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암흑기의 친일 문학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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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기의 친일 문학

 본문

  일제 말의 특정시기를 가리켜 암흑기라고 최초로 이름한 사람이 누구인지, 혹은 암흑기라는 명칭은 과연 적절한 용어인지에 대해서는 대체로 논의로 되어왔다. 그러나 그 시기가 대체로 1940년에서 1945년 해방에 이르는 시기라는 데는 이견이 없는 듯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암흑기가 반드시 1940년을 시발점으로 해서 시작된다든가 하는 뜻은 아닐 것이다. 1937년에 중일 전쟁이 시작되고, 일본이 전시체제로 돌입하면서 총독부는 전쟁 수행을 위한 총력 체제로 돌입하면서 총독부는 전쟁 수행을 위한 총력 체제 구축에 광분하게 되고, 이에 따라서 지금까지 형식적으로 표방되었던 일체의 온건 또는 유화적인 정책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 구체적 움직임의 하나가 1939년 10월에 결성을 보게 되는 조선 문인 협회인데, 여기에는 이광수가 주축이 되고 일본인과 한국인이 뒤섞여, 이른바 내선 일체를 지향하는 조직을 갖게 된다. 조선인측 간사로 김동환, 정인섭, 주요한, 이기영, 박영희, 김문집 드이 참여하게 되는데, 이 조선 문인 협회가 관점에 따라서는 훗날 나타나는 조선 문인 보국회의 준비 단계로 볼 수도 있다.

 

 이와같이  문인들을 하나의 단체로 만들어 전시 총력체제로 돌입시킨 뒤 1940년 2월에는 그 유명한 창씨 제도를 실시하여 한국인의 뿌리를 뒤흔드는 음모를 노골화하기 시작한다. 이어 1940년 8월에는 '동아', '조선' 두 일간지를 폐간시키고 동년 10월 16일에는 국민 총력 조선 연맹을 결성함으로써 전체주의적인 색체가 사회 곳곳에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고 1941년 4월에는 '인문 평론'과 '문장'이 폐간되기에 이른다.

 

 이어 1941년 12월에는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식민지 수탈을 더욱 강화하여 1942년 9월에는 조선어학회사건을 일으키고, 1943년 4월 17일에는 이른바 문인보국회라는 단체를 태동시키기에 이르며 동년 9월에는 진단학회를 해산시킴으로써 이 땅의 민족 문화를 말살하려 드는데, 이같은 일련의 사태가 일어난 시기를 가리켜 암흑기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암흑기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데에도 사용자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덕순의 경우는 암흑기라는 말을 식민지 정책의 강화에 기인한 암흑 시대로 규정하고 있음에 비하여 백철은 '그런 모든 분해된 현상 위에 드디어 우리 문학사상에 그 암흑기가 와버린 것'이라고 하여 문학사적인 암흑기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추세는 정치적 의미에서의 암흑기라 하고, 이 시기에 산출된 문학이나 그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 문학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록 친일 문학일지라도 문학 활동이 있었고, 그것이 싫건 좋건 우리 문학의 유산 가운데 하나라면 암흑기라고 명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친일 문학의 폭을 어떻게 잡을 것이냐 하는 문제는 아직도 논의가 덜 끝난 상태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논자에 따라서는 식민지 치하에서 문자화된 모든 문학은 친일문학이라고 규정하기도 하다. 어떤 의미로건 식민지 정책에 부합했기 때문에 출판이 허락된 것이고, 그런 뜻에서 본다면 분명한 친일 문학이라는 주장이다. 물론 일리가 있는 견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친일문학이란 앞서 말한 암흑기에 나타났던 작품군을 가리키며, 그 작품의 분류나 규정은 별개로 하기로 한다.

 

 친일 문학의 개념을 이렇게 한정하면, 그 태동기를 1939년 4월 '인문 평론'의 창간이라고 장덕순은 보고 있다. 그는 '인문 평론'을 야합의 첫기수라고 규정하고 그 구체적 증거로 '건설과 문학'이라는 창간호의 권두언을 지적하면서, 최재서가 '일제가 대륙 침략의 구실로 내세우는 신질서 건설을 찬양하고 문학자들도 이 건설 사업에 총력을 기울여 협조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규정했다.

 

 이 같은 관점은 최재서가 그 훨씬 나중까지 자기 분열과 고민을 거듭했다고 보는 김윤식의 견해와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김윤식의 견해는 최재서 개인의 행적을 면밀히 분석한 데서 얻어진 것이고 장덕순의 그것은 외부로 나타난 양상을 두고 얻어진 것임을 감안한다면, 친일 문학의 태동은 장덕순이 지적한 대로 '인문 평론'의 창간으로 봄이 옳을 듯하다.

 실제로 '인문 평론' 창간호는 박영희의 '전쟁과 조선 문학', 백철의 '일본 전쟁 문학일고' 등의 논문을 싣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일본의 침략 전쟁을 합리화하고 긍정하는 글이다. 따라서, '인문 평론'은 장덕순의 지적대로 전기 문학에서 암흑기 문학을 연결하는 가교의 구실을 한 것이다.

 

 그러나 친일 문학의 준비는 '인문 평론'에 국한되는 현상은 아니었다. 이광수가 신문지상에 '국민문학의 의의', '심적 신체제와 조선 문화의 진로' 등을 발표하는가 하면 백철이 '시대 우연(時代遇然)의 처리(處理)'라는 글로 일본의 침략 전쟁을 긍정하는 등, 시대적 압력에 친일로 대응해 가는 변화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시기가 지나고 친일 문학이 '국민 문학(國民文學)의 요건(要件)' 가운데서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합리화한다.

  국민 문학이란 것은 오직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문단(文壇)의 길을 타개하기 위하여 제멋대로 생각해 낸 제목은 아니다……단적으로 말한다면 구라파 전통에 뿌리박은 소위 근대 문학의 한 연장으로서가 아니라 일본 정신에 의하여 통일된 동서 문화의 종합을 지반으로 하고 새롭게 비약하려는 일본 국민의 이상을 시험한 대표적 문학으로서……

 

  이와 같이 국민 문학이란 일본의 문학, 일본 정신에 뿌리박은 문학임을 천명함으로써 친일 문학으로서의 국민 문학임을 뚜렷이 밝히고 있는 것이다.

 

 또, 이같은 국민 문학이란 용어는 단순히 잡지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국민 문학>이라는 잡지 이름을 국민 문학이라는 용어에서 빌려왔다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그 구체적 증거로 이광수(李光洙), 김기진(金基鎭), 안함광(安含光), 이석훈(李石薰) 등이 신문지상에 국민 문학의 의의라든가 출발 또는 성격, 문제 등등의 제목으로 글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대에 슬로우건처럼 유행하던 용어임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의 자료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국민 문학 운동의 선봉은 최재서였으며, 이광수가 그 적극적인 지지 혹은 동조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 당시로서는 신인이었던 사람들의 추종을 받으며 국민 문학은 당대를 휩쓴다. 여기에 더욱 박차를 가한 것이 1942년에 나온 <국민 문학> 2권 5호로서, 이 때부터 한글판을 일체 폐지하고 완전히 일본어로만 발행하기에 이른다. 원래는 연 4회가 일문판(日文版)이고 나머지는 한글판으로 내기로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그 때에도 평론은 거의가 일본어이고 몇몇 창작만이 한국어였는데 그나마 한글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명실 공히 '내선 일체(內鮮一體)'를 실천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이같은 외형적 변화에 따른 작품의 내용들은 어떤 것이었던가.

 먼저 비평 부문에서는 그 특징을 한마디로 공백기라고 장덕순은 지적한다. 그 이전에 활발했던 비평이 자취를 감추고 국민 문학이라는 친일 사상의 강조에 그침으로써 사실상 비평 활동은 끝났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 비평의 흐름을 잡아본다면, 그것은 구미적 색채의 일소였다고 할 수 있다. 미국과 영국에 선전 포고를 하고 있는 일본으로서는 적대국의 잔재를 일소할 것이 급선무였고, 또 구미 문학의 영향만을 받아온 한국의 신문학으로서는 이것이 문단 혁신의 중요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추세에서 나타난 것이 정인섭의 '서양 문학에의 반성'과 김오성(金午星)의 '세계사의 전환'인데, 전자는 적성 문화의 비판을 시도한 것이고, 후자는 서양의 몰락을 예견하면서 동아 문학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이 글 뒷부분에서 보게 되겠지만 최재서는 이 부분에서 심각한 내적 분열을 일으키고 있다. 그 자식 T.E.흄 스타일의 합리주의적 사고와 문학관에 길들여져 온 사람으로서 그같은 문학을 부정하고 내선 일체와 식민지 체제를 수용하기에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지식인으로서의 최재서가 어떻게 이 갈등을 극복했는가 하는 점인데 이는 후술된다.

 

 다음으로 시 부문에서는 이른바 국민시라고 하는 것이 등장하게 된다. 1942년 5월부터는 한글판도 완전히 사라져서 보기 어렵게 되므로 작품이 모두 일본어로 씌어졌을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친일 문학이라 해도 어느 만큼의 구분은 있어서 그 내용에 차이를 보이고 있다.

 

    낳아 자란 곳 어디거나

    묻힐 데를 밀어 나가자

  

    꿈에서처럼 그립다 하랴

    때로 진한 고향의 미신이리

 

    제비도 설산을 넘고

    적도 직하에 병선이 이랑을 갈 제

 

    피었다 꽃처럼 지고 보면

    물에도 무덤은 선다

 

    탄환 씰리고 화약 싸아한

    충성과 피로 고아진 흙에

 

    싸움은 이겨야만 법이요

    씨를 뿌림은 오랜 믿음이라.

 

  <국민 문학> 1942년 2월호에 게재된 정지용(鄭芝溶)의 '이토(異土)'라는 시다. 남양 여러 곳에 징용으로 끌려가서 외로운 넋이 된 죽음을 영광의 죽음으로 각색하고 있는 것이다.

 

 초기에는 이처럼 담담한 어조의 시도 나올 수 있었으나 국민 문학의 열도가 더해 가고 일제가 침략 전쟁을 확대해 감에 따라 시 또한 함께 흥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목적을 가진 문학이 으레 그렇듯이 시는 점차 생경한 구호 같은 단어와 채 삭지 않은 흥분의 토로로 전락함을 보게 된다.

 

    앞장서 지원한 그대에 이어

    그리운 학모(學帽)를 바람에 버리고

    새로운 군모(軍帽)의 별을 받들어

    붓을 검(劍)으로, 서책(書冊)을 지도로 대신할 때

    몇 만(萬)의 발자국은 청운(靑雲)을

    소용돌이쳤다.

 

  김용제(金龍濟)가 <국민문학> 1944년 7월호에 발표한 '학병(學兵)의 꽃'이라는 시로 전쟁 말기에 학도병 지원을 미화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처럼 그 내용에 있어 내선 일체(內鮮一體)를 지향하고 결전의 각오를 다지는 것들이 있었는가 하면, 일본의 단가(短歌) 형식을 빌려서 작품을 쓰는 사람조차 있었느니, 이는 형식에 있어서조차 한국적인 것의 포기라고 김윤식은 지적하고 있다.

 

 한편 소설 작품은 어떠했던가?

 장덕순은 이 시기 소설의 경향을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하나는 황민화(皇民化)의 철저한 신봉이고, 둘째는 현실에서 떠나 은둔하는 태도이며, 셋째로는 지식인이기를 버리고 전향하는 유형이 그것이다.

 

  황민화의 작품으로 장덕순이 지적한 것은 이효석(李孝石)의 '계( )의 장(章)', '아내의 고향(故鄕)', 그리고 정인택(鄭人澤)의 '청량리계외(淸凉里界 )' 등을 들고 있다.

 

  한편 은둔 표방의 예로 박노갑(朴魯甲)의 '백일(白日)' 김남천(金南天)의 '등불'등을 들고 , 지식인이기를 포기하고 전향하는 예로 이석훈의 '고요한 폭풍(暴風)'을 들고 있다. 장덕순의 이같은 분류는 주인공의 행동 양식에 따른 분류로, 작가의 태도를 고려한다면 붓을 꺾고 창작 활동을 하지 않은 저항의 부류를 하나 더 설정해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것도 초기 현상이고 말기 증상을 보이기 시작하는 1943년에는 다음과 같은 소설 작품이 나오고 있음을 지적한다.

 

   어머니, 이제 곧 동경 (東京)을 보여드리겠어요. 사꾸라가 한참 핀 꽃의 동경을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은 내가 죽는다라는 말입니다. 죽으면 나는 외람스럽게도 야스꾸니신사[國神社]의 신으로 제사를 받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귀족의 한 사람으로서 나를 만나려고 동경에 갈 수는 있다는 뜻입니다. 어머니는 하루도 빨리 동경이 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정인택의 ' 돌아보지 않으리'라는 이 글은 출정한 지원병이 고향의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일별하여 보면, 죽음이라는 문제와 민족이라는 문제를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는 당대 지식인의 단세포적 사고의 한 단면을 느낄 수 있다. 친일 문학의 정도가 여기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같은 친일 문학을 우리 문학사는 어떻게 다를 것이며, 또 무엇을 다를 것인가 하는 본질적인 문제가 남는다.

 먼저 역사 의식의 문제다. 식민지 시대를 살아갔던 지식인으로서의 작가의 행동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 때에 맨 먼저 묻게 돼는 물음은 친일 문학에 앞장을 섰던 작가들에게 진정한 역사 의식은 있었던가 하는 점이다. 민족 감정을 배제하고 냉철한 판단으로 본다해도 대답은 부정적이 될 것이다. 민족이라고 하는 것을 그렇게 쉽사리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오류고, 그런 생각이 없었다면 무지의 소치라고 보아야한다.

 

 그러나 그같은 역사 의식의 결여는 접어 두더라도 친일 문학에의 전향이 지식인다웠는가 하는 문제는 음미해 볼 가치가 있다. 그리고 이 점에 관해서 김윤식은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분석을 가하고 있다.

 

 김윤식이 주로 다루고 있는 것은 최재서 개인의 문제다. 최재서의 변신은 이광수의 그것과는 또 다르다. 이광수의 변신이 '누군가 당할 일을 스스로 당한다'는 식의 선민 의식에서 나온 것이라면 최재서의 경우는 그 나름의 갈등을 거치기 때문이다.

 

 잘 알다시피 최재서는 서구적 합리주의와 주지주의 적 문학관으로 단련된 사람이다. 그가 친일로 달려간 것이 과연 논리적이었는가 김윤식은 다음의 글을 예로 들어 논리에 의한 것이 아니고 신념에 의한 것이라고 말한다.

 

  금후 일본 문학에서 한편 그 순수화의 도를 더욱 높임과 동시에 다른 한편 그 확대의 범위를 더욱 넓힐 것이다. 전자는 전통의 유지와 국체의 명징에 이어지는 일면이요, 후자는 이민족의 포섭과 세계 신질서와에 이어지는 일면이다. 전자는 천황귀일(天皇歸一)의 경향, 후자는 팔굉일우(八紘一宇)의 나타남이다.

 

  '조선문학(朝鮮文學)의 현단계(現段階)'라는 최재서의 이 글에서 우리는 그가 논리에 매달리려고 고심한 흔적을 본다. 허나 그가 일본체제를 받아들이는 것은 천황귀일(天皇歸一)과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신념일 뿐 논리는 아니다.

 

 적잖은 갈등을 겪었던 흔적을 그의 글에서 보이고 있는 그가 끝내 논리를 포기하고 신념으로 황민화(皇民化)의 길에 직선으로 매달리려 했다는 것은 그가 진정한 지식인이 되지 못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진정한 지식인은 논리에 의해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므로, 최재서의 경우가 이러할 때 여타의 친일 작가에서 지식인의 행적을 찾기란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붓을 꺾은 저항 작가의 명단이나 이육사(李陸史),윤동주(尹東柱) 등의 저항 문학을 고귀한 것으로 치는 천이두(千二斗)의 논조는 타당성을 부여받는다. 천이두에게 있어 이 문제는 문학에 앞선 양심의 문제로 보이는 것이다.

 

 친일 문학을 논할 때 두 번째 던지게 되는 물음은 형식의 문제다. 당시 작품평을 하고 잇는 글 가운데서 우리는 단가(短歌)라는 용어를 발견하게 되고, 이광수를 비롯한 몇몇 시인들이 그 형식에 맞춰서 창작을 했다는 기록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단가(短歌)란 일본의 정형시 형식을 말한다. 이 문제는 그 표현된 언어의 문제와 함께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가령 일본어로 시조를 썼다고 가정해 보자(가정일 뿐 실제로는 불가능하겠지만). 그것은 어느 나라의 문학인가? 형식마저 일본의 정형이고 그 언어가 일본어라면 이는 당연히 일본의 문학이어야 할 것이다. 실제로 당시의 친일 문학론자들은 한국의 문학은 일본의 구주(九州)나 북해도(北海道) 같은 한 지방 문학에 지나지 않는다는 논조를 편 바 있다.

 

 친일 문학에 대한 세 번째의 물음은 그 언어에 관한 문제다. <국민 문학>이 1941년 5월호부터 한글판을 폐지함과 동시에 조선어 말살 정책이 기운으로 대부분의 창작 활동이 일본어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렇게 해서 일본어로 씌여진 작품들의 문학사적 귀속은 어떻게 될 것인가. 속문주의(屬文主義)를 취한다면 일본 문학이고 속소재주의(屬素材主義)를 취한다면 한국 문학일 것이나. 그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 김윤식의 견해다.

 

 김윤식은 여기서 한걸음 나아가, 이무영(李無影)의 '청와(靑瓦)의 가(家)' 최재서의 '비시(非時)의 화(花)', '민족(民族)의 결혼(結婚)' 등은 일본 국가에 이르는 혼을 발견하려고 쓴 것이지만 그 소재가 '조선'일 뿐 아니라 '조선적 특수성'을 드러낸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런가 하면, 김사량의 '물오리島(도)', 太白山脈(태백산맥)', 유진오(兪鎭午)의 '남곡선생(南谷先生)', 조용만(趙容萬)의 '선(船)의 중(中)', 오영진(吳泳鎭)의 '맹 진사 댁 경사(孟進士宅慶事)' 등은 일본어 썼다 해도 '반민족적 또는 친일 문학이라고 하기엔 어려움이 있다.' 고 보고 있기까지 하다.

 

 일본어로 표기된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것은 친일 문학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는 사고와, 비록 일본어로 썼더라도 친일 문학으로 보기 어렵다는 두 가지 견해는 극단적인 대립으로 보인다. 전자의 주장은 언어와 사고의 관계를 바탕에 깔고 있는가 하면 후자의 주장에는 한글 이전이나 이후에 쓰인 작품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도 같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문학을 보는 시각의 문제다. 이 점에서 김윤식은 우리에게 암시하는 바가 많다. 그는 일본혼을 지향한 친일 문학이라 할지라도 '깊이 통찰해 본다면 그 무엇인가의 불합리, 추태, 고민이 스며 있음'을 알 수 있고 그것이 바로 우리의 것이며 우리 문학사의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문학이 진공관 속에서 이뤄지지 않는다는 영향론적 관계를 우리가 인정할 때, 이같은 판단은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친일 문학에 대한 조사와 정리는 임종국(林鍾國)에 의해서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진행되어 있고, 우리가 이 자료에 추가할 것이란 별로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간은 자료들을 섭렵하면서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것은 그들에 대한 대우 문제다. 많은 논자들이 적극적 동조냐 소극적 동조냐, 혹은 적극적 동참을 주장한 내용이냐 단순한 반영이냐를 놓고 등급을 매기고 분류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분류란 체계적 지식을 위한 준비이며 목표이지만, 천일 문학에 있어 그것을 분류하는 일은 꼭 필요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문학자란 문학 작품이 개별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상호 영향하고 영향받는 의미의 맥락에서 추구된다고 할 때, 친일 문학에 대한 우리의 적개심을 일단 누르고 그것이 우리 것임을 긍정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버리고 싶다는 것은 감정이지 논리가 아니다. 감안한다면, 일본이 패전국으로서 히로시마의 원자 폭탄 떨어진 자리를 보존하고 있는 것도 감정을 넘어서서 스스로의 반성과 역사를 아끼는 태도라고 볼 수도 있다.

 

 일제 말의 암흑 시대가 비록 추태이긴 하나 공백이 아니고 채워져 있는 우리 문학사의 한 대문임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김윤식의 다음과 같은 말은 친일 문학을 보는 우리의 관점 설정에 도움이 되리라 본다.

 

 '이러한 자기 비판이나 역사에의 변명은 제3의 관점을 도입하지 않는 한 무의미할 것이다. 즉 김사량(金史良)류처럼 조선어 제일을 떠들면서 아무것도 안하고 붓만 끊으면 저항이냐 라는 반문과, 이태준(李泰俊)류의 일어(日語)로 작품만 쓴 것이 아무리 저항적이라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명제의 대립은 어쩌면 난쟁이 키재기 놀음인지도 모른다. 을유 해방 문학(乙酉解放文學)의 전개가 이 두 전제를 철저히 극복했느냐의 검정은 그 다음 차례에 논구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중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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