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식민주의 사관의 뿌리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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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주의 사관의 뿌리 /  한영우

식민주의 사관이란 곧 식민주의 한국 사관을 말한다. 이것은 일제의 어용 학자들이 우리 나라에 대한 일제의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왜곡된 한국 사관인 것이다. 이 글은 일제의 한국사 왜곡의 과정을 ‘식민 사관’의 형성 배경과 목적을 통해 밝혀 내고 있다 우리 나라와 일본은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 볼 때, 판이한 양상을 띠고 있다. 우리의 역사는 동아시아의 평화를 희구하고, 합리적 역사를 위한 정신과 안목을 기반으로 중국의 문화적 동화력을 극복하고 주변국의 끊임없는 위협을 막아 내어 독자적인 역사의 터전을 마련해 왔다. 그러나 일본은 한반도로부터 이주해 간 이주민들에 의해 고대 문화와 고대 국가가 이루어졌다. 문화적으로 변경에 위치한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특수한 역사 전개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일본 역사의 전개 과정은 대한(對韓) 콤플렉스로 이어지고 결국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일제는 단계적으로 우리 나라를 침략하게 되고, 이러한 행위의 이론적 뒷받침을 위해 식민 사학을 진흥하게 된다. 왜곡과 날조의 표본인 ‘조선사’도 이러한 과정에서 쓰여진다. 당시의 우리 나라 개화파 지식인들조차도 ‘조선사’의 역사 왜곡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은 우리 개화파 지식인의 한계이기도 하다. 일제의 이러한 역사 왜곡은 한국 근대사의 곳곳에 뿌리내려져 민족적 열등감과 패배감을 느끼도록 해 왔다. 그리고 식민 사학의 잔재가 아직도 한국사의 곳곳에 잔존해 있는 실정이다.


이제는 일제의 ‘식민 사학’이 강조해 온 한국사의 정체성과 타율성을 극복할 민족의 근대사학을 확립해 가야 할 시기이다. 식민 사학을 극복할 만큼 한국사의 연구도 상당히 성숙해졌다. 제대로 된 한국사를 통해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처해야 할 것이다.

본문 읽기
어느 나라든지 역사 의식은 그 국민의 문화적 생리 위에서 형성되는 것으로 문화 생리를 떠나서는 역사 의식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역사적으로 볼 때, 중국.한국.일본은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에 속해 있으면서도 문화 생리가 서로 달라서 이에 따라 역사의 식도 적지 않은 차이점을 지녀 왔다. 한국과 일본을 비교할 경우, 한국 사학은 샤머니즘(shamanism)과 연결된 고대 신앙을 바탕으로 종교적.신화적 역사 서술에서 출발했지만. 고려 조선조를 거치면서 유교적 합리 정신에 입각한 역사 서술이 깊은 뿌리를 내려 왔다.


그리하여 조선조의 사서들은 비록 국사를 쓰지만 동아시아의 국제 평화 ------ 이른바 ‘사대 교린(事大交鄰)’ ----를 희구하는 안목이 들어 있고, 단군의 수명이 일천 몇 년이라고 되어 있는 단군 신화를 재해석하여, 일천 몇 년은 단군 한 사람의 수명이 아니라 단군 왕조의 역년(曆年)으로 해석하는 등 보다 합리적인 역사를 엮었다. 바로 그러한 정신과 안목이 고대 문화를 청산하고 보다 세련된 중세 문화를 일찍이 건설하는 힘이 된 것이고, 중국의 무서운 문화적 동화력을 이겨 내고, 일본이나 북방족의 끊임없는 군사적 위협을 극복할 수 있는 문화 능력으로 작용하였다.


일본의 경우 한반도에서 건너간 이주민들에 의해서 고대 문화와 고대 국가가 건설되었고, 우리가 건네 준 불교.유교 문화에 의해서 중세 문화가 성장하였지만, 동아시아 문화권의 변경(邊境)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과 외부의 침략을 받은 경험이 거의 없는 정치적 조건 등이 작용하여 고대 문화의 생리를 오랫동안 축적하면서 중세와 근대로의 전환을 맞이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일본 역사의 특수한 전개 과정은 한편으로 한반도 및 대륙 문화와의 문화적 성장 단계의 격차에서 오는 열등감으로 유도되고, 그 열등감이 반사적으로 고대적 생리와 연결되어 비합리적으로 자기 전통을 미화하고. 고대 문화의 직접 전수자인 한반도인을 모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일본인의 대한(對韓) 콤플렉스는 고대와 중세를 통해서는 지방 세력 단위의 왜구의 침략 형태로 나타났지만, 서구의 기술 문명을 받아들인 뒤에는 국가 정책 차원의 침략 형인 군국주의(軍國主義)와 제국주의(帝國主義)로 흐르게 된 것이다. 같은 제국주의라도 서구보다 일본이 더 질이 낮은 것은 문화 생리의 성격이 서고와 다른 데서 오는 차이이다.


벌거벗은 왜구 떼들이 신라 변경을 수없이 노략질하던 7세기경에 일본 국내에서는 커다란 정치적 변화가 나타났다. 반도계 지배 세력을 밀어 내면서 이른바 천황 체제가 수립되고, 그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 정리 작업으로서 뒤에 <일본서기(日本書紀)>라는 역사책이 편찬되었다. 이 책은 720년에 편찬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뒤에 나온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백제 서기>,<백제 신찬>등 백제측 사서(史書)를 많이 참고하여 편찬되었다고는 하지만, 이 책은 너무나 근거 없는 허구적 사실들을 많이 수록하여 훗날 일본인 학자들조차도 문학 작품으로 간주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그 허구적 기사 가운데 오늘까지도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떠받들어지고 있는 것이 바로 임나 일본부(任那日本府)와 진쿠 황후(神功皇后)의 신라 정벌에 관한 기사이다. <일본 서기>를 믿지 않는 이라도, 이 한국 관계 기사만은 의심치 않는다.


우리의 입장에서 본다면 한국계 지배 세려을 alfd 내고 새로운 천황 국가를 건설한 일본인의 증오와 보복심이 반영된 것이 바로 <일본 서기>이다. 왜구가 물질적인 침략 형태라면, <일본 서기>는 정신적인 자기 합리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서기>가 위와 같은 성격의 것이라 해도 그것이 나왔을 당시에서는 우리 사학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12세기 초에 편찬된 <삼국사기>에는 임나 일본부나 진쿠 황후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외적의 침략을 낱낱이 기록한 <삼국사가ㅣ>가 그러한 사실들을 빠뜨릴 이유가 없다.


에도(江戶) 시대 말기, 즉 막부(幕府) 말기에 일본에서는 이른바 국학 운동이 일어나면서 <고사기(古事記)>,<일본 서기>등 고전 연구가 활기를 띠었는데, 이에 따라 한국 연구도 본격화되었다.


그들은 <일본 서기>를 그대로 신빙(信憑)하여 우주 창생에서 일본 건국에 이르는 과정을 종교적으로 서술하고, 태고 때부터 일본이 조선을 지배했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국학 운동의 이면에는 일본 주자학자들의 퇴계(退溪) 숭상에 대한 반발도 작용하였다. 이보다 앞서 18세기를 전후해서는 우리 나라 실학과 비슷한 고학(古學) 운동이 일어나서 부국 강병론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고학과 국학 운동은 쇄국에서 탈피하여 대외 팽창ㅇ으로 나아가려는 조짐을 갖기는 마찬가지였고, 그러한 배경에서 마침내는 메이지(明治) 초기에 이르러 한국(韓國)을 정벌하자는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이 대두하게 된 것이다.


1876년에 이토 히로부미가 내각을 구성하자 다음 해 동경 제국 대학을 세우고, 이어 국사학과를 설치하였는데, 그 목적은 한국 및 대륙 침략을 두시받침하는 식민 사학을 진흥시키기 위함이었다. 말하자면 에도 이래의 국학 전통을 국책으로 진흥시키자는 것이다. 1879년에 설치된 경도 대학도 비슷한 취지에서였다. 동경 제대에는 국사학과 외에 사학과가 있어 독일 근대 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랑케의 제자 리스를 데려다 주임 교수로 앉혔으나, 그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자 국사학과를 따로 설치한 것이다.


제국 대학을 설치한 보람이 있어, 그 졸업생이자 교수인 하야시 다이스케가 1892년에 7권의 <조선(朝鮮史)>라는 최초의 한국사 개설서를 펴냈다. 이 책은 서양식 시대 구분법을 따라 상고(上古) , 중고(中古) , 근고(近古) , 근세(近世) 등으로 시대를 구분하고, 편(篇) , 장(章) , 절(節)로 항목을 나누는 등 외형은 근대 사학의 체제를 따랐으나, 내용은 에도 시대 국학자나 그 외 동시대의 시게노 , 구메 , 호시노 등이 집필한 <국사안(國事眼)>(1890)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EK른 것이다. <조선사>에서는 단군을 출운 신화에 나오는 스사노오노미고토의 동생이라 하여 이른바 일선 동조론(日鮮同祖論)을 주장하고, 소위 임나일본부가 가야를 식민 통치했다는 설을 그대로 채용하엿으며, 진쿠 황후가 신라를 정복하고 백제의조공을 받았다고 하였다.


또, 한국사의 시발(始發)을 기자 조선(箕子朝鮮)으로 설정하여 조선 왕조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서술하였다. 말하자면, 이책은 그 때까지 연구되고 축적되었던 왜곡된 한국사 연구와 식민 사관을 개설서로서, 종합 , 정리하고 체계화시킨 것이다. 왜곡된 한국사의 틀은 이미 이 책에서 잡혀진 것이다.


이 책은 우리 나라에 소개되어 개화기 역사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 당시의 학부 교과서 편찬의 핵심 인물이자 독립 협회의 회원이기도 했던 김택영 , 현채 , 장지연 등 저명한 사가들의 저서에서는 진쿠 황후의 신라 정복과 스이닌 덴노의 임나부 설치 등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현채 같은 이는 <조선사>를 극찬하면서 이를 번안(飜案)하여 <동국사략(東國史略)>(1906)을 펴내기도 하였다. 개화파 지식인들은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에는 비상한 관심을 쏟았으나 당시의 일본에 대해서는 지나친 낙관과 호의를 가졌다. 물론, 그들이 일인 사학이ㅡ 영향을 받았다 해서 일인들과 완전히 동일한 국사관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개화기 역사가들은 고대로부터 우리가 스승의 위치에서 일본을 문화적으로 계도(啓導)해 준 것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고, 우리 나라가 중국의 속국이 아ㄴㄴ 자주 독립국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기자 조선을 독립 국가로 재해석하고, 단군 조선의 이치도 중요시하였다.


그러나 당대의 이론 문화, 특히 물질 문화가 우리보다 앞섰다는 사실에 대한 지나친 신뢰가 일본의 정신 문화까지 신뢰하는 방향으로 나간 것이 큰 잘못이었다. 독립 협회 같은 진보적 단체에서조차 일황년기(日皇年紀)를 국사에 병기(倂記)하고, 일본을 ‘동종 동문(同種同文)의 나라’로 쓴 <대동역사(大東歷史)>(최경환.정교 지음)를 대표적 사서로 널리 보급하였으니, 이는 개화파 지식인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에도 시대의 일본 문물의 급속한 성장을 보고 일본을 신뢰하는 태도를 갖게된 것은 실은 개화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다산 정약용 같은 실학의 거장도 18세기 말에 쓴 <일본론>에서 일본에 대한 낙관혼을 펴고 있다. 일본에서 주자학을 비판하는 고학이 일어나고 기술 문명이 급속히 성장한 것을 보고 일본이 이제 왜구적 체질을 청산한 것으로 오해하였다. 다산과 같이 애국적이고 진보적인 지식인도 일본 문화의 생리를 철저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산은 뒷날 강진에 유배된 시절에야 일본의 침략 위험성을 다시 느꼈지만 처음에는 그것을 간파하지 못했다. 이제 그 같은 오류가 일본을 가장 많이 안다고 자부하던 개화파 인사들에게서도 똬시 반복되고 있었던 것이다.


1905년에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일본의 식민 사학은 한반도뿐 아니라 만주 침략까지를 목표로 하여 더욱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한국사를 만주사와 한 묶음으로 묶어서 해석하는 이른바 만선 사관(滿船史觀)이 풍미하여, 한국사를 만주사의 부용(附庸)적 존재로 격하시켰다. 한편, 후쿠다 도쿠조라는 경제 학자는 1907년에 낸 책자에서 한말(韓末)D의 사회가 10세기 경의 일본 고대 사회와 비슷하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폈다. 그 후 사뢰 경제 사가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한국사의 정체성(停滯性)을 강조하면서 일본에 의해서 비로소 근대화를 경험했다는 결론을 유도하였다. 일본이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주장은 식민 사관의 중요한 뼈대의 하나를 이루었다.


1907년에 한국을 반식민지로 만든 일제는 학부의 교과서 편찬에 관여하여, 자주 독립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서술을 금지시켰고, 애국적인 출판물을 대량으로 금서로 지정하였다. 이와 같이 일제의 역사 왜곡이 노골화되고 국권이 거의 침탈된 위기의 상황에서 분연히 일어나 제국주의와 식민 사학을 규탄.비판하고 민족주의 입장에서 근대 사학을 수립한 이가 박은식. 신채호 등이다. 박은식은 근대사에서, 신채호는 고대사에서 각각 국사의 정맥을 세우는 데 크게 공헌하였으니, 국사를 찾음은 곧 나라를 구하는 정신 운동이었다.


1910년 강점(强占) 이후로 일제의 한국사 왜곡은 연구와 교육의 양면에서 유례 없이 강화되었다. 총독부 산화에 조선사 편수회를 두어 엄청난 경비와 인력을 동원하여 방대한 조사 자료집과 사서를 간행하였다. 박은식의 <한국 통사>(1915)와 같은 애국적 사서가 중국에서 유입되어 읽히고, 3.1운동의 거족적 항쟁이 일어나자 일제는 역사 왜곡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였다. 그들은 고대사를 왜곡하는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사 5,000년의 전 역사를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고, 그러한 역사를 배우는 이로 하여금 한없는 민족적 열등감과 패배감 그리고 자조(自嘲) 의식을 느끼도록 유도하였다.
한국은 지리적으로 반도이므로 숙명적으로 대륙 국가의 강포(强暴)한 지배를 받아 왔는데, 일본의 지배를 받음으로써 비로소 온정적인 품안에 들었다고도 하고 한국문화는 모두 중국 문화를 받아들인 것에 불과하여 독창성이 없다고 하였다. 고려와 조선은 귀족의 횡포로 일관하다가 망했고, 당쟁은 고칠수 없는 민족성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들의 역사 연구 방법은 겉으로는 과학적인 것으로 위장하여 문헌 고증을 중시하고 고고학이나 금석학(金石學).언학적 해석 방법을 동원하였지만, 고대사 연구의 주요 자료인 광개토 대왕릉비의 글자를 조작하고, 유물을 날조하고, 국보적 문화재를 실어 가는 등 온갖 학문적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들의 생리는 옛날의 왜구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물론, 일인 학자 가운데에는 비교적 양심적으로 한국사를 연구한 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 차이라는 것도 오십보 백보의 차이이지 일본인의 입장과 그 학문 정통을 근본적으로 떠난 것은 아니다. 가령, 한국의 곡선미에 심취하여 미술사를 정동했던 야나기 무네요시의 경우, 그가 곡선미를 아무리 찬탄했다하더라고 그 곡선이 한국인의 고난과 슬픔의 표현이라고 해석한 것은 식민지인의 패배주의에 감상주의(感傷主義)를 보태 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진보적 입장을 취하던 사회 경제 사가의 연구도 예외는 아니다. 우파든 좌파든 한국사의 정체성과 타율성을 강조하는 입장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전후에 일본 내에서는 전전 세대의 식민 사관과 황국 사관을 스스로 비판하고, 한국사를 한국인의 주체적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은 일본을 위해서도 다행한 일이고,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움직임었다. 그러나 그들의 구호가 참신한 만큼 그들의 실제 역사 연구가 신선한 것이냐 하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역시 몸은 그대로이고 옷을 갈아입는 데 지나지 않은 것은 아니가 의심되는 학자도 없지 않다. 시세(時勢)에 응변해서 재빨리 옷을 갈아입은 것은 일인의 장기이다.


우리의 근대 사학은 식민 과의 대결을 통해서 성장해 왔고, 지금도 그러한 전통 위에서 연구되고 있다. 특히, 최근30년 간의 연구 성과는 괄목한 만한 것으로 전 세계 한국학 연구자의 주목을 받고 있다. 적어도 학계의 수준을 가지고 말한다면 식민 사학의 대들보는 이미 무너졌다. 그러나 식민 사학의 뿌리가 워낙 깊고 넓어서 학계나 교육 현장에서 그 잔재가 모두 청산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식민 사학의 잔재를 청산하는 일은 연구와 교육의 양면에서 시급히 강구될 필요가 있으나, 반발적인 구호나 주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데 어려움이 있다. 지금 중요한 일은 학곙를 더욱 격려 지원하고, 새로운 인재를 시급히 양성하여 일본 사학보다 더 높은 수주의 국사학을 확립하는 일이다. 동시에 국사학의 연구 성과를 쉽고 재미있게 대중에서 전달하는 중간 매체의 활동이 좀더 활발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일본이 국수적(國粹的) 방향으로 간다고 해서 침착성을 잃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한 일 관계는 영원한 것이며 종국의 극일(克日)은 우리의 전반적인 문화 수준이 일본을 능가할 때 가능하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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