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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태소설론(世態小說論) / 비평 / 전문 / 임화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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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태소설론(世態小說論) / 임화

 

1

 

최근 발표되는 소설들이 매력이 부족하다는 말은 실상 근자의 조선 문학

전반이 특색을 잃고 있다는 말인데 이 상태는 여러 가지로 음미할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가 아무리 순연한 비평의 직업 심리를 가지고 소설을 읽는다 해도 온

전히 작품의 잡아당기는 범위에서 벗어나기란 용이치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동시대 시인의 비평이란 그 시대의 작품과 같은 흥미는 있으면서

도 동시대의 문학을 정확히 평가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오히려 지나간 시대를 회고한다든지 벌써 앞서가는 시대를 전망한다든지

하는 것이 용이한 일이며 동시대인이 보지 못한 그 시대 문학의 고유한 특

색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혼돈이란 두 자를 놓고 생각해본다 할지라도 우리 자신에

있어서는 우리의 시대 심리를 이야기하는 하나의 형용이 되는 듯싶으면서도

다음의 시대가 우리 시대의 문학을 관찰할 때 과연 혼돈의 시대란 표현으로

만족할 것이냐 하면 심히 의심스럽다고 아니할 수 없다.

혼돈이란 우리의 시대에 있어선 이미 터부가 되다시피 한 무의미한 말이

.

요컨대 전부를 표현하는 듯하면서도 실상은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 말이

.

정돈의 대립 개념인 한에서 혼돈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 같으나 결국은 우

리의 시대에 대한 우리의 성찰 자체가 혼돈되고 정돈되어 있지 않다는 절망

의 심리의 표백(表白)에 불과할 것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작품으로부터 매력을 느낄 수 없다는 말과도 같다.

예하면,천변풍경》《탁류》《소년행》《제퇴선》《신개지》《임거정

남생이등과 같은 소설을 한 움큼 집어다놓고만 본다 하더라도 우리 시

대의 문학은 혼란의 세계인 것을 직감할 수 있으나 혼돈이란 한 말을 가지

고 이 소설의 개개가 소유한 개성이나 주장하고 있는 작가 정신을 또한 개

괄할 수 있느냐 하면 아무도 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무슨 이 시대의 문학을 꼭 집어서 옮겨놓을 만한 적절한 말을 생

각해낼 수 있느냐 하면 그것은 더욱 가망 없는 일이다.

우리가 한말로 그 전성격을 이야기할 수 있는 발자크 같은 작가를 놓고도

대비평가 텐(Hippolyte Adolphe Taine)은 적절한 개념을 얻지 못한 일을 생

각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결국 할 수 없어 쓰는 혼돈이란 개념에 이 이상 더 집착할 필요

가 없다.

그러면 결국 우리는 우리의 시대의 문학을 아무리 해도 알 수 없다는 의미

의 독백을 자꾸만 되풀이하는 데 지나지 않을 것이니까 차라리 우리는 전시

대의 부감(俯瞰)으로부터 한 걸음 내려와 일찍이 우리가 작품을 읽을 때 받

던 단순한 인상이나 이것저것 품어왔던 회의를 정리하고 분석해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요컨대 성급히 전체를 평가해보려는 비평의 이상으로부터 좀더 숙고를 깊

게 하기 위하여 얼마간 더 작품의 소리를 다시 듣고 작품들의 말로써 이 시

대를 귀납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이렇게 각오를 정하고 최근 수삼 년간의 소설을 돌아본다면 우선 연래로

보편화되어온 판단의 하나인 사상성의 감퇴란 것을 절실히 느낄 수가 있다.

물론 작품이 인제 사상적 매력을 잃었다는 말은 결국 최근의 소설들이 일반

으로 문학으로서의 매력이 적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나 아직도 조선 소설은

(일반으로 문학이) 현대 청년들이 자기의 정열을 토로하고 의탁하는 주요한

영역의 하나임은 이유가 있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이것이 재래로 우리가 불러오던 바와 같은사상이란 것으로 작

품 위에 표현되지 않는 것도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 진실이다.

그러면 어떠한 행태로 현대 조선 청년이 문학을 생활 정열의 주요한 가탁

(假託物)로 선택하는 이유가 표현되는가?

정히 이것이 우리가 최근의 소설을 읽어오면서 천착하고 찾아내려고 하는

궁극의 요점이 아닌가 한다.

다시 말하면, 사상성의 감퇴 대신에 새로이 소설을 특징 지우고 있는 특색

은 무엇인가?

그것은 선악간(善惡間) 현대의 독자가 아직도 소설을 버리지 않고 읽어가

는 즉 오늘날의 소설 고유의 매력이, 다시 말하면 재래의 의미에 대신하는

매력이 되는 것이다.

 

2

 

나는 이런 몇 개 요소 중의 하나로 세태 묘사에의 길을 든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최근 조선 소설의 압도적 조류가 되어가는 문학적 경

향의 하나라고 생각할 수가 있다.

세태 묘사의 소설이란 직접으로는 내성의 소설과 대척되는 것으로 김남천

씨의 소설과 채만식 씨의 소설 또는 고() 이상 씨의 소설과 박태원 씨의

소설을 비교하면 이 특색은 명백히 나타난다.

더욱이 세태 묘사의 소설은 내성의 소설과 유기적인 대척 관계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양자가 한꺼번에 두각을 나타내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

마치 조이스가 프루스트와 더불어 서구의 가장 신선한 문학적 요소인 것처

럼 김남천·채만식·이상·박태원 씨 등은 현대 우리 문단에 있어서 가장

프레쉬(fresh)한 소설을 제작하는 이들이다.

그러면 외부로 향하는 작가의 정신과 내부로 파고 드는 작가의 정신과의

사이에 어떤 공통한 관계란 것을 연상치 않을 수가 없다.

다시 말하면 외향(外向)과 내성(內省)은 본래 대립되는 방향임에 불구하고

한 시대에 두 경향이 한가지로 발생하는 때는 그 종자들을 배태하는 어떤

기초에 단일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작가의 내부

에 있어서 말하려는 것과, 그 알려는 것과의 분열에 있지 않은가 하고 생각

한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작가가 주장하려는 바를 표현하려면 묘사되는 세

계가 그것과 부합되지 않고, 묘사되는 세계를 충실하게 살리려면 작가의 생

각이 그것과 일치될 수 없는 상태다.

지난 정초 본보(동아일보) 좌담회 석상에서 유치진 씨가 작자의 희망

을 살리려면 리얼리즘을 버리고 로맨티시즘을 취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술

회한 바는 이 사실의 좋은 예증이 되지 않는가 한다.

현실을 있는 대로 그리면 작품 가운데선 작자가 인생에 대하여 품고 있던

희망이란 게 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암담한 절망을 얻게 되는 것이

.

그러므로 자연 작자의 생각을 살리려면 작품의 사실성(寫實性)을 죽이고

작품의 사실성을 살리려면 작자의 생각을 버리지 아니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에게 있어선 창작 심리의 분열이고, 작품에 있어선 예술적 조

화의 상실이다.

그러므로 민촌(民村)의 근작(近作)이나 설야(雪野)의 근작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작가는 부절히 이 양자의 중간을 방황하고, 제 생각에 지배되지 않는

묘사의 세계 때문에 또는 작품의 구조 가운데 동화되지 않는 제 생각 때문

에 실로 통절한 고통을 맛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사는 시대의 이상과 현실이 너무나 큰

거리로 떨어져 있는 혈실 자체의 분리상의 반영일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 작가들이 이 분열 가운데서 고통하고 발버둥치는

이외에 아무런 능력도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시대의 이상과 현실을

연결시키는 결대(結帶)는 그 시대인이며, 양자의 거리를 축소시키고 나중엔

이상을 현실로 현실을 이상으로 전화시키는 오묘한 능력까지가 우리들에게

부여되어 있음에 불구하고 우리들 자신은 현재 영점하(零點下)를 상하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분열이 희유의 거리를 가진 시대의 성격에 반하여 인간의 힘은 어

떤 시대에 비하여서나 약화되어 있을 때 실로 시대의 생활은 하나의 비극이

되는 것이다.

정신 생활의 영역에나 작가들의 가슴속에 저미(低迷)하는 가장 깊은 구름

, 페시미즘(pessimism)임이 현재엔 조금도 불가사의한 일이 아니다.

동시에 암운의 한가운데서 작가들이 비록 태양에 비할 바 되지 못한다 하

더라도 일점의 별빛을 좇으려 하는 원망(願望)도 또한 당연한 일이다.

성격과 환경과의 하모니가 본시 소설의 원망임에 불구하고 작가들이 이런

조화를 단념한 데서 내성에 살든지 묘사에 살든지의 어느 일방을 자연히 택

하게 된 것이다.

내성의 문학을 통하여 수직적으로 자기 가운데로 들어가는 작가는 자기 자

신의 개조란 것이 궁극에선 문학하는 이유가 되는 것으로, 자기의 소설을

자기 고발의 형식이라 생각한 김남천 씨에게서 다시 설명할 여지 없는 예를

볼 수가 있다.

어떤 이는 이 점을 뾰드렐과 같이 자기 분열의 향락이라든지 자기 전능의

현실이라 생각하나 그것은 표면의 이유다.

그들도 역시 제 무력, 제 상극을 이길 어느 길을 찾으려고 수색하고 고통

한 사람들이다.

 

3

 

그러면 외부로 즉 묘사의 세계로 향하는 작가들은 대체 어떠한 곳에서 문

학하는 이유·보람을 찾을 것인가?

예하면 박태원 씨의 소설천변풍경을 통하여 우리는 얼른 작자의 문학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찾아낼 수 있을까?

이 소설에 대하여는 최재서 씨의 논문을 위시하여 2, 3편의 비평이 씌어졌

으니, 결국은천변풍경이 리얼리즘의 확대가 아니냐 하는 도그마론에 머

물러버렸다.

오히려 문제는 리얼리즘이 작자의 생각을 떠나 존재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있었다.

왜 그러냐 하면소설가 구보씨(仇甫氏)1(一日)을 쓴 심리주의자

박태원 씨가천변풍경을 쓴 리얼리스트 박태원 씨 그것이 어떤 리얼

리즘이든간에 로 변하는 데는 어떤 정신적 이유가 따랐는가를 당연 물어

야 할 것이었으므로이다.

그러나 나는소설가 구보씨의 1천변풍경과의 사이에는 작자 박

태원 씨의 정신적 변모가 잠재해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똑같은 정신적 입장에서 씌어진 두 개의 작품이라고 보는 게 가장 타당한

관찰일 것이다.

소설가 구보씨의 1에는 지저분한 현실 가운데서 시체가 되어가는 자

기의 하루 생활이 내성적으로 술회되었다면천변풍경가운데는 자기를 산

송장을 만든 지저분한 현실의 여러 단면이 정밀스럽게 묘사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두 소설이 훌륭한 의미에서 조화 통합되었다면 우리는 어떤

본격적인 예술 소설을 연상할 수가 있다. 그러나소설가 구보씨의 1

나타난 작자는천변풍경의 세계의 지배자가 될 자격이 없었고,천변풍

의 세계는소설가 구보씨의 1의 작자를 건강히 살릴 세계는 또한

아니었다.

즉 양개가 다 작자의 예술적 정신적인 비상을 위하여는 각각 하나의 중하

(重荷)였다.

그러므로 박태원 씨는 아직도 두 개의 경향을 양수(兩手)에 들고 좀처럼

놓지 못하며, 양자의 조화를 시험해보려는 1, 2편의 단편에선 작자의 자기

무력은 저조한 감상으로 변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작자가 제 눈을 사진기의 렌즈처럼 닦아가지고 현실 생활의 각부를

노리는 데 자기를 약하게 만든,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한 개의 보복 심

리가 들어 있다.

그것은 지저분한 실로 너무나 지저분한 현실을 일일이 소설 가운데 끄집어

내다가 공중 앞에 톡톡히 망신을 시켜주려는 꼬챙이 같은 악의다.

마치 청계천변에 모인 빨래꾼 여인들이 남이 보기엔 솟을대문을 달고 인력

거를 타고 다니는 훌륭한 민 주사의 가정은 사실 이렇게이렇게 지저분한 게

라고 입을 쫑긋거리며 속살대는 심리와 비슷하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묘사하는 배후에 흐르는 작자의 정

신이고, 묘사에는 반드시 묘사 이상의 묘사하는 의식이 잠재해 있음을 발견

하는 데 있다.천변풍경을 관류하는 작자의 의식은 아까도 말한 바와 같

소설가 구보씨의 1의 그것과 본질상으로 구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역시 우리가 문제삼을 것은 향외적(向外的)인 길이 작자나 작품상에 있어

여하한 의의를 갖느냐 하는 데 있다.

나는 현실을 시련의 장소로 삼자는 말을 한 일이 있다. 그러나 박씨에게

있어 자기나 혹은 작중의 주인공이 생사의 운명을 만들어가는 장소로서

변풍경은 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소설 가운데서 작자의 생각이 사는 방법이 오직 묘사되는 현실을

통해야만 예술로서 형성된다는 것을 생각할 제 우리는 소설 가운데 묘사되

는 현실의 막대한 주요성을 재인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때문에 작자의 생각이 묘사되는 현실과 조화되지 않을 때 비극을 경

험한다고까지 말하지 않는가?

더욱이 소설은 묘사의 예술, 산문의 문학이다.

소설은 시가 할 수 없는 것을 해낼 수 있는 특이한 예술이다.

시는 지저분한 현실에 대한 악의를 이렇게까지 교묘 섬세하게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소설은 시가 절망하는 곳에서 교묘하게 활동할 수 있는 것이다.

이래서 세태 묘사의 소설을 풍자시와 같이 작자 자신의 자태를 그렇게 똑

똑히 내놓지 않고 단지 묘사되는 현실 그것을 통하여 독자에게 현실의 지저

분함을 능히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때문에 묘사되는 현실이란 실로 하나의 정신적 가치를 갖는 것이며

세태 소설이란 순전히 소설의 이런 측면에만 작자가 자기를 의탁하려는 문

학이다.

세태 소설이 소설 가운데서 그중 산문적인 문학인 이유가 이곳에 있다.

또한 내성의 문학과 더불어 세태적인 소설이 점차로 문단에 세력 있는 조

류를 이루고 있는 이유도 현대 작가들의 정신적 능력의 무력의 증명이나 제

가 사는 환경에 대한 경멸과 악의의 한계를 넘기가 어려운 데 있다.

이것은 현대 작가의 한계인 동시에 우리 시대의 특색이기도 하다.

 

4

 

임거정을 세태적인 소설로 일괄하여버린다는 데는 약간의 이의가 있을

줄 아나 우리가 세태 소설이란 것의 양식상 특성을 가장 산문적인 데 두었

다면 아마 조선 소설 중에임거정만큼 초산문적(超散文的)인 소설의 예

는 드물 줄 안다.

작가가 소설의 세계를 현대로부터 과거에 옮긴다는 데는 실로 흥미 이상의

이유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흥미만의 이유로 무대를 옮기는 것은 야담(野談)의 일이고 문학의 일은 아

니다. 또한 소설에 취급되는 이동이 장소의 이동이 아닌 것도 주지의 일이

.

무엇 때문에 역사적 현실 가운데 소설 구조의 무대를 구하느냐 하면 역사

적 현실이 우리들의 문학 의식과 어떤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때 작

가는 제 소설을 역사의 현실을 빌려서 구성한다.

이 관계가 현대의 없는 것을 과거에서 구하려 할 때 스콧(Walter Scott)

같은 낭만주의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태준 씨가삼천리문학창간호 좌담회에서 뚜렷한 성격과 장대한 기구

를 가진 픽션을 구하려면 과거의 현실을 찾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 것은 다

분히 이런 점이 있다. 춘원의 역사 소설도 전부가 이런 부류에 속한다 할

수 있으나 후지모리 세이키치(藤森成吉[등삼성길])도변화산이나 기시

쇼지(貴司小治[귀사소치])양학년대기(洋學年代記)또는 임방웅의

등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현대의 성격과 환경을 소설 가운데 구성할 조건이 불편해질 때 그들은 현

대와 유사한 과거 역사상의 한 시대를 택한 데 불과한 것이다.

그러면임거정은 어떤 종류의 역사 소설이냐? 그것은 춘원의 그것과는

결정적으로 틀림은 물론 야담에는 비할 수도 없는 예술성을 가지고 있으며

도변화산등과도 또한 구별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역시도변화

등과 가장 많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아니할 수 없다.임거정일당

이나 그때 세상(世相)의 여러 면모가 어딘지 한 개 사회성으로서 우리의 시

대와 비슷한 듯한 느낌을 받을 수가 있다.

그러나도변화산이나청년같은 소설에서 받는 것과 같은 직통하는

공감을임거정가운데선 구할 수는 없다.

우리들과 같은 성격이나 우리가 탐내는 뚜렷한 성격도 없고 그 성격과 환

경과의 비비드(vivid)한 갈등도 없으며 따라서 작품을 관류하는 일관한 정

열도 없다.

단지임거정의 매력은 그 시대의 여러 가지 인물들과 생활상의 만화경

과 같은 전개에 있다.

그러면 화제를 일전하여 지금 우리가 세태 소설이라고 부르는천변풍경

탁류》《남생이들의 매력이 순전히 진부한 일상 세계의 전개에 있음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천변풍경가운데도탁류가운데도남생이가운데도 김유정의 소설

가운데도 탁마된 성격이 우리를 끄는 힘은 없으며 그 성격과 환경이 어울려

져 만들어내는 줄기찬 플롯이 우리를 끄는 힘도 없으며 따라서 작가의 사상

이나 정열이 우리를 매료해버리지도 못한다.

조밀하고 세련된 세부 묘사가 활동 사진 필름처럼 전개하는 세속 생활의

재현이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태 소설 가운데선 작가는

주의를 한 군데 집중시키는 법이 없다. 현실의 어느 것이 중요하고 어느 것

이 중요치 않는가 이것을 구별하는 것이 진정한 리얼리즘이다 가 일

체로 배려되지 않고 소여(所與)의 현실을 작가는 단지 그 일체의 세부를 통

하여 예술적으로 재현코자 한다.

이 세 점 즉, 세부 묘사 전형적 성격의 결여, 필연의 결과로서 플롯의 미

약 등에서임거정은 현대 세태 소설과 본질적으로 일치된다.

동시에임거정의 지면을 흐르는 작가의 의식을 우리는 연상할 수가 있

. 그러나 세태 소설로 역사 소설이 가능하냐는 별개의 과제가 아닐 수가

없다. 왜 그러냐 하면 묘사되는 현실이 한 개의 정신적 실체로서 독자에게

작용하는 마당에 있어 역사상 현실은 현대의 현실의 가치를 분명히 추종키

어려운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대의 세태적인 소설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유락성(愉樂性),

종 파노라마를 보는 듯한 미감(美感)임거정가운데서 발견함은 즐거운

일이나 그것이 소설의 예술성으로부터 오는 미적 유락성인지 혹은 일종의

풍속전(風俗展)을 보는 듯한 오락성인지는 재고할 과제인 것 같다. 이 점은

임거정과 현대의 세태 소설과의 구조가 전자는 파노라마적인 데 비하여

후자는 모자이크적인 데 더욱 명백히 볼 수가 있다.

왜 그러냐 하면 전형적 성격과 운명적 치열미를 가진 플롯이 불가능한 세

부 묘사의 문학은 자연히 모자이크적이 아닐까 하는 때문이다.

이 모자이크의 대표적인 것이천변풍경이고 조각보와 같은 비미적 체재

(非美的 體裁)를 피하려 한탁류와 같은 소설이 불가피적으로 통속성을

가미하여 플롯을 굵게 하고 있는 사실을 우리는 성찰해야 한다.

결국 세태적 소설은 꼼꼼한 묘사와 다닥다닥한 구조와 느린 템포와 자그마

한 기지로밖엔 씌어지지 않는 것이다.

김유정, 현덕, 그리고탁류등 비교적 최근에 호평을 듣는 작가의 문

·구성 등이 전부 이런 점에서 특이하다.

그러나 모자이크가 좀 떨어져 보면 한 개 하모니를 표출하듯 세태소설은

순수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들에게 일종의 유락을 주는 것이다.

 

5

 

끝으로 우리는 자꾸만 만연되어 가는 조선 소설의 세태 소설화의 경향을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는 문제를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

요컨대 세태 소설을 발전시킬 것인가 어찌할 것이냐의 문제다. 그러나 이

미 소설계의 일방을 지배하기 시작한 이 조류는 아무도 새삼스럽게 어찌하

진 못할 것이다.

차라리 우리는 세태 소설 가운데 작가들이나 우리 문학이 최량의 것을 수

득할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는 게 본무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내성 소설이 심리 묘사를 심화하고 세태 소설이 현실 묘사를 확대

하여 서로 각각 소설의 영역을 깊이 하고 혹은 넓혀 문학에 패익(稗益)한다

고는 보지 않는다.

그런 것은 문학이 아니고 문학의 한 부분 조그만 측면에 악착하고 있는 상

태를 너무나 안일하게 긍정해버리는 태만한 비평 정신의 하는 일이다.

물론 장래의 문학은 심리 소설에서나 세태 소설에서나 각기 유용한 유산을

끄집어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대는 결국 소설이 와해된, 시대 문학이 궤멸된 시대인 것

을 생각지 않을 수가 없다.

조이스와 프루스트를 평하여 어느 비평가가 소설 예술의 사멸과 붕괴의 산

물이라 하였음은 연유 없는 말이 아니다.

단지 조선에 있어서 세태 소설이 어딘지 청신하게 보이고 존재 이유가 있

는 듯한 점은 서구는 물론, 동경 문단의 전통과도 달라 조선 소설사가 아직

묘사의 기술을 완성해본 단계를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령 조이스를 디킨스에 비한다면 기술상의 진화라느니보다 주로 구조상의

차이를 있을 다름이며, 차라리 성격의 운명에 의하여 시추에이션을 연속시

키지 못한 결함이 더 치명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동경 문단만 해도 이만한 묘사는 자연주의 문학이 완성하였다고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조선 신문학상에 있어 가장 정밀한 묘사가라는 상섭(想涉동인

(東仁) 등은 현대의 세태적 소설의 묘사 기술을 분명히 따를 수는 없는 것

이다. 이런 의미에서 세태 소설에게 하나의 지위를 줄 수가 있고 묘사되는

현실의 가치를 중시함으로써 우리는 묘사 기술의 성장을 기대할 수가 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묘사를 전부 세부 묘사에 국한하고 소설을 시추에이션의 집합물로

짝 갈라버리는 결과를 반성하지 않을 수가 없다.

소설의 구조가 시추에이션으로 분리되어버리면 세태 소설적인 의미의 묘사

란 결국 모래와 같은 세부 묘사의 집합에 불과하고 만다.

이것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함을 목적으로 하는 진정한 묘사의 기술과

분명히 구별되지 않을 수가 없다.

이곳에 나는 어떤 유효한 구제책을 생각하느니보다 세태 소설적 묘사가 스

스로 규정하는 소설 장르상의 한계를 의식하는 것이 필요할 줄로 안다.

다름아니라 세태 소설은 일견, 그 정신적 내용의 심오함에 장점이 있는 것

이 아니라 묘사되는 현실의 양이 풍다함에 가치가 있는 거와 같이 생각되어

자연히 장편을 택해야 할 성싶으나 나는 이것을 심히 의심한다.

왜 그러냐 하면천변풍경》《탁류등이 모두 장편 소설이고 또 그것으로

서 흥미가 있는 듯싶으나 사실 자세히 분석해보면 이 작품들은 자체가 단편

의 집합이었고 흥미도 한 토막 한 토막의 시추에이션에 걸려 있었다.

인물 자체나 또는 인물이 자꾸만 체험하는 사건에나 또는 그런 속에 만들

어지는 줄거리에 우리는 긴장한 적이 없다.

만일 있었다면탁류에서와 같이 통속 소설의 수법을 끌어들인 덕택이거

나 설화조의 매력에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세태 소설은 합리적 구조와 소설 구조의 무슨 내적 필연성에

의하여 장편을 구성한 것이 아니라 명백히 비장편적인 억지의 구성이나,

렇지 않으면 허위의 연결이나, 비예술적 구성으로 겨우 장편이 된 것이다.

이것은 세태 소설의 특성인 묘사되는 현실의 양적 풍다성을 무시하고 단편

소설을 주장하는 것 같으나 결코 양자는 모순하지 않는다.

문학이 묘사되는 생활상의 양의 과다로 우월이 좌우되지 않는 것쯤은 한

개의 상식이다.

그러면 시는 소설에 비하여 이등 예술임을 영원히 면치 못할 것이다.

오히려 단편 소설을 통하여 우리는 지저분한 현실에 대한 경멸과 악의를

날카롭게 해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을 날카롭게 하기 위하여 현실

가운데 어느 부분이 가장 그것을 표현하기에 전형적인가를 탐색하게 되는

것이다.

이 탐색이 우리는 무엇을 결과하리라고 예단할 순 없다. 그러나 작가의 이

러한 의식이 장대한 기구와 운명의 긴박성을 가진 장편 소설의 해당치 못하

는 것과 단편 가운데 칩거하지 않을 수 없는 한계를 가질 것은 의식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작가의 의식의 방향이 현실 가운데를 탐색하고 있는 한 즉, 제 회

색빛 페시미즘이나 고십테일러(gossip - tailor)적 악의를 넘어서 생활 세

계를 찾는 한, 세태 소설 가운데를 방황하는 자기의 문학하는 이유를 모두

다른 곳에서 찾을 가능성도 기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좌우간 세태 소설 내지는 세태적인 문학의 성행은 무력의 시대의 한 특색

이라 할 수 있다.


저작물명 : 세태소설론

저작자 : 임화

출처 : 공유마당

이용조건 : CC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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