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시인 정지용의 고향 - 옥천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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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정지용의 고향 - 옥천

 

 

넓은 별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흙에서 자란 내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활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그속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傳說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의와

아무러치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석금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속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한 구절 한 구절 나아갈 때마다 소리로, 모습으로, 느낌으로 선명히 다가오는 고향의 정경과 주술처럼 반복되는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가 휘저어올리는 그리움, 위의 시는 노래로도 널리 알려진 정지용의 대표작향수이다.

 

정지용의 생가

정지용은 옥천읍 죽향리 하계마을에서 났다. 옥천읍 중심지에서 북쪽으로 조금 벗어난 죽향리를 이곳 사람들은 흔히 구읍이라 부른다. 예전에는 이곳이 옥천의 중심지였으나 일제강점기에 철도를 내면서 이 곳 지주들의 반대로 옥천역을 지금의 자리에 둔 후 죽향리 일대는 한적한 농촌의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하계마을로 들어서면 요즘도 나지막한 집들이 이어진 가운데 가끔씩 낡은 일본식 건물도 눈에 뛴다. 얼핏 보아 여윈 까마귀가 울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아래 흐릿한 불빛을 둘러앉은 식구들이 도란도란 거리던그 시절로부터 아주 멀리 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마을 가운데를 질러서 개천이 흐르고, 정지용의 생가 자리는 그 개천 위에 걸린 청석교 모퉁이에 있다. 그의 체취를 간직한 생가는 오래 전에 무너지고 다른 건물로 바뀌었으나 1996년에 옥천군에서 본체와 행랑채, 우물과 돌담장, 시립문을 갖춘 초가로 복원해놓았다. 검푸른 빛이 도는 청석을 걸쳐 만든 예날의 청석교도 좁다란 담장 안에 복원되어 있다. 그러나 집 옆의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 우는 얼룩백이 황소같은 것은 다 잃어버리고 양쪽 기슭이 축대로 쌓이고 바닥에 생활쓰레기가 뒹구는 채로 흐른다. 옛날의 청석교를 지금의 청석교 자리에 얹어 그려보지만, 현재의 모습에서 그의 시가 그려낸 고향의 모습이나 시인의 자취를 느껴보겠다는 것은 애초에 지나친 욕심이겠다. 예전 청석교는 석재가 더러는 개천에 묻히고 더러는 옮겨져서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었는데 생가를 복원하면서 도로 모아서 세워놓은 것이다.

 

복원된 생가 우물 옆에는 커다란 향수 시비도 섰고 기념돌들도 놓였지만 가장 오래 눈길을 잡는 것은 개천가 옆집 담벽에 붙은 도화지 한 장만한 기념판이다. 안경 끼고 두루마기 입은 시인의 가슴 윗부분을 한 옆에 새긴 그 얌전한 기념판은 생가가 복원되기 전부터 붙어 있던 것으로 내용은 이렇다. “지용 유적 제 1. 명시 향수의 시인 정지용이 1902515(음력) ‘실개천가의 이 자리에서 태어났다. 생가는 1974년에 허물어지고 새 집이 들어섰다. 1968625, ‘지용회.” 지용회는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된 후 월북자가가 하여 묶여 있던 그의 작품들이 해금된 1987년에 그를 기리는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단체이다.

 

이곳에서 나서 자라며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시절, 정지용은 옥천공립보통학교에 다녔다. 생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죽향초등학교는 옥천공립보통학교의 후신인데, 그가 다니던 시절의 학교 건물이 지금도 운동장가에 남아 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 생가에 들어서자마자 반기는 정지용의 '향수'. 박인수와 이동원이 함께 불렀던 노랫가락으로 우리에게 더욱 익숙해진 이 시처럼 정지용 생가 앞으로는 정말 실개천이 흐르고 있다. 그러나, 콘크리트 둑길, 5층 건물 등 시에 빠져들기엔 다소 어색함이 생긴다.

 

우리나라 현대시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정지용 시인이 태어난 이 곳에는 초가집 한 채와 헛간 한 채, 그리고 마당에는 78m 길이의 넓적한 바위 두 개가 다리처럼 놓여져 있다. 마당의 길쭉한 바위 판석보는 바로 그 실개천에 걸쳐있던 다리였다고 한다. 일제시대 때에는 신사에 세웠다가, 해방되고 나서는 땅 속에 묻히는 수난을 겪은 끝에 지금 지용 생가 마당에 와있다.


시인 정지용

 

"지용은 작은 체구로 얼굴에 예지의 기상이 번득였으며, 비범한 눈빛이 영롱한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고 박두진은 한 천재시인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의 천재적인 기질은 오만에 가까운 당돌성과 패기를 느끼게도 하나 그러한 엄숙한 풍모 속에는 소탈함과 자상함 을 숨기고 있음을 아울러 밝힌다. 정지용은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서 자신이 추천한 문학청년을 대등한 시인으로서 대하여 주었으며, 방문을 마치고 돌아가는 그를 북아현동 고개 마루에서 20분 넘어 걸리는 서대문 네거리까지의 비탈길을 배웅하면서 마치도 천 리를 멀다 않고 찾아온 옛친구와의 작별을 아쉬워하듯 다정하고 허물없이 대해주었다고 지용의 인간적 면모를 밝히고 있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14세의 정지용은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있는 고향을 떠나 긴 객지생활을 시작했다. 정지용의 아버지는 젊어서 중국과 만주를 방랑하며 익힌 한의술로 고향에서 한의업을 하며 농사를 지었다지만 살림살이는 매우 가난했다. 정지용은 원래 4대 독자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둘째 부인을 얻음으로써 누이와 남동생이 생겼고 또 당시의 풍습에 따라 보통학교 다니던 12세 때 장가를 들었다.

 

서울로 올라온 정지용은 처가 쪽 친척인 송참사 댁에서 4년 동안 한학을 공부한 후 17세 때 휘문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갔으며 졸업 후 곧 일본 교토에 있는 도시샤 대학 영문과에 유학했다. 휘문고보와의 인연은 정지용의 생애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1학년 때 전체 학생 88명 가운데 1등을 할 만큼 성적이 좋았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정지용에게 휘문학교는 학비와 생활비를 대주었고 일본 유학 비용까지 지원해주었다. 일본 유학 후 정지용은 휘문고보 교사가 되어 16년 동안 일하기도 했다.

 

정지용은 휘문고보 시절부터 요람이라는 등사판 동인지를 내고 문우회활동에 참가하는 등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대학 시절에는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집지에 카페 프란스’ ‘Dahlia' ’이른 봄 아침‘ ’바다‘ ’향수‘ ’갑판 위등을 발표하며 큰 반향과 더불어 시단에 나섰다.

 

1929년 귀국 후 휘문고보 영어교사로 일하며 서울에 정착한 이래 김영랑, 박용철과 함께 시문학동인으로 활동했고 카톨릭청년편집고문을 지내며 스스로 신앙시를 발표하거나 이상의 시를 소개하기도 했다. ‘9인회회원으로 가입하였고 문장의 시 분야 선고(選稿)위원이 되면서 30년대 시단의 중심에 자리잡았다. 정지용은 문장을 통해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등 소위 청록파로 꼽히는 시인들을 추천했는데, 당시 소설 부문에서는 이태준, 시조 부문에서는 이병기가 추천을 맡고 있었다.

 

1920년대까지 우리나라 시단에서는 시인의 자아를 그대로 드러내는 감상적 낭만시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거기에 감정의 노출을 배제하고 신선하고 감각적인 시어로 대상의 이미지를 모사한 정지용의 시들은 큰 충격을 주었다. ‘왕년의 센티멘탈리즘을 배제한’ ‘말씀의 요술을 부리는 시인’(박용철), ‘우리 시 속에 현대의 호흡과 맥박을 불어넣은 최초의 시인이며 천재적 민감으로 말의 가치와 이미지를 발견한 최초의 모더니스트’(김기림)와 같은 찬사가 1930년대에 정지용에게 주어졌고, ‘진정한 한국 현대시는 정지용의 시에서 비롯되었다라는 견해가 있을 만큼 정지용의 시는 한국 문학사에 뚜렷한 금을 그었다. 그는 시집으로 정지용 시집백록담, 산문집으로 지옹문학독본산문을 남겼다.

 

해방 후 정지용은 조선문학가동맹의 아동분과위원장으로 추대되기도 하고 이화여대 교수와 경향신문주간을 지냈으며 서울대학에 출강하여시경을 강의하기도 했다. 그러다 49세이던 1950, 한국전쟁의 와중에 갑자기 서울에서 사라졌다. 북한군 문화선무대에 참여했다고 하나 소식이 끊겼고 1953년 전후에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설만이 나돌았다. 학계와 가족들은 어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납북된 것으로 보았으나 정부에서는 그를 월복자가로 분류하였다. 그후 오랫동안 정지용의 작품은 어둠 속에 묻히고 그에 대한 연구조차 자유롭 지 못했다.

 

6.25 전쟁이 일어나기 얼마 전 어느 날 <이북통신>이라는 주간지에 *지용월북* 이라는 거짓말이 나오자 스스로 출판사에 돌아다니며 월북 사실이 없음을 해명하기도 했던 지용, 지용의 납북되기 전후의 행적에 대한 갖가지 억측과 오해, 더 많은 시를 쓰고 문단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해야 할 나이에 가족을 남기고 납북되어간 비극적 행적- 이렇게 해서 한 천재 시인이 삶이 비극적 행각으로 끝난 것은 분단된 우리 겨레의 아픔을 온통 한 몸에 안고 간 것이며, 그 자체가 이 민족사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1988, 정지용의 시는 풀려났다. 이듬해인 1989514, 옥천읍 한가운데 있는 관성회관(옥천군민회관) 옆 공원에서는 여러 시인과 가족, 옥천 주민들이 모이고 예전에 그에게 배우던 이화여전 학생들이 할머니가 되어 눈물을 훔치는 가운데 정지용의 시비와 동상이 세워졌다. 이는 제2회 지용제 행사 가운데 하나였다. 그 이래 지용회와 옥천군은 해마다 5월에 지용제를 별여온다. 키 큰 참나무들 사이로 옥천 시가지를 내려다보는 그의 동상 좌대에는 늘 가슴에 사무치는 한 마디가 새겨져 있다.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남북의 문학 '오해'가 풀린다

이데올로기가 저주한 작가들 재평가 활발상호이해의 지평 넓히는 공동토론을

 

남쪽의 영웅은 북쪽의 역적이고, 그 역도 성립해온 게 얼마 전까지 한반도의 상식이었다. 그러나 그런 분단냉전대결 구도가 깨어져야 통일이 가능하다는 것도 상식에 속한다.

 

문학에서도 남북의 평가는 엇갈리는 게 '정상'이었다. 가령 남쪽에서는 80년대 말까지 단순히 월북작가라는 이유로 많은 이들의 작품을 읽지 못하도록 했고, 북쪽에서도 비좌익계열의 많은 작가들을 󰡐반동작가󰡑로 규정해 아예 평가하지 않았다.

 

남쪽에서는 88년 카프계열 작가들과 월북작가들의 작품이 일부 해금되어 이들에 대한 정당한 평가의 길을 텄다. 90년대 이후엔 북쪽에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반동작가로 규정당했던 염상섭의 작품이 98년 북에서 간행한 <현대조선문학선집>에 포함되었는가 하면, 정지용과 백석 등 카프계열과는 다른 경향의 문학을 생산해내었던 작가들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평가가 나오고 있다.

 

북의 이런 변화는 1992년 펴낸 김정일의 <주체문학론>에서 비롯했다. 김정일은 이 글에서 󰡒민족 문화유산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은 곧 민족 자존심과 민족제일주의의 중요한 표현󰡓이라고 전제한 뒤, 󰡒조선시대 실학파 문학과 192030년대 카프 문학에 대한 평가와 처리를 공정하게 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작가의 출신과 사회생활 경위가 복잡하다 하여도 우리나라 문학예술의 발전과 인민의 문화정서생활에 이바지한 좋은 작품을 썼다면 그 작가와 작품을 아끼고 대담하게 내세워주어야 한다󰡓고 지적해 문학사 재평가 작업의 물꼬를 텄다. 그는 이 글에서 특히 이광수 최남선 신채호 한용운 김억 김소월 정지용 심훈 이효석 방정환 문호월 나운규 등은 이름까지 직접 거론하면서 공정한 평가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남북의 이런 변화는 서로의 공통분모를 넓혀갈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이다. 분단체제의 두 극단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의식을 접근시켜 접점을 넓혀갈 중요한 매체의 하나가 문학이기 때문이다.

 

구한말 애국계몽운동기1945) 시기의 작가와 작품들에 대한 남북의 평가는 일치하는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 그러나 󰡒서로 평가가 달랐다가 같아지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역동적인 공간󰡓이 바로 이 시기다. 김 교수는 󰡒이 시기의 작가들은 그 시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남북 문학계에서 활동이 이어지기 때문에 이후의 남북 문학을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발판 구실도 한다󰡓는 점에서 󰡒공통된 문학 유산의 확충을 위한 논의의 장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이라고 본다.

 

남북의 평가와 관련해 이 시기의 작가를 크게 세 집단으로 나눈다.

첫째는 분단 이후 남북이 줄곧 평가를 같이해온 작가들이다.

둘째는 남북이 최근들어 평가하기 시작한 작가들이다. 여기에는 백석과 정지용이 포함된다.

세번째는 남북에서 각각 󰡐나쁜 작가󰡑라는 비방을 받아오다 최근에야 재평가 받기 시작한 이들로, 리기영과 염상섭이 대표적이다.

 

홍용희(34) 경희대 강사는 '통일문학의 원형성'이란 글을 통해 남과 북에서 최근 새롭게 평가를 받고 있는 작가인 백석과 정지용을 다뤘다. 두 사람은 각각 재북월북 시인으로서 분단과 함께 남쪽 문학사의 뒷전으로 사라졌다가 1988년 해금조처 이후에야 공식 복권되었다. 북에서 정지용과 백석이 문학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1995년 간행된 <조선문학사 9>부터다. 홍씨는 󰡒일제 강점기 백석과 정지용의 토속적 정서가 그 자체로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는 저항의 구실을 담당했다면, 오늘날에는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열쳐내는 동력으로서의 노릇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본다. (실천문학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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