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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시대의 문학 1 /염상섭과 채만식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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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시대의 문학 1 -  -염상섭과 채만식- / 김현

 본문

 염상섭(廉想涉)의 '삼대(三代)'와 채만식(蔡萬植)의 '태평 천하(太平天下)'는 1930년대의 일제 식민지하에서 한국 지식인들이 쓸 수 있었던 두 개의 극단적인 발언을 각각 대표한다. 염상섭의 '삼대'는 민족주의자―보수주의자가 본 1930년대의 한국 사회를, 채만식의 '태평 천하'는 사회주의자―진보주의자가 본 1930년대의 그것을 문학적으로 뛰어나게 표현하고 있다는 진술은, 그 두 소설이 극단적인 민족주의자·사회주의자 들의 소설이 흔히 그러하듯 도식화된 논리와 이념을 전연 담고 있지 않으면서도, 그 어떤 민족주의자·진보주의자보다도 당대의 한국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분석하고 있다는 진술이다. 거의 비슷한 사회적 계급에 속해 있으면서 어떻게 해서 염상섭이 민족주의자가 되었고, 채만식이 사회주의자가 되었는가 하는 질문은 그 두 작가에 대한 자세한 전기가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분석하기 힘든 문제에 속한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삼대'와 '태평 천하'에 나타난 두 작가의 세계관의 차이에 대해서만 언급할 작정이다.

 

 3·1 운동을 가장 큰 정신적 충격으로 받아들였을 식민지 세대에 대해서 염상섭과 채만식은 분명히 다른 태도를 내보이고 있다. 채만식은 사회주의를 당대의 유일한 출구로 보고 있으며, 염상섭은 그것의 유효성을 인정하면서도 극단적인 변모는 거부하는 보수주의를 고수한다. '삼대'와 '태평 천하'에 나오는 식민지 세대를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종학 ― 윤 직원 영감의 둘째 손자로서 일본에서 법과 대학을 다니는 수재. '태평 천하'의 전면에 나타나지는 않으나 마지막 대단원을 장식함으로써, 채만식의 식민지 사회 비판의 거점이 되고 있다.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가 경찰에 피검되었다는 것만이 독자들에게 알려진다. ② 병화 ― 목사의 아들로 사회주의 활동을 하기 위해 집에서 뛰쳐 나온 청년이지만, '타협하고 법을 옹호하는 부르주아의 파수 병정'과 돈독한 우정 관계를 유지하며, 동지의 딸인 필순이가 프롤레타리아 운동원답지 않게 '삼대'의 주인공인 부잣집 아들 덕기에게 호감을 갖는 것을 묵인한다. 온건한 사회주의자. ③ 장훈 ―'삼대'에서 유일하게 그려진, 한국 문학사상 보고 힘든 종류의 극좌파 사회주의자, 테러리스트. 동지를 팔지 않기 위해 옥중에서 자결한다. ④ 필순― 노 사회주의자의 딸. 자신이 프롤레타리아임을 자각하면서도 덕기에 대한 호감을 포기하지 못한다. ⑤ 경애 ― 덕기의 아버지에게 희생된 독립 운동가의 딸. 술집을 경영하며 병화의 일을 돕는 동반자. ⑥ 종수 ― 윤 직원 영감의 큰손자. 고보(高普) 시험에 세 번 계속 떨어진 뒤, 군수가 되기 위해 군청의 말단 직원으로 다닌다. 후기의 상훈처럼 어음 위조, 술, 기생질 등으로 세월을 보낸다. ⑦ 병호 ― 종수와 같은 부잣집 아들에게 빌붙어 뚜쟁이 노릇을 해 주며 살아가는 사기꾼. ⑧ 덕기 ― '삼대'의 주인공이며, '태평 천하'의 종학과 대립되는 위치에 서 있는 개량주의자. 그는 할아버지의 전통적·복고적 습성도 이해하며, 아버지의 새 것 취향도 이해한다. 물론, 그는 사회주의의 유용성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무산(無産) 운동에 대하여 무관심으로 냉담히 방관만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제일선에 나서서 싸울 성격도 아니요 처지도 아니니까, 차라리 일간 호졸격으로 변호사나 되어서 뒷일이나'  보려 한다. 그러한 그의 성격은 '나이 스물셋이 되도록 인생 고초라고는 감기나 앓아 보았을까, 그 외에는 소설책이나 병화의 생활을 통하여밖에는 모르고 자란' 탓이다.

 

 결국, 식민지 세대를 이렇게 간추린다 하더라도 중요한 인물은 '태평 천하'의 종학, '삼대'의 덕기로 압축된다. 그 외의 인물들은 그들을 돋보이게 하는 보조 역할을 맡고 있을 따름이다. '태평 천하'의 종학이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었느냐 하는 것은 작품 구성 때문에 전면에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러나 '삼대'의 덕기는 사회주의의 수용과 극복이라는 염상섭적 주제를 잘 드러낸다. 물론, '삼대'에서 염상섭은 특별한 결론을 이끌어 내지는 못한다.

 

 그는 덕기가 사회주의와 맞서서 그것을 어떻게 용해하고 극복하느냐 하는 어려운 문제만을 제기함으로써 '삼대'를 끝낸다. 그 문제 제기는 덕기의 의식 속에서 돈에 대한 관심이 고조됨으로 행해지는데, 그 계기가 할아버지의 죽음이다. 할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덕기는 인간 관계가 추상적인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돈이라는 탄탄하고 구체적인 끈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고 그것의 효용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한다.

 

  (1) 생각하면 조부 초상 후에 객쩍은 일만 하고 돌아다니기는 하였다. 고등 학교도 못 나온 처신에 두 살림 세 살림을 떠맡고, 게다가 필순이 모녀까지 맡는다는 것도 주제넘은 짓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사는 것, 생활이라는 것이 아닌가도 싶다.―그것도 할아버지 덕분에 돈푼이 있으니까, 쓸데없이라도 바쁘구 남이 알아 주는 것이지 돈 없는 조덕기더면야 자기 같은 책상물림에게 누가 믿고 죽은 뒤라도 처자를 보살펴 달랄까. 그걸 생각하면 원삼이가 조상이 급합니까? 돈이 긴하죠! 하던 말이 옳기는 옳다.

 

(2) 돈이란 뭐냐? 돈은 어디서 나온 거야?

(3) ―구차한 사람, 고생하는 사람은 그 구차 그 고생만으로는 인생의 큰 노역이니까. 그 노역에 대한 당연한 보수를 받아야 할 것이 아닌가?…… 이런 도의적 이념이 머리에 떠오르는 덕기는 필순이 모녀를 자기가 맡은 것이 당연한 의무나 책임이라는 생각도 드는 것이었다.

 

  '삼대'의 마지막 부분을 발췌한 이 인용문은 염상섭적 태도를 가장 잘 보여 준다. (1)의 인용문에서 빈번히 사용되는 동사가 '생각하다'라는 것은 덕기의 삶의 반경이 아직 '책상물림'적이라는 것을 짐작케 해 준다. (2) 그러나 삶이 돈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큰 진전이다. 삶의 구체적 지반을 덕기는 돈을 통해 접촉한다. (3) 그렇다면 돈이란 무엇이며 어디서 나오는 것이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덕기는 그 이상 그 문제를 추구하는 것을 포기하고 '구차한 사람의 고생에 대한 대가를 부자가 치러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선에서 멈춘다. 염상섭의 보수주의적인 측면을 재확인케 하는 측면이다. 식민지 시대의 가장 큰 두 지주인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진보주의와 보수주의를 채만식과 염상섭은 종학과 덕기를 통해 극명히 드러낸다. 나로서는 종학의 사회주의보다는 사회주의를 한국적 정황 속에 끌어들여 그 한계 내에서 이해하려 한 덕기에게 더욱 주목하고 싶다. 다시 말하면 그의 뒷소문이 더욱 알고 싶다.

 

 진보주의적인 세계관을 가졌기 때문에 종학을 내세우고 한말 세대를 비판한 채만식과, 보수주의적인 세계관을 가졌기 때문에 덕기를 내세우고 개화기 세대를 비판한 염상섭 중에서 어느 한쪽이 더 우수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1930년대에 이르러 문학이 정치에 봉사하는 문학에서 벗어나, 자신과 자신이 속한 사회를 드러내는 표현체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현대 한국 문학의 이론)

 요점 정리

 

 작자 : 김현

 갈래 : 실천 비평, 분석 비평, 사회·문화적 비평

 특징 : 작품의 실증적 분석을 통해 작자의 세계관과 등장 인물의 성격을 대응 관계

 성격 : 실증적, 분석적

 주제 : 등장 인물을 통해 구현된 염상섭과 채만식의 세계관

 출전 : 현대 한국 문학의 이론(1982)

 의의 : 작품·작자 ·시대 상황의 관계를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내용 연구

염상섭의 '삼대'와 채만식의 '태평 천하'는 1930년대의 일제 식민지하에서 한국 지식인들이 쓸 수 있었던 두 개의 극단적인 발언을 각각 대표한다. 염상섭의 '삼대'는 민족주의자-보수주의자가 본 1930년대의 한국 사회를, 채만식의 '태평 천하'는 사회주의자-진보주의자가 본 1930년대의 그것을 문학적으로 뛰어나게 표현하고 있다는 진술은, 그 두 소설이 극단적인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의 소설이 흔히 그러하듯 도식화된 논리와 이념을 전연 담고 있지 않으면서도, 그 어떤 민족주의자·진보주의자보다도 당대의 한국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분석하고 있다는 진술이다. 거의 비슷한 사회적 계급에 속해 있으면서 어떻게 해서 염상섭이 민족주의자가 되었고, 채만식이 사회주의가 되었는가 하는 질문은 두 작가에 대한 자세한 전기가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분석하기 힘든 문제에 속한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삼대'와 '태평 천하'에 나타난 두 작가의 세계관의 차이에 대해서만 언급할 작정이다. - 문제 제기

 

 3·1운동을 가장 큰 정신적 충격으로 받아들였을 식민지 세대에 대해서 염상섭과 채만식은 분명히 다른 태도를 내보이고 있다. 채만식은 사회주의를 당대의 유일한 출구로 보고 있으며, 염상섭은 그것의 유효성을 인정하면서도 극단적인 변모는 거부하는 보수주의를 고수한다. - 두 작자의 세계관의 차이

 

 결국, 식민지 세대를 이렇게 간추린다 하더라도 중요한 인물 '태평 천하'의 종학, '삼대'의 덕기로 압축한다.  (중략)

'태평천하'의 종학이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었느냐 하는 것은 작품 구성 때문에 전면에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러나 '삼대'의 덕가는 사회주의의 수용과 극복이라는 염상섭적 주제를 잘 드러낸다. 물론, '삼대'에서 염상섭은 특별한 결론을 이끌어 내지는 못한다. - 두 작품의 주요 인물과 그들의 사상

 

 식민지 시대의 가장 큰 두 지주인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진보주의와 보수주의를 채만식과 염상섭은 종학과 덕기를 통해 극명히 드러낸다. 나로서는 종학의 사회주의보다는 사회주의를 한국적 정황 속에 끌어들여 그 한계 내에서 이해하려 한 덕기에게 더욱 주목하고 싶다. 다시 말하면 그의 뒷소문이 더욱 알고 싶다. - 두 작자의 세계관과 주요 인물의 관계

 진보주의적인 세계관을 가졌기 때문에 종학을 내세우고 한말 세대를 비판한 채만식과, 보수주의적인 세계관을 가졌기 때문에 덕기를 내세우고 개화기 세대를 비판한 염상섭 중에서 어느 한 쪽이 더 우수하다고 말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1930년대에 이르러 문학이 정치에 봉사하는 문학에서 벗어나, 자신과 자신이 속한 사회를 드러내는 표현제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 자신의 표현체로서의 문학

 그 두 소설이 ~ 있다는 진술이다 : 1930년대의 한국 사회를 날카롭게 해부하여 비판하고 있다.

 채만식은 사회주의를 - 고수한다 : 채만식은 사회주의를 통해 당대 한국 사회의 여러 가지 모순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본 반면에, 염상섭은 사회주의의 역할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혁명과 같은 급격한 변모는 거부하는 보수주의를 견지했다.

 태평천하의 - 있지 않다.: '태평천하'는 주로 윤 직원 영감 일가의 타락한 삶과 그 가족의 부침(浮沈)을 풍자하고 있기 때문에, 유일하게 긍정적인 인물인 종학의 사상은 작품 전면에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하면 - 알고 싶다 : 사회주의를 당대 한국 사회의 처지에 맞게 이해하려 한 덕기의 시도가 어떻게 되었을까에 더욱 관심이 있다.

 중요한 것은 - 점이다 : 문학에 대한 정치 우위를 주장하면서 사회주의 이념과 사회 개조의 당위성을 작품화하려 했던 카프 계열의 문학이 1930년대에 이르러 퇴조하고, 작자 자신과 당대 사회를 형상화하려는 문학이 주류가 되었다는 지적이다.

 이해와 감상

 이 글을 통해 필자는 두 작품에 드러난 두 작자의 차이점을 말하고 있다. 이 평론은 선입견을 배제하고, 작품의 실증적 분석을 통해 작자의 세계관과 등장 인물의 성격이 대응관계에 있다는 점을 치밀하게 밝힘으로써 설득력을 갖고 있다.

 염상섭과 채만식은 이른바 가족사 소설의 형식을 통해 식민지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 낸, 1930년대의 대표적인 작가들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필자가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은 두 작가의 공통점이 아니라 그 차이점이다.

 

 염상섭은 민족주의자로서 보수주의적 입장을, 채만식은 사회주의자로서 진보적 입장을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세계관의 차이는 소설 속의 등장 인물인 덕기와 종학을 통해 구현된다는 것이 바로 필자의 주장의 핵심이다. 즉, 사회주의 운동에 적극 투신하는 종학과 그것에 대해 유보적 입장을 취하는 덕기는 두 작가의 이념적 태도를 충실하게 대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이 평론은 작품의 실증적 분석에 의해 작가의 세계관과 등장 인물의 성격을 일 대 일 대응 관계로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심화 자료

 김현(1942.7.29~1990.6.27)

 평론가·불문학자. 본명 광남(光南). 전남 진도 출생. 64년 서울대학 불문과, 67년 동 대학원 불문과 졸업. 71년 서울대학 전임강사가 된 뒤 90년까지 불문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대학 재학 시절인 62년에 평론 <나르시스의 시론(詩論)>을 《자유문학》에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 이후 여러 문예지와 잡지에 평론을 발표했다. 프랑스의 현대문학과 사상, 특히 실존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으며, 실존적 정신분석 방법에 비평의 기초를 두었다. 또한 한국문학사에도 관심을 기울여 《한국 개화기의 문학》(69) 등의 저서를 남겼다. 저서에 《존재와 언어》(64) 《상상력과 인간》(73) 《한국문학의 위상》(77) 《문학사회학》(82) 《분석과 해석》(88) 등이 있으며, 김병익(金炳翼) 등과의 공저 《현대한국문학의 이론》(72), 김윤식(金允植)과의 공저 《한국문학사》(73) 등이 있다. 89년 제1회 팔봉비평문학상을 수상했다.

 가족사 소설

 한 가족의 흥망 성쇠 내력을 다룬 소설을 말하며, 단순히 가족 구성원 간의 문제를 다룬 소설들과는 다르게 취급된다. 가족사 소설은 가족 내의 개인보다는 가족이라는 사회 집단의 움직임과 변화 양상을 중시하며, 여러 대에 걸친 가족의 역사를 추적하기 때문에 연대기 소설의 형태를 띠게 된다. 서양에서 골즈워디의 '포사이트 가의 기록' , 토마스 만의 '부덴브루크 일가' , 마르탱뒤 가르의 '티보가 사람들' 등이 가족사 소설에 해당하며,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1930 년대에 비로소 정착되었는데, 염상섭의 '삼대' , 채만식의 '태평 천하' , 김남천의 '대하' 등이 대표적 작품이다. 최근에는 박경리의 '토지' 가 이 계열의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가족사 소설의 장점은 가족의 역사를 통하여 시대적 변천과 역사의 변모 양상을 밝혀낸다는 점이며, 특히 대가족 제도를 유지해 왔던 시대에 알맞은 소설 양식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가족의 개념이 점차 와해되고 있는 최근의 상황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형식이기도 하다.

 민족주의 民族主義 (nationalism)

민족에 기반을 둔 국가의 형성을 지상목표로 하고, 이것을 창건(創建) ·유지 ·확대하려고 하는 민족의 정신상태나 정책원리 또는 그 활동으로 민족주의는 본래 매우 비합리주의적이고 다의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이것에 일률적인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다.

 

민족주의가 성립하는 데는 2가지 조건이 필요하였다. 첫째, 세계는 하나라고 하는 이상과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세워진 세계제국(世界帝國)이 무너지고 많은 독립국가가 나타나, 종래의 보편적인 종교 ·문화를 대신하는 새로운 민족적인 종교 ·문화를 창조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둘째, 이렇게 이룩된 독립국가를 국민들이 ‘우리들의 국가’로서 받아들여 사랑하고 이에 긍지를 느끼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첫째 조건은 16세기 이후 그리스도교 세계의 통일이 무너지고 로마교황이나 신성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지 않는 많은 독립국가가 나타남으로써 충족되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에 나타난 독립국가는 그 대부분이 절대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국민들이 이것을 ‘우리들의 국가’로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거리가 먼 존재였다. 왕은 절대군주로서 절대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국민은 전혀 권리를 가지지 못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국민이 그들의 국가를 ‘우리들의 국가’로 느끼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군주의 절대권을 제한하거나 배제하여 국민의 권리를 신장시킬 필요가 있었다. 진정한 의미의 ‘국민의 국가’가 되어야만 비로소 국민은 국가에 애착을 느끼고 긍지를 갖게 되며, 조국(fatherland)이라고 부르게 되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최초로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난 곳은 17세기경의 영국이었다. 그러므로 민족주의를 세계에서 제일 먼저 꽃피운 나라도 영국이라 할 수 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국가

1848년 K.마르크스는 《공산당선언》 중에서 "프롤레타리아에게는 조국이 없다"고 말하였으나, 그 프롤레타리아가 아이러니하게도 1917년 러시아혁명에 의하여 그들의 조국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소련을 그들만의 조국이 아니라 온 세계 프롤레타리아의 조국이라고 선전하였다. 그러나 그때까지 소련 한 나라뿐이었던 프롤레타리아의 조국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복수(複數)로 늘어났다. 이에 따라 민족주의문제는 사회주의 세계에서도 무시될 수 없는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의하면, 사회주의국가간의 관계를 규율하는 원리는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이지 민족주의가 아닌 것으로 되어 있다. 또,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오직 상대국의 독립과 주권을 존중하고 그 내정에 간섭함이 없이 호혜평등의 입장에서 물심양면의 형제적 원조를 제공하여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럼으로써 전근대적 농업국에 머물던 후진국도 더불어 선진공업국으로 성장해 감으로 민족주의가 발생할 여지가 없다고 단정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회주의국가에서 민족주의가 여전히 건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사회주의국가라고는 하지만 현시점에서 그 경제구조가 국민경제로서 조직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기반으로 민족주의가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중·소 대립을 비롯한, 소련의 침공을 받은 아프가니스탄 민족주의자들의 반소(反蘇)게릴라전, 유고슬라비아의 티토이즘, 그리고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의 자유노조운동 등 사회주의국가 사이에서 일어난 각종 이해대립은 이를 잘 입증한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보수주의 保守主義 (conservatism)

급격한 변화를 피하고 현체제(現體制)를 유지하려는 사상이나 태도로 진보주의에 대응하는 개념이다. 주로 이데올로기적인 근대 정치사상의 특정 조류를 가리킨다. 사회심리학적 의미에서 인간의 어떤 심리적 태도 또는 성향(性向)을 가리키기도 한다. 양자는 상호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명확히 구별되어야 한다. H.세실은 인간의 특정적 심리태도를 의미하는 보수주의를 '자연적 보수주의'라 하여 그것을 소문자(小文字)로 썼고, 특정의 사상적 조류를 의미할 때는 '정치적 보수주의'라 하며 대문자(大文字)를 사용하였다.

 

K.만하임도 심리적 보수주의를 '전통주의'라 하였으며, 사상적인 것을 '보수주의'라 불렀다. 실제로 정치적 진보주의자가 사생활 영역에서는 보수적 행동을 취한다거나, 정치적 보수주의자가 사생활 영역에서는 진보적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즉, 어떤 개인의 심리적 태도는 반드시 그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심리적 보수주의

미지의 것을 두려워하고 변화를 싫어하여 자기가 익숙한 것에 집착하는 점에서, 변화를 좋아하고 낡은 것을 버리고 싶어하는 진보주의와 대립된다. 즉, 한쪽은 현상을 고집하는 데 반하여 다른 한쪽은 현상의 변화를 요구하는 심리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는 모든 개인이 많든 적든 나타낼 수 있는 것으로 대개 기계적인 반사행동으로 나타나며, 그러한 행동형식은 미리 예측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어느 고장에 철도가 신설된다고 할 때 그 고장의 보수적인 사람들이 나타낼 심리적 반응은 거의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

 

심리적 태도로서의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는 서로 대립되는 것이지만, 상호간의 작용에 의하여 사회생활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사실상 이러한 심리적 태도는 여러 농도로 존재하고 있어 반동주의와 급진주의의 양극 사이에 보수주의와 진보주의가 스펙트럼의 빛과 같이 제각기의 뉘앙스를 가지고 끼여들어 있다. 반동주의·급진주의는 모두 현상의 과격한 변화를 바라는 심리적 태도이지만 전자는 '뒤쪽을 바라보는 변화'를, 후자는 '앞쪽을 바라보는 변화'를 바라고 있다. 보수주의가 반동주의에 접근하는 것은, 미지의 것보다는 익숙한 것으로 향하려는 '뒤쪽을 바라보는 변화'를 택하는 경향을 가졌기 때문이다. 심리적 보수주의가 현상을 고집하려는 것은 안정을 바라기 때문이며, 그것은 A.B.울프가 말하였듯이 '안전제일주의'를 본질로 하는 것이다. 예컨대,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는 것과 같다.

 

인간은 관례에 따라서 행동하기 위하여 안전을 구하려 하고, 그 안전을 그의 생활환경의 현상유지에서 찾아내는 것이다. 따라서 심리적 태도로서의 보수주의는 합리적인 태도라기보다는 차라리 감정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현상에 대한 감상적인 애착 또는 현상에 대한 어떤 종류의 가치감정에 동기가 있고, 그 감정은 습관에 의하여 형성되며 공포심에 의하여 자극되는 것이다. 이 습관과 공포심은 보수주의의 두 가지 심리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어떤 개인에게 주어진 생활환경이 그를 만족시키는 상태에 있기 때문이며, 심리적 태도로서의 소수주의는 인간의 생활환경에 대한 조정(調整)과 적응(適應)의 과정에서 생긴다. 따라서 그것은 어떤 특정적인 교육이나 연령의 영향에 따라서 강화된다. 특히 노령(老齡)이 육체의 쇠약에 따라 비융통성·환멸감과 같은 심리적 변화를 초래하여 보수주의적 태도를 강화한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이데올로기적 보수주의

 

이데올로기면에서 생긴 보수주의에 대해 살펴본다.

 

⑴ 근대 정치사상의 특정 조류로서의 보수주의는 앞에서 말한 심리적 태도를 기반으로 하여 생겼다. 즉, 역사의 어떤 단계에서 각자가 가진 보수주의적인 심리적 태도가 표면에 떠올라, 특정한 사상적 조류를 응집(凝集)시키는 중심이 되어 이데올로기로서의 보수주의가 생긴 것이다. 각자의 보수주의적 심리태도는 각각 특정된 개인적 또는 계급적 이익과 무관하게 부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이익이 동기가 되어 부상한다. 그것은 '소유의 안전을 바라는 욕망'에 뿌리를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이데올로기로서의 보수주의가 생긴 다른 이유는, 인간의 또 하나의 심리적 태도인 진보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진보주의의 성립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즉, 진보주의라는 사상적 조류가 성립되자, 그때까지 잠들어 있던 각자의 심리적 태도가 능동적인 것이 되어 의식적으로 그런 사상적 조류에 반대하는 운동으로서 보수주의가 성립되었다.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는 각각 '질서의 당'과 '진보의 당'으로 나뉘어 대립되나, 그 관계는 역사적 제반조건에 따라 제각기의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이데올로기로서의 보수주의는 근대 시민계급의 대두와 사회구조의 변화를 전제로 하여, 1789년 프랑스혁명 발전과정에서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시민계급이 당시의 진보주의인 자유주의 또는 민주주의의 역군으로서 등장한 데 대하여 귀족계급이 보수주의라는 개념으로 총괄되는 사상적 조류를 낳았던 것이다. 귀족계급은 그들의 사회적 토대인 토지소유의 영향하에 이미 심리적 태도에 있어서 보수주의의 보고(寶庫)였다고 할 수 있으나 그 토대에 동요를 느끼게 되자 '능동적인 공포심'에 쫓겨서 의식적으로 시민계급의 진보주의에 대하여 보수주의를 취하였다. 그러나 보수주의가 '1789년의 이념'에 비하여 하나의 사상적 조류로서 확고한 지위를 가지게 된 것은 19세기 초의 왕정복고시대이다. 그 무렵 보수주의라는 말이 비로소 정치적 용어로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즉, 1818년 왕당주의운동(王黨主義運動)의 기관지가 《르 콩세르바퇴르(Le Conservateur)》라고 명명되면서부터 보수주의라는 말이 정치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는 곧 유럽 전체에 퍼졌고, 그것이 '1789년의 이념'에 대항하는 반혁명적 운동의 구호가 되었다. 영국에서 토리당을 보수당이라 칭하게 된 것은 1835년의 일이었다.

 

이데올로기로서의 보수주의를 사상사적(思想史的)으로 보면 프랑스혁명 이후의 역사적 단계에서 성립된 특정의 사상 조류이고, 그 세력은 봉건귀족계급이었다는 점을 특색으로 들 수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는 귀족계급의 사회적 기초가 붕괴됨과 동시에 보수주의의 역사적 의의도 상실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근대에 있어서 보수주의의 역사적 기원을 찾는 뜻에서는 타탕한 말이라 할지라도, 그 후의 사정은 달라졌다. 특히 1848년 이후로 종전의 진보주의인 자유주의 또는 민주주의가 '사회주의'의 대두에 따라 보수적인 경향을 띠게 되었다. 또 19세기 후반부터는 시민계급을 세력으로 하는 새로운 보수주의가 재생되었기 때문에, 이데올로기로서의 보수주의를 단순히 귀족계급의 사상적 조류라고 한정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⑵ 근대에 보수주의라는 사상적 조류를 최초로 정식화한 사람은 E.버크이고, 그 후 보수주의자들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버크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버크의 저서 《프랑스혁명의 고찰》(1790)을 비롯하여 《새로운 휘그주의자의 옛 휘그주의자에 대한 어필:Appeal from the New to the Old Whigs》 등 일련의 저서는, 프랑스혁명의 영향을 받은 영국의 급진적 민주주의운동에 대한 '능동적인 공포심'에 쫓긴 결과로 쓰여진 것이다. 그것들은 '1789년의 이념'에 대한 가장 힘찬 저항이었을 뿐만 아니라, 보수주의 최초의 이데올로기적 표현이었다. 보수주의는 원래 어떤 특정적인 역사적 상황에 대한 응답으로서 나온 것이므로, 그 본래의 모습은 방어적인 것이다. 그것은 사회구조의 현상유지를 위하여 현체제에 대한 도전에 방어의 태세를 취하는 것이다. 따라서 보수주의가 이데올로기라는 면에서 문제되는 것은, 현제도가 어떠한 제도이건 그 제도 자체를 정당화하려는 점에 있다. 보수주의가 현제도를 방어하려는 이유는 조상들이 걸어온 길을 벗어날 경우에는 안전이 위협을 받기 때문인 것이었고, '안전' 그 자체는 특정인이나 계급의 이익과 결부된 것이었다. 따라서 보수주의자의 '현제도 방어'는 주어진 역사적 상황에 대한 조정과 적응 과정에 불과한 것이고, 여기에서 F.J.C.헌쇼가 지적한 바와 같이 보수주의적인 소극성과 그 강령(綱領)의 불확실성이 나타난다. 그것은 이데올로기로서의 보수주의가 일관된 사상체계를 가지지 못하고 무체계성(無體系性)을 특징으로 한다는 것을 뜻한다.

 

K.만하임에 의하면, 보수주의의 무체계성은 사고(思考)형식의 문제이다. 즉, 근대의 사회구조 변화에 대하여 진보주의자는 그것을 긍정하여 현존 제도의 전체적인 개조를 생각하기 때문에, 그 사고형식은 필연적으로 추상적·체계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는 변화를 부정하고 현제도에서 만족을 느끼며 그것을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의 사고방식은 구체적일 뿐 체계적인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보수주의는 개개의 구체적인 사실만을 문제로 삼아 기껏해야 그것을 다른 개개의 사실로 바꾸어 놓을 뿐이므로 그들에게는 '유토피아'가 없다. 그러한 뜻의 이데올로기로서의 보수주의는 S.P.헌팅턴이 말한 바와 같이 '제도지향적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다.

 

보수주의의 내용을 간단히 정식화(定式化)할 수는 없지만, 형식적으로 보면 세 가지 원리, 즉 ① 현재에 대한 변화를 부정하는 '보존의 원리' ② 과거의 것을 현대에 이용하려는 '역행의 원리' ③ 현재의 것에서 유기적으로 생기는 '진보의 원리'를 결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⑶ 19세기 후반부터 시민계급 세력에 의한 보수주의가 재생한 것은, 사회구조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보수주의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동시에, 보수주의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문제를 던지고 있다. 보수주의는 종래에 주로 역사적 기원에 착안하여 귀족계급의 이데올로기로서, 시민계급의 진보주의(자유주의)와 대립되는 것으로 생각하여 왔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는 그러한 대립이 반드시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헌쇼가 지적한 바와 같이, 현대에는 시민계급의 보수주의와 노동자계급의 진보주의(사회주의)가 대립되고 있다. 최근 미국에서 논의되고 있는 보수주의 문제도 그러한 견지에 입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대립의 변화는 과거에 시민계급세력이던 자유주의가 새로운 역사적 상황하에서 보수주의로 이행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헌팅턴은 보수주의를 '위치(位置) 이데올로기'라 하여, 그것이 어떤 사회집단(계급)의 이익을 반영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어떤 사회집단이 다른 집단에 대하여 가진 특수한 관계의 존재를 반영하는 이데올로기라 생각하고 있다. 이데올로기로서의 보수주의의 기능은 그 성격이나 사고형식과 더불어 좀더 규명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개혁<reform>(改革)

정치·사회상의 구(舊)체제를 합법적·점진적 절차를 밟아 고쳐 나가는 과정. 즉, 사회질서의 개선 또는 구제(救濟)가 특정한 제도·행동 및 조건의 개조를 통하여 성취될 수 있을 때, 사회제도 및 정치체제의 본질적인 요소를 유지하면서 일부분만을 사회의 발전에 적합하도록 변혁시키는 것을 말한다. 개혁이 기존의 체제나 추세와 조화를 이루면서 부분적이고 한정된 변혁을 꾀하는 것이라면, 혁명은 기존의 사회제도 또는 정치체제를 전면적으로 변혁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개혁은 기존의 체제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사회적 모순을 제거하는 것이며, 이로써 기존체제의 붕괴를 방지하려는 것이다.(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철학에서의 진보

일반적으로 과학에는 진보가 있어도 철학에는 진보가 없다고 말한다. 물론 철학에는 다른 학문의 경우와 같은 의미에서의 진보가 없음은 부정할 수 없다. 다른 학문의 경우에는 일정한 대상이 정해졌고 따라서 하나의 학문은 언제나 같은 대상을 연구하고 있기 때문에, 연구를 계속함에 따라 점차 그 대상에 관해서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고, 또한 지금까지의 지식이 그릇된 것임을 알게 되면 그 잘못을 고쳐 올바른 지식을 증대시킬 수 있다.

 

이렇게 해서 학문은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삼아 점차 진보하고 발전할 수 있게 된다. 이에 반해 철학의 경우는 일정한 대상이 없기 때문에 다른 학문의 경우와 같은 진보나 발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떤 철학은 스스로 선택한 대상에 관해서 여러 가지로 사색하고 연구를 계속한다. 그러나 그뒤를 이은 철학은 전혀 다른 사항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을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연구의 대상이 달라지게 되면 그 때까지의 철학은 근본적으로 무너지고 철학은 완전히 새로운 지반에서 다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철학은 이와 같이 그 이전의 철학을 끊임없이 근본적으로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철학에는 모든 의미에서 진보·발전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철학은 오히려 그 이전의 철학의 지반 자체를 반성하고 그 지반을 무너뜨려 새로운 지반 위에 새로운 입장의 철학을 구축한다. 이와 같은 새로운 지반이 끊임없이 새로 발견되고 있다는 점에 철학의 진보가 있는 것이다.

 

철학사상(史上) 철학의 대상이 여러 가지로 변화해 왔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거니와 그 변화가 제멋대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 이전의 철학이 딛고 섰던 지반을 반성함으로써 지금까지 연구해 온 철학의 대상이 실은 최선(最善)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자각하고 이 자각에 의해 새로운 대상이 철학의 대상으로 선택되어 왔다. 따라서 철학의 대상이 변화해 왔다는 바로 그 점에 어떤 의미에서의 철학의 진보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철학사상 위대한 철학은 모두가 새로운 지반을 발견하고 새로운 입장에서 철학의 문제를 탐구하였다.

 

언제나 근원적인 문제에 관해 회의를 느끼고 과거의 철학의 지반을 무너뜨리는 데 철학의 본질이 있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 다른 학문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철학의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철학의 연구는 철학사(哲學史)의 연구와 별도로 생각할 수 없다. 현대의 철학 문제를 이해하는 데도 그 문제가 지금까지의 철학에 대한 어떤 반성에서 생긴 것인가 하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사회주의 社會主義

사회사상으로서 볼 때 자본주의의 경제적 원리인 개인주의를 사회주의로 대치함으로써 사회를 개조하려는 사상 또는 운동으로 사회주의란 말의 기원에 대하여는 이설이 많다. 1826년 영국에서 R.오언의 제자들을 가리켜 사회주의자라고 불렀고(브리태니커백과사전), 사회주의란 말은 1927년 런던의 어떤 조합 기관지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프랑스의 사회사상가 P.르루는 “나는 사회주의란 말을 사용한 최초의 사람이다. 그것은 당시로서는 새로운 말이었으나 대단히 필요한 말이었다. 나는 이 말을 개인주의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처음으로 사용하였다.”(인성론)고 말하고 있으며, 《브리태니커백과사전》도 “개인주의의 반대말로서의 사회주의란 말은 프랑스의 르루와 J.레이노의 《신백과전서(新百科全書)》 등 저서에 의하여 일반화되었다.”고 쓰고 있어서, 사회주의란 말이 개인주의의 반대말로서 르루에 의하여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 말을 만들어 낸 연대는 밝히지 않고 있어서 단정하기 어려우나, 사회주의란 말이 처음으로 사용된 1926년보다 뒤라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개인주의의 반대말을 새로 만들어 낼 필요가 어디에 있었는가. 자본주의의 경제체제는 사적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고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자유경쟁을 수단으로 삼고 있는 제도로서, 개인의 소유, 개인의 경쟁으로 되어 있는 경제적 개인주의의 제도이다.

 

그런데 19세기 사회사상가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여러 모순과 병폐들, 즉 생산의 무정부성 ·자본의 집중 ·자원의 낭비 ·실업과 빈곤의 증대 ·주기적 공황 ·제국주의와 전쟁 등이 나타나는 것은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인 개인주의에 근본원인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를 개조하기 위하여서는 개인주의를 폐지하고 반대 원리로 대치해야만 된다고 생각했으므로, 사회주의란 말이 개인주의의 반대말로서 새로 만들어져 나오게 되었다.

 

이리하여, 사회주의는 처음에,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와 사회적 관리의 수단에 의하여 자유 ·평등 ·사회정의를 실현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상 또는 운동으로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와 사회적 관리를 주장하는 사상의 종류는 19세기 이후만으로도 200여 종에 달할 정도로 많으며, 이들의 주장은 세세한 차이점은 있으나, 1950년 이전에 나타난 모든 사회주의는 사회개조의 근본방법을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와 계획경제에서 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1951년 7월 《프랑크푸르트선언》이 나옴으로써 사회개조의 방법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기 이전의 고전적 사회주의에 있어서, 사회주의는 일반적으로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를 기초로 하는 사회개조의 사상을 뜻하는 것으로 상식화되었다.

생산수단의 공유는 사회개조의 유일 ·절대적 방법으로 여겨짐으로써, 이 제도를 사회주의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굳어지는 한편, 이 제도에 의하여 실현될 것으로 기대되는 사회, 즉 자본주의보다 한층 훌륭한 사회를 의미하는 말로도 쓰이게 되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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