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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에 대해(시조개론)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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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개론

시조(時調)

 

시조

고려 말기부터 발달하여 온 우리 나라 고유의 정형시. ‘시조’라는 명칭이 언제부터 사용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영조 때 시인 신광수(申光洙)가 그의 문집 ≪석북집 石北集≫〈관서악부 關西樂府〉 15에서 “일반으로 시조의 장단을 배열한 것은 장안에서 온 이세춘(李世春)일세(一般時調排長短來自長安李世春).”라고 한 구절에 보이는 것이 문헌상으로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그 뒤부터는 ‘시조’라는 명칭이 종종 쓰였음을 볼 수 있다. 정조 때의 시인 이학규(李學逵)가 쓴 시 〈감사 感事〉 24장 가운데 “그 누가 꽃피는 달밤을 애달프다 하는고. 시조가 바로 슬픈 회포를 불러주네(誰憐花月夜 時調正悽懷).”라는 구절이 있다.

이에 대한 주석에서는 “시조란 또한 시절가(時節歌)라고도 부르며 대개 항간의 속된 말로 긴 소리로 이를 노래한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시조’라는 명칭은 조선왕조 영조 때에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시조’라는 명칭의 원뜻은 시절가조(時節歌調), 즉 당시에 유행하던 노래라는 뜻이었으므로, 엄격히 말하면 시조는 문학부류의 명칭이라기보다는 음악곡조의 명칭이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 있어서도 그 명칭의 사용은 통일되지 않아서, 단가(短歌)·시여(詩餘)·신번(新潼)·장단가(長短歌)·신조(新調) 등의 명칭이 시조라는 명칭과 함께 두루 혼용되었다.

근대에 들어오면서 서구문학의 영향을 입어 과거에 없었던 문학부류, 즉 창가(唱歌)·신체시(新體詩)·자유시(自由詩) 등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들과 이 시형을 구분하기 위하여 음악곡조의 명칭인 시조를 문학부류의 명칭으로 차용하게 된 것이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시조라는 명칭이 문학적으로는 시조시형(時調詩型)이라는 개념으로, 음악적으로는 시조창(時調唱)이라는 개념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이러한 까닭에서이다.

시조의 형식

문학부류로서의 시조는 3장 45자 내외로 구성된 정형시라고 할 수 있다. 시조는 3행으로써 1연을 이루며, 각 행은 4보격(四步格)으로 되어 있고, 이 4보격은 다시 두 개의 숨묶음으로 나뉘어 그 중간에 사이쉼을 넣게 되어 있다. 그리고 각 음보는 세 개 또는 네 개의 음절로 구성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제 그 기본형을 도시(圖示)하면 다음과 같다.

초장 3·4 4·4

중장 3·4 4·4

종장 3·5 4·3

그러나 이 기본형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상적인 기준형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절대 불변하는 고정적인 제약을 받는 것은 아니다. 우리말 자체의 성질에서 오는 신축성이 어느 정도 허용되는 기준이다.

먼저 음수율을 살펴보면 3·4조 또는 4·4조가 기본운율로 되어 있다. 이 기본운율에 1음절 또는 2음절 정도를 더 보태거나 빼는 것은 무방하다. 그러나 종장은 음수율의 규제를 받아 제1구는 3음절로 고정되며, 제2구는 반드시 5음절 이상이어야 한다. 이 같은 종장의 제약은 시조형태의 정형(整型)과 아울러 평면성을 탈피하는 시적 생동감을 깃들게 한다.

다음 구수율(句數律)을 살펴보면 이광수(李光洙)·이은상(李殷相)은 12구체로 파악한 일이 있고, 이병기(李秉岐)는 초장과 중장을 각각 2구로 보고 종장의 특이성을 살리기 위하여 종장만을 4구로 보아 8구체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안확(安廓)·조윤제(趙潤濟) 등은 6구체를 주장해왔으며, 오늘에 와서는 6구체로 보는 것이 정설로 인정되고 있다.

6구체로 볼 경우의 구수(句數)는 제각기 두 구절씩 짝이 되어 하나의 행(行), 즉 한 장(章)을 이루고 있다. 이상과 같은 음수율과 구수율을 지닌 기준형에 해당하는 모든 시조를 단형시조(短型時調) 또는 평시조(平時調)라고 부르는데, 그 보기는 다음과 같다.

이시렴 브디 갈女 아니가든 못浬쏜냐

無端이 슬튼야 柑의 말을 드럿는야

그려도 하 애도래라 가는 駑을 닐러라

(海東歌謠)

그리고 종장 제1구를 제외한 어느 구절이나 하나만 길어진 것을 중형시조(中型時調) 또는 엇시조(濫時調)라 부르고, 두 구절 이상이 길어진 것을 장형시조(長型時調) 또는 사설시조(辭說時調)라고 부른다. 사설시조는 대개 중장이 길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엇시조와 사설시조의 보기를 차례로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압못세 든 고기들아 뉘라셔 너를 모라다가넉커늘 든다

北海 淸沼를 어듸 두고 이못세 와 든다

들고도 못나勘 情은 네오鑑오 다르랴

(花源樂譜)

개를 여라믄이나 기르되 요 개枷치 얄呱오랴

呱온 님 오며勘暖리를 홰홰치며 魯락 蝎리 魯락 반겨셔 내鎧고

고온 님 오며勘 뒷발을 버동버동 므르락 나오락 캉캉 즈져셔 도라가게 梨다

쉰밥이 그릇그릇 난들 너 머길 줄이 이시랴

(靑丘永言)

이 세 종류 중에서 양적으로 가장 많이 쓰여진 시형은 평시조이다. 그리고 몇 편의 시조가 내용상 연결되어 흔히 같은 제목 아래 쓰여진 경우가 있는데, 이를 연시조(聯時調)라고 한다.

시조의 형성과 전개

(1) 고시조 형성 문학·예술로서의 시조는 14세기경인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에 걸쳐 정제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전하는 시조집 중에는 고구려의 을파소(乙巴素)나 백제의 성충(成忠), 신라의 설총(薛聰) 등의 작품이라고 실려 있는 경우가 있으나 거의 인정하지 않는 것이 현 학계의 공통된 견해이다.

현재 남아 있는 시조집에서 비교적 초기에 속하는 작가들을 들어보면 고려시대의 작가로는 충숙왕 때의 우탁(禹倬)과 충혜왕 때의 이조년(李兆年), 공민왕 때의 이존오(李存吾)·길재(吉再)·원천석(元天錫)·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 등이 있다. 조선 초기의 작가로는 정도전(鄭道傳)·변계량(卞季良)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고려말 조선초의 유학자들로 주목된다. 초기의 시조작가가 당대의 쟁쟁한 성리학(性理學)의 석학들로 망라되어 있다는 사실은 곧 시조가 형성되는 데 있어서 그 내용의 형성요건을 제시하는 데에 성리학이 중대한 의의를 가졌음을 암시한다.

즉, 신라 이후로 우리 민족의 생활과 민족문화의 뒷받침이 되어온 불교가 고려 말기에 들어서서는 누적된 폐단으로 말미암아 백성과 나라를 해치는 화근으로 전락하였다. 이에 새로운 지도이념으로 각광을 받게 된 주자학(朱子學)의 등장과 함께 시조문학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시조는 고려말 이래 새로운 지도이념으로 떠오른 성리학을 신봉하는 유학자들에 의하여 성립된 새로운 시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세련된 문화와 예술을 누리고 있었던 고려 말기에 성립된 시조시형이 그보다 앞선 시대의 문학이나 음악으로부터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시조의 기원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가 여러 차례 시도된 바 있는데, 그 동안의 연구를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는 외래기원설이다. 이는 다시 중국의 불가곡(佛歌曲)에서 수입되었다는 설과 한시(漢詩)를 번역하면서 이루어졌다는 설이 있으나, 이 두 설은 모두 오늘날 학계에서 부정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재래기원설이다. 이는 다시 네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는 신요(神謠)나 민요 또는 무당의 노랫가락이 시조의 원형이라는 설이고, 둘째는 시조의 기원을 향가에서 찾을 수 있다는 설이다. 셋째 〈정읍사 井邑詞〉와 같은 6구체가(六句體歌)가 그 기원이라는 설과 넷째 고려가요가 붕괴되어 단형화하면서 시조시형이 이루어졌다는 설이 있다.

이 중에서 앞의 세 가지 설은 너무 추상적이다. 시조시형과 가장 많이 닮은 형식을 보여주고 있는 무당의 노랫가락도 극히 후대에 발달한 곡조이기 때문에, 사실과 맞지 않아 수긍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따라서, 시조의 기원은 네 번째 학설로 접근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특히 고려가요 중에서도〈만전춘 滿殿春〉의 제2연과 제5연에서 시조의 형식과 아주 가까운 면을 찾아볼 수 있다.

耿耿孤枕上에 어느 瑯미 오리오

西窓을 여러悧니 桃花ㅣ發悧두다

桃花勘 시름업서 笑春風悧蝎다 笑春風悧蝎다

(제2연)

南山에 자리 보와 玉山을 버여 누어

錦繡山 니블안해 麝香각시를 아나 누어

藥든 가寄을 맛초督사이다 마초督사이다

(제5연)

이 작품에 나타난 리듬의 템포나 호흡의 완급, 수사의 방법 등은 시조가 지니는 풍격(風格)에 아주 가깝게 접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세 장으로 나뉜 것이 한 연을 이루는 형태적인 성격이 시조의 형식을 낳게 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 우리 시가의 고유한 음보율인 3음보율을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운율형태인 4음보율의 완성과 아울러, 첩련식(疊聯式)인 고려가요의 형태가 붕괴되기 시작한 것이 이 새로운 형태가 독립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이로써 시조의 형식이 갖추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성리학을 신봉하는 유학자들에 의하여 전대의 문학 및 음악·예술의 형태가 극복되면서 성립된 14세기의 시조문학작품들 중에는 역사적 사건과 결부된다. 그리하여 설화와 함께 전하거나 작품에 제목이 붙여진 것이 많다.

특히 이방원(李芳遠)이 조선의 건국을 앞두고 구세력을 대표하는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기 위하여 불렀다는 〈하여가 何如歌〉와, 이에 대답한 정몽주의 〈단심가 丹心歌〉는 유명하다.

정치적 격변기라 할 수 있는 이 시기의 작품들은 회고가(懷古歌)와 절의가(節義歌)로 나누어볼 수 있을 만큼 나라를 위한 충절이 가장 힘있는 주제로 대두되었다.

회고가는 고려의 멸망 후 지난날의 왕조를 추억하면서 옛 도읍지인 송도(松都)를 찾은 느낌을 읊은 고려 유신(遺臣)들의 작품을 말한다. 절의가는 고려의 충의지사들이 그들의 충성과 단심을 노래하고, 기울어가는 고려왕조에 대하여 개탄한 작품들이다. 이러한 절의가는 조선초에도 나타난다.

(2) 조선 전기 조선초의 절의가는 단종의 퇴위(退位)에 관련된 사육신(死六臣)과 생육신(生六臣)이 그들의 절개를 읊은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 등이 지은 절의가와 함께, 15세기의 시조작품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한가롭고 평화스러운 경치를 읊은 서경시(敍景詩)이다.

새로이 건국된 조선왕조가 비교적 안정되고 모든 기구가 정제됨에 따라 사대부들의 여유있는 생활이 시조의 주된 소재를 이루었고, 시조는 그들의 정신적 자세를 표현하는 그릇이 되었던 것이다.

예컨대 맹사성(孟思誠)의 〈강호사시가 江湖四時歌〉는 사계절에 따른 자연의 변화와 그 속에서 생활하는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같이 평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근원은 어디까지나 군주의 은혜로써 비롯되었다는 뜻을 담은 종장이 반복되는 연시조로서, 그 뒤 수없이 쏟아져나온 서경시의 한 전형이 되었다.

언뜻 보아 자연시(自然詩)처럼 보이는 이들 작품이 궁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던 것도 유교적인 충의사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자연을 감상하면서도 유교적인 충의를 노래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한가하고도 평화로운 서경시가 오늘날 전하고 있는 고시조의 태반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것은 15세기로부터 수립된 전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조선 왕조를 건국하던 당시의 공로로 권위를 유지해 오던 구세력에게 과감하게 도전해오는 신흥세력이 등장하였다. 이들 신흥세력의 역량이 축적되자 드디어 조선왕조의 정치사를 지배하는 이른바 당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 당쟁으로 말미암은 유학도 사이의 심리적 갈등은 이 시조시형을 통해서도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신흠(申欽)·이항복(李恒福) 등의 작품에 드러나고 있는 당쟁에 대한 경계나 당쟁으로 인하여 희생된 인재들에 대한 애석함 등이 그 예가 된다.

마음이라는 추상적 실체를 구상화하여 자신의 이성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심리적 갈등을 객관적으로 표현한 작품이 등장하는 것도 이시기의 당쟁과 관련되어 있다.

또한 자기수행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마련인 인간으로서의 자성(自省)을 표현하고 있는 작품도 이러한 당쟁의 와중에서 산출된 것들이다. 이런 유형의 작품으로는 서경덕(徐敬德)·권호문(權好文)·김구(金絿)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당쟁에 패배하고 먼 곳에서 귀양살이를 할망정 이들 유학자들이 지니고 있는 군주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이 없었다. 체념과 허무 속에서 오히려 자기를 잃지 않고 낙관적인 관조 속에서 진실을 발견하려는 유학도들의 긍정적인 태도를 지탱시켜준 것이 곧 그들의 충성심이었던 것이다.

비록 역사의 추이에 따라 소재는 변할지라도 군주에 대한 충의라는 주제만은 변하지 않았던 주제의 정착성, 이것이 유학도의 서정시로서 시조문학이 갖는 특징적인 성격이다. 또한 시조문학이 지닌 역사적인 기능이기도 했다.

조선 전기의 시조가 지니고 있던 이러한 특징은 16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세 갈래의 지향점이 발견되어 그 세 방향에서 각기 우수한 작품을 산출하고 있다.

그 하나는 이황(李滉)의 〈도산십이곡 陶山十二曲〉과 이이(李珥)의 〈고산구곡가 高山九曲歌〉 등으로 대표된다. 이들 작품에서는, 자연에 대하여 정치적 이념과 태도를 선행시키고 있는 조선 전기 유학자들이 자신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품격과 자연에 투영된 인생관의 한 극치를 시조에 반영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 하나는 정철(鄭澈)의 〈훈민가 訓民歌〉로 대표되는 작품들이다. 〈훈민가〉와 같은 시조에서는 유교적인 윤리관을 주제로 한다. 백성들을 계몽하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므로 토속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결국 시조가 토속적인 언어기교를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황진이(黃眞伊)로 대표되는 기녀(妓女)들의 작품들이다. 구체적이고 인간적인 애정을 시조시형을 통하여 형상화하고 있다. 특히 유학자들과 가까운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시조의 작자로 등장하게 된 기녀들의 작품은 전대의 고려가요가 지녔던 발랄한 애정표현을 시조시형을 통하여 재창조하였다. 또한 시조문학 내지는 조선시대의 모든 측면에서 억제되고 있었던 여심(女心)의 표현을 활발하게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시조문학은 새로운 가능성을 찾게 되었다. 관념적인 유교이념을 형상화하는 데에도 부족함이 없을 뿐 아니라 구상적인 인간성을 서정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있어서도 모자람이 없는 이원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3) 조선 후기 조선 후기, 특히 17세기의 시조에서도 이러한 이원적 성격은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가로는 신흠(申欽)과 윤선도(尹善道)를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윤선도는 시조문학사상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손꼽힌다. 그의 작품 〈어부사시사 漁夫四時詞〉는 각 계절마다 각 10수씩, 사계절에 총 40수로 된 연시조이다. 우리 말의 아름다움을 갈고 닦아 간결하면서도 품격이 돋보이는 표현이 뛰어나며, 속화된 자연을 시로써 승화시킨 대표작이다.

기교면에서의 대구법(對句法)의 처리나 자연의 변화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시상(詩想)의 전개, 그 시상의 전개가 펼쳐보이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는 주목할 만하다. 그 뒤에도 많은 작가와 작품이 산출되었으나, 제재 및 주제면에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이때까지의 시조는 유학자들의 여기(餘技)로서 창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으로, 대부분의 시조는 그들의 소박한 감정을 직선적으로 표출하는 영탄적인 방법을 많이 사용하였다. 또한 시조는 확고한 창작의식이나 문학적 진통을 겪지 않고 수월히 불리어졌던만큼 ‘어즈버, 아희야, 두어라’와 같은 감탄사가 빈번하게 쓰였으며, 그것이 시행 종결(詩行終結)의 방법으로 즐겨 사용되었다.

다음으로 많이 사용된 표현기교는 서술적인 방법이다. 대부분의 전원시(田園詩) 또는 자연시들이 서경(敍景)을 위주로 하는 서술적인 방법을 통하여 표현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유학도들의 여기로서 창작된 시조이었다 할지라도, 때로는 천재적인 작가를 만나기도 한다. 이들에 의해 지어진 시조는 서정적인 표현이나 사실적인 표현으로 지양되고 승화되는 경우도 있으며 때로는 고도의 상징적 수법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런데 사실(寫實)이라 함은 어떠한 객관적인 사물을 재현하는 것을 뜻하며, 서정은 작자의 내면적인 세계를 충실하게 재현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사실적 표현은 자연히 객관성을 띠게 되고, 서정적 표현은 자연히 주관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시조의 표현기교에 있어서는 서구적인 표현방법과는 달리 이 주관성과 객관성이 합치되는 곳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시조에 있어서는 객관적 사실성이 항상 주관적 서정성에 일단 여과되어서 표현되는 데에 그 특징이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사실과 서정의 통합은 결과적으로 상징성을 가져오게 된다. 그러니, 시조의 표현기교는 이러한 관조(觀照)의 정신에서 그 다채로울 수 있는 가능성을 충분히 시사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시조의 발전과정에 큰 변화를 초래한 것이 사설시조이다. 사설시조는 17세기에 이르러 나타났으리라고 추정되나, 구체적으로 성행되었던 사실은 18세기 자료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16, 17세기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기점으로 조선왕조의 정치·사회체제는 여러가지 면에서 모순과 허점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이에 유학도 자체내의 비판적 시각으로부터 도전을 받지 않을 수 없었으며 미미하나마 새로운 세력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서민의식으로부터도 저항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도전과 저항의 집약이라고 할 수 있는 실학사상(實學思想)은 이 땅의 정신생활면에 선풍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켜 정치·경제·문화 등 각 분야에 하나의 분수령적인 구획을 긋기에 이르렀다. 문학예술부문에 이 실학사상이 가져다준 가장 큰 변화는 과거의 율문 전성시대를 극복하고 산문문학을 발전시킬 수 있는 바탕을 닦아주었다는 데 있다.

사설시조는 모든 문학예술의 형식이 산문화하는 방향으로 전환하던 이 시기의 산물이다. 시조가 지닌 3장체의 형식적 특성은 살리면서, 초장과 중장에는 그리 큰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 범위내에서이기는 하지만, 일부 비판적 유학도들은 정형률을 깨고 새로운 가치관에 의하여 사설시조를 창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설시조는 이들 일부 비판적인 유학도보다는 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에 의하여 더욱 새롭게 발전한다. 서민들은 유학도와는 생활감정·사고체계·가치관을 달리하였기 때문에 사설시조로의 전환을 이룩하는 데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그 창법(唱法)과 작법(作法)을 개발할 수 있었다. 일부 비판적인 유학도에 못지않게 날카로운 현실의식으로 시조의 전통적인 미학을 변혁하고 극복해 나갔던 것이다.

그들은 한편에서는 지배계층인 유학도의 이념과 통치방법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유학도적인 행동을 취하려 하였고, 그들의 대상으로서 지배계층을 언제나 의식함으로써 유학도에 의존하고 동화하려는 사고방식에 젖어들기 일쑤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그들이 뿌리를 내리고 호흡하고 있는 피지배계층의 가치관에 의하여 유학도의 그것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지배계층의 의식구조에 의존하고 동조하려 할 때에는 시조의 미의식을 사설시조 속에서 그대로 연장하여 수용하였다. 그러나, 지배계층의 가치관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때는 시조의 미의식을 변혁하고 극복하였다. 때로는 지배계층의 미의식에 대응하는 서민들의 독자적인 미의식을 창조하기도 했다.

조선왕조의 지배계층인 유학도들은 그들이 구축한 사회체제의 질서와 안정이라는 두 가지 측면의 요구에 의하여 시조문학을 창조해갔다. 이에 반해 피지배계층인 서민들은 그러한 유학도들이 창출해낸 시조의 미학을 연장, 수용하거나 일부 변용을 시도하기도 하였지만, 마침내 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미학을 창조하였던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유학도들은 그들 사회의 질서라는 측면의 요구에 의하여 숭고미(崇高美)와 비장미(悲壯美)를 구현하고 그들 사회의 안정이라는 측면의 요구에 의하여 우아미(優雅美)를 추구하게 되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서민들은 유학도들의 이러한 미의식을 수용하는 한편 사설시조를 통하여 시조가 구현하고 있는 세 가지 미적 범주와는 또다른 미의식인 희극미(喜劇美)를 창조하였다는 것이다.

현재 전하고 있는 400여수의 사설시조 가운데 초현실적인 소재에 의하여 숭고미를 구현하거나 현실체념적인 주제에 의한 비장미를 구현하고 있는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혹은 현실도피적인 주제에 의한 우아미를 구현하고 있는 작품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설시조는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소재에 의한 희극미를 창조하고 있다.

사설시조는 지난날의 영탄이나 서경의 경지를 완전히 탈피하고, 적나라한 묘사와 상징적인 암유(暗喩)로써 그 표현기교를 바꾸고 있다. 또한 애정·거래(去來)·수탈(收奪)·패륜(悖倫)·육감(肉感) 등 다채로운 주제를 다루면서 지난 시대의 충의사상에 밀착된 시조의 주제를 뒤엎고 있다.

(4) 평민가객의 출현과 가집 편찬 이와 같은 사설시조의 발달과 함께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 발달과정에 있어 가장 주동적인 구실을 하고 있는 평민가객(平民歌客)의 출현이다.

이들 평민가객들 중의 한 사람인 김수장(金壽長)이 편찬한 시조집 ≪해동가요≫에는 17, 18세기에 걸쳐 활약한 가객 56인의 명단이 실려 있다. 이들은 대개가 문벌이나 지위가 낮은 인물들이며, 사회적으로 크게 대우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16세기 이래 시조의 창작에 참여한 기녀들과 함께 시조문학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바 이들의 업적을 세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로, 이들은 끊임없는 연수를 통하여 시조의 작법과 창법을 전수하고 있다. 역사적인 문헌에 나타난 바로는 ≪광해군일기≫에 당시 고부군수를 지냈던 이승형(李升亨)이 ≪고금가사 古今歌詞≫라는 한 권의 책을 가지고 기녀인 은개(銀介)에게 5, 6년 동안 노래를 가르친 기록이 있다.

김수장이 소개하고 있는 가객들 가운데 가장 시대가 앞선 인물인 허정(許珽)은 이승형이 은개에게 노래를 가르쳤던 17세기 초엽에 태어나서 승지·부윤(府尹) 등의 벼슬을 지낸 사람이다. 〈광해군일기〉에 보이는 이승형에 대한 기록은 평민가객들이 활발하게 배출되기 이전에는 일부 선구적인 유학도들이 노래에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이들 일부 선구적인 유학도들과 그 뒤의 평민가객들 사이의 관계는 자세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18세기의 평민가객들이 시조의 창법과 작법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한 흔적은 다수 발견된다.

장안으로부터 관서지방으로 시조의 장단법을 가져갔던 이세춘(李世春)이나 영남지방에 가서 시조의 창법을 전수하였던 김유기(金裕器), 김유기의 집을 방문하여 시조를 논하였던 김천택(金天澤) 등은 모두 18세기의 가객들이다.

이외에도 18세기 가객들로는 박상건(朴尙健)에게서 창법을 익힌 김우규(金友奎)와 김성기(金聖器)에게 거문고와 퉁소를 배운 김중열(金重說)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19세기의 박효관(朴孝寬)·안민영(安玟英) 등의 활동도 18세기의 가객들이 수립한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둘째로, 이들은 사설시조라는 새로운 시형을 발굴하고 발전시켰다. 현전하는 사설시조는 작자를 알 수 없는 작품이 대부분이다. 또 가객들이 창작한 작품도 평시조가 대부분인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18세기의 평민가객을 대표하는 김수장이 36수의 사설시조를 창작하였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당시의 문학과 음악은 이들 평민가객에 의하여 발달하였고 동시에 이들의 독자적인 미의식인 희극미를 창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이 시기의 위항문학(委巷文學)의 성행, 가사문학의 변화, 판소리사설의 완성 등 일련의 문학 내적·외적 변이과정과 동일한 양상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셋째로, 이들은 가단(歌壇)을 형성하고 시조집을 편찬함으로써 시조문학의 항구적인 발전을 꾀하고 있다. 18세기 초반에 일군의 가객들과 더불어 가단활동을 한 것으로 보이는 김천택은 주의식(朱義植)의 작품을 구해준 변문성(卞文星), 김성기의 작품을 얻어준 김중려(金重呂) 등과 협력하고 그밖의 많은 가단 구성원들의 이해와 협조를 얻어 시조집 ≪청구영언≫을 편찬하였다.

김천택이 이끄는 가단의 일원이었던 김수장은 18세기 후반에 새로이 배출된 신진가객들과 더불어 가단을 재편성하여 발전시켰으며, 이들의 협조를 얻어 시조집 ≪가곡원류≫를 편찬하였다.

이들이 편찬한 ≪청구영언≫·≪해동가요≫·≪가곡원류≫는 다른 시조집들에 비하여 수록한 작품수가 많고 그 편차체제(編次體制)가 정연하여 3대 시조집이라고 일컫고 있다.

이밖에도 송계연월옹(松桂烟月翁)의 ≪고금가곡 古今歌曲≫, 이형상(李衡祥)의 ≪병와가곡집 甁窩歌曲集≫, 편찬자 미상의 ≪화원악보≫·≪남훈태평가 南薰太平歌≫, 김교헌(金喬軒)의 ≪대동풍아 大東風雅≫ 등의 시조집들이 전한다.

시조 - 현대적인 양상과 과제

1920년대에 일어난 시조의 근대적 변화와 연구는 1930년을 거쳐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광복 이후 현재까지 나온 시조집 가운데 1940년대 것으로는 양상경(梁相卿)의 ≪출범 出帆≫(1946), 조운의 ≪조운시조집≫(1947), 김상옥의 ≪초적 草笛≫(1947), 박종옥(朴宗玉)의 ≪상원시조집 桑園時調集≫(1948) 등이 있다.

1950년대에 나온 시조집으로 김오남의 ≪김오남시조집 金午男時調集≫(1953), 이호우의 ≪이호우시조집 爾豪愚時調集≫(1955)을 비롯하여 정훈의 ≪벽오동 碧梧桐≫(1955), 조애영(趙愛泳)의 ≪슬픈 동경(憧憬)≫(1958)이 있다.

이후에도 시조집은 간간이 출간되었는데, 1960년대 시조집으로는 고두동(高斗東)의 ≪황산시조집 皇山時調集≫(1962)과 정기환(鄭箕煥)의 ≪시조한국 時調韓國≫(1967), 조종현(趙宗玄)의 ≪자정(子正)의 지구(地球)≫(1969)가 있으며, 그 이후 출간된 장응두(張應斗)의 ≪한야보 寒夜譜≫(1972)도 있다.

한편, 시조에 관한 연구저서로는 이태극(李泰極)의 ≪시조개론 時調槪論≫(1959)이 나오기도 하였다. 시조 전문지인 ≪시조 時調≫(1952∼1953)와 ≪시조문학 時調文學≫(1960)·≪현대시조 現代時調≫(1970년 6월 창간) 등도 이 시기에 나왔으며, 시조작가협회가 결성되기도 하였다.

현대시조의 과제라면 시조를 어떻게 발전시켜야 할 것인가라고 할 수 있다. 시조는 보편적 질서와 함께 개인적 질서를 가져야 한다. 그런데 보편적 질서만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시조야말로 우리 고유의 전통시라는고 하면서 시조가 지닌 미덕이나 그에 대한 향수에 무조건 집착하려 한다.

시조가 이미 주어진 형식이고 전통적이라는 말은 실상 시조시인들의 일방적 주장이지, 학문적으로 검토된 것은 아니다. 적어도 전통적이라고 하면, 시조의 형식체험을 깊이 의식하고 시조가 현실에서 존재하여야 할 역사적 요청에 부응할 수 있어야 한다. 거기서 우리는 시조가 전통적이라는 것의 의의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조가 과거에 지녔던 그 의의 때문에 무조건 오늘날까지 전승되어야 한다는 것은 복고적이며 민족적 감상주의에 그칠 우려가 많다. 그러한 생각은 시조의 형식체험을 단순히 외형적인 형식의 차원에서만 파악하고 있을 뿐, 시조 특유의 내재적 원리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 데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서경·영탄·회억·감상 일변도로 머무는 것이다. 나아가 시조가 그것이 하나의 의미있는 삶의 형식으로 받아들여지기에 앞서 안이한 발상에서 오는 기계적 반복이나 자수맞추기놀음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시조가 단조롭고 기계적이며 또한 복고적이라는 오해는 바로 이러한 데에 기인한다.

살아 있는 경험과의 부딪침에서 나온 것이 아닌 관념적인 발상법이나, 개성적 질서가 무시된 형식을 고수하는 것은 고시조가 그러했던 것처럼 시조를 유형화시키는 길을 걷게 되고 생명없는 시를 양산(量産)할 뿐이다.

이와는 반대로 아무리 읽어보아도 자유시와 구별되지 않는 명목상의 시조들도 존재한다. 이는 보편적 질서를 무시하고 개인적 질서에만 치중하는 데서 오는 현상이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시조의 질서란 그 자체로서 굳어진 자족적 질서는 아니다. 개인적 질서에 의하여 보편적 질서의 변형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그 변형이 아무런 원칙도 없이 자의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순전히 개인적 질서에 의하여 자의적으로 이루어질 때, 그것은 이미 시조의 영역에서 벗어난 것이고, 따라서 이미 시조가 아닌 것이다.

시조가 아무리 변형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할지라도 결국 그것은 보편적 질서의 반영이며, 그 질서를 통하여 삶을 인식하고 경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조의 질서는 의도적인 작위의 결과가 아니고 우리 민족이 오랜 세월 동안 삶의 현실과 부딪쳐서 얻어진 결과이기 때문이다. 시조는 우리 민족의 미적 감수성과 사고의 양식, 여기에 창이라는 음악적 요소까지 가미되어 형성된 민족시의 가장 정제된 형식인 것이다.

따라서, 시조형식에 대한 맹목적인 고수나 무조건적인 파괴는 어느 것이나 현대시조가 취할 길이 아니다. 보편적 질서와 개인적 질서의 발전적인 종합을 통해서만 현대시조는 존재가치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시조는 정형시이면서 자유시이고, 자유시이면서 정형시가 되어야 한다.

현대시조가 과거의 시조와 다른 점은 정형이라는 틀에 구속받지 않는 데 있다. 그렇다고 해서 현대시조가 자유시가 되지도 않는다는 데 그 묘미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점에서 이병기는 ‘시조는 정형(定型)이 아니라 정형(整形)’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현대시조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좌표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시조

현대시조는 고시조에 대비되는 새로운 내용과 형식을 갖춘 시조를 말한다. 일명 근대시조 또는 신시조라고도 한다. 그 시기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으나, 갑오경장 이전의 작품을 고시조라고 하고 그 뒤 오늘날까지의 작품을 한데 묶어 현대시조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적·시대적 관념이며, 시조의 근대적 변화 또는 근대적 성격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다만 시대라는 기준에 의하여 단선적으로 규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시조의 근대적 변화가 관념보다 구체, 집단보다 개인에 대한 발견과 표현에 있는 것이라고 볼 때, 근대적 감수성의 시조가 본격적으로 쓰여진 것은 1920년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편의상 1920년 이전의 시조를 개화기시조라 하고, 그뒤의 시조를 현대시조 또는 근대시조라 한다.

(1) 개화기 시조 개화기 시조는 형식면에서나 내용면에서 고시조와 비교하여 새로운 변화를 보여준 ≪대한매일신보 大韓每日申報≫·≪제국신문 帝國新聞≫·≪대한민보 大韓民報≫·≪대한유학생회보 大韓留學生會報≫·≪태극학보 太極學報≫·≪대한학회월보 大韓學會月報≫ 등에 실린 시조를 비롯하여 ≪소년 少年≫·≪청춘 靑春≫·≪매일신보 每日申報≫ 등에 실린 최남선(崔南善)과 이광수(李光洙)의 초기 시조까지를 말한다.

개화기 시조의 첫 작품으로는 1906년 7월 21일 ≪대한매일신보≫에 발표된 대구여사(大丘女史)의 〈혈죽가 血竹歌〉를 들 수 있다. 이어 1907년 3월 3일 ≪대한유학생회보≫에 실린 최남선의 〈국풍 4수 國風四首〉가 있다.

이들 첫 작품 이후에 많은 시조들이 발표되었다. ≪대한매일신보≫는 385여수를, ≪대한민보≫는 ‘가요(歌謠)’ 또는 ‘청구가요(靑丘歌謠)’라는 이름 아래 150여수를 각각 게재하여 시조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대한매일신보≫·≪대한민보≫ 등에 실린 시조의 대부분은 공적인 감정이 주를 이룬다. 즉 망국민(亡國民)의 우국충정이나 아니면 매국정권에 대한 저항, 또는 문명개화 등을 내용으로 하는 현실성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 같은 시대적 요청을 전통시가의 형식인 시조의 리듬을 통하여 토로하고 있다.

우국충정을 토로한 시조로는 ≪대한매일신보≫에 발표된 〈하리라〉·〈혈죽가〉·〈보국심 報國心〉, 장생(長生)의 〈더욱 바삐〉, 지아생(知我生)의 〈누가 감히〉·〈자강력〉 등을 들 수 있다.

매국적 집권층을 규탄하고 민족적 각성을 촉구한 시조로는 〈해산약 解散藥〉·〈부지자 不知者〉나 ≪대한민보≫에 발표된 〈귀자자유 貴子自由〉와 기필생(期必生)의 〈금향로 今香路〉·〈송죽 松竹〉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개화사상을 강조하거나 의리를 고수하기도 하고 교육구국의 이상을 펼치는 등 문명개화를 부르짖은 시조도 있었다.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문재목(文在穆)의 〈경화매일신보정신곡 敬和每日新報精神曲〉·〈권소년 勸少年〉·〈의구결 醫口決〉·〈한반도 韓半島〉·〈배양력 培養力〉 등과 ≪대한민보≫에 실린 〈대기 對棋〉, ≪대한학회월보≫에 실린 벽미산인(碧眉山人)의 〈시가 詩歌〉가 대표적이다.

개화기는 서구문화의 충격과 일본의 침략이라는 외래적 상황과 그에 대한 저항 및 내적 모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그리고 민족적 역량의 자각 등으로 점철된 시대인만큼, 개화기시조 역시 심미적인 차원에서보다 그 시대적 성격이 강조되지 않을 수 없었다. 개화기시조가 문학적 의미보다 그 사회적 기능을 중요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이는 고시조와 마찬가지로, 개화기 시조는 개화기의 이념을 모방하고 이상화하는 데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개인의 삶의 현실이 반영될 수 없었음을 뜻한다. 고시조의 주요 주제인 유교적 이념이 이때에 와서는 우국·저항·개화 등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형식이나 표현방법 또는 시를 인식하는 태도 등은 고시조와 별로 다른 바가 없다.

이렇게 주제의 새로움이 나타나 있다고 해도 그것은 감수성의 내면적 필연성에서 오는 작자의 표현의지가 아니다. 이는 외부의 시대적 요청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개화기의 정신적 분위기에 대한 선구자로서의 자각을 노래한 것이다. 개화기시조는 바로 이러한 의식을 반영한 시가였다.

게다가 작자 대부분이 비전문적인 사람들로서 신문집필진 아니면, 시대정신을 자각한 독자들이었다. 이러한 점에서도 개화기시조의 내용 내지 주제는 계몽적일 수밖에 없었고, 그 목소리는 시인이 직접 청중에게 말하는 설득적인 목소리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시조에 비하여 신문에 발표된 개화기시조의 형태는 몇 가지 점에서

첫째, 외형상의 특징으로서 시조마다 제목이 붙어 있다. 그 의도가 무엇이든간에 제목은 시조의 내용에 대한 작자의 의식을 무엇보다 강조하고 있다. 〈하리라〉·〈일신우신 一新又新〉 등의 제목은 각 시조에서 작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표현하는 데에 기능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3장이라는 형식상의 문장보다 6구라는 시적 리듬의 반복형태가 현저하다. 3장 분장의 형식에서 각 장을 2구씩 분절하여 표기함으로써 6구라는 시적 리듬의 반복형태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시조의 종장을 처리하는 방법에서 독특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말하자면 당시의 많은 시조들이 종결어미의 꼬리를 잘라버린 것이다. 즉 ‘……하노라’, ‘……이더라’ 등의 ‘러라’체의 어미는 물론, 어떤 경우에는 한마디 어절 전체가 생략된 것들도 있다.

종결어미에 대한 이러한 생략은 ‘러라’체가 주는 유창하고 완만한 느낌을 감소시키고, 결의가 단호하고 힘참을 실감하게 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넷째, 고시조가 가졌던 종장의 엄격한 규칙이 동요하고 있다. 고시조에서는 첫 구절이 반드시 3음절이어야 하며, 둘째 구절은 5음절 이하이어서는 안되었다. 그러나 개화기시조에서는 종장의 이러한 규칙에서 벗어나고 있는 작품들이 많이 나타난다.

이러한 형식의 변화는 그것이 비록 3장의 분장형식이 가지는 시조 특유의 형식을 완전히 파괴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전통시가에 대해 형태적 변모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개화기시조는 최남선의 시조와 함께 현대시조의 대두를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조짐으로 보이는 것이다.

(2) 최남선의 시조 최남선이 처음 발표한 시조는 〈국풍 4수〉이다. 이 작품은 첫 수만 단시조이고, 나머지 세 수는 장시조 형태이다. 종래의 기사형식은 바꾸었으나 그 서술내용으로 보아 고시조나 다름없는 작품이다.

그 뒤에도 ≪대한유학생회보≫·≪대한매일신보≫·≪소년≫·≪청춘≫ 등에 계속하여 작품을 발표하였는데, 〈국풍 4수〉를 비롯한 그의 초기시조는 개화의식을 나타내고 있어서 개화기시조라고 부른다.

그의 시조에 대한 관심은 1909년 자신이 발행한 ≪소년≫에 ‘옛사람은 이런 시를 끼쳤소’라는 상설란에 고시조를 소개함으로써 나타난 바 있다. 최남선은 ≪소년≫에 〈국풍 4수〉를 비롯하여 14제 40여수와 ≪청춘≫지에 10제 30수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특히 ≪소년≫에서 최남선은 시조를 국풍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시조를 중국 ≪시경≫의 국풍에 해당하는 우리 민족의 독자적인 가요로 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이때에 국풍 아닌 새 제목도 볼 수 있다. 〈삼면환해국 三面環海國〉·〈봄마지〉·〈태백(太白)에〉·〈청천강〉 등이다. 여기에 와서 〈국풍 4수〉나 신문의 개화기시조보다 더욱 분명하게 시조의 형식을 6구의 형식으로 분절해놓은 점에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국풍 4수〉는 말할 것도 없고 ≪소년≫·≪청춘≫지의 시조는 한결같이 개인적 리듬에서 나온 새로운 의미내용은 아니다. 그의 시정신의 본질인 ‘조선심(朝鮮心)’을 기존의 관습적 리듬에 맞추어 노래한 것에 불과하다.

최남선의 본격적인 시조 창작활동은 1926년에 발표한 ≪백팔번뇌≫에서 시작된다. ≪백팔번뇌≫는 현대 최초의 개인창작 시조집이다. 그 서문에서 시조를 ‘문자의 유희가 아니라, 엄숙한 사상의 한 용기’로 보고 있다. 또한 시조를 우리 시가의 본류로 보면서 시조 부흥의 의지를 피력하고 있다.

최남선의 시조는 문학적 의미보다 그 사회적 기능을 중요시하는 교술문학적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이 무렵에 발표된 이광수의 시조, 특히 명승지를 읊은 기행시조는 개인적 정서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최남선의 시조에 비하면 분명히 새로운 세계이다.

(3) 1920·1930년대의 근대적 변화 시조의 근대적 변화가 관념보다 구체, 집단보다 개인의 발견과 표현이라고 할 때, 근대적 감수성의 시조가 본격적으로 쓰여진 것은 이광수·주요한(朱耀翰)·변영로(卞榮魯)·정인보(鄭寅普)·조운(曺雲)·이은상(李殷相)·이병기(李秉岐) 등의 활동 이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개화기시조가 등장한 것은 1910년 전후이겠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현대시조가 논의되고 쓰여진 것은 1920년대 이후의 일이다. 특히 1926년 이른바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대항하여 국민문학운동이 전개될 때 조선주의의 부흥과 더불어 본격적인 시조부흥운동이 전개되었다. 근대 최초의 개인시조집인 최남선의 ≪백팔번뇌≫가 발간되었고, 이 시기를 전후하여 시조에 관한 논문과 작품이 많이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1920년대는 서구적 충격 속에서 전통적인 것과 단절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서구적인 것을 무시하기도 불가능한 문화적 갈등이 그 어느 때보다도 민감했던 시기이다. 그리하여 일본을 통하여 이식된 자유시가 시단을 휩쓸던 상황 속에서도 시조가 전통적 시형식으로 자각되고 시조의 가치가 역설된 것은 맹목적인 서구화에 대한 반작용, 곧 자기상실이라는 위기감의 표현이 아닐 수 없었다. 즉 전통적 질서에 복귀함으로써 한국시가 자기를 찾고 자기의 원모습을 발견하려는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이 시기 시조라는 전통적 시형식을 처음으로 들고 나왔던 이는 최남선이었다. 1926년 ≪조선문단≫ 5월호에 발표한 〈조선국민문학으로의 시조〉라는 논문이 그 본격적인 움직임이었다.

최남선은 시조가 절대 최선의 문학양식은 아니더라도 조선국토·조선인·조선심·조선어·조선음률을 통하여 모든 조선적 요건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시조를 조선이라는 체로 걸러진 정수라고 규정하고, 민족문학으로서 가장 알맞은 전통양식이 시조임을 강조하였다.

이어 손진태(孫晉泰)는 1926년 ≪신민 新民≫ 7월호에 〈시(詩)와 시조에 표현된 조선사람〉에서 시조의 명칭·기원·형식 등을 간단히 말하고는 시조에서 본 우리 나라 사람의 생활과 사상성에 대하여 말하였다.

염상섭(廉想涉)은 〈시조에 관하여〉(조선일보, 1926.12.)에서 “시조마저 빼버리면 조선문학은 무엇이 남을 것인가, 편협한 국수적 견해를 벗어나 널리 인생을 위한 예술로서 시조를 가꾸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신민≫에서는 〈시조는 부흥할 것인가〉(1927.3.)라는 설문을 가지고 이병기 외 11인이 다양한 의견을 들어 발표한 바 있다. 이 설문에 대한 답변 가운데 이은상은 고시조는 그대로가 우리 민족문학의 체계에 대한 광탑(光塔:등대)이 되는 것이니, 이를 연구하여 이 형식에다 새로운 사상과 감정을 담아 새로운 시조를 창작하여 시로서 지향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특히 이병기는 〈시조를 혁신하자〉(동아일보, 1932.1.)라는 논문을 통하여 현대시조가 나아가야 할 길을 다음의 여섯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실감실정(實感實情)을 표현하자는 것이며, 둘째는 취재의 범위를 확장하자는 것이다.

셋째는 용어의 수삼(數三:선택), 넷째는 격조의 변화를 들었고, 다섯째는 연작을 쓰자는 것이었으며, 마지막 여섯째로는 쓰는 법, 읽는 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최초로 현대시조 창작에 대한 이론을 제시한 것인데 현대시의 방법과도 상응하는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또 하나 이 시기에 있어서 시조론의 결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안확의 ≪시조시학 時調詩學≫(1940)이다.

(4) 8·15 이후의 시조 민족사의 거시적 단위로 보아 해방 후 50년은 결코 길다고는 할 수 없다. 오늘의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그때 그 광복의 감격과 기대가 반세기에 이르는 현대사의 격동 속에서 조금씩 퇴색하거나 망각되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해방은 민족사에 있어서 처음으로 남북 분단이라는 대결 관계에 놓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구속해 온 것도 명백하다.

빼앗긴 국권, 그러나 국권을 찾았을 때 강대국의 대결의 장으로 분할된 국가와 더불어 사상과 이념이 나누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8·15는 해방과 광복의 의미를 지니면서 동시에 분단과 대결이라는 양면성을 지닌다. 이러한 양면성은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낳았고 좌우의 대립은 민족문학의 분열을 낳았으며, 심지어는 남과 북의 서로 이질적인 문학을 낳게 하였다.

시조라고 예외는 아니다. 시조를 보는 시각이 남과 북이 매우 다르다. 한 쪽에서는 시조가 민족적이고 전통적인 형식이라면서 무조건 계승되어야 한다고 했다. 반면, 다른 한 쪽에서는 시조를 양반 사대부의 생활 감정과 미학적 요구를 반영한 노래로 보고 무조건 부정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중요한 것은 관심을 시각에서 실상으로 돌려 북에서는 시조에 대한 획일적인 시각을 버리고 시조의 실상을 깨우치게 하는 일이다. 동시에 남에서는 다시 한번 시조의 위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다져야 한다.

해방 직후는 창작의 성과보다 이념의 대립, 정치적인 갈등이 고조되었던 비시적(非詩的) 시대다. 해방의 감격에 압도되어 대부분의 시가 정치적 전언 일변도였다.

양주동(梁柱東)의 〈님을 뵈옵고〉, 정인보의 〈십이애 十二哀〉, 이병기의 〈해방전-살풍경〉, 박노제의 〈해방〉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 시편들이 당시 시의 정치적 전언이 있을 법한 판에 박힌 상투성과 무관한 것은 시조의 절제된 형식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조운의 ≪조운시조집 曺雲時調集≫(1947), 정인보의 ≪담원시조집 饋園時調集≫(1948), 이병기의 ≪가람시조집 嘉藍時調集≫(중판, 1947), 양상경(梁相卿)의 ≪출범≫(1946), 정훈(丁薰)의 ≪머들령≫(1949), 이희승(李熙昇)의 ≪박꽃≫(1947) 등의 출간은 해방 직후 시조계를 대표하는 시사적 업적으로 평가된다. 물론 이들 시조는 대부분 해방 후가 아니라 해방 이전의 암흑기에 씌어져서 발표되지 못하고 있다가 출판된 것들이다.

이렇듯 해방전의 암흑기와 6·25전쟁까지의 공백기를 메꾸고 1950년대로 이어주는 과도기적 교량적 역할을 담당한 시인들은 이병기·이은상·조운·이호우(李鎬雨)·김상옥(金相沃)·김어수(金魚水)·이영도(李永道)·장하보 등이다. 그 중에서도 조운은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월북하였다. 이들은 주로 ≪백민≫·≪죽순≫·≪영문 嶺文≫·≪민성≫ 등을 통하여 작품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현대시조에 있어서 1950년대는 주목할 만한 시기다. 1950년에 터진 6·25전쟁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정규전으로서 단순한 남과 북의 군사적 충돌이 아니었다. 대전 이후 국내 정치 구조의 필연적인 양극화와 더불어 시작된 동서 양 진영의 냉전이 실제의 무력 전쟁으로 벌어진 최초의 전쟁이다.

안으로는 민족의 분열과 대립을 심화시키고 분단 체제를 한층 강화시키는 하나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만큼 6·25의 충격은 해방 후 한국시의 양상을 바꾸는 데 역사적인 사건이 되었으며 시조의 현대적 성격을 특징 짓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1950년대에 와서 시조는 현실시처럼 서정적 자아가 외향하기도 하고 전통시처럼 내향하기도 한다. 서정적 자아의 외향은 전쟁의 극한상황을 직접 다룬 이은상의 〈너라고 불러보는 조국아〉(1958)·〈고지가 바로 저긴데〉(1956), 최성연(崔聖淵)의 〈핏자국〉(1955) 등의 시편에서 볼 수 있다. 서정적 자아의 내향은 박재삼(朴在森)·정소파(鄭韶坡)·장순하(張諄河)·최승범(崔勝範)·송선영(宋船影) 등처럼 전통적 서정을 노래하는 시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전통적 사상력을 통한 이러한 자기회복의 움직임은 1950년대가 거둔 시적 성취다. 그리고 이것은 전후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과 1930년대의 시문학파와 앞 세대의 가람·노산 등의 시조가 계기가 되어 이루어진 문화적 각성과 자연감각이 내면화된 것이다. 그렇다고 은둔·안주 등 조선조 시조 이래 오랜 내력을 지닌 귀거래사의 자연은 아니다. 그만큼 자연감각으로 자연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자연은 인간의 감각으로 파악된 자연이다. 자연의 개념이 바뀐 것이다. 자연은 삶의 현실, 삶의 현장 그 자체가 된다. 이들 시에 나타나는 서정은 전후 현실적 상황에 대한 시적 대응이라고 할 만하다. 그리고 그것은 1960년대 이후에 고조된다.

4·19와 5·16의 역사적 격랑을 겪은 1960년대 이후는 물질주의의 팽배와 사회적 모순으로 물들은 시대이다. 이 시대는 분명 시의 시대라기보다는 산문의 시대다. 아니, 물량화의 시대다. 산문의 시대, 물량화의 시대 속에서 시적 상상력은 비인간화해 가는 현실의 이모저모를 헤아리면서 아울러 그 비인간화 과정에서 인간의 구원을 겨냥하고 있었다.

박경용(朴敬用)·정완영(鄭椀永)·이우출(李禹出)·이우종(李祐鍾)·유성규(柳聖圭)·배병창(裵秉昌)·김준(金埈)·이근배(李根培)·김제현(金濟鉉)·이상범(李相範) 등의 시조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 점에서 1970년대에 와서 장순하·서벌(徐伐)·윤금초(尹今初) 등의 장시조가 시도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유재영(柳在榮)·김남환(金南煥)·김연동(金演東)·김원각(金圓覺)·박기섭·박시교(朴始敎)·박재두(朴在斗)·백이운(白利雲)·이일향(李一香)·이우걸·이지엽(李志葉)·임종찬(林鍾贊)·정해송(鄭海松)·한분순(韓粉順)·민병도(閔炳道)·조동화(曺東和) 등의 시가 환기하는 주변적 경험 역시 여기에 따라 나오는 자연스러운 결과라 할 수 있다.

현대시조는 이미 있어온 잠재적 시조의 보편적 질서와 개인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개인적 질서가 함께 실현된 시형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 질서와 보편적 질서는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개인적 질서는 보편적 질서에 의하여 안정을 얻고, 보편적 질서는 개인적 질서에 의하여 변형된다. 이때 보편적 질서란 물론 한국시가 전체가 나누어 가지고 있는 원초적 질서이다.

한국시가사상 오직 시조의 형식만이 시형으로서 지속적인 가치를 가졌다는 것은 시조의 형식이 한국시가의 다양한 변화 속에서도 일관하는 민족적 동일성과 깊은 연관성을 지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같은 보편적 질서는 시에 형식을 부여한다. 즉 보편적 질서를 통하여 개인적 경험을 표출하는 것이 시조라고 하는 전통양식인 것이다.

그것은 곧 보편적 질서에 뿌리를 박고 있되 개인적 질서로 재구성되는 실감실지의 눈이다. 실감실지의 눈은 이미 있어온 관습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나고, 이러한 저항은 개인적 질서에 의하여 완성된다. 곧 개인적 질서를 통하여 보편적 질서가 갱신될 때 현대시조에서는 새로운 시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툼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임아 보소라 빠개 젖힌 이 가슴

(曺雲의 石榴)

이 시조는 시어로 보나 율조로 보나 개화기시조와 비교하여 상당히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개화기시조와 같은 단조로움이 극복되어 시조가 단형 서정시로 변모되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변모가 가능한 것은 보편적 질서에 근거하면서도 개인적 질서로 재구성되고 있는 ‘실감실지’의 눈으로 대상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실감실지의 눈은 무엇보다도 이미 있어온 시조적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섰을 때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으며, 자기의 개성적인 질서에 충실하였을 때에 재확인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있어온 시조의 틀 안에서도 현대시조는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는 신축성과 유연성을 가질 수 있다. 이와 같은 예는 이은상이 1925년 4월 18일에 발표한 〈봄처녀〉, 이병기가 같은해 7월 1일 ≪동아일보≫에 발표한 〈봉천행 9장 奉天行九章〉에서 잘 나타난다. 이어 주요한·변영로·조운·정인보 등을 거쳐 ≪문장 文章≫지의 추천을 거친 김상옥(金相沃)·이호우(李鎬雨)로 이어지면서 시조의 근대적 변화가 꾸준히 추구되었다.

현대시조의 특징으로는, 형식면에서 개화기시조의 경우와 같이 시조의 형태를 6구의 형식으로 분절해 놓은 것과, 이은상이 시도한 양장시조(兩章時調)를 들 수 있다. 양장시조는 3장에 담을 내용을 압축해서 평시조의 자수를 단축하여 30자 내외로 하고 종장의 3·5자를 지키면서 중장을 생략한 형태이다.

내용면에서는 계절이나 자연물·명승고적 등을 찾아 거기서 느끼는 서경과 회고, 여정의 회포 등이 대부분을 이룬다. 이 시기의 작품활동은 주로 ≪동아일보≫·≪조선일보≫ 등의 신문과 ≪신동아 新東亞≫·≪조선문단≫·≪조광 朝光≫·≪사해공론 四海公論≫·≪문장≫ 등의 잡지를 무대로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나온 시조집으로는 최남선의 ≪백팔번뇌≫(1926), 이은상의 ≪노산시조집≫(1932)을 비롯하여 장정심(張貞心)의 ≪금선 琴線≫(1934), 김희규(金禧圭)의 ≪님의 심금(心琴)≫(1935) 등이 있다. 이외에 오신혜(吳信惠)의 ≪망양정 望洋亭≫(1935), 이병기의 ≪가람시조집 嘉藍時調集≫(1939) 등의 시조집도 출판되었다.

시조 - 음악적 성격

(1) 악 보 시조의 악보가 처음 보이는 것은 순조 때 학자 서유구(徐有梏)의 ≪임원경제지≫ 가운데 〈유예지 遊藝志〉와 이규경(李圭景)의 ≪구라철사금자보 歐邏鐵絲琴字譜≫이다. 해독에 의하면 이 악보의 시조는 현행 경제(京制)의 평시조에 해당하므로 시조 곡조의 원형은 다른 자료가 새로 발견되지 않는 한 경제의 평시조가 원형에 든다고 하겠다.

(2) 시조창 시조 곡조는 순조 때의 〈유예지〉에 처음으로 경제에 해당하는 평시조의 악보가 전하지만 그 뒤 여러 가지 가곡형태(歌曲形態)의 영향을 받아 많은 시조 곡조가 파생되었다.

한편으로는 시조창이 각 지방으로 널리 번짐에 따라 그 지방사람의 기호(嗜好)에 의하여 창법상의 지방적인 특징이 생김으로써 지역적으로 조금씩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다. 즉 서울지방을 중심으로 한 경제, 전라도지방을 중심으로 한 완제(完制), 경상도 중심의 영제(嶺制), 충청남도지방의 내포제(內浦制) 등 지방제(地方制)가 생기게 된 것이다.

그 가운데 경제의 시조는 원래 현행 평시조에 해당하는 시조곡의 한 가지였는데 전통 가곡의 형식을 본받아 많은 파생곡이 생기게 되었다. 즉 평시조·중허리시조〔中擧時調〕·지름시조〔頭擧時調〕·사설지름시조〔濫時調〕·수잡가(首雜歌:엮음 또는 言編時調)·휘모리잡가(編 또는 엮음시조의 변형) 등 변화곡이 경제의 시조로부터 나오게 되었다. 완제·영제·내포제의 시조는 평시조와 사설시조(또는 엮음시조·편시조)가 중심이 된다.

(3) 장 단 시조의 기본장단은 경제와 완제·영제·내포제에 있어서 약간씩 차이가 있다. 경제는 피리나 대금 등 반주가 수반된다. 그러나 완제·영제·내포제에 있어서는 각종 악기의 반주를 갖추지 못하고 기껏해야 장구장단 아니면 무릎장단으로 반주를 대신한다.

이들의 반주 장단이 초장과 중장 끝장단에서 5박자가 줄어든 것이 경제의 장단과 다른 점이다. 이 경제와 지방제의 장단법을 도표로 예시하면 [그림 1]·[그림 2] 와 같다.

(4) 음 계 경제의 평시조와 중허리시조, 완제·영제·내포제의 평시조와 사설시조는 황종(黃鐘: )·중려(仲呂: )·임종(林鐘: )의 3음으로 된 계면조(界面調)이다. 경제의 지름시조·사설지름시조·수잡가·여창지름시조는 황종·중려·임종·무역(無射: ) 또는 남려(南呂: C)의 4음으로 된 계면조이다.

(5) 시조와 가곡 시조와 가곡이 다같이 시조시를 노랫말로 사용한 점에 있어서는 같다. 시조창의 형식은 문학적인 형식과 같이 3장형식이고, 관현반주가 따르지 않는다. 음계는 3음 혹은 4음의 계면조이다.

가곡은 노랫말을 세분하여 5장으로 구분하고 관현반주를 가지며 전주곡 혹은 후주곡에 해당하는 대여음(大餘音)과 간주곡에 해당하는 중여음(中餘音)이 3장과 4장 사이에 있다. 음계는 3음 혹은 4음의 계면조와 5음의 우조로 되어 있다.

또 시조창은 음악의 즉흥성을 가진 전달음악이기 때문에 종장 끝음절인 ‘하노라’, ‘하느니’, ‘하오리라’ 등을 생략하지만 가곡에서는 끝까지 다 부른다는 점에서도 이 둘은 서로 차이가 있다. 시조와 가곡의 분장법(分章法)을 가사를 중심으로 구분하면 〔그림 3〕 과 같다.

시조는 3음 또는 4음의 적은 음정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창법에 따라서는 요성(搖聲)·전성(轉聲)·퇴성(退聲) 등의 여러 가지 기법으로 시조시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다.

이에 옛 선비들이 즐겨 불렀던 것이며 선비들의 대중음악이 될만했던 것이다. 시조는 이와같이 질긴 생명력을 가진 귀중한 전통음악으로서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에도 계승되어 전국적으로 시조인구가 널리 분포되어 있고 수많은 동호인 모임이 있다.

시조 -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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