먹을 때 맨상투로 밥상에 앉지 말고, 국을 먼저 훌쩍 훌쩍 떠먹지 말고, 무엇을 후루루 마시지 말고, 젓가락으로 방아를 찧지 말고, 생파를 먹지 말고, 막걸리를 들이켠 다음 수염을 쭈욱 빨지 말고, 담배를 피울 때 볼에 우물이 파이게 하지 말고, 화난다고 처를 두들기지 말고, 성내서 그릇을 내던지지 말고, 아이들에게 주먹질을 말고, 노복(奴僕)들을 야단쳐 죽이지 말고, 마소를 꾸짖되 그 판 주인까지 욕하지 말고, 아파도 무당을 부르지 말고, 제사 지낼 때 중을 청해다 재(齋)를 드리지 말고, 추워도 화로에 불을 쬐지 말고, 말할 때 이 사이로 침을 흘리지 말고, 소 잡는 일을 말고, 돈을 가지고 놀음을 말 것이다. 이와 같은 모든 품행이 양반에 어긋남이 있으면, 이 증서를 가지고 관(官)에 나와 변정할 것이다.
성주(城主) 정선군수(旌善郡守) 화압(花押). 좌수(座首) 별감(別監) 증서(證書)
이에 통인(通引)이 탁탁 인(印)을 찍어 그 소리가 엄고(嚴鼓) 소리와 마주치매 북두성(北斗星)이 종으로, 삼성(參星)이 횡으로 찍혀졌다.
부자는 호장(戶長)이 증서를 읽는 것을 쭉 듣고 한참 머엉하니 있다가 말했다.
"양반이라는 게 이것뿐입니까? 나는 양반이 신선같다고 들었는데 정말 이렇다면 너무 재미가 없는 걸요. 원하옵건대 무어 이익이 있도록 문서를 바꾸어 주옵소서."
그래서 문서를 다시 작성했다.
"하늘이 민(民)을 낳을 때 민을 넷으로 구분했다. 사민(四民) 가운데 가장 높은 것이 사(士)이니 이것이 곧 양반이다. 양반의 이익은 막대하니 농사도 안 짓고 장사도 않고 약간 문사(文史)를 섭렵해 가지고 크게는 문과(文科) 급제요, 작게는 진사(進士)가 되는 것이다. 문과의 홍패(紅牌)는 길이 2자 남짓한 것이지만 백물이 구비되어 있어 그야말로 돈자루인 것이다. 진사가 나이 서른에 처음 관직에 나가더라도 오히려 이름 있는 음관(蔭官)이 되고, 잘 되면 남행(南行)으로 큰 고을을 맡게 되어, 귀밑이 일산(日傘)의 바람에 희어지고, 배가 요령 소리에 커지며, 방에는 기생이 귀고리로 치장하고, 뜰에 곡식으로 학(鶴)을 기른다. 궁한 양반이 시골에 묻혀 있어도 무단(武斷)을 하여 이웃의 소를 끌어다 먼저 자기 땅을 갈고 마을의 일꾼을 잡아다 자기 논의 김을 맨들 누가 감히 나를 괄시하랴. 너희들 코에 잿물을 들이붓고 머리 끄덩을 희희 돌리고 수염을 낚아채더라도 누구 감히 원망하지 못할 것이다."
부자는 증서를 중지시키고 혀를 내두르며
"그만 두시오, 그만 두어. 맹랑하구먼. 나를 장차 도둑놈으로 만들 작정인가."
하고 머리를 흔들고 가버렸다.
부자는 평생 다시 양반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한다. <연암집(然巖集)>
지은이 : 박지원(朴趾源) / 이우성·임형택 옮김
갈래 : 한문 소설, 단편 소설, 풍자 소설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구성 : 단순 구성으로 정선군의 한 양반이 가난하여 환곡을 갚지 못하자, 감사와 아내로부터 비난을 받는다. 이를 알게 된 마을의 한 부자가 환곡을 갚고 양반을 샀다. 군수가 이러한 사정을 알고, 두 사람 사이의 매매 사실을 군민으로 증인으로 삼고 증서를 만들었다. 증서의 내용은 양반이라면 마땅히 이행해야 할 의무와 권리들을 열거하고 있다.
발단 - 전개 - 결말의 3단 구성
문체 : 번역체, 산문체, 문어체
배경 : ① 시대적 - 18세기 ② 공간적 - 정선군 ③ 사상적 - 실학사상
주제 : 양반들의 공허한 관념·비생산성·특권 의식에 대한 비판, 양반의 무능력과 위선에 대한 풍자
특징 :
① 몰락하는 양반들의 위선적인 생활 모습을 비판 풍자함.
② 당시의 시대상의 반영으로 평민 부자로 대표되는 새로운 인간형을 제시함.
③ 독특한 풍자와 해학으로 근대 의식을 보여 줌.
④ 실사구시의 실학 사상이 문학 작품 속에 드러남
⑤ 소재를 현실 생활에서 취하고 사실적인 태도로 묘사함.
⑥ '도둑놈' 이라는 표현을 통해 전횡을 일삼는 양반을 풍자적으로 고발함.
등장 인물 :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매우 복잡하다.
양반 |
강원도 정선의 양반으로 봉건사회에 기생하는 소위 선비의 계층에 속하는 이 작품의 주인공이다. 무기력하고 타성에 젖어 독서만 하다 천석이나 되는 관곡을 터먹고 어쩔 수 없이 양반을 팔게 되는 무능력한 인물이다. 당시 사회의 실정으로 보아 기생충적인 생활을 하는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있음. |
양반의 아내 |
관곡을 갚지 못하여 훌쩍거리고 울고 있는 자기 남편의 무기력함을 원망하고, 양반 권위을 부정한다. 이는 조선후기의 사회적 변동에 민감한 여인으로 남편을 질타하는 것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인식을 바탕에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관찰사 |
여러 고을을 순행하다가 정선양반의 관곡 사건을 알고 크게 노하여 양반을 잡아 가두게 한다. |
군수 |
몹시 세련된 관료적인 인간형으로 양반과 동네 부자간의 양반 매매에 관한 사건을 원만히 처리하지만 위선적 인물임 |
동네 부자 |
양반의 딱한 소식을 듣고 천석이나 되는 관곡을 양반 대신 갚고 양반권을 사려는 어리석은 인간이지만 그렇게도 원했던 양반의 모순된 점을 알고는 다시는 양반이란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다만 아무런 보람없이 천석만 송두리째 빼앗겨 버리고 마는 인물 |
기타 |
동네 부자와 양반 사이에 양반권 매매사건이 있을 때 군수의 명에 따라 양반문권을 작성할 때 자리했던 공형, 별감, 통인, 사족(士族) , 농민, 공장이, 장사아치 등 |
줄거리 : 강원도 정선 고을에 한 양반이 살고 있었다. 그는 학식이 높고 현명하고 정직하고 독서를 좋아하고 손님들을 초대하여 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부임하는 신임군수들은 몸소 찾아가서 인사를 하곤 했다. 그런데 양반은 너무 가난하여 관가에서 내주는 환자를 타먹고 살았다. 이렇게 여러 해를 보내는 동안 빚은 산더미처럼 쌓여 천석이나 되었다. 이 고을에 순찰차 들린 관찰사가 관곡을 조사하다가 천석이 빈 것을 발견하였다. 대노한 관찰사는 그 연유를 알고 당장 그 양반을 투옥하라고 했다. 군수는 양반을 투옥할 수도 그 빚을 갚도록 할 방도도 없어서 난감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한 사실을 안 양반은 어찌할 바를 몰라 울기만 하고 양반의 아내는 양반의 무능을 질타하였다. 이때 이웃에 사는 동네 상민 부자가 그러한 소문을 듣고 양반의 신분을 동경하던 중이라 이 기회에 양반을 사서 양반노릇을 해보겠다고 작정하고 양반을 찾아가서 양반을 팔라고 한다. 양반은 기꺼이 승낙하여 천부는 관곡을 갚아준다.
양반이 관곡을 갚았다는 말을 듣자 이를 의아하게 생각한 군수가 양반을 찾아가자 양반은 상인 행세를 하고, 그 일의 자초지종을 들은 군수는 군민들을 모아놓고 양반권 매매 계약서의 작성에 들어간다. 처음에 양반이 취할 형식적인 행동거지를 하나하나 열거하자 천부는 양반이 좋은 것인 줄 알았는데 행동의 구속만 받아서야 되겠느냐며 좋은 일이 있게 해 달라고 한다. 이에 군수는 두 번째 문서를 작성한다. 양반의 횡포를 하나하나 나열하면서 관직에도 나갈 수 있고, 상인들을 착취할 수도 있다고 한다. 동네 상민 부자는 '그런 양반은 도둑이나 다를 바 없다'면서 도망치고 만다. 그리고 다시는 양반을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고 한다.
출전 : 연암집 제 8권 '방경각외전'
내용 연구
양반이란, 사족(士族 : ①조선 시대 사농공상의 사민 가운데 사의 집안이나 그 자손. ②선비나 무인(武人)의 집안. )들을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
정선군(旌善郡)에 한 양반이 살았다. 이 양반은 어질고 글읽기를 좋아하여 매양[언제나, 번번이] 군수가 새로 부임하면 으레 몸소 그 집을 찾아와서 인사를 드렸다[먹고 살기도 힘든 형편에서 인사치레를 신경쓰는 양반 계층의 허례 허식에 대한 비판 의식이 깔려 있음]. 그런데 이 양반은 집이 가난하여 해마다 고을의 환자[각 고을의 사창에서 백성에게 곡식을 꾸어 주던 제도. 환곡(還穀)]를 타다 먹은 것이 쌓여서 천 석(섬. 용량의 단위로 열 말, 또 중량의 단위로 백이십 근)에 이르렀다(양반의 지위에 걸맞지 않게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조선 후기 양반의 경제적 몰락이라는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인물 설정이다. 또한, 무능한 양반을 묘사한 것이지만 천 석이란 엄청난 양을 빌릴 수 있다는 것은 가난한 백성들에게 돌아갈 것이 이런 양반들에게만 집중되었다는 면을 고발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강원도 감사(監使)가 군읍(郡邑)을 순시(巡視) : 돌아다니며 사정(四正)을 보살핌. 또는 그런 사람. ) 하다가 정선에 들러 환곡(還穀 : 각 고을의 사창에서 백성에게 곡식을 꾸어 주던 제도. 환곡(還穀))의 장부를 열람하고 대노(크게 노함)해서,
"어떤 놈의 양반이 이처럼 군량(軍糧 : 원문에는 '군흥(軍興)'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환곡을 의미하는 것으로 환곡은 원래 국가 비상시를 대비한 군량임.)을 축냈단 말이냐?"
하고, 곧 명해서 그 양반을 잡아 가두게 했다. 군수는 그 양반이 가난해서 갚을 힘이 없는 것을 딱하게 여기고 차마 가두지 못했지만 무슨 도리가 없었다.[속수무책(束手無策) : 손을 묶은 것처럼 어찌할 도리가 없어 꼼짝 못함. ]
양반 역시 밤낮 울기만 하고 해결할 방도(일을 하여 갈 방법과 도리.)를 차리지 못했다(글 읽는 것밖에 해 본 일이 없는 양반이 눈앞에 닥친 현실 문제에 대해 대책을 세우지 못한다. 현실 생활에 무능력한 양반의 단면을 보여 주는 대목)그 부인이 역정[성, 화]을 냈다.
"당신은 평생 글읽기만 좋아하더니 고을의 환곡을 갚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군요(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대책을 세우지 못하는 무능력한 양반의 모습을 아내의 입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이는 박지원의 또 다른 작품인 '허생전' 의 '허생' 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쯧쯧 양반, 양반이란 한 푼어치도 안 되는 걸."[양반의 무능과 비생산성, 남편의 무능을 질타]
그 마을에 사는 한 부자가 가족들과 의논하기를,
"양반은 아무리 가난해도 늘 존귀하게 대접받고 나는 아무리 부자라도 항상 비천(卑賤)하지 않느냐(양반은 가는 데마다 상이요, 상놈은 가는 데마다 일이라. : 여기서 양반의 의미는 대접받는 존재이므로 편하게 지내는 사람은 어디를 가나 대접을 받고, 고생스럽게 지내는 사람은 어디를 가나 괴롭다는 말임.사회적 지위는 낮아도 경제적 지위는 높은 당시의 신흥 상공인 계층의 모습을 반영한 인물 설정이다. 대구 대조적 표현). 말도 못하고, 양반만 보면 굽신굽신 두려워해야 하고, 엉금엉금 가서 정하배(庭下拜 : 뜰아래에서 절을 올리는 것)를 하는데, 코를 땅에 대고 무릎으로 기는 등 우리는 노상 이런 수모를 받는단 말이다[상민들이 양반으로부터 받는 수모이자 양반을 사게된 동기임]. 이제 동네 양반이 가난해서 타먹은 환자[각 고을의 사창에서 봄에 백성에게 곡식을 빌려 주었다가 가을에 되돌려 받던 제도, 환곡]를 갚지 못하고 시방 아주 난처한 판이니 그 형편이 도저히 양반을 지키지 못할 것이다. 내가 장차 그의 양반을 사서 가져보겠다.(경제적인 여유를 지니게 된 부자들이 돈으로 양반직을 사는 조선 후기의 사회적 모습이 반영되어 있다.)"
부자는 곧 양반을 찾아가 보고 자기가 대신 환자를 갚아 주겠다고 청했다. 양반은 크게 기뻐하며 승낙했다[신분질서제도의 동요, 당시 사회에서는 경제력에 따라 신분이 달라짐, 당시 양반의 경제적인 압박이 심하다는 것을 의미하면서 양반이 옥에 갇히기가 두려워 아무런 고민 없이 신분을 팔고 있음]. 그래서 부자는 즉시 곡식을 관가에 실어가서 양반의 환자를 갚았다.
군수는 양반이 환곡을 모두 갚은 것을 놀랍게 생각했다. 군수가 몸소 찾아가서 양반을 위로하고, 또 환자를 갚게 된 사정을 물어보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 양반이 벙거지(주로 병졸이나 하인이 쓰던 털로 검고 두껍게 만든 모자.)를 쓰고 짧은 잠방이(가랑이가 무릎까지 올라오는 짧은 남자용 홑바지)를 입고 길에 엎드려 '소인[윗사람에 대한 자기의 겸칭]'이라고 자칭하며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지 않는가(부자에게 양반을 팔았기 때문에 원래 양반이 평민처럼 행동한 것이다. 근본적으로 양반다움을 지니지 못한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풍자적이다, 부자에게 양반의 신분을 팔고 나서 스스로 평민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벙거지' 와 '짧은 잠방이'는 평민의 신분을 나타내는 차림이다. 희화화 : 어떤 인물의 외모나 성격, 또는 사건을 의도적으로 우스꽝스럽게 묘사하거나 풍자하고 있다. 양반이란 신분에 의지한 허울일 뿐이라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군수가 깜짝 놀라 내려가서 부축하고,
"귀하[원래 양반]는 어찌 이다지 스스로 낮추어 욕되게 하시는가요?"(어질고 글읽기를 좋아하여 신임 군수들이 몸소 찾아가 인사를 드릴 정도로 덕망이 높은 사람이 갑자기 평민의 옷차림을 하고 길에 엎드려 있는 까닭을 의아해하고 당혹해하며 묻는 말이다.)
하고 말했다. 양반은 더욱 황공해서 머리를 땅에 조아리고 엎드려 아뢴다.
"황송하오이다. 소인[양반의 신분 변화를 알 수 있음]이 감히 욕됨을 자청하는 것이 아니오라, 이미 제 양반을 팔아서 환곡을 갚았습지요. 동리의 부자 사람이 양반이올습니다. 소인이 이제 다시 어떻게 전의 양반을 모칭(冒稱 : 성명을 거짓으로 꾸며 댐.)해서 양반 행세를 하겠습니까?"
군수는 감탄해서 말했다.
"군자로구나 부자여! 양반이로구나 부자여! 부자이면서도 인색(吝嗇 :체면 없이 재물만 아끼어 꽤 더러움)하지 않으니 의로운 일이요, 남[양반]의 어려움을 도와주니 어진 일이요, 비천한 것을 싫어하고 존귀한 것을 사모하니 지혜로운 일이다(신분이 높고 낮은 것을 말하며 계급 사회에서는 특권이 많은 높은 신분을 사모하는 것이 당연하므로 지혜롭다고 했다. 양반의 특권 의식을 비꼬는 풍자적 표현임). 이야말로 진짜 양반이로구나. 그러나 사사로 팔고 사고서 증서를 해 두지 않으면 송사(訟事 :백성들끼리의 분쟁을 관청에 호소하여 그 판결을 구하는 일.)의 꼬투리가 될 수 있다. 내가 너와 약속을 해서 군민(郡民)으로 증인을 삼고 증서를 만들어 미덥게(믿음성 있게) 하되 본관[군수]이 마땅히 거기에 서명할 것이다."[신분제 사회의 동요와 지배 질서를 유지해야 할 관료들의 타락성을 보여주는 말로 군수가 직접 양반 신분을 사고 파는 일에 증인이 되고 증서를 남기겠다고 한 것은 당시 이런 양반 매매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것임]
그리고 군수는 관부(官府 : 관가)로 돌아가서 고을 안에 사족(士族) 및 농공상(農工商)들을 모두 불러 관정(官庭 : 관가의 뜰)에 모았다. 부자는 향소(鄕所 : 유향소, 고려, 조선 시대에 지방 수령을 보좌하던 자문 기관 )의 오른쪽에 서고, 양반은 공형(公兄 : 삼공형, 조선 시대에 각 고을의 구실아치, 호장, 이방, 수형리를 이른다)의 아래에 섰다.[부자와 양반의 뒤바뀐 처지를 보여줌]
그리고 증서를 만들었다.
건륭(乾隆 :1745년(영조 21년). 건륭은 청나라 고종의 연호) 10년 9월 일
위에 명문[明文 :증서(證書), 글로 명백히 기록된 문구]은 양반을 팔아서 환곡을 갚은 것으로 그 값은 천 석이다.
오직 이 양반은 여러 가지로 일컬어지나니, 글을 읽으면 가리켜 사(士)라 하고, 정치에 나아가면 대부(大夫 : 벼슬의 품계에 붙이는 칭호)가 되고, 덕이 있으면 군자(君子)이다. 무반(武班)은 서쪽에 늘어서고 문반(文班)은 동쪽에 늘어서는데, 이것이 '양반'이니 너 좋을 대로 따를 것이다.[양반 권위의 상실]
야비한 일을 딱 끊고 옛을 본받고 뜻을 고상하게 할 것이며, 늘 오경(五更)만 되면 일어나 황(黃)에다 불을 당겨 등잔을 켜고 눈은 가만히 코끝을 보고 발꿈치를 궁둥이에 모으고 앉아 동래박의[東萊博義 : 송(宋)나라 여조겸(呂祖謙)이 지은 책.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대한 사평(史評)]를 얼음 위에 박 밀듯 왼다[둥그런 박이 빙판 위에서 잘 나가듯이 멈춤 없이 유창하게]. 주림을 참고 추위를 견뎌 입으로 설궁(說窮 : 살림의 구차한 형편을 남에게 말함 )을 하지 아니하되, 고치·탄뇌(叩齒彈腦 : 도가의 양생법으로 이를 여러 번 마주치는 것을 고치, 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볍게 두드리는 것을 탄뇌라고 한다)를 하며 입안에서 침을 가늘게 내뿜어 연진(嚥津 : 도가의 양생법 중 하나 )을 한다. 소매자락으로 모자를 쓸어서 먼지를 털어 물결 무늬가 생겨나게 하고, 세수할 때 주먹을 비비지 말고, 양치질해서 입내를 내지 말고, 소리를 길게 뽑아서 여종을 부르며, 걸음을 느릿느릿 옮겨 신발을 땅에 끄은다. 그리고 고문진보(古文眞寶 : 송나라 말기에 황견이 주나라 때부터 송나라 때까지의 시문을 모아 엮은 책), 당시품휘(唐詩品彙 : 중국 명나라의 고병이 편찬한 당시 선집)를 깨알같이 베껴 쓰되 한 줄에 백 자를 쓰며, 손에 돈을 만지지 말고, 쌀값을 묻지 말고, 더워도 버선을 벗지 말고, 밥을 먹을 때 맨상투로 밥상에 앉지 말고, 국을 먼저 훌쩍 훌쩍 떠먹지 말고, 무엇을 후루루 마시지 말고, 젓가락으로 방아를 찧지 말고, 생파를 먹지 말고, 막걸리를 들이켠 다음 수염을 쭈욱 빨지 말고, 담배를 피울 때 볼에 우물이 파이게 하지 말고, 화난다고 처를 두들기지 말고, 성내서 그릇을 내던지지 말고, 아이들에게 주먹질을 말고, 노복(奴僕)들을 야단쳐 죽이지 말고, 마소를 꾸짖되 그 판 주인까지 욕하지 말고, 아파도 무당을 부르지 말고, 제사 지낼 때 중을 청해다 재(齋)를 드리지 말고[양반의 미혹한 모습과 서민들의 미신적인 형태에 대해 비판하는 것임], 추워도 화로에 불을 쬐지 말고, 말할 때 이 사이로 침을 흘리지 말고, 소 잡는 일을 말고, 돈을 가지고 놀음을 말 것이다. 이와 같은 모든 품행이 양반에 어긋남이 있으면, 이 증서를 가지고 관(官)에 나와 변정[옳고 그름을 가리어 바로잡음]할 것이다(양반이 규범을 어길 경우 잘잘못을 가려 양반의 신분을 뺏을 수 있다는 의미가 있지만, 작자와 대변자인 '군수'가 기존 사회 질서를 부정하는 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양반의 편에서 사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으로, 까다로운 법도와 체면치레를 중시하는 양반의 위선적인 모습이 자세히 열거되어 있다. 이는 다음 양반 매매 증서에 나오는 내용과 대조를 이루면서 양반이 지켜야 할 도리를 통해서 양반의 위선을 폭로하는 이면적 의미가 담겨 있다.).
성주(城主) 정선군수(旌善郡守) 화압[花押 : 수결(手決). 사인(sign)]. 좌수(座首) 별감(別監) 증서(證書)
이에 통인(通引 : 관아의 심부름꾼 )이 탁탁 인(印)을 찍어 그 소리가 엄고(嚴鼓 : 시간을 알리는 북) 소리와 마주치매 북두성(北斗星)이 종으로, 삼성(參星)이 횡으로 찍혀졌다. [도장 소리가 엄고 소리, 즉 임금 행차시 북소리와 같이 위엄이 있고, 도장이 마치 밤하늘의 별 모양인양 벌려 있음을 묘사하였다. 이는 양반 신분을 산 부자에게 위압감을 주는 동시에 관의 횡포를 암시한 표현이다]
부자는 호장(戶長)이 증서를 읽는 것을 쭉 듣고 한참 머엉하니[실망하는 마음이 담긴 표정/ 실망감] 있다가 말했다.
"양반이라는 게 이것뿐입니까?[연극 대본으로 바꾸어 쓸 때, 아연실색하여, 어리둥절하여, 어안이 벙벙하여, 기가 막히다는 듯이] 나는 양반이 신선같다고 들었는데 정말 이렇다면 너무 재미가 없는 걸요. 원하옵건대 무어 이익이 있도록 문서를 바꾸어 주옵소서."[양반 신분을 사서 이익을 챙기고자 하는 부자의 의도가 드러난다. 이 부분에서는 양반과 부자가 동시에 풍자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문서를 다시 작성했다.
"하늘이 민(民)을 낳을 때 민을 넷으로 구분했다. 사민(四民) 가운데 가장 높은 것이 사(士)이니 이것이 곧 양반이다. 양반의 이익은 막대하니 농사도 안 짓고 장사도 않고[양반계층의 생활상을 단적으로 보여줌] 약간 문사(文史)를 섭렵해 가지고 크게는 문과(文科) 급제요, 작게는 진사(進士)가 되는 것이다. 문과의 홍패(紅牌 : 문과 과거의 합격증 )는 길이 2자 남짓한 것이지만 백물이 구비되어 있어 그야말로 돈자루인 것이다(문과에 급제하기만 하면 저절로 재물이 생기게 된다는 내용으로. 권력을 남용하여 재물을 긁어 모으는 양반의 비도덕적 모습을 풍자). 진사가 나이 서른에 처음 관직에 나가더라도 오히려 이름 있는 음관(蔭官 : 과거에 의하지 아니하고 조상의 덕으로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이 되고, 잘 되면 남행(南行 : 과거에 의하지 아니하고 문벌을 따라 벼슬을 내리는 것)으로 큰 고을을 맡게 되어, 귀밑이 일산(日傘)의 바람에 희어지고(벼슬아치의 행차 때 햇빛을 가리는 일산을 씌워 주니 얼굴이 볕에 타지 않아 희어지고, 하인들이 떠받들어 모시니 기분이 흡족하게 되고. 문벌의 덕을 입어 과거도 거치지 않고 큰 벼슬을 갖게 되면 호강하게 되고, 권력을 남용하여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양반의 모습을 풍자한 내용이다.), 배가 요령 소리에 커지며, 방에는 기생이 귀고리로 치장하고, 뜰에 곡식으로 학(鶴)을 기른다. 궁한 양반이 시골에 묻혀 있어도 무단(武斷)을 하여(힘을 믿고 강제로 행하여) 이웃의 소를 끌어다 먼저 자기 땅을 갈고 마을의 일꾼을 잡아다 자기 논의 김을 맨들 누가 감히 나를 괄시하랴. 너희들 코에 잿물을 들이붓고 머리 끄덩을 희희 돌리고 수염을 낚아채더라도 누구 감히 원망하지 못할 것이다."[양반 신분의 비도덕적 행위를 고발하는 문장으로 양반의 이중적 속성을 스스로 폭로하도록 하고 있음]
부자는 증서[양반 매매 증서에 담긴 작자의 의도는 첫 번째 매매 증서는 양반으로서 지켜야 할 규범을 나열함으로써 형식에 얽매인 양반들의 모습을 희화화했고, 두 번째 매매 증서는 양반이 개인적 이득을 위해 사사로이 다른 사람의 것을 사용하는 비도덕적인 행동을 폭로하고 풍자함]를 중지시키고 혀를 내두르며
"그만 두시오, 그만 두어. 맹랑하구먼(생각하던 바와 아주 달라 허망하군 / 양반의 실상을 파악한 상민 부자의 현실 인식). 나를 장차 도둑놈으로 만들 작정인가."(양반을 사서 신분 상승을 이루려던 부자가 양반들의 작폐를 듣고 양반되기를 포기하는 부분이다. 양반을 '도둑놈'이라 표현하는 대목에서 부패한 양반에 대한 신랄한 비판(批判)과 풍자(諷刺)가 절정에 이른다. 재력을 통해 신분 상승을 이루려던 부자가 스스로 양반되기를 포기하는 장면이다. '도둑놈' 이라는 표현을 통해 양반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풍자 정신이 돋보인다.)
하고 머리를 흔들고 가버렸다.
부자는 평생 다시 양반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한다.(부자 자신이 추구했던 존귀라는 가치는 결코 돈으로 살 수 없음을 깨달음.)[양반의 전횡에 대한 비판, 지배 계층의 무능함 폭로, 부정 부패를 일삼는 양반층에 대한 폭로, 양반의 무위도식하는 생활에 대한 비난]
작품개관 :
'양반전' 은 조선 후기 소설사의 흐름을 보여 주는 지표가 되는 작품으로 이를 통해 조선 후기 사회상이 어떻게 문학에 반영되었으며, 작가의 비판 정신이 문학을 통해 어떻게 발현될 수 있었는지 살필 수 있다. 이 작품은 (연암집)의 방경각외전에 실린 7편의 전(傳) 가운데 하나이다. 이 작품은 당시의 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는데, 특히 새로운 시대에 걸맞지 않는 인간상(무능하기 짝이 없는 양반, 부패한 관료, 무지한 천민 등)을 해학적이고 풍유적으로 고발하고 있다. 시대적 흐름을 반영하여 몰락하는 양반과 부상하는 평민을 등장시켜 삶의 발랄함을 부각시키려는 해학적인 이 작품은 무능한 양반과 부자가 된 평민 사이에서 이루어진 양반 매매사건을 소재로 해서, 사회적 모순을 안고 있는 전형적인 양반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또한 사이사이에 끼어 있는 교묘하고 익살스런 표현은 독자의 웃음을 유발하기에 충분하며, 그러한 표현이 높은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기도 한다.
연암 박지원의 사상 :
조선 후기 실학의 전반적인 이념은 경세치용(經世致用), 이용후생(利用厚生), 실사구시(實事求是)로 집약된다. 이 중에서 연암 박지원의 실학사상은 이용후생 이념에 집중되어 있다. 연암의 실학적 이념은 '허생전'과 '양반전'을 비롯한 거의 모든 작품에 두루 반영되어있다. 이러한 여러 작품을 통해 할 수 있는 것은 연암이 일상의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하등의 도움도 주지 못하는 성리학적 수신관에 대해 비판적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양반들이 지키는 규범 중에는 실생활에 불필요한 것이 많다는 점과, 양반들이 누리는 권세가 서민들의 희생 위에서 가능한 것이라는 점을 내세워 그 규범과 권세를 부당하다고 파악했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후기 시대상 :
조선 후기는 임진, 병자 양란의 후유증으로 조선 전기의 엄격한 신분 질서가 동요하기 시작했으며, 상업의 발달과 농업 생산력의 발달 등으로 평민 부자들이 많이 나타났다. 한편 당시의 지배 관료층은 혼란한 사회를 개혁하려는 의지가 부족하고 공허한 명분에 얽매여 있었으며, 관료 사회의 부패 또한 극심하였다. '양반전'은 이와 같은 조선 후기 사회의 한 단면을 풍자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지도방법
작품의 배경이 된 당시의 시대상을 떠올리며 읽도록 지도한다.
이 작품은 임진·병자 양란을 계기로 조선 전기까지의 엄격한 신분 질서가 동요하고, 산업의 발달과 농업 생산력의 증대로 인해 평민 부자들이 많이 등장하게 된 배경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이러한 조선 후기 시대 상황을 학생들로 하여금 조사하게 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국사 교과서나 역사 관련 교양서적을 참조하면 교과 통합적 학습 효과도 높일 수 있다.
실학자였던 작가의 의도가 작품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고려하며 읽도록 지도한다.
'양반전'의 창작 동기를 활용하여 지도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그 의도가 어떠한 방식으로 작품에 실현되었는지 학생들이 확인하게 한다. 그리고 실학에 대해 학생들이 조사하게 함으로서 작가가 작품을 통해 사회적으로 어떤 발언을 하고 싶어했는지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게 할 수 있도록 한다.
1. 작품의 내용과 관련하여 다음 활동을 해 보자.
(1) 이 작품에서 주된 풍자의 대상은 무엇인지 말해 보자.
이끌어주기 :
이 활동은 작품에서 풍자하고 있는 대상을 찾음으로써 문학과 시대 상황의 관련성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설정되었다. 이 작품에서는 양반이 풍자되고 있는데, 양반의 어떤 점이 풍자의 대상이 되고 있는지 두 번에 걸친 매매 문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추리하게 한다.
예시답안 :
이 작품에서 풍자하고자 한 주된 대상은 양반 계층임이 분명하다. 그가 비판하고자 한 양반의 모습은 두 가지이다. 첫 번째 문서에서 풍자된 양반은 무위도식(無爲徒食)하며 공허한 관념과 겉치레에 얽매인 비생산적 계층으로 드러나 있으며, 두 번째 문서에서 풍자된 양반은 개인적 이익만을 취하며 부당한 특권을 남용하는 집단으로 드러나 있다.
(2) 부자가 양반을 하지 않겠다고 한 이유를 설명해 보자.
이끌어주기 :
(1)의 활동에서 정리된 풍자의 대상이 된 양반의 면모에 대하여 '그만 드시오, 그만두어. 맹랑하구먼. 장차 나를 도둑놈으로 만들 작정인가' 라고 한 부자의 마지막 말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게 한다.
예시답안 :
부자는 양반층의 공허한 관념, 비생산성에 대해서 '재미없다'고 소극적인 비판을 하지만, 양반이 개인적인 이익만을 취하며 부당한 특권을 남용하는 데 대해서는 양반을 도둑놈으로 몰아붙이며 강하게 비판한다. 즉, 부자는 양반층의 공허한 관념, 비생산성과 부당한 특권 남용을 비판하며, 자신은 그러한 부정적인 양반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다.
2.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과 관련하여 다음 활동을 해 보자.
(1) 이 작품의 배경은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移行期) 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사회. 경제적 특징을 조사해 보자.
이끌어 주기 :
중세가 봉건제를 사회 제도의 근간으로 삼았다면, 근대는 자본의 집적과 이에 따른 상업 문화의 활성화를 특성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기 사회 . 경제적 특성은 상업 문화가 어느 정도로 활성화되었는지를 중심으로 파악하면 전체적인 윤곽을 잡을 수 있다. 특히 이 문제는 역사 지식과 연관되므로, 국사 교과서나 역사 관련 교양서적을 참조하면 교과 통합적 학습 효과도 높일 수 있다.
예시답안 :
이 시기의 가장 두드러진 사회·경제적 특징은 상품 화폐 경제의 급속한 발달에서 찾을 수 있다. 17세기 후반부터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자 농민들은 상품 생산을 위한 농업 경영에 나서게 되었고, 지주들은 늘어난 소작료를 시장에 판매함으로써 농촌의 시장은 크게 발달하였다. 이처럼 상품 화폐가 경제가 진전되자 상평통보라는 동전이 주조되어 전국적으로 유통되었다. 대동법의 시행으로 세 부담을 한층 줄인 농민들은 수공업에도 관심을 돌렸고, 전업적인 장인들도 수공업에 가세함으로써 상품 화폐 경제는 더욱 활성화되었다.
여기에 상설 점포인 서울의 육의전(六矣廛) 및 개성, 평양, 전주, 대구 등 지방 도시의 시전(市廛)이 생겨나 상품 유통을 더욱 활성화하게 된다. 시장의 형성에 따라 상품의 도산매와 위탁 판매, 운송업이나 금융업도 새롭게 생겨나게 되었고, 객주와 여각도 등장하게 되었다. 국제적으로도 무역이 성행하게 되어 개성상인인 송상, 의주 상인인 만상, 동래 상인인 내상은 상업 자본을 축적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러한 상업 발달의 이면에서는 전통적인 양반사대부가 농민층으로 전락해 가고 토지의 독점으로 소작농들은 더욱 피폐한 삶을 살게 되었다.
(2) 이 작품에 나타난 양반과 평민의 관계가 조선 전기와 비교하여 어떤 변화가 있는지 생각해 보자.
이끌어주기 :
이 활동은 문학 작품에 반영된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설정되었다. 부모로부터 타고난 신분을 귀속 신분이라고 하며, 후천적인 노력으로 얻게 되는 신분을 획득 신분이라고 한다. 이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이 시기는 둥 중 어느 것이 더 중시되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한다.
예시답안 :
이 작품에서 평민 부자는 가난한 양반의 신분을 사려고 한다. 양반 신분을 사고 팔 수 있다는 것은, 조선 후기 사회 자체가 귀속 신분보다는 경제력에 의한 획득 신분이 중시되는 사회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3. 문학 작품은 '작가 의식의 산물' 이라는 점과 관련하여 박지원의 실학사상을 조사해 보고, 이러한 사상이 작품 속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 표해 보자.
이끌어주기 :
이 활동은 작가의 사상이 문학을 창작하는 데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학생들이 확인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설정되었다. 조선 후기 실학의 전반적인 이념은 경세치용, 이용후생, 실사구시로 집약된다. 이 중에서 연암 박지원의 실학사상은 이용후생 이념에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연암의 실학사상이 작품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이용후생의 개념을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 다만 지도상 주의할 것은, 작가의 사상이 문학 작품 속에 그대로 노출되는 것이 아니고 인물의 성격이나 발언, 그리고 사건이나 배경을 통해 간접적으로 형상화된다는 점이다.
예시답안 :
연암의 실학사상은 이용후생(利用厚生)으로 집약된다. 이용후생(利用厚生)이란 말은 사전적으로 풍요로운 경제와 행복한 의·식·주 생활을 뜻한다. 이 말은 본래 상서라는 책의 ‘정덕(正德). 이용(利用). 후생(厚生). 유화(惟和)'란 구절에서 ‘정덕’과‘유화'를 버리고 따온 말이다. 여기에서 특히 '정덕’을 버렸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변혁이라 할 수 있다. 정덕이란 부자·형제·부부간에 지켜야 할 유교적 윤리체계이며 이용과 후생은 국민의 풍요로운 경제생활이다. 즉 이용후생을 기치로 내세웠다는 것은 윤리 우위의 정치가 아니라 경제 우위의 정치를 부르짖었다는 것이다.
연암은 홍대용·박제가와 더불어 북학파라 일컬어진다. 북학파란 존화(尊華)의 명분론에서 벗어나서 우리보다 앞선 청나라의 문물과 학술을 배워야 살 수 있다는 주장을 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들은 정덕 이후에 이용, 후생이 있다는 전통적 관념을 비판하고 경제가 넉넉해야 윤리도 있게 된다는 논리를 주장하였다. 이들 학파들은 자연과학의 도입, 중소상공업의 육성, 기술혁신, 해외 통상 증진 등 국민의 경제를 향상할 모든 것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박지원은 (한전론)에서 '백성들의 이용과 후생에 도움이 된다면 오랑캐에게도 배워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연암의 이러한 실학적 이념은 '허생전' 과 '양반전'을 비롯한 거의 모든 작품에 두루 반영되어 있다. '양반전'에서 비판의 주된 대상은 무능한 양반이다. 양반은 공부를 하느라고 가계를 책임지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부자에게 양반 신분을 팔아 환자를 갚기로 한다. 이 과정에서 부자에게 증서를 만들어 주게 되는데, 군수는 첫 번째 증서에서 양반의 지켜야 할 도리를 일일이 열거하여 부자를 깜짝 주눅들게 만든다. 두 번째 증서에서는 양반이 행할 수 있는 권리를 열거하여 다시 부자를 놀라게 한다. 그것은 모두 양반이 권세를 부리는 방법이기 하지만, 남들을 희생하면서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삶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품 내적 상황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연암이 일상의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데 하등의 도움도 주지 못하는 성리학적 수신관에 대해 비판적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양반들이 지키는 규범 중에는 실생활에 불필요한 것이 많다는 점과, 양반들이 누리는 권세가 서민들의 희생 위에서 가능한 것이라는 점을 내세워 그 규범과 권세를 부당하다고 파악했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물론 다른 시각에서는 연암이 양반들의 규범 자체를 문제삼았다기보다는 신분을 팔아 생계를 도모하는 양반답지 못한 양반, 신분을 재물로 사려는 부자답지 못한 부자를 동시에 비판했다는 분석도 있다.)
이해와 감상
이 작품에서 박지원은,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양반을 등장시켜 당대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양반 신분을 판다는 것은, 조선 후기 사회 자체가 귀속 신분보다는 경제력에 의한 획득 신분이 중시되는 사회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사회적 배경은 임병 양란을 계기로 조선 전기까지의 엄격한 신분 질서가 동요하고, 산업의 발달과 농업 생산력의 증대로 인해 평민 부자들이 많이 등장하게 된 것과 관련이 있다. 매매 문서에 드러나 있는 것처럼 당시의 지배층은 공허한 명분에만 얽매여 있는 무능한 존재였으며, 혼란한 사회를 개혁하려는 의지는 커녕 관료 사회의 부패는 극에 달했다. 작자는 이러한 양반의 실상을 해학과 풍자를 통해 통렬하게 폭로하는 한편, 선비 계층이 올바른 인식과 각성으로 거듭나기를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출전 : 한계전 외 4인 공저 문학교과서)
이해와 감상2
풍자(諷刺)란 어떤 대상을 비고고 조롱하거나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풍자의 대상은 보통 잘못된 가치관을 갖고 살아가는 부정적인 사람이다. 따라서 풍자의 정신이란 곧 비판의 정신이기도 하다.
'양반전'에서 풍자의 대상이 되는 것은 물론 조선 시대의 양반이다. 조선 시대의 지배 계급이었던 양반, 하늘 같은 양반이 이러한 풍자와 비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사실 놀라운 일이다. 이러한 사정은 조선 후기의 시대적 변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선 후기는 양반층의 증가와 더불어 엄격했던 신분 질서가 붕괴되기 시작했던 시대였다. 신분 질서의 붕괴는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부농층·상공인층의 증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회 전반적으로 농업생산력이 증가하고 상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평민들 가운데 거대한 부(富)를 축적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는 부족할 것이 없었지만 신분상으로는 여전히 평민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정부는 이들에게 돈을 받고 양반의 지위를 팔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 양반층의 수는 증가해 갔고 결과적으로 양반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박지원의 작품 '양반전' 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양반은 몰락한 양반층으로서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에 취해 있다. 게다가 이제 평민들은 더 이상 부패하고 무능력한 양반들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박지원은 돈을 주고 양반을 사려는 어느 부자의 이야기를 통해 이러한 부패하고 무능력한 양반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사실 박지원을 비롯한 실학자들도 양반층의 일부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 시대의 문제점을 냉철하게 인식할 줄 아는 안목을 가진 사람들이었으며, 새로운 사회 질서를 이루기 위한 개혁의지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허생전' , '양반전'을 비롯한 박지원의 문학은 이러한 실학자들의 날카로운 비판 정신이 살아 있는 풍자 문학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이해와 감상3
조선 정조 때에 박지원(朴趾源)이 지은 한문 단편소설. 작자의 문집인 ≪연암집 燕巖集≫〈방경각외전 放揭閣外傳〉에 실려 있다. 저작연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지은이의 초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선에 한 양반이 살고 있었다. 어질고 독서를 좋아하였다. 군수가 도임하면 반드시 그를 찾아가 예를 표하였다. 그러나 집이 가난하여 해마다 관곡을 꾸어 먹은 것이 여러 해가 되어 1,000석에 이르렀다. 관찰사가 군읍을 순행하다가 관곡을 조사해 보고 크게 노하여 그를 잡아 가두라고 명하였다. 양반의 형편을 아는 군수가 차마 가두지 못하였고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양반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갚을 길이 없었다. 그의 아내는 “당신이 평소에 글 읽기를 좋아하였으나 관곡에는 소용이 없구려! 어이구 양반! 양반(兩半 : 한냥 반, 兩班과 兩半은 동음)은 커녕 한푼어치도 안 되는구려!” 하고 푸념하였다.
그 마을의 부자가 “양반은 비록 가난하여도 늘 존귀하고 영화로우나 나는 비록 부유하여도 비천하니 참으로 욕된 것이다. 지금 양반이 가난하여 관곡을 갚을 수 없으므로 양반을 보전하기가 어렵게 되었으니 내가 사서 가지겠다.”고 사사로이 의논을 하였다. 드디어 양반을 찾아가 관곡 갚기를 청하자 양반은 기뻐서 허락하였으며, 부자는 그 자리에서 관곡을 실어 보냈다.
군수가 놀라 몸소 가서 그 양반을 위로하고 관곡 갚은 경위를 물어보려 하였다. 그러자 양반은 전립에 짧은 옷을 입고 땅에 엎드려 소인이라 자칭하며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는 것이었다.
경위를 알게 된 군수는 짐짓 부자의 행위를 야단스럽게 기리고 나서, 이런 사사로운 매매는 소송의 단서가 되므로 문권(文券 : 공적인 문서나 서류)을 만들어야 한다고 명하고, 관아로 돌아와 모든 고을 사람들을 불러놓고 문권을 만들었다. 문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건륭(乾隆) 10년 9월 일 명문(明文)은 양반을 팔아 관곡을 갚으니 그 값이 1,000곡(斛)이다. 양반을 일컫는 말은 선비·대부(大夫)·군자(君子) 등 여러 가지이다. 네 마음대로 하라. 더러운 일은 하지 말고 옛일을 본받아 뜻을 세운다. 오경(五更 : 새벽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에는 항시 일어나서 유황을 뜯어 기름불을 켜고 눈은 코끝을 보면서 발꿈치를 모아 꽁무니를 괴고 ≪동래박의 東萊博議≫를 얼음에 박밀듯이 외우고……소를 잡지 않고 노름을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온갖 행동이 양반에 어긋남이 있거든 이 문권을 가지고 관가에 나와 바로잡을 것이다.”
정선군수가 문건에 수결을 하고 좌수·별감이 증인으로 서명한 뒤에 통인이 문권 가운데에 관인을 찍었다. 호장(戶長)이 읽기를 마쳤다. 부자는 슬픈 기색으로 “양반이 신선 같다고 들었는데, 참으로 이와 같다면 한쪽은 너무 이익이고 한쪽은 너무 손해니, 이익이 될 수 있도록 고쳐달라.”고 청하였다. 그래서 다시 문권을 만들었다. 다시 만든 문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백성을 낼 때, 그 백성이 넷이고, 사민(四民)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이 선비다. 이것을 양반이라 일컬으니 그 이익이 막대하다. 농사도 하지 말고 장사도 하지 말고 대강 문사(文史)나 섭렵하면 크게는 문과에 오르고 작아도 진사는 된다. 문과 홍패(紅牌)는 두 자(尺 척)밖에 안 되지만 백물이 갖추어져 있는 돈주머니이다……궁사(窮士)가 시골에 살아도 오히려 무단(武斷)을 할 수 있다. 이웃집 소로 먼저 밭을 갈고, 마을 일꾼을 데려다 김을 맨들 누가 감히 나를 홀만하게 여기랴. 네 코에 잿물을 붓고 머리끝을 잡아돌리고 수염을 뽑더라도 감히 원망하지 못하는 것이다.”
부자는 문권의 이 대목에 이르러는 혀를 빼물며 “그만두시오, 그만 두시오, 맹랑합니다. 장차 나를 도둑놈으로 만들 작정이오?” 하고 머리를 흔들고 가서 죽을 때까지 양반의 일을 말하지 않았다.
〈양반전〉에 대하여 박지원은 〈방경각외전〉의 자서(自序)에서 다음과 같이 그 저작 경위를 밝히고 있다 “사(士)는 천작(天爵)이니 사(士)와 심(心)이 합하면 지(志)가 된다. 그 지(志)는 어떠하여야 할 것인가? 세리(勢利)를 도모하지 않고 현달하여도 궁곤하여도 사(士)를 잃지 말아야 한다. 명절(名節)을 닦지 아니하고 단지 문벌이나 판다면 장사치와 무엇이 다르랴? 이에 〈양반전〉을 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천작을 팔고 산 정선 양반과 상인인 부자를 풍자한 것으로 허위와 부패를 폭로한 것이다.
〈양반전〉에서 처음 만든 문권에 나타나는 것은 양반의 형식주의이다. 두 번째에 만들다가 만 문권에서는 양반의 비인간적인 수탈 등이 매우 구체적이고 희화적(戱怜的)으로 서술되고 있다. 이 점에 착안하여 〈양반전〉은 양반의 위선적인 가면을 폭로하고 봉건계급 타파를 주장한 소설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작품을 분석하여 얻은 결론은, 치부를 한 뒤 신분상승을 꾀하여 양반이 되고자 하는 정선의 한 부자가 마침 어느 몰락양반이 당면한 극한 상황을 계기로 그 양반을 사 가지는 사건을 두고, 같은 양반 계층인 군수가 기지를 써서 이 매매행위를 파기시켜버린 골계소설이라는 것이다.
그 까닭은 최초에 설정하였던 관곡 보상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뒤에 군수가 새로 이 사건에 개입한 점, 문권의 내용은 양반이 상인(常人)이 되어 지켜야 할 일들이 제시된 것이 아니고 상인이 양반이 되어 지켜야 할 것만을 요구하는 일방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첫째 문권은 양반이 행하는 일들의 골계적인 표현이며, 둘째 문권은 계약 파기의 적극적인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견해는 작가가 가진 철저한 계급의식을 감안할 때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
〈양반전〉은 부농이 등장하여 경제력에 의한 양반신분획득의 가능성이 나타난다. 그리고 관료사회의 부정이 깊어졌으며, 몰락양반의 비참한 모습이 드러나는 등의 조선 후기의 역사적 상황이 작가의 간결한 필치로 잘 그려진 작품이다.
또한 사이사이에 끼여 있는 교묘하고 익살스러운 표현은 독자의 웃음을 유발한다. 속된 표현이라 하여 당대에 많은 비난을 받았던 이 작품은 도리어 그 표현 때문에 더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고 할 것이다.
≪참고문헌≫ 燕巖集, 燕巖小說硏究(李家源, 乙酉文化社, 1965), 韓國小說硏究(李在秀, 宣明文化社, 1969), 燕巖小說의 近代的 性格(金一根, 慶北大學校論文集 第一輯, 1956), 燕巖小說考(李源周, 語文學 15, 1966).(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해와 감상4
이 작품은 연암의 초기작 가운데 하나로 조선 후기 양반들의 경제적 무능과 허식적인 생활 태도를 폭로하고 비판한 한문 소설이다. 작자는 신분 질서가 문란해진 조선 후기를 바탕으로 해서, 양반이라는 특권 계층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양반이 양반답지 못한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첫 번째 양반 문건에 규정된 엄격한 준수 조항은 형식과 가식에 얽매여 꼼짝도 할 수 없게 된 양반 사류(士類)의 모습을 희화화(戱畵化)하였고, 2차로 작성된 문건은 양반들이 자행한 작폐를 보여 줌으로써 양반 사회의 비행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을 통해 양반 사회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관점은 보이지 않는다. 양반의 경제적 몰락을 풍자하면서도 양반이 진취적인 지식인으로 거듭 나기를 촉구하고 있다.
심화 자료
양반의 두 개의 얼굴
<양반전>은 대개의 고소설이 그렇듯이 전(傳)을 표방했지만 전혀 전의 형식이 아니다. 전은 본래 역사 책에서 인물의 일대기를 기록하던 문학 갈래를 말한다. 따라서 '-전'을 표방한다면 <홍길동전>처럼 그 인물의 일대기를 그려 놓는 것이 기본인데 이 작품은 전혀 그렇지 않다.
잘 생각해 보면, 이 <양반전>의 주인공인 정선 양반은 이름조차 나오지 않으니, 한 개인의 삶을 조망하겠다는 생각은 아예 없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그리려는 것인가?
건륭 10년(서기 1745년) 9월 0일에 이 증서를 만든다. 앙반을 팔아서 관가의 곡식을 갚았으니 그 값이 곡식으로 천 석이나 된다. 원래 양반이란 것은 여러 가지가 있다. 글만 읽는 것은 선비요, 정치에 종사하면 대부라 하고, 덕이 있는 자는 군자라고 한다. 무반은 서쪽에 서고 문반은 동쪽에 선다. 그래서 이것을 양반이라고 한다. 이 중에서 너는 맘대로 골라서 하면 된다.
매매 문서의 첫 대목인데, '특정한 양반인 한 인물'에 주목하지 않고 양반 일반에 초점을 두고 있다. 양반은 다시 여러 이름으로 갈라져 있는데, 이 이름이 여럿이라는 것은 곧 역할이 여럿이라는 뜻이다. 선비는 책을 읽는 사람이고, 대부는 정치하는 사람이며, 군자는 덕이 있는 사람이고, 양반은 문반과 무반을 아우른 개념이라고 했다. 양반에게 붙여진 이런 다양한 이름들은 결국 양반이면 꼭 해야하는 역할인데, 문제는 '아무것이나 네 마음대로 하라'고 한 데서부터 발생한다. 만일 그리하여,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이 선비를, 덕이 없는 사람이 군자를 취하게 된다면 어찌될 것인가. 이것은 정명(正名)에 어긋나는 것으로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첩경이 된다. 박지원은 짧은 소설 한 편으로 그런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나선 것이다.
절대로 비루한 일은 하지 말아야 하고, 옛사람을 본받아 그 뜻을 숭상할 것이다. 새벽 오경(새벽 3-5시)이면 항상 일어나 촛불을 돋우고 앉아서 눈으로는 코끝을 내려다보고 무릎을 꿇어 발꿈치는 궁둥이를 받친다. <동래박의-송나라의 여조겸이 지은 책으로 역사에 대한 논평이 담겨 있음>를 마치 얼음 위에 박을 굴리듯이 술술 외야 한다. 배가 고픈 것을 참고 추운 것을 견디어 내며 입으로 가난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이를 마주 부딪치면서 뒤통수를 주먹으로 두드리고 작은 기침에 입맛을 다신다. 소맷자락으로 관을 쓸어서 쓰는데, 먼지 터는 소맷자락이 마치 물결이 이는 듯하다. 손을 씻을 때 주먹을 쥐고 문지르지 않고 양치질을 해서 냄새가 나지 않게 한다.
천한 신분의 부자가 귀한 신분의 양반이 되기 위해 '꼭 해야할 일'을 열거한 부분이다. 이 부분을 두고 양반의 허식이라는 둥, 지저분한 행태라는 둥 말들이 많지만, 잘 따지고 보면 대체로 공부하고 덕을 쌓는 일임을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고 어려운 책도 술술 읽으며 행실을 조신하게 한다는데 누가 시비할 것인가. 결국 이 대목은 앞서 살핀 양반의 여러 이름 중 두 가지, 즉 선비와 군자가 되는 길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내용이 열거되자 부자는 매우 곤혹스러워 이렇게 항변한다.
"양반이란 겨우 이것뿐입니까? 내가 듣기에 양반은 신선과 같다던데 겨우 이것뿐이라면 별로 신통한 맛이 없군요. 더 좀 좋은 일이 있도록 고쳐 주십시오."
그래서 두 번째 문서가 등장한다.
양반의 이익은 막대하니 진사가 나이 서른에 처음 관직에 나가더라도 오히려 이름있는 음관(蔭官-조상의 음덕으로 얻은 벼슬)이 되고, 잘 되면 남행(南行- 과거에 의하지 않고 문벌을 따라 벼슬을 내림 )으로 큰 고을을 맡게 되어, 귀밑이 일산(日傘-감사나 수령들이 부임할 때 받던 우산 모양의 의장)의 바람에 희어지고, 배가 요령 소리에 커지며 방에서 기생이 귀고리로 단장하고, 뜰에는 학(鶴)을 기른다. 궁한 양반이 시골에 묻혀 있어도 능히 이웃의 소를 끌어다 먼저 자기 땅을 갈고 마을의 일꾼을 잡아다 자기 논의 김을 맨들 누가 감히 나를 괄시하랴. 너희들 코에 잿물을 디리붓고 머리끄뎅이를 회회 돌리고 수염을 낚아채더라도 가히 원망하지 못할 것이다.
보다시피 양반의 권세가 얼마나 대단한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어려운 학문을 열심히 하여도 별다른 보상이 없다고 했던 앞 문서에 비한다면, 이 부분은 참으로 유혹적이다. 공부를 별로 하지 않아도 벼슬을 하고 큰돈을 벌 수 있으며, 설령 벼슬을 하지 않더라도 시골에 틀어박혀서 일반 백성들을 자기 맘대로 부릴 수 있다니! 이 대목은 바로 양반의 여러 이름 중 대부처럼 벼슬을 통해 특권을 얻은 자에 해당되는 부분인데, 앞의 문서와 완전히 상반된 내용임을 기억하자. 앞의 문서에 나타난 양반이 열심히 공부하고 행실을 닦아도 가난하게 사는 딱한 양반이었다면, 이 문서에 나타난 양반은 공부도 대충하고 행실은 개차반이면서도 제 이익만은 꼬박꼬박 챙기는 도둑놈 양반인 셈이다.
곧 앞 문서의 양반은 의무는 충실히 이행하면서 먹을 것도 못 챙기는가 하면, 뒷문서의 양반은 의무는 게을리하면서 특권을 독점한다. 이 소설에서는 간단한 문서 두 장으로 그런 양반의 두 얼굴을 여지없이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혹시 그 두 얼굴 중에 어느 쪽이 진짜 양반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어느쪽도 양반의 진면목은 아니다. 박지원이 생각하는 양반은 열심히 수행하여 백성을 잘 다스리는 사람인데, 이제 시대가 변하여 그런 아름다운 조화는 물거품처럼 되고 말았다. 한편에서는 촌구석에 틀어박혀 열심히 공부하지만 아무 벼슬도 못하고 생계에 허덕이는 사람이 생기는가 하면, 또 한편에서는 학문이니 덕행이니 하는 것과는 담을 쌓고 살면서도 제 실속은 다 챙기는 파렴치한 사람이 생겼던 것이다. 결국 <양반전>에서는 그런 두 양반상을 다소 과장하여 보여 주면서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정말 그런지 궁금하다면, 등장 인물별로 살펴보자.
정선 고을의 양반은 얼마나 덕망이 있었던지, 군수가 부임해 올 때마다 그에게 인사를 왔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생계 대책도 세우지 못하는 무능력한 인물이었다. 오죽하면 아내로부터 '한푼어치도 못되는 양반'이라며 핀잔만 받았을까. 공간 배경으로 강원도 정선을 설정한 것부터가 출세와는 담을 쌓은 양반을 설정하려는 의도가 강한 것이다.
이와 달리 새로 부임한 군수는 같은 양반이면서도 영 다른 모습을 보인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같은 신분의 양반을 보호하기 위하여 교묘한 문서 두 장으로 천한 부자의 재산만 축내게 하고는 일을 마무리짓고 있다. 군수라는 신분을 십분 활용하여 낮은 신분의 인물을 골탕 먹인 예라 하겠다.
이렇게 보면, 바로 정선 양반과 정선 군수가 문서에 등장하는 두 얼굴의 양반을 대변하는 예이다. 그렇다면 부자는 또 어떤 인물인가? 양반의 온갖 추악한 행태가 열거되자 그는
"나를 도둑놈으로 만들 작정이시오?"
라며 달아나 버렸다. 끝내 양심의 가책을 받을 만한 일을 할 수 없다며 도망가 버린 점을 생각하면 그는 매우 인간적인 인물이다. 요즘 말로 하면 휴머니스트라 하겠는데, 다른 한편에서 보자면, 두 양반의 합작에 의해 재산만 털리고 마는 어리석은 인물이기도 하다.
결국, 이 작품은 도둑질이라도 해야할 만큼 절박한 처지에 놓인 몰락 양반과, 갖은 수단과 밥업을 동원하여 제 잇속만 챙기는 부도덕한 양반, 도둑놈은 되기 싫다며 달아나는 착하고 어리석은 백성을 함께 보여주면서 당시 현실을 총체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 : 이강엽, 고교 독서평설(통권 106호). 지학사 )
'양반전'의 비판 대상
'양반전'은 '자서(自序)'에서 밝혔듯이 양반이 지조를 잃고 명절(名節)을 닦지 않으면서 가문을 상품처럼 팔았던 세태를 보고 창안한 작품이다. 연암이 여기서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존재는 우선 정성 양반처럼 무기력하고 무능하면서 심지어 신분을 상품화하고 있는 양반과 현달을 했다거나 실세를 했거나 간에 작위나 신분을 이용하여 무단을 자행하는 양반들이다. 작품속에 등장하는 군수가 이 매매 사건을 무효화시켰다 해서 그도 비판의 대상이 되는 양반이라고 보는 견해는 일반적으로 조선 후기 관료들을 부정적으로 보는 선입견의 작용일 뿐 작품 속에서 굳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정덕(正德)을 닦은 선비라야 받을 존귀를 부로써 얻겠다고 하는 천부의 속물주의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연암은 조선 후기 서민들의 인간적 자각으로 나타났던 신분 상승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문제의 초점은 현실 양반들의 타락해 버린 세태와 신분 상승의 분위기 속에서 천부가 자신의 부로써 존귀와 양반이 되겠다고 하는 속물주의적 의식이다. 연암이 '양반전'에서 관심을 보인 것은 양반다운 양반의 부재와 진정한 의미의 양반, 즉 정덕, 이용 후생의 실학 정신에 바탕을 둔 양반의 상이었다고 하겠다. 따라서 연암은 계급 타파, 봉건 체제의 와해, 양반의 형식주의 타파 등의 사상을 '양반전'을 통해서 형상화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연암은 자신이 추구했던 양반의 상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현실의 양반 군상을 풍자했고, 신분 질서가 와해되는 조선 후기 시대의 배경을 등에 업고 부로써 양반의 존귀를 구하겠다는 천부의 무지를 해학적으로 드러냈다. (출처 : 김태균, 양반전의 주제)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가 말하는 '양반전'과 나의 아버지
세상의 벗사귐은 오로지 권세와 이익만을 좇았다. 그리하여 여기에 붙었다 저기에 붙었다 하는 세태가 꼴불견이었는데, 아버지는 젊을 때부터 이런 세태를 미워하셨다. 그래서 아홉 편의 전(傳)을지어 세태를 풍자하셨는데, 그 속에는 왕왕 우스갯소리가 들어 있다. 아홉 편의 전에는 각기 시적인 서문을 붙이셨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중략)
명분과 절개를 힘써 닦지 않고
문벌과 지체를 밑천 삼아
조상의 덕을 파니
장사치와 뭐가 다를까?
이에 '양반전'을 쓴다.
(중략)
이들 전(傳)은 그 체재가 자못 장난삼아 지은 것처럼 보이므로, 식견이 없는 자는 우스갯소리로 지은 글로만 알고, 식견이 있는 자라하더라도 얼굴을 찡그렸다. 그래서 나는 이글들에 대해 지공께 한번 여쭈어 본 적이 있다. 공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 당시 선비인 체하며 권세와 이익을 구하는 자가 있었는데, '학문을 팔아먹는 큰도둑놈전'은 그 자를 풍자하기 위해 지으신 거지. 후에 그자가 죽자 네 아버지는, '저 옛날 소순이 간사한 자를 비판하는 글을 지어 명성을 얻은 적이 있지만 내가 다시 그런 명성을 얻을 필요는 없지.'라고 하시고는 마침내 그 글을 불태워 버렸다. "'봉산학자전'이 없어진 것도 아미 이 때가 아닌가 싶어"(출처 : 박종채 지음/ 박희병 옮김 '나의 아버지 박지원')
'양반전' 의 시대적 배경
'양반전' 은 조선 후기의 신분 질서의 변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앙법, 견종법 등의 도입으로 농업 생산력이 증가하고 상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신분 질서가 동요하기 시작했으며 상업의 발달과 농업 생산력의 발달 등으로 평민 부자들이 많이 나타났고, 새롭게 부를 축적한 부농층, 신흥 상공인 계층이 등장하게 된다. 이들이 경제적으로 높은 지위를 차지하게 됨에 따라 점차 사회 신분의 상승을 꾀하게 된다. 반면에 양반층에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점차 경제적으로 몰락하는 계층이 형성된다. 국가에서는 부족한 국가 재정을 메우기 위해 돈이 많은 평민들에게 돈을 받고 양반으로 신분을 상승시켜 주게 된다.
몰락한 양반층 가운데 일부는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세례를 받고 부패한 현실을 개혁하려는 지식인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들이 바로 박지원, 정약용 등으로 대표되는 실학자들이다. 실학자들은 당대의 지배층이 현실과는 유리된 공리공론(空理空論)에 빠져 백성들의 궁핍한 현실을 외면하고 부정부패를 일삼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리고 그들은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을 바탕으로 실제 백성들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데에 많은 관심을 두었다. 박지원의 소설 '양반전' 은 이러한 시대적 현실을 반영하여 양반층의 허위 의식과 부패상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박지원 소설의 특징
풍자적 성격과 사실주의적 특성이다. 연암에 있어 풍자란, 중세적 봉건 사회가 무너져 가고 그 속에서 새로운 사회의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하는 역사적 변화의 시대에 살면서, 그 모든 추억들을 직시했던 비판적 태도로 나타난다. 또한, 그는 서민들의 삶의 세계를 향하여 새로운 의식 세계를 확장하면서 당대 평민층의 모습을 생생하게 포착하는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뛰어난 소설적 성과를 이룩했다.
박지원 소설은 무엇보다도 조선 후기의 양반층의 부패와 허위 의식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풍자하는 데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는 중세적 봉건 사회가 무너지고 새로운 근대적 사회의 맹아가 싹트고 있음을 포착한 작가 의식의 발로이기도 한다.
그는 '호질(虎叱)'에서 유학자 북곽 선생을 등장시키고 호랑이의 입을 통해 양반의 허위 의식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또한 그는 '허생전'을 통해 당대의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애쓴 실천적 지식인 허생을 등장시켜 작가 자신의 꿈과 이상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였다. 박지원은 이처럼 현실의 모순에 대한 풍자 정신, 시대의 변화를 민감하게 포착한 사실주의 정신, 봉건 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봉건 사회 너머를 꿈꾸었던 시대 정신으로 뛰어난 소설적 성과를 이루었다.
양반전의 풍자 대상
박지원이 이 작품에서 풍자하고자 한 주된 대상은 양반 계층임이 분명하다. 그가 비판하고자 한 양반의 모습은 두 가지이다. 첫 번째 문서에서 풍자된 양반은 무위 도식(無爲徒食)하며 공허한 관념과 겉치레에 얽매인 비생산적 계층으로 드러나 있으며 두 번째 문서에서 풍자된 양반은 개인적 이익만을 취하며 부당한 특권을 남용하는 집단으로 드러나 있다. 작자는 이 양면은 모두 부정적으로 보고 있으나 좀더 강한 비판이 가해진 것은 둘째 유형의 특권적 행동이다. 평민 부자가 이 문서의 내용을 듣고 '아이구 맹랑합니다 그려, 나를 도적으로 만들 셈이란 말이오?'라 하는 말을 남긴 채 달아나 버린 데서 이 점이 분명히 나타난다. 이와 같은 풍자적 비판을 통해서 작자가 말하려고 한 주제는 양반층의 공허한 관념, 비생산성과 부당한 특권 남용이 당시 사회의 커다란 병이요 문제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양반전을 쓴 동기
선비는 몸이 비록 곤궁하더라도 본분을 잃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지금 소위선비들은 명절을 닦기에는 힘쓰지 않고 부질없이 문벌만을 진귀한 보화로 여겨 그의 세덕을 팔고 사게 되니, 이야말로 저 장사치에 비해서 무엇이 낫겠는가. 이에 나는 이 양반전을 써 보았노라.
박지원의 문학에 반영된 실학 사상에 대한 이해
조선 시대 후기에 들어서서 성리학의 인성론·예론 등 공리공론을 탈피하여 주로 권도에서 소외된 재야의 선각적 선비들 속에서 부국민안의 '시무책(時務策)'적인 실학이 대두되었다. '실사구시', '이용후생'의 시무책은 경제개혁적 정책에 주안점을 두어 서유럽 자연과학의 수용, '유민인국'으로 대변되는 박지원의 농업·수공업·상업·무역 등의 산업화 진흥 등 가히 그 사상운동에서 자유주의적 발상을 볼 수 있다.
이런 사회 변혁의 구조적 전환기에는 기성 질서에 비판을 가하는 유토피아적 미래상이 제시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허균의 '홍길동전'에 나오는 '율도국'과 연암 박지원의 '공도'개척이다.
실학 운동의 혁명성은 양반질서의 근간이던 사농공상의 계층적 신분제를 허문 것이다. 연암의 '양반전'에서는 양반 사대부의 지배층이 기왕에는 천정(天定)의 불변원칙으로 규범화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무릇 하늘이 백성을 나으실 제, 그 갈래를 넷으로 나누었다. 그 네 갈래의 백성 중에서 가장 존귀한 이가 선비이고 이 선비를 불러 양반이라 한다.'
연암의 실학 사상에 나타난 부국안민의 개혁안은 몰락양반 대신 신흥지배계층으로 사(士)이외의 농·공·상, 특히 상공업 계층이 주도하는 호민의 새 시대를 예감하는 상공업 사회에의 대망을 담고 있다. 연암의 '허생전'은 양반에 대한 해학적 비판과 아울러 기왕에 천시되던 상업과 시장상인에 대한 발상전환을 감행하고 있다. 그의 실학에서 '이용후생'의 '이용'은 수공업과'상통(商通)'을 하여 '민(民)'의 '용(用)'을 이롭게 한다는 정책으로, 거기서는 상공업의 자유로움이 허용되고 진흥되어야 한다는 근대적 시민사회의 미래상이 제시되어 있다.
연암의 '허생전'에서 몰락한 양반인 허생은 노동 천시와 금전 천시라는 양반적 에토스를 파격적으로 타파하고 호민 변씨한테서 장사 밑천으로 만금을 차용하여 장사를 시작한다. 당시 상업의 요지인 안성에서 잔치나 제사용 과일을 모두 매점매석(買占賣惜)하여 10배의 이득을 얻고 다시 제주도로 가서 말총을 몽땅 매점하여 망건값을 10배로 올려놓고 매석으로 폭리를 취한다. 이 소설에서 허생은 자기처럼 매점매석의 폭리행위를 하는 자가 많이 생기면 나라의 시장질서가 망가진다는 것도 지적하고 있다. 연암은 허생의 대담한 상행위를 과시하여 시장적 사고를 가진 새로운 사회계층의 대두를 예시했다. 우리 근대 사회의 구조전환은 단순히 일제 식민지 사관의 가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일제의 침투라는 외부 요인에 의해 한국이 자본주의 시장사회로 전환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그리고 그 자생적 맹아를 '허생전' 등의 실학 운동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왕조 쇠망기의 백성들은 '홍길동전' 에 나타난 도둑떼였고 연암의 '허생전' 속에서도 처자가산 없는 도둑떼로 그려지고 있다. 이미 양반사회의 경제체제는 몰락양반을 비롯해 양민들을 도둑떼로 만드는 단계, 현대적 표현으로 하자면 '봉건제 해체기의 대량 실업자' 가 만연되는 단계였으며, 이에 대한 해결안으로서 직업 확대 창출이 실학자들의 주된 시무책이었다. 그 해결은 상공업의 진흥을 통해 도둑떼가 된 백성들에게 세속적 직업을 마련해 주는 것이었으며, 그러한 새 직장을 만들어 내는 신흥 사회계층인 기업가의 생성은 이미 4민 질서를 와해시키는 과정에 들어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민 질서가 해체된 다음의 주역은 신흥 상공업 발흥에서 생성되는 시민이다.
'허생전' 의 '공도' 개척의 유토피아도 도둑떼로 된 양민들에세 생업을 마련해 주는 실업대책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 '공도' 개척에서는 아직 농본주의에 머물러 있되, 그 무인도 농업개간을 통해 7년 먹을 식량을 비축하고 나머지를 일본 나가사키로 수출하는 해외 무역의 본보기는 명백히 상업과 무역을 통한 자본주의적 부강의 길을 선구하고 있다고 하겠다.
'허생전'의 주제인 '유민익국'의 부강국 건설 비전에서는 먼저 민생을 부하게 한 연후에 문자를 만들고 의관을 새롭게 제정하겠다는 경제개발 우선의 '선부론'이 눈에 띠는데, 이는 성리학적 명분론보다 상공업의 산업을 앞세워야 한다는 경제개혁 위주의 발상전환이라는 철학이 전제되어 있다. 연암이 이 소설에서 '공도' 유토피아의 보호를 위해 '글을 아는 자들' 을 떼내어 '이 섬의 화근을 없애야 한다.'는 '양반추방론'을 개진하는 것은, 조선 왕조의 사대부 지배에 대한 그의 비판이 얼마나 날카로웠는가를 실감케 해주는 대목이다. 연암은 허생의 상행위와 선부론을 통해 근대자유기업과 시장제의 신흥지도층인 기업가상의 모형을 그렸다고 평가할 수 있다.(출처 : 신인철, '자유주의와 한국 사회의 전통 사상')
박지원(朴趾源)
1737(영조 13) ∼ 1805(순조 5). 조선 후기의 문신 · 학자. 본관은 반남 ( 潘南 ). 자는 미중(美仲) 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또는 연상(煙湘) · 열상외사(洌上外史). 할아버지는 지돈녕부사 ( 知敦寧府事 ) 필균(弼均)이고, 아버지는 사유(師愈)이며, 어머니는 함평 이씨(咸平李氏) 창원(昌遠)의 딸이다.
〔성장 과정〕
서울의 서쪽인 반송방(盤松坊) 야동(冶洞)에서 출생하였다. 성장하면서 신체가 건강하고 매우 영민해 옛사람의 선침(扇枕)과 온피(溫被) 같은 일을 흉내내기도 하였다. 아버지가 벼슬 없는 선비로 지냈기 때문에 할아버지 필균이 양육하였다. 1752년(영조 28) 전주 이씨(全州李氏) 보천(輔天)의 딸과 혼인하면서 ≪ 맹자 ≫ 를 중심으로 학문에 정진하였다.
특히 보천의 아우 양천(亮天)에게서는 사마천(司馬遷)의 ≪ 사기 史記 ≫ 를 비롯해 주로 역사 서적을 교훈받아 문장 쓰는 법을 터득하고 많은 논설을 습작하였다. 수년간의 학업에서 문장에 대한 이치를 터득했으며, 처남 이재성(李在誠)과 평생 문우로 지내면서 그의 학문에 충실한 조언자가 되었다.
〔북학사상의 형성과 현실 개혁론〕
1760년 할아버지가 죽자 생활은 더욱 곤궁하였다. 1765년 처음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했으며 이후로 과거 시험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1768년 백탑(白塔) 근처로 이사를 하게 되어 박제가 ( 朴齊家 ) · 이서구 ( 李書九 ) · 서상수 ( 徐常修 ) · 유득공 ( 柳得恭 ) · 유금(柳琴) 등과 이웃하면서 학문적으로 깊은 교유를 가졌다.
이 때를 전후해 홍대용 ( 洪大容 ) · 이덕무 ( 李德懋 ) · 정철조(鄭喆祚) 등과 이용후생 ( 利用厚生 )에 대해 자주 토론했으며, 이 무렵 유득공 · 이덕무 등과 서부 지방을 여행하였다. 당시 국내 정세는 홍국영 ( 洪國榮 )이 세도를 잡아 벽파 ( 僻派 )였던 그의 생활은 더욱 어렵게 되고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었다. 결국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으로 은거했는데 그의 아호가 연암으로 불려진 것도 이에 연유한다.
그는 이곳에 있는 동안 농사와 목축에 대한 장려책을 정리하였다. 1780년(정조 4) 처남 이재성의 집에 머물다가 삼종형 박명원(朴明源)이 청의 고종 70세 진하사절 정사로 북경으로 가자, 수행(1780년 6월 25일 출발, 10월 27일 귀국)해 압록강을 거쳐 북경 · 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이 때의 견문을 정리해 쓴 책이 ≪ 열하일기 ≫ 이며, 이 속에서 평소의 이용후생에 대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 이 저술로 인해 문명이 일시에 드날리기도 했으나 문원(文垣)에서 호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그 뒤 1786년에 뒤늦게 음사(蔭仕)로 선공감감역에 제수된 것을 필두로 1789년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 ·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1791년 한성부판관, 1792년 안의현감(安義縣監), 1797년 면천군수(沔川郡守), 1800년 양양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안의현감 시절에는 북경 여행의 경험을 토대로 실험적 작업을 시도했으며, 면천군수 시절의 경험은 ≪ 과농소초 課農小抄 ≫ · ≪ 한민명전의 限民名田議 ≫ · ≪ 안설 按說 ≫ 등을 남기게 되었다. 그가 남긴 저술 중에서 특히 ≪ 열하일기 ≫ 와 위의 책들은 그가 추구하던 현실 개혁의 포부를 이론적으로 펼쳐보인 작업의 하나이다.
특히 ≪ 열하일기 ≫ 에서 강조한 것은 당시 중국 중심의 세계관 속에서 청나라의 번창한 문물을 받아들여 낙후한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는 일이었다. 이 때는 명(明)에 대한 의리와 결부해 청(淸)나라를 배격하는 풍조가 만연하던 시기였다. 이 속에서 그의 주장은 현실적 수용력이 부족했으나 당시의 위정자나 지식인들에게 강한 자극을 불러일으키는 결과가 되었다.
북학사상(北學思想)으로 불리는 그의 주장은 비록 청나라에 적대적 감정이 쌓여 있지만 그들의 문명을 수용해 우리의 현실이 개혁되고 풍요해진다면 과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조선에 대한 인식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개선책을 제시했으며, 나아가 역대 중국인들이 우리에게 갖는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는 방법도 서술하였다.
그는 서학 ( 西學 )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는 자연과학적 지식의 근원을 이해하려 한 것이며 새로운 문물에 대한 애착을 보인 결과였다. 이러한 관심은 홍대용과의 교유에서 보이는 우주론의 심화를 위한 작업이며, 실제로 북경을 여행할 때 천주당이나 관상대를 구경하면서 서양인을 만나고 싶어하였다.
천문학에 깊은 관심을 보인 그가 펼친 우주의 질서는 당시의 중국학자들도 놀라게 했으며 이는 그가 가진 세계관의 확대와 전환을 의미한다. 나아가 당시에 풍미하던 주자학 ( 朱子學 )의 사변적 세계에만 침잠하는 것을 반성하면서 이론적 세계의 현실 적용, 곧 유학의 본질 속에서 개혁의 이론적 근거를 찾고자 하였다.
이 생각은 당시로서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주창이었으나 과감한 개혁 의지의 한 표출로 나타났다. 이 같은 그의 생각을 집약한 것이 곧 이용후생 이후에 정덕(正德)을 이루는 방법이다. 이는 정덕을 이룬 뒤에 이용후생을 추구하는 방법과 비교할 때 발상의 일대전환이라 할 것이다.
이것이 그가 주창하는 실학사상(實學思想)의 요체이며 이를 위해 제시한 것들은 자기 주장의 완성을 위한 방도이다. 그 방도의 구체적 현상은 정치 · 경제 · 사회 · 군사 · 천문 · 지리 · 문학 등의 각 분야에서 나타났다. 특히 경제 문제에서는 토지개혁정책 · 화폐정책 · 중상정책(重商政策) 등을 제창했으며 현실의 문제를 개혁하지 않고는 미래의 비전을 찾기 힘들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문학 작품〕
그가 남긴 문학 작품 속에서도 이러한 생각이 잘 나타나고 있다. 곧 당시 주조를 이루는 복고적 풍조에서 벗어나 문학이 갖는 현실과의 대립적 현상을 잘 조화시켜, 시대의 문제를 가장 첨예하게 수렴할 수 있는 주제와 그 주제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였다.
이것은 그의 사고가 고정적 관념에서 벗어나 일대 전환을 시도한 것과 맥락을 이루며, 문학 작품의 매개체인 언어의 기능을 이해하고 당대에 맞는 문체 개혁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법고창신(法古創新 : 옛 것을 거울삼아 새로운 것을 창조함)으로 표현되는 이 말은 시속문(時俗文)의 인정을 의미하며 그렇다고 문승질박한 비평소품(批評小品)을 찬양한 것은 아니다. 고법(古法)을 버리는 이유는 새로운 현실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문학을 창조하는 데 있었기에 새롭기 위해서 또다시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나타난 표현의 절제와 문장 조직 방법의 운용, 사실적인 표현 등은 그가 생각한 당대의 현실과 문학과의 관계를 연결짓는 방법들이었다. 이는 그의 문집 속에 수록된 당시 그와 교유했던 사람들의 문집서(文集序) 등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또한 그가 남긴 일련의 한문 단편(漢文短篇)들 속에서도 구체적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초기에 쓴 9편의 단편들은 대체로 당시의 역사적 현실이나 인간의 내면적인 세계 혹은 민족 문학의 맥을 연결하는 것들로서 강한 풍자성을 내포하고 있다. 〈 양반전 〉 의 경우는 조선시대 봉건사회의 와해와 그 속에서 군림하는 사(士)의 계급이 가지는 올바른 개념을 정립하고 있어 많은 문제점을 던져주었다. 다음으로 북경을 여행한 이후에 쓴 두 편의 단편은 여행기 속에 포함된 것으로 역시 그의 실학사상을 잘 대변하고 있다.
그 중에서 〈 허생전 許生傳 〉 은 중상주의적 사상과 함께 허위적 북벌론을 배격하면서 이상향을 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당시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작품들은 그의 사상을 나타내는 이론의 근거와 함께 그것을 실제로 작품화한 실례가 될 것이다.
〔저서〕
그의 저술은 모두 ≪ 연암집 燕巖集 ≫ 에 수록되었다. 그가 가진 생각들이 당대의 사고와 많은 차이를 내포하고 있어서, 실제로 1900년 김만식(金晩植) 외 23인에 의해 서울에서 처음 공간된 그의 문집은 책을 초록한 형태였다. 그의 손자 박규수 ( 朴珪壽 )가 우의정을 지냈으면서도 할아버지의 문집을 간행하지 못했음은 문집 내용이 갖는 의미를 짐작케 한다.
그의 저술에서 특이한 점은 문집 대부분이 논설을 중심으로 한 문장이 대부분이며, 시는 각체를 합해 42수가 전부이다. 이 점에 대해 아들 종간(宗侃)은 〈 영대정잡영 映帶亭雜 半 〉 (권제4) 말미에 붙인 부기에서 유실되었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당시 교유한 문인들의 문집 속에도 그가 많은 작품들을 지었다고 하고 있어, 이 역시 유실되었음을 증명하는 한 예일 것이다.
저서로는 ≪ 열하일기 ≫ , 작품으로는 〈 허생전 〉 · 〈 민옹전 閔翁傳 〉 · 〈 광문자전 廣文者傳 〉 · 〈 양반전 〉 · 〈 김신선전 金神仙傳 〉 · 〈 역학대도전 易學大盜傳 〉 · 〈 봉산학자전 鳳山學者傳 〉 등이 있다. 1910년(순종 4)에 좌찬성에 추증되고, 문도공(文度公)의 시호를 받았다.
≪ 참고문헌 ≫ 燕巖集, 燕巖小說硏究(李家源, 乙酉文化社, 1965), 韓國小說硏究(李在秀, 宣明文化社, 1969), 韓國文學思想史試論(趙東一, 知識産業社, 1978), 熱河日記硏究(姜東燁, 一志社, 1988), 朝鮮後期 文化運動史硏究(鄭玉子, 一潮閣, 1989), 燕巖小說의 近代的 性格(金一根, 慶北大學校論文集 1, 1956), 燕巖朴趾源의 生涯와 思想(李家源, 思想界, 1958.10.), 燕巖 朴趾源과 實學思想(柳影默, 漢陽 1 ∼ 6, 漢陽社, 1962), 朴趾源-兩班社會의 諷刺家-(朴魯春, 韓國의 人間像, 新丘文化社, 1965), 燕巖 朴趾源의 經濟思想(宋柱永, 亞細亞硏究 10 ∼ 11, 高麗大學校亞細亞問題硏究所, 1967), 北學派의 實學思想-洪大容의 科學精神과 朴趾源의 實用精神 ― (琴章泰, 精神文化 10,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1), 北學思想의 形成과 그 性格-湛軒 洪大容과 燕巖 朴趾源을 中心으로-(유학봉, 韓國史論 8, 서울大學校, 1982), 熱河日記와 淸朝學藝(金明昊, 韓國學報 53, 一志社, 1988), 燕巖 朴趾源 の 敎育觀-李朝敎育十八世紀相 へ の そ の 位置 て け の た ぬ に 試論-(渡部學, 朝鮮學報 36, 朝鮮學會, 1965), 燕巖 朴趾源 の 敎育觀-千字文不可讀說 と そ の 他 に み ら ね る 敎育法思想 の 進展-(渡部學, 近世朝鮮敎育史硏究, 雄山閣, 1969). (자료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지원의 한문소설
작품명 |
주 제 |
출전 |
도학자들의 위선을 폭로 풍자 |
열하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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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의 무능력 비판과 자아 각성 고취 |
열하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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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 생활의 허식과 부패상 폭로 |
방경각외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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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 사회의 간접적 풍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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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적 차별 타파 및 천인의 성실성 |
방경각외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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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 도식하는 유생 풍자와 미신 타파 |
방경각외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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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 사상의 허무 맹랑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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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인재등용의 맹점 비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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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생들의 위선적 교우 풍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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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가 금지의 반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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