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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부인전(愛國夫人傳)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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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부인전(愛國夫人傳)

 

 

(전략)

 

제 팔 회

각설 이 연설장에서 여러 인민들이 일제히 약 원수의 군사됨을 자원하는 자가 분분하거늘 원수가 일러 가로대 그대들이 이제 군중에 들어와 나라를 위하여 전장에 나가고자 하므로마땅히 죽기를 동맹하고 일심 병력하여 적군을 파(깨뜨릴)할지니 오늘부터 항오(대오)를 차려 군령을 복종하고 기율을 문란치 말라 하고 이 날 행군할새 원근 촌락에 있는 백성들이 량초(군량과 꼴)와 긔게(기계) 등속을 가지고 모두 원수의 군중에 받치는 자가 락역 부절(왕래가 끊이지 않음)하더라.

 

원수가 아리안 십이 박게 이를어 진을 머물고 뎍진을 살펴보니 만산 편야한 것이 다 영국 군병이라. 긔치 창검은 일광을 가리고 금고 함셩은 텬디 진동하는데 일편 외로온 셩에 살긔 참담한지라. 원수가 제장을 불러 상의 하되 이제 영군의 형세 심히 굉쟝하여 낫낫이 날내고 싸홈 잘 하는 군사뿐더러 병긔도 다 졍리하니 형셰로 하면 능히 익이지 못할지라.우리는 다만 애국열혈로 빈 주먹만 쥐고 쥭기를 무릅써 일제히 아프로 나아갈 따름이니 비록 칼과 창이 수풀 같고 활살과 탄환이 비오듯 할지라도 한 걸음도 물러갈 생각말고 다만 아프로 나아가자 하고 각각 군장을 단속하여 뎍진으로 달려드니 사람마다 애국하는 열혈이 분발하여 죽을 마음만 잇고 살 생각은 업스매 날낸 긔운이 츙텬하여 한아이 백을 당할 듯한지라. 영국 군사가 아모리 만코 날내나 이러케 죽기로 싸호는 사람을 엇지 당하리오 원수의 들어오는 형셰 바다에 조수 밀듯하매 영국 군사가 자연 한편으로 헤어지며 분분히 흐터지는 지라.

 

각셜 이 때 아리안 셩이 에움을 입은지 임의 일곱 달이라. 타쳐 군사가 구원치 안코 군량 오는 길도 끈허져 장졸이 다 쥴이고 곤핍하여 형셰 심히 위태하니 장차 죠셕에 함몰할 디경이라. 비호로 공작이 근심을 익이지 못하여 홀로 성루에 올라 뎍진을 살피더니 홀연 엇더한 장수가 금괴 은갑으로 백마에 노피 안자 우수로 쟝검을 두르며 좌수로 몸긔를 집고 군사를 몰아 비호가티 들어오니 영국 군사 분분히 츄풍 락엽쳐름 흐터지며 물결 가티 헤어지는지라.

 

공작이 크게 놀나 의심하되 엇더한 장수가 저러틋이 영웅인고 혹 꿈인가 눈을 씻고 자셰히 살피니 일개 녀장군이 분명한지라. 대단 의심할 지음에 원수 벌셔 셩문에 이를 엇는지라. 공작이 급히 문을 열고 원수를 마자 젼후 사졍을 낫낫치 들으매 모도 원수의 애국 츙의를 흠탄하여 가로되 원수는 쳔고 녀중 영웅이요 절셰 호걸이라.

(하략)

 

 요점 정리

 연대 : 1907년
 작자 : 장지연(張志淵:1864-1921)
 형식 : 역사소설, 군담소설
 성격 : 전기적, 영웅적
 제재 : 잔 다르크의 일생과 오를레앙 전투
 주제 : 프랑스 소녀 잔 다르크의 애국심과 용맹성을 그림으로써 일제 침략에 대한 경계와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의도

 

 줄거리 : 프랑스는 영국과의 백년 전쟁(百年戰爭)에서 거듭 패배하여 국토를 상실하고 이로 인해 백성들은 깊은 도탄에 빠졌다. 이런 상황에 오를레앙에서 태어난 잔다르크는 비참한 조국의 현실을 목도하고 상제(上帝, 하느님)에게 기도하여 힘을 구한다. 상제의 계시를 받은 잔다르크는 부모와 이별하고 프랑스의 국왕을 만나 신임을 얻어 백성들에게 일장 연설을 하여 자기 뒤를 따르게 한다. 잔다르크는 프랑스의 마지막 보루로, 위기에 처한 오를레앙 성과 리목 성을 탈환하고 왕의 대관식을 행하게 한다. 다시 파리를 탈환하려고 출장했으나, 영국군에게 사로잡혀 화형(火刑)당한다.
 의의 : 일반적인 신소설과 구별되는 전기 양식으로서 개화기 소설의 한 독자적 영역을 이룬다.
 출전 애국 부인전
 기타 :
1) 이 작품은 조선조의 군담소설, 영웅소설 등의 전기 소설과 유사한 형식을 갖고 있다
2) 개화기 이러한 소설 양식을 일반적 신소설과 구별하여 '역사 전기 소설'이라고도 부른다.
 줄거리 : 잔 다르크가 백년전쟁 때 16세의 나이로 영국군의 포위망을 뚫고 앞장서서 오를레앙성(城)을 함락한 일과, 뒤에 영국군에 잡히어 이단의 혐의로 화형(火刑)당한 사실을 전기소설로 엮었고 인용된 줄거리는 백성들이 잔 다르크의 군사 되기를 자원한 후 함께 싸우니 비록 형세는 열세이나 점차 영국군을 물리치기 시작한다.
 구성 : 전체 10회 중 8회
 출전 : 1907년 광학서포(廣學書鋪)

 

 

 내용 연구

 약 원수 : 잔 다르크를 중국식 표현으로'약안아이격'이라했음
 파평지니 : 물리치니
 항오 : 군대를 편성하는 대오
 량초 : 양식과 풀.
 락역 부절: 왕래가 끊이지 않음
 군장 : 군사 장비
 흠탄하여 : 아름다움을 칭찬하여
 약 원수의 군사됨을 자원하는 자가 분분하거늘 : 잔 다르크의 군사가 될 것을 자원하는 사람이 매우  많음을 표현한 구절로 우리의 위태로운 민족 현실 속에서도 많은 애국자가 나오길 의도한 작자의 생각이 담겨 있다.
 만산 편야 한 것이 : 큰 산과 들판에 가득 찬 것이
 우리는 다만 ~ 나아갈 따름이니 : 당시 우리 나라의 형세와 비슷한 양상으로 오로지 애국심으로 나아갈 것을 독려하고 있다. '애국 열혈'은 애국, 계몽 소설의 핵심적인 주제이다.
 사람마다 ~ 엇지 당하리오 :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여 독자로 하여금 저절로 혈기 충천케 하는 효과를 노리고 있다. 애국, 계몽 소설에서는 이 같은 표현이 주로 강조된다.

 

 

 이해와 감상

 장지연 ( 張志淵 )이 역술한 전기소설. 원작명은 미상이다. 1907년 광학서포(廣學書 孃 )에서 발간하였다. 표지에 ‘ 신소설 ’ 이라고 규정한 이 작품은 전10회로 되어 있으며, 잔다르크의 구국전사(救國戰史)를 중심으로 하여 그 생애를 전기화하고 있다.

 

이 작품의 번안은 중국문헌을 매개로 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데, 그런 보기를 인명표기에서 볼 수 있다. 곧, ‘ 카알 7세 ’ 를 ‘ 사이 뎨 칠 ’ 로 번역한 것 같은 예가 바로 그것이다.

 

작품의 내용은 프랑스의 애국소녀 잔다르크가 백년전쟁 때에 16세의 나이로 영국군의 포위를 뚫고 앞장서서 오를레앙성(城)을 탈환하고, 뒤에 영국군에 잡히어 화형(火刑)을 당한 사적을 전기소설로 엮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주인공이 서구의 위인이며, 특히 구국의 영웅이라는 점이 주목을 끈다.

 

이는 역술가의 민족주의적 자보사상(自保思想)과 관련되는 것으로, 역사에 우의(寓意)하여 저항정신을 나타낸 것이라 생각된다. 장지연의 유일한 역술소설인 이 작품의 표지에 붙은 ‘ 신소설 ’ 이라는 용어는 독자를 혼란하게 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1907년 〈 이태리건국삼걸전 伊太利建國三傑傳 〉 을 번역, 간행한 광학서포에서 같은 해에 〈 혈의 누 〉 와 이 소설을 간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적 보수주의와 구국의 영웅숭배사상이 개화주의와 결합하여 만들어진 작품이라 생각된다.

 

≪ 참고문헌 ≫ 애국부인전 · 乙支文德 · 瑞士建國誌(李在銑, 한국일보社, 1975), 開化期文學쟝르(尹明求, 韓國史學 2,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0).

 

 

 심화 자료

 

작품해제 :

 역사 소설. 1907년 광학서포(廣學書鋪) 간행. 이 작품은 프랑스의 애국 소녀 잔다르크의 생애를 전기화한 것이다. 작품의 내용은 잔다르크가 백년 전쟁 때 16세의 나이로 영국군의 포위망을 뚫고 앞장서서 오를레앙 성(城)을 함락한 일과, 뒤에 영국군에 잡히어 이단의 혐의로 화형(火刑)당한 사실을 전기 소설로 엮었다.

 

(1) 이 작품의 주인공인 잔다르크의 생애와 그가 활약했던 시대적 상황을 조사해 보자.

교수·학습 방법 :

프랑스의 구국 영웅인 잔다르크의 생애와 그가 활약했던 프랑스의 시대적 상황을 인터넷, 백과사전 등을 통해 조사하도록 지도한다. 모둠별로 활동이 이루어지도록 지도하는 방법도 좋다.

 

예시 학생 활동 :

 가톨릭의 성녀(聖女). 로렌과 샹파뉴 사이에 있는 동레미라퓌셀의 독실한 그리스도교 가정인 농가에서 태어났다. 1429년의 어느 날 "프랑스를 구하라"는 신의 음성을 듣고 고향을 떠나 서쪽으로 가서 루아르 강변의 시농성(城)에 있는 샤를 황태자(뒷날의 샤를7세)를 방문하였다. 당시의 프랑스는 북반부를 영국군 및 영국에 협력하는 부르고뉴파(派) 군대가 점령하고 있었고, 프랑스의 왕위도 1420년의 트루아의 조약에 따라 샤를 6세 사후에는 영국왕 헨리 5세가, 또 그의 사후에는 그의 아들 헨리 6세가 계승하도록 되어 있어, 황태자 샤를은 제외되어 있는 형편이었다.

 

 잔다르크는 샤를을 격려하고 그에게서 받은 군사를 이끌고 나가, 영국군의 포위 속에서 저항하고 잇던 오를레앙 구원에 앞장서서 싸웠다. 영국군을 격파하여 오를레앙을 해방시킨 데이어 각지에서 영국군을 무찔렀다. 흰 갑주에 흰 옷을 입고 선두에 서서 지휘하는 잔다르크의 모습만 보고도 영국군은 도망하였다. 이리하여 그해 5월 상순, 영국군은 오를레앙에서 완전히 패퇴하였다. 랭스까지 진격한 잔다르크는 이곳 성당에서 전통적인 전례에 따라 샤를 7세의 대관식(戴冠式)을 거행토록 하였다.

 

 이에 샤를 7세는 영국의 헨리 6세에 앞서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잔다르크에 대한 왕의 측근들의 질시와 선망 속에서도 잔다르크는 더욱 충성을 하였다. 1430년 5월 콩피에뉴 전투에서 부르고뉴파 군사에게 사로잡혀 영국군에게 넘겨졌다. 1431년, 재판에서 마녀로 낙인 찍혀, 이단(異端) 선고를 받고 루앙에서 화형을 당하였다. 뒤에 샤를 7세는 앞서의 유죄 판결을 파기(1456), 명예를 회복시켰고, 가톨릭 교회에서는 1920년 그녀를 성녀로 시성(諡聖)하였다.

 

(2) 이 작품이 지어진 시대 상황을 고려하여 작가가 이 작품을 쓴 이유를 토론해 보자.

교수·학습 방법 :

 당시의 프랑스가 영국의 침략으로 인해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국가의 존망이 위협받던 상황에서 구국의 영웅으로 나타난 이가 잔다르크였다. 당시의 프랑스의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시대 상황과의 비교를 통해 작가의 창작 배경을 유추해 보는 활동을 하도록 지도한다.

 

예시 학생 활동 :

 우리나라는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고 강제로 합병하려고 시도하는 상황은 프랑스가 위기에 처한 상황과 비슷하다. 작가는 구국의 영웅이 나와 국가를 구했던 이 소설을 통해서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일본에 저항해서 싸우려는 의지를 고취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이 소설을 창작했을 것이다.

 

 

 장지연(張志淵 )  

 1864(고종 1)∼1921. 조선 말기의 언론인·애국계몽운동가. 본관은 인동 ( 仁同 ), 초명은 지윤(志尹). 자는 화명(和明)·순소(舜韶), 호는 위암(韋庵)·숭양산인(嵩陽山人). 경상북도 상주 출신. 용상(龍相)의 아들이며. 장석봉(張錫鳳)의 문인이다.

1894년(고종 31) 진사가 되었다. 1895년 8월 일제의 민비시해 만행이 자행되자 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지어 각처에 발송하였다. 1896년 아관파천 ( 俄館播遷 )이 일어나자 고종의 환궁을 요청하는 만인소 ( 萬人疏 )를 기초하였다.

 

한편, 사례소(史禮所) 직원으로 ≪대한예전 大韓禮典≫ 편찬에 참여하고, 이듬 해 내부주사(內部主事)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였다. 같은 해 7월 독립협회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1898년 9월 ≪황성신문 皇城新聞≫이 창간되자 기자로 활약하였다. 같은 해 11월 만민공동회 ( 萬民共同會 )의 간부로 맹활약하다가 그 해 말 독립협회·만민공동회가 해산당할 때 체포, 투옥되었다.

 

1899년 ≪시사총보 時事叢報≫의 주필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출판사인 광문사(光文社)를 설립해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 牧民心書≫와 ≪흠흠신서 欽欽新書≫ 등을 간행하였다. 1901년 황성신문사의 사장에 취임해 민중 계몽과 자립정신 고취에 진력하였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황성신문≫ 1905년 11월 20일자에 〈시일야 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제목으로 국권침탈의 조약을 폭로하고, 일제의 침략과 을사5적을 규탄하면서, 국민의 총궐기를 호소하는 논설을 써서 일제 헌병대의 사전검열을 거치지 않고 전국에 배포하였다. 이 일로 체포, 투옥되어 65일 후 석방되었으며, ≪황성신문≫도 압수 및 정간 처분되었다.

 

이 후 1906년 윤효정 ( 尹孝定 )·심의성(沈宜性)·임진수(林珍洙)·김상범(金相範) 등과 함께 대한자강회 ( 大韓自强會 )를 조직, 국권 회복을 위한 본격적 애국계몽운동을 시작하였다. ≪대한자강회월보≫·≪조양보 朝陽報≫ 등에 전국민이 각성해서 실력을 배양해 구국운동에 나설 것을 호소하는 논설을 다수 발표하였다.

 

1907년 1월 대구의 김광제(金光濟)· 서상돈 ( 徐相敦 ) 등이 국채보상운동 ( 國債報償運動 )을 전개하였다. 이에 이 운동을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시키고자 신문과 잡지 등에 다수의 논설을 게재해 전국민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같은 해 7월 일제가 헤이그특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 양위시키고, 애국계몽운동에 대한 탄압법들을 잇달아 제정하자, 대한자강회 회원들과 함께 격렬한 반대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일로 인해 8월 19일 대한자강회는 강제 해산되었다. 그 후 11월에 권동진 ( 權東鎭 )·남궁 억(南宮檍)· 여병현 ( 呂炳鉉 )· 유근 ( 柳瑾 )· 오세창 ( 吳世昌 ) 등과 함께 대한협회 ( 大韓協會 )를 발기해 조직하였다.

 

1908년 2월 일제의 탄압을 피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정순만 ( 鄭淳萬 ) 등이 간행하고 있던 ≪해조신문 海潮新聞≫의 주필에 취임하였다. 재정난으로 ≪해조신문≫이 폐간되자, 상해(上海)와 난징(南京) 등 중국 각지를 유랑하다가 양쯔강의 배 안에서 일제의 첩자로 보이는 괴한의 습격을 받고 부상당해 8월에 귀국하였다.

 

귀국 즉시 ≪해조신문≫에서의 격렬한 일제침략 규탄이 문제되어 일제 헌병대에 체포되었다가 얼마 뒤 석방되었다. 1909년 1월 영남지방의 교육구국운동 단체인 교남교육회 ( 嶠南敎育會 )의 취지문을 지어 지원했으며, 학회의 편집원으로 활약하였다.

 

같은 해 2월 대한협회의 〈정정부문 呈政府文〉을 지었으며, 신민회 ( 新民會 )에도 가입, 활약하였다. 1909년 10월 진주에서 발행되는 ≪경남일보≫의 주필로 초빙되어 언론구국운동을 다시 계속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나라를 병탄함에 따라 항의하는 선비들이 잇달아 자결하자, 황현 ( 黃玹 )의 〈절명시 絶命詩〉를 ≪경남일보≫에 게재해 일제를 규탄하였다. 이로 인해 ≪경남일보≫가 폐간되어 활동 무대를 잃었다.

 

1911년 이후 향리에 칩거하면서 나라를 빼앗긴 울분을 통탄하다가 1921년 마산에서 죽었다. 묘지는 창원시 구산면 현동리 독마산(禿馬山)에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는 ≪증보대한강역고 增補大韓疆域考≫·≪유교연원 儒敎淵源≫·≪위암문고 韋庵文稿≫·≪대한최근사 大韓最近史≫·≪동국역사 東國歷史≫·≪대동문수 大東文粹≫·≪대한신지지 大韓新地志≫·≪대한기년 大韓紀年≫·≪일사유사 逸事遺事≫·≪농정전서 農政全書≫·≪만국사물기원역사 萬國事物紀原歷史≫·≪소채재배전서 蔬菜栽培全書≫·≪화원지 花園志≫·≪숭산기 嵩山記≫·≪남귀기행 南歸紀行≫·≪대동시선 大東詩選≫ 등 많은 작품이 있다. 그의 저작을 수집해 ≪장지연전서≫가 간행되었다.

 

≪참고문헌≫ 騎驢隨筆, 大韓季年史, 梅泉野錄, 나라사랑 5-장지연특집호-(외솔회, 정음사, 1971), 張志淵全書(檀國大學校東洋學硏究所, 1981),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金厚卿, 光復出版社, 1983), 大韓民國獨立有功人物錄(國家報勳處, 1997).

 

 

 잔다르크<Jeanne d?rc>(1412.1.6~1431.5.28)

15세기 전반에 영국의 랭커스터 왕조가 일으킨 백년전쟁 후기에,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적인 소녀. 가톨릭의 성녀(聖女). 로렌과 샹파뉴 사이에 있는 동르미의 독실한 그리스도교 가정인 농가에서 태어났다. 1429년의 어느 날 “프랑스를 구하라”는 신의 음성을 듣고 고향을 떠나 서쪽으로 가서 루아르 강변의 시농성(城)에 있는 샤를 왕태자(뒷날의 샤를 7세)를 방문하였다. 당시의 프랑스는 북반부를 영국군 및 영국에 협력하는 부르고뉴파(派) 군대가 점령하고 있었고, 프랑스의 왕위도 20년의 트루아의 조약에 따라 샤를 6세 사후에는 영국왕 헨리 5세가, 또 그의 사후에는 그의 아들 헨리 6세가 계승하도록 되어 있어, 왕태자 샤를은 제외되어 있는 형편이었다. 잔 다르크는 샤를을 격려하고 그에게서 받은 군사를 이끌고 나가, 영국군의 포위 속에서 저항하고 있던 오를레앙 구원에 앞장서서 싸웠다.

 

영국군을 격파하여 오를레앙을 해방시킨 데 이어 각지에서 영국군을 무찔렀다. 흰 갑주에 흰 옷을 입고 선두에 서서 지휘하는 잔 다르크의 모습만 보고도 영국군은 도망하였다. 이리하여 그 해 5월 상순, 영국군은 오를레앙에서 완전히 패퇴하였다. 랭스까지 진격한 잔 다르크는 이곳 성당에서 전통적인 전례에 따라 샤를 7세의 대관식(戴冠式)을 거행토록 하였다. 이에 샤를 7세는 영국의 헨리 6세에 앞서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잔 다르크에 대한 왕의 측근들의 질시와 선망 속에서도 잔 다르크는 더욱 충성을 하였다. 30년 5월 콩피에뉴 전투에서 부르고뉴파 군사에게 사로잡혀 영국군에게 넘겨졌다. 31년, 재판에서 마녀로 낙인 찍혀, 이단(異端) 선고를 받고 루앙에서 화형을 당하였다. 뒤에 샤를 7세는 앞서의 유죄판결을 파기(56), 명예를 회복시켰고, 가톨릭교회에서는 1920년 그녀를 성녀로 시성(諡聖)하였다.

 

 백년전쟁<Hundred Years?War>(百年戰爭)

중세 말기에 영국과 프랑스가 벌인 전쟁. 프랑스를 전장(戰場)으로 하여 여러 차례 휴전과 전쟁을 되풀이하면서,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 동안 단속적(斷續的)으로 계속되었다.

 

 

 

【원인】

영국은 1066년 노르만왕조의 성립 이후 프랑스 내부에 영토를 소유하였기 때문에 양국 사이에는 오랫동안 분쟁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1328년 프랑스 카페왕조의 샤를 4세가 남자후계자가 없이 사망하자, 그의 4촌 형제인 발루아가(家)의 필리프 6세가 왕위에 올랐다. 이에 대하여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그의 모친이 카페 왕가 출신(샤를 4세의 누이)이라는 이유로 프랑스 왕위(王位)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양국간에 심각한 대립을 빚게 되었다.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경제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하여 플랑드르에 수출해오던 양모(羊毛) 공급을 중단하고, 그 보복으로 프랑스의 필리프 6세는 프랑스 내의 영국 영토인 기엔, 지금의 가스코뉴 지방의 몰수를 선언하였으며, 37년 에드워드 3세는 필리프 6세에게 공식적인 도전장(挑戰狀)을 띄우게 되었다. 원래 플랑드르는 프랑스왕의 종주권(宗主權) 아래에 있었지만, 중세를 통하여 유럽 최대의 모직물 공업지대로서 번창하여, 원료인 양모의 최대 공급국인 영국이 이 지방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기엔 역시 유럽 최대의 포도주 생산지였으므로, 프랑스왕들은 항상 이 두 지방의 탈환을 바라고 있었다. 따라서 전쟁의 근본적 원인은 이 두 지방의 쟁탈을 목표로 한 것이다.

 

【제1기】

전쟁은 1339년 플랑드르와 북(北)프랑스에서 양국군 사이의 사소한 다툼에서 비롯되었다. 40년 영국 함대는 라인강의 하구에 있는 슬로이스에서 프랑스 함대를 격파한 뒤, 45년 에드워드 3세는 그의 맏아들인 흑태자(黑太子) 에드워드와 함께 노르망디에 상륙하였다. 이듬해 크레시전투에서 장궁대(長弓隊)를 활용하여 전력(戰力)이 우세한 프랑스 기사군(騎士軍)을 격파하였으며, 그 여세를 몰아 칼레시(市)로 진격하여 이 성을 완전히 포위하였다. 칼레시민들은 완강하게 계속 저항하였으나, 47년 마침내 영국군에게 항복하였다.

 

그뒤 양국에 페스트가 유행한 데다 재정사정도 악화되어 한때 전쟁이 중단되기도 하였으나, 55년 흑태자는 다시 남프랑스를 침입하였다. 50년 프랑스에서는 필리프 6세가 죽고 그 뒤를 이어 장 2세가 즉위하였으나, 56년 흑태자는 장 2세가 인솔한 프랑스군을 푸아티에전투에서 격파하고 장 2세를 포로로 잡았다. 이처럼 전쟁 초기에 거둔 영국군의 일방적 승리는, 독립적 자영농민(自營農民)을 주력으로 한 보병(步兵)의 장궁대 전법(戰法)이 프랑스의 봉건 기사군의 전법에 비해 우수하였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전쟁의 참화와 영국군의 약탈로 농민의 피폐가 격심하여, 58년 농민반란인 자크리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즉시 진압되었지만, 프랑스는 매우 심한 궁지에 빠졌다. 그 결과 양국 사이에 브레티니화약(和約)이 성립되어, 프랑스는 장 2세의 석방보상금으로 300만 크라운을 지불하고, 아키텐 지방 전부와 칼레시(市) 등의 영토를 영국에게 할양하였다.

 

【제2기】

1364년에 프랑스에서는 장 2세가 죽고 샤를 5세가 즉위하였다. 그는 내정(內政)의 정비와 재정(財政)의 재건에 착수하였으며, 아키텐의 귀족들을 선동하여 영국의 지배에 반항하게 하였으므로, 양국 사이가 다시 악화되어 마침내 전쟁이 재개되었다. 69년 흑태자의 아우 존 오브 곤트가 이끈 영국군이 프랑스로 침입하였으나 프랑스군의 분전으로 패배하고, 영국 해군(海軍) 역시 카스티야 해군과 동맹을 맺은 프랑스 해군에게 잇달아 패전하였다. 따라서 브레티니화약에서 영국에 할양한 영토의 대부분을 탈환하고, 75년 부르지에서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다. 그 뒤 77년 영국에서는 에드워드 3세가 죽고 리처드 2세가 왕위에 올랐으며, 프랑스에서도 80년 샤를 5세가 죽고 그의 아들 샤를 6세가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두 왕이 모두 미성년(未成年)이었으며, 특히 영국에서는 81년 와트타일러의 난이 일어난 데다가, 더욱이 리처드왕의 지배에 대한 귀족의 반항까지 겹쳤기 때문에,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은 오랫동안 중단되었다. 99년 영국에서는 리처드왕이 폐위되고 랭커스터가(家)의 헨리 4세가 왕위에 올라 프랑스에 대한 전쟁을 재개하였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종종 정신착란(精神錯亂)을 일으키는 샤를 6세를 대신하여 국정(國政)의 실권을 장악하려고 한 귀족들이,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로 나뉘어 내란 상태에 빠졌다.

 

【제3기】

1413년 헨리 4세의 뒤를 이어 영국왕으로 즉위한 헨리 5세는 프랑스의 내분(內紛)을 이용하여 부르고뉴파와 결탁하고, 15년 맹렬한 기세로 노르망디를 진공(進攻), 아장쿠르전투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프랑스군을 대패시켜 북프랑스의 여러 도시를 탈취하였다. 헨리 5세는 이를 배경으로 20년 트루아조약을 맺고, 스스로 샤를 6세의 딸 카트린과 결혼함으로써 자신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승인시켰다. 그러나 샤를 6세의 황태자 샤를(샤를 7세)과 이를 지지하는 아르마냐크파는, 이와 같은 영국측의 강요를 인정하지 않은 채 중남부 프랑스에 거점을 두고 전쟁을 계속하였다. 22년 영국의 헨리 5세와 프랑스의 샤를 6세가 잇달아 죽자 나이 어린 헨리 6세가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의 국왕을 자칭하고 나섰고, 프랑스에서는 황태자가 샤를 7세로서 프랑스의 왕위에 올랐음을 선언하였다.

 

이에 영국군은 28년 샤를 7세의 거점인 오를레앙을 포위하였으므로, 샤를 7세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이와 같이 불리한 전황을 승전(勝戰)으로 전환하게 한 것은 바로 잔 다르크의 출현이었다. 그녀는 적은 수의 프랑스 병사로 오를레앙의 영국군을 격파하였으며, 그뒤 항상 선두에 서서 영국군을 격파하였다. 그 결과 그 해 샤를 7세는 정식으로 대관식(戴冠式)을 거행하고 적법(適法)한 프랑스 국왕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게 되었다.

 

따라서 샤를 6세가 영국과 맺은 트루아조약은 사실상 그 뜻을 상실하였다. 그 다음해인 30년에 잔 다르크는 부르고뉴파에게 체포되어 영국측으로 인도된 끝에, 31년 마녀재판(魔女裁判)을 받고 화형(火刑)에 처해졌다. 그러나 이 무렵 전황은 이미 프랑스 쪽으로 기울어졌으며, 35년 동안이나 항쟁을 계속한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도 아라스에서 화의를 맺음으로써 프랑스의 내란은 끝을 맺었다. 또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산발적인 전투가 계속되었으나, 44년 툴에서 휴전(休戰)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영국은 프랑스 내에 멘·보르도·칼레·노르망디 등의 영토를 계속 보유하게 되었다.

 

【전쟁의 종결】

1445년 양국의 외교적 교섭이 원만히 타결되지 못하였으므로, 이 기회를 이용하여 프랑스 국왕 샤를 7세는 군대를 동원하여 영국 지배하의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 50년에는 노르망디 전역을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패전으로 영국에서는 랭커스터왕조의 지배에 대한 요크가(家)의 반항이 일어났다. 프랑스의 샤를 7세는 이와 같은 영국 내의 혼란을 틈타 기엔의 회복에 나서 영국군을 격파하고, 53년에는 영국군 최대의 거점인 보르도시를 맹공격, 이를 점령하였다. 따라서 영국은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내의 모든 영토를 잃었다. 잔 다르크의 출현 이후 프랑스의 승리는 장기간에 걸친 영국군의 가혹한 지배와 약탈행위로 인해 프랑스의 시민과 농민들 사이에 반영감정(反英感情)이 고조된 점과, 샤를 7세에 의하여 보병·포병(砲兵)을 주력으로 한 프랑스 국왕군(國王軍)이 강화되었던 점 등이 그 원인이었다. 양국간의 최종적 강화(講和)는 1475년에 체결되었지만, 보르도가 함락된 1453년에 백년전쟁이 사실상 끝난 것으로 본다.

 

【전쟁의 의의】

프랑스는 장기간에 걸친 전쟁과 내란에 의해서 봉건귀족(封建貴族) 세력이 극도로 약화된 반면, 국왕의 권력이 크게 신장되었다. 샤를 7세는 자크 쿠르를 등용하여 왕실의 재정을 정비하고, 국왕의 상비군(常備軍)을 강화하며 귀족세력을 누르고 중앙집권제(中央集權制)를 추진해 나갔다. 한편 영국에서는 전쟁이 끝난 뒤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30년 간에 걸친 장미전쟁(1455~85)이 일어났으나, 이것은 프랑스에서 돌아온 귀족들의 생존 경쟁의 일환(一環)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그들이 함께 쓰러지는 결과를 초래하여, 헨리 7세에 의한 중앙집권화의 기초을 굳혀주었다.

 

한편 영국은 프랑스 내의 영토를 상실함으로써 그 이후 유럽대륙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문제들에 휩쓸리지 않게 되어, 독자적인 국민국가(國民國家)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의 공포를 피하여 기술직이민(技術職移民)들이 플랑드르로부터 영국으로 이주함으로써, 플랑드르를 능가하는 모직물 공업이 발전하게 되어 경제적 발전의 기초가 다듬어졌다. 즉, 백년전쟁의 결과, 영국과 프랑스 모두 봉건기사의 세력이 무너지고 농민해방(農民解放)의 진전, 부르주아 계급의 대두, 왕권의 확대 등을 초래하였다 (자료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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