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시인 서정주의 친일 행적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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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서정주의 친일 행적 

 

소개

시인. 호는 미당(未堂).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출생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학(漢學) 수업. 전북 부안군 졸포보통학교 수료.서울 중앙고보 및 전북 고창고보 중퇴.방랑생활. 1931년 고승 박한영 대종사 문하에 입산,서울 개운사 대원암의 중앙 불교 전문강원에 입학, 그 뒤 중안 불교전문학교에서 수업.

 

1936<동아일보>신춘문예에 시 이 당선되었다. 시동인지 <시인부락>편집 겸 발행인,동인은 김돌이.이용휘.오장환. 등이었다. 1938년 화투패를 떼 보고 선을 본 방옥숙 여사와 결혼하고 첫 시집 화사를 남만서고에서 출간, 그뒤로 일제 식민지 시대의 황막한 강산을 떠돌고 서울의 여기저기에 기류하다가 만주로 방랑,안동안 간도에서 양곡주식회사 경리사원으로 있었고 용정에도 가 있었다. 일제 말기를 고향과 서울에서 전전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1946년 시집 귀촉도가 선문사에서 출간되어 시단에 나온 직후부터 놀라운 반응을 일으킨 그의 시가 이 시집에 이르러 정착되었다. 동아대학 교수,<동아일보>사회부장 .문화부장 등에 취임한 후 정부 수립과 함께 문교부 초대 예술과장을 약 1년간 역임하면서 한국문학가협회 시부위원장에 피임되었다.

 

19506.25 동란이 발발하자 조지훈.이한직 들과 한강을 기적적으로 건너 대전.대구 등지로 피난하였다. 전쟁과 함께 그는 극심한 정신분열증세를 일으켜 전시임시문인단체인 문총구국대 문우들의 보살핌으로 대구의 병원과 부산의 한거에서 요양하다가 9.28 수복 후 서울로 돌아왔다. 1.4 후퇴와 함께 가족과 더불어 피난열차,마차 따위를 타고 전주로 내려갔으며 후배들의 알선으로 생활 터전이 마련되어, 그의 중견시 이후에 가장 중요한 시적 테마가 되었던 신라체험<삼국사기><삼국유사>를 통해 영감이 확대된 경지에 정착시켰다.

 

또 전주시대는 자살미수사건도 생긴 반면 동양사상과의 만남에 의해서 1936년 초기에 강렬하게 보인 보들레에르풍의 마성이 승화되었다. 그의 전주시대 그리고 광주시대에 이르러 이른바 대가시 <상리과원><무등을 보며>등 명작을 산출했는데,이런 서정주문학의 예술적인 승리는 그의 정신분열증세와 함께 진행되었다. 전주의 전시연합대학 강사,전주고교 교사,조선대학 부교수 등으로 전전하다가 환도와 더불어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돌아왔다. 예술원 회원,서라벌 예술대학 교수,동국대학 교수를 역임하면서 1960년 시집<신라초>를 출간했다.

 

그의 동양정신은 전후세대의 공격을 받은 샤머니즘을 주조로 삼으면서도 노장철학.유교 등을 체질화한 뒤 마침내 그가 청년시대부터 경험해 온 불교에서 완숙한 상상력을 얻어냈다. 그러나 그는 불교의 실상론 보다는 현상론.연기론.에 기울어져서 인연설화의 오묘한 전생에 시의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국성사략>과 같은 전율적인 학구 정신사를 확인함과 동시에 불교적 영생주의를 고조하였다.

 

특히 1968년 출판의 시집 <동천>은 범천과 같은 동천과 자아 사이의 성적 교감을 발휘한 것으로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님은 주무시고><선운사 동구><고요><외할머니네 마당에 올라온 해일><산수유꽃 나무에 말한 비밀> 과 같은 어린 시절의 토속적 감동을 의식의 한계를 벗어나서 불러 일으키고 있다. 그를 가리켜 한국최대시인이라는 일반적인 찬양이 압도적이지만 그의 다음 세대가 가지고 있는 새로운 언어 패턴에 의해서 많은 회의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1972년 서정주 문학전집 전 5권이 나오면서 서정주의 문학사적 위치는 거대한 것으로 공고해졌다.

참고 문헌 - 친일파 100100(발췌)


서정주 시인의 친일 행적

 

증앙불교전문학교를 수학하고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 같은 해에 김동리.김달진.오장환 등과 동인지 [시인부락]을 주재하는 등

활발한 시단 활동을 벌였다.

 

서정주가 친일작품을 쓰기 시작한 것19427월 평론 [시의 이야기-주로

국민시가에 대하여] 를 매일신보에 발표하면서부터이다. 친일시인으로 작심하고

친일 어용 문학지 [국민문학][국민시가]의 편집일을 맡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친일작품을 양산했다. 당시의 문단 비중에 비해서 상당한 분량의 친일작품을

남긴 것이다. 평론 1, 4, 단편소설 1, 수필 3, 르포 1편 등 합계

10편의 친일 작품을 썼다.

 

친일작품을 연대별로 살펴 보면 1942년 평론 [시의 이야기-주로 국민시가에

대하여], 1943년 수필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

[인보(隣保)의 정신] [스무살 된 벗에게] [보도행], [항공일에] [헌시

(獻時)], 소설 [최체부의 군속 지망], 1944년 시 [무제] [오장 마쓰이 송가]

등이 있다.

 

서정주는 친일문학 활동뿐만 아니라 직접 행동으로 나서 194310윌 엿새 동안

일본군 경성사단의 추계 훈련에 종군하고 참관기를 쓰기도 하였다.

 

해방 후 조선청년문학가렵회 시분과 회장을 맡고 문교부 초대 예술과장,

한국문인협회 회장 등 문단의 감투를 쓰고 이승만의 전기를 접필하는 등

'정치문인'으로 5공화국 때까지 맹렬한 활동을 했다.

 

다음은 매일신보 1944129일자에 실린 서정주의 '친일 대표작' [송정오장송가(松井伍長 頌歌)] 전문이다.

 

송정오장 송가

 

아아 레이테만은 어데런가

언덕도

산도

뵈이지 않는

구름만이 둥둥둥 떠서 다니는

몇천 길의 바다런가

 

아아 레이테만은

여기서 몇만 리련가......

 

귀 기울이면 들려오는

아득한 파도소리......

우리의 젊은 아우와 아들들이

그 속에서 잠자는 아득한 파도소리......

 

얼굴에 붉은 홍조를 띠우고

'갔다가 오겠습니다' ..

웃으며 가드니

새와 같은 비행기가 날아서 가드니

아우야 너는 다시 돌아오진 않는다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오장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인씨(印氏)의 둘째 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

귀국대원

 

귀국대원의 푸른 영혼은

살아서 벌써 우리게로 왔느니

우리 숨쉬는 이 나라의 하늘 위에

조용히 조용히 돌아왔느니

 

우리의 동포들이 밤과 낮으로

정성껏 만들어보낸 비행기 한 채에

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

소리 있이 벌이는 고흔 꽃처럼

 

오히려 기쁜 몸짓 하며 내리는 곳

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

 

수백 척의 비행기와

대포와 폭발탄과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 같은 병정을 싣고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려져서 깨었는가?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伍長}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

한결 더 짙푸르른 우리의 하늘이여

 

아아 레이테만은 어데런가

몇천 길의 바다런가

 

귀 기울이면

여기서도, 역력히 들려오는

아득한 파도소리......

레이테만의 파도소리......


報道行

경성사단 추계연습의 뒤를 따라서

 

 

1(1018)

 

X.

 

우리들 보도반원 일행 33명은 1018일 오늘 이른 아침 호남선에서 내렸읍니다.

우리들은 지금 패검(楓劍)만 차지 않은 병정의 차림새로 실로 의기충천의 기세를

가지고 있읍니다.

 

복장이라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것입니다. 어제까지도 초라한 '세비로'를 입고

혼들거리던 몸이 오늘은 군복 속에 담기어서 자꾸 전선으로만 달리고

싶으니까요. 보도의 요령이라고는 조금도 모르는 주제에 건방지게도 그냥 어디

실전의 전선으로만 달려가고 싶으니까요.

 

오전중에는 나까가와 대위에게서 내일부터 시작되는 연습의 개요설명을 듣고

오후에는 사단장 자하와 참모장에게 신고를 갔었읍니다. 사단장은 예상키에는

무척 무섭고 딱박할 줄 알았더니 의외에도 상냥스럽고 음성이 부드러운

분이었읍니다.

 

군인에 대한 내 생각이 엄청나게 틀린 것이었음을 여기에 와서 나는 절실히

느꼈읍니다. 개인으로서 부하에게 대하는 한, 이렇게도 부드럽고 인정미에 넘쳐

있는 상관들이란 다른 세계에는 아마 없으리라 생각봅니다. 우리들을 직접

지도하시는 후지 대좌만 하다라도, 우리들을 향해 '기착'을 부를 때만

빼놓는다면 참 드물게 보는 아저씨 같은 좋은 노인입니다.

 

그건 그렇고, 오후 두 시경부터 우리에겐 휴식이 주어졌습니다. 내일부터 맹렬한

연습이 시작되므로 우리들을 좀 포근히 쉬게 하려는 것인지, 그보다도 반원

각자에게 준비된 것을 똑바로 준비하게 하려 함인지도 모르겠읍니다.

 

그러나 외출하고 싶은 사람은 김제 음내에 한해서만은 하여도 괜찮다고 합니다.

사실은 여기서 남으로 두 정거장만 더 내려가면 정읍에는 처가와 내 누이의 집이

있고, 아우가 또 거기 농학교에 있읍니다만 그런 근친자들을 아주 가까이

두고서도 나는 규율을 지키기 위하여 이 김제읍을 벗어 나서는 안됩니다. 이런

경험 또한, 나로서는 처음 당하는 일입니다.

 

언젠가 읽은 어떤 문둥이 소설가의 [혈루] (血淚)라는 자전소설 속에는 외국에

가서 대학에 다니다가 뜻밖에 나병에 걸려 고향에 돌아간 작자가 그러나 집에는

종시 들어가질 못하고 고향 마을의 모양이 내려다뵈는 산 위에서 울다가 다시

방랑길을 떠나는 대목의 묘사가 있었읍니다마는, 물론 그것과는 정반대의 의미로

이러한 엄격한 규칙생활이 주는 외견의 부자유는 내게는 오히려 끝없는 자유와

같이 생각이 되었읍니다. 옅은 개울물에서 첨벙거리다가 임의로 땅 뒤에 올라설

수 있는 경박하고 손쉬운 자유가 아니라, 깊은 대양에 자기를 잠그고 있는 것

같은 그러한 자유 말씀입니다.

 

나는 지정된 여관의 한 방에 앉아서 가지고 온 '메모'를 꺼내 다음과 같은 몇

줄을 적어둡니다. 어떠한 선입관념과 선입감정으로도 내 정신을 향해 들어오는

것을 막아서는 안된다. 항시 눈을 크게 뜨고 있자. 전황의 보도는 신문기자에게

비록 연습이지만 우리들 종군작가는 그보다는 더 근본적인 것에 눈을 두어야

한다. 맨 먼저는 우리 자신의 정신과 그 다음엔 독자들의 정신을 전체로서

구제할 수 있는 내용을 찾을 일.

 

<중략>

 

X. 우리들은 오늘 임피라고 무르는 군산 가까운 소읍에 와서 있읍니다. 이번

연습지의 어디를 가거나 항상 느끼는 일이지만 이 지방 사람들의 환영에는

그저그저 감복할 따름입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어디를 가거나 그들은

우리를, - 물론 병정으로서의 우리를 향해, 두 손을 쳐들며 만세를 불러주었고,

길거리에 막을 치곤 차들을 대접해 주었읍니다. 이러한 그들의 성의가 어찌

도로로 돌아갈 리가 있을까요. 그들은, 아니 우리들은 인제 엄청나게 향상될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X. 오늘 우리는,--문인보국회에서 파견된 최재서 씨와 히라누마(平沼文甫)

씨와 저 이렇게 세 사람은, 군의 연습을 기다리는 동안 최재서 씨의 발안으로,

마침 이곳에 견학을 나온 서수청년훈련소생 45인으로 더불어 한때의 단란한

야외좌담회를 열었웁니다. 그들은 그 전부가 지금 꽉 스무살짜리의 소년들로서

명년이면 스물 한 살이 되어 성년함과 동시에 병대에 입영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 예비훈련을 받고 있는 터입니다.

 

최재서 씨가 먼저 우리들의 신분을 간단히 소개한 후에

 

'이 중에 국어(일어-편집자)를 모르는 이는 없겠지요 ? '

 

고 동석한 교관에게 물으니

 

'없읍니다'

 

하는 교관의 대답이 떨어지기 전부터 그들은 연방 빙글빙글 합니다. 지금 세상에

국어를 모르는 사람이 어이 있어요---하는 듯한 눈치입니다.

 

'그래, 명년에는 여러분이 모두다 병대로서 입영을 하게 되는데 그

감상이나 희망을 말해 주시오. 병정이 될 일을 생각하니 마음이 어떤지 ?'

 

최씨가 이번엔 그들을 향해 물으니, 그 증에 한 소년은 참으로 유창한 국어로써

다음과 같이 대답했읍니다.

 

'나는 열 다섯 살부터 용산의 어느 내지인 상점에서 일을 보고 있다가 금년

봄에사 고향으로 왔읍니다. 용산에 내 일터가 있던 관계로 나는 늘

병정들이 오고가는 것을 보고는 참 씩씩하다. 나도 한번 저렇게 되어

봤으면 쓰겠다 하고 늘 부러워하였읍니다. 그러던 만큼 우리도 군인이

된다는 기별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너무 기뻐서 뛰었습니다. 지금의

감상은- 감상은, 그저 하루라도 빨리 입영해저 나라를 위해 한 몸을 바치고

싶은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X. 이것은 결코 제 문장이 아닙니다. 소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안정해 있는 어조와 능란한 국어에는 뭐라고 한 말 더 물으려 했던 나 자신이

주저될 정도였읍니다.

 

이하, 우리와 그들과의 대화를 메모에 적힌 대로 순차 적어보겠웁너다.

 

최재서 씨 : 이번에 여러분은 손수 눈으로 잘 봐서 알겠지만 병대는 편안한

곳은 아닙니다. 그래도 좋습니까?

 

훈련소생 1 : 편안코 안 편안한 걸 가리는 데가 아니겠지요, 병대는. 그런

것을 모두 잊어버린 곳이겠지요, 병대는.

 

최씨: 그렇습니까. ......그런데 흑, 여러분의 부모나 형님들 가운데는,

더구나 어머니 되는 이들은 여러분이 병정이 되는 걸 겁내거나 하는 일은

없읍니까 ?

 

훈련소생 2: ......있었읍니다 어머니들이 처음엔 크귄 이가 가끔

있었읍니다. 하지만 요즘 와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들을 훈련소에 보낸

어머니를 마을 사람들은 모두다 부러워하고 그 접안의 바쁜 일은 공동으로

돌봐줍니다. 우리들의 어머니들은 요즘은 오히려 자랑에 넘쳐 계십니다.

 

최씨: , ......그건 참 장하신 일입니다. 그런 여러분 증에는 결혼한

이는 없읍니까?

 

훈련소생 3: 없습니다. 장가는 우리들이 전쟁에서 개선하는 날 갈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읍니다.......

 

최씨: 훌륭한 생각입니다. 좋은 처녀들이 여러분의 개선할 날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일동 미소)

 

히라누마 씨: 그런데 여러분은 모두 총각인 모양이지만, 같은 훈련소생

중엔 혹 결혼한 이도 있을 텐데 그런 이들의 아내들은 어떻게들 생각하고

있읍니까 ? 남편이 군인이 되는 것을 ?

 

훈련소생 4: 물론 좋게 보고 격려하고 있읍니다. 그래 요즘 와서는 국어를

모르는 젊은 여인들은 남편에 뒤져서는 안된다고 국어공부에 모두들

열심입니다. 나도 그이들을 위해 국어강습소를 또 따로 하고 있읍니다만-.

 

어떻습니까 X. 나는 나 자신이 오히려 그들의 앞에 부끄러워져서 견딜 수가

없었읍니다. 최재서 씨는 나보고도 뭐라고 물어볼 일이 없느냐고 하였읍니다만

그러나 내게는 그들의 대답하는 말을 듣고, 그들의 각오의 빛을 얼굴 위에서

보는 것만도 여간 힘이 드는 공부가 아니었읍니다.

 

X. 제일 많이 고쳐야 할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은 역시 우리들 교양인이요, 또한

우리 연배들임에 틀림없읍니다.

 

([朝光] 1943l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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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이야기

 

주로 국민 시가에 관하여

 

 

<전략>

 

물론 그들은 자국(自國)의 유산이 아니었다. 괴테는 먼저 그 너무나 고귀하고도

일반적인 그의 서정시와 극작(劇作)을 하기 전에 널리 구라파문화의 본원이 되는

상고(上古)의 희랍. 로마(羅馬) 문화 연구에 미친 바 적지 않았으며, 푸쉬킨은

처음에는 아라비아 민요의 모방에서 시작하였던 것이었다. 이렇듯 그들의

고투에는 실로 혈흔이 임리한 바 있다. 그러나 그들이 한결같이 돌아온 것은

자국민의 성격의 발견과 이것의 고양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또한 한 개의

국민으로서의 그들의 피치 뭇할 필연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국민시가 내지 국민문학은 또한 필연적으로 문학의 첫 단계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나는 국민문학이란 전연히 괴테나 푸쉬킨 같은 태도의 보편적이요,

건실한 작가에게 의하여 씌어지는 문학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아들과 손자의

대에는 또한 넉넉히 한 개의 전통이 될 수 있는 문학의 창건을 이름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이하(以下)에 나는 시가의 방면에 한하여 국민시가의 금후의 창작에

앞서 작가는 어퍼한 태도로 이에 대처해야 될까 하는 일()의 가능을 자기의

생각이 미치는 버로 이야기하며 최근에 국민시가라는 이름 밑에 발표된 시작들에

대해서도 약간 언급해 보려 한다.

 

서구제국의 문화가 그 근원에 있어서는 조금씩이라도 모두 희랍, 로마(羅馬)

문화의 혜택에서 출발하는 것처럼, 동양의 정신문화라는 것은 그 전부가 근저에

있어서 한자(漢字)를 중심으로 하는 일환(一環)의 문화를 운위하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동아공영권(東亞共榮圈)이란 또 좋은 술어(述語)가 생긴

것이라고 나는 내심 감복(惑服)하고 있다. 동양에 살면서도 근세에 들어

문학자의 대부분은 눈을 동양에 두지 않았다. 몇몇 동양학자들이 따로 있어

자기들이 일상 사용하는 한자의 낡은 문헌들을 자의적(字義的)으로 해석해 내는

정도에 그쳤었다.

 

시인은 모름지기 이 기회에 부족한 실력대로도 좋으니 먼저 중국의 고전에서

비롯하여 황국(皇國)의 전적(典籍)들과 반도(半島) 옛것들을 고루 섭렵하는

총명을 가져야 할 것이다. 동양에의 회귀가 성{)히 제창되는 금일이다. 그것은

작가의 태도 여하에 따라서는 결코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나, 자네가 이렇게

공부하는 동안에 그건 취사(取捨}될 것이요 또한 선택될 것이다.

 

그 다음에는-- 조목을 늘어놓은 것 같아서 안되었으나 사실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인 것이다. -- 재래의 비경가나 몇몇 독자가 칭찬하거나 욕한 까닭에 흔히는

고정되어서 드디어는 자네 자신도 흠빡 그런 줄로만 믿었던 그건 아무의 것도

아니요, 자네 혼자만의 천재(天才)가 빚어낸 것 이라고 속으로 고집하는 자네의

그 독창적 경지라는 것을 깨끗이 무시해 버리고 제발 괴테나 푸쉬킨과 같은

이들의 본을 받아서 커다란 보편적인 작가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보편이란 점 내가 무슨 어느 걸 체득하여서 하는 소리는 아니다.

이건 사실은 내가 보일 게 아니라 자네들이 손수 자네들의 자기(自己)라는 것을

오래오래 공간에다 팽개치는 동안에 스스로 수영할 때의 해양(海洋)의 넓이와

같이 자네들의 전신(全身)을 둘러싸게되는 것이 할 것이다.

 

<하략>

 

(매일신보 19427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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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된 벗에게

 

 

 

편지가 제 흥에 겨워서, 벗 이 여, 너를 향해 말을 하던 것이 나는 잠깐 옆으로

얼굴을 돌리고 씨부리었다.

 

그럼 결론은 우리의 몸뚱이를 어디에다가 던져야 할 것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젊은 벗이여.

 

네 나이는 인제야 스무 살이다. 명년에는 스물 한 살...... 너는 벌써

어려서부터도 어느 맑은 자리에 뿌리를 박은 충실한 나무와 같이 지혜와 용력이

뛰어났었고, 한 쌍의 눈은 언제나 두 개의 별처럼 개어 있더니, 지금도

여전하구나. 벌써 삼 년을 너를 보지 못한 동안에 물론 너는 많이 컸을 것이나,

네가 나한테 보내준 글에는 여전히 옛날 같은 네 두 개의 총명한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는 듯하여 나는 기뻤다.

 

'징병제의 발표가 있은 후로 사실 나는 많이 생각하여 왔읍니다. 늘 부족한

자기를 채찍질하여 이제 와서야 간신히 마음의 준비가 완료되었읍니다.

내일이라도 용약출전할 각오가 섰습니다. 댁에 영이는 많이 컸습니까-----

하략'

 

너는 이렇게 나한테 편지를 주고 자기의 이야기라고는 겨우 위의 몇 줄을

적어보먼 외에 그 나머지의 전부는 내 걱정만을 하여 주었다.

 

네 편지는 나를 크게 감동시켰다. 벗이여 고백하거니와 나는 울었다.

 

며칠 동안을 두고, 네 편지를 지듭 읽어보면서 나는 나의 정신의 위치를 너의

그것에 비겨보고는 거울질을 하고 있었다. 부끄러운 말이나 너의 도달한 고봉에

비겨서는, 나의 입명(立命)해 있는 자리는 형체도 잘 보이지 않을 만큼 희박하고

옅은 것임을 스스로도 긍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이야기를 조금 쓰겠다. 총명한 너는 내가 쓰지 않아도 벌써 내 속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을 것이지만, 그럼 너를 부르면서 씌어지는 이 글은 다른

동무들에게라도 읽히기로 하자(그것도 너는 용서할 테니까).

 

내 나이는 너도 아다시피 지금 스물 아흡이다(너보다는 아홉 해가

손위이로구나). 부끄러웁게도 나는 지금 내가 스무 살이라면 어떠한 심적 체험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을, 그저 어지간히 거죽으로만 밞았을 뿐, 깊이는 헤각써 보려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명년에 입영해야 할 네가 몸소 당사자로서

겪은 필연적일 의미의 심적 체험으로서는 체험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나는 지금,

나의 존재의 주위에 나의 존재를 가급적, 향미로운 것으로 유지해 가기 위한

정서를 모으는 외에 할 바를 모르고 있다.

 

때로 하폄하고는 후회하고, 가위 타성적으로 분신(分身)하려는 자기를 간신히

주워모으고는 해질 때에 문밖에서 노는 아이들의 수그러진 머리를 한 번이나 두

번씩 쓰다듬어 주는 정도에서 자위하고 있다. 화초 등을 매만지는 소규모의

성실, 애써서 간신히 얻어지는 조그만 용서들의 연습, .....그 외에 있다 해도

그 비슷한 것들이다. 모든 현상을 영원한 면모에서만 향수하려 하는 한 사람은

얼마든지 게을러질 수 있는 것이다. 아무의 앞에서도 부끄럼을 느끼려 하지

않던, 이 향수태도 때문에 오는 나의 소극성이, 벗아 네 앞에서는 부끄러웁구나

!

 

운명에 대한 숭엄한 그 긍정을, 벗아, 인제 겨우 스무 살인 벗아, 나도 너처럼

하고 싶구나. 나도 총을 메고 머언 남방과 북방으로 포연과 탄우를 뚫고 가보고

싶구나.

 

<중략>

 

기왕에 네가 편지를 주어 내게 요설을 벌이게 하였으니 조금만 더 지껄이게

하여다오......이러한 역사라는 것은 사실은 우리가 이렇게끔 되게 원했기

때문에 지워진 것이다. 싸움을 기다렸기 때문에 싸움이 왔고 총을 원했기 때문에

총이 쥐어지고, 몸 던질 곳을 찾았기 때문에 그 길이 열린 것 이다. 그러기에

인수해야 할 의무가 있음은 물론이다.

 

스무 살인 벗이여. '준비가 되었읍니다' 그 한 마디 말은, 세상이 아직까지 생전

구경하지도 못하던 것, 무엇 한 가지를 우리 앞에 내어놓을 듯이 들리는구나.

 

우리의 몸뚱이를 어디에다가 던질까 ? 벗이여 , 그것은 말하지 않는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朝光] 1945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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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체부의 군속지망

 

<전략>

 

지루한 봄이 지나고 여름이 들 무렵, 바로 우편소 앞인 경찰서의 게시판에는

'육군 군속 모집'이라는 붉은 글씨의 새로운 게시가 붙었다.

 

최체부도 물론 그것을 보았으나, 처음에는 최체부에게는 그것은 그렇게까지

유심히 보여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보여지지 않은 걸 최체부는 나중에

뉘우쳐야 하였다.

 

그 게시를 본 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해리면에 배달을 나가서 면사무소 엘

들르니 마침 자리에 앉아 있던 소학 동창인 그 정다운 벗 가네무라 군 은

뜻밖에도 웃음 대신에 손짓을 하며 잠깐 들어오라고 하였다. 들어오라고 해서

가방을 문간에 부려놓고 그 옆으로 가니, 동무는 다짜고짜로

', 육군 군속을 지원했네 ! 우리 면에서는 이번엔 별로 나갈 사람야 없어서

내가 지원했네 '

 

하고는 곧 얼굴이 붉으레 상기(上氣)가 되었다. 말주변이 없는 최체부는 자기도

벗을 따라 얼굴이 잠잔 후끈거렸을 뿐, 아무 대답도, 충고도 주지는 못하고

헛되이 다시 그의 배달가방을 주어 메고는 면사무소를 나왔다,

 

그는 근처의 배달을 마친 후에, 일찍부터 자기를 알아주던 스승이 있는 학교로

갔다. 그는 학교의 사무실 문을 열면서 웬일인지 오늘만은

'선성님!' 하고 그의 스승을 불렀다. 그러나 스승은 한 손으로 이마를 고이고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선생님!' 하고 최체부는 두 번째 스승을 불렀다. 그제서야 스승은 간신히

이마에서 손을 떼고 이쪽을 보기는 하였으나

'뭐야?'하고 퉁명스럽게 한 마디를 물을 뿐, 그전과 같은 얼굴을 하여 주지는

않았다. 더구나 자기는 요새 좀 아팠고, 마음속도 여러가지로 괴로운 것이다.

스승은 왜

'웬일이냐 ?' 하고 그전 같이 모든 것을 다 아는 얼굴로 자기를 보지 않는

것인가. 최체부는 이무래도 거기에서 그대로 발걸음이 떨어지지가 않아

한참동안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의외에도

'아우가 전쟁에 나가 전사하였다 ! 나도 나이가 늙지 않았으면 당장에 라도

나가겠다만 ! ' 하고 다시금 왼손으로 이마를 고여버렸다.

 

최체부는 이 자리에서도 여전히 아무 말도 없이 물러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바다가 보이는 산모롱을 올라설 때에도 아무 노래도 나오지는 않았다.

그날은 또 이상히도 같이 뭐라고 이야기라도 하고 갈 동행 하나도 없었다.

최체부는 그 바닷가의 맨 처음 마을에 당도하도록까지, 웬일인지 벌쩌 여섯 해

전에 죽은 그의 아내의 일만 생각하고 있었다. 마을에 닿아서도 그는 마을

사람들이 권하는 점심도 물리치고 아내의 얼굴을 그려보고는 바다를 보고,

그려보고는 바다를 보고 걸어갔다.

 

그러는 동안에 어디로 어떻게 걸어온 것인지 벌써 해리면의 배달은 다 끝나고,

자기의 어깨에는 빈 가방만 털레털레 매어달린 채, 해는 아직도 해리면이 또

하나가 있어도 넉넉히 배달할 만큼 길게 남아 있었다.

 

최체부의 걸음은 한없이 느리었다. 그에게는 이제까지 자기의 종사하는 배달부의

직업이 이렇게도 누추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아들도 공부하고, 어머니도

먹여살리고, 나도 되도록이면 단 한 시간이라도 기를 써보고 살다가 죽을, 그런

일은 없을까 ? 어디 없을까? 가만 있거라. 나도 가네무라 모양으로 군속을

지원할꺼나 ? (나라를 위하여서......) 이렇게 생각하면서 아직도 터덜터덜

걸어가던 최체부의 걸음은 해리장터에 다다르자, 뜻밖에도 일찌기 그의 십 년이

넘는 배달의 생애에서도 찾아보기가 어려우리만큼 굉장히 속도가 빨라져서

동쪽을 향해 달리어 갔다.

 

<중략>

 

이튿날 최체부는 여덟 시가 되어도 우편소에 출근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덟 시

반이 되자, 돌연히도 그의 얼굴은 경찰서에 나타나서 한 장의 봉투편지를

우께쓰께에 바쳤다. 절수가 안 붙은 걸로 보아 배달편지가 아님은 물론이다.

겉봉에는 '경무주임'전이라고 씌어 있었다.

 

드디어 이 편지를 떼어본 경무주임은, 들고 보던 손이 떨리어서 그걸 책상 위에

떨어뜨리었다. 그건, 아직도 온전히 마르지 않은 최체부의 피로써 적은 '육군

군속 지망'의 탄원서였다.

 

'덴노헤이까 반사이!(정리자주:천황폐하만세!)' 하고 큰 획으로 맨 처음 줄을

아로새긴 밑에, 신문지를 두 쪽에 낸 것만한 백로지 위에 탄원의 문귀가 가득히

쓰이어 있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최체부의 소원은 마침내 관계 관원들을 울린 바 있어서,

그의 벗인 해리면 사무소의 가네무라 군과 같이 얼마 후에 두 사람은 군속이

되어 먼 남녘 나라로 떠났다.

 

최체부는 떠날 달부터 꼭꼭 그의 집에 돈을 부치어, 집안은 오히려 전보다

살기에 궁색치 않았고, 마을 사람들의 끝없는 호의와 존경 속에서 최체부의

어머니도 손자를 따라 아침해가 떠오를 때면 규--요하이(정리자주:궁성

요배)를 하는 갸륵한 습성이 생기었다.

 

(八月 二十二 日)

 

([朝光] 1943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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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일에

 

여린 숨을 폭폭 내쉬며

내 귓가에서 자그마한 서운녀(西雲女)

일곱 살 서투른 고향 말씨로

아이 하늘은 서울이레야,

속삭이던 그 하늘이구나

 

마늘이랑 파랑 고추를 먹고

기름때 절은 하이얀 옷을 입은

뜨겁디뜨거운 가슴을 안은 이들이

산비둘기 울던 노오란 길을

가고 가던 진초록

바로 그 하늘이구나

 

아아 에달퍼라 아직은 감을 수 없는 눈과 눈이여

잊을 수 없는 파아란 정

꽤 저물어 밤이 되면

별똥은 반짝거려

아아 애달퍼

지금 사랑하는 사람들

스러져 나날이 하늘은 깊어만 가고

 

여기 있는 건 내 덧없는 몸짓과 말뿐

메아리와 파도소리와

 

새맑은 좁은 마당엔

꽃축제 올리는

쇠가죽 북소리만 은은해

 

아아 날고프구나 날고 싶어

부릉부릉 온몸을 울려

사라진 모든 것

파랗게 걸린 저 하늘을

힘차게 비상함은

내 진작 품어온 바램 !

 

([國民文學] 194310월호, 日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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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의 변명

종천 순일파? - 팔항이 바람 중 발췌

 

 

 

그러나 이무렵의 나를

'친일파'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의가 있다

'친하다'는 것은

사타구니와 사타구니가 서로 친하듯하는

뭐 그런 것도 있어야 할 것인데

내게는 그런 것이 전혀 없었으니 말씀이다

'부일파'란 말도 있긴 하지만

거기에도 나는 해당되지 않는 걸로 안다

일본에 바짝 다붙어 사는 걸로 이익을 노리자면

끈적 끈적 잘 다붙는 무얼 가졌어야 했을 것인데

나는 내가 해준 일이 싼 월급을 받은 외에

그런 끈끈한 걸로 다붙어 보려고 한 일은

단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때 그저 다만,

좀 구식의 표현을 하자면----

'이것은 하늘이 이 겨레에게 주는 팔자다'하는 것을

어떻게 해서라도 익히며 살아가려 했던 것이니

여기 적당한 말이려면

'종천순일파' 같은 것이 괜챦을 듯하다

이때에 일본식으로 창씨개명까지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우리 다수 동포속의 또 다수는 아마도 나와 의견이 같으실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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