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시와 탄력성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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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탄력성

 본문

  예술이란 영원한 창조 행위라고 규정되어야 한다. 일찍부터 예술은 그것이 예술이었기 때문에 끝없이 새로운 국면을 타개해 내는 개척자가 되어야 했다. 만약 새로운 국면을 타개해 내지 못한다면 그 순간부터 예술은 곧 아류(亞流)나 모방자의 위치에 떨어질 것이다. 아류나 모방이라면 그것은 흉내내기이지 예술일 수가 없다. 이제까지 누려 온 영광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마땅히 예술은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 한편 여러 장르의 예술 가운데서 시는 일쑤 한 떨기 꽃에 비유되어 왔다. 그처럼 아름답고 훌륭하다는 뜻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비유의 보다 근본적인 동기를 이루고 있는 것은 시가 여러 예술의 정화(精華)라는 생각에서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들을 모아 엮은 사화집의 성격도 대개 규정된다고 할 것이다. 기법, 형태, 구조 모든 면에서 독창성이 꿈틀대고 있어야 하겠다는 요구가 여기서 대두된다.

 

 항상

 부정(否定)의 자세로 흘러가는

 어두운 강(江)물 위에

 두어 개 추억(追憶)의 별을 띄워 놓고

 사람들은 회한(悔恨)의 술잔을 든다.

 

 아무 데도 보이지 않는

 어린 날의 오르간 소리

 

 지금 막

 눈꽃 핀 나목(裸木)의 가지 사이를

 바람이 되어 눈가루를 살랑이며

 시간(時間)이 지나갔다 과거(過去) 쪽으로.

 

                            ― '시야(視野)'에서

 

  아무렇게나 뽑아 본 이런 예를 통해서도 시집 <새벽>(정한모)이 개척한 언어의 독창성은 어김없이 포착된다. 새삼스럽게 밝힐 것도 없이 현대시의 구비 요건 가운데 하나로 우리는 관념의 감각화를 꼽아 왔다. 그의 형이상파 시인론에서 엘리어트가 '사상을 장미의 향기처럼 느끼게 하는 시'라는 말을 쓴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이 때 장미의 향기처럼 느끼게 하는 일이 곧 감각화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 엘리어트가 이처럼 관념적인 것의 이미지화를 요구한 까닭도 별로 복잡한 데 있지 않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 관념, 또는 사상이 그 본 바탕을 그대로 둔 채 한 편의 작품이 쓰여지는 경우 그런 것을 일러 일종의 단상, 또는 에피그램이라고 한다면 몰라도 시는 아닐 것이다. 어떤 의미 내용이든 그것이 시가 되기 위해서는 거기에 시적 의장(意匠)이 요구된다. 그 의장 가운데 하나를 엘리어트는 관념의 이미지화 또는 감각화라고 본 셈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그 기법에서부터 '시야'에는 발견이 있다.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회한을 곱씹는 일은 사변의 범주에 드는 일이지 감각적 체험이 아니다. 그것이 '시야'에서는 우선 눈을 맞고 선 나목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에 비유되어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무 사이를 지나가는 나비의 유추를 가능케 하여 관념을 시각화해 낸 것이다. 이제 우리가 이 작품의 이와 같은 일면을 흔히 말하는 감각적 등가물의 발견이라고 보아 무방할 것이다. 또한 이것은 이중의 의미에서 우리 시가 갖게 된 발명 특허라 할 것이다. 우선 우리 시단에서 감각적 등가물을 찾아 쓴 예가 그렇게 많지 못하다. 뿐만 아니라 관념적인 사실에 지나지 않는 추억, 회한의 정을 이렇게 선명한 이미지로 제시한 예도 일찍이 없었다. 본래 시에서 창조란 기법에 있어서의 그것을 가리킨다. 그런 관점에서 '시야'를 수록하고 있는 시집 <새벽>은 주목에 값한다.

 

  <새벽>과 <행인(行人)>(신동집), <꿈꾸는 한발(旱魃)>(이형기)에는 또한 시의 동력학(動力學)이 있다. 물론 이런 경우 우리는 동력학이란 말을 정적인 시를 염두에 두고 그 상대 관념으로 쓴다. 일상 우리가 대하는 시에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 유형의 것이 있지 않나 짐작된다. 그 하나는 언어를 아주 충격적인 입장에서 다루는 것이며, 다른 하나가 비교적 온건한 입장에서 언어를 배열하는 경우이다. 전자를 우리는 흔히 실험적인 시라고 부른다. 물론 우리 현대시 가운데는 실험적인 게 아닌 것도 상당히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김소월의 시는 이런 경우의 한 보기가 될 것이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영변의 약산 진달래꽃/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물론 일상 우리가 사용하는 문장을 표준으로 놓고 보면 이 작품에도 다소간 변칙적인 데가 있다. 일상 우리가 쓰는 산문에서라면 고작 꽃을 뿌리는 일을 말할 때,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런 경우 대개 우리는 '진달래꽃을 한아름 따서  가실 길에 뿌려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상적 진술을 조금 고쳐서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라고 말하더라도 그 정도로 이 시의 의미 파악에 두드러지는 난점이 생기지는 않는다. 시란 으레 그런 것으로 작품에서 요구되는 음성 구조를 위해 다시 말을 손질하고 다듬었다고 생각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시에 대해 우리는 정력학(靜力學)이라는 말을 쓴다. 우리가 작품을 통해 심한 시험을 시도하지 않으면 그 시는 대개 단순해지고 또 어느 면에서는 안정감을 갖게 된다. 작품이 안정되었다는 것은 곧 정적이라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시를 정력학으로 설명하는 까닭이 바로 이런 데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한, 현대시는 그 구조 속에 정력학 이상의 것이 있기를 요구한다. 또한 시인은 잡다한 체험들을 포괄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그들을 정리, 조직, 조화하는 자이기도 했다. 신화 시대부터 뮤즈는 질서와 조화를 주재해 왔다. 그런데 새삼 밝힐 것도 없이 현대란 혼돈과 무질서의 대명사와 같은 것이다. 합리의 체계가 통용 화폐 가치를 지녔던 근대와는 달리 현대에 이르러서는 여러 잡다한 사상과 체험 내용들이 저마다 존재 의의를 내세우고 활개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을 주재, 통괄할 가치 체계는 아직 수립된 바 없다. 그러나 이런 상황과 여건 속에 서 있는 시가 어떤 모양의 것이 되어야 할까는 불문 가지(不問可知)의 일이다. 혼돈 속에서 질서와 조화의 구현자가 되기 위해서 오늘 우리 주변의 시는 부득이 온건한 태도를 버릴 수밖에 없다. 바꾸어 말하면, 현대시는 현대라는 특수 상황과 여건 속에 있기 때문에 안정과 정적인 위치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요구가 대두되는 것이다.

 

 <새벽>과 <행인>, <꿈꾸는 한발>의 기조를 이루고 있는 게 언어의 동력학임은 그 속에 수록된 몇 개 작품을 검토해 보면 곧 드러난다. 가령 시집 <새벽>에서는 봄바람이 '겨우내 독감으로 누웠다가 일어난 처녀'에 비유되었는가 하면, 또한 그것이 '첫나들이 그녀의 발목에 휘감기는 치맛자락'으로 형상되기도 했다. 그리고 <꿈꾸는 한발>에서는 다음과 같이 석탄이 의인화되고 억눌린 흑인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석탄(石炭)을 캔다.

 페름기(紀) 이래의 어둠 속에 잠자는 흑인(黑人) 거인(巨人)

 곡괭이로 어깨쭉지를 내리 찍어

 그의 잠을 깨운다.

 속살이 패어나고 피가 철철 흐르는

 아침 햇살

 석탄(石炭)은 일어난다.

                                     ― '석탄(石炭)' 전반부

 본래 바람과 독감 걸린 처녀와는 아무런 상관 관계가 없다. 또한 석탄은 천연자원의 일종일 뿐이지 인간이 아니다. 처녀와 무관한 봄바람을 처녀에 비유하고 무생물에 지나지 않는 석탄에서 선혈이 흩어지는 이미지까지 제시하는 기법의 뒤에는 상당히 격렬한 실험 의식이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실험이 빚어 내고 있는 것은 언어와 언어의 조직에서 오는 탄력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들 작품에 대해서 동력학의 이름을 붙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행인'에서 우리는 이런 유형의 또 다른 예를 찾아낼 수 있다.

 

 가지에 주렁 달린 열매를 보아라.

 행인(行人)이여

 반짝이는 한 알씩의 노래를 보아라.

 할 일 마친 나무는 아득히

 생각에 잠긴다.

 

 열매들의 달롱이는 노래도 알 바 없이

 나무는 대지(大地)의 다스림을 받아들인다.

 해 짧은 날의 목숨을

 한로(寒露)의 가지 끝에 걸어 놓고

 떠나는 행인(行人)이여.

 

 누구나 다 한 번은

 마지막이 될 인사를 남겨 놓고

 돌아갈 곳은 언제나

 서리 묻은 원점(原點)이다.

                                ― '속행인(續行人)' 끝부분

 

  우선 시의 동력학은 언어의 상징적 기능을 현저하게 강화시킨다. 그리고 상징적 기능을 강화시키는 길은 작품의 언어에 밀도 또는 탄력성을 부과하는 길밖에 없다. 그리고 이 말은 시의 동력학이 일차적으로 언어의 밀도를 통해 달성되리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한편 시집 '행인'에서 우리가 언어의 상징적인 사용이라든가 그 밀도 확보에 고심한 자취를 찾아 내는 것은 아주 손쉬운 일이다. 가령 일상적인 진술의 경우 인간과 과목은 전혀 그 의미 공간을 달리한다. 새삼 밝힐 것도 없이 과목은 땅에 뿌리를 내린 채 스스로는 자리를 옮기지 못하는 식물의 일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 특히 행인이란 언제고 그가 원하면 직립 보행으로 제 자리를 옮길 수가 있다. 인간은 또한 사유 능력을 가진 동물이다. 사유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과 세계를 성찰의 대상으로 삼고 생각에 잠길 수가 있다. 그러나 환상이 아닌 이상 일상적인 진술의 차원에서 나무가 그럴 수는 없다. 무엇보다 나무에는 인간이 갖추고 있는 뇌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 명백하게 드러나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행인>에서 과목은 인간과 동격이 되어 있다. 인간에게만 가능한 성찰 작용을 나무도 하는 것처럼 만들고 있는 게 그것이다. '할일 마친 나무는 아득히/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이 동일화의 비밀이 되고 있는 게 언어의 상징적인 사용이다. 우선 나무를 생각에 잠기도록 만들기 전에 <행인>의 시인은 그 준비 작업으로 가지 끝에 매달린 과일을 노래에 비유했다. 이 유추 역시 비약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우선 나뭇가지에 과일이 열리는 것은 가을이다. 그리고 가을은 무더운 여름을 지나 하늘이 끝없이 맑은 계절이다. 청명한 가을날,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탐스럽게 익은 과일을 보는 순간 여름의 열기, 그 가운데서 이루어진 노동과 휴식이 아울러 상기되는 나머지 알알이 익은 열매를 향해 노래라고 명명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은 반드시 기상 천외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일단 과일을 노래라고 부른 이상 그들을 달고 있는 나무가 생각에 잠길 수 있는 길도 열렸다고 보아야 한다. 사유 능력뿐만 아니라 노래 역시 인간만이 가능한 것이니까. 한편 사물의 이와 같은 변형이 상징으로 이야기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허구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본래 상징이란 허구를 통해 사실을 지시하는 것이며 비유적인 방법으로 실재를 암시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언어의 상징적인 사용을 통해 이 시는 이미 살핀 바와 같이 전혀 이질적인 체험 내용을 한 개 단단한 구조 속에서 엮어 낼 수 있게 되었다. 만약 동력학의 또 다른 뜻이 서로 모순 충돌하는 체험 내용의 효과적인 조화, 통일에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면 <행인>에 수록된 한 작품이야말로 그런 본보기 가운데서 대표적인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언어들은 만만치 않은 밀도와 탄력성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후략)

 요점 정리

 작자 : 김용직(金容稷)

 갈래 : 비평문

 주제 : 현대시에서 요구되는 동력학으로서의 탄력성

 이해와 감상

 1986년에 간행된 <정명(正名)의 미학(美學)>에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우리 시에서 요구되는 동력학으로서의 탄력성을 여러 시인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논하고 있는 비평이다. 여기에서의 동력학이란 시에서의 음성과 의미가 역동적으로 작용하여 하나의 구조를 이루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시의 동력학은 언어의 상징적 기능을 현저하게 강화시킨다. 서로 모순 충돌하는 체험 내용의 효과적인 조화, 통일에서 얻어지는 것 또한 동력학의 뜻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때 그 언어들은 만만치 않은 밀도와 탄력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와 같이 이 글은 시에서 요구되는 탄력성을 중심으로 현대시에 요구되는 탄력성을 중심으로 현대시에 요구되는 방법상의 조건을 말하는 실천적인 것이다. 현대시는 복잡다단한 현대라는 특수한 상황과 여건 속에 있기 때문에, 기존 시의 틀인 안정과 정적인 위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요구가 대두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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