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기계 / 본문 일부 및 해설 / 차범석
by 송화은율성난 기계 / 차범석
등장 인물
양회기 : 35세, ××종합 병원 폐외과(肺外科) 과장
김인옥 : 30세, 연초 공장 포장공(包裝工)
최상현 : 39세, 인옥의 남편
정금숙 : 28세, 간호원
시대 : 현대, 늦가을
장소 : 폐외과 과장실
무대 : ××종합 병원 폐외과 과장실. 정면 벽 우반부에 밖으로 통하는 도어가 있다. 도어의 5분의 1은 두꺼운 반투명 유리가 끼어 있고 검은 페인트로 '과장실'이라는 세 글자가 씌어 있다. 좌반부엔 진찰용 베드와 흰 광목으로 된 칸막이 커튼. 좌편 벽엔 두 개의 유리창이 남쪽으로 향하여 있어, 하마터면 음침하게 될 뻔한 이 방에 환한 햇볕을 빨아들이고 있다.
그 옆쪽으로 큼직한 책상고 회전 의자와 환자용의자, 벽 구석에 책장과 캐비닛. 우편 벽에 진찰실과 수술로 통하는 육중한 도어, 이 도어와 정면 도어 중간에 전임 간호원의 사무용 책상과 의자. 그 앞에 응접세트, 출입문 한 구석에 흰 타일로 된 세면대와 옷걸이가 붙어 있다. 따라서, 이 방은 가벼운 진찰과 외래객의 응접과 연구를 겸한 과장의 사실이다.
회기는 걷잡을 수 없는 허무감과 자책심에 사로잡혀 인옥이 사라진 쪽을 멍하니 바라보다 말고 돌아서 제자리에 주저앉는다. 그리고 담배를 갈아 피운다. 매우 난처한 표정인 금숙은 책상 위의 서류를 뒤적이면서 시선은 회기에 쏟고 있다.
회기 : (무심코 담배를 든 손을 내려다보며 혼잣소리로) 내 손이 기계라고? 음…….
금숙 : (채 알아듣지 못한 듯) 예?
회기 : (제정신으로 돌아가며) 참, 미스 정은 나더러 기계라고 하던 말…….
금숙 : (과장된 표현으로) 정말 그 환자는 보통이 아니던데요! 그 말을 들었을 때 난 깜짝 놀랐어요.
회기 : 왜?
금숙 : (자기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라는 듯이 웃으며) 저…… 선생님…… 음흐…….
회기 : 응? 뭐야?
금숙 : 선생님 별명이 뭣인지 아세요?
회기 : 아니, 내게도 별명이 있나?
금숙 : 그럼요!
회기 : 그래 뭔데?
금숙 : 머리는 사람이고 손은 기계인 이십세기 스핑크스!
회기 : 이십세기 스핑크스!
금숙 : 옛날 스핑크스는 머리는 사람이고 몸은 짐승이었잖아요?
회기 : (쓴웃음을 뱉으며) 스핑크스라…….
금숙 : 그러니 아까 그 환자가 하는 말은 선생님의 별명을 알고나 있는 눈치 아니에요?
회기 : 내가 스핑크스처럼 괴상하게 생겼나?
금숙 : 원, 선생님두……. 스핑크스의 장점만을 들어서 지은 이름인 걸요…….(하며 매혹적인 미소를 던진다.)
회기 : 미스 정은 직업을 잘못 택했어…….
금숙 : 왜요?
회기 : 그 재치와 애교와 그리고…….
금숙 : 훗후…… 선생님은 미국에 다녀오시더니 여자를 다루는 데도 명의가 되셨어요…….
회기 : (동조로) 다행이군 그래…….
금숙 : 정말이에요.
회기 : 오늘 저녁은 불가불 내가 사야겠는걸! 핫하…….
금숙 : (잠시 생각에 잠기며) 선생님은 참 이상해요.
회기 : 뭐가?
금숙 : 아까 그 환자에게 대해서 너무 냉담하신 것 같았어요. …… 가엾잖아요?
회기 : 가엾은 건 나 자신일지도 모르지…….
금숙 : 하지만 지금까지 어느 환자에게도 수술을 거절해 보신 일도 없었거니와 실수도 없었잖아요……. 그런데 왜 그렇게 완고하게 거절하셨어요?
회기 : (어둡고 침울한 표정으로 변하며) 내가 냉정했을까?
금숙 : 그 환자는 선생님을 원망하고 있을 거예요…….
회기 : (깊은 생각에 잠기며) 세상은 참 묘한 거야……. 사람들은 '의는 인술'이니 뭐니 하여 의사를 무슨 절대적 존재처럼 신성시하지만, 나 자신은 조금치도 그런 실감이 안 나거든……. 여자건, 남자건, 미인이건, 늙은이건 닥치는 대로 배를 가르고 갈비뼈를 떼어 내어 썩은 폐 조각을 잘라 내는 하나의 노동을 하고 있는 데 불과하니 말야…….
금숙 : 그렇게 해서 귀중한 생명을 건져 내지 않아요?
회기 :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그와 같은 목적을 의식하면서 수술을 한 적은 없었어! 5년 전에 미국에 건너가서 폐외과를 전공할 때도,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서는 못 해 본 수술을 해 본다는 호기심과 이걸 배워 가지고 가면 내 존재가 뚜렷해진다는 공명심은 있었지만, 인간을 구하느니 하는 도의심 따위는 느껴 보지도 못했거든! (하며 담배 연기를 푹푹 뱉는다.)
금숙 : (약간 당황하며) 전 자세한 얘기 모르겠지만 아무튼 선생님의 그 메스처럼 날카로운 두뇌와 손을 무한히 존경해요! 그리고…….
회기 : 그리고?
금숙 : 선생님이 그 나이가 되시도록 결혼을 안 하시는 이유도 의학에 전 생애를 바치겠다는 의욕에서이시라고.
회기 :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미스 정은 정말 지레 짐작도 잘하는군! 그야말로 오버센스야!
금숙 : (무안해지며) 예?
회기 : 결혼과 의학과 무슨 상관 있어. 내가 서른 다섯이 되도록 독신으로 지낸다는 것은 내 취미지. 누구에게 생색을 내기 위해서가 아니야!
금숙 : 그렇지만 선생님과 같이 모든 조건이 구비된 분이 어째서…….
회기 : (단호하게 단정을 내리듯) 마음이 쏠리지 않는 일은 도대체가 하기 싫단 말이지. 누가 뭐라 하건 나는 내 생각대로 사는 거니까!
금숙 : 그렇지만 외롭지 않으세요?
회기 : 결혼한다고 외로움이 해소되나?
금숙 : (수줍음을 감추며) 독신보다는 덜 외롭겠죠…….
회기 : (멀거니 금숙을 쳐다보며) 그럼, 미스 정은 왜 결혼을 안 하지?
금숙 : (당황하며) 예? 저야…… 뭐…….
회기 : 스물여덟이면 더 급하지 않아 어때?
금숙 : (동요되는 마음을 저지하려고 무척 애쓰며) 그건…… 제게도 생각이 있어서요…….
회기 : 생각?
<하략>
작자 : 차범석(車凡錫 1924- )
갈래 : 희곡, 단막극
배경 : 현대의 어느 늦가을, 폐 외과 과장실
경향 : 기계 문명 속에서 소외되고 비인간화되는 세태를 고발한 사실주의적 작품
성격 : 비판적, 고발적
특징 : 비정한 현대인의 모습을 시니컬(cynical : 냉소적)하게 묘사
구성 :
발단 - 인옥이 찾아와 수술을 해 달라고 애원함
상승 - 회기는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인옥을 집으로 돌려보냄
절정 - 상현이 찾아와 돈 걱정을 하며 인옥에게 수술을 해 주지 말라고 부탁함
반전 - 남편의 이기주의와 비인간성에 분노한 회기가 수술을 결심함
대단원 - 회기가 간호사로 하여금 인옥에게 편지를 쓰게 하며 함께 기뻐함
인물 :
양회기 - 종합병원의 과장. 비인간적인 삶에 젖어 기계처럼 냉정하고 빈틈없음
김인옥 - 연초공장 포장공. 가족을 위해서는 어떠한 모욕적인 것도 감수함
최상현 - 인옥의 남편.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가족도 생각지 않고 비정함
정금숙 - 상사에게 충성스럽고 업무에 충실한 간호사
제재 : 소외되고 비인간화된 사회 현실
주제 : 현대 사회의 빈곤과 인간성 상실, 산업화 시대의 인간성 회복
출전 : <신문학 60년 대표작 선집>(1968)
줄거리
양회기는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온, 폐 전문 의사이다. 어느 날 연초 공장 포장공으로 일한다는 인옥으로부터 폐 수술을 해 줄 것을 요청 받는다. 그러나 X―레이 검진 결과 인옥의 폐 상태는 수술을 할 수 없을 만큼 악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회기는 수술을 거부했지만, 인옥은 가족을 위해서도 꼭 살아야 한다고 하며 수술을 간청한다. 그러나 회기는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인옥을 돌려보낸다. 얼마 후 인옥의 남편 상현이 회기를 찾아온다. 상현은 회기를 만나 부인인 인옥의 폐 수술을 해 주지 말 것을 주장한다. 이유인즉, 없는 돈에 어떻게 폐 수술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상현의 말을 들은 회기는 어떻게 해서든지 인옥을 살려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회기는 간호사를 시켜 인옥에게 속달 우편을 보내도록 지시한다. 기계처럼 빈틈없는 회기가 상현의 부도덕한 태도에 성이 난 것이다.
머리는 사람이고 손은 기계인 이십세기 스핑크스 : 스핑크스의 머리는 사람이고 몸은 짐승이듯이 머리는 사람 모습을 하고 있지만 하는 일은 모두가 기계적이라는 말. 물질 문명의 발달로 비인간화된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사이다.
정말이에요 : 앞에서의 '여자를 다루는 데도 명의'라는 말을 재확인하는 다짐을 하고 있다. 이 말에는 미묘한 연정을 알아 달라는 뜻과 이렇게 무심한가 하는 뜻이 이중적으로 함축되어 있다.
그렇지만 외롭지 않으세요 : 이 말은 질문이면서 동시에 그렇게 생각하기를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금숙은 이런 점을 환기함으로써 회기의 마음을 돌리려고 시도하고 있다.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모르겠어요! : '모르겠다'는 말의 뜻이 매우 다양하다는 점을 참고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단념, 거부, 항의, 무지, 무관심 등 매우 다양한 태도의 표현이다. 여기서 금숙은 자기 마음을 전혀 몰라주는 데 대한 항의의 표시도 담고 있다.
미스 정은 좀더 자기 본위로∼ 살고 싶어서 그래 : 금숙이 자기를 대하는 태도가 단순한 호의가 아니라 결혼까지도 생각하는 애정이라는 표현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회기가 그 애정을 완곡하게 거부하고 있다.
그렇다고 또 난들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 인정과 비정의 대립이 한껏 고조되는 대사들이다.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는 회기의 대사는 그 삶이 직업 의식에만 철저한 것임을 인식하게 한다. 이런 대립을 거듭하는 동안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인 '인간적' 문제가 부각된다.
(멋지게 웃으며) 실은 제가 아픈 게 아니라, 제 처가∼∼. : 자기가 아파서 온 게 아니라 아내의 일로 왔다는 뜻이다. 이 대사는 앞부분에 등장했던 인옥과의 연관성을 시사함으로써 사선의 점층적 전개나 아니면 역전이 일어나리라는 예감을 갖게 한다. 사건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까를 예측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예측은 대체로 자신의 체험과 가치관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지므로 극의 실상과는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실태와 확인을 거듭하는 동안 인간과 삶의 의미를 더 깊게 체득하게 된다는데 극문학 감상의 의의가 있다.
글쎄, 그게 말입니까? ∼그런 돈이 어디 있겠습니까……. : 폐의 치료는 조심해야 한다는 것과 돈이 없다는 것은 서로 거리가 먼 말이므로 일관성이 없다. 억지로 쓰고 있음을 뜻한다. 상현의 비인간적인 성격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처음엔 그런 줄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그게…….: 일이 많아서 야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감독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외박을 한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흥! 내 처가 가족을 위해서 수술을 원하는 줄 아십니까? : 의문을 부정의 뜻을 담고 있다. 가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딴 목적으로 수술을 받으러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심리 상태를 그 인물의 성격과 주위 환경에 따라 추리·상상해 본다. 어떤 인물은 실생활에서 돌발적이고 이해하지 못할 행위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학에 등장하는 인물은 우연한 인물이 아니라 전형성·보편성·구조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이 인물이 이런 성격이 되는 데에는 그럴 만한 필연성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구조성을 통해 삶의 이해가 깊어진다.
내 벌이라는 게 처가 공장에서 나올 때 속옷이나 치마폭에 감춰 가지고 나오는 담배를 팔아야만 …… : 남편 상현의 직업은 아내가 속옷이나 치마폭에 감춰 가지고 나오는 담배를 파는 것. 자기의 벌이가 보잘 것 없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납득 : 남의 말이나 행동을 잘 알아차려 이해함.
생색 : 남에게 어떤 도움을 준 일로 말미암아 떳떳해지는 체면
나와 어린것들이 벌써 오래 전부터 그 덕으로 살아왔는데 : 남편인 나와 자식들이 상옥의 하찮은 돈벌이로 지금까지 살아왔기에 괴롭다는 뜻이다.
수술을 해서 몸이 회복된다면 내 아내는 더 불행해질 거예요.: 남편 상현의 인옥에 대한 심리 표현으로 인옥의 불행이나 나의 불행은 수술을 해서 몸이 완쾌되면 더욱 심해진다는 뜻이 상현이 인옥을 믿지 못함을 알 수 있다.
미심쩍게 : 마음에 거리끼게
노골적 : 있는 그대로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노골적으로 분노를 터뜨리며) 그건 너무 심하지 않소? : 물음이 아니라 단정이며 질책이다. 회기라는 인물의 대사가 함축하고 있는 뜻을 여러 측면에서 헤아려 본다. 삶의 현실을 반영하는 측면, 인간의 복잡한 심리를 드러낸다는 측면이 극의 극적 전개와 관련된 측면 등 여러 요소를 담고 있는 대사이다. 본디 회기는 '기계'라는 별명을 지닌 만큼 직업적인 타성에 젓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상현처럼 비정한 사람을 만나서 성격의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그 친구에게 살해당할 바엔 : 아내가 죽어 가는데도 내버려 두는 남편의 행위는 곧 살해 행위와 마찬가지라고 본 것이다.
기계가 노하셨네요…… : '기계'는 물질 문명의 상징으로 쓰이고 있는데, 그런 물질 문명의 비인간적 삶에 젖은 의사 회기가 분노의 감정을 갖는 인간적인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혼잣소리로) 담배는 포장도 중하지만 알맹이가 좋아야지!: 말 자체는 어려울 것이 없지만 이 말은 실제로 담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점에서 하나의 비유이며 따라서 상징이다. 사건이 모두 해결이 되었는데 굳이 이런 대사가 필요한 이유를 이 작품을 쓴 작자 의식과 연관지어 음미한다. 작자가 진정 비판하고 또 바란 것은 무엇인지가 이 마지막 부분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 담배만은 진짜겠지요……: 현대 사회에서 인간성을 상실한 것들은 모두 가짜이다. 담배가 가짜 인생을 사는 상현의 것이지만 그 담배만은 진짜일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 작품은 기계 문명 속에서 소외되고 비인간화되는 세태를 고발한 리얼리즘 경향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에서는 전체의 전환과 결말 부분을 옮겼다. 이 작품은 원래 1950년대 <사상계>에 발표한 작품인데 본래 차범석의 작품들은 사회성이 강하다. 사회에 대한 폭넓은 관심은 그로 하여금 변천하는 사회를 그때그때 작품에 수렴하게 한다. 유치진에 의해 "밀주(密酒)"로 추천을 받은 그는 지속적으로 리얼리즘을 고집하며 변천하는 현실을 작품에 그대로 담았다. 그의 작품은 제재의 폭이 매우 넓지만 그것들은 대체로 몇 갈래 나누어질 수 있다. 가난한 서민들과 전쟁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의 삶, 문명의 발달로 인한 인간성의 상실과 인간의 소외, 인간의 애욕(愛慾)의 갈등과 정치의 허위성, 구세대와 신세대의 갈등과 그에 따른 전통적인 것의 몰락 등이 그가 주로 다루어 온 주제들이다.
그러니까, 차범석이 이처럼 문명 비판적인 작품을 몇 편 썼는데, "성난 기계"를 비롯하여 "계산기"와 "분수"가 바로 그런 계통의 작품이다. "계산기"가 전후(戰後)의 실업·빈곤 문제를 기계 문명 발전과 관련시켜 파헤친 작품이라고 한다면, "성난 기계"와 "분수"는 인간성 상실 문제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이들의 공통점은 현대인의 소외와 고독이다. 현대 기계 문명에 의한 개인의 소외는 인간성 상실로까지 확대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인간성의 상실과 그 회복의 가능성을 다루고 있다. 즉, 물질 문명으로 인한 인간성의 상실을 휴머니즘으로 극복하는 차범석 문학의 한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은 가난한 여환자의 폐 수술을 냉담하게 거부한다. 성공의 전망이 불투명한, 그것도 가난한 환자의 수술을 했다가 책임을 질 수 없는 상황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목전에 둔 한 인간의 호소가 먹혀 들어가지 않는 기계적인 인간의 모습이다. 이렇게 이 작품의 전반부는 인옥의 인간적인 호소와 회기의 기계적 대응이 대립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작품의 후반부에 와서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남편이 찾아와서 자기의 아내를 죽게 내버려 달라고 뻔뻔스럽게 비인간적인, 비윤리적인 요청을 하자, 회기의 가슴 한켠에 잠재해 있던 인간성이 살아난다. 비인간성에 더욱 극단적인 비인간성이 부딪치자 '작용·반작용의 법칙'처럼 오히려 주인공의 인간성이 회복하게 된다. 결국, 주인공의 '기계' 같은 삶의 태도가 더욱 저열한 인간형을 만나 '성난 기계'가 됨으로써 잠재된 참모습을 되찾게 된 것이다.
차범석(車凡錫 1924- )
극작가.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밀주(密酒)"가 당선되어 등단. 한국 연극협회 이사장과 예총 부회장 역임. 사실주의의 바탕 위에서 현대적 서민 심리 추구. 희곡집에 <껍질이 깨지는 아픔 없이는>, <대리인> 등과 장편 희곡 "산불" 등이 있음.
사실주의극<realism theater>(寫實主義劇)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 유행한 연극 양식. 1850년경부터 프랑스를 시초로 사실주의 연극을 향한 의식적인 운동이 일어났다. 즉, 희곡작가는 실재하는 세계의 진실한 묘사를 위해 노력할 것, 가능한 한 직접적인 관찰과 경험을 토대로 작품을 쓸 것, 최대한 객관적으로 묘사할 것이 요구되었다.
사실주의극은 사회 및 현실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특히 빈민계층의 열악한 삶의 양상에 주목하였다. 79년에 발표된 H.입센의 《인형의 집:A Doll’s House》은 사실주의극의 효시로 꼽힌다. 사실주의의 대표적 극작가로는 입센 이외에도 러시아의 A.체호프, 영국의 G.B.쇼, 스웨덴의 J.A.스트린드베리 등이 있다. 사실주의극은 무대장치 면에서도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프랑스의 A.앙투안은 마치 실제의 방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무대를 설계하였다. 이는 관객들이 4면의 벽 가운데 한쪽면을 뚫어 몰래 들여다 보는 듯한 환각 효과를 노렸는데 이를 ‘제4벽의 원리(fourth-wall theory)’라 한다.
사실주의극은 배우를 비롯하여 연극에 소용되는 모든 요소들의 조화로운 앙상블이 요구되었고 이에 따라 연출자의 권한이 확대되었다. 특히 러시아의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활동한 C.스타니슬라프스키는 ‘스타니슬라프스키 시스템’이라는 사실주의 연기술을 개발하였다. 이는 배우들이 마치 실생활에서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운 연기를 표출하도록 지도하는 방법론이다. 한국에 사실주의극이 최초로 수용된 것은 1922년에 창단된 토월회(土月會)를 통해서였다. 이 새로운 사조는 ‘신극(新劇)’이라 불리었고 31년에 조직된 극예술연구회(약칭 극연)에 의해 본격적으로 뿌리내리게 되었다. 극연은 해외의 유명 사실주의극들을 번역하여 공연하는 한편, 한국 현실에 바탕을 둔 창작극들을 생산하였다. 8·15광복 이전 사실주의극의 대표작으로는 유치진(柳致眞)의 《소》(1935)와 함세덕(咸世德)의 《동승(童僧)》(39)을 꼽을 수 있다. 사실주의극은 70년대까지 한국 희곡의 주류를 이루었다.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블로그의 정보
국어문학창고
송화은율